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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엽 3집『은하수』발표 직전에 기타리스트 김광석을 만났습니다. 대학로의 모 연극에서 음악을 맡고 계셨던 터라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저의 지인이 마침 그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고, 그렇게 퍼뜩 마주쳤던 겁니다. 인연이다 싶어 재빨리 지인을 통해 김광석님을 섭외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연륜 깊은 뮤지션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설렙니다. 저의 게으름으로 인터뷰 공개가 늦어져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멋진 철학을 만나보세요.
즉석 라이브 음악도 들을 수 있답니다.
일시: 2008년 11월 19일
장소: 대학로 민들레 영토 본관
진행: 전자인형, 헤비죠, 호떡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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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은 목동 아파트 팔아서 만들었고, 2집은 신림동 아파트 팔아서 만들었고.
헤비죠(이하 ‘헤’): 2집『비밀』리뷰를 제가 나왔을 당시에 썼구요, 그걸 보고 호떡이 CD를 샀어요.
김광석(이하 ‘김’): 그거 집 한 채 들어간 거예요. ‘거지되자’
작정하고 만들었어요. 첫 앨범에 이어서 두 번째로 거지 된 거죠. 그때 아예 녹음실을 만들었어요. 근데 엔지니어까지 겸하면서 할 수가 없겠더라구. 그래서 거기서 녹음한 건 딱 2곡 밖에 없어요. 아무튼 1번 CD 녹음도 다 못 끝냈는데 예상했던 제작비 3000만원이 다 날아갔어요. 스물 몇 프로(‘1프로’는 스튜디오 녹음작업 3시간 30분이다.) 했는데. 세션비 나가고 하니까. 내가 우리 집 식구들한테 공공의 적이에요. 나 때문에 잘 될 수가 없어요. 이런 짓 안 했으면 아파트가 몇 채일 텐데. 1집은 목동 아파트 팔아서 만들었고, 2집은 신림동 아파트 팔아서 만들었고.
전자인형(이하 ‘전’): 자녀분들은 아버지의 뮤지션십을 지지하나요?
김: 2집 만들 때 애들이 고등학교 다녔는데,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애들한테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요. 저는 고소득자였어요. 제가 우리나라 스튜디오 세션맨들 중에 모든 악기를 통틀어서 14번째로 수입이 많았어요. 옛날 세션맨들 지금 다 골프 치러 다니는데 저만……
헤: 90년대 초반까지 아무 앨범이나 딱 열어보면 ‘기타: 김광석’ 이렇게 쓰여 있어요.
김: 요즘도 세션 해요. 제 능력은 옛날보다 더 업그레이드 돼 있죠.
헤: 이제는 세션이라기보다 음악감독 수준으로 하시잖아요.
김: 음악감독은 재미없어요. 전체를 지휘하는 입장에 서는 게 맞지 않아요.
(인터뷰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음취는 원래 이런 식으로 수다 떠는 인터뷰를 지향한다,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어? 호떡과 헤비죠가 가진 2집 케이스가 조금 다르다, 초판과 재판의 차이다, 제작비 엄청 많이 들었다, 그런데 초판은 호떡이 가진 거다! 술술술~ 다시 2집 얘기로~)
김: 제가 ‘비타(쉽게 설명해서 비파와 기타를 합쳐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란 악기를 만들었잖아요. 명주실 쓰는. 2집「파동」에서 들리는 소리에요. 지금 녹음작업 들어가려고 하는 게, ‘김광석류 비타 산조’라고 국악기하고만 협주하는 거예요. 상업적인 개념은 없는 거지.「파동」을 다시 한 번 할 거예요. 록 블루스도 할 건데, 이를테면 1집의「애증」같은 것들. 사람들이 그걸 듣고 게리 무어(Gary Moore)라고 자꾸 그러는데, 저는 인정 못 해요. 우리나라 성인가요 코드 진행이 다 그거예요. 애드립만 자연 단음계(단조가 ‘라’부터 시작한다는 건 아실 거다. 라시도레미파솔라~ 이렇게. 그냥 시와 도, 미와 파 사이가 반음일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이게 자연단음계다. 여기에서 솔에 #을 붙여주면 화성 단음계라 부른다.)에요. 그걸 게리 무어라고 하는데, 게리 무어가 우리나라 정서랑 비슷할 뿐이에요. 노래를 부르면 가만히 있는데 기타만 치면 게리 무어라고 하니. 그래서 아예 10곡을 만들려고. 또 클래식 명곡이나 올드 팝을 통기타로 혼자서 아니면 둘이서 칠 계획도 갖고 있어요. 세션맨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전: 얼마 전에 동영상 하나를 봤는데, 함춘호씨와「Over The Rainbow」같이 하시더라구요. 그런 컨셉인가요?
김: 아유, 그거 소리 개판인데 인터넷에 막 돌아다니고.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까 기타가 부서져 있었어요. 그걸 보고 바로 집을 나왔지.
교단 밑에 기타를 숨겨놨어요. 선생님들이 거기는 몰랐지. 학교에서 유명했어요. 하도 기타만 쳐 대서.
호떡바보(이하 ‘호;): 자, 그럼 본격적으로 얘길 해볼까요? 연대순으로? 처음에 어떻게 기타를 접하셨고…… 이런 얘기부터.
김: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 갔다가 친구 아버지가 갖고 있던 기타를 띵 쳐봤어요. 그게 너무 좋아서 집에 와서 널빤지에 고무줄로 가짜 기타를 만들어서 며칠 놀았어요. 그때 우리 집이 잘 살아서 가정교사가 있었어요. 가정교사가 “이거 뭐야?” 이러길래 “학교 숙제에요.”라고 거짓말을 했지. 제가 6살 때 학교를 들어갔어요. 부잣집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머리가 좋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었어요. 어른들이 “전과 좀 외워봐” 이러면서 몇 페이지 찍으면 비슷하게 외우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제 누님이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중학교 1학년 때 결혼을 했어요. 그때 고1 이었던 시골 사돈총각이 우리 집으로 유학을 왔어요. 하숙하러 온 거지. 그 사람이 기타를 갖고 왔어요. 그걸 보고 아버지가 집 건너편 악기 상점에서 기타를 사서 동생에게 줬어요. 그런데 동생은 관심 없고 제가 갖게 됐죠. 그때부터 기타를 쳐댄 거죠.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기타만 쳐대니까 아버지가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고 2때 그룹을 결성해서 콘서트를 했어요.
호: 몇 년도인가요?
김: 제가 55년생이니까 70년대 초에요. 포스터 붙이고 연습하고 극장 빌려서 했어요. 그때 완전히 맛이 갔죠. 교회 가서 매일 연습하고. 드럼 치는 친구 하나 구해서. 그때는 목사님들이 좀 깨어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공간을 내줬어요. 그렇게 공부 안 하고 기타만 치니까 성적이 내려갔죠.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까 기타가 부서져 있었어요. 그걸 보고 바로 집을 나왔지.
