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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주: 문단등극을 위하여 2025년 9월에 신격호샤롯데문학상에 응모를 했으나 11월 14일 발표의 입선작에 들지 못했다. 신춘문예까지는 아니더라도 꼭 필요했지만 하는 수 없다. 내가 작가등단을 하려는 이유는 '나의 상념'이란 실재적 소설을 언젠가는 발표하기 위한 발판이다. 대한민국의 한 영혼으로 장차 우리 모두를 위한 정곡을 찌른 북극성 같은 작품이 하나 필요하다고 본다. 필력이 달리지만 그냥 사라지기 보다 MY Uncle Mono(초기 판)을 증보하여 탑재하오니 필요한 분들의 감상을 지극히 바랄 뿐이다. 다른 것보다 굳이 안되면 '나의 상념' 만이라도 나중에 자비출판을 해야 할 판이다. 필요에 의해 수정을 하더라도 일단 그대로 올려 본다.>
My Uncle Mono(응모제출본)
서사(敍事)는 길 필요가 없다. 짧아도 서사는 서사이다. 오늘도 렌이라는 소년에게는 무척 커 보이는 그 읍내는 강을 따라 해가 진다.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들 속에 소년 렌도 살고 있다. 오랜 배고픔으로 키가 덜 자라서 작지만 무척 예쁜 소년이다. 하나 누추한 몰골이다. 씻으면 엄청난 예쁜 모습의 소년이지만 씻질 못한다. 전기도 없는 부엌이 딸린 단칸방에서 홀로 자취를 한다.
렌이 자취방으로 오는 길에 모노 아저씨를 만났다. 속내라는 동갑내기여자와 동거를 하는 사이다. 길에서 가끔 같이 가는 그들을 보곤 한다. 주로 한가한 골목에서 그 둘만의 뒷모습이었다. 다정해 보이지만 저녁의 기운이 오로라처럼 붉게 서려 있었다. 바라보는 렌은 뭔지 모르게 스산하고 쓸쓸함을 느꼈다. 모노 아저씨는 삽질하는 공사판의 노가다 출신이다. 어린 렌은 속내라는 분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래도 술집에서 허드레와 밤일을 가끔 한다는 소문 정도로 여러 번 들어서 안다.
인사차 반갑게 말씀을 드렸다. “아저씨, 어딜 가나요?” 바쁜 모습이었지만 검정군복의 잠바를 걸친 그가 친절히 응해 준다. 키 크고 덩치가 나름 큰 아저씨치고는 고마운 일이다. “나? 속내 외상꽃값 받으러 간다.” “어떤 놈이 외상으로 해 놓고 며칠째 안 주고 있다.”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줌마께서 고생하신 돈이네요.” “그렇다.” 그 말에도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안 주면 쇠망치로 공짜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줄 것이다.”
모노 아저씨는 공사판 출신으로 주먹이 단단했다. 맨주먹 싸움도 잘 한다. 오랜 노가다로 손도 거칠고 솥뚜껑처럼 크다. 몸도 너무나 단단하여 읍내 태권도 당수선생이 피할 정도이다. 시비가 붙으면 씨름꾼이고 휴가 차 나온 군인이고 나발이고 간에 족족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주먹이 쇠뭉치이었다.
그에게 3류 호신술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시비 거는 족족 이마와 배와 옆구리를 쳐서 쓰러뜨렸다. 당수도장의 젊은 사범과도 시비로 붙었는데 젊은 사범이 상대가 되질 못했다. 작업장 공터의 흙바닥에 추풍낙엽처럼 거꾸러져 도장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쳐 박혔다. 젊은 사범이 이마와 배, 옆구리를 연타로 맞고 그대로 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한번은 진적도 있다. 골라서 몇 대 맞고는 쓰러져 안 일어났다. 생면부지의 상이군인출신에게 진 것이다. 같이 온 그 장애인의 어린 딸이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노 아저씨는 그 싸움에서 스스로 불타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이처럼 가난한 백성들끼리 사는 그날까지 여기저기서 서로 부대키며 살고 있었다. 비와 눈이 내려도 전설에 전설을 만들고 만들며 하루하루 연기(煙氣) 마냥 사라지면서 살고 있었다.
나라가 해방이 되고, 5년도 채 안되어 6·25라는 사변(事變)을 치렀다.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들 순진해서 어지간하면 경찰서까지는 가질 않았다. 집안에 도둑이 들어 쌀이나 돈, 금반지가 사라져도 신고를 할 줄 몰랐다. 작은 읍의 고장이지만 그래도 나름 이 동네 저 동네로 인간들이 제법 복잡하게들 살고 있다. 집집마다 대개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많았다.
마을 북쪽에 자리 잡은 장터에는 닷새 만에 장(場)이 들어선다. 기다리던 그 장날이 파장이 되면 시시한 싸움질이 여기저기에 고래고래 시끄럽게 많았다. 겨우 막걸리 따위에 취해 다 큰 남자들이 빈 주전자를 들고 비틀거렸다. 다들 고생하여 새까만 피부로 영양이 부족하고 춥고 속들이 비어 모든 행동거지에 가난한 기운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경찰서와 파출소는 무척 한가했다. 파출소 순경들이 제복을 입고 장기나 바둑을 둘 정도이다.
