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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니엘 영재교육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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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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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자
나는 대장간을 단 한 번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보게 된 대장장이는 커버올 작업복을 입은 건장하게 생긴 남자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노(爐)라고 부르는 활활 타는 불 가까이에서 일하고 있었다. 손에는 쇠를 벼리는 과정에서 가장 바쁘게 쓰이는 도구인 거대한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의 ‘책상’은 검은 쇠모루였고 그 위에 그는 과열된 두꺼운 쇠막대기를 놓았다. 나는 그가 그 거의 녹은 쇠를, 빗발치듯 쏟아지는 불꽃의 소나기를 만들어 내며 망치로 반복해서 내려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잘 겨냥된 타격에 천천히 수그러들면서, 그 쇠막대기는 근처에 놓여 있는 한 농기구의 한 부분으로 교체가 가능한 형태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길 속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뜨거운 쇠, 모루에 내리쳐지는 시끄러운 쇠망치 소리, 그 가게 안의 뜨거운 열기는 몇 년 동안이나 나의 기억 은행 속에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생활의 모든 영역 안에서 기능할 수 있는 믿음을 벼린다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혀서 그 경험을 종종 빗대곤 했다.
믿음을 벼린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가끔은 천천히, 가끔은 순조롭게)한 인간의 생활과 그 모든 연장선상(나라는 존재, 내가 하는 일, 내가 가진 것)을 통하여 믿음을 사방으로 퍼지게 하여, 하늘의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목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의 모습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믿음에는 종류가 아주 많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믿음에 대해, 그것을 성경적인 믿음(bibical faith)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한다.
성경적인 믿음은 언제나 선택과 함께 시작되는데, 동적인 감각으로 생활의 모든 차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을 때 의도하신 그대로 완벽하게 순화됨으로서 정점에 다다른다. 왜냐하면 이 성경적인 믿음은 예수님께서 가장 잘 가르치셨으며 또 그 모범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Christ-following faith)이라고 바꿔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표본 삼아 이 문제를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성경 이야기 하나가 있다. 어느 밤 뱃머리에서 쉬시는 주님을 태우고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을 때, 사나운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경험 많은 뱃사람들의 허세는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모두 사라져 버리고, 그들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께로 몰려가 외쳤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 그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35-41)
그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셨던 것일까? 아마도, 당신의 주무시는 태도를 주의하여 보고 그들도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기 원하지 않으셨을까? 또, 간단히 배를 바람 방향으로 돌리고 폭풍 속을 뚫고 나아가는 용기를 원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이 바로 동적인 믿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나는 내 믿음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생활 영역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믿음이 잘 적용되지도 못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원칙도 제공해 주지 못할 정도로 힘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믿음이 그 영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무의식중에서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그런 믿음, 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는 믿음은 정말로 초라하고 부적절한 절름발이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을 차고에 처박아 두는 사람들 중에는 어쩌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믿음이 평일에 맞부딪히게 되는 현실의 조건에 맞도록 확장되고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위선이 아닐 수도 있다. 시골의 그 대장장이는 그 뜨거운 쇠를, 벌판 작업을 할 때 부딪히게 될 갖가지 힘든 일을 견딜 수 있는 부품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망치질을 하고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믿음을 버린다는 의미를 숙고하는 자도 비슷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일상 생활과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잘 기능할 수 있는 믿음, 어떤 환경 속에서도 휘어 버리거나 딱 부러져 버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
이 눈에 확 띄는 질문으로 해서 나는 믿음을 정의하는 문제로 자연스레 되돌아가게 된다. 벼려져야 하는 믿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중요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그리고 여기서 여러분은 이 책 전체의 간단한 윤곽을 잡을 수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친밀히 교제하는 방법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2. 그들은 자신의 내면 생활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현저한 자기 통제력을 습득할 수 있었다.
3. 그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여 그 역사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의지하는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누구나 무서워하는 종류의 일들에 대하여 거의 혹은 아무 두려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면을 들여다볼 때, 그들은 자신의 약점과 강점, 또 그것들에서 유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목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만들어 나가고 있었던 역사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자신을 흡수하는 꿈이나 사명에 의해 이끌렸으며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들의 뜻을 이해했던 것 같다.
이런 두드러진 3중의 관점을 가지고,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모본,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기록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은퇴한 운동선수들, 자신들을 이어 달리는 후계자들을 격려하면 관람석에 앉아 있는 무리로 상상해 보기를 즐긴다: 그들의 믿음 또한 그 3중의 관점에 반영되어 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지켜보며 특별 관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쁜 동시에 적잖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나의 기쁨과 걱정을 함께 나누지 않으시려는가? 그들은 여러분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달릴 때 그들은 많이 기뻐할 것인가?
이런 믿음은 어떻게 발전되는가? 가장 간단한 용어로, 이 믿음의 생김새는 과연 어떨까?
이제 이 책에 사용될 다른 중요한 단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 이것은 궤변적인 단어, 현실 세계(real-word)이다.
현실 세계의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상황이 거칠어지는 항구 밖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는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게 하는 기능을 하는 부분을 망치로 때려 형태를 잡아 주는 것과 같다. 또, 개인의 내면의 자아를 이해하고 또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들어가는 역사가 주님의 목적하심에 부합하겠는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것은 이 세가지가 어떤 상황하에서든 가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Meeting God)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의 집으로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현재 생활)과 앞으로(영생) 하나님의 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뵙게 될 때의 행동거지를 아는 것이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활동의 한 부분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Making 'History')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우리의 공적인 세상,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사명을 해 나갈 때 나타나는 안전하고 또 그렇지 못한 부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이끄시고자 하는 곳과 우리로 성취하라고 주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활동의 한 부분이다.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데 필요한 훈련들 중 하나는, 우리가 감춰둔 문제들이 드러날 때 그것을 끊임없이 정화하는 것이다. 이 훈련을 게을리 할 경우에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곧잘 날 대신해 그렇게 해 주신 경험을 나는 수없이 겪었다. 이것은 때로는 고통스런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회피해 버린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로 다니시며 말씀과 행위로 가르치신 믿음보다 범위와 능력 면에서 상당히 더 연약한 믿음밖에 더 생겨날까?
대장장이는 망치로 쇠를 두드린다. 가끔씩 그는 쇠를 달구기 위해 멈추기도 하고, 만들고 있는 부분이 끼울 자리에 잘 맞는가를 확인하려고 멈추기도 한다. 그런 후에 다시 망치질을 한다. 그 내려치는 망치질이 정말로 거칠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마치 레이저를 가지고 뇌를 가르고 있는 외과의사의 극도로 미묘한 움직임처럼 그 하나 하나가 조심스레 겨냥되고 시기 적절한 움직임인 것이다. 대장장이는 자신이 벼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그래야 한다. 천국을 향한 믿음, 내면의 자아를 향한 믿음, 삶의 현장을 향한 믿음을 바라는 자라면 망치를 잡고 내려치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바울은 이 글을 쓰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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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군가’는 (다름아닌)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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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추종 (Bilnd Followership)
맹목적인 추종을 하게 되면 한 개인은, 대단히 설득적이고 가끔은 두렵기조차 한, 모든 것에 대해 정통하다고 자신하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 그처럼 되어야 하고, 그처럼 말하고, 그처럼 기도하고, 그처럼 믿어야 한다는 교묘한 압력에 무의식적으로 굴복하게 된다. 이 극단으로 치닫는 불건전한 과정은 오늘날 공공연히 ‘컬트’라고 언급되는 영역으로 사람들을 밀어붙이게 된다. 이 가능성은 여러 다른 환경에서, 비단 종교사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만 관찰하기로 하겠다.
휠씬 젊었을 때, 내가 교제하던 집단에 성경을 암송하는 재주가 아주 뛰어난 한 성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결과로 우리들은 그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흠, 그 성도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단순히 수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는 것이 그 사실을 바꾸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문제를 상의하는 자리에서,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가 내놓은 의견 앞에서는 후퇴하고 자신들의 확신을 제쳐놓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보았다. 그 놀라운 암기력으로 인해서 그들은 그를 더 우월한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J- 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느냐 말이예요.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이 경우에서 사람들은 암기된 성경 구절이 여러 문제에 있어서 위대한 통찰력으로 번역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잘못 추측했던 것이다.
이 맹목적인 추종의 가능성은 오늘날에는 더 넓은 범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훌륭한 부류가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과 이 위험한 세상에서 설쳐대고 있는 문제들을 두고 가장 적절한 반응을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도전을 주면서, 청중에게 질문과 성경적인 원칙들을 제공해 준다. 그들은 훌륭한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해답’이란 것을 청중들에게 남발하면서, 반대할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 고의적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운동을 두 조각 내고, 문제와 전망 등에 있어 완고하게 고집을 부려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경고했던 것과 같은, 거만함과 자만심을 키우는 이념적, 신학적 제국을 세운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따라 하려는 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옷을 입으려는 것과도 같다. 나는 39사이즈를 입는데, 그가 46사이즈라면 폼나게 걸치는 것은 고사하고 우선 불편하기만 할 것이다. 나의 심리와 인생 경험과 마음속 생각과 공존할 수 있는 믿음의 본보기를 벼리려는 시도에서도 나는 똑같은 이치를 발견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배울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복제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이 원칙을 찾으려는 싸움 가운데에서 나는, 언젠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데 깊이 영향을 미친 다음의 말씀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한 번 입어 볼 만한 “옷”이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추종 (Passive Followership)
믿음을 키우는 데 있어 앞의 예 못지않게 해로운 관점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도 만들어 주신다는 개념을 아주 강조하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라 왔다. 우리가 온후하거나 수동적인 자리를 견지하고 있으면 (“놔 둬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또 우리를 통하여 모든 필요한 믿음을 형성하신다는 것을 어디서 듣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수동적인 추종이라고 부르겠다.
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성이나 감정, 혹은 개성을 모두 없애시려고 부르신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그가 수수방관하며 꼭두각시가 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게 아니다. 그 지성과 감정과 개성을 이용, 더 발전되고 정제된 모습을 주님께 올려 드리는 것? 바로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수수방관하고 앉아 있는다면? 절대로 안 된다!
구약 성경의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몇 년 전의 그 혹독한 배신에 대해 처음으로 말을 꺼낼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50:20). 이런 식의 통찰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놀라운 교리를 얻게 된다 : 궁극적인 선을 담고 있는 당신의 장기적인 계획을 위하여, 최선과 최악을 오가면서 사람과 시간을 함께 모아 시공간을 진두 지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나는 그 교리가 다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강력하게 다가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 교리가 영적인 생활 방식에서 수동성을 함축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슬렁거리며 기다리면서 사건들이 제 갈길을 가도록 놔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는 나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이 교리가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을 시작하라고 주신 자유와 평행을 이룬다고 본다. 그 과정으로 하여 그 현실로 곧장 걸어 들어가 현실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관리하라 : 일어나는 사건을 꼼꼼히 살피라. 자신의 능력을 점검하라. 선택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라.
나는 요셉이 공격적으로 그를 둘러싼 세상에 달려들어 노예로서, 옥에 갇힌 죄인으로서, 후에는 애굽 정부의 총리로서 최선과 유용함과 기회를 추구한 사실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그저 누워서 사건에 휩쓸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 그를 생각하면 나는, 늘 적군의 홈 그라운드에서 적대적인 관중을 앞에 두고 경기를 해야 하지만 결코 지거나 동점에서 주저앉을 가능성을 거부하는 스포츠 팀이 떠오른다.
요셉은 거칠고 융통성 있고 일관적이었으며 또 공정했다. 속어를 쓰자면, 그에게는 멍텅구리 같은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규칙에 따랐으며 그는 모든 점에 있어 - 인간 관계, 직업, 영적으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자기 관리에 투철했으며 사건들을 해석하고 다루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가 벼려 나간 믿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을 주의하여 보고 그것에서 믿음의 경험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우리 몫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고유한 방식을 소유해야만 한다 : 그것은 각자 어울려야 하고, 살아가는 공적, 사적인 세상에서도 이치에 맞아야 한다. 주일에는 적당하나 평일에는 적당치 않은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이 믿음을 버리는 것은 고귀한 작업이며 아무도 우릴 대신해서 해 줄 수 없다. 곁에서 도울 수는 있는가? 물론이다! 모두 다 해 주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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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면, 어디로 이끄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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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 앞으로의 우리의 모습, 그 결과로서 일어나는 일들 같은 것은 정말로 제한되어 있고, “집안에서만 왔다갔다하는”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왜소하고 현실적이지 못하며 상대적으로 쓸모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집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집단 밖의 사람들에게는 한 무더기의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는 아주 사적인 어휘들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문제가 대두될 때 우리는 이 집단 밖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져 버리게 된다.