음취 일동: 으하하!
김: 일주일 지나니까 어머니가 슬슬 꼬드겨요. 집으로 돌아오면 더 좋은 거 사주겠다고. 아! 이 사건은 콘서트 하기 전에 벌어졌구나. 통기타로 연습할 때. 어쨌든 집으로 돌아와서 동네에서 떠도는 전자기타를 하나 샀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또 때려 부셨어요. 그런 일이 3번 정도 반복되고 난 다음에 기타를 사러 서울 중심가까지 나왔어요. 제대로 된 기타를 갖게 됐죠. 그 후에 공연을 했죠. 그때는 베이스가 없어서 기타에다가 베이스 줄 걸어서 치고 그랬어요. 아버지가 기타를 계속 부셔서 일이 커진 거예요. 아버지가 저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는데 고 2때 낙제 점수가 나왔어요. 급기야 아버지가 오토바이로 저를 학교에 출퇴근 시켰어요. 학교 끝날 시간 되면 아버지가 교문 밖에서 딱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근데 옛날 분들 취약점이 뭐냐면 8~9시면 주무셔야 돼요. 아버지가 잠든 거 확인하면 저는 그 시간부터 밤새도록 활동 개시죠. 학교에선 자고. 교단 밑에 기타를 숨겨놨어요. 선생님들이 거기는 몰랐지. 학교에서 유명했어요. 하도 기타만 쳐 대서.
헤: 그 당시에 어떤 곡들을……
김: 중학교 땐 벤처스(The Ventures)만한 음악이 없었고,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랑 지미 헨드릭스(Jimmy Hendrix). 비틀즈도(The Beatles)도 듣고. CCR만 해도 최신곡이었어요. 아버지가 음대를 보냈어야 했는데 그때 어른들은 음악 하면 춥고 배고프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음대는 으레 미달이었어요. 그래서 경기대 관광경영학과를 들어갔어요. 입학 첫날부터 저는 신입생들 축하공연 하는 밴드에만 관심 있었죠. 학교는 무의미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집에서 기타를 치긴 쳤지만 그룹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수님을 찾아가서 악기 좀 사게 협조를 부탁했어요. ‘교내 그룹사운드 조직 건’ 이렇게 만들어서 도장도 찍고. 그걸 아버지에게 보여줬더니 안 된대요. 매형한테 보여주면서 취미생활로 병행하는 거라고 먼저 설득시켜서 결국 아버지가 기타를 사줬어요. 그 다음날 타이탄 트럭 불러다가 악기 싣고 무조건 집을 나왔어요.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무조건 나와 보니까 막상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돈도 없고. 고민하다가 학교 근처에 있는 기타학원으로 갔어요. 강사 좀 시켜달라고. 그날부터 서대문에 있는 그 학원에서 밤에는 의자 펴놓고 자고 낮에는 기타 가르치고. 한 달 정도 보냈어요. 낮에 시간이 많이 남아서
허리우드 극장(지금은 서울아트시네마. 낙원상가 있는 곳. 인사동 초입.)에 갔어요. 아침부터 갔어요.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오더니 발을 동동 굴러요. 악기가 급히 필요한데 아침 9시라 문을 안 열었다면서. 옆에서 듣다가 내 기타 빌려주겠다고 했어요. 거기서 팀을 만난 거예요. 그 팀이 내 악기 빌려서 간 곳이 해밀튼(Hamilton) 호텔(이태원 한가운데 있다. 이태원 가본 분들 떠올려보시라. 1973년 4월 28일 개업했다.)이었어요. 호텔 오픈 공연 한다고.
호: 73년, 74년 정도겠네요.
땅을 치고 통곡을 하시더라구. 아들이 거지됐다고. 그때 알았어요. 내가 거지가 됐구나.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바로 그때에요.
김: 그렇죠. 아직 스무 살 안 됐을 때니까. 제가 정식으로 녹음실 들어간 게 77년이에요. 최연소 기록은 아직도 안 깨졌을 거예요. 그때 쟁쟁한 사람들과 경합 벌여서 제가 들어간 거예요. 아무튼 그 팀에 있다가 미 8군에 들어갔어요. 대구에 있는. 항상 재미있는 게 뭐냐면, 누가 갑자기 펑크를 내서 “대신 와서 자리 좀 메꿔죠” 이렇게 갔다가 거기서 계속 일하게 되고 그래요. 거기 가서 죽기 살기로 했죠. 소문이 좋았어요. 기타 치는 괴물이 하나 있다더라.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거지 하나가 나타났어요. 개털 잠바에다가 신발은 다 닳아서 뒷굽이 없고. 저한테 오더니 “김광석씨는 저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됩니다.” 이러는 거예요. 우리나라 음악 발전을 위해서 올라가야 된대요. 같이 있던 멤버들이 황당해했죠. 미 8군은 큰 회사들이 그룹을 관리했기 때문에 계약에 의해서 움직였어요. 제 팀은 유니버셜 소속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명만 빠져 나가도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 거지 이름이 김옥동이었어요. 건반 친다고 했는데. 그날부터 전쟁이에요. 잠도 안 자고 다른 멤버들이랑 토론하는 거죠. 일주일동안 ‘왜 이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하는가’로 토론을 하는 거예요. 저는 잠자코 있고. 그러더니 일주일 후에 밴드 마스터가 와서 따라가라고 했어요.
전: 멤버들이 잠을 못 자서 너무 괴로워서 그랬나봐요, 흐흐.
김: 열정이었죠. 삼국지에나 나오는 얘기에요. 그래서 김옥동 따라서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런데 잘 되기는커녕 보름 동안 생라면만 먹었어요. 하늘이 노랗더라구. 둘 밖에 없는 거예요. 악기도 없고.
음취 일동: 으허허!
김: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족보도 없고. 내가 잘 한다는 소문만 듣고 무작정 찾아왔던 거지. 그러다가 어떻게 멤버를 꾸려서 일하러 부평으로 갔어요. 부평역 인근이 그때 기지촌이었어요. 논밭 한가운데 역이 있었고 그 앞에 공수부대 있었어요. 아무튼 멀리서 다른 멤버들이 오는 걸 보면 영낙없이 거지에요. 저는 몰랐어요. 내가 거지가 됐다는 걸. 잠 잘 데가 없어서 문 닫은 허름한 당구장 안에 당구대 위에서 자고. 열심히는 했어요. LP가 하얗게 되도록 판따기 하고. 책도 없었고 콩나물 대가리도 구경 못했고. 판이 닳아서 바늘이 튀니까 동전 계속 올려가면서 듣고. 바늘 다 되면 바늘 갈고.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줌마가 오더니 “광석이 어딨어요?” 이러는 거야. 보니까 엄마에요. 신체검사 때문에 오셨던 거예요. 계속 미루다가 병역 기피자가 되게 생겼으니까.