그런 모노 아저씨가 속내 아줌마를 인연으로 만나고 난 뒤로는 노가다를 접었다. 속내 아줌마 덕에 노가다를 안 하고도 살만 했다. 이윽고 렌이 답을 한다. “예, 잘 다녀오세요.” 누추하지만 작고 예쁜 소년의 어리고 맑은 목소리이었다. 길에서 점점 바쁘게 멀어지는 모노 아저씨를 보는 렌은 그날도 배가 무척 고팠다.
며칠 뒤 길에서 모노 아저씨를 만났다. 반가이 인사만 꾸벅 하는데, 모노가 말했다. “아, 그날! 돈 받아 왔다.” 작은 렌이 모노 아저씨를 올려 쳐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혹시 시간 있으면 저녁에 우리 집에 올래? 밥 같이 먹자.” 다 받다 왔다 했지만 렌은 느낌으로 알았다. 몇 푼 안 되는 돈이라는 것을, 그만큼 서로가 가난한 곳이었다.
그날 저녁, 아줌마께서 그 아까운 돈으로 쌀과 쇠고기를 사 왔다. 렌은 아저씨와 아줌마가 해 주신 쌀밥과 쇠고기 국을 맛있게 먹었다. 밥과 국을 함께 말아서 셋이 김치와 나눠 먹었다. 모습이 너무 행복해 마치 한 가족 같았다. 전에도 국수는 수없이 얻어먹었다. 국수는 아저씨가 혼자 있을 때 장만했다. 따끈하게 삶은 국수에 양념을 쳐서, 말아서 젓가락으로 후룩후룩 냠냠 먹었다. 모노 아저씨와 웃으며 서로서로 아이들 마냥 하하하하 하고 먹었다.
그날은 국수보다 배가 더 불러 더 행복했다. 이리저리 작고 소소한 읍이지만 렌에게는 무척 큰 도시로 느껴졌다. 서북을 타고 온 긴 물결이 마을을 북으로 이고 동서로 강을 길게 휘감다 곧 북으로 내치다가 다시 동으로 흐르면서 산과 들판 여기저기에 전설과 함께 널리 수많은 나무와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렌은 자취방에 와서 호롱불에 불을 켜고는 조용히 영어책을 폈다. 읍내 대부분의 가정집에는 전기가 들어가지만 렌의 자취방만은 호롱불이다.
주인집 노파가 전기가 불법이라고 하면서 렌이 자취방에 들어 온 그날 오후에 전선을 빼갔다. 작은 자취방으로 본채와 거리가 있는 허름하고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본채의 기둥에는 푸른색의 녹색 공용 라디오가 달려 있어, 오후에서 저녁까지 뉴스와 일일 연속극을 들을 수 있었다.
노파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란다. 렌이 인사를 마치고 그 방에 짐을 풀자 전기선을 렌이 보는 앞에서 힘들어 하면서 홀랑 빼갔다. 렌은 우두커니 보고만 있다가, 어둡고 캄캄한 밤을 며칠 보냈다. 그러다가 아끼고 아낀 돈으로 장날이 되어서야 겨우 호롱불과 등유를 사 왔다.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교과서를 펼쳐보았다. ‘Tom & Judy’ Tom과 Judy가 영어교과서의 표지로 나온다. 아름다운 나라, 미국의 소년소녀이다. 밝은 2층 양옥집의 푸른 잔디밭에 앉아 정겹게 담소하는 모습이다. 윤기 흐르는 하얀 피부, 단정한 옷차림, 예쁜 금발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풍성해 보였다. 볕이 총총 내리 쬐이는 따뜻한 모습의 정원이다. 전혀 배고픈 모습이 아니다.
렌의 목소리가 낭독으로 문틈을 타고 진동으로 밝게 여기저기 흐르고 있었다. ‘Tom & Judy. I am a boy. You are a girl.’ 혼자 자취하고 있는 렌의 방에 호롱불이 팔랑거리며 타고 있었다. 등유는 꽤 많이 남아있다. 어린 렌은 일찌감치 등유의 중요성을 알아 등유만큼은 충분히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렌은 그가 왜 배가 자주 고픈지 모른다. 그냥 밥을 덜 먹어서 그런 줄만 안다.
1년이 지난 후 모노 아저씨가 안 보이더니, 아주머니도 같이 영영 안 보였다. 대구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비 오는 어느 날 몹시 추웠다. 자취방에서 혼자 덜덜 떨었다. 배가 또 고파왔다. 렌은 그분들이 그리웠다. 렌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은 모노 아저씨께서 자주 해주신 국수 한 그릇들이었다. 그리고 속내 아줌마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마련해준 흰 쌀밥과 쇠고기 국물이다. 그럴수록 방안에 찬 공기만 더욱더 가혹하게 냉랭히 채워졌다.
