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지영 소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2)
2. 가을비 내리는 저녁의 해후받아 봐, 네 전화야. 건섭이 내게 수화기를 건넸다. 명 선배인가 하고 받아 본 전화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커튼을 젖혀 봤더니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비가 내리려는 것 같았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밖에서 이 바람을 다 맞고 서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러 번 상대편을 불러 보았지만 결국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반가운 사람일 텐데 왜? 하고 건섭이 담배를 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건섭은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단어는 자기 사전에 없다고. 나는 단어를 원하는 게 아니야. 내가 말하자 건섭은 담배 연기만 푸푸 내뿜었다.
전화. 나는 이제 명우 형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87 년 10월, 노은림의 유고 일기 중에서)
처음 그 카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은림을 발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제일 처음에 든 생각은 그가 방 창가에 서서 우물거리며 떨고 있는 사이에 은림이 가 버린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조금 더 여유를 찾으면서 어쩌면 그녀가 잠시 화장실에 가거나 공중전화로 달려간 사이 그가 지하 카페에 들어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구석진 자리에 나란히 앉은 젊은 남녀 둘이서 거의 이마를 맞댄 채로 서로에게만 열중하고 있고 그리고 카페 한가운데 머리가 벗어진 중년의 사내가, 찾는 사람이 당신은 아니지만 그저 심심하니 당신이라도 구경을 해야겠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비상구라는 초록 불이 켜진 구석진 자리에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안개처럼 자욱한 연기가 그녀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키가 큰 인조 벤자민 화분이 천장에 닿도록 서 있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다.
번개처럼 그의 시선이 그리로 가 닿았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하는 육체를 저지하며 천천히 여자의 뒷모습에게로 다가갔다.
지나친 상상이었을까, 순간적이었지만 그는 은림이, 만일 저 뒷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저 여자가 은림이라면 왜 하필 이 텅 빈 카페의 많은 자리들 중에서 비상구라는 초록 간판 아래의 자리를 선택했을까 생각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무심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몹시 참담해 보였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은림이 얼굴을 펴고 그를 알아보는 시늉을 했다.
한 0.1초의 사이였을까, 갑자기 다른 여자의 영상을 뚫고 정말 예전의 그녀가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검은 눈동자가 둥그렇게 치떠지면서 은림은 환하게 웃었다. 그랬다.
은림이었다. 어깨 위까지 아무렇게나 내려 온 머리카락, 그리고 깃에 수놓인 바느질 자국이 다 뭉그러진 낡은 베이지색 점퍼, 조금 야위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까, 은림은 담배를 비벼 껐다. 뼈가 앙상했고 푸른 정맥이 훤히 비치고 있는 손목이었다.
"내가 너무 갑자기 전화를 했었나 봐요."
놀라는 표정의 그를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으면서 은림이 입을 열었다.
예전보다 조금 더 여위었을 뿐 그녀는 그대로였다. 그는 얼른 그녀와 마주칠 뻔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눈께에 뜨거운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이상했다. 칠년 만인데.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칠 년이었는데, 젊은이 하나를 아주 딴 사람으로 만들어 놓기에 너무나 충분한 세월이었는데,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세월이 시치미를 뚝 떼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변한 것도 있었다. 나이를 먹었고,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고 그 사이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제는 문패를 버젓이 달고 살며 때로는 자신의 승용차로 강변에 나가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그라면 그런 식의 이별은 이제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대던 그 맑은 가을 날 광화문 네길거리에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대는 그녀를 두고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었고, 살아왔던 이십칠 년 동안 그가 오르내린 계단을 모두 다 합한다 해도 그보다는 길지 않을 것만 같은 광화문 지하도를 식은땀을 흘리며 내려가지도 않았을 거였다.
대체 이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학대해 가면서 이루어야 할 일이 남기나 했다는 말일까.
"고개 좀 들어 봐요, 정말 형이 맞나 보게."
사실은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하는 그에게 은림이 먼저 말했다.
예전의 그녀가 그랬듯 장난꾸러기 같은 말투였지만 음성은 건조해 보였고 까실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겨우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무언가 아주 부신 빛이 눈을 쏘아대는 것처럼 곧 시선을 내리깔았다.