엄마가 날 몰라보고 광석이 어디 있냐고 물어본 거예요. “내가 광석이야.” 그랬더니 땅을 치고 통곡을 하시더라구. 아들이 거지됐다고. 그때 알았어요. 내가 거지가 됐구나. 다행히 옛날에 팔을 다친 적이 있어서 군대는 면제받았어요. 그때 집에 잠시 갔다가 아버지에게 인사만 드리고 다시 나왔죠. 그 후에 부평 클럽이 문을 닫아서 파주군 문산으로 갔어요. 거기는 제법 음악 하는 분위기가 났어요. 거기서 지내다가 어느 날 이태원에서 밴드가 왔어요. 이태원 ‘세븐 클럽’ 일하던. 당시엔 거길 최고로 쳐줬어요. 일반 무대 중에선 ‘마음과 마음’, ‘오비스 캐빈(OB's Cabin)’ 등이 있었고 그쪽에선 히 파이브(He 5)와 라스트 찬스(Last Chance)가 유명했죠. 진짜로 쳐 주는 건 미군들만 출입하는 세븐 클럽이었어요. 거기서 하면 최고 밴드였어요. 근데 그 밴드가 오더니 또 절 데려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일주일 토론에 들어갔어요. 잠 안 자고. 결국 이번엔 김옥동씨가 당하게 됐어요. 팀을 깨기로 했어요.
전: 김옥동씨랑 하던 밴드 이름이 뭐였어요?
김: 그땐 이름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냥 하는 거지. 그렇게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 치고서 이태원으로 왔어요. 정말 재미있더라구. 무대 옆을 떠나질 않았어요. 한 번 연주하고 내려가면 다음 차례 될 때까지 무대 옆에 앉아 있었어요. 당시 드럼이 백두산의 한춘근. 건반은 DJ 이진.
헤: 바보스(Babo's)에 있었던 이진씨.
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바로 그때에요. 이진씨도 그렇게 얘기해요. 전화 통화하면서 “광석아,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그때 우리가 올라가면 미군들이 춤도 안 추고 전부 감상했어요. 완전히 뒤집어졌죠. 하루하루 다리가 후들거리고 소름이 돋고.
헤: 거기선 어떤 곡들을……
김: 카피였죠. 그때는 자기 음악 한다는 생각을 못했으니까. 산울림이 인정받는 게 자기 음악을 들고 나왔다는 거잖아요. 카피해서 무대에 오르면 사운드 좋은데, 자기 곡으로 음반을 만들면 엉망이었으니까. 녹음실은 열악하고. 그래서 그때 음악 잘 못하는 밴드 보고 산울림 사운드라고 놀렸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우리 모두 단체로 양키였던 거예요.
전: 70년대 중반이면 하드록이 대세였을 때인데.
헤: 이진씨는 유라이어 힙(Uriah Heep) 굉장히 좋아하시잖아요.
어느 날, 또 사람이 왔어요. 히 파이브에서 데려가겠다고.
보름 동안 한 잠도 안 자 본 적도 있어요. 결혼을 그 시절에 했는데, 약혼식을 현충일 날 했어요.
김: 맞아요. ‘짠짠 짜~~안’ 이러고 난리 났었죠. 멤버들 스테이지마다 옷 갈아입고. 그런데 어느 날, 또 사람이 왔어요. 히 파이브에서 데려가겠다고. 히 파이브는 대한민국 최고였으니까 멤버들이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때 히 파이브에 있던 김홍탁씨가 미국으로 가고 얼마 후에 저를 찾으러 온 거예요. 그렇게 또 세븐 클럽 팀이 깨졌어요. 멤버들이 가라고 했어요. 히 파이브 가서 일 바쁘게 했죠. 또 어느 날 누가 오더니 “광석씨, 내일 시간 있어요?” 물어봐요. 드러머 배수연씨였어요. 녹음실에 따라 가게 됐죠. 그때 배수연씨는 전속 세션맨이 아니었어요. 건반 치는 이호준씨와 함께 약간 아웃사이더였어요. 두 분 다 명성은 이미 있었지만. 당시 제대로 된 스튜디오는 마장동 스튜디오랑 서울 스튜디오(동부이촌동에 있다.) 2개였잖아요. 그 중에서도 중심은 마장동 팀이었어요. 그 팀이 일을 거의 다 했어요. 제가 히 파이브를 9년 정도 했어요. 29살 때까지.
헤: 그럼 지금까지 들은 파란만장한 일들이 다 2~3년 사이에 일어난 거군요. 학교를 일찍 들어가셨기 때문에.
김: 녹음실 일 하면서 함께 지냈던 분들이 사랑과 평화. 김명곤씨가 있었죠. 최이철씨. 이철호씨. 얼마 후 전속으로 일하게 됐죠. 주변에 기타 치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중산씨부터 시작해서 쟁쟁했죠. 그때부터 6년 동안 잠을 못 자는 시간이 계속 됐죠. 녹음이랑 밤일을 같이 했어요. 히 파이브로 새벽 4시까지 하고, 오전에 바로 스튜디오 나가고. 오전, 오후 2 프로가 항상 있었어요. 두 달 치 스케줄을 미리 적어놨어요. 보름 동안 한 잠도 안 자 본 적도 있어요. 결혼을 그 시절에 했는데, 약혼식을 현충일 날 했어요.
음취 일동: 하하하하!
헤: 그 당시에 모든 클럽은 6월 6일 하루만 쉬었잖아요.
김: 그리고 12월에 결혼했는데, 그 날은 빼주더라구요. 아무튼 그 시절에 쉬어본 날이 열흘도 채 안돼요. 그 열흘도 업소가 이사를 가서 쉬던 때.
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계속 바쁘게 생활하신 거죠?
김: 그러다가 이제 그만 둘 때가 됐다고 느꼈고 몸이 망가지더라구요. 죽는 길이 보였어요. 아버지가 오셔서 “너 그러다 죽는다” 이러시고. 그땐 젊었으니까 그랬지, 지금 그렇게 한다면 일주일이면 앓다 죽었을 거예요.
헤: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신 건지……
김: 와이프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어요. 결혼 전까지 만나본 게 10번이 안됐어요. 왜 이렇게 콧대가 센 지.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름 제가 진실한 사람으로 보였나 봐요. 연락이 딱 왔어요. 그래서 24살에 결혼하고 큰 애를 25에 낳았어요. 결혼하기 전에 녹음실에 들어갔죠. 사실 스튜디오 들어갈 정도면 돈도 많이 벌고 나름 성공한 건데, 아버지는 계속 불만이셨지. 누나가 박사 학위 받으러 가던 날 통곡 하셨어요. 원래는 내가 받아야 하는 건데.