그로부터 1년 수개월 후엔 렌도 그 읍내를 떠나 대도시 부산으로 왔다. 삭풍(朔風)과 크리스마스의 냉기가 본격적으로 마을을 내리 덮치기 할 때 빠져 나왔다. 1970년 가을이 가고 12월 말로 무르익어가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렌은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오기 전에 아무 고민 없이 그곳을 벗어 나왔다. 여름에는 몹시 무덥고 겨울에는 강이 통째로 야밤에 소리를 내면서 꽁꽁 언다는 대구와는 정 반대 방향이다.
렌은 겨울에도 바다마저도 따뜻하다는 남쪽으로 몸을 돌린 것이다. 너무 자주 굶어 하얗게 여위고 키가 덜 자란 그 상태로 몸만 빠져 나왔다. 검정색 교복도 하얗게 낡아 닭아 있었고 그의 몸엔 때가 득실거렸다. 그가 빠져 나온 그 땅은 렌의 조상들이 태고의 유사 이래 대대로 살아 온 땅이다. 산속의 우거진 숲에는 천년 조상들의 묘소가 여기저기에 차례로 그득했다. 마을 북쪽의 자갈강변엔 종가(宗家)의 전답이 지주(地主)의 땅처럼 산허리까지 크게 있었다. 쪼개지고 나누어지고 6·25사변 직전에 토지분배개혁까지 당했지만, 여전히 종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크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의 그 전답에서 쌀과 감자, 옥수수, 보리, 콩 등이 수확기 마다 대량으로 산출되었다. 여분은 모두 읍내시장 등으로 가마니채로 팔려 나갔지만 렌은 전혀 모르는 일로 오로지 남의 일일 뿐이다. 어린 그가 그래도 굶어서 안 죽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너무 굶어서 창백하고 작고 여윈 모습으로 그곳을 빠져 나왔다. 보고도 모르는 나이로 홀로서기를 못해 허약하고 볼품도 없이 병든 아이 마냥 다니다가 빠져 나온 것이다.
그래도 그는 걱정 하나 하지 않았다. 학교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녔다. 배가 고프니 힘도 없고 혼자가 되었다. 누추하니 저절로 혼자가 되었다. 마음이 혼자니 몸도 혼자가 되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그곳을 하직하듯이 등져도 아무도 몰랐다. 그냥 소리 없이 홀로 사라져 나왔다. 떠나면서 그는 학교도 친구도 모두 잊어 버렸다. 3년간 배운 교과서들도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다 잊어 버렸다. 추억의 흔적 모두가 소각되었다. 공책은 첨부터 없었다. 볼펜과 연필은 몇 자루 있었지만, 친구들이 쓰다가 그냥 준 것이다. 필기는 책의 여백에다 했다. 그것이 오히려 공책에 하는 것보다 렌의 공부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교실에서는 뚫어지게 칠판만 보다가 학교를 파하곤 했다. 보면서도 마음의 눈은 감고 있었다. 체벌로 한번은 시범케이스로 맞았다. 약한 먹잇감으로 누가 봐도 시범케이스로는 제격이었다. 그런 일을 당하는 렌의 몰골로 보면 조상들이 다 와서 봐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약하고 왜소하고 누추하다보니 시범삼아 버려도 되는 희생타로 졸지에 당한 것이다.
렌은 특이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제시된 문제들을 다 풀지 않았다. 짝수 문항이나 아니면 홀수 문항만 차례대로 몇 개 풀고, 나머지는 그냥 마음속으로만 답을 달았다. 답을 알더라도 홀수나 짝수 문항 가운데 몇 개만 답을 적고 그대로 제출하였다. 아주 어렵게 보이는 문항은 답을 알아도 피하고 갔다. 그런 문항에 답을 단다는 것은 렌 스스로가 생각해도 아찔하고 아주 위험한 짓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사나 학생 어느 누구도 그런 렌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다. 느낌으로 알아도 다들 그냥 바삐 지나간 셈이다. 생존의 세계에서 렌은 이런저런 일들로 더 조용해졌다. 갑작스런 해방으로 급조된 신생국이라 학교 자체도 궁핍한 것이 많았다. 학교는 멀리서 보면 아지랑이처럼 아득히 피어오르는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하나 빈궁한 처지로 학교마저도 모든 것이 허약하고 운명의 지시에 의지해서 그냥 살아가는 시절이었다. 렌은 자신을 시궁창의 굶주린 생쥐처럼 여겨졌다.