몇 년 동안이나, 나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 온 사람들이 종교사회 집단 밖에서는 비교적 영향력 없는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해 왔다. 이웃이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많은가? 그렇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내부적인” 생활 습관의 채택, 그 집단 안 사람들만 알고 있는 어휘의 사용, “외부 사람들”이 보통 흥미를 느낄 만한 문제들에는 관여하기 꺼리는 태도 등등으로 해서, 평균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 세대에 실제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도 아쉽게 잃어버리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삶의 현장으로 똑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결코 교회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현실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대신에, 그들은 주말에 어울리는 언어와 생활 방식을, 주중을 위해서는 (때로는 퇴행적이고, 때로는 이중적인) 대안적인 언어와 생활 방식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요즘 나는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현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관계들 (친밀한 사람들로부터 거리가 있는 사람들까지), 나의 모든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 전 재산의 관리, 경력의 선택, 투쟁의 관점, 기쁨과 고통, 그리고 먼저 살아온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에 기반을 둔 삶과 죽음, 사후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관점 등을 “진행”시키는 것임을, 그리고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미가 있는 일로 알고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최근에 아내와 나는 한 조그마한 공동체에 저녁 식사를 대접받으러 운전을 하며 가고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우리는 곧 길을 잃어버렸다. 한 경찰관이 차를 정차시키고 있는 것이 보여서 나는 차를 거기에 대고 방향을 물었다. 보통 때는 하지 않으려 애쓰는 일이었지만.
“신호등 두 개를 더 지나세요. 그리고 우회전해서 좌회전이 되는 도로가 나올 때까지 쭉 가세요. 신호등 두 개 … 아니 세 개였나…? 아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어요. 여기서 유턴을 해서 저기 뒤에 있는 조그만 쇼핑몰까지 돌아가세요. 저기 모퉁이에 주유소가 딸린 곳, 아시죠? 지금 내 말 듣고 계십니까? 거기서 좌회전해서 해변까지 이어진 길을 그냥 따라가세요. 아마 몇 번 돌 겁니다. 아셨죠? 그리고 주의하셔야 될 게 있습니다… 아니지! 내가 처음 말했던 대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에잇, 제기랄! 내가 모셔다 드리죠. 따라 오세요. 꼭 붙으세요!”
나는 경찰관을 꼭 붙어 따라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자, 내면의 자아를 알고 싶어하는 자,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버비을 알기 원하는 자에게 보여지는 그리스도의 초대인 것이라고. 꼭 붙어서 그분을 따르라.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잘못 들지 않으신다.
당신이 그분을 따르고 꼭 붙어 갈 때, 그분은 어디로 이끄실 것인가?
나는 주님께서 그의 제자를 내가 지금부터 천국이라고 부르게 될 장소로 초대하시는 목소리를 듣는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새로운 태도가 요구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예배의 중요성가 활동을 배우게 된다. 한때 내가 비교적 비실제적이라고 생각했던 기능이다. 천국이라고 불리는 그 장소가 현실 세계이다.
그런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를 그 자신의 내면의 자아의 움푹꺼진 깊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 그 광경은 늘 보기에 좋은 것은 아니고 끊임없는 탐험과 쇄신이 필요한 그런 장소이다. 내가 바로 그 여행자일 때, 그 여행의 첫 몇 발자국은 신경 쓰지 않지만 곧바로 나는 겁이 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가 세상이라는 공공 장소로 들어갈 때 그 길을 인도하기 원하신다.
이 삶의 현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눈이 휘둥그래지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끌어 가는 현장과 모든 장소들은 현실세계이며, 우리가 벼려가는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가장 잘 활동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곳의 언어, 위험과 유혹, 아름다움, 요구와 가능성들을 알게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모르시는 세계는 없다. 천국이라는 “세계”, 내면의 공간이라는 “세계”, 글쎄, 이 세상이라는 “세계”, 모두 다 아신다. 그리고 그분은 분명 이 세계를 통하여 당신을 따르라고, 당신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라고, 그리고 동일하게 행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생활을 취하여 모루 위에 놓고 엄격하게 망치질을 하여 모양을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모양을 만드는 것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의 개념을 펼쳐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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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가 진창에 빠졌을 때 믿음은 가장 큰 시험에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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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가운데서 현실 세계의 믿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최상의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바빌론의 왕궁에서 네 명의 왕을 섬겼던 구약 성경의 다니엘이 금방 떠오른다. 다니엘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는 1장의 짧지만 중요한 마지막 절을 무심코 지나가게 마련이리라.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단1:21).
사람들은 평생 동안 일하는 동안 몇 번이고 경력을 파는 이런 세상에서는, 꼭대기에서 혹은 그 가까이에서 시작하여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던 한 인간의 생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 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그는 끝까지 해 냈다! 잘 훈련된 달리기 선수처럼, 그는 경주를 시작하여 힘차게 끝을 냈다. 다니엘이 이 책 전체에서 빛나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현실 세계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다니엘이 그 사람이다!
사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다니엘의 직업상의 공적인 생활에서는 너 다섯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그의 사적인 생활에 관해서는 아주 약간의 기록들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다니엘이 섬겼던 행정부는 백성들의 성장과 발전에 성취의 우선권을 두는, 친절하고 자비심이 많은 비영리적 단체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다니엘은 무자비하고 백성들의 복지에는 냉담한 무관심(왕위에 관한 관심에 열을 올린 것만 제외하고는) 이 풍조처럼 되어 버린 문화 안에서 일생을 보냈다. 노예제가 성행했고, 사람 목숨은 왕의 변덕에 의해 연장되거나 그 날로 끝장이 났다. 절대적인, 마키아벨리주의의 범위에 들어가는, 창을 쥔 자의 힘에서 나오는 권력이 전부였다.
다니엘은 그런 세상에서 실제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체제안의 최고 권력층에 있으면서 일을 해 나갔다.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귀중한 메시지인 것이다. 다니엘은 어떻게 했기에 여호와께 그렇게 큰 기쁨이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같은 재능 있는 사람을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터에서 건지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현대의 많은 다니엘들이 월 스트리트나 플릿 스트리트, 크레믈린이나 KGB, 헐리우드나 라스베이거스, 쉘 오일 혹은 파나소닉과 같은 다양한 일터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일생의 결정이나 활동의 축적이 있은 후에라야 그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위대한 인물들의 삶을 연구해 볼 때, 그 인물의 질적인 면을 평가해 보기 전에 먼저 그들이 살았던 세상과 그들이 마주했던 도전을 연구해 보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 다니엘이 적절한 예가 되겠다. 그의 이야기를 너무도 자주 들어서, 나는 이 사람을 친절하고 신실하며, 심지어 무대에 나타나 한두 개의 꿈을 해몽하고 다시 불려질 때까지 뒤로 물러나 있는 조용한 타입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다니엘은 매일 일하러 나갔다. 그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정치적 기구들 중 하나인 바벨론 정부의 거대한 부분을 관리했다. 나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했는지, 그가 행사했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은 그런 곳의 문화를 해독하기 위해 얼마나 영민하게 행동해야 했는지도 그저 상상만 해 볼 뿐이다. 이것은 모두 영리하고 정치적으로 기민하며 거칠고 설득력이 있고, 위협이나 뇌물, 혹은 부정 이득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는 그런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왕이 바뀜에 따른 정치적 바람의 변화에 순응하는 능력을 가진 신용 있는 다니엘은 바벨론 시대를 살아남았고 바사의 왕좌까지 섬길 수 있었다. 그는 생존자인 동시, ‘번성한 자’였다.
다니엘이 살았던 세상에 관해 할 말이 더 있다. 그곳은 혹독한 인간 고통과 압제로 특징 지워지는 곳이었다. 인간 존재란 가치 없고 한 개인이나 혹은 한 지방 사람들 전체의 생명이 왕의 말 한 마디에 사라져 버릴 수조차 있었다. 정부 고위 관리들조차 자신들의 행위가 불충이나 무능력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목이 날아갈 위험이 다분했던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어느 정도의 뒷골목 불량배 같은 마음가짐도 조금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다니엘은 하나님의 가치와 법에서 보면 너무도 진저리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일해야만 했다. 전쟁과 압수 등을 통해 부가 축적되었고, 이쪽이 부자가 되면 저쪽은 빈곤해졌다. 그는 사람들이 모략의 ‘게임’을 펼치며 영향력을 찾고 있는 정치적인 세계 안에서 싸워 나가야 했다. 다니엘은 그의 성취를 시기하는 자들, 일을 조작하여 그의 생명이 사자굴에서 끝장나게끔 시도한 사람들에 의해 거의 희생될 뻔했다.
만약 내가 중요 회사나 거대한 정부기업에서 일했다면, 혹은 부정직이나 착취로 유명한 그런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면, 혹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시는 일에 단호하게 적대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면 다니엘을 더 잘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의 직장 상황과 내 것을 비교해 보고, 내가 그러는 것처럼 다니엘도 과연 영혼의 고갈 상태를 맛보고 녹초가 되어 퇴근을 하는 일이 있었을까 숙고해 보고 싶었으리라. 그도 과연 간단하거나 명확한 해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야 했는지도 알고 싶다. 그가 어떻게 해 나갔는지도 알고 싶다.
그의 내면의 영혼은 자신의 처리를 바라는 모든 문제들을 다 옹호해 주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알게 됨에 따라 분명 수없이 기습을 당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최고로 중요한 문제가 떠오를 때를 위하여 어떻게 아껴 두어 이용할 것인가를 몇 시간이고 생각하며 보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그 순간들을 잘 선택했다. 그런 순간들이 닥쳤을 때 (그리고 그는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골랐을 뿐이다) 다니엘은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왕을 포함한 사람들 모두는 물러나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다니엘이 일하러 나갈 때면 왕은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그는 하는 일마다 훌륭하게 해 냈다. 그는 최고였던 것이다. 그는 열심히, 영리하게, 또 ‘회사’를 위하여 일했다. 그 회사의 이익을 높여 주었다 - 반드시 그 자신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에 극적으로 대립되는 문제들을 대했을 때만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럴 때에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과 맞서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이제 용감하게 나서야 하게 됐을 때, 그는 두드러진 상황을 선택한 듯 보여진다 : 포로로 잡혀 온 백성에 대한 왕과 그의 무자비한 정책들의 도덕적인 처리 문제, 정권의 붕괴를 예언한 벽 위에 씌어진 메시지의 해석과 적용, 종교의 자유의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왕의 마귀와 같은 도전 등등. 이런 문제들에 관한 시험이 닥쳤왔을 때, 다니엘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덤벼들었다.
자신의 성공을 시기하던 반대 당 사람들의 비열한 조사 활동을 당했을 때, 다니엘은 그 시련 속에서 나무랄 데 없이 깨끗한 사람으로 확인되었다.
적들의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단6:5).
다니엘의 적들은 현명하게도 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것이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왕과 그의 신실한 동료 사이에 쐐기를 박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률이 통과된 이유인 것이다. 그것은 다니엘의 현실 세계의 믿음에 고통스런 시험이 되었다. ‘왕에게 바쳐지는 예배가 아닌 것은 모두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민법에 규정이 되었을 때도 그 믿음은 훈련과 함께 일관성 있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 믿음은 여론 조작을 위한 재판의 압력에도 견딜 수 있었을까? 평생을 쌓아 온 경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그런 사건을 앞에 두고 그 믿음은 담대함을 솟게 할 수 있었을까? 굶주린 사자들의 굴 안에서도 그 믿음은 유효했을까? 그것은 정말로 현실 세계를 위한 믿음이었을까?
대답 : 그렇다. 다니엘은 최상층의 사무실에서나,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무릎꿇고 탄원하는 개인 침실에서나, 사자굴에서나 모두 효과적인 현실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 그가 굴에서 걸어나와 좌절하고 있던 왕 앞에 나타났을 때, 그 믿음은 강력하게 효과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냉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이다.