호: 그럼 그 후에라도 화해 하셨나요?
김: 아니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절 인정 안 했어요. 돈 벌고 못 벌고를 떠나서 하류인생으로 쳤으니까.
3시간 안 치면 3시간만큼 기타 실력이 줄어요.
우리나라에서 녹음하면 다 ‘깽깽깽’ 소리 밖에 안 들렸어요.
헤: 연습은 하루에 어느 정도 하세요?
김: 쌓는 것은 10년, 20년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3개월도 안 걸려요. 연습 안 하면 소용없어요. 3시간 안 치면 3시간만큼 기타 실력이 줄어요.
호: 기타를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김: 얘는 어딜 가도 나랑 안 떨어져요. 치지 않더라도 항상 옆에 있어요. 그냥 잡고라도 있어요.
헤: 마이클 쉥커(Michael Schenker)가 하루에 크로매틱(chromatic: 요거 보세요. 이런 거랍니다~. http://video.naver.com/2008122803252445204)만 2시간 해야 손이 풀린다고 했다는데.
김: 그게 거짓말 아니에요.
헤: 한참 스튜디오 활동하실 때 어떤 악기들을 쓰셨어요?
김: 그땐 주로 팬더(Fender). 아무래도 내추럴하니까.
헤: 그때는 악기가 자유롭게 수입되던 시절이 아니었잖아요.
김: 이펙터도 딱 1개 아니면 2개 밖에 안 썼죠. 코러스(chorus: 밑에서 받쳐주는 듯한, 소리가 풍부해지고 맑아진다.) 아니면 오버 드라이브(over drive: 디스토션 없던 시절에 엠프 출력 세게 해서 소리를 찌그러트렸던 것. 디스토션보다 소리가 덜 거칠다. 후에 이펙터가 따로 나왔다.). 녹음실 들어가기 전까지 이펙터가 없었어요. 그냥 없이 했지. 앰프 볼륨으로만. 아예 상상을 못했어요. 그런 게 있다는 걸. 게인(gain) 기능이 있어서 오버 드라이브 걸 수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죽어라 해도 그 소리가 안 나는 거야. 우리나라에서 녹음하면 다 ‘깽깽깽’ 소리 밖에 안 들렸어요.
헤: 예전에 휘닉스(Phoenix) 멤버였던 심형섭씨를 뵌 적이 있는데, 베트남에 갔다가 미국 사람들이 쓰는 퍼즈(fuzz: 디스토션보다 더 지글지글~)를 처음 봤대요. 그 전까지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는 어떻게 이런 소리를 낼까?’ 답이 안 나왔는데, 그걸 밟으니까 바로 소리가 났다고…….
김: 저는 처음에 이펙터 밟고서 적응이 안 됐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거와 너무 다르니까. 그래서 이펙터 안 썼어요. 미국에서도 사실 잘 안 썼어요. 다 게인 소리지. 헨드릭스도 그랬고 딥 퍼플(Deep Purple)도 그랬고. 그래서 옛날 소리가 멋있는 거예요.
음악이 싹 바뀌었어요. 그때 알았어요. 아,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90년대 들어와서 젊은 음악들이 생겨났죠. 곧 한가해지겠다고 생각했죠.
명곤이 형이 참 창작을 하고 싶어 했어요. 연주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전: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앨범들은 거의 다 세션을 하신 거죠?
김: 지금 저작권협회에서 연주자들에게 나눠 줘야 할 돈이 60억이에요. 근거가 없어서 못 나눠주고 있어요. 누가 했다고 쓰여 있질 않으니까. 그것 때문에 난리에요. 90년대 돼서야 이름 들어갔죠. 그때는 저작권 이런 거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60억 중에 40억이 임자를 못 찾았어요. 200~300명이서 그걸 나눠 가져야 돼요. 지금 여기서 나보고 세션 목록을 대라고 하면 안 돼요. 거의 다야.
전: 그래도 인상적이었던 걸 꼽자면……
김: 가수 보지도 않고 했으니까.「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어느 날 작업 맨 끝에 누가 해달라고 해서 한 번 녹음한 건데, 히트하고 나서 알았어요. 조용필 노래라는 거.
헤: 그럼 당시 스튜디오 분위기는 이미 편곡 다 돼 있고……
김: 악보 보고 살벌하게 하는 거예요. 그냥 코드만 놓고 하는 경우도 있고. 악보가 많았지. 이호준씨랑 김명곤씨과는 코드 놓고 했고. 두 분이 아웃사이더였고 제가 명곤이형이랑 일을 많이 했었죠. 마장동 일과 병행하면서.
전: 김명곤씨는 흑인 필이라고 할까……
김: 최첨단이었지. 그 분도 녹음실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따로 팀이 있었어요. 나중에 그 팀에 함춘호씨가 들어왔죠. 그러다가 음악이 싹 바뀌었어요. 그때 알았어요. 아,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90년대 들어와서 젊은 음악들이 생겨났죠. 곧 한가해지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1집을 냈어요. 바쁠 땐 내고 싶어도 못 내다가. 그때는 너무 자존심이 높아서 들국화 보고도 ‘얘네는 뭐야~’ 이랬으니까. 저랑 배수연씨랑 들국화 연습하는 곳을 갔었어요. 전인권씨랑 최성원씨랑 있더라구. “제발~~” 소리 빽빽 질러서 ‘이거 뭐야~’ 속으로 이랬어요. 그래서 같이 몇 번 연습하다가 그만뒀어요. 근데「행진」이 떴죠. 아무튼 나중에 다시 인권씨랑 수연이 형이랑 같이 전인권 밴드란 이름으로 공연하러 많이 다녔어요. 베이스는 민재현씨였고. 수연이 형이 재미없어졌다고 나간 다음에 이건태씨랑 같이 했고. 그때 공연 참 멋있었죠. 한참 하다가 인권씨가 들국화로 하자고 했는데 제가 싫다고 했어요. 싸웠죠. 그 후에 갑자기 들국화 3집이 나왔는데, 자켓 보면 하얗게 백지로 된 곳이 있어요. 자기 밴드에 기타는 없다 이거지. 생각해보면 미안해요. 제가 상처를 줬죠. 찾아가서 화해했어요. 그때 싸우고 나서 저 대신 조준형씨가 들어갔어요. 저는 전인권 그 친구 존경해요.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요. 그때도 만나면 항상 음악 얘기만 했어요. 다른 얘기는 안 해.