그런 렌이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교내미술대회에서 전교1등을 했다. 전교1등이지만 누추한 가정으로 아무도 관심을 가질만한 형편이 되질 않아, 얼마 후 그 상장은 어디로 갔는지 유실되어 버렸다. 렌으로 봐서는 그 상은 정말로 너무나 운이 좋아서 탄 상장이었다. 3월에 다른 학교에서 부임하여 온지 얼마 안 되는 미술부서담당교사가 얼굴도 모르는 렌에게 5월의 미술대회에서 그 상을 준 것이다. 렌에게는 어마어마한 상이었다. 그때 마음속에 새겨진 그 상장은 허약한 렌을 평생 지탱해주는 엄청난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렇게 감수성이 깊게 풍성하고 끝없이 풍부해야할 시기이지만 렌은 그곳을 빠져 나오자마자 자취방도, 학교의 운동장도, 오곡백과로 풍성했던 을씨년스런 마을의 풍경도 금방 다 잊어버렸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마치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크면서 서서히 잊어가는 아이와 같았다. 그래도 어리고 아픈 데가 없으니 모든 것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모노 아저씨 부부는 그곳을 떠나기 직전에 읍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단다. 그리고 읍내 사진관에서 두 분이 결혼사진을 찍고 며칠 후 찾아 갔단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노 아저씨는 천사라고 하고, 속내 아줌마는 보살이라고 했다. 천사와 보살이라고 담장을 타고 렌에게까지 울려 퍼진 그 말을 들은 그는 정신이 멍멍했다.
그곳을 홀로 등지면서 그가 소상히 기억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더럽게 보이는 베게와 솜이 여기저기로 터져 나온 까만 때로 얼룩진 무명이불, 땀 냄새가 배긴 두꺼운 요와 그 아래로 천천히 냉기 흐르는 냉골 바닥, 어두워오는 자취방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밤마다 성냥으로 피운 호롱불 정도이다. 책도 연필도 가방도 다 그대로 두고 나왔다. 그리고는 그마저도 바로 망각했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소중히 여긴 등유와 호롱불도 어디에 두고 왔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촘촘히 사는 빈한한 촌락이지만 그곳도 너른 들판이 있고 태고의 푸른 강물이 유유히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울렁이는 강물에 물결치는 달빛 속에서 고요해 보이지만 숨 가픈 희로애락의 숨결이 여기저기에 시시각각의 흔적으로 엄청나고 위험하게 깊게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누추함 속에서도 창백한 빛으로 홀로 아름다움이 소녀처럼 안으로 번지면서 넘쳐나는 어린소년 렌에게는 어쩌면 이제 이곳이 서서히 몸에도 맞지 않는 아주 위험한 장소가 되어가는 중이기도 했다.
그냥 그대로 있다간 액운의 희생타가 되어 철장의 감방으로 가야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들이란 모조리 땅바닥에 붙여 사는 배설의 미물로 결정적인 순간엔 서로가 벌레와 진배가 없다. 알리바이가 있더라도 무시당하면 그만이다. 굶주려 비루하게 나약한 자에겐 이웃들이 오히려 아차 하는 순간엔 악귀를 대동한 신(神)의 죄악처럼 절명의 비수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정해진 수순의 수많은 전설처럼 변고의 액운이 가장 약한 고리인 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허약하고 작지만 더 자라기를 그만 포기하고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시기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누적된 인연으로 서로가 다 아는 시골보다는 번잡하지만 서로가 전혀 모르는 큰 도회지가 렌이 몸을 숨기기엔 더 안전하고 좋은 곳이다.
그래도 혹여나 하고 참고 그곳에 계속 있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모두가 렌의 모습을 익히 너나없이 잘 알아도 렌은 그냥 마을을 홀로 걸어 다니는 작은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했다. 굶어서 겨우 기어 다니는 가을모기처럼 꺼져도 되는 왜소한 몸으로 차갑게 얼어가는 삭풍의 겨울 속으로 점점 걸어가는 영양부실의 아이일 뿐이다. 여자아이로서 성숙하다간 동정을 넘어 음욕의 대상이 되어 자다가 여럿에 능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지고 달도 지면서 이웃의 천사가 동네 악마가 되는 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선사시대에 산다면 순장이나 인신공양이 되었을 것이다. 삼천년의 아득한 전설로 임당수의 풍년제 인신공양으로 매겨져, 청아하고 순박한 다 큰 우유 빛 몽정이 그의 정갈한 허벅지를 흥건히 적시기 위하여 금단의 성문이 열릴 때 어린 처녀의 제물 같은 그를 노리는 검은 사자(使者)가 냉기 가득한 밤기운 속에 호롱불을 입김으로 후하고 불어 끄고는 주린 채로 냉골로 잠자는 렌의 방을 덮쳐 입과 손발을 포박하여 해와 달이 보는 가운데 주변의 온 산동네가 신바람 무당의 굿 소리 장단에 발맞추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북과 피리소리 가운데 산천수의 제물로 강물 속으로 멸하게 했을 것이다.
태고의 한 전설에 렌 같은 소년이 있었다. 굶주리며 누추하게 홀로 살다가 인신공양으로 사라진 그 소년의 자태는 전무후무한 극한 미(美)의 모습으로 주변동네의 모든 여자아이들을 완전히 능가했다. 이제는 남자아이도 잘 생기면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온 마을을 덮쳐 소년을 가진 모든 어머니들까지 떨게 하였다. 그 공포가 변곡점이 되어 그 풍습은 단번에 사라졌다. 시대의 변곡점이었다. 어쩌면 그 소년이 삼천년을 다 채우고 다시 이 마을로 잉태되어 온 지도 모른다.