"형, 정말 아저씨가 다 됐다 그지? 그런데 너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애."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은림이 놀리듯 말했다. 목소리에서 까실거리는 느낌이 없어지고 예전의 그 장난꾸러기 같은 분위기가 떠올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마주 보고 웃어 주고 말았다. 은림은 그가 웃자 더 활짝 마주 웃었다.
"사실은 한 마흔여섯 살쯤 돼서 흰머니 염색할 때쯤이나 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어색해 하는 게 안쓰러웠던 이유였을 거다. 그녀는 여전히 가볍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웃을 때나 말을 할 때 작게 오므린 것 같은 얇은 입술 사이로 고른 이가 내보이는 것도 여전했다.
그렇다면 세월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칠년 만에 찾아온 이 이상한 해후가, 전화를 받고도 그로 하여금 창가에서 오래 망설이게 하던 이 느닷없는 재회가 이렇게 가볍기만 해도 좋은지 그는 당황스러운 기분이었고 어쩌면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분이기도 했다.
은림이 천천히 웃음을 그쳤다. 하지만 웃음을 거두고 나서도 그녀의 눈가로 짙게 잡히는 잔주름이 보였다. 그는 그제서야 칠 년이라는 세월이 그냥 지나가지만은 않았다는 걸 생각했고 그래서 좀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은림도 담배를 가져다 물었다.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손가락은 거의 푸른빛에 가깝도록 창백했다.
"건섭이 소식은 들었다."
왜 거기서 건섭이라는 그녀의 남편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하기는 건섭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사랑에 빠져 버렸을 때조차. 건섭을 빼고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단 말일까.
"경주에 있어요."
"잘 지내지?"
"으응. 거기 들러서 책이랑 넣어 주고 오는 길이에요. 난 자주 못 봤어요. 시댁 식구들이 자주 가."
은림은 머나먼 고장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건성으로 대꾸했다. 더이상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는 정말 먼 고장에서 온 사람처럼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정말 촌뜨기가 다 됐어요. 서울 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충무로에서 전철을 갈아타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사당역까지 가 버렸어. 신문을 보다가 중간에 고개를 들었는데 회현이라는 역이 나오잖아.
갑자기 회현이 무슨 소린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거예요. 가려고 했던 곳은 여기가 아닌데. 중간에 하도 정신이 없어서 거기 서서 번쩍 손을 들고, 저 미아가 된 것 같은데 경찰서로 좀 데려다 주실 분 계세요, 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는걸."
그는 잠자코 은림을 바라보았다. 은림은 농담을 하고 있었지만 서두르고 있었고 어쩌면 쫓기는 듯했다. 건섭의 이야기를 꺼낸 후부터 그녀는 몹시 불안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벼운 이야기나 나누며 회포나 풀기 위해 그녀가 나타난 것은 아닐 게 뻔했다. 그녀와 그의 눈이 끌리듯 마주쳤다.
하지만 그의 이런 무거운 상상을 깨 주겠다는 듯 은림은 이번에는 쑥스러운 듯 살풋 웃었다.
여위어진 뺨 탓인지 입가에 여러 겹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그는 그 입가의 잔주름에서 오래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 눈길을 느꼈을까, 은림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더니 낡은 점퍼에 손을 찌른 채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이 어떠세요?"
"많아."
그는 얼른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 같아 잠시 마른기침을 해댔다. 물론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일 주일 동안 밤샘을 해야 일을 맞추어 줄 지경이었다.
그는 두 손바닥을 바지에 대고 쓱쓱 비볐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은림의 옆자리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가방을 그제서야 보았다.
낡긴 했지만 아주 낯이 익은 가방. 연한 코코아색 가방에 머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은림이 가방의 손잡이를 가만히 잡으며 웃었다. 가방을 쌌던 것은 언제나 은림이었다.
그 가을날 광화문 네거리에서 그녀는 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 서울로 아주 올라왔어요."
" ."
"몸이 안 좋아졌어요. 더 머무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정리하려고 해요."
"몸 어디가?"
그가 묻자 은림은 얼른 얼굴을 펴고 말했다.
"으응 그냥 영양실조쯤 되겠지 뭐."
은림은 농담처럼 웃다가 잠시 괴로운 듯 머리를 부볐다.
"나 술 좀 사줄래요?"
은림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낮은 음성이었는데 그때서야 그는 그녀 속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서른 몇 살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먼저 일어서면서 은림의 곁에 놓였던 가방을 들었다. 가방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이제 다 정리하고 서울로 왔다는 은림의 짐이 이렇게 가벼워도 좋을까, 잠시 생가했지만 그는 성큼 앞장을 섰다.
