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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수필가 한글학자 -조홍제
김지철 시인
작가 연보 (1926년~2001년)
1927년(1세) 울산 농소읍 창평리 출생 1941년(14세) 농소공립심소학교(현 농소초등학교) 졸업 1949년(22세) 울산농고(6년 과정, 7회) 졸업 1953년(26세) 동아대학교 문리학부 문학과 졸업 1955년(28세) 언양농고(첫 발령), 울산공고, 울산여고 등에서 40년간 교직에 헌신 1966년(39세) 한국문협 울산지부 창립 회원으로 참가 1969년(42세) 『현대문학』에 「한글전용에 관하여」라는 설문지에 답하는 글을 발표. 『울산문학』에 첫 시 작품 「망부석」을 발표 1970년(43세) 『울산문학』 수필 「고운말」, 『처용촌』창간호에 「울산말의 특징」 발표 1971년(44세) 『울산문학』 2호 시「나무」, 『처용촌』에 「한글이름」 발표 1976년(49세) 한글문화협회 울산지부 결성 지부장이 됨. 회원인 이춘걸, 이준웅, 오민필, 오반식, 서진발, 이부열 등과 함께 「울산간판실태조사」라는 팜플릿(11쪽)을 내다. 이 해 한글학회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활동 1978년(51세) 한국문협 울산지부장이 됨. 울산예총 부지부장이 됨 1979년(52세) 『울산문학』 4집이 6년 만에 복간. 이 출판 경비는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충당함 1980년(53세) 중등교장 자격 취득 후 욕지중학교를 시작으로 계성중학교, 일산중학교, 울산중앙중학교장(퇴임) 역임 1983년(56세) 『울산문학』에 「울산방언」를 발표하면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 1985년(58세) 울산수필동인회 회원으로 활동 1992년(65세) 40년간 교직 정년퇴임. 수필집 『 』 (울산저널) 출간. 시집 『내일은 비가 와도』 (해성) 출간 1993년(66세) 『경상일보』에 「우리 고장의 지명 유래」 (46회) 연재 2000년(73세) 울산사투리를 집대성한 역저 『울산방언』 (제일) 출간 2001년(74세) 생을 마감(농소 가대동 선영에 안장). 4월 20일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추모 문학의 밤이 열림 2002년 제2회 울산문학상 수상. 제5회 울산광역시 문화상(문학) 수상. 조홍제 문집1 『달맞이꽃은 달 없는 밤에도 핀다』 (도서출판 제일) 발간
시, 수필, 한글을 사랑하다
시인이고 수필가이며 한글학자이신 선생은 울산 북구 농소 창평동 출생 으로 본관은 함안이다.
농소 공립 심상 소학교(농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 공립 농업중학교 6년 과정을 졸업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저서를 읽 고 대학을 문과로 가기로 결정후 한글 사랑과 연구로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 심하고
동아대학교 문리학부 문학과 4년을 마친후 울산방언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후 여러 중·고등학교를 거쳐 모교인 울산농림고등학교(울산 공고)에서 14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교편을 잡아 왔다.
선생은 첫 부인 사별이란 아픈 마음이 있어서인지 소월의 초혼을 그렇게 애절하게 애송했는지 모른다.
선생은 도서 오지인 거제도 욕지중학교 교감 으로 다년간 근무하시다 울산 중앙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울산문협회장을 10대에 이어 11대까지 지냈으며 슬하에 5녀를 두었고 맏 사위가 중견
문영 시인이다. 시집으로는 『내일은 비가 와도』를 출간했으며울산 사투리를 연구하신 선생은
방대한 『울산방언』을 집필 완간 하셨다. 유고집으로 『달맞이 꽃 은 달없는 밤에도 핀다』를 여러 후학들과
제자들의 고증으로 출판되었다. 선생의 많은 제자들을 두고 외람되게 내가 작고문인 돌아보기를 부탁 받 은 것은
조금은 이치에 맞지 앉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 평소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나 또한 그 단아한 생전 모습이 늘 마음속에 자 리 잡고 있었다. 젊은 날 하릴없이 방황했던 날 많은 힘이 되어주셨고 후에도 여러 방면으 로 관심을
보여주셨지만 선생께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초라한 시인 이력서 한 장 뿐인 것이 못내 안타까워질 뿐이다.