렌이 유년시절에 동네아이들이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수없이 끼리끼리 한 이야기이었다. 그때마다 홀로 사는 배고픈 아이가 온 동네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 속 어느 소년도 은하수 가득한 그믐밤에 배고픈 채로 홀로 흙집에서 잠들다 야밤의 동네 전설이 되기 위해 요물로 분장당해 손발이 뒤로 묶인 채로 포대기 천에 싸여 스며드는 차가운 강물을 마시며 바들바들 떨다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한 액운이 오기 전에 짙은 때가 깊숙이 배어 있는 옷만 걸치고 렌이 그곳을 운 좋게 빠져 나온 것이다. 슬프고도 가련한 숙명이었다. 그런 숙명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희미하지만 악마인지 천사인지 신의 은총과 같은 우주의 한 기운이 렌을 확실히 비추고 있었다. 기억이 아득한 할머니와 어린 손자 사이에 밤마다 화롯불 이야기로 이어지는 마을의 한 전설이 되기 전에 그는 그 땅을 빠져 아무 생각 없이 무사히 나온 것이다.
렌은 시간 속에 모두를 망각했지만, 모노 아저씨만큼은 줄곧 생각이 났다. 백전불패의 모노 아저씨와 속내 보살 아줌마이다. 모노 아저씨가 상이군인출신에게 얼굴과 몸통 등에 골라서 적당히 몇 대 맞고는 같이 온 그 상이군인의 어린 딸 앞에 아주 천천히 쓰려져서 안 일어난 일은 렌의 뇌리에 굳게 박제로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량한 일도 렌에게는 오로지 남들만의 사치스런 일이다. 그는 여전히 작고 약했다. 그가 아무리 착한들 모노 아저씨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너무나도 뼈 채로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여전히 부지런히 일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당만이라도 무사히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안쓰러워도 그것으로 족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래도 여전히 렌의 정신적 추(樞)는 그날 그냥 쓰러진 모노 아저씨이다.
하나 나이가 더할수록 몸과 마음과 정신이 제때의 성장을 놓쳐 버린 렌에게 지나간 아쉬움이 가슴에 쓰러진 체념의 물처럼 스며든다. 그럴 때 마다 모노 아저씨가 생각난다. 세월과 함께 다시금 느껴보니 천천히 쓰러져 가던 모노 아저씨의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이 젊은 어느 날 잠시 읽은 잡지에 실려 있었던 도덕을 깊이 아는 철학자와도 같았다. 어느 누구도 하기 힘든 심신을 도덕으로 담아 깊게 흐르는 철인(哲人)의 모습이었다. 렌의 가슴속에 표박의 심지로 살아 있는 'My Uncle'이다.
단순한 하급 일용노동자이지만 작업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하여 무슨 일이든지 시작한지 한 달만 지나면 보통 직원들보다 생산량이 더 가능했다. 제품 마무리와 정리정돈도 깔끔하고 완벽하고 깨끗했다. 일하는 작업장마다 그렇게 일하니 사장들이 생산량만큼 임금을 더 주었다. 말없이 오로지 일만했다. 마음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라 백치처럼 몸과 마음과 정신이 너무나도 건강하고 맑았다. 전혀 근심이 없으니 아픈 데가 하나 없고 치아도 초원의 사자마냥 튼튼했다. 2년마다 하는 건강검진 때도 작아보여도 몸무게는 많이 나갔다. 정신지체아마냥 강하고 부드러운 물살로 체구가 작아도 약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의 식사시간이 되면 소년 내내 엄청 굶어서인지 많이 먹지는 못해도 식성이 무척 좋았다. 중식으로 제공된 곰탕도 소금을 전혀 치지 않고도 김치와 함께 맛있게 잘만 먹었다. 출근은 일찍 하지만 퇴근만은 정확했고 인사하고는 바로 사라졌다. 일체의 모임도 없었다. 아는 이를 길에서 만나도 그냥 스쳐갔다. 웃음기가 전혀 없어 친구로서 가까이하기엔 뭔지 모르게 섬뜩했다. 조기출근과 정시퇴근만이 그의 일상이었다. 책에서 보니 폭력보다 폭언이 더 가슴을 때린다는 구절이 있었으나 렌은 이를 크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 하나를 크게 다쳤는데 그 회복이 생각이상으로 더디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손가락을 보면서 그는 깊이 느꼈다.
망신을 주는 모욕이나 폭언도 신체를 훼손하는 사고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돈으로 직결되는 노동자의 생명인 생산력이 떨어졌다. 평소에도 말이 적었지만 그 후론 렌은 상대방의 말들에 대하여 가타부타를 심정적으로도 전혀 더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신(神)의 소리로 여기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가 덤으로 더 느끼는 것은 폭언이나 망신에 대한 대응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소이가 없다면 그냥 가만히 듣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가 일하면서 들은 가장 무책임한 말이 미안하다거나 송구하다는 말이었다. 누구를 진정으로 자신마냥 여긴다면 사과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자신의 책망을 다 받고 책임을 지는 것이 옳은 길이라 여겼다.