호: 세션 계속 하시다가 느슨해지기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쯤인가요?
김: 40살 딱 넘으면서 느슨해졌고 바로 1집을 냈죠. 95년에. 시간이 나더라구. 팝 발라드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서 기타 세션을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하게 됐어요. 함춘호씨 같은 분들이. 그렇다고 내가 위축된 건 아니에요. 다른 방향으로 도약하게 됐어요. 저는 그 흐름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헤: 후배 세션맨들과 교류는 하시나요?
김: 제가 함춘호를 좋아하니까 가끔 만나고. 교류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은 없어요.
전: 1집이 창작으로는 처음이신데……
김: 창작하니까 말인데, 돌아가신 명곤이 형이 참 창작을 하고 싶어 했어요. 연주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막상 대중가요와 달리 연주곡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앨범 만들려고 팀까지 다 짜 놓았는데. 형이 내 1집 나왔을 때 그랬어요. “야, 이런 걸 언제 만들었냐.” 결국 그걸 못하고 돌아가셨지. 이를 테면 카시오
페아(Casiopea) 같은 걸 하고 싶어 했는데. 녹음도 줄어들고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방문 걸어 놓고 혼자 소주 마시고. 돌아가실 때 35kg이었어요. 거의 자살이라고 봐요, 저는. 저도 제 1집은 창작이라고 보지 않아요. 작곡은 했지. 창작은 자기 류(類)를 만드는 거거든. 요즘 그게 조금 보이긴 해요. 누구든지 그래요. 우리나라에 창조의 개념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어요.
헤: 1집에「숙제」를 보면 김광민씨, 베이스 치는 김병찬씨 등과 함께 하셨는데…….
헤:「숙제」는 나중에 ‘코리아 슈퍼세션’이라고 해서 퓨전 재즈 팀으로 나가는 발판이 됐잖아요(김기표, 정성조, 신현권 등이 멤버였던 코리아 슈퍼세션 1기의 앨범은 93년에 발표됐다. 비죠군은 96년에 앨범을 발표한 2기를 말하는 것 같다. 2기 멤버는 김병찬, 한상원, 한충완 등이었다).
김: 음반 낼 때마다 참 쉽지 않았어요. 낼 때마다 죽는다고 생각했고 탈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집도 날렸지. 녹음 부스 앞에 만날 드러누워 있
었어요. 믹스할 때도 드러누워서. 탈진 돼서. 3집은 좀 편하게 했어요. 2집 때까지는 내 마음이 그랬어요.「아들」이란 곡도 거의 유서 같은 심정으로 연주한 거예요. 미안하단 마음으로.
저는 곡이라는 건 공 들여서 만드는 게 아니라고 봐요.
연습은 즉흥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거예요.
호: 그럼 1집 구상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김: 저는 녹음 들어가면 시간을 끌지 않아요. 그냥 한두 번에 끝내버려요. 억지로 뭘 하질 못해요. 2집「일출」이 원 테이크에요. 2집은 1번 CD 1번 곡부터 다 녹음 순서대로에요. 녹음 순서대로 넣은 거예요.「Jam1」과「Candlelight」도 원 테이크.
헤: 한춘근씨와 같이 한 거죠?
김: 그 사람들은 “녹음하자.” 이러면 안 돼요. 몰래 작전을 짜서 “그냥 한 번 해 보자.” 이렇게만 얘기하고서 했어요. 엔지니어보고는 “소리 나면 무조건 녹음 눌러라.” 귀띔 해놓고.「Candlelight」는 진짜로 불 다 끄고 촛불 켜 놓고 한 거예요. 분위기 잡고. 연습도 없어요. 무조건 가는 거예요. 즉흥으로. 3번 CD는 다 즉흥이에요.「약진」은 서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엔지니어가 “가세요~” 했는데 ‘짜장~’ 첫 박자가 맞았어요.
호: 그렇다면 2집에서 공 들여 만드신 곡도 있나요?
김: 저는 곡이라는 건 공 들여서 만드는 게 아니라고 봐요. 몇 초 안에 만들어져요. 공을 들인다는 건 몇 초 안의 그걸 기승전결로 다듬는다는 얘기지, 만드는 건 순간적으로 발생해요. 곡이 만들어질 때 와이프가 말 걸거나 화장실 가고 싶으면 짜증나는 거죠.「축제」는 녹음실 가기 전 그날 아침에 만들었어요. 곡 만드는 건 걱정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니까.
헤: 그럼 악보로 다 옮기시는 건가요?
김: 네.「첫눈」도 첫눈 올 때 곡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그냥 만든 거고.「새벽」같은 경우는 악보 다 만들어서 같이 세션했지만, 사물놀이랑 같이 한「개천」은 원 테이크에요. 원 테이크에 안 되면 아예 싣지를 못하는 거예요.
전: 김대환 선생님하고도 하셨고 최선배씨와도 하셨는데, 김광석님 음악 세계가 프리 뮤직하고 닿아 있는 것 같아요.
김: 요즘 재즈는 재즈가 아닌 게 많아요. 형식화 되어있고 경직되어 있어요. 습관화된 패턴, 습관화된 필로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면 그건 재즈가 아니지. 재즈는 같은 게 반복될 수가 없어요. 순간 반응이기 때문에.
전: 연습은 어떻게 하세요? 스케일만 하세요, 아니면 어떤 곡을 연습하세요?
김: 연습은 근본적인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집에서 바흐(J. S. Bach)를 많이 해요. 즉흥으로 연습한다고 하면 그건 말이 안 되죠. 그건 연습이 아니지. 연습은 즉흥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거예요.
전: 대가들에게 궁금한 점이…… 자기는 자기 자신이 잘 한다는 사실을 알까? 이게 궁금해요.
김: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요. 옛날엔 잘 몰랐는데 지금은 레드 제플린이 엉망으로 했던 게 다 보여요. 개기는 것도 보이고. 내 연주가 안 되는 것도 너무 많이 보여요. 누가 뭐라 칭찬하든 신경 안 써요. 이제 이 나이에 무슨 영광을 보겠어요. 와이프도 그래요. “뜰 생각 하지 말어.”
헤: 사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다는 건 정밀한 작업이고, 편곡자가 짜 온 원안을 그대로 해주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프리 뮤직은 정 반대잖아요.
김: 제가 지금 스튜디오에서 수석 주자에요. 남보다 페이도 많이 받고. 배경이 있기 때문에 든든해요. 정밀한 세계, 프로페셔널한 세계, 모든 지 할 수 있는 연주력, 이걸 다 갖췄기 때문에 나가서 자신 있게 다른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만약 프로의 세계에서 아웃당했다면 연주 안 해요. 보따리 싸 가지고 어디 가서 죽던가. 아무튼 목적을 가지고 음악 하면 소리가 이상해져요. 사심이 있으면 일단 재미가 없어요.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가끔 생기는데, 마누라가 그건 아니라고 얘기해줘요. “그런다고 돈 벌리지 않아. 그냥 편하게 해.” 옛날에 집 팔았을 땐 난리 났었는데 지금은 든든한 조력자에요.