탁 터놓고 말해 보자. 다니엘은 삶과 죽음, 음모와 야망, 성공과 실패, 강요와 압력, 승자만이 대접받는 경쟁 사회라는 현실 세계를 살았다. 그는 그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어두웠던지간에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니엘을 그 현실 세계에서 끌어내지 않으셨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에 그분은 다니엘이 모든 상황에 알맞은 믿음을 벼리고 또 열중하는 것을 가능케 만드신 것이다. 다니엘은 그런 식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는 결코 뛰지 않았다. 그는 노(爐)에 머물러 있으면서 열이 거세어지고 과제가 불가능해 보일대에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1부 천국이라는 위쪽의 현실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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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분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건 바로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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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집까지 그리스도를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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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행 안내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배우게 될 것은? 예배의 방법이다. 이 일을 함으로써 달라지는 것은? 이것이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세 단계의 첫 번째가 된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 세 명을 천국으로 인도하셨다. 제자들이 산꼭대기에서 좀 떨어져 앉았을 때, 숭엄한 장면이 나타났다. 영광의 광채 속에서 예수께서는 구약 시대의 성인들과 앉으셔서 당신의 천국 올라가심을 얘기하고 계셨다.
세 구경꾼들 중 하나인 시몬 베드로는 후에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하여 글을 썼다. 그가 쓴 것을 보면 그 순간이 그의 평생을 좌우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난다. 비록 그 광경의 모든 암시가 베드로의 영혼 깊숙이 가라앉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 사명은 완수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장기적인 믿음은 끈기와 힘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의 현실 세계 안에서 그 자신을 강력한 전도자로 만들었다. 베드로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
그 때 베드로 자신은 몰랐겠지만, 나는 그의 개인적인 신학이 그 거룩한 산 위에서 한 단계 크게 뛰어올랐다는 것을 느낀다. 나중에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천국에는 거대한 능력이 있으며,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이 그 산꼭대기에서 보여진 것이다. 그는 커다란 외경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가진 하나님의 모습을 확장시킬 준비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먼저 아버지의 면전으로 따르고 그곳에서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남 :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가 흥미를 잃고 낙오자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감찰하시며, 우리에게 힘주시고, 우리의 존재를 친근하게 알고 계시며,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것.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9:23-24) |
하나님을 만나고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의 열쇠이다.
혹자들 중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알 자격이 있다는 사실에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성, 인종, IQ, 가족 유전, 출신교, 나이, 예금 잔고, 그리고 평판 등은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문제가 닥치면 별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입장료도 없고, 겪어야 할 시련도, 사회의 연줄도, 가입 시기도 필요 없다. 누구든지 그분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교적 소수만이 그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 세계의 믿음을 소유하는 자도 별로 없다.
다니엘은 이 우선적인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세대에는 다니엘만큼 부와 권력과 지혜를 합법적으로 입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를 움직였던 것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인 관점으로나 하늘의 하나님의 관한 지식의 추구였던 것이다. 그 지식은 그로 하여금 그 거칠고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의 방식을 협상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분명 다니엘의 현실 세계의 믿음의 축복이었다.
다니엘의 경력에 있어 첫 번째 중대한 위기는 그가 섬기는 느부갓네살 왕이 불쾌한 꿈을 꾸면서 일어났다. 요즘은 꿈같은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악몽을 두고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에는 군주의 악몽이란 누군가가 나서서 적절하게 해몽을 하여 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때까지 궁전 안을 충격의 파장으로 몰아넣었다. 듣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 주라. 이것이 해몽가들의 좌우명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왕이 꿈에 나타난 자세한 것들은 잊어버리고 다만 꿈이 준 불쾌한 느낌만을 간직하고 있었거나, 혹은 꿈이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를 알고 있으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쪽이거나 해몽 전문가들에는 골치였다. 왜냐하면 꿈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전에 그들은 먼저 묘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 안가 느부갓네살은 졸중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모두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다니엘이 앞으로 나와 문제를 풀기 위해 왕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이 곧 실행되었을 것이었다. 다니엘은 그 알현을 준비하면서 먼저 세 친구들과 모여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의 기도 내용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각 문구들이, 다니엘이 단지 황제에 불과한 사나이에게 위축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종류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분명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너무나 장대하셔서 우주도 그분의 영광을 모두 담기에 부족한 그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릴 때는 다른 문제들은 조그만 감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분명 이 하나님은 교회 천장 발코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단2:20-23). |
다니엘이 가졌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왕들에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진 것은 무엇인가? 현실 세계의 조건하에서 잘 사용된 믿음이다. 그들은 인간의 권력과 대결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웃고, 일시적인 이익의 유혹을 비웃었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면전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 나를 알라. 내가 여호와인 것을 깨달으라.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집까지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 때가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이 버려지기 시작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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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호 체계 : 미학론자와 경험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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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면 영혼의 여섯 가지 지배적인 성향, 여섯 가지의 기호 체계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를 관찰해 왔다. 각각이 중요점, 표현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면이나 속성 중 하나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각각의 지배적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따라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대부분 이 기호 체계들 중 하나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다시금 이 특별한 중요점으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이 ‘성향들’을 열거하는 데에 특별한 순서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처음이 되어야겠기에 나는 ‘미학적 성향’이란 것을 처음으로 고르겠다.
1. 미학적 성향 (The Aestheitc Instinct)
중요한 것은 위엄이다.
미학적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배를 목적으로 디자인된 환경 아래서 예배를 드릴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미학적인 그리스도의 제자의 명단에는 아마 이스라엘의 대왕 다윗도 들어갈 것이다.
아마도 다윗의 가장 위대한 미학적 꿈은 성전 건축이었을 것이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막으셨으므로 다윗 시대에 실현되지 못하고 아들 솔로몬이 이어받았다. 자신은 아름다운 왕궁에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거하심을 송축할 더 나은 양질의 장소는 없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면서 그냥 살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고귀한 의도를 하나님은 인정하셨다.
다윗은 땅에 첫 구멍을 파는 것에서부터, 성전 건축의 기획안을 착수하기 위해서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누군가가 위대한 고전적 종교음악이나 예배 형식, 그리고 큰 성당의 장엄함을 사랑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다윗에게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기쁨에 넘친 열광을 강렬하게 뿜어낼 수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위대하고 형식적인 문구들을 쓴 이 사람이 그날 기쁨에 겨워 날뛰며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었던 것을 기억해 보라. 다윗은 울고 웃고 또 얼굴을 찌푸리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넓은 범위의 영적 성향을 가졌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전적으로 즐겼던 것으로 보여진다 - 적어도 그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술적으로 사려 깊게 만들어진 언어나 구조, 음악이 다윗이 생각한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방법 중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다윗이 가진 영혼의 지배적인 미학적 성향 덕분에, 인류의 각 세대는 그 시편을 읽음으로써 기자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는 것의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을 같이 느끼며 하나님을 만나 왔다.
미학적 성향를 가진 사람들은 매우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선다. 그들이 위엄의 하나님 면전에 무릎꿇을 때 그들은 하나님도 미학적인 성향으로 자신들을 이끄신다고 영혼 깊은 곳에서 조용한 확신을 가진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내비치진 않지만.
2. 경험적 성향 (The Experiential Instinct)
중요한 것은 기쁨이다.
미학적인 사람들과 전혀 반대로 나타나는 사람들을 나는 경험론자라고 부르겠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때 그분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하며 충만한 감정의 범위와 심지어는 몸짓으로 하는 표현까지도 동원해 반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손뼉치기, 발 구르기, 심지어는 춤까지- 열정에 취하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울고 웃는 사람이다. 그곳에는 책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 사무실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지도 모른다 : 그 순간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찬양하거나 기도하는 표현이지만 그 소리는 분명히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험론자는 복음이란 즐거운 경험인데 왜 ‘품위를 지켜야’하는가?하고 묻는다.
하나님의 성령이 때가 되면 할 말을 주실 텐데 왜 딱딱한 구조 속에서 계획을 세워 가며 힘을 들이는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증거할 말이 있고 또 받은 말씀이 있는 때에 왜 제한된 몇몇 사람에게만 예배를 이끌도록 놔두는 것인가?
미학적인 성도가 왕과 주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위엄에 집중한다면, 경험론자들은 성령과 또 그분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능력을 가장 소망한다. 경험론자의 어휘 사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치유의 은사, 천국에서 직접 내려오는 진리의 추구,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화합하는 것 등으로 표현된다.
일반적인 견해로 보면, 경험론자와 미학론자는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있어 반대이다.
다윗이 대부분의 시간을 미학론자들과 보냈다면, 나는 시몬 베드로가 경험론자들에게로 강하게 끌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드로는 언제나 육신의 사람, 열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달려들었지 먼저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재빨리 확언한 것은 베드로였다(훌륭하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 취해 주께서 십자가라는 언짢은 것을 언급하심을 질책한 것도 베드로였다(안타깝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 물위를 걷기 원했던 사람은 베드로였다. 산꼭대기에 머물러 제단을 쌓기 원했던 자도 베드로였다. 배반하지 않겠다고 굳건한 맹세를 한 것도 베드로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당황하여 급기야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베드로를 보면 모든게 자명해진다 - 위대한 에너지, 위대한 의도, 위대한 행동.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그는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 - 그게 옳든 틀리든 간에 - 바로 그것이 경험론자들이 하는 방식인 것이다.
경험론자들은 도량이 넓고 온화하다. 그리고 그는 추호의 의심 없이 생각하기를 하나님도 경험론자이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는 거의 모든 기회를 잃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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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호 체계 : 행동론자와 사색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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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지배적 성향 혹은 체계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주고받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 아버지의 면전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여기 두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그리고 미학적이나 경험적인 성향처럼 그 두 가지도 처음에는 서로 극과 극처럼 나뉠 것이다. 우선, 행동론적 성향을 생각해 보자.
3. 행동론적 성향 (The Activist Instinct)
중요한 것은 성취이다.
행동론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 모두를 섬김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을 또한 성취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가장 성취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는 그는 대부분의 실천안이 성취에 맞추어지기를 기대한다(‘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끝까지 남는다’ 이런 말을 때때로 듣지 않은가). 행동론자는 이루어져야 할 좋은 일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써 예배하고 싶어한다.
그는 세상이 절실한 변화의 요구 가운데 있다고 보고 또 바꾸려고 전심을 다한다. 그는 행동론자였던 사람들의 생애를 읽고 그들의 용기와 희생의 이야기에 전율한다. 그는 기적의 토대가 되는 거대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활력을 얻는다. 행동론자는 평소대로 변화없는 생활을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뭔가 비범한 일의 한 부분이 되고 싶어한다. 비전이라는 단어가 그가 말할 때마다 튀어나온다.
행동론자들이 하는 일은? 더 큰 교회를 짓고, 거대 도시에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고, 기독교 문화의 상당한 양을 확충하고, 걸식자들을 먹이기 위해 막대한 양의 돈을 내고, 악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감시하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각자 생각되는 일을 하도록 훈련시키고 동원시킨다.
행동론자들은 매우 특별한 렌즈를 통하여 성경을 읽는다. 그들은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위대한 임무’로 제자들에게 앞선 비전을 주신 것에 주목한다. 그들은 초기 교회의 삶을 연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에 용감히 침투한 것에서 커다란 동기를 얻는다. 그들은 그 당신에 교회가 퍼져 나가던 속도를 보며 넋을 잃고 기뻐하면서, 왜 그런 일이 오늘날에는 일어날 수 없는가 묻는다. 행동론자들에게 고맙게도, 오늘날 세계의 어딘가에서 바로 그런 부흥이 일어나는 까닭은 바로 그들 덕분인 것이다.
행동론자는 계획을 세우고 고안할 때, 사람들을 동원하고 프로그램들이 시작되는 것을 볼 때 가장 믿음 안에 편안해 한다. 그는 성취된 것을 재어 본다. 신용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취된 것을 축하하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적잖은 수의 행동론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나는 모세를 들려고 한다.
노골적인 행동주의로 인해 그는 골칫거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 행동주의란 가금씩은 그런 결과를 낳는다 - 어느 날 충동적으로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이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들이 그 행동에 감명을 받고 자신을 따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만사가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도망자가 되어 광야로 쫓기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약간 사색적인 것으로 균형을 맞추실 때까지 40년간을 그는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후에 나타난 그는 그 문제에 있어 꽤 균형이 잡힌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용기를 잃고 마비된 것은 단지 몇 번뿐이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이 정신적 지평선에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행동론자는 사람들을 훈련하고 동원하고 기능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둔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때 말씀을 들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나님도 행동론자일 것이 틀림없다고 마음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4. 사색적 성향 (The Contemplative Instinct)
중요한 것은 귀기울임이다.
그러나 행동론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면, 사색론자들은 좀 다른 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 그의 성향은 하나님을 바쁜 계획들 가운데가 아닌 내면 생활의 고요함 속에서 만나고 싶어한다. 그 영혼의 커다란 공간에서 사람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그 백성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말없는 속삭임을 묵상하고 듣고 숙고한다.
