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몇 차례 백제의 고도인 부여를 찾게 된다. 부여에 이르면 먼저 박물관을 거쳐서 읍남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을 찾는다. 이 탑은 지표에 남은 백제 유일의 건조물인데, 1300년이 지난 오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들판에 홀로 세워진 전매청과 공장 사이에 끼여서 경관이 일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옛날의 인상을 찾기 위하여 이 탑을 대하는 새로운 지점을 찾아야만 한다.
이같이 사정은 서울 남대문의 경우와도 같은데, 이것 또한 수난의 하나라고 느껴진다. 일찍이 나당 연한군에 의하여 나라의 생명이 다할 때 이 석탑 또한 운명을 같이하여 그 몸에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제탑'이라 자타가 부르게 되었는데, 금세기에 들어서는 외국 학자에 의하여서도 당인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이같은 오인은 그후 얼마 아니하여 시정되었는데, 핸방 직후에 발간된 최초의 우리 미술사에서 다시 당장 소정방의 건립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해방 수년이 되던 어느날 문교부에서 열린 고적 관계 모임에서 왜색 일소의 주장이 과열하였던 탓인지, 바로 이 백제탑을 헐어 치워야 한다고 책상을 치던 어느 백제 유민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다. 이 탑이 국치의 표본이니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 탑이야말로 우리 옛 건축의 전통을 오늘에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국보라고 생각한다.
이 탑은 화강석을 소재삼아 이룩되었기에 거친 풍토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나 그 자체가 당시의 목조 건축의 수법을 따르고 있어 더 한층 귀중하게 느껴진다.
첫째, 단층의 기단을 갖고 있는데 그 갑석의 길이가 약10척으로서 탑신 폭보다 좌우로 한 자가 나왔을 뿐이며, 초층의 기둥 높이 5척에 대하여 기단의 높이 3척이어서 기단은 매우 낮고 탑신의 방대함이 곧 건축의 기단 관계를 나타내었다.
둘째로, 각 층 탑신을 이루는 네 기둥은 모두 각형인데, 그곳에 상협하활(上狹下 )의 에터시스(배흘림)의 수법이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다. 이같은 각주는 백제의 방형 초석이나 또는 해방후 새로 발견된 백제의 금동 공예탑 등에서 유행했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곳에 나타난 엔터시스의 수법은 그후 길이 계승되어서 우리 건축미와 그 특색의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이같은 수법은 멀리 그리이스 건축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달되어서는 특히 목조 건축의에 계승되어 우리 건축미의 중요 요점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있어서는 일찍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종류의 건물에서나 이 수법을 찾을 수가 있다.
이같은 수법은 무엇보다 시각을 바로잡아 건물의 중압감을 없애고 경쾌한 인상을 주는 동시에 특히 우계(隅桂)에서는 건물 중심을 향하는 내전(안쏠림)의 짜임새를 느끼게 하여 준다. 이같은 엔터시스의 수법은 지붕 곡선과 더불어 건물의 위와 아래에서 서로 작용하여서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이루고 있다.
오늘 태백산 부석사에서 전래하는 최고의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에서 열계(列桂)에 뚜렷하게 나타난 이 수법으로 말미암아 오간삼간의 큰 건물이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경쾌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같은 기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같은 엔터시스의 가장 오랜 모습을 이 탑이 지니고 있는 것은 그 오랜 전통의 줄거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석탑에서 가장 주목되는 특색은 그 지붕에 있다. 지붕이 넓고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첨단은 수평으로 뻗어 있는데 거의 전장의 10분의 1이 되는 곳에서 가볍게 반전을 나타내서 강력한 장력을 보이고 있다. 이것 또한 목조의 건축의 실제를 따르던 수법인데, 이와같은, 네 귀에 이르러서의 반전은 신라 석탑이 직선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다른 특색으로서 두 나라 석탑이 각기 양식계통을 달리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도 목조 건축은 특히 백제에서 발달된 사실을 짐작케 하여 주는데, 이것은 신라가 황용사대탑을 세우기 위하여 백제의 아버지를 초빙한 사실이나 일본이 최초의 사원인 비조사(법흥사)를 세우기 위하여 백제의 공인을 부른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이같은 백제의 지붕 곡선은 그후 우리 건축의 하나의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이 지붕은 모든 중국 건축계의 생명을 이루는 것인데, 우리의 것이 중국의 것과 같이 창천을 꿰뚫으려는 위세적인 곡선이 아니요, 또 일본의 것과 같이 성벽적 직선도 아니다. 그것은 온화하고 세련되었으며 유유하면서도 긴장된 곡선이다. 이같은 곡선은 궁전이나 불사 같은 권위 건물에서 민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통 수법으로 이어내려온 것인바, 그 연원은 멀리 삼국 시대에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지붕 곡선을 이루기 위하여 부채살 모양의 서까래 가구 방식이 계승되었는데, 이것 또한 삼국 이래의 오랜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끝으로 이 탑에서 또 하나의 특색이라 할 것은 석재조립의 방식인데, 소재 정리의 규율성은 그 외관에서 율동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등차급수적인 각층의 감축도가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이라 일컫는 일본의 법륭사 당탑과도 서로 닮은 점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 탑은 오늘 사지에 고립하고 있어 옛날 가람(伽籃)과의 관계를 하나도 볼 수는 없다.
우리의 고대 건축은 대소각별의 단위 건물이 각기 자리에서 서로 연결됨으로써 하나의 궁궐, 사원, 민가 등의 집성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란 이와 같은 유기적 관련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나아가 우리 건축이 그 시초부터 깊은 관계를 맺었던 자연적 경관을 떠나서는 다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자연적 조건과 인공이 서로 조화되고 융합된 곳에서 우리 건축의 전통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바 그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이 오늘 몇 곳이나 될 것인가. 태백산 부석사의 고려 건물들은 아마도 그 대표가 될 만하다.
<佛敎와 美術/黃壽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