김현식은 할 때 항상 같이 있었어요. 보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녹음할 때 와요.
제가 장사익씨한테 그랬어요. 형은 이제 큰 나무가 됐으니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호: 1집 나오고 8년 후에 2집이 나왔어요.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김: 특별한 변화는 없었어요. 일이 줄어들었지만 세션 계속 했고. 장사익씨랑 작업을 많이 했죠. 그때 죽이 맞아서. 저는 그 사람 대단하다고 봐요. 자기의 소리를 만들고 자기 음악을 창조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촌스럽지만 온전히 그 사람 거예요. 아무리 멋있고 세련돼도 아류가 많잖아요.
헤: 장사익씨 1집은 임동창씨 영향이 절대적이었는데 2집부터 그 분 특유의 느낌이 강해졌어요. 3집부턴 김광석님이 음악감독 하셨잖아요?
김: 음악감독이란 이름은 자기들이 그냥 붙여준 거지 뭐. 내가 얘기를 많이 하고 간섭을 많이 했으니까. 감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취미 없어요.
전: 장사익씨랑 작업하는 것과 다른 뮤지션이랑 하는 것과 다를 것 같아요.
김: 다른 뮤지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김현식은 할 때 항상 같이 있었어요. 보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녹음할 때 와요. 와서 같이 연습해요. 오질 않으면 몰라요. 더군다나 신인들은. 장사익씨 1집은 한두 번에 다 끝낸 거예요. “가사 틀렸는데요.” 이랬더니 “됐어.” 이러더라구. 그 정도는 돼야죠.
헤: 기타 톤에 대한 연구는 계속 하시죠?
김: 계속 하죠. 굉장히 중요하죠.
헤: 혹시 참고하시는 외국 음반이 있나요?
김: 톤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봐요. 영혼의 문제지.
헤: 1집에 비교해서 2집을 들어보면 일렉트릭 기타 톤이 훨씬 담백하단 느낌을 받거든요.
김: 2집은 후배 놈이 “형, 디스토션 왕창 거세요.” 이랬어요. 그 놈이 자기가 세팅해 준다고. 헤비메탈하는 친구에요. 그래서 뭐가 왕창 걸렸지. 1집은 너무 생소리 난다면서. 악기도 골라주고.
호: 어쨌든 1집과 2집 사이에는 장사익씨랑 많이 하셨고……
김: 장사익씨랑 딱 10년을 같이 했어요. 정말 재미있게 했지. 10년 되니까 어딜 가서 공연해도 난리가 났어요. 장사익씨도 폭발하고 나도 그렇고. 관둘 때가 지금이다, 라고 생각했죠. 항상 정점에서 그만 둬요. 히 파이브도 그랬고. 제가 장사익씨한테 그랬어요. 형은 이제 큰 나무가 됐으니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나는 작은 나무니까 나가서 내 음악을 만들겠다고.
악기도 그렇고 연주에 대한 개념도 그렇고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부숴버릴 수 있어요.
전: 2집이 CD 4장이잖아요. 아무리 자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해도, 이 정도면 정말 ‘본격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큰 열망이 있었던 건가요?
김: 왜냐면 자꾸 써 지니까. 기타만 잡으면 곡이 나오니까. 뭐만 딱 보면 곡이 나왔어요. 악보도 없이 다 메모리에 들어가 있었어요. 안 할 수가 없는 거지. 원래는 3장으로 하려고 했는데, 소품들도 모아서 넣었어요. 지금도 소품 엄청 많아요.
헤: 2집 구성이 1번 CD부터 처음엔 메탈릭한 느낌, 그 다음엔 좀 더 퍼퓰러한 세션, 그 다음엔 즉흥 연주, 마지막으로 안방에서 듣는 듯한 소품, 이렇게 돼 있어요.
전: 두 글자 제목들이 참 인상적이에요. 어떤 고집 같기도 하고.
김: 고집이죠. 두 글자로 해도 다 되더라구요. 사람 이름도 두 글자고. 지명도 다 두 글자고. 안 될 게 없어요. 근데 3집은 안 그랬어요. 이번엔 듣는 사람 입장을 고려했어요. 내가 완전히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 자기의 똑같은 자아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 바보죠. 부숴버릴 땐 다 부숴버려야죠. 악기도 그렇고 연주에 대한 개념도 그렇고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부숴버릴 수 있어요. 앞으로 할 일이 무지 많아요. 언젠가 진짜 테크니컬한 작품을 하나 만들 거예요. 세상 어디에나 내 놓아도 끝장을 볼 수 있는. 기타는 월드 악기니까. 내가 뭔가 더 해야 하는데 막막하다고 했더니 후배 하나가 “선배님, 다음 생애에서 하세요.”
음취일동: 하하!
전: 외국 기타리트스들 중에서 이 사람은 잘 한다, 아니면 이 사람은 거품이다, 이런 생각들 하시는지.
김: 거품은 토미 엠마뉴엘(Tommy Emmanuel). 퍼포먼스만 크고. 파코 데 루시아(Paco De Lucia)나 알 디 메올라(Al Di Meola)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발가락의 때도 못 미치지. 알 디 메올라는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에요. 세계 최고의 피킹(오른손 줄 튕기기)이고.
전: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관객들과 즐겁게 호흡하는 것도 있고, 또 연주력을 떠나서 개성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김: 테크닉에서 밀리면 치기가 싫어요.
전: 예를 들어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은 테크니션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느낌은 분명 있잖아요.
김: 그건 또 다른 세계 같아요. 팻 매쓰니(Pat Metheny)가 너무 좋다는데 거기서 테크닉을 논할 수는 없으니까. 연주가 절대 가치는 아니죠. 그렇게 종합적으로 따지면 전 지미 헨드릭스 이상의 기타리스트는 없다고 봐요. 한국에서는 신중현 선생. 그 분은 한 시대의 음악을 만든 분이죠. 대단한 천재에요. 테크닉으로 보자면 좀 다르지만. 지미 헨드릭스도 마찬가지고.
그만 접을까 생각도 했었어요. 그러니까 딱 죽고 싶더라고. 바로 죽음이 보였어요.
전: 3집에서는 이제 소통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김: 3집 컨셉은 가정주부들이라도 집에서 항상 들을 수 있는 음악. 저는 제 와이프가 듣는 음악이면 상업적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에 봉사하는 거고. 우리 와이프가 2집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음취일동: 하하하하!