주어진 일에 빈틈없이 성실했지만 2년이 되기 전에 직장이나 일터를 옮기곤 했다. 어릴 적 경험으로 사람 자체를 멀리하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다가올수록 더 외로웠다. 그럴수록 차가운 냉골바닥이 강물처럼 그의 가슴을 후비 치며 지나갔다.
어렴풋하지만 노년으로 점점 더 빨려 갈수록 렌이 꾸는 꿈이 하나가 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렌이 믿고 가져보는 오래된 하나의 꿈이다. 살아생전에 건강하고 좋은 집에서 살면서 온전하게 더 노인이 되면 자신에 대한 대우가 혹시나 조금은 더 나아질까 하곤 한다. 렌은 그것을 희망삼아 깊어가는 노년의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자신은 스스로도 아무 걱정 없이 건강하기 때문에 아주 오래오래 살 거로 보였다. 그래서 홀로 있을 노년을 위해 국민연금은 매월 불입(拂入)으로 꼭 챙겼다.
그는 생존을 위해 어떤 정신 하나를 어릴 적 스스로 알아서 잘라버렸다. 어떤 방법이나 방도가 없으니 잘라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것은 급하면 누구나 행하는 신(神)의 섭리일 것이다. 나병환자의 무고통과 같았다. 살기 위해 그 귀중한 자긍심의 소인(素因) 하나를 몸과 마음과 정신에서 뿌리째 뽑아 소각한 것이다. 그 자긍심을 소각한 자신의 모습을 유추할 적마다 TV에서 본 중동의 이슬람 여인들 같았다. TV에서 보니 그토록 아름다운 중동의 여인들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다. 그렇게끔 렌이 자신의 목숨하나를 부지하려고 그 영혼을 뿌리째로 뽑아 버린 것이다. 영혼 없는 아이 하나가 짙어오는 냉기의 별빛 아래 땅거미 지는 푸른 초원의 옅은 사막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양젖을 구걸하기 위해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천막 앞에서 가죽 그릇을 하나 들고 높고 깊어가는 은하수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운 좋게 이래저래 살아남아 세월의 나이 덕분에 이제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월의 때가 짙게 묻어 우선 돈이라도 더 벌면 자신에게 무척이나 이로운 것이다. 렌은 이미 오랜 전부터 노년을 위해 임금이나 품삯을 받으면 주식이나 은행에 돈을 모으고 모으면서 나아갔다. 빈곤한 가운데 돈은 무조건 한 푼이라도 아껴 더 모으면서 비밀로 나아갔다. 더러 교활한 업자를 만나 임금을 제때 주지 않으면 말없이 그대로 노동청사무소를 찾았다. 조용히 기다리면서 법이 해결해 주는 만큼 받아갔다.
시대가 좋은지 운이 좋은지 하늘과 땅, 바다에서 모두가 찬연히 번창하는 시대를 잘 만나 하급 노동자를 하면서도 야금야금 모은 주식이 수십 배로 늘어 이미 복리를 심하게 타고 있었다. 주변에서 너나없이 모두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일자리가 넘쳐 그가 일자리를 자주 옮겨도 남 몰래 작은 부자가 된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자족의 큰 부자인 셈이었다. 그래도 그는 남들의 이목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 돈 이야기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내내 혼자 따뜻하게 밥하고 빨래하고, 소소하게 10원 20원으로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아간다.
이제는 그도 모든 것이 잘 구비된 큰 방 하나와 큰 거실이 있는 룸에 보증금을 걸고 달세로 살고 있다. 세상을 알기 위해 조간신문은 꼭 챙겨본다. 일이 없거나 혹여 쉬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쉼 없이 지나가는 차들을 보고 또 본다. 그때마다 희미하지만 뚜렷한 잔상이 마음속에 하염없이 뜬다. 검은 액자 속에 모노 아저씨와 속내 아줌마가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또 소반에 높게 포개진 국수그릇들과 한 그릇의 흰 쌀밥과 따끈한 쇠고기 국물이 더하여 있다. 그리고 자취방의 전기를 불법이라며 바로 끊어가는 노파의 뒷모습과 냉기 흐르는 자취방과 저녁을 팔랑거리며 밝혀 준 호롱불이다. 차가운 그런 장면들이 렌의 가슴에서 스크린처럼 막막 지나간다.
예나 지금이나 배는 항상 고프지만 그는 매우 건강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국과 반찬 하나를 식판에 담아 먹을 때 더 없이 행복했다. 밥은 매번 먹을 만큼만 전기밥솥으로 했다. 식사를 조금이라도 더 하면 구토가 오기 때문에 그는 늘 소식이다. 룸에만 있을 때는 늦은 아침과 늦은 오후로 하루 두 끼만 소량으로 했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렌에게도 세상은 빈틈없이 급하게 사정없이 변하면서 급물살로 흘러갔다. 렌은 그런 모습에 수없이 당황하면서도 마지막의 자신의 꿈은 마음에 드는 좋은 집을 임대받아, 어느 조용한 아침에 홀로 자면서 영면(永眠)하는 것이다.
