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산군도
군산은 금강의 하구에 자리잡은 중소도시로 황해와 면하고 있는 항구도시이며 대규모 공단을 보유한 공업도시이고 배후의 넓은 옥구평야에서는 질좋은 쌀을 생산하는 농촌형 도시일 뿐만 아니라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63개의 섬과 그 섬에서 살고 있는 섬사람을 시민으로 삼고 있는 복잡한 성격의 도농형통합도시이다. 63개의 섬중에서 개야도, 죽도, 연도, 어청도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 비안도, 두리도라는 16개의 섬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섬들의 명칭에서는 천년의 역사와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들 섬들은 여러차례 행정구역의 변천을 거치면서 이웃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 속했던 적도 있었고 자치단체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어청도, 연도, 개야도, 죽도는 현재 충남의 보령시 관할에서 옥구(군산)로 편입되었고, 전남 신안군과 전북 김제시에 속했던 선유도, 신시도, 장자도, 비안도, 대장도, 야미도, 관리도, 말도, 두리도가 옥구(군산)로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군산지방의 지명도 이들 섬과 연관이 있는데 마서량현(백제) ⇒ 옥구현(신라․고려) ⇒ 진포(조선초) ⇒ 군산창(조선말) ⇒ 옥구부(대한제국) ⇒ 군산부(일제시대초) ⇒ 군산시․옥구군(정부수립후) ⇒ 군산시(1995년)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옥구라는 지명은 옥야다구(沃野多溝-들판이 기름지고 도랑이 많아 비옥한 땅이라는 뜻)라는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전해지며 군산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고군산군도 선유도에 고려시대때 수군진영을 두어 군산진(群山鎭)이라 하였는데 조선조 세종때에 진영을 옮길 때 지명까지 옮겨져 현재의 군산이라는 지명이 되었고 기존의 군산에는 옛고(古)자를 붙여 고군산이라 하였으니 현재의 고군산군도의 지명이 되었다.
한편 이들 섬들은 육지와의 거리가 최단 5킬로미터에서 최고 72킬로미터나 떨어진 절해고도가 있고 유인도에서 가장 큰 섬은 신시도로 그 면적이 4.25평방킬로미터이며 가장 작은 섬은 선유도 옆에 있는 아름다운 섬 장자도로 0.11평방킬로미터이다. 63개섬 전체의 면적은 군산시 전체면적 376.355평방킬로미터의 9.8%인 37.104평방킬로미터에 그치지만 그러나 「바다는 자원의 보고」라는 말처럼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면적으로는 오히려 육지보다 훨씬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선유도
수정같이 맑은 물, 곱다 못해 눈이 부시기까지 하는 모래밭, 바위섬에 부딛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사이로 아름아름 유서와 전설이 배어있는 고군산군도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길이 1.2킬로미터 폭 50미터 규모의 명사십리 모래밭을 가진 서해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주변의 경관은 신선이 감탄하며 즐겁게 놀 정도라고 할 만하다.
선유도는 행정편의상 1, 2, 3구로 구분하고 있으나 실제 지명은 지형과 연관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선유도 북단에 해발 100여m의 선유봉이 있는데 그 정상의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선유도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선유도의 수군 절제사가 진을 치고 있었던 진말(본 마을)이 있으며 통정대부까지 벼슬한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통리(일명:통개)라 부르며 주민들이 촌락을 새로 형성했다하여 샛터라하고, 본마을과 밭을 사이에 두고 있다하여 밭너머를 한문으로 전월리(田越里)라 부른다. 남쪽의 산밑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남악리(南岳里)라 부르고 있는 등 총 5개의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선유도 주위를 둘러싼 무인도로는 쑥섬(일명 닭섬), 앞삼섬(3개의 섬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장구삼섬(장구모양으로 생긴 섬이라고 해서), 쥐삼섬(쥐가 기어가는 모습)등이 있으며, 이중 장구삼섬은 선유도의 바로 앞에 있는 무녀도의 무녀봉과 한쌍이 되어 무당이 춤을 추고 장구치는 모습의 형상을하고 있다고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다.
