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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 역사스페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한반도 남부를 동서로 가르는 자연경계이다. 그런데 백두대간 넘어 호남 동부지역에서 대가야의 유적이 새롭게 확인되고 있다. 대규모 산성과 봉수대들. 그리고 수많은 대가야 고분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강성했던 대가야의 힘을 상징한다. 백두대간 너머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들. 그것은 잊혔던 대가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제 4의 제국 대가야, 백두대간을 넘다>
대가야가 쌓은 산성과 봉수대 그리고 대가야의 초대형 고분들이 백두대간 넘어 호남 동부지역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생소하게 들리신 텐데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의 상황을 지도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보이는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 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백두대간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한반도를 동서로 나누는 자연경계가 되고 있는데요. 보통 가야는 이 백두대간의 동쪽과 낙동강의 서쪽인 영남의 남서에 위치한 10여개 소국 연맹체를 말합니다. 4세기까지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5세기부터는 이곳 경북 산간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가 가야연맹체를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북 고령의 대가야와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전라북도 남원, 임실, 장수, 진안 등 호남의 동부지역에서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가야에 대한 통념을 깨는 사실인데요. 오늘은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대가야의 실체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대가야의 고분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대가야, 백두대간을 넘어 백제 땅에 진출하다
http://blog.daum.net/dilee60/13029233 (복성이재 이미지)
백두대간을 넘는 복성이재는 예로부터 함양과 남원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통로다. 복성이재를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막산성.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성은 길이가 630m에 달한다. 이 성을 언제, 어떤 세력이 쌓았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와 신라가 이곳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602년 아막성 전투, 백제 무왕의 공격으로 신라 장수 무은이 전사함.)를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종 학예연구사 / 호남문화재연구원
“이성은 아영면 성리에 있는 성리 산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인데요. 모산 신라 때 모산현이 있었던 곳입니다. 일명 이 산성은 아막산성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아막 산성의 연유는 백제 무왕 때 아막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막성이라고 일컫고 있다.”
아막 산성 내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파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과 함께 대가야의 토기 파편들도 발견된다.
강원종 학예연구사
“성 내부에서 채집된 유물이 가야 시대 토기 편이라든지 신라 시대 토기 편 또 백제 시대 토기 편들이 모두 다 출토가 되기 때문에 아마도 이 초축과 관련된 것은 아마 가야 세력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 이후에 신라, 백제에 의해서 계속 경영이 되었던 곳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막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남원시 아영면. 잡목에 덮여 있는 고분들을 볼 수 있다. 고분 주변이 포도밭으로 경작되면서, 봉토가 대부분 깎여나고 봉분의 형태마저 알아보기 힘들다. 허리가 잘려 나간 부분에 드러나 있는 벽석만이 이곳이 무덤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이곳에는 원래 10여기의 대형 고분(월산리 고분)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80년 초, 88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그 중에 한 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곳에서 5세기 초 것으로 보이는 토착세력의 토기와 함께 대가야양식 토기가 상당수 출토된 것이다. 토기와 함께 출토된 철제투구와 목가리개, 은상감환두대도 역시 대가야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곽장근 교수 군산대학교 사학과
“이 유적과 관련된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보니까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마 백제고분으로 그렇게 인식을 해왔었는데 80년데 초반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를 통해서 백제가 아닌 가야계 고분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월산리 고분 자체가 상당히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월산리 고분군에서 1.7km 떨어진 두락리. 이곳 야트막한 산자락 위에서도 40여기의 고분들이 확인되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지름이 30m에 달해 마치 작은 숲처럼 보인다. 두락리 고분들 역시 대부분 크게 훼손됐다. 두락리 1호분이라고 이름 붙혀진 이 무덤은 봉토가 잘려나가고 그 위에 콩들이 심어져 있다. 잡목과 수풀에 뒤덮여 있는 이곳이 두락리 2호분이다. 언뜻 봐서는 봉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곽장근 교수
“남쪽 트렌치를 넣은 상태에서 이 부분에서 연도입구가 발견됐습니다.”
이 무덤은 지난 1989년 전북대 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결과 두락리 2호분은 돌들을 다듬어 쌓아 올린 굴식 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다. 무덤에는 약간의 철기류와 토기들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 점은 남아 있는 토기들이 대부분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대가야 양식 일색이라는 것이다.