그는 가난하면 누구나 받는 노인기초연금도 매달 꼬박꼬박 받고 있다. 그리고 많지는 않았지만 소액으로 긴 시간 납부한 공적노후연금도 받고, 다분히 쌓아 놓은 주식배당금도 소소하게 잘 받고 있다. 모든 흐름이 스스로 준비한 만큼의 이상으로 만족하게 잘 되어 있다. 이제는 그도 만족한 만큼 이상의 행복한 사람이다. 렌은 본인이 사멸하면 저축통장은 그대로 두고 갈 것이다. 자신의 돈을 불리며, 안전하게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준 투자처에 보답의 마음으로 그대로 그냥 두고 떠나려하고 있다. 돈에 대한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준 투자처이다. 사후에는 통장이 자동으로 정지가 되기 때문에 큰 고민이 없다.
이제 나이가 드니 종종 꿈속에서 고향에 다가 가보는 꿈을 꾼다. 아무도 없는 그 시각에 걸어서 가는 것이다. 별들도 안 보이는 어둠을 타고 내내 희미한 달빛을 지고 걸어서 가는 것이다. 꿈속에서 고향을 느낀다. 오랜 세월 끝에 노년의 몸으로 고향에 다가가는 꿈을 꾼다. 렌에게 세상은 늘 같은 모습이다. 세상이 다만 자신의 가슴 속에서만 나이가 들뿐이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 볼 때 마다 똑 같다고 여기고 있다. 인간이 없으면 없는 대로 완벽한 세상이라고 여겼다. 모순이란 것도 ‘나’라는 한 개인의 삶에서만 비롯되므로 사람의 탄생이 그는 그리 반갑지 않았다. 가끔은 세상을 관조하는 현인처럼 느끼면서도 렌의 생각은 바로 늘 그곳에서 끝난다. 아는 것이 더 이상은 없었기 때문에 결론은 늘 야박하였다.
끝없는 생각 가운데 렌은 또 스스로 자신을 근세기 프랑스 시골의 하급귀족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그 정도의 신분은 스스로도 되는 것 같다. 렌의 커피 잔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차나 커피를 담기위해 하인들이 뜨거운 물에서 꺼내야 하는 귀족의 잔처럼 두꺼운 진홍색의 영국산 고급본차이나 자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달세로 사는 룸도 나름 고급이라 부유해 보이는 입주자들이 꽤 있다. 금발의 남녀백인과 곱슬머리 흑인여자도 몇이 보인다. 렌 자신이 사는 곳이 이미 국제도시인 것이다.
룸에 입주 전 계약서에 사인하는 날, 주인이 주는 커피를 마셨다. 코로나방역마스크를 벗고 마시는 모습에 주인이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계약서에 표기한 나이보다도 너무나 훨씬 어려 보이는 것이었다. 심미적 눈빛과 선명한 이목구비에 여성미가 물씬 거렸다. 얼굴과 외모에 은은하지만 서늘한 지성미가 번지는 가인(佳人)이었다. 결코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는 예상외의 모습이었다. 불가사의한 모습의 서늘하면서도 섬뜩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낭인의 자태이었다. 엄청난 사치를 해도 남을 이런 분이 허름한 복장으로 다니다니 아쉬움과 연민이 들었다. 그 순간 주인의 눈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 후론 렌의 그 서늘하지만 극도로 아름다운 미안(美顔)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기가 쉽지 않았다. 여전히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주인의 가슴을 휘감았지만 입주 후엔 주인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렌은 코로나가 오기 전엔 모자만 깊게 내려쓰고 다녔지만 코로나덕분에 이제는 마스크로도 얼굴까지 마음 편히 가릴 수가 있게 되었다. 렌이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이 불가사의한 엄청난 미모의 아름다운 낭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작고 빈궁해보여 노출하기 싫은 공허한 아름다움이었고, 신 내림 같은 서늘한 공포가 그 주위를 무언으로 타고 있었다. 누구라도 가까이하다간 순간 급살의 위기를 당할 수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스크 덕분에 이젠 그런 노출의 걱정이 완벽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방점검 차 주인은 일부러 점검기사들과 렌의 방에 들어왔다. 집주인으로서 렌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서재에 있는 가지런한 책들을 보고는 주인은 안도감을 가졌다. 거실의 서재에는 주식, 건축, 산행, 야생화, 음악이나 미술사, 철학이나 법률, 역사 등으로 수준이 있는 교양도서가 차례로 기품 있게 보였다. 별로 많지 않는 60여권이지만 두께가 있는 크기의 서적으로 남다른 존경과 외경을 느낄만했다. 벽에는 나이 든 렌의 모습이 영정사진용 액자로 있었다. 노년임에도 심미적 눈빛과 함께 너무나 착한 모습이었다. 인자함이나 온화감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직접적인 착함이었다. 그러면서도 지순한 고독감이 깊게 함께 배어 있었다. 그 액자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이런 분이 자신의 손님으로 온 것이 신(神)이 내린 엄청난 선물이라 느껴졌다.