사색론자는 공적인 합동 예배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하긴 그런 시끄러움 보단 조금 더 조용할 때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단어가 전달할 수 없는 ‘교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긴 하지만 그는 객관적으로 말해지는 진리의 추구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예배 인도자나 신학적 천재들 상당수가 사색론자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도전을 줄 것이다. 천국의 가장 위대한 회복은 말이나 느낌, 혹은 행위의 수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결에서 양식을 받아먹는 영혼의 깊은 대수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이 근원은 오직 바깥의 소음을 피하고 스스로가 조용해지고자 하는 사람만이 꺼낼 수 있는 것이다. 결과는?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 후에 사색론자는 듣고, 알게 되고, 안내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색론자는 기도가 상호간의 대화라고 믿고 있으며, 기도는 말보다는 듣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전적으로 이성적이거나 꼭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적 진행보다 크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원하시는 바대로의 방법으로 그 신비로운 존재를 우리에게 각인 시키신다는 것이다.
교회 조직 안에서 사색론적 성향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는 왜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생활에 집중하지 못하느냐고 묻기 십상이다.
행동론자와 사색론자들은 처음 보아서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나는 듯 보인다. 한족은 밖으로 움직이고 한쪽은 안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서로를 보충해 주어야 할 때에 쉽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적 성향들이 함께 짜여 들어가면 뭔가 매우, 정말 능력 있는 일이 일어난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의 성향 목록에 행동주의를 덧붙인 사색론자의 놀라운 예이다. 또 다른 사색론자인 구약시대의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기반으로 하여 믿음을 벼려 가며,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는 도전을 주신 것을 곰곰이 생각하며 광야에서 몇 년을 보냈다. 그는 살았던 곳이라든가(아마 동굴이 아니었을가?) 가진 소유(그는 낙타 가죽옷과 가죽띠, 메뚜기와 석청이라는 조화롭지 못한 것들 외엔 가진 것이 없어 보인다)등 육신의 문제에서 분명 엄격한 자기 통제를 유지했다.
요한은 말을 할 때 요점을 정확히 짚어 냈으며 무리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몰려들었다.
요한이 사색 가운데 얻어낸 통찰력은 고요한 가운데 들은 것들을 크게 소리쳐서 무리의 관심을 얻어냈고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믿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을 때 그를 맞을 준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색론자였던 것이다. 행동론자들은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색론자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꺼이 물러난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도 마음으로는 사색적이실 것이라 말없이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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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호 체계 : 학문론자와 상관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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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론자는 호칭 기도를 좋아한다. 경험론자는 예언을 좋아한다. 행동론자는 전략을 사랑한다. 사색론자는 묵상에 깊이 빠진다. 하나님을 만날 대 그들은 이런 것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다른 많은 것들을 가져온다. 나는 그것들을 영혼의 지배적 성향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여행에서 다른 두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5. 학자적 성향 (The Student Instinct)
중요한 것은 진리이다.
나는 그 둘 중에 첫 번째를 학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진리가 그가 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공들인 단어와 교리를 사용, 전달하는 진리. 이것에서 위대한 신학이,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를 최대한 이해하는 골격이 나올 수 있다.
사색론자가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다면, 학자는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심오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학문론자가 약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거만하고 애정이 결핍되어 버리는 진리 탐구의 의무에 있다고 할 것이다. 가장 심한 경우에 학문론자는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타인에게 특별한 존중을 하는 것보다 옳은 것에만 더욱 집착하는 비열한 사람이 될 소지조차 있다.
한편, 학문론자가 아니었더라면 믿음의 사회는 분열되어 버렸을 것이다. 잘 정의된 신앙과 가치관의 목록이 없는 운동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의도’와 그 함축된 의미를 열심히, 사정없이 연구하도록 주장하는 것이다.
학문론자가 타인에게 겨눌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말은 상대주의자나 이단이라는 딱지일 것이다. 이런 말들은 정교 신앙,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에 대한 기준이 되는 일련의 생각들에서 일탈하는 행위를 말할 때 쓰인다. 학문론자는 사색론자가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어요”라고 속삭이거나 혹은 경험론자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하고 소리칠 때 의심부터 한다. 객관적인 성경적 증거에 더욱 끌리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성경에서 찾아 보여주시오, 그러면 믿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행동론자들의 프로그램도 만약 그릇된 이유에서 치러졌다고 결론지으면, 그것들에도 그리 큰 감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옳게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듣는다, 그러므로 위대한 상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에 놓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알기 쉽고 다루기 쉬운 단편들로 만들 수 있는 선생들은 가장 유명해지는 것이다.
다시, 성경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추구함에 강조점을 두는 학문론자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의 믿음은 비참한 상대주의로 빠르게 침잠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리와 그 반대자들에 대항한 역사적인 방어에 대해 학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교리를 형성하거나 믿음을 실제적인 정의로 만드는 문제에서 보면 우리는 학자들을 꼭 필요로 하게 된다. 신학적인 사고 과정을 발달시키라고 도전을 주는 것은 학문론자들이고,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의심할 여지없이 학문론자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라 개종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그렇게 훈련받아 왔다. 그는 분명 교회가 뻗어 나가기를 원하는 행동론자였으나, 회당에서 회당으로, 그리고 듣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진리가 퍼져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바울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지칠 줄 모르는 선생이었다.
비록 바울은 사실상 내가 지금까지 묘사한 영혼의 지배적 성향 전부를 훌륭한 균형을 이루며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학문론자가 가장 지배적이다. 그는 학문론자의 가장 좋은 쪽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간이기에 가장 나쁜 쪽도 드러내고 있다.
가장 좋은 쪽이란? 하나님의 내보여진 진실성을 향한 그의 소박한 사랑을 말한다.
그럼 가장 나쁜 쪽은? 그 사도는 때때로 너무도 독단적이었던 것 같다. 자기 확신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그는 함께 일할 동료로서의 요한 마가의 가치를 놓고 논쟁하다가 오랜 친구인 바나바와의 동업자 관계를 잃는 위험을 감수했다.
학문론자와 반대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상관론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6. 상관적 성향 (The Relational Instinct)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학문론자가 진리를 위해 사랑을 말한다면, 상관론자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말한다.
상관론자는 사람들의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 그는 서로 섬기고 즐기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함께 모으기 원한다. 그는 대립이 있을 때 가슴 아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직과 솔직함으로 생활을 내보이지 않을 때 의기소침해 한다. 반대로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갈라놓았던 오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느길 때 유쾌해 한다. 이 일이 벌어질 때 그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본다고 믿고, 그 시간에 가장 친밀하게 그분을 만났다고 느끼게 된다.
상관론자들은 모임을 좋아한다. 학문론자가 바울을 좋아한다면 상관론자들은 바울의 첫 동업자였던 바나바를 사랑한다. 상관론자는 바나바가 요한 마가 문제를 놓고 결국 바울에게 질려서 그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한때 바울을 데려다가(그가 비교적 새 신도였을 때) 그에 대한 감시를 누그러뜨리기 어려워했던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결국 바나바였다. 안디옥 마을의 새 신도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도 바나바요, 그 일을 바울에게 맡긴 사람도 역시 바나바였다. 그리고 요한 마가를 날개로 품어 주고 스승 노릇을 한 것도 그였다. 그리하여 학자인 바울이 전에 저지른 실패 때문에 그를 거절했을 때 상관론자인 바나바는 단호하게 결심하고 동업자 관계를 끊어 버렸다. 여러분이 바나바를 볼 때마다 그는 사람들의 행복과 상호관계를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오늘날의 상관론자들은 그를 사랑한다.
상관론자들은 그들 특유의 예수관이 있다. 상관론자들은 외친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을 의식하신 분이었는지 알지 못하십니까? 그분께서 어떻게 항상 빈곤한 개인과 시간을 보내셨겠어요? 열두 제자에게 주신 명령, 진정한 제자도의 신호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셨어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관심사였다 : 잃어버린 자들, 멸시받는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등등. 가시는 곳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셨고 그들의 희망과 가치와 온전함을 세워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들을 소개해 주셨으며 또 서로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상관론자가 가장 하기 좋아하는 일이다.
문제의 결론 (The Conclusion of the Matter)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혼의 여섯 가지 지배적 성향 전부를 소유하고 계셨다. 그분은 사색론자이셨던 동시에 행동론자이셨다. 상관론자이시며 학자이시기도 했다. 경험론자인 동시에, 미학론자이셨던 것이다. 그분은 여섯 가지를 완벽하게, 균형 있는 방법으로 섞으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섯 가지 중 두세 가지에 자연스럽게 끌릴 것이라고, 또 한두 가지에 호기심을 가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머지 상관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일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첫 번째 장소들 중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 곳에 도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것이며, 그분의 보좌 앞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십중팔구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분 면전에서 가장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이해함으로써 나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는 데 있어 가장 자연스런 방법이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것으로 지배적 성향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발견했을 때 다른 네 다섯 가지도 탐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의 성숙은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이 경배의 여섯 가지 기호 체계에 모두 정통할 때 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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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전에서 부르는 찬양은 감옥에서도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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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쇠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국을 들여다본다는 상상이 정말 겉잡을 수 없이 달려간다. 무한한 시간이 흘러가고 하나님의 속성과 행하신 일에 대해 찬양대가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서 요한이 점점 더 확신에 차는 모습을 나는 볼 수 있다.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인가?
영접이라는 주제 (The Theme of Acceptance)
요한은 일곱 개의 봉인이 찍힌 두루마기(고대의 책) 하나를 보았다고 쓰고 있다. 성경 연구가들은 그 두루마기에 무엇이 쓰여 있었을까를 가지고 몇 세기를 연구해 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었을까?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생각해 오신 역사의 계획이었을까?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놀라운 일은 아무도 그 봉인을 깨고 내용을 조사할 만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이 일로 해서 요한은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계5:4).
그러나 그는 한쪽에 계셨던, 이 벅찬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못 보았기 때문에 울었을 뿐이다. 그분은 어린양(역설적으로 그분은 유다 족속의 사자로도 불리셨다)이었다. 살아 계셨지만 죽임을 당하신 표를 생생히 가지고 있는 어린양이셨다. 이 이미지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알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갑자기 깨닫게 된다. 이 분만이 그 두루마기를 펼 능력을 가지고 계신 유일한 분이심을. 다시금 찬양대는 찬양을, 이번에는 어린양을 향하여 노래부른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계5:9-10). |
어린양 행위가 없이는 삶이란 어떨까? 매일 사람들은 살아 나가기, 가족 부양하기, 친구 만들기 같이 과업을 겪어 나가면서 수천 가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누가 옳게 지도해 주는가? 무의식중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내면의 존재가, 너무나 숨겨져 있어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지도 못하는 실천안을 생산해 내는 비표준적 동기와 욕망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쉽게 성문화되고 정의되는 단순한 죄들이 있을 뿐이라고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혹은 죄악이 인간의 상태에 침투하였으며,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하나님의 영접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신 어린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우울하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창조주께서 우리를 영접하신 까닭이 우리의 공로나 환호성에 기반하지 않음을 알고서 현실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어린양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에 기초하고 있고,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세계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게 서게 되는 것이다.
사자로 다시 일어서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 찬양하라. 교회에서, 거리에서,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 사무실의 고요함 속에서, 차 속에서, 점심 식사하는 곳에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크고 오래도록 찬양하라. 생활에 온전함을 가져다주시고 실패에서 일어나 다시 시도하게끔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시는 이가 바로 어린양이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또 쉽게 이겼을 때 겸손함을 가져다주시는 이가 바로 어린양이시다. 어린양께 찬양하라. 그분이 우리 현실 세계의 믿음의 기반이 되신다.