2001년 봄날에 선생은 고인이 돠어 초혼 곁으로 떠나갔다. 선생의 애칭 ‘초혼 선생님’의 애송시 「초혼」을 잠깐 그려본다. 1971년 10 월 반구대 문협 야유회 때 선생의 그 낭랑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가 끔 귓전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때 회원들은 아무 말없이 그저 숙연하게 듣 고만 있었다. 언덕위 풀밭에 앉아 서산에 지는 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 였다.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선생의 초혼은 누구인가를 잠깐 그려보 다 나의 생각도 초혼에 빠져 들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켜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핸드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낭송하시던 선생의 모습에서 초혼을 그렇게 애송하시던 알지 못할 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반구대의 저 녁나절 짧은 해가 설핏한 햇살을 만들며 비켜 가고 있었다. 멀리 산마루에 붉은 해가 반쯤 걸려 있었다. 기사와 함께 온 김인섭 유공공보과장이 배려한 차가 반구대를 벗어 나올 때까지 모두들 초혼을 생각하 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후 선생은 길에서나 모임에서 잠깐씩 만나면 전에 없이 단아한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한 번씩 듣는 울산방언 ‘칼클타(깨끗하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좀 생소 했지만 울산방언을 구상하고 있는 선생의 생각은 변함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울산방언』을 내실 때 선생은 지역을 직접 찾아 다니며 지역민들의 사투 리를 직접 듣고 참고하는 부지런함과 치밀한 것이 있었다. 그런 중에도 수 필집을 내시고 수필 동인회 회장을 다년간 지내셨다. 그리고 그 이전이지만 한글문화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된 후에 간판 정화 운동에도 나섰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를 써 왔지만 등단을 하지 않았다. 사후에 등단한 것 은 드문 예다. 선생께 시인의 간판을 달아준 곳은 《동방문학》이다. 선생은 그 이전에 시집 『내일은 비가 와도』 를 출간하여 1992년 2월 이미 시인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이 밖에 선생의 행적은 너무 많아 주목할 만한 몇 가지만 작고문인 돌아 보기에 적었다. 선생은 2001년 3월 20일 7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열다섯 해가 지나도록 선생의 애송시 초혼의 이름 하나 허공 중에 흩어진 다. 또한 붉은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때마다 치자 빛 자막으로 생각 저편에 깔린다.
초혼 선생과의 몇 가지 추억,내가 초혼 선생을 자주 뵙게 된 것은 교단에서보다 초창기 울산문협이나 백일장 행사 때였다. 칠십 년대 초의 문협 식구는 단출하여 십여 명 안팎의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주로 성남동 사거리 지하 명다방에서 만나 작품 발표 및 문학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곤 하였다. 그때 난 희미한 불빛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선생의 단아한 모습을 보았 다. 모임이 끝나고 헤어질 무렵엔 몇몇 선배 문인들의 뒤풀이가 뒤따랐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몇몇 선배 문인들은 뒤풀이를 위하여 골목길로 촘촘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때 난 성남동 사거리 한 모퉁이를 혼자 돌아나가는 선생의 뒷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성남동 제일교회 뒤의 김태근 선생 자택에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사모님이 손수 차려온 술상 자리에 젊은 내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 니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그때 제자로서 어려워하 는 나를 보고 스스 럼없이 술잔을 건네 며 사제간의 벽을 허물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 대화 도중에 울산방언 ‘칼클타’라는 사투리를 사용하였다. 선생이 많이 사용하는 울산 사투리 중의 하나였다. 후에 선생의 울산 방언집을 한 번 훝어 보았는데 울산 방언이 이처럼 다양하고 방대한 줄은 처음 알았다. 그 후에도 선생님을 여러 번 만났고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인식이 들었고 스스럼없어졌다. 모임 장소가 명다방에서 시계탑 사거리 이층 가로수 다방 으로 옮겨 몇 번 모였고 다시 장소가 옥교동 미도 다방으로 옮겨졌다. 건물 이층에 자리 잡은 미도다방은 창문 쪽에 앉으면 길거리를 오가는 사 람들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곳에 가면 이준웅 선배 문인을 자주 만 날 수 있었다.