"이 가방 참 오래 들고 다니지?"
쑥스러운 듯 은림이 말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둘의 눈길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부딪쳤고 그의 머리 속으로 빠르게 다시 그 가을날이 지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은 괴롭기도 하고 조금은 은림의 출현이 거북해지기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만,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시키고 나서 얼굴보다 큰 생맥주 잔을 들어서 거푸 마시고 나서야 그도 그녀도 좀 편안해진 기분이 되었다.
은림이 먼저 입을 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맥주조끼를 내밀며 건배를 원했다.
"칠년 만이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칠년 만에 만나서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나쁘지 않네요. 좀 늦었지만 자 건배해요."
둘은 가볍게 술잔을 부딪쳤다.
은림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카페를 들어선 이후 손에서 놓지 않고 쉴새없이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대신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쭉길쭉 썰어진 야채에 곁들인 마요네즈가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굳어가고 있었다. 500cc 짜리 잔을 세 개쯤 비웠을 때던가 그는 비로소 그들 둘이서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든가 지금은 무얼하고 사느냐든가 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걸 깨달았다.
은림이 건섭과 함께 울산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끝이었다. 건섭의 소식은 요 얼마전 신문에서 읽은 것이었다. 아니,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요 몇 년간 그는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 벌써 햇수로 삼 년이 다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예전의 사람들과는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의 작은 틈새로 집요하게 스며드는 바람이 피리 같은 소리를 냈다.
은림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늘게 어깨를 움츠렸고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럴 때 그녀는 참 작아 보였다.
가뜩이나 가냘픈 체구가 쥐면 그의 품 안에서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는 문득 은림에게는 집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릴케의 시구처럼, 게다가 이제 가을이었다.
"서울 오니까 겨울 같아. 경주랑 창원은 아직 견딜 만큼 따뜻한데. 이제 또 겨울이겠구나."
멀리 가로등을 등지고 선 가로수의 뒤통수가 환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그 가로수 가지에서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게 보이기도 했다. 실내는 따뜻한 편이었다.
부지런한 주인 덕에 일찍 월동 준비를 마친 카페에 틀어 놓은 온풍기가 부우 하고 뜨거운 바람을 불어 놓고 있었고, 바람이 나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달아 놓은 길고 가느다란 은박 리본이 그 바람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은림의 얼굴에 아까 그가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보았던 것 같은 참담함이 다시 어리고 있었다.
어쩌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형. 딸내미가 있다면서요?"
그렇게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은림이 물었다.
"응? 응."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그는 맥주잔을 입에서 떼며 당황스레 대답했다.
"몇 살?"
"만 두 살, 우리 나이론 네 살이고."
그는 야채 안주의 오이를 집어 씹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재킷 주머니 속에 넣어 온 명지의 뽀뽀뽀 테이프가 아직 들어 있었다.
"이름이 뭐야?"
" 명지."
"명지? 명지 참 예쁜 이름이야."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담배를 든 손가락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치켜올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피곤하게 보였다.
기나긴 여정에서 아주 잠시 쉬어 가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나 할까. 가야할 길은 너무 멀고 되돌아가는 건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고달프게 느껴지고, 그럴 때 길 가운데에서 잠시 다리를 쉬는 사람이 짓는 표정,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보다 걸어가야 할 길에 더 마음을 빼앗긴 근심스러운 표정이 그녀의 뚜렷한 윤곽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형이 결혼했다는 소식 듣고 내가 어떤 기분에 사로잡혔었는지 알아?"
지금까지의 질문이 오픈 게임이라면 이제서야 공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은림의 창백한 얼굴에 군데군데 불긋한 실핏줄이 드러난 것이 술이 많이 오른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톡톡 털었다.
"어떻게 생각했니?"
목으로 마른침이 굵게 넘어갔다. 은림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린 채 엄지와 검지로 짧게 타 버린 꽁초를 빨았다.
그런 모습이 꼭 다 늙어 버린 늙은이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가닿는 멀리 사람들이 주머니마다 두 손을 찾아 찌르고 택시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 말대로 이제 겨울이니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돌아가서 따뜻한 방에 앉아 뜨겁고 매운 찌개에 밥을 비벼 먹고는 아랫목에 앉아 햇귤이라도 까고 싶을 것이다.
