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친척에게서 모 제과회사에서 나온 <종합 선물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화려한 포장지에 쌓인 커다란 선물상자를 안고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잔뜩 부푼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번쩍거리는 포장지를 풀고 종이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비스킷과 사탕, 캐러멜, 껌 등이 들어 있었다. 상자 속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하고서는 커다란 외형에 비해 먹을거리가 빈약하여 그만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신문보도에 따르면 전북에 있는 대학에서 한국적인 캠퍼스를 조성하려고 강의실을 겸한 한옥 정문을 신축하기 위해 첫 삽을 떴단다. 그런데 공사비가 70억 원에 달해 지방대의 정체성을 확보하겠다는 야심과는 달리 지나친 외형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했다고 한다.
1971년에 내가 입학한 대학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였다. 울타리도 없고 번듯한 정문도 없었다. 강의실 건물은 블록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마치 군부대 막사와도 같았다. 건물 내·외벽은 미장작업도 하지 않았고,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것이 꼭 가건물처럼 어설퍼 보였다. 아마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그랬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에 우리 지역에 있는 배재대학교 국제 언어생활관(Paitel) 건물이 건축가협회상 수상과 함께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주관한 제2회 대한민국 토목·건축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건축물이기에 그런 큰 상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배재대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일부러 상 받은 건물을 찾아보았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외벽에 별도의 마감재를 사용하지도 않고 도색 작업도 하지 않았다. 나의 눈에는 건물을 짓다가 완공하지 못한 것처럼 생경해 보였다. 마치 사십 여 년 전 내가 대학생 시절에 우리학교 강의실 건물을 보고 어설프게 생각했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상을 받은 건물은 외관을 잘 다듬어서 산뜻하고 화려할 것으로 크게 기대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상을 받은 배재대학교의 건축물을 보면서 그동안 외형에 지나치게 공들였던 건축물에 길들여진 나의 눈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새로 지어 깔끔하고 아름다운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하자보수를 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들었다. 새 집이 천정에서 누수현상을 보이거나 벽면에 곰팡이가 피어 건축공사를 담당했던 업체 직원들이 드나드는 것도 목격했다. 그러고 보니 잘 지은 건축물은 외관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이 생활하는데 편리하고 내구성이 강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회사에선가 구두 닦는 왁스를 수입하기 위해 구두를 닦는 사람들에게 제품을 나누어주고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그만 수입을 포기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구두약은 광택제가 많이 들어있어서 구두를 닦으면 반짝반짝 광이 잘 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수입제품은 가죽 보호제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구두를 오래 신을 수는 있지만, 광택이 잘나지 않아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화장을 할 때에 기초화장보다는 색채화장을 강하게 한단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여성들은 기초화장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초화장이 약하고, 색채화장이 진한 우리나라 여성들은 피부의 노화현상이 빠르게 나타난단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문화는 실용적인 면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론 내·외면이 튼튼하고 실용적이면서 외형도 수려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좋겠지만, 내실을 기하지 못한다면 이는 외화내빈(外華內貧)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 문화의 특색이라고 비하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문화형성기에 주변 강대국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 하는 것을 몹시 의식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며, 유교문화 영향이라고도 한다.
이런 우리 모습도 요즈음 들어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개성 있게 행동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이는 매우 바람직스런 일이다. 다른 사람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다. 아마 주체성이 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이런 독특한 모습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일을 할 때에 나는 아직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답답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첫댓글 도솔산에 오르기 위해 배재대학교 교정을 거의 매일 지나면서 '상 받은 건축물'이 바로 그 건물이었음을 오늘에야 박영진 교장선생님의 옥고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품격 있고 내부가 용도에 맞게 잘 설계돼 있는 건축물이 최상의 건축물이겠지요. 번쩍이는 구두약이며, 여자 기초 화장이며 예시를 들어 주신 외화내빈형 사례도 우리 사회에 경종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좋은 수필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머리 염색을 지난 달부터 중지했습니다. 용기가 필요했지만 견뎌보려 합니다. ㅎ
우리는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는 거 같습니다. 내실보다는 외양에 치중하는 풍토라서 그런가 봅니다.
예로 들어주신 기초화장 이야기에 뜨끔합니다~~~^^*
여자들도 고달플 때가 있습니다. 화장을 하지 않고 슈퍼라도 가려면 혼자 세수 안 하고 나온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다들 '있어 보이'려고 합니다. 내실을 다지는 주체성을 지녀야 할 텐데요..
저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합니다.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