젊은날 나도 하릴없이 이 다방을 자주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이준웅 선배 문인과 선생을 몇 번 합석한 자리에서 나의 직장 문제가 거론 된 적이 있었다. 이런 자리는 나에겐 많은 힘이 되었다. 그리고 선생과는 천안집에서 몇 번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천안집은 이층 다다미 방이 넓어 가끔 문협 뒤풀이 행사를 할 때가 있었다. 여기서 우린 선생의 애송시 초혼을 가끔 청해 들었다. 선생은 원래 조용한 분이라서 많은 학교를 오가 도 문협 식구들은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곤 했다. 팔십 년대 초 학성공원의 서덕출 동요 백일장 모임에서 만난 선생은 평소 처럼 반가워했고 몇몇 여학교 제자들 앞에 과분하게 소개하여 얼마나 부끄 러웠는지 몰랐다. 구십 년대 중반 오 랜 직장 생활에서 나 와 길거리를 다니다 선생을 몇 번 만났고 그땐 선생도 이미 정 년 퇴임을 하여 교단 을 떠나 있었다. 짬짬이 등산을 한다는 말에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건강 관리를 잘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선생이 울산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아 찾아가 보았다. 이마에 수건으로 가리고 누워 계셨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하였다. 악수하는 선생님의 손에 힘 이 들어 있엇다. 며칠 계시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평소처럼 길에서 만나 겠지 생각하면서 병원문을 나왔다. 그런데 선생의 운명은 예고 없이 찾아 왔고 그 길로 선생은 「초혼」을 읊던 목소리만 내 귓가에 남기고 영영 먼길을 떠나고 말았다.
조홍제 선생의 문학과 울산 방언
문 영 시인, 평론가
조홍제 선생은 평생을 교직에 몸 담았다. 그의 문학은 국어교사 시절 우 리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울산지역 토박이말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남달랐다. 토박이말은 지역 정서에 바탕을 둔다. 그의 시와 수필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교육자로서 모범적인 생활이 글 속 에서 녹아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학에서 시는 단아하고, 수필1)은 단정하고 일상적이다. 그 예를 다음 시와 수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얀 카드가 새해를 아뢰며 복을 빈다.
꿈도 잊은 세월의 뒤안 길에
낙화처럼 날아든 카드 한 장
조용히 고개 숙이면 먼동이 트는 아침 새해가 뜬다.
- 「연하장」
이 작품은 ‘하얀 카드’와 ‘먼동이 트는 아침’의 이미지가 선명한 대비를 이 루면서 꿈을 잃은 쓸쓸한 삶과 소망과 희망, 복을 기원하는 새해와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낙화처럼 ‘날아든’이라는 시어와 새해가 ‘뜬다.’라는 동적인 시어에 의해 울림이 강화된다. 그러면서도 조용하고 단아한 어조를 취한다. 자연친화적이고 청정무구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봄의 소리」나 곧고 청백 한 선비적 삶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 「갈대」2)에서도 이 같은 현상을 발견 할 수 있다.
창문을 열면 활짝 갠 하늘이 가슴에 와 앉는다.
아침 까치가 지저거려 산과 들도 잠을 깨는가?
앞뜰에서 기지개를 펴면파릇파릇 봄이 오는 소리
하마 산골 눈이 녹아 개울물도 조잘댄다.
수도꼭지를 틀면 콸콸 봄이 쏟아져 출렁출렁 넘친다.
대야물에서 내가 봄과 더불어 자맥질을 한다.
- 「봄의 소리」
이 시는 활짝 갠 하늘과 아침 까치, 산과 들의 풍경이 물소리에 실려 오는 봄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봄이 오는 소리는 봄의 풍경이 온다는 말이 되겠 는데, 개울물처럼 조잘되다가 ‘콸콸’과 ‘출렁출렁’이라는 의성어와 의태어에 의해서 움직임이 확장되어 내가 ‘자맥질을 한다.’로 마무리 된다. 즉 정적인 봄의 풍경이 소리로 바뀌면서, 다시 동적 이미지로 끝을 맺었다. ‘정중동靜中 動’의 세계이다. ‘동動’의 움직임이 활기찬 이유가 어조가 차분하면서 ‘정靜’하 기 때문이다.
가을 들판에 흰 머리카락 흩날리고 서 있는 갈대를 본다.
하늘로 뻗은 곧은 키에 가녀린 뼈대가 바람에 안쓰럽다.
뿌리사 흙에 묻혀 든든하건만 허공에 선 줄기가 사람이 두렵고 장마가 무섭고 가뭄도 지겨워 떨고 있다.