"난 이렇게 생각했어. 형이, 형이랑 결혼한 그 연숙 씨가 아이를 낳으면 혹시나 내 이름자 중에 하나는 넣어 주진 않을까 하고, 연숙 씨 눈치 못 채게 한 글자만 말이야.
연숙씬 가명 말고 내 진짜 이름 몰랐으니까. 그러니 한 자라도 넣어 주지 않을까 하고. 은 자는 조금 나약한 느낌이 드니까 림 자? 그러면 내가 먼 훗날 어딘가에서 형의 아이를 보면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아아 적어도 이 아이에게 깃들어 있는 정령 중의 반은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구." "난."
그는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은림의 말을 가로막았다.
은림이 작고 얇은 입술을 다물었다.
" 난 이혼했어."
그는 정말 나쁜 일을 한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심판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더듬 듯이 은림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한때 은림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는 상상을 했었다.
은림이가, 형 왜 그랬어 하고 물어 주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러면 그는 말하려 했었다. 모르겠니?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니? 하고.
하지만 그는 지금은 은림이 침묵해 주기를 바랐다. 생각해 보면 은림이 때문도 아니었고 아내 연숙 때문도 아니었다.
천주교도처럼 새삼스레 모든 게 내 탓이오 하고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냥 사는게 그랬어, 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돼 버린 거야,
네가 아까 전화에 대고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게 사실은 그냥 우스운 일이었는지도 몰라.
그땐 그랬잖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잖니? 그는 갑자기 은림 앞에서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 앞에선 그냥 그렇게 무작정 무책임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은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은림이 그토록 침묵해 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는 갑자기 힘이 주욱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담배를 한 대 다 태울 즈음의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침묵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웨이터가 다가와 빈 잔을 치워 갔고 스피커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난 지금 "
은림이 탁자 위로 두 팔꿈치를 괴어 놓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간 눈빛이었다.
말갰지만 차분한 눈빛이었다. 그가 간단한 낚시 도구를 메고 찾아가는 호수의 가을빛 같았다.
"난 지금은 사귀는 여자가 있어."
가을빛 같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던 은림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뭘 어쩌란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은림에게 그 이야기를 만나자마자,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은림이 오늘밤부터 당장 저 가방을 들고 방으로 쳐들어올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물었다.
"다행이야. 형이 혼자서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은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를 빨다 말고 그가 은림을 바라보았다.
뭐랄까 무언가가 계속 그의 의도에서 비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형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댔어. 연숙 언니를 버렸다고..
건섭씬 형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일 년도 넘게 나한테 숨겼었고.
일 년 전쯤인가 정식이네 출판사에 전화를 해보고 정식이에게서 형 소식을 들었었어. 안 그래도 형을 한 번 만날까 해서 연락을 넣었던 참이었는데"
"왜 그때 연락하지 않았니?"
그가 물었다. 은림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맥주잔만 만지작거리더니
"사람들. 건섭이까지도 형이 이혼했단 소리를 들으면 내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고 겁들이 났었나 봐."
마지막 말을 하면서 은림은 설풋 웃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갑자기 술기운이 푸우푸우, 하고 목구멍으로 밀려들었다.
"그때 저질러 버릴 걸 그랬나?"
은림은 말을 마저 이으며 웃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게 어리석었어. 우린 모든 걸 잃어 버린 거야." 그는 정말 취해 버린 사람처럼 머리칼을 부비며 말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갑자기 눈으로 뜨거운 기가 몰려들었다. 은림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들도 아니었어. 1990 년대 이곳에서 일어났다면 얘깃거리도 안되는 일들이었겠지. 그래, 아무 일도 아니었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우리들조차 우리 자신을 한 번도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았어. 우린 겨우 이십대 중반일 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실수를 할 수는 있는, 사실은 유일한 나이였는데 난 요즘 가끔 생각해. 우린 정말로 인생에서 중요한 많은 걸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모두들 어리석었던 거야."
은림이 연민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훔쳤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더 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더 지껄이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그랬다. 이혼을 했든 여자를 사귀었든, 그도 아니면 지금 이 여자와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한들 별다를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은림이 말을 막았다.
"우리 흔들리지 말고 살아요, 무얼하든."