선유도는 본래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리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려․송무역로(麗․宋貿易路)의 기항지(寄港地)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군산도(현 선유도)에 수군진영이 창설되었고 세종초기에는 이곳의 군산진이 옥구현 북쪽 진포로 이동하면서 '군산'이란 명칭까지 옮겨 가므로써 이곳을 '고군산도'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수군제도의 변천에 따라 이곳의 수군진은 존폐를 반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선조 2년(1569)에는 이곳에 수군절제사를 두어 인접한 8개군을 관할케 한 일이 있었고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잠시 육지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선조 33년(1600)에는 이곳에 감사를 두어 수군절제사가 통할 당시의 동일지역을 관할케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인조 2년(1624)에는 별장진을 두었고, 숙종 원년-9년(1675~1683)에는 고군산진을 각각 신설하기도 하였다.
진말동산에는 당시의 동헌건물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1932년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고 그 유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선유도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첩을 거두고 이곳 고군산도에 찾아와 열하루동안(1597 9.21~10.3) 머물면서 명량해전의 승첩을 조정에 보고하기 위한 장계를 초안하여 서울로 보냈고, 왜란 중에 아산 본댁이 왜적들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 등 충무공의 통한이 서린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의 수군진터에서 동편 건너, 망주봉 아래에 있는 오룡묘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제신당으로서 그 옛날에는 이곳에 기항하는 항해선들도 해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처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선유도는 연안해로의 거점이요 관방의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관도 빼어나서 고군산 팔경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으니 과연 신선이 노닐만한 선경인 것이다.
▣ 장자도
바다에서 조업을 하다가 태풍이나 폭풍을 만났을 때 장자도로 피신하면 안전하다는 안온한 섬으로 선유도와 연결된 길이 268미터 폭 3미터 높이 30미터의 장자교에서 바라보는 주변 섬의 모습은 가히 선경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아침안개속에서 봉긋봉긋 솟아나는 이웃 섬들은 숨이 막힐 정도의 충격적인 아름다움과 환상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장자도는 원래 가재미, 장재미를 합하여 통칭 장자도라 부르고 있다. 마을 서쪽 바닷가에 우뚝하게 솟은 사자모양의 바위가 있어 '사자바위(일명 장자할머니바위)'라 부르는데 이사자 바위는 서해를 바라보는 형태를 하고 있어 먼 바다로부터 오는 동네 액운을 막아주는 파수역할을 하고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장자할머니바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장자섬에 선비 한사람이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살았는데 어느해 서울로 과거를 보러 선비가 떠나자 그 부인이 매일 산에 올라가 남편의 금의환향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남편이 장원급제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을 등에 업은채 산마루로 달려올라가 남편이 타고오는 배가 빨리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남편이 나타났지만 그 남편은 등과도 하지 못하고 그간 새부인을 맞아 아들까지 낳아서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크게 상심하여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고 있던 아기가 힘을 쓰는 바람에 선채로 돌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은 장자할머니바위에 줄이나 흰천이 둘러져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 무녀도
고군산군도의 중심부에 자리한 섬으로 마치 무당이 제당에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모양이어서 이름이 되었으며 김과 멸치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주변의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등과 다리로 연결되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며 지역은 넓으나 높은 산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1950년대 초에 조성된 16만평의 간척지는 이 섬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읽을 수 있다.
무녀도는 비교적 낮은산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무녀봉이 하나 있을 뿐 지역은 넓어도 높은 산이 없는 것도 또한 특징이다. 무녀도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고려말경 이씨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무녀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무녀봉앞에 장구모양의 섬과 그 옆에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붙어 있어 이 전체를 보면 무당이 제당에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모양이라고 하여 무녀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서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는 바쁜 일손을 놀려 서둘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렵다는 즉 부지런히 서둘러야 살 수 있다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군산도에서는 김을 가장 많이 생산하다시피하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지런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섬이므로 '서들이'란 옛지명도 선견지명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도 갖게된다.
무녀1구의 남쪽에 있는 산구릉에 패총이 형성되어 있으며 혼토 패각층과 순수 패각층이 층을 이루며 2m 내외두께로 퇴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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