김: 그런데 3집은 끼고 살아요. 아들도 그래요. “엄마가 즐겨듣는 걸 만들어. 그럼 성공해.”
전: 뮤지션을 증명하는 게 작품일 수도 있고 공연일 수도 있는데, 명반을 만드는 일에는 크게 욕심이 없으신 것 같아요. 즉흥이나 연주 행위에 중점을 두고 계신 건 아닐까……
김: 명반을 만든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거죠. 행위에 따로 중점을 두는 건 없어요. 3집은 테크닉은 크게 없는데 완성도는 뛰어나요. 거의 기타 한 대로만 했어요. 솔로나 마찬가지에요. 선율이 굉장히 강하고.
헤: 3집도 원 테이크로 다……
김: 그렇진 않아요. 그래도 3번 이상 치면 안 나오더라구. 3집 녹음한 시간대가 새벽 6시였어요. 밤새 다니면서 클럽에서 연주하고 그러다가 딱 들어와서. 제가 최근에 7~8개월 동안 잠을 2시간씩만 잤어요. 기타에 몰두해서. 새벽에 공원에 나가서도 치고. 보통 하루에 클럽이나 라이브 카페를 세 군데 이상 다니면서 연주했어요. 노 개런티. 돈 줘도 안 받았어요. 그랬더니 코피 나고 하혈해서 병원에 갔어요. 저를 중환자실로 보냈어요. 거기서 퇴원하고 나서 개념이 바뀌었어요. 자신이 생기더라구. 그래서 녹음하자고 해서 만든 게 3집이에요. 막막하고 그랬었는데.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죠. 병원에서도 링겔 꽂고 기타 쳤어요. 아침 7시에 눈 뜨면 링겔병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의사가 그만 좀 하라고 하더라구.
전: 저희 입장에서 그처럼 독하게 연습하시는 이유가, 더 잘 치고 싶은 이유가 있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김: 왜냐면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는 게 분명하니까. 그만 접을까 생각도 했었어요. 그러니까 딱 죽고 싶더라고. 바로 죽음이 보였어요. 그래서 까짓 거 더 하자.
헤: 안 된다는 게…… 뭔가 새로운 창조가 안 된다는 얘긴가요?
김: 뭐가 안 되는 거지 좌우간. 창피해서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내미는 거예요.
전: 음취에 가끔 오시고 박광수님 인터뷰 주선해주셨던 꿈휴님이 자기 블로그에 “김광석의 음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렇게 써 놓으셨더라구요.
김: 맞아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호: 다음 음반이나 프로젝트는 조금 속도가 빨라질까요?
김: 그러겠죠. 비타 산조 나오고, 올드 팝 명곡들 통기타로 할 거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테크닉도 개발을 해요. 세상에 나 혼자만 갖고 있는 것들. 주법들. 예를 들어서……
(갑자기 기타 집에서 기타를 꺼내든 김광석님. 그 좁은 민들레 영토 세미나실 안에서!! 클래식 기타 주법은 어떻고 누구의 주법은 어떻고 조금씩 맛을 보여주더니 나는 이렇게도 친다며 시범에 들어가셨다. 20년 연습한 거라면서. 손놀림에 혀를 내두른 음취일동.)
헤: 2집「파동」에서 비타를 쓰셨다고 했는데. 김대환 선생님이랑 같이 한 곡에서. 그 악기 소리가 베이스 소리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특별히 악기를 만드신 이유가 있으세요?
김: 뭔가 새로운 소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 들고 있는 건 세고비아 기타에요. 평범한 건데 그냥 지나가다가 샀어요.
(그러더니 다시 즉석 기타 연주 돌입. 올드 팝 2곡을 멋지게 들려주셨다. 함께 들어보자)
*기사 아래 첨부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나온 기타 솔로 앨범들을 들어보면 코드만 잡혀 있고 나머지는 애드립이잖아요. 그런데 그 애드립이 멜로디 없이 ‘내가 이런 테크닉을 합니다.’ 이런 걸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김광석님의 경우는 멜로디를 위한 테크닉이란 생각을 많이 했요. 테크닉을 위한 앨범을 내겠다고 하신 게 혹시 그런 의미는 아닌 지……
(헤비죠가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 기타를 튕기는…… 말 끝나자마자 바로 또 즉흥 속주!)
홍대 앞에 가면 있어요. 딱 들어보면 이전에는 없던 색깔이에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음악이라고 느꼈어요. 조짐이 있어요. 뭔가 이뤄지고 있어요.
김: 속주를 하면 어떤 전율이 느껴져요. 피가 끓는 듯한. 3집에서「은하수」란 곡이 타이틀이 된 이유가 있어요. 몽골에 갔을 때 만들었는데, 거기는 해발 2000미터 이상이에요. 평지에요.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없어. 불빛도 없고. 밤에 별을 위로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옆에서 봐요. 별이 쏟아지는 게 아니라 별들 안에 들어가 있어요. 이 곡 만들 때 같이 갔던 어떤 분은 차를 끓였고, 유명한 스님 한 분은 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셨어요. 아내도 같이 춤 췄고. 이 곡은 완전히 우리나라 음악이에요. 우리나라 음계고. 자연이 정말 광대한데 기타로 막 ‘짜글짜글 짜잔~’ 하는 건 소용없더라고.
(곧바로「은하수」연주! 들어보자.)
김: 사람들이 좋아해요. 시골 가서 하면 더 좋아해. ‘얼쑤~’하고 반응이 나와요. 시작할 때 딱 우리나라 진양조(판소리와 산조에서 쓰이는 느린 장단. 보통 4분의 24박자.)에요. 조화가 중요해요. 느리게 칠 수 있는 만큼 빨리도 치고, 세게 칠 수 있는 만큼 부드럽게 치고, 복잡한 만큼 단순하게 치고. 긴만큼 짧게. 어느 한 쪽으로만 가면 지루해져요.
(기타를 다시 기타 집에 집어넣었다. 20분 정도 이어진 그의 민토 라이브~~ 짝짝짝!!!)
전: 앨범에 국악기를 많이 사용하고 다른 예술가들하고 협연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런데 본인도 처음엔 록 음악에 빠져서 시작하셨고, 그러면 보통 뮤지션들은 처음 그것이 몸에 배어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김: 저는 옛날 음악을 답습한다고 해서 그걸 한국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거는 그냥 대안이 없는 상황이죠. 요즘에 맞는 국악을 만들어야죠. 일본만 가도 그 사람들이 공유하는 코드가 있어요. 우리나라도 그게 있어요. 그런데 요즘 그런 애들이 있어. 홍대 앞에 가면 있어요. 딱 들어보면 이전에는 없던 색깔이에요. 내가 누군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쇼케이스를 한 번 갔는데,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음악이라고 느꼈어요. 조짐이 있어요. 뭔가 이뤄지고 있어요. 이상한 국적 불명의 R&B, 저는 이런 거 꼴 보기 싫거든요. 아무튼 홍대 앞에서 뭔가 되고 있어요. 단지 연주가 좀 부족해요. 시간이 필요한 거죠.