고개를 숙인 채로 머리를 부비던 그가 약간은 과장된 포즈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그런 격언을 쓰나? 그래서 교훈을 얻고 깨닫고 반성하고 그러나?" 그는 빈정대며 은림의 말을 받았다.
은림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이어 굳어졌다. 칠년만의 해후에 실망하고 있겠지, 그래 나는 이렇게 변했어, 그는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었다.
은림이 입을 열었다.
" 저어기 어떻게 하지. 이제 가 봐야 할 시간이에요."
마지막 남은 맥주를 마시고는 은림이 말을 꺼냈다. 그는 발악의 충동을 느끼던 입가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 일어나자. 가야지."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또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집안은 모두?"
가자고 해 놓고 담배를 무는 것이 어색해져서 그가 물었다.
"아버진 오빠 그렇게 된 다음에 끝내 돌아가셨고, 엄만 LA 이모네로 떠나셨어. 오빠 병원비 때문에 집을 팔아 버렸거든."
마치 며칠 전에 만났던 사람에게처럼 은림은 담담하게 말했다.
"은철이 소식은 동창회에서 전해 들었다."
"아까 올케하고 조카한테 다녀왔어요. 올케가 친정에 들어가서 어렵게 살림 꾸려가나 봐. 조카들 옷 한 번씩이라도 사주고 오고 싶었는데."
"병원비는?"
"몰라요."
은림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보태 주지도 못할 거면서 물어볼 수도 없었어."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 싶어 그는 조금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은림의 말대로 보태 주지도 못할 거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그렇다고 무관심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결국 이런 경우에 선택은 둘밖에 남지 않는다.
돕든가, 무책임한 방관자가 되든가. 그는 피다 만 담배를 얼른 비벼 껐다.
그런데 이번에는 은림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나도 한 대만 피우고."
왜였을까,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그들은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랬었다. 헤어지기 싫어서 자꾸만 담배를 번갈아 피우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조금만 더 마주 보면서 있고 싶어, 하고 말할 수도 없었던 그 시절,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일어나지,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심장이 담배처럼 타 녹아내리던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그는 대학입시 체력장에서 뛰던 백 미터를 생각했었다. 그는 달리기를 잘 하지 못했다.
그때 이십 초도 안되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이십 초도 그렇게 길었는데 이 시간은 적어도 일 분은 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달랬었다.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울 동안이라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던 것은 담배가 아니라 단 몇 분간의 시간이었다.
생선회칼로 저며낸 듯한 그 얇고 투명하고 짧은 시간. 그러나 그는 이제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도 그 절박함을 다시 실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제 시간은 지천으로 널려 있고 그는, 너와 더 앉아 있고 싶어, 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게 수줍은 사랑 같은 건 하지 앉기 때문이다.
계산을 치르고 카페를 나오자 은림이 뒷모습으로 서 있었다. 은림이 바라보고 있는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였는지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고 신문 가판대의 아주머니가 마악 양동이에 든 비닐우산을 내 놓고 있었다.
마른 플라타너스 이파리에 비가 부딪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리는 거리였다.
그는 먼저 건물의 현관에 서 있는 은림의 뒷모습으로 다가가면서 지금이라면 이 여자를 쉽게 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안고 입을 맞추고 하룻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도 없이, 어떤 약속 없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처럼 도망을 가자던가 하는 어리석은 말 같은 것은 이제 뱉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무심하게 은림의 곁에 섰다.
은림의 머리칼이 초라하게 날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만한 나이의 여자가 이맘때쯤 입을 수 있는 바바리코트라든가 실크 스커트 자락이 아니라 그저 퍼머기가 풀어져 푸석한 머리카락만 흩어져서 뺨 위로 몰아치고 있었다.
은림의 몸뚱이에서 나부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는 그 머리카락 때문에 은림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잠시 건물 입구에 서서 내리기 시작하는 가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엔 제발 비가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는데 오늘 밤 걸어다녀야 할 길이 아주 많이 남았거든 하지만 가을도 다 가 버렸어."
은림이 중얼거리듯 말하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은림은 웃었다. 결코 눈까지 미소짓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아직도 그가 카페에서 처음 그녀를 발견했던 그때처럼 참담함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참담함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더욱 어둠 속에서 올려다보는 그 눈빛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예전에 그녀를 아끼던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부르곤 했었다.