찬양의 말 (The Ascription)
감사하게도 이 책을 구입해 읽는 독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이 페이지들을 무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매일 현실 세계의 것들과 툭탁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그들은 현대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 배우자에게 충실하게 사는 것, 아이들이 마약에 손대지 않게끔 주의시키는 법, 해직 당해야 할 사람(혹은 당신을 해고할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대하는 방법, 모자라는 금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돈을 벌든 부당하게 탐내든) 등등에 대한 염려로 머리가 복잡한데 말이다. 현실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이런 당면 문제들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는 것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배울 때만이 제 크기를 되찾게 된다. 그 때만이 현실 세계의 믿음을 일의 다음 발자국을 내딛는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또 우리가 그 초대를 받아들일 때 그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예배이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깊이는 우리가 벼려가는 현실 세계의 믿음의 힘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그게 첫걸음이며, 피해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구경꾼이나 우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제몫을 하는 참여자, 때로는 지도자로서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기 위해서는 요한이 목격한 천국의 합동된 예배 형식 같은 것이 정말 필요하다. 그것들은 더 커다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무리와 접촉시켜 주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들은 또한 천국의 식구들 가운데는 우리가 주중에 경험하기 쉬운 성과 연령, 소유, 인종, 교육 정도로 인한 사람들의 분열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귀뜀해 준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하나이며, 그 경험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풀려져 있던 것이 빠지며 또 움츠렸던 어떤 이들은 제 크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목적하셨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는 영혼을 확장시키고 내면에 도사린 악에 의해 저질러진 죄를 질책하고 깨끗케 할 합동된 예배의 경험이 필요하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민감하게 기도할 수 있고 또 성경이 현실 세계와의 관련성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장소로 올 필요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예배가 웅변술과 음악의 재능을 가지고 우리를 대접하는 몇몇 전문가들의 소유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필요에는 책임이 따른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음과 생각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예배 경험에 참가하고, 하나님께 정의를 드리기 위한 가득한 열정을 가지고 참여할 준비를 할 책임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은혜와 용서를 받을 수 있게끔 확신으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나아 올 책임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희생의 행위를 풍부히 드릴 책임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필요할 때에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경 말씀을 받아먹을 기회가 올 때 마음과 생각을 열고 배울 책임이 있다. 필요와 책임 - 둘은 같이 나아가야 한다.
나는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감옥 장면을 읽을 때면 웃지 않고는 넘길 수가 없다. 바울과 실라는 사슬에 단단히 묶여 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나라면 무엇을 했을지 뻔하다!) 그들은 예배드렸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것을 믿는다. 서구 세계의 대부분의 예배가 모두 끝났을 자 정도 훨씬 지난 시간에 노래를 불렀다. 나는 바하나 모차르트의 위대한 고전 종교음악과 랜들 톰슨같은 최근 작곡가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들이 그런 종류의 음악을 불렀으리라고는 절대 생각되지 않는다. 시편을 암송했을까? 초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방 포크 음악에 맞추어 사용했던 최초의 선전 문구와 찬양의 커플렛을 불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감옥 찬양이라고 부른다 : 세상으로 나가서 주중에 지하철에서, 책상 앞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흥얼거릴 수 있는 종류의 멜로디이다. 우리는 예배 인도자들에게 감옥에서도 부를 수 있는 찬양을 달라는 도전을 줄 필요가 있다.
성경 읽기, 영적 고전들의 묵상, 감옥 찬양을 흥얼거림, 중보와 참회와 기도, 하나님의 성령이 천국의 생각들로 마음을 씻어 주실 때의 고요한 생각들, 침묵, 고독, 평화로운 재정비.
예배를 사적으로 혹은 협력하여 드리면서 우리는 현실 세계의 믿음을 계속 버려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 앞에서의 진정한 예배는 세상의 삶의 현장만이 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천국은 삶의 현장 전에 있었고, 그것들이 사라진 후에도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실 세계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적용되는 법을 아는 믿음을 벼려야 한다.
2부 우리 자신이라는 내면의 현실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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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내면이라는 현실 세계 안에서 자아를 정복하는 것,
그리고 그분께 만드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선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건 바로 그리스도를 닮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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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운 여행이란 바로 자아 깊숙이 행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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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천국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영혼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내면 공간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개인의 내면 자아에 대한 진전된 지식이며 그것을 정복하기 위한 성장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더욱 큰 극기를 권할 때에 이 개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앞장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을 정복한다는 개념은 정의된다기보다는 종종 관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고 싶은 이유이다. 현실 세계의 믿음의 두 번째 차원을 설명하는 데 다니엘보다 적당한 사람은 거의 없다.
몇몇 이방 왕들의 행정부에 기록된 다니엘의 경력은 화려하다. 그와 관련된 어떤 인적 파일을 보아도 아마 공정함, 일관성, 지혜로움, 또 어떤 상황에서든 처신할 수 있는 융통성 등등이 그에게 딸려 있을 것이다.
다니엘이 행했던 매일 매일의 관리 활동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보다는 두드러진 중요성을 내포한 몇 가지 담대한 결심, 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맞불을 놓아 그의 경력을 빼앗아 갈 수도 있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결심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이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다니엘은 동요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행동했다. 무엇이 그를 행동하게 만들었는가?
그 대답은 한 부분은 다니엘이 일관성 있게 행했던 두 가지 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몸과 생각과 영혼 깊숙이를 통제 - 왕이나 다른 사람들 아닌 바로 자신의 통제 -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어떤 일에 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가 한 긍정적 훈련을 주의해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분주한 사람들이 무시할 만한 행동들이다. 그러나 그 훈련들은 다니엘에게 힘과 의지를 가져다주었고, 영웅이 되어야 할 때가 왔을 때(물론 다니엘이 그런 기회를 갈망했다고 생각진 않지만) 그는 옳은 대로 행했고, 그 행위는 영웅적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나는 다니엘이 행한 것을 ‘훈련’ 혹은 ‘자기 관리’라고 부르고 싶다.
자기 자신에게 ‘안 돼’하고 말하는 방법에 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세상 안에서 다니엘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일을 해닐 수 있도록 자기 통제를 했던 것이다.
다니엘은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잔인함이 있고 인간 목숨을 경시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고 성공까지 할 수 있었는가? 그는 하루 중의 세 번은 모든 일을 손에서 놓고 자신의 영혼을 예루살렘의 하나님께로 돌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매일의 압력이 너무나 거세어서 하루 세 번 기도하지 않고는 십중팔구 개인적인 재난이 다가왔을 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몇 년 전에 왕의 식탁에서 받았던 삶의 압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으름장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말들은 다니엘의 적들이 그의 영혼 활동의 일상의 패턴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바벨론에서의 생활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는 중요한 원칙을 배우게 된다 : 그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신을 관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의 표시이다.
이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회개가 필요한 것들이 있음을, 그리고 잘한 일들을 알아보기 전에 이 불행한 성질들이 필히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가 따르기로 결심하고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내면 공간의 쇄신이 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신다. 결과가 나올 끝까지 가기 전에는 항상 기분 좋은 경험들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혹감, 갈등, 실패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의 믿음이 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면 이것은 일어나야 할 일인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었고, 그는 시험의 순간을 준비했고, 그는 자신을 훈련했고, 그는 열광적이고 규칙적인 중보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때를 기대했다. 그는 자기 영혼 내의 약점을 기꺼이 탐험했다.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사람은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리스도를 닮음 안에서 그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는 일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다니엘과 같은 사람 속에서 그 결과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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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망쳐 버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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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를 성경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을 때, 모든 사물들이 질서와 조화를 목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 질서와 조화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기로 작정한 날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악한 영이 세상을 오염시켰고 마구잡이 식의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왔다. 진리는 더 이상 명확한 것이 아니었고, 속임수가 인간의 가장 무서운 문제가 되어 버렸다. 확실성 대신 가망성만이, 명확함 대신 어림짐작이 있을 뿐이다. 창조물들은 더 이상 인간의 종이 아니게 되었다. 친구는 더더욱 아니었고 곧 경쟁자가 되었다. 그리고 역사를 내려오면서 창조물과 인간 각각은 서로를 기회만 있으면 비방하고 공격해 왔다.
쇠사슬 톱 앞에 무너지는 브라질의 삼림에서부터 해안을 덮는 쏟아진 석유까지, 점점 사라지는 오존층에서부터 유독 폐기물까지, 인간은 창조물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 있는 신비는, 인간은 그것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말하는, 이 지구 위에서의 우리가 알고 있는 생활이 재난을 향해 가고 있다고 결론지어야 하는 것의 모든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소 부드럽게 말한다면,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 이후로, 대부분의 인생이 몇몇 특별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되었다. 그 특별한 순간들조차 반드시 모든 인간, 모든 세대의 소유가 되지는 않았다. 청년들은 잠시 무시할 뿐이고 늙은이들은 오래 소홀히 할 수 없는 죽음이 전체에 만연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죽음, 이 믿기 어렵지만 보편적인 현실은 처음엔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이 ‘망쳐짐’이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창조물의 고요함이 악의 폭력에 의해 파괴된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갱생의 사명에 착수하셨다. 나의 논리적인 부분이 발동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환란 덩어리를 녹이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셨을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명은 두 부분이 중첩된 것 같다 : 인류의 구속이 첫째요, 창조물을 재생하는 것이 둘째다. 예수님의 강림하심은 하나님의 갱생 계획의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다양한 부류의 인간 군상과 접촉하게 되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신 것이다! 악의 권세에 눌려지내던 인생들이 속으로부터 새로워진 것이다.
우리와 같은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그분께서 일으키신 변화, 그것이 바로 많은 이들을 예수께로 이끄는 요소이다. 우리는 그 성경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으며 그것들에서 소망을, 우리가 들은 치유와 회복의 은사가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이끌어 낸다.
갱생의 각 경우마다 우리는 개인적 종살이의 상태(흔히 ‘굴레’라고 부르는 것)에서 점점 증가되는 극기 혹은 자기 관리의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대로의 인간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 사이를 다니실 때마다, 그분은 악의 권세, 질병, 두려움, 장애, 미신, 영적 마비 상태에 예속된 자들을 정확히 지적하셨다. 극기란 이런 덫에 걸린 상태에서 내면의 자유함으로 변화되고 창조물의한 조각으로서 관리의 본래 능력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된 가지가지의 이야기들을 아주 조금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도 요한은 열정적으로 이렇게 썼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한편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같은 마을에서는 그분을 전적으로 거절하고 깨어진 것을 회복시키시는 그분의 능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자유케 하시는 능력을 경험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조건은, 자신이 이 망쳐진 종의 한 부분이며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자 하는 기꺼움이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이다 : 자기 폭로의 행위와 생활의 방향과 헌신을 바꾸고자 하는 선택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는 언제나 내면 생활의 노출과 회복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면의 조그만 한 부분만이 아니라 크게 확대된 부분을 말한다. 이 부분의 원칙을 재 공식화해 보겠다.
현실 세계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천국이라고 불리는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내면을 살피게 되고 자아를 정복할 능력을 얻게 되며 창조주의 놀라움을 반영하게 된다. |
현실 세계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천국이라고 불리는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내면을 살피게 되고 자아를 정복할 능력을 얻게 되며 창조주의 놀라움을 반영하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은 해 놓고 그분이 시작하시는 탐험의 과정에 반대한다는 건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수단을 무효화해 버리는 셈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어둡고 혼란스런 내면 깊은 곳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의 한 부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당신을 따라, 그런 결정이 사실상 내려지는 내면 생활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라고 초청하신다. 그 망쳐짐을 인식하고 그분으로 하여금 갱생을 시작할 수 있게끔 해 드리는 것이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과정의 한 부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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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을 정밀 조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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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139편) |
이 시편의 핵심은 내면의 노출이다.
인간 마음의 어두움에 빛이 비추어져 숨겨진 것들이 마침내 분명해지고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종적인 목표는? 기자는 시 마지막에 가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그는 ‘영원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용어로 말하자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 시편 기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만큼 이상적인 것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휠씬 넘어서는 방법으로 이 마음 속 내면 에너지와 동기들을 살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자기 폭로이다.
이 모든 것은 속이는 습관을 계속하고자 원하는 시편 기자를 다소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것이 숨을 수 있겠는가? 그 기자가 다윗이라면, 이것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분명 (그 자신은 생각하기에) 하나님에게 거짓말하는 데 전문이었던 사람에게는 불안한 생각이다.
시편이 끝날 때 기자는 항복한다. 마치, 결국 하나님께서 내면을 관찰하실 작정이시라면 - 좋든 싫든 간에 - 자신도 그 과정에 합력하여 자기 폭로로 이끄는 조사를 받아들이겠다고 결론지은 것 같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
이것이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버리는 방법을 찾는 사람의 기도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말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풍부하게 보여주는 예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을 대하신 예수님의 행동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예수께서 과연 그녀를 어떻게 판단하실 것인가 그들은 알기 원했다.