모질게도 견디며 꽃도 피웠는데 소슬한 바람이 분다.
가을 들판에 흰 머리카락 흩날리며 내가 서 있다. - 「갈대」 전문
이 시에서도 별스런 수식, 기교도 없이 담백한 풍경을 연출한다. 시인 자 신의 하얀 모발이 갈대꽃에 비유되었다. 갈대에 대한 연민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또한 갈대가 겪은 모진 삶은 시인 자신의 삶이기도 하다. 마지막 연이 자신이 삶의 모습이고, 1,2,3,4연이 기승전결로 갈대의 모습이다. 연 민과 삶의 반추를 보여 준다. 갈대와 시인이 하나로 겹쳐 있는 작품으로 형 식은 간결하고, 내용은 담백하다. 조홍제 선생의 수필은 일상적인 생활과 향토성과, 말과 방언에 대한 내용 이 많다. 문장은 단문이 주류를 이루는데, 정확한 언어구사를 사용한다. 문 체는 화려하지 않고, 건조체인 설명과 약간의 서정적 문체가 혼합되어 있 다. 생활과 삶을 내용으로 한 수필에는 간결하지만, 말과 방언 등을 내용으 로 한 글에는 건조체의 문장이 많다. 수필은 그 사람이라고 했지만, 조홍제 선생의 인품과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비는 하염없이 내리는데」 「말이 되네」 「못 다한 말의 메아리」등에서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무료한 오후의 내 마음 속으로 가을비가 촉촉이 배 어든다. 으레 따뜻한 방이 그리워지고 벗과 술 생각도 나기 마련이다. 허나 당장의 여건이 하나도 갖춰진 게 없다. 따뜻한 방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날의 내게는 벗과 술이 없고 방은 따뜻 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곧 벗이 나타날 리도 없고, 술이 있다 해도 상 대와 자리 나름이다. - 「비는 하염없이 내리는데」 중에서
달맞이꽃은 여름철 저녁놀이면 철둑이나 강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 는 꽃이다. 꽃의 빛깔은 하양과 빨강도 있으나 대표적인 빛이 노랑이다. 이 꽃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이면 시드는 하룻밤살이로 단명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한 포기에 여러 송이가 번갈아 피고 지며 그리 화려하지도 향기롭지도 않으면서 은은하고 정겹다. -
「달 없는 밤의 달맞이꽃」
말에는 정이 담겨야 한다. 요즘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에는 정이 없다. 대 화는 마음의 거래인데 오늘의 대화는 소리의 거래일 뿐이다. 돈을 주고받는 거래에는 에누리 없이도 잘 이루어지는데 말을 주고받는 거래에는 너무도 에누리가 많다. 타산과 불의의 비정이 도사려 있고, 아양과 거드름과 위선 도 숨어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위장된 말에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 판을 치 기도 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입을 열기도 두렵고, 귀에 담기도 무서운 말이 많은 세상이기도 하다. - 「말이 되네」
혀는 화를 부르는 도끼라는 말도 있다. 예로부터 말이나 글을 함부로 썼 다가 목숨을 앗긴 사람도 많았지만 그러나 내가 못 다한 말은 그런 엄청난 말도 아니다. 어쩌면 부질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따금 제 혼자 중 얼거리다 제 가슴으로 묻히는 독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못 다한 말로 묻어둔 독백에는 이따금 아픈 미련이 메아리 되어 오는 여운도 있다. - 「못 다한 말의 메아리」
조홍제 선생의 수필 가운데 빛을 발하면서, 가장 큰 특징을 드러내는 부 분은 울산지역의 향토성과 토박이말과 정서를 다룬 글이다. 선생의 수필 중 사십 프로 정도를 찾지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선생이 울산 방언의 자료 수집 과 연구 과정에서 얻은 수확물이다. 이런 글들은 울산 지역의 향토성과 정 체성을 이해하는데 유용성을 가진다. 대표적인 글 두 편을 들면,대체로 한 고을의 인심은 그 고을의 풍토를 다듬고 가꾸어 풍요롭게 한 다. 그러나 풍토와 인심은 일시에 의도적으로 마련된 것도 아니며 또한 영 원불변한 것도 아니다. 나는 이따금 태화강변을 거닐며 이 고장의 사적과 이 고장의 전설을 줍 고, 때로는 문수봉에 올라 동해를 굽어보며 이 고장의 기상과 신화를 듣는 다. 울산은 신라의 옛 고장이라 화랑의 후예다운 기질이 남아있음도 좋지만 처용의 관용 또한 나를 반하게까지 한다. 세죽 앞바다의 처용암은 말이 없 지만, 신라의 향가로 전하는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이 고장 사람들의 마음속 에 자리 잡고 있다. …… (중 략) …… 울산 사람은 대체로 후하고 너그러운 데가 있다. 딱한 사정 어엿비 여기 며, 불쌍한 이 잘 돕고 남의 잘못도 용서 잘한다. 한두 번의 거짓도 알면서 속아 주고, 한두 번의 잘못도 너그럽게 용서해 준다. 너무 양보심이 강해 겸 손하다 보면 이따금 손해보는 경우도 있다. 처용의 경우도 그렇다. -