'러시아의 눈동자'
모피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있고 무릎까지 쌓이는 눈길을 달리는 마차가 있고, 흰 자작나무로 빽빽한 숲이 있고 그 나무보다 무성한 뿔을 뽐내는 순록이 거닐고, 그리고 그곳을 달리는 뺨이 붉은 러시아의 처녀들 혁명의 고향 눈 내리는 얼음 벌판에서 철도를 놓던 노동자들 너구리의 윤곽이 살아 있는 털모자들 그 망망하게 흰 눈밭 위의 눈동자.
"잠깐 여기 서 있어."
그는 은림을 남겨 두고 신문 가판대까지 뛰어가 우산을 한 개 샀다. 돌아오자 은림이 가방을 들고 보도로 내려섰다.
그들은 말없이 전철역을 향해서 걸었다. 둘의 어깨가 가끔 부딪쳤다.
비닐우산은 작아도 두 사람의 머리칼을 적시지 않을 만큼 요긴했지만 가끔 바람이 불면 곧 뒤집어질 듯 펄럭거렸다.
바람이 더 세차지고 찬비가 뿌리고 기온이 내려갈 모양이었다.
"형, 정말 형 말대로 우린 어리석었던 걸까?"
말없이 걷다가 은림이 추위에 파르라니 변한 얼굴을 들고 말했다.
빗방울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우산 속으로 은림을 더 끌어들였다.
은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추위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가로등 빛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입술은 거의 남보랏빛이었다.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야. 우리가 그렇게 했더라도 후회했을거야.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니?"
은림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잠시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형은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구 있구나. 난, 난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 하고 물으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칠 년이나 헤어졌다가 만난 두 사람이었다.
같은 단어를, 같은 상황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전철역 입구에서 그는 우산을 접었다. 은림이 그가 든 가방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차 타는 거 보고 갈게, 내려가."
"괜찮아요. 여기서 헤어지고 싶은걸. 이번엔 형 말대로 내가 형을 지하도 앞에 남겨 두고 가고 싶어. 형이 조금만 울어줘. 그럼 복수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은림이 꾸민 듯 명랑하게 말했다. 그는 은림을 따라 웃으며 은림의 손을 잡아끌고 내려가면서 그는 난데없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손을 붙들고 비닐우산을 접은 채로 비 오는 지하도를 뛰어 내려갔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그들이 사랑에 빠진 지 얼마되지 않았던 여름날이었다.
그때도 은림의 손은 이렇게 찼다. 은림의 손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때.
그는 갑자기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표소 앞에서 가방을 건네 주면서 그제서야 손을 놓았다. 차가운 은림의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묻은 땀을 슬며시 재킷에 문지르고는 매표구로 가서 수원행 티켓을 끊었다. 돌아보니 은림이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티켓을 내밀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은림의 얼굴이 갑자기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가방을 들지 않은 은림의 그 차고 마른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굵은 눈물이 그녀의 손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힐끗거렸다. 그는 잠시 당황한 채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우선 은림을 지하도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결국 지하도 앞에서 또 울고 마는구나."
농담처럼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은림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은림이 그가 내민 손수건을 제 손에 쥐었다.
"미안해요. 나 정말 이러지 않으려고."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한 은림의 얼굴 위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은림의 머리를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은림을 엉거주춤 안고 선 그의 어깨로 뻐근한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른두 살이나 먹은 여자를 이 지하도 한가운데서 울게 만드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느낌은 있었다. 말하자면 은림의 가슴 속에 가을비가 내리고 있는 거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바람이 불고 찬비가 내리고 낙엽이 지는 거다 라고. 그는 아까 카페를 나서면서, 그때 찬비를 바라보고 있던 은림의 야윈 뒷모습을 보면서 은림을 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안고 입을 맞추고 그저 잠자리를 같이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을 후회했다.
모든 것이 그 탓인 것처럼 그는 알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내 사무실에 가서 좀 쉬었다 가겠니? 차라도 한 잔 하면서?"
미안한 마음 때문에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면서 그는 이 말은 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했어야 옳았다는 생각을 했다.