순수하게 품행 면에서 보면 그녀는 정말로 그 무리 안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 간음은 그 시대 상황에서 보면 9번이나 10번 죄에 해당했던 것이고, 그녀가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는 질문할 필요조차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녀가 지은 죄의 심각성을 그분이 무시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행동을 문제삼을 수 있었다. 그 지식은 시편 기자의 단어를 쓰자면 그리 ‘기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CAT 스캐너를 켜시고 그 무리 - 창녀와 바리새인 - 가운데 동등하게 담겨 있는 어둠의 심연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녀를 끌고 온 자들은 드러난 행위를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속의 감추어진 상태, 통제 요소에 초점을 맞추심으로써 모든 이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이다. 갑자기 모든 이들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떠났던 것이다. 노인들이 먼저, 젊은이들이 나중에 떠났다. 그분은 자기 폭로를 강조하셨고, 바리새인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자기 폭로는 마치 모기에게 있어 구충제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린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견해가 내면의 통제 요소를 밝혀 내면서 반드시 내면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을 밝혀 내면서 우리는 내면의 해방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 그것을 용서로서 다루어 주시고 해결책을 주시는 한 분께 내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많은 사람에게 있어 이것은 무엇보다도, 완전히 탐험되고 필요하면 질책도 받을 필요가 있는 내면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의식적인 마음 안에 써 주시는 바를 느끼는 사색적인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성경 공부에 의해 움직여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을 거룩한 그들에 잠그게 될 때 어떤 것들이 불쑥 뛰쳐나와서 내면의 현실들과 연결되는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를 성경 속 인물들의 행동 혹은 사도나 선지자들의 가르침 속에서 보게 된다. 주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명령 하나가 갑자기 골수에 사무치게 되고 우리는 자기 폭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기 폭로는 또한 우리가 조심스레 우리의 행동 결과를 조사할 때도 온다. 우리 각자는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다 - 나를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태도와 동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하고 정직한 물음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을 높여 주신다.
그러면 통제를 피하고 극기를 얻는 점에서 가장 가깝게 보아야 하는 범주는 어떤 것들이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신이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통제되는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해 본다. 그는 사람들의 의견에 기반하여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끌려 다니는 사람인가? 그는 사람을 키우기 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이용하지는 않는가?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 있는가 혹은 경쟁이나 질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는 물질적인 것과 연결된 것들을 꼼꼼하게 조사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재는가? 금전이 통제해야 할 문제인가? 은행에 있는 돈의 안전에 대해 생각하려는 유혹이 혹시 있는가? 물건을 사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지 않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이 버리는 것 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불행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줄 수 있을 만큼 관대한가? 가진 것에 의해 사람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의 환상, 사색적 생활의 상태의 목록을 만든다. 그의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부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상상에 자주 사로잡히지는 않는가? 포르노그래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자기는 될 수 없는 어떤 존재에 대해 망상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인생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 끊임없는 불만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내면을 살펴보고, 그리스도의 제자는 해결되지 않은 죄의 증거를 찾는다. 그리고 죄가 있을 때 이렇게 질문한다 : 죄가 뭐라고 말하는가? 해결되어 보상이 필요한 과거의 문제들이 있는가? 한 인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내면의 불편한 감정을 꿰뚫고 들어올리려고 시도하는, 마주할 필요가 있는 문제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는 경력을 향한 태도를 관찰하기 위해서도 내면을 살피길 원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항상 최선을 다하여 일을 마무리하는가? 일이 부자연스럽게 생활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레저와 오락 시간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원기 회복이 되는가? 영혼에 건전한 것인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활동인가?
특별히 커다란 고통이나 분노로 얼룩진 기억들은 어떤가? 과거에 내게 잘못한 중요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는가? 혹시 앞으로 발전하려는 생각을 막고 있는 옛날의 패배나 실패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가?
습관 양식, 중독, 애정 등이 그를 통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는 바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 방식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것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형제 자매들의 도움을 그는 어디서 필요로 하게 될까? 그 속박의 원천에 손가락을 짚어 줄 수 있는 조언자나 목회자의 도움을 그는 어디서 필요로 하게 될까?
이것들은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사람이 추구하는 범주와 질문들이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내면의 자기 폭로를 추구하는 것이 끊임없는 훈련임을 알게 된다. 이 훈련을 무시하게 될 때 극기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상실되는 것이다.
내면의 자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오는 고통은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내면에 생명이 있으며 미래를 위한 소망과 가능성이 존재함을 말해 준다. 다니엘은 마음속의 고통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아는 그런 위대한 자가 된 것이다. 다니엘은 고통을 은혜와 새로운 성장으로 이끄는 입구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더욱 예수를 닮게 해 주는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려 감에 따라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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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믿음이란 회복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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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신앙 사회에 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정지된 용어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일단 ‘구원’받기만 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사실 회복이며, 회복은 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동적인 단어인 것이다.
성경 시대에 작가들과 설교자들은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린다는 것의 의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동시대적 상황에 주목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영적 갈등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묘사하실 때 ‘잃어버린’이라는 단어를 쓰시곤 했다. 잃어버렸던 사람이 안전하게 돌아왔을 때의 결과로 ‘찾은’ 혹은 ‘구원받은’을 썼다. ‘잃어버린’과 ‘찾은’은 길 잃은 양이나 여행자의 현실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귀로 가득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마12:43-45). |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바는?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내면 생활로 들어가 자기 폭로를 경험할 때, 버려진 ‘가구’나 굴레 등을 영적으로 긍정적이고 건전한 것들로 대치할 필요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단지 있던 것들을 내던지기만 하고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으면 우리는 굴레로 되돌아가거나 말씀 속에서처럼 악한 영들의 재방문을 받는 꼴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좀더 증진된 극기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에 다단계적인 접근 방법은 없을까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년기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한 모범을 세우고 가르칠 기회가 없어서 자기 통제나 훈련의 원칙을 가르치지 않은 가족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커질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여기 그리스도를 따라 내면의 공간으로 가서 재설비를 하는 방법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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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믿음을 위한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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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것은 C.S 루이스가 언급한 ‘망쳐진 종’의 영향으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회복이란 내면생활을 여러 가지 가치와 태도와 해답으로 채우기 위해 의도적이고 훈련된 단계를 밟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어둠을 뚫고 그곳을 빛으로 대치시켜 줄 것이다.
인생 계획의 전개 (The Development of a Life Plan)
인생 계획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로 구성되어 있다 :
1. 한 개인의 중요한 과거 경험들(성공과 실패 모두)의 적나라한 목록, 습득된 성취물, 자연스럽고 영적인 은사와 능력, 중요한 교제, 그리고 그 교제가 개인에게 마련해 준 것은?
2. 아직 배우지 못한 주요한 것들의 정직한 평가, 훈련을 통하여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경향과 습관, 건강 상태, 나쁜 감정이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관계,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도달해 있는 상태, 그 개인의 두려움과 명백한 장애물과 한계는 무엇인가?
3. 그 사람의 친구와 친밀한 관계자들의 상태 보고서와 이것들이 가지는 힘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되어져야 할 일. 그들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또 그가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4. 직업, 오락, 사람들을 향한 섬김, 개인적 성장에 있어 그 사람이 가장 하기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묘사, 배움, 여행, 성취, 창조 등 개인적인 성취에 있어 다가오는 해에 하고 싶은 일은?
5. 사명 글귀 : 인생을 살며 성취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관한 간단한 문장이나 문단. 나는 단순하게 ‘전적인 기독교 사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직업전선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무엇을 -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한다면 - 자신의 사명으로 보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6. 목표, 예를 들면 직업 훈련, 살기 좋다든지 하는 지리적인 위치, 가족과 친구들의지지, 더 많은 교육, 스승의 인정, 영적인 성숙 등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들의 목록 적기.
7. 직업에 대한 일반적인 계획. 지금 현재 쌓아 가고 있는 경력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열람되어야 할 다른 가능성들은 없는가? 현실적인 한계는 없는가?
8. 재정적 목표는 어떤가? 그 목표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는가? 목표가 성취될 때 그 원천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9. 그 사명이 성취될 수 있게끔 단계적 과정을 계획하는 현실적인 시간표.
10. 만약 때아닌 죽음을 맞게 된다면, 그 사람이 장례식이나 재산의 처분하는 방식에서 가족들에게 무엇을 원하겠는가? 물론 이것은 의지의 대용품은 아니지만, 이것을 인생 계획안에 포함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피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인생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당신의 사역을 측정할 만한 사명 글귀를 가지고 계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생육신하신 삶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분이 결코 우연같은 것에 의지해 살지 않으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하신 일들은 미리 준비된 사명에 따른 것이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로다” (마18:11). 그분의 행위 전반에 걸쳐 인생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결승점을 향한 비전 (A Vision fo the Finish Line)
어떤 사람이 극기를 추구하고 내면의 생활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바란다면, 이 마지막 훈련을 잘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10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를 마음에 그려 보라.
50세 생일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일기장을 펴고 인생 계획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앞으로 살 날이 30년 남았다는 가정 하에 평생을 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하심대로 내 30년을 간섭하실 방법을 찾으셨거나, 아니면 30년을 더 살진 못한다고 간단히 말씀하시기로 하셨다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분께서 다르게 말씀하실 때까지 나는 그 30년에 관하여 늘 생각하기로 했다.
그 30년의 마지막 10년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초점 없는 삶? 타인의 말에 끌려 다니는 삶? 오락에 빠진 삶? 아니면 생산성, 기민함, 성장으로 점철된 삶?
나는 바울이 로마에서 생을 마감할 때 그랬던 것처럼 내 안에 남은 모든 힘을 다하여 힘차게 테이프를 끊을 것이다.
끝맺음을 굳세게 : 나의 50대보다 70대에 더욱 성장하고, 더욱 많이 주고, 더욱 격려하는 것. 이 비전은 내게 영감을 주며, 일기장에 적어 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인생의 내면에 걸어 들어오셔서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고집하셨다. 그래서 순종했다. 주님과 나는 내면에서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릴 것이다. 매일 하는 그 여행은 때로는 고통스럽겠지만, 그건 나의 현실 세계의 믿음이 모루에 놓여져 망치질을 당한다는 뜻이다. 만들어져 나오는 그 모습을 나는 좋아한다. 30년 후, 다니엘이 훈련했던 모든 것도 포함하여, 극기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부 삶의 현장이라는 바깥쪽 현실 세계에서
개인적인 역사를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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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삶의 현장이라는 바깥쪽 현실 세계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분께 한 인간의 전부를 바쳐 형성된 선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왕국 건설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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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사람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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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에게 기본적인 질문들을 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믿음을 가르치는 곳은 어디인가? 교회이다. 누가 가르치는가? 성직에 임명된 성직자이다. 보통 믿음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신학적인 언어로 말해진다. 사람들은 생각들을 어떻게 나누는가? 강의실같은 곳에서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줄을 서서, 혹은 둥글게 앉아서 서로 정중한 말을 나눈다. 믿음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교회 안의 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것이고 교회 밖의 일은 드물다. 이것이 과연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벼려지는 믿음은 삶의 현장이라는 형태를 통한 생각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거리의 상황에 비추어 시험된다.
길들여진 교회는 ‘집안 사정’을 편드느라 세상에서 매일 일어나는 문제들과 그 안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교회는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 마련된 요나의 ‘특등실’을 생각나게 하는 장소가 되어 버린다. 요나는 거기서 후퇴와 부인의 잠을 잤다. 갑판 위에서는 흉포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위험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는 니느웨라는 거대한 도시가 포악한 가치 체제에 빠져 있었고 제국주의는 인접 국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요나는 누군가 무례하게 흔들어 깨울 때까지 조용한 장소에서 잠만 자고 있었다. 길들여진 그리스도의 제자도 우리 밖의 삶의 현실에 대항해 믿음을 재어 보라고 요구되지 않는다면 그저 ‘잠’만 자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조직들을 참신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들은 조금도 길들여져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노동자의 집안에서 나온 노동자이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감히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망치를 놓으시고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시작하셨을 때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다. 폭풍 한가운데에 놓인 배 안에서 서시고(물위를 걸으신 건 고사하고라도),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을 혼내시고, 로마 군인이 내리치는 채찍질의 고통을 우는소리 한 번 없이 받아들이신 것에서 알 수 있다 : 아주 거친 사람이었다. 로마 백부장과 성공적으로 도전을 주고, 까다로운 질문들로 공격해 오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들의 얼굴을 못 들게 만드는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더욱 잘 받아들여지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사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자로서의 모습이다. 내 생각엔 그가 여행할 때 일반 대중은 그를 아마도 장막 만드는 사람 바울로 먼저 알지 않았을까 싶다.
왜 우리는 시장에 앉아서 여행자들에게 맞춤 장막을 팔던 때의 바울은 고려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장막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들 - 가죽, 실, 막대기 등등 -을 가지고 도매상과 어려운 흥정을 하는 바울의 모습은 불러내지 않는 것일까?