「울산의 풍토와 인심」
사투리의 지명을 찾아 울주군 농소면 가대리에 들어 섰다. 산골짜기 바람 이 약간은 차갑게 느껴지는 초가을이다. 이 고장에는 유달리 사투리의 지명 이 많이 남아 있다. 가대리라는 지명도 따지고 보면 본디는 한자 지명이 아 닌 갓山林이라는 우리 옛말에서 온 지명 같지만 옛날에는 이 고장도 두 마을 로 나뉘어져 가동加東 마을은 ‘고촌각단’이라 했다. … (중략) 옛날 ‘고촌각단’이라던 큰 마을에서 동쪽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북쪽 산기 슭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가 곧 ‘미영밭골’이 다. 옛날에는 이 골짜기의 밭에 미영(목화)을 심어 가꾸었기 때문에 밭 이름 을 ‘미영밭골’이라고 하고 따라서 골자기 이름도 ‘미영밭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의 ‘미영밭골’에는 미영은 그림자도 찾을 길이 없다. 하기
야 길쌈이 없어지고 무명베도 감춘 지가 오래인데 여긴들 어찌 그 미영이 심어지며 ‘미영밭’이 그대로 있을 수 있으랴? 지금의 ‘미영밭골’에는 위쪽은 논으로 개간되어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그 아래쪽 두어 배미가 밭으로 남 아, 그 밭에 심어진 콩과 팥과 깨의 잎들이 노란 단풍으로 물들고 있는데 콩 밭에는 드문드문 서있는 수숫대가 이따금 불어오는 골짜기의 바람에 바스 락거리고 있을 뿐이다. - 「미영밭골에서」
사람살이도 마찬가지만 문화의 뿌리가 언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데 대 해서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정작 삶과 문화의 뿌리인 언어에 대 한 관심과 연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낮다. 특히 지 역민들이 거처 공간만으로 문화를 인식할 때, 그 지역문화는 폐쇄성에서 벗 어나기 힘들다. 지역 언어인 토막이 말이 담당하고 있는 사적이고 친교적인 기능과 지역 문화의 통합성을 이루려고 한다면 지역문화의 뿌리인 방언(토 박이 말)에 대한 정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업을 시도한 이가 울 산에서는 조홍제 선생이 최초이고, 그 결과물이 『울산 방언』이다. 울산에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 연구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이가 조홍 제 선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그의 울산 토박이말의 정리 와 분석 연구서인 『울산 방언』은 중요한 저서이다. 특히 울산 문화의 정체성 을 말할 때, 이 책은 비중 있게 언급해야 된다. 조홍제 선생의 『울산 방언』집은 「울산 방언의 형성」소리」낱말」말본」월」 등 다섯 부분으로 구분에 울산 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 책에 사 용된 용어와 문법의 분류 체계 등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에 바탕 을 두고 있다. 부록으로 울산방언의 낱말을 한데 모아 사전식으로 편찬하였 다. 울산 말을 공부하는 이는 물론 누구나 활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다른 지역에서는 수많은 방언 관련 자료가 발간돼 학술 및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데 반해 울산에서는 이렇다 할 방언 관련 자료가 부족한 현실 에서 지역 언어의 변천사와 더불어 문학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귀중한 자 료이다. 울산 지역사 연구에 있어서 이유수 선생의 『울산 향토사 연구』와 함 께 조홍제 선생의 『울산 방언』은 울산의 명저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