헤: 문제는 그런 팀들이 20년 못 채우고 생계 때문에 그만둔다는 사실이죠.
김: 그래도 전 반드시 후배들이 해내리라고 믿어요. 홍대 파워가 참 막강해요.
전: 반면에 재즈 아카데미를 비롯해서 실용음악과 출신들이 만든 음악들은 ‘혹시 실용음악과 아니야?’ 이러면 진짜로 그런 경우가 많아요.
김: 뭔가 해내는 친구들은 실용음악과 안 다닌 친구들일 거예요. 음악은 자유로워야 돼요. 그걸 40~50살에 깨우치지 말고 젊었을 때 곧장 그 길로 가야 돼요. 저처럼 무식하게 가면 안 돼요.
연극도 자꾸 붙는데,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거부하지 않아요.
헤: 80년대 초에 조용필씨 세션도 하셨잖아요. 그때 얘기 들어보면 앨범 여러 장 내기로 계약을 해 놓아서, 한 번은 위대한 탄생이랑 하고 한 번은 세션들과 하고.
김: 뽕스러운 걸 내가 했지. 그렇게 보면 돼요.
음취일동: 하하!
전: 혹시 후회는 안 하세요. 70년대를 20대로 사셨는데……
김: 그때는 군사정권이어서 음악 하는 놈들은 퇴폐의 무리들이었으니까. 우리 부모님부터 그랬는데 뭐. 기타를 쳤다는 자체가 기적이죠. 그런 환경에서 맘껏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죠. 후배들 중에 새벽에 밤일 끝나고 길에 나왔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기타 메고 있으면 와서 잡는 거야.
전: 음악은 많이 들으세요?
김: FM 방송 주로 들어요. 클래식 나오는 거. 아메리칸 스타일을 머리에서 지워야 돼요. 너무 많이 해서 자꾸 나오려고 해요. 아예 안 들어.
전: 무용이라든가 연극에서도 음악 작업하시잖아요. 다른 예술 분야와 결합하는 걸 하려고 하시는 편인가요?
김: 무용은 잘 안 하는데 자꾸 사람들이 붙어요. 제가 뭘 일부러 만들려고 하질 않아요. 연극도 자꾸 붙는데,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거부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걸 나의 길로 봐요. 돈을 얼마 받느냐는 따지지 않아요.
호: 제가 연극『우동 한 그릇』보러 갔다가 김광석님이 연주하는 걸 봤잖아요. 그럼 연극을 먼저 보신 다음에 같이 하기로 하신 건가요?
김: 어느 날 전화가 왔더라구. 처음엔 거절했는데 전화가 또 왔어요. 그래서 하게 됐어요. 그 사람들 훌륭해요. 돈 없어요. 그 동네가 돈을 벌려고 하면 답이 안 나와요. 그냥 하는 거지. 한 달에 얼마씩 챙겨주는데 차 기름 값도 안 돼요. 그 사람들의 열정이 느껴져서 좋더라구. 처음엔 도와준다고 생각했는데, 가서 해보니까 내가 얻는 것도 많아요. 배우들이 왔다갔다 움직이는 걸 보고 어떤 에너지를 느껴요. 아무튼 제 입장에선 매일 공연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라이브 카페는 산만한데 연극은 사람들이 가만히 지켜보니까.
대단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뭐…… 서로 타이밍을 알기 때문에.
헤: 2집을 보면 곡마다 세션이 조금씩 바뀌잖아요. 이 곡엔 이 사람이 맞겠다, 이렇게 염두에 두신 건가요?
김: 네. 드럼 치는 강수호, 그 친구는 선배랑 한다니까 아주 극성맞게. 자기가 마이크도 여기저기 다 설치하고. 재미있었어요. 신발이 막 날아다니고. 죽여줬지.
헤: 세션 팀들과 할 때 느낌은 어떠세요?
김: 대단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뭐…… 서로 타이밍을 알기 때문에. 다 리듬 악기잖아요. 다른 타이밍에 쳐대면 자꾸 저항하는 것처럼 들려요. 타이밍을 잘 알면 딱딱 상대방 앞에 떨어뜨려 주는 거죠.
전: 마테우스의 어시스트네요.
호/헤: 뭐야~!
김: 밴드하고 달라요. 밴드가 오래 같이 해서 자기들끼리는 잘 맞는데, 떨어져 나와서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면 못 맞춰요. 근데 진짜 잘 하는 세션맨들은 그걸 맞춰요. 근데 또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3집에「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있는데, 처음 녹음한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했어요. 연주는 정확히 맞췄지. 그런데 결국 음악은「냉정한 사람」이 됐어요. 아무리 해도 안 나오겠다 싶어서 그냥 처음에 했던 걸로 집어넣었어요. 정말로 냉정히 본다면 세션맨은 하나의 기능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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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의 장인 김광석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타를 더 잘 칠까 막막했는데 이제야 조금 자신이 생겼다는 말이 계속 귀를 맴돌더군요. 그 분과 함께 거리로 나왔습니다. 헤비죠가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연극 시작하기 전에 일찌감치 가 봐야 한다며 별다른 인사치레도 없이 훌쩍 가버리시더군요. 어깨에 딱 붙은 세고비아 기타가 그를 따랐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썩 괜찮은 헤어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그가 들려줄 음악을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인터뷰 오래도록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월간대담 18] 기타리스트 김광석 - 영혼 속에 들어 있는 기타 하나 (음악취향 Y |작성자호떡바보
첫댓글 참말로 세밀하고 정성스럽고 성실한 인터뷰네요~ ^^"
네이버의 음악취향 카페에서 모셔왔더니 사진이 다 없어졌네요.
손볼게요~ 일단 출처를 클릭하셔서...^^"
흥미진진한 소설 한편을 읽어 내려가듯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일대기네요. 고마워요, 들꽃님~~^^*
늘사랑님의 표현마따나 가히 선생님의 일대기라는.
인터뷰어나 인터뷰이나 대단하십니다.^^" 저도 고마워요 늘사랑님~~^^*
이제서야 꼼꼼히 영혼속에 들어있는 기타하나를 읽어봤네여...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않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게되네여..
선생님의 모든 대화 한마디한마디에 순수한 영혼이 느껴져 너무 감동적이었구여,
마지막 사진 선생님의 또다른 모습의 기념사진에 빵 터졌습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