오피스텔 이층에 있는 생맥주 집에서 술을 마셨으면서 그녀에게 이런 제안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실수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는 손님이었고 너무나 오래간만의 해후였고 그리고 그녀는 먼 곳에서 먼 세월을 지나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그는 정말로 은림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멈칫거리던 은림이 얼굴을 들었다. 아직 다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맑게 눈 속에 고여 있었다. 그가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가 힘주어서 잡았던 그의 재킷 한 끝자락을 그제서야 놓으며 은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서요.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에요." 그는 은림이 잡고 있었던 자신의 재킷 자락 한 끝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차일 거예요. 타야죠."
마지막 차라는 말에 그는 멈칫 했고 들고 있던 비닐우산을 그녀에게 건넨 후에 준비해 두었던 지폐 다섯 장을 그녀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은림은 잠시 그녀의 주머시 속에 구겨져 처박힌 지폐를 바라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전화해 주겠니?"
은림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형."
"이럴 땐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임마."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은림 때문에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어쩌면 눈물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마구 화가 나는 그런 기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사촌 오빠처럼 태연히 은림의 어깨를 안고 개찰구까지 다가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은림의 어깨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잘 먹고 다니고. 너무 마른 것 같아. 알았지?"
은림은 착한 여동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도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만났다.
은림의 손은 역시 작고 차가웠다. 악수를 하면서 은림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카페에 들어가 처음 발견했던 때처럼 참담한 표정이 다시 그녀의 얼굴 위를 덮었다.
"정말 갈께요."
무슨 말인가 할 듯, 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은림은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은림이 가로로 설치된 알루미늄 막대기를 밀치고 그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갑자기 그가 또 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여자와 이별하지는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했었지만 다시 가을이었고 지하도가 있고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같은 가방을 들고 은림은 또 울면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계단으로 내려서기 전에 돌아보는 은림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정말 이번에는 칠 년이 아니라 영원히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웃음까지 띠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은림도 웃었다.
그는 돌아선 은림이 계단을 따라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고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거리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추락해 버린 이파리들이 비에 젖어 질퍽거리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이 올 것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언제나 비가 있다.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차가워지고 비가 그치고 나면 새순이 돋고 비가 그치고 나면 꽃들이 피어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 비가 그치고 나서 다가오는 계절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우린 어리석었던 걸까?'
은림의 물음이 생각났다.
'형은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는 거야? 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데.' 그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노르스름한 그의 얼굴에 부딪혀 왔다.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그는 오피스텔 입구까지 그저 우산 없이 걷기로 했다.
그는 빗물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길거리의 간판들을 읽었다.
신나라성인캬바레 청수대중탕 동서증권 삼성생명 엄마손분식 길목프. 불빛이 환한 레코드 가게에서 바이올린 곡이 끊어질 듯 흐르고 있었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서울로 올라왔을 때 그는 삼선교의 한 삼류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분명 간판에는 금발머리 창녀 트랄라의 모습이 선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표를 사고 어둠 속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아마도 그저 그런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조금 피곤했기 때문에, 피곤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술을 깨기 위해 그는 그 극장으로 들어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그는 한참 그 자리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영화가 생각보다 아주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저 스치듯 지나쳤던 제목을 다시 한 번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 비상구. 그는 그때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공포를 알아 버린 후였다. 그 공포를, 그러니까 그것에게 걸리는 목숨, 그것에게 걸리는 생애들, 그것에게 걸리는 젊은 시간들. 때로는 뭉뚱그려져 희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 공포를 아는 사람과 만났다는 전율 같은 것이 그 어둠 속에서 그를 덮었던 거였다.
그는 비상구 아래 앉아 있던 은림을 생각했다.
은림도 사실은 탈출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다시 말하면 은림도 사실은 마지막이라는 이름을 걸고 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무언지 모르지만 뭉뚱그려져서라도 아직 희망이라는 게 남아 있나 싶어서, 그래서 하필이면 그 비상구 아래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비상구라는 간판이 위기를 알리는 붉은색이 아니라 하필 풀잎 같은 초록색일 이유가 없을 것 같았고, 하필이면 은림이 그 아래 앉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그는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오자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비에 젖은 재킷에서 스웨터에서 머리칼에서 눅눅하고 시큰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를 뱉으며 돌아누웠다.
뒤척이는 옆구리에서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카세트 테이프였다. 그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그걸 주머니에서 꺼내서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려다가 머리맡의 카세트 레코더에 밀어넣었다.
빗소리보다 더 맑게 퐁당퐁당 튀기는 실로폰 소리가 울리고 여자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 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열두시가 지나면은 문을 닫는다.