바울은 자기의 작품을 보증할 수 있었을까? 그가 만든 장막이 새는 일은 없었을까? 그가 만든 제품을 반품하러 가져오는 사람은? 다소에서 온 이 유대인은 자신의 장막 일이 정당한 이윤을 남긴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일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일을 좋아하긴 한 것일까? 장막 만드는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바울은 자신의 제품을 자랑스러워했을가? 지중해 근방을 돌아 다니는 여행자들이 잠을 자는 장막 안, 솔기 사이 어딘가에 ‘다소의 바울이 제작했음’이라는 꼬리표가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우리의 믿음을 정립한 사람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깨끗한 옷을 입고 앉아서 하루 종일 신학이나 얘기하고 있는 멋진 이들의 모습으로 생각해 왔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수님이나 바울 모두 더러움의 실상, 굳어진 손, 완고한 사람들과의 대화, 애써서 얻은 것들의 만족만큼이나 사업의 반전에서 오는 실망을 알고 있었다.
길들여져 있지 않은 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먹고 살기 위해 반벌거숭이로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데 온 밤을 지새는 조그만 사업자들이었다. 마태는 세리, 시몬은 정치적 행동가였다. 이 점을 한 번 더 강조하도록 하자 :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아한 종교적 말들이나 내뱉은 수동적이고 물러서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세대의 가장 낮은 지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 낮은 지위 - 종교적 경계선 안에 있지 않은 - 에서 그들은 믿음을 활용했던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바로 현실 세계의 믿음이었다.
구약 성경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 지향적인 일들을 해 냈다. 그 일들은 종교적 환경이 아니라 현실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세는 이룬 일의 대부분을 바로의 왕궁 안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해냈다. 에스더는 왕의 궁전에서 해냈다. 느헤미야는 성전 건축에서 그러했다. 이 남녀들은 행정관, 학자, 건축자, 전사, 상인들이었다. 대개 그들은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활동적이기를 원하신 하나님에 기초를 두고 정의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들의 믿음의 언어는 거리의 언어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거리에서 끄집어내어 종교적 언어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일은 거리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상상력의 부족으로 이 남녀들을 거리에서 끄집어내어 (비유적으로 말해서) 신학자들이나 상시 종교적 일꾼들로 보이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고민하곤 했던 문제는 보통 거리의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들도 끄집어내어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짧게 말하면, 우리는 이 성경의 인물들을 실제보다 축소시킴으로써 길들이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영웅으로써 우러러보고 존경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또한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날의 고속도로 공사의 건설 인부거나 제조업자, 프렌차이즈 회사 경영자, 비서, 관리자 등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을 충분히 생각해 보는 적이 정말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나는 한 번 더 말하겠다 : 우리는 그들의 믿음이 현실 세계를 위한 믿음이었지 전문적인 종교의 제한된 환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가 거리의 언어로 선포되지 않을 때, 삶의 현장인 거리를 겨냥하지 않게 될 때,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라는 도전을 주지 못하게 될 때, 현실 세계의 믿음은 일어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길들여져서, 종교적 단체 안에서는 능숙하게 활동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신실하게 사는 법은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외부 세계를 참으면서 살게 된다 : 그들은 그 세계를 비판하는 쪽으로만 생각하며, 온갖 기회를 다 잡아 나쁘게 말한다. 그들은 외부의 요구에서 물러나며, 도전을 받아 경쟁하기도 거절하고, 가치를 더해 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받아들일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두 번째를 선택한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둘로 갈라진 생활 방식을 만들게 된다 : 하나는 교회에서나 교회 성도들과 만날 때에 필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무대에 있게 될 때 쓰는 생활 방식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 보지 않은 채로 이런 사람들을 쉽게 위선자라고 부른다. 몇몇 이중생활이 정말로 현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선생이나 설교자의 잘못이란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교회밖에 나가 사는 한 주의 95퍼센트에 적용시키는 방법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다는 것도 가능한 일인가?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고귀한 행위가 잠깐 켜졌다 꺼지고 마는 플래시 불이 아니라, 산 위에 있는 도시의 불꽃처럼 빛날 것을 확신케 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분은 방관자들로 “하나님의 생명은 저 사람의 행위나 성격 안에서 확실히 찾아볼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게끔 하는 행위를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의 폭발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항의 한 마디 않으시고 예루살렘 바깥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임을 믿는다. 목수의 생활에서 얻어지는 피로와 부상, 거친 일과를 알아 오신 분, 불같은 비난자들과 인간 요구의 극단을 모두 받으신 이 분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강건한 일을 해 내셨다.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분은 인류를 위해 생명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내가 묘사했던 것 같은 길들여진 인간이 아니셨다. 그리고 하신 일 - 한쪽에 같이 매달린 강도, 아래에 있는 적,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멀리서 낙담해 있는 친구들을 위해 생명을 주신 것 - 은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가슴속에 잠재한 고귀함을 해방시켜서 다시 한 번 그것이 플래시 불처럼 빛나고 산 위에 있는 도시의 불꽃처럼 지속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숟가락으로 먹여 주는 돌봄과 인공적인 보호를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은 아마 이 세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오해했다. 우리는 그 거친 친구들을 우리 생각 속에서 길들여 버린 거시이다. 언제나 그들은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그들이 우리를 보며 화내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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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에서의 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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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안에서 혹 ‘스타’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구약의 다니엘일 것이다. 현실 세계의 믿음의 소유자, 이교와 쾌락주의의 전형인 바벨론 같은 장소에서 살아남은 다니엘 말이다. 인생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인 삶의 현장에서 평일을 보내며 그가 그 세대에 쓸모 있는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격려가 된다. 이 책의 모델이 된 인물은 성직자나 기독교 전임 종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매일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똑같은 부류에 둘러싸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였다. 현실 세계의 믿음은 사람들이 집이나 직장, 학교에 있을 때, 혹은 즐기는 시간 등등 주중에 대부분 훈련된다는 것을 꾸준히 강조하고 싶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1. 하나님 중심의 시각 (A Kingdom Perspective)
적어도 세 번 다니엘은 자신이 우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것은 바벨론, 바사 왕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온 맘 다해 일하고 있는 분에 대해서 바꿀 수 없는 인식을 가진 한 젊은이의 몸으로 바벨론으로 왔다. 그것은 그 조상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와였다. 바벨론 궁 안에서 왕을 위해 하루를 일하는 동안, 그의 노력은 그의 하나님의 기쁨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 나라의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왕도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게끔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와 왕들에게 거리낌없이 하는 조언들은 다니엘이 그 왕들의 권력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를 정확히 보여준다.
후에 그는 왕에게, 그의 권위가 얼마 동안 쇠퇴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4:26).
벨사살 왕에게 그는 말한다.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을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5:23).
다니엘은 이 무뚝뚝하고 대적하는 말을, 그 자리에서 자신을 없앨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들에게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결코 어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 왕들의 왕좌보다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에 비하면 그 왕들은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다니엘이 가르치는 것은, 현실 세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평일에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견을 기준으로 모든 행위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의견이 불거지는 순간에는, 진정한 권세는 어느 쪽에 놓여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기억해야 한다.
2. 신중한 융통성 (Prudent Flexibility)
다니엘은 물러설 때와 맨주먹으로 달려들 때를 알고 있었다.
다니엘의 평일 생활을 읽고 또 읽어보면, 그는 자신이 일해야 하는 ‘체제’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니엘은 많은 ‘어두운’문제들, 언제나 기쁘지만은 않은 결정과 선택들을 마주하며 살았다. 확실히 그의 영혼이 이방인들의 방법들에 의해 커다랗게 공격당할 때가 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힘겹게 감수해야만 했다.
다니엘의 당연한 듯한 융통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을 일으킬 수 있다. 정당하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람은 어디까지 신념을 타협할 수 있는가? 사람은 부정과 위법행위, 무감각함을 만들어 낸 체제에서 분리되기 전에 얼마만큼 그것들을 눈감아 줄 수 있는가?
다니엘은 오직 행동으로써만 보여주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들은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단4:27)라는 말은, 자신의말이 들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 내부 사람인 다니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3. 명철과 슬기에 기반한 대화
(Communication Based on Wisdom and Tact)
다니엘은 특별한 통찰력의 원천을 가지고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했다.
“…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단2:14)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성가신 꿈과 관련된 위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 이 말을 읽을 수 있다. 명철, 곧 지혜와 슬기,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다니엘의 명철은 아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얻기를 찾아 헤맬 것이 틀림없는 존경스러운 자질이었다. 명철은 모든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아는 더욱 위대한 감각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달라고 기도했으며 또 받았다. 다니엘은 이것을 지니고 있었으며 잘 사용했다.
한편으로, 슬기는 명철이 생산해 내는 의사 소통의 능력이다. 이 단어는 다니엘이 시위대 장관 아리옥에게 해몽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그 계획을 바벨론이라는 문화 안에서 완전히 이해 될 수 있는 단어와 개념을 가지고 말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니엘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이나 설득에 소질이 있다. 우리는 중요한 점심 식사 모임과 권위적인 옷차림을 하는 것, 회의장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의 가치를 이해한다. 우리는 판매 발표회를 ‘끝내는’ 방법, 연설 첫머리에 특별한 농담을 집어 넣는 방법, 컴퓨터 그래픽을 할 때 좀더 사실적인 영상을 창출하는 방법 등 바람직한 것들을 배웠다. 그러나 슬기는 좀더 위대한 능력을 나타낸다 :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주의를 끄는 능력과, 자신이 알맞은 대답을 가지고 있음을 다른 이로 확신하게 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평일에 쓰여지는 믿음을 훈련하기 위해 현실 세계로 들어올 때, 그는 반드시 명철과 슬기가 함께 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한 간부를 돕고 단호한 솔직함으로 일해야만 하는 비서의 목표일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동기부여를 해야 하는 관리자의 목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단체를 만들어야만 하는 기술자의 목표일 것이다.
4. 겸손함 (Humility)
다니엘은 결코 자기 선전이나 광고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관들과 협의해야 할 경우가 생길 때 다니엘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누구도 제공하지 못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은사였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것들에서 권력을 추구한다거나 부를 축적하는 등의 이득을 챙기려고 하지 않았다. 왕들이 그의 능력을 인해서 그를 찬양하려고 할 때,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재빨리 그 영광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5. 지식 (Intelligence)
다니엘은 영리했다!
우리는 이 말들에 함축된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동해야 한다. 강조점은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지식과 명철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다니엘은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기독교 사회 안에서는 그리고 충분히 권장되고 있지 않은, 뇌를 그렇게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은 내게 참 고무적이다.
인생이 복잡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생각과 연결된 뇌를 가진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 세계 안에서 통찰력이 있는 건전한 결단을 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6. 성실함 (Integrity)
다니엘은 현금 관리 쪽에서도 신용을 얻었다.
현실 세계의 믿음은 그 목록에 성실함을 포함한다.
그들은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성실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다니엘을 찾은 것이다. 오늘날에 그런 사람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다니엘이 너무 거대한 권력을 가졌기에 제거하자고 그의 적들이 결정했을 때 그들은 한 치의 약점이라도 잡을까 하고 그의 생활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성실로 감싸인 사람을 패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7. 지도력 (Leadership Skill)
다니엘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다니엘의 프로그램 운영 능력 또한 명백하다. 그것이 새로운 왕의 관심을 끌때마다 다니엘은 무언가를 관리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은 단순한 관리 기술 이상이었다. 그것은 필요할 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을 바꾸게 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지도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책임을 맡고 있는 - 방향을 정하고, 알맞은 사람들을 뽑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공식적인 상황을 가정한다. 그러나 지도력은 영향을 주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머지않아 삶의 현장이라는 현실 세계 안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독특한 도전이 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우리 각자는 평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왕국의 영향을 행사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8. 충성심 (Loyalty)
다니엘은 신실하였다.
신실함은 왕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할 준비가 된 것을 의미했다. 왕의 행정기관의 주요한 각 국을 이끄는 일, 해몽하는 일, 벽에 쓰인 글씨에 대해서 현명한 조언을 하는 일, 정부의 체계를 믿음직하게 검사하는 일 등등이 포함되었다.
몇 세기가 지난 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중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다니엘은 이 말을, 누구에 비할 바 없이 거의 완벽하게 해 냈다. 그의 일은 현실 세계의 믿음으로 특징지워지며 그 결과로서, 모든 과제가 신성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네 명의 이방 왕을 섬긴 다니엘의 이야기는 정말로 감격스러운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는 말씀을 읽었다. 이야기의 끝으로 가면서 우리는 “이 다니엘이 다리오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게서 우리를 현실 세계로 인도하시고 평일에 삶의 현장에서 가치를 가지고 쓸 수 있는 믿음을 벼리라고 도전을 주실 때, 다니엘이 행한 방법이 아마 예수께서 정확히 마음에 두신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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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믿음으로 행하는 거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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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 거의 모두가 거대한 것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 인물들이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려 감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의 장엄함을 느끼게 되었고 경배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내면의 공허함이나 상실감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회개했다.
