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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추억 열한 번째 - 손으로 빚어낸 어머님의 사랑, 손칼국수 / 최지인 |
풍성한 억새의 머릿결을 빗어 내리던 바람이 도시로 옮겨 앉으면서 미처 겨울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의 몸짓이 바빠진다. 살갗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민 어깨엔 절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두꺼운 겨울옷을 꺼내 입기엔 왠지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있고 그렇다고 얇은 옷을 고수하기에는 감기란 침입자가 무섭다. 목덜미에 와 닿는 서늘함을 따뜻하게 데워 줄 뭔가가 그립다. 이럴 때 문득 시야로 들어오는 손칼국수 간판은 어머님의 마음인양 단박에 마음속으로 뛰어 들어 저절로 걸음을 옮기게 한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허연 수증기를 배경으로 진득하게 우러나던 어머님의 사랑, 그 얼큰한 손칼국수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행복한 맛의 고백이기도 하다.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풀어서 진하고 얼큰한 맛이든, 해물을 넣고 끓인 맑고 시원한 맛이든 한 그릇만 있어도 머리를 맞대고 함께 먹을 수 있는 서민들의 대표적인 음식 칼국수! 20kg정도의 쌀 포대 크기랄까. 지금처럼 패스트푸드가 나오기 전인 그 시절엔 밀가루도 커다란 포대로 사놓고 먹었다. 요즘이야 칼국수는 가끔 먹는 별식으로 치부돼 어쩌다 한번 찾게 되는 음식이지만 어린 시절 칼국수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때문에 지금의 쌀20kg정도의 크기의 밀가루 포대를 마루 한켠에 세워두고 수시로 칼국수를 밀어서 점심으로 해결해야 했다. 칼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선 참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다리를 접은 둥그런 상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그 위에 콩가루를 조금 섞은 밀가루 반죽을 아주 오래도록 치대고 또 치대어 힘들게 반죽하시던 어머님 모습이 생각나는지! 오래 치댈수록 끈기가 생겨 쫄깃쫄깃해지던 면발은 미술시간의 점토처럼 아무나 쉽게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집이나 하나씩 있던 길고 두툼한 홍두깨는 잘 반죽된 밀가루 위에서 어머님 손에 의해 마치 요술을 부리듯이 쓱쓱 삭삭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마른 밀가루를 설설 뿌려가면서 죽죽 밀어 홍두깨에 돌돌 감았다가 다시 풀어 밀기를 되풀이하다보면 어느새 그 두툼하던 반죽은 얇고 넓은, 동그란 종이처럼 되었다.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손놀림도 빠르게 싹싹 썰어 면발을 만드시면서 십중팔구는 한석봉 얘기도 오갔을 터인데. 그러고 보면 예전 우리의 모든 어머님들은 한석봉의 어머님 버금가는 훌륭한 스승님이자 예술가이셨던 셈이다. 평소엔 살기 바빠 마음뿐 표현하지 못하셨던 자식사랑을 앞뒤로 흔드는 홍두깨질에 알알이 박아 넣으시고, 온 옷은 물론 방안 가득 곳곳에 허연 밀가루를 깔아서 멋진 행위예술까지 보여주셨으니까 말이다. 저러다 혹여라도 밀가루 반죽이 찢어지지는 않을까, 나중에 끓이면 풀처럼 다 풀어지거나 뚝뚝 끊어지지는 않을지...옆에서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고 있으면 끊임없이 심부름은 왜 그리 많이도 시키시던지. 반죽 위에 뿌릴 밀가루 좀 더 가져와라, 물 한 대접만 더 떠와라, 제일 잘 드는 큰 칼과 도마 가져와라, 칼국수 썰어 담을 큰 그릇 가져와라..등 끝없는 주문이 이어졌지만 귀찮은 건 잠시, 그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한다는 자체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보다가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접은 반죽을 날카롭게 날이 선 칼로 쓱쓱 자르는 순간 형제끼리 양쪽에 버티고 앉아 각각 밀가루 반죽의 끝부분 하나씩을 차지하기 위한 오랜 기다림도 보상을 받았다. 지금엔 줘도 안 먹을 단순한 밀가루 반죽 끝동에 불과한데 부엌 장작불에 얹어 바삭바삭하게 구워먹으면 어찌 그리도 고소하던지. 다시마와 멸치로 구수하게 우려낸 물에 감자 몇 개 툭툭 썰어 넣고 기다란 나무 주걱을 휘휘 저어가며 흔들어 털듯이 집어넣던 면발. 손잡이가 긴 나무주걱으로 솥 안을 휘휘 젓는 어머님의 얼굴이 수증기 사이로 보이다 사라지다가를 반복하면 따끈따끈한 부뚜막에 앉은 동심은 미리 몇 그릇의 입맛을 당겼다. 천장 깊숙이 자리했던 커다란 뚝배기 그릇이 모처럼 세상 구경을 하고 안개인 듯 뽀얀 훈김 속에 어머님의 푸근한 사랑이 그릇으로 옮겨진다. 살짝 데친 애호박도 듬뿍 얹고, 간장에 고춧가루, 마늘, 청양고추까지 송송 다져 넣은 맵싸한 양념장도 한 숟갈 푹 떠 얹고, 사정이 허락할 땐 고명으로 다져서 볶은 고기도 아낌없이 섞으면 허리띠부터 끌러 놓던 그 행복한 도취감을 어디에 비견할까.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 깨끗하게 비워낸 뒤 두 세 번은 기본으로 다시 청하던 그때, 갓 새로 버무린 배추겉절이와의 맛의 조화 역시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다. 비올 때면 더 생각나는 게 칼국수다. 시대적으로 살기에 바빴던 우리 시대 어머님들이기에 비오는 날 만큼은 자식 사랑이 더 두터워졌었고 결국 그 사랑의 크기만큼 비오는 날이면 자녀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주셨던 건 아닐지. 요즘은 칼국수의 요리법도 너무나 다양하다. 깨를 넣은 영양만점 깨칼국수를 비롯, 밀가루수제비, 새알수제비, 팥죽칼국수, 해물칼국수, 호박이나 당근, 녹차를 활용한 참살이(웰빙) 칼국수(수제비)까지..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색채적인 감각을 잘 살린다면 우리 부산을 찾는 해외관광객들에게도 신선하고 인상적인 맛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글 · 최지인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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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맛닌글 잘 읽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