여전히 렌은 창가에 앉아서 빈 따뜻한 커피 잔이 더 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취된 마냥 오로지 분주히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만 보고 또 본다. 하지만 그의 의식만은 고독이나 외로움과는 거리가 완벽히 멀었다. 건전하고 아름답고 건설적이고 멀리 보는 지도자처럼 원대했다. 배운 것이 박(薄)하여도 바이칼 호수의 냉기를 마상(馬上)에서 깊게 마시며 천천히 내려다보는 잔혹한 초원의 칭기즈칸처럼 넓고 깊었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녹색이 깃든 푸른 앞치마를 탁자 위에 접어서 놓고 텅 빈 커피 잔이 더 식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정리해야하는 그에게 모노 아저씨 부부(夫婦)의 소식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영면(永眠)의 문턱에서 그 두 분이 렌을 누구보다 먼저 기다려줄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만남을 영혼으로도 거부한지가 오래다. 하지만 모노 아저씨 부부만큼은 피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하지만 그런 만남은 멸절(滅絶)의 세계에서는 아예 불가능이 아닌 불능일 것이다. 만남자체가 하나의 착시일 것이다.
렌의 책상 앞에는 가입한 상조회사의 이름과 알림판이 크게 붙여져 있다. “저의 이름과 생년월일과 가입번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비는 완납했습니다. 독거노인이니 잘 부탁합니다. 장지(葬地) 등은 저의 돈이 되는대로 그냥 편안한 곳이면 됩니다. 구청 공무원 담당자께서 더 필요한 돈은 저의 책상 옆에 고정된 금고 안에 넉넉히 있습니다. 열쇠와 비번은 금고아래 바닥에 같이 있습니다. 혹시 몰라도 전문기사님을 부르면 다 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인에게 방을 빌려준 사장님께도 사례비를 얼마간 봉투에 별도로 넣어 표기하여 마련해 놓았습니다. 저에 대한 일이 다 끝나면 제가 낸 보증금과 함께 그냥 가져가시면 됩니다.”
이렇게 렌은 상조회사 알림판을 그의 책상머리에 풀과 테이프로 단단하게 고착하여 놓았다. 그리고는 방을 비울 때 마다 일간 신문지로 한 겹 덮여,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연필 한 다스로 눌러 놓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한자 위주의 번역물인데 무엇보다 정신현상학이란 제목이 맘에 들었다. 동네도서관에서 보고, 구입하여 이리저리 읽어 보고 있다. 마치 홀로 사물을 바라보는 렌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스스로 탐독하는 거와 같았다. 문장하나하나와 문단하나하나가 장엄한 생명체가 되어 온 세상으로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하루살이마냥 퍽 사라지는 것이 난삽하게 그지없이 아무것도 아닌 렌인 그가 마치 잠시 살아 있다가 저녁이 오면서 통째로 사라지는 햇살과 함께 빛이 없는 속으로 그냥 그대로 멸하는 거와 같았다.
렌의 룸에서 남(南)으로 멀리 보면 도회지가 동서로 깊게 흐르는 대하(大河)의 강물로 망각한 고향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커튼을 열고 침실에서 그 대하를 바라보다가 렌은 잠이 든다. 렌은 꿈속에서 그믐이 다가오는 하현달빛을 받아가며 그 땅 자신의 천년 고향인 그 외진 언덕의 어릴 적 혼자 놀던 골짝으로 새벽밤이슬을 받아가며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곤 한다. 자신의 마지막 끝 영혼을 위하여 그 땅으로 그는 매일 밤 꿈속에서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것이다. 냇물도 없이 강물만 있는 그곳으로 걸어서만 간다.
이렇게 하염없이 그 땅과 꿈마저도 렌에게 깊은 내홍을 주지만 그래도 그는 따뜻한 미등이 은은히 별처럼 내리쬐는 크고 높은 룸의 큰 침대에서 내일의 석양을 위하여 오늘도 여전히 깊은 잠을 따뜻하게 느끼며 잔다. 그리고는 또 강물을 따라 내내 그곳으로 여전히 낡은 옷차림에 흙이 서린 신발을 신고 회색 망태기 하나를 어깨에 좌우로 걸치고 홀로 수풀 가득한 그 길을 따라 걸어만 간다.
차가운 달빛의 추운 가을 밤바다 같은 하늘엔 옅은 구름이 전체로 낮게 배어 별들은 가고 없고 희미한 달빛만이 산자락 지평 아래로 몸을 숨긴 채 떠오를 시각만을 기다린다. 그 언덕 골로 시야를 느끼며 렌이 점점 멀리서 나마 서서히 다가갈 때 동녘의 지평에서 어릴 때 수없이 바라 본 산허리를 수직으로 안고, 구름사이로 여과된 빛을 가득하지만 희미하게 내치는 달빛이 산허리를 타고 또 하나의 밤을 지새우려 하나의 영혼에서 온 우주를 깊게 채울 것이다. 그는 사후에도 떠돌이 혼백으로 혼자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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