이 두 가지 경험은 그들이 어떻게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그 세대를 위해 뭔가 유용한 일들을 해 냈는가 하는 통찰력의 토대를 놓았다.
비록 그들이 세상의 우울함 - 인생의 어려움, 슬픔, 복잡함, 위험, 불공평함 등등 - 과 관련된 주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어두움에 빛을 비추고 변화시킬 기회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그만 역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결코 악명 높거나 부하거나 강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들은 (이런 말이 괜찮다면) 꿈에 의해 움직여졌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마음속에 불어넣어진 꿈,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에 의해 변화된다면 갱생된 창조물은 어떻게 보이게 될 것인가에 대한 꿈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작건 간에 상관없이,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변화와 회복의 꿈을 꾼다.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만연한 영이 파괴적인 영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거만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것처럼, 왕국의 꿈을 꾸는 사람은 이 아름다운 세상의 혼란을 두고 눈물을 흘린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도 세상을 사랑하며, 그 세상의 현재 자꾸 침체되어 가는 악순환에 대해 비평한다면, 그는 그 책임에 동참하려는 회개하는 비평가이다. 점점 썩어 가는 것들에 대한 그의 관점은 느헤미야의 기도와 비슷하다. 느헤미야는 황폐된 예루살렘 성의 비참한 상태를 듣고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라고 기도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 :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 : 우리는 성령의 힘주심의 은혜를 찾는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어디서 역사를 만들고 변화를 일으키며 우리가 처음 왔을 때보다 좀더 나은 결과를 내고 그것들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하루의 모든 순간 순간이 창조주의 관점 안에서 왕국을 함축하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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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에 초점을 맞추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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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내 친구는 사업의 성장을 억눌러서 사람들의 성장과 관계 있는 인생의 다른 사명을 감당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다.
내 친구는 많은 거래에 대부분은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그 친구의 세상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그가 묘사한 것과 같은 ‘거래’에 중독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저 한 번 더 이기고 싶어 못견뎌하기 때문에 돈은 주요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나의 친구가 현실 세계의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야기는 나를 분발시킨다. 그의 인생 계획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우선권을 알고 있다. 그의 결단은 극기, 다른 사람이 ‘네’라고 할 때 전략적인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 준다.
또 언젠가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최근에 있었던 회의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것은 사업과 정부 관련 일에 대해 전략적인 장기간의 계획을 세우는 데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조언자인 어떤 사람과 함께 연 것이었다. 그 조언의 목적은 내 친구의 사업 활동 계획과 관계가 있었다.
“우리는 내 회사의 모든 면면들을 조사한 다음 나의 인생 계획을 상세히 보았네.” 그는 그 모임의 흐름을 묘사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후에 그의 종이를 한 장 집어 한가운데에 상자를 하나 그리더군.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당신 말씀을 두 시간 가량 잘 들어 보았습니다 : 그건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요약이 되는군요. 그리스도인가 이익인가 :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 인생 계획의 그리스도인가 이익인가. 당신의 전체적인 장기 계획은 그 상자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이익 중,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를 말씀해 주시면 저는 당신의 미래를 어떻게 계획할 것인지 정확히 말씀드리죠.”
내 생각엔 이 친구는 속의 약간의 ‘다니엘’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더 높은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물질적, 영적 자신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임을, 그리고 그것들이 적절히 관리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조심스레 심사숙고되고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 의해 평가된 인생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장하고 끝맺음을 확실히 하고픈 갈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현실 세계의 믿음을 벼리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몇몇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왕국 용어로서 자신들이 한 일의 가치를 보는 데 힘들어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직업에서 일할 수도 있었던 것을, 지금 이 직업에 종사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느낀다.
나는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방법을 장려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 질문들은 트램웨이 카페의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 많이 논의되었기에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부르겠다.
트램웨이 질문들 (The Tramway Questions)
1. 당신은 과거의 경험들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섭리에 따라 당신의 인생(교육, 학습 경험, 전문 기술, 성공과 실패)에 맡겨 주신 과거의 경험이나 선천적인 은사는 무엇이며, 이것들이 당신이 일하는 장소에서 어떻게 인생의 질을 높여 주는데 전략적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인생의 모든 것이 어떻게 당신이 오늘 행하고 또 앞으로 올 날들에 행할 왕국에의 공헌을 위해 전략적으로 준비되었는가를 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2. 당신은 자산인가 빚인가?
당신이 일하는 곳에서 고용인의 관심에 가치를 더해 주는 일이 닥칠 때,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당신의 고용인은 당신을 사업에 필요한 확실한 자산으로 보고 있는가? 그리하여 당신은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젖혀 두고도 주는 보수를 받는 데 합당한 (어쩌면 그것보다 더한) 사람인가?
3. 당신은 일과를 관리하고 있는가?
당신의 현 직업 상황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새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즉, 만약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책상 앞에 앉으시고 일과를 처리하시며 물품을 파시고 편지를 타이프치시고 일에 도움을 주신다면, 그 분위기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대의는 무엇이겠는가? 당신이 있어서 그 회사는 일하기에 더 좋은 장소가 되는가?
4. 당신이 준비하고 있는 사안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 어떤 것인지 잘 인식하고 있는가?
독립적이건 다른 이들과 협력하건 간에 당신이 불려 가서 만들거나 영향을 끼치게 될, 당신의 회사가 미래에 채택하게 될 방향에 현저한 차이를 만들게 될 중요한 결단은 무엇인가? 당신은 당신의 경력과 개인적인 안전까지도 걸게 될지 모를 훌륭한 문제를 식별할 수 있는가?
5. 당신은 기독인적인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자리에 있는가?
당신이 동료들과 사업 관계 친구들 사이에서 식별하고 ‘전도’해야 할 가치관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무엇인지 목록을 써 보기 위해 시간을 들인 적이 있는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을 위해 고려 해 보고 있는 가치들을 읽거나 연구하고 있는가? 당신은 직장에서 중요한 가치관들이 깨어졌을 때 깨어 있는가? 당신은 일이 닥칠 때 반응만 하는 수동적인 일꾼이 될 것인가, 현명하고 순향적인, ‘결과’보다 높은 가치들을 강조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6. 중요한 관계에 있어 당신의 영향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중요한 관계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당신의 현실적인 소망과 목표는 무엇인가? 당신보다 우월한 사람, 동료, 부하직원, 고객, 전문적인 동료들, 주주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삶의 차원이 당신과의 교제로 하여 넓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까지라도) 당신이 키우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이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격려하고 있는 사람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조언하고 있는 사람은? 당신과 동행할 기회를 잡음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조금이라도 나아 오고 있는가?
7. 당신은 권력과 성공을 어떻게 다루는가?
당신은 경의를 표하는 것을 어떻게 연습하고 있으며, 비교적 힘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 어떻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겨지고 있다면, 그 명성과 권력, 영향력을 어떻게 관리하겠는가? 당신이 ‘거물’이라면 ‘소시민’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다른 이들의 삶에 미치는 그 ‘영향력’에 감사하고 당신보다 더 위대한 것들에 관심이 모아질 수 있게끔 그것을 사용할 것인가?
8. 당신은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가?
당신은 일하는 패턴과 우선 순위가 다른 부분 - 가정 안에서의 중요한 관계, 개인적인 성장과 발전, 안식일, 기독교 사회 - 과의 합리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은 결과가 다음의 예수님에 대해 말한 성경 말씀과 비슷한 인생 계획(사업 계획을 넘어선)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9. 당신의 영적 훈련은 어떤 모습인가?
당신은 내면 공간을 관찰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어떻게 규칙적으로 관여하는가? 하나님께서 경고와 질책, 긍정, 안내의 메시지를 주실 때 당신은 그 신호를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시간표를 개방해 놓아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방문하실 수 있게끔 내면세계에 질서를 잡는데 적절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10. 개인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 당신은 누구에게 도움을 주어 보았는가?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완전히 열린 마음과 솔직함으로 사귀는, 귀기울여 들을 만한, 하는 대답이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그런 동성 친구가 두세 명 있는가? 당신에게 생활이 불균형하고 위치와 소유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혹은 하나님과 당신과의 관계가 걱정스럽다고 말해줄 수 있는 ‘밀고자들’은 누구인가?
11. 당신은 훈련된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당신의 노동과 소득, 그 결과로서의 소유, 오락 등의 열매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끊임없는 물질적 확장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가? 혹은 지위의 ‘하강 이동’과 관용의 상향 이동의 규율을 습득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돈, 영향력, 기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과 모든 것의 사용한 기록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평가되는 날가지 조심스럽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엄격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12. 당신의 현실 세계의 믿음이 다른 이들을 제자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는가?
매일 당신과 함께 일함으로써 영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은 동료들과 진정한 관계를 발전시켜서 그리스도에 관한 대화가 자연스런 화제로 떠오르도록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당신의 생활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만들 만한 독특한 면이 있는가?
13. 쿠오 바디스 :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은 의무와 사명, 행위의 기준, 당신의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을 모두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인생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서 가기를 원하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하여 당신의 목표가 직업보다 더 커질 수 있는 곳을 아는가? 만약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당신은 언제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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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해낸다는 것에 대한 몇 가지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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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그리스도를 닮는 성장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이 흥미 없이 이기주의적 목표들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일을 하게끔 스스로를 재촉하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육신, 기술, 소유, 금전)이 내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내게 관대하셨으므로 나도 그분과 다른 이들에게 그 응답으로 관대해야 한다.
믿음은 본래 전혀 이렇게 의도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다. 생색을 내거나 우월감에 도취된 슬픔이 아니라,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라는 책임감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는 슬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소망이다. 매일 나는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창조물과 인간을 남기는 조그만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소망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임무를 완수하실 것이라는 소망이다.
다니엘에게
한 그리스도의 제자로부터
한 대장장이가 다른 대장장이에게 보내는 몇 가지 생각들
다니엘, 수십 년간 놀라운 왕국 생활을 보여주신 것에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장대한 관점을 주고 건전한 신학을 가짐으로써 만드는 변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무시무시한 갈등 (규율, 기도 생활, 당신도 본질적으로 죄인이란 사실에 대한 인식)의 나날이었음을 솔직하게 알려 주신 것도 고마워요. 당신이 고백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당신이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아내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대단히 어려운 환경 하에서 놀라운 일을 해 내신 것에 대해 한 번 더 감사합니다 : 압력을 다루었던 방법, 들을 필요가 있는 어려운 말들을 꺼냈던 방법, 개인적인 생활을 흠 없이 지켜 나간 방법, 사람들이 당신을 제거하려고 시도할 때 맞서 싸우지 않은 방법 등등. 어두운 시대에 빛을 비추는 방법을 보여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니엘, 현실 세계의 믿음이 이젠 좀더 이해가 됩니다. 당신이 그 활용 방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면에서 적절하게, 우리가 사는 세상만큼이나 거칠게 그 일을 해 냈습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현실 세계의 세 가지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다. 천국의 기준으로 볼 때 아마 그 사람들 중에 참으로 위대한 이들은, 세상에 보통 알려져 있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들은 종교 잡지를 장식하지도 않을 것이고, 잔치 자리에 초대되지도, 명예로운 상을 받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도시와 시골에서 어머니, 관리자, 세일즈맨, 세탁소 주인, 정부 기관 사람, 농부, 간호원 등등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면서 조용히 살게 될 것이다.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군인 사관이 될 사람들도 있다. 유모, 뉴스 아나운서, 사회사업 종사자, 교사의 역할에 기뻐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저 지켜보는 방관자들은 가끔씩 그들의 하찮게 보이는 모습을 비웃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국의 한 부분이 그들이 있는 곳에서 세워지고 있음을 아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현실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3세기에 성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도나투스, 이 아름다운 정원의 포도나무 그늘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유쾌하게 보인다네. 하지만 내가 높은 산들을 몇 개 넘어 저 거친 땅을 바라본다면, 자네도 내가 무엇을 볼지 잘 알 걸세. 길에서 만나는 강도들, 바다의 해적들, 원형극장에서는 열광하는 관객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지붕 아래선 비참함과 이기주의…정말 고약한 세상이네, 도나투스, 믿기지 않을 만큼 고약한 세상이야.
하지만 그 가운데서 나는 고요하고 거룩한 사람들을 찾았네. 그들은 이 죄악된 인생에서 누렸던 어떤 기쁨보다 천 배는 더 나은 기쁨을 발견했네. 그들은 무시당하고 핍박당하지만 상관하지 않지. 그들은 세상을 이겼네. 이 사람들은, 도나투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네…그리고 나도 그들 중 하나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