그는 옷을 입고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창 밖에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층의 유리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 그는 원래 이런 궂은 날 사무실 안에서 작업하는 걸 좋아했었다.
비가 오는 날, 더구나 이렇게 청승스러운 가을비가 내리는 날 바짓가랑이에 빗물을 적시며 눅눅한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는 이런 밤에는 사무실의 불을 모두 끄고 책상 위에 놓인 할로겐 조명만을 켜 놓았다.
그러면 그 주황색에 가까운 노란 불빛의 온기 속에 따스하게 잠기는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일을 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면 노랗고 커다란 비누방울 속에 갇힌 자신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이런 날, 이렇게 스산하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 그는 일을 마친 후 흰포도주를 한 잔 마시기도 했다.
그럴 때 그의 곁에는 자주 여경이 있었다. 옷을 벗고 침대 속에서 서로의 살갗을 비비면 마른 살갗의 감촉이 아주 부드럽게 느껴지는 게 오늘 같은 날이었다. 정사가 끝나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 둘이서 마시던 흰포도주는 얼마나 산뜻했던가.
그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할로겐 스탠드를 켰다. 노란빛 때문에 방 안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의 사내가 노란 불빛 아래 누렇게 뜬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시 바람이 창문을 덜컹였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문들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닫힌 문 밖으로 파란 비닐우산을 들고 은림이 걸어가고 있다.
오늘밤에 걸어다녀야 할 길이 아주 먼데.
그제서야 잊고 있던 혓바닥 끝의 돌기가 다시 느껴졌다. 그는 아랫니에 대고 그것을 부벼 보았다.
술에 취해서였는지, 그래서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인지 아까 낮보다는 통증이 덜했다. 그는 결사적인 것을 찾기라도 하듯이 혀를 더 비벼댔다. 갑자기 가늘고 날카로운 통증이 혓바닥으로 퍼져나갔다.
아마 혀에 난 돌기 중의 하나가 터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려고 질끈 눈을 감았다. 감으면서 대체 왜 자신이 늘 이 아픔을 확인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비에 젖은 담배는 구겨져서 불이 붙지 않았다. 그는 담배 피우기를 포기하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나란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에 걸린 코르크 메모판에는 일정표가 꽂혀 있었다.
예정한 대로 였다면 그는 오늘 적어도 백 매 정도를 써야만 했다. 만일 그 난데없는 전화가 없었더라면 외출에서 돌아온 후 사우나에서 몸을 풀고 한 시간이라도 잠을 자고 돌아와 적어도 지금쯤은 육십 매 정도는 진행시키고 있었을 터였다.
물론 지금이라도 시작한다면 적어도 새벽 세시까지, 못해도 사십 매는 진행시킬 수 있으리라. 그는 책상 곁에 선 채로 잠시 서성였다.
그가 은림을 만나러 나갈 때 켜둔 자동응답장치는 삼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동생 명희거나 소림 편집이거나 아니면 여경일 것이다. 그는 삼이라는 숫자가 명멸하는 전화 녹음장치를 비껴 걸어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걸까, 창문을 열고 목을 길게 빼서는 까마득한 오피스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머리만 디밀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창에서 비가 들이쳐 머리카락을 적셨다.
구층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현관에는 노란 나트륨 등이 환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두엇, 대기시킨 승용차에 올라탔고 검은 우산을 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인적이 끊겼다. 거리고 점차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창을 닫고는 실내로 들어왔다. 찬비 속에 내밀어졌던 머리가 훈훈한 실내로 들어오자 얼얼해졌다. 대체 누가 다시 그 현관으로 들어설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껐다.
비는 사정없이 창 밖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단 한가지 사실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가 노란 할로겐 스탠드를 켜고 흰포도주를 마시며 여경과 안락한 섹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은림은 파란 비닐우산을 쓰고 거리를 걸어다녔을 것이다. 다만 그때는 그것을 잊었고 지금 그는 그것을 기억해냈을 뿐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엌의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가 언젠가 선물 받았지만 한 번도 마시지 않았던 십이 년 된 위스키의 마개를 따서 컵에다 가득 부은 다음 단숨에 그걸 마셔 버렸다.
다 감긴 테이프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끊겼고 그러자 적막이 이어졌다. 그는 마셔 버린 빈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
첫댓글 눈치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