곽장근 교수
“바로 서쪽 1.7km 떨어진 곳에 월산리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데 월산리 단계보다는 고분의 입지나 출토되는 유물 속성 자체가 고령대가야와 관련성이 굉장히 강한 걸로 밝혀졌습니다. 그런 내용을 종합해 봤을 때 가야 문화를 토대로 발전했던 가야 세력에 의해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대가야 세력이 만든 고분은 장수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전북장수군 계남면. 이곳에는 해발 700m에 달하는 침령산이 자리하고 있다. 봉우리 위에는 산정상을 둘러싼 침령산성이 남아 있다.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았는데 전문가들은 축조방식으로 보아 6세기 백제가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침령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서너 군데 지역에서 대가야 고분군들이 발견되었다. 장계 분지의 한 산자락 위에서도 20여기의 고분이 발견됐다. 삼봉리 고분군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고분은 훼손되고 겨우 두기만 남아 있다. 그나마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도굴꾼에 의해 봉분이 파헤쳐지고, 그 위에 무덤 덮개돌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1999년 발굴과정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대부분 대가야의 특색을 그대로 보여주는 토기들이다. 이러한 유물은 5세기 후반 대가야가 장수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 가야계 고분들이 백두대간 넘어 남원, 임실, 장수, 진안에까지 산재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곽장근 교수
“가야계 고총 자체가 산줄기 정상 부분에 입지하고 있다는 것, 고총의 출토되는 유물 자체가 고령 양식의 토기가 주종을 이룬다던지 그 주변에 대규모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백두대간 동쪽 자리한 가야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호남동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고분들은 문헌기록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대가야의 숨겨진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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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세기 대가야의 팽창
저는 지금 가상 복원한 남원 두락리의 대가야 고분군 옆에 서 있습니다. 실제 이곳에는 봉분의 지름이 2,30m에 달하는 40여기의 무덤이 있었는데요. 대부분 크게 훼손되어 그 형체마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뒤늦게나마 발굴조사를 통해 이 무덤들의 실체를 확인한 것입니다. 이 무덤은 두락리 2호분이라고 이름 붙여진 굴식 돌방 무덤인데요, 봉분의 지름이 20m에 달합니다.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두덤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 보시는 것처럼 제법 널따란 돌방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잘 다듬은 돌들을 정교하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회를 칠해놓았는데요. 무덤 축조방식이 고령 고아리 벽화무덤과 유사하여 전문가들은 대가야에서 파견된 석공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덤 안엔 발굴 당시 도굴로 인해 약간의 토기 외에는 부장품이 거의 남이 있지 않았는데요. 남아 있는 토기들을 살펴보면, 지금 보시는 이 원통형 그릇받침은 전형적인 고령 대가야 양식의 토기입니다. 대가야 토기는 이렇게 표면에 촘촘히 새겨진 물결무늬가 특색인데, 대가야의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이 두락리 고분뿐 아니라 백두대간 넘어 호남 동부지역에는 수많은 대가야 고분들이 나나타고 있는데요. 그것은 5세기 고령 대가야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북의 산간 내륙에 자리한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다. 고령 시내를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주산능선 위에는 거대한 고분들이 자리하고 있다. 낙타 등처럼 솟아 오른 수십 개의 봉분들. 바로 대가야 왕족의 무덤들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1920년 일제 강점기 때 처음 발굴됐다. 그 후 발굴을 빌미로 많은 유물들이 도굴되고 무덤은 훼손되었다. 지난 70년대 후반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지산동 고분군은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대가야 고분들은 대부분 산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다. 대가야인들은 왜 이렇게 높은 산 능선 위에 고분을 만든 것일까?
정동락 학예연구사 / 고령대가야 박물관
“뚜렷한 정설은 없습니다만 우선 대가야의 건국신화를 보면 대가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야산의 산신과 하늘의 신의 후손이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산신과 하늘신의 후손들인 왕들이 사후 세계에 산 위에 하늘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싶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고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이게 왕의 위엄을 크게 과시할 수 있습니다. 아래쪽에서 보면 구릉 정상부에 고분군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우러러 보이고 웅장해 보이는 그런 효과들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지산동 고분들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큰 것은 44호분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봉분의 높이는 6m, 지름은 무려 27m에 달한다. 지난 1977년 이 무덤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로 드러난 무덤의 내부, 그것은 거대한 순장 무덤이었다. 무덤 중앙에 깊이 2m, 길이 9m에 이르는 크기로 땅을 파고, 잘 다듬은 돌로 벽을 쌓아 주인공을 묻을 돌방을 만들었다. 이 돌방에는 주인공과 2명의 순장자가 함께 묻혔다. 주인공을 위해 부장품만을 넣는 돌방 두 개를 따로 놓았다. 주인공의 돌방 주위로는 서른 두 개의 작은 돌방이 둘러져 있는데 여기에 순장자가 한 사람씩 묻혔다.
주보돈 교수
“기록 외에 실물로써 나타나는 순장은 규모가 대가야 44호분이 가장 큰 겁니다. 30여명에 달하는 규모는 지금으로는 전무후무하다고 그러는데 그건 그만큼 강한 결집력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이 출현을 했다. 적어도 30여명의 대형 고분에 30여명의 순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인적 동원을 갖출 수 있는 그런 결집력이 있는 왕권이 출현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고령․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수준 또한 대단하다. 뛰어난 철기기술을 보여주는 갑주류와, 곡선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묻어나는 토기는 대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또한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품들은 무덤주인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금관도 출토됐다. 고령에서 출토된 토기에 선명하게 사겨진 명문은 다시 대가야의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주보돈 교수
“대왕이라고 하는 것은 6세기 들어와서 신라의 경우에 왕호를 사용하면서 왕중왕이라는 그런 개념이고 따라서 고대 국가 체계를 갖춰나가는 상황에서 사용된 왕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산 능선 남쪽 끝자락의 고아동 벽화고분. 6세기경에 축조된 대가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 내부는 잘 다듬은 돌들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그 위에 회를 칠한 동방 무덤이다. 여기에 벽화를 그렸다. 벽에 그린 그림은 대부분 지워졌지만 일부벽면과 천정에는 연꽃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불교가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증거인 것이다.
정동락 학예연구사
“고대 사회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공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왕권을 크게 성장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왕과 부처를 등가 시킵니다. 부쳐=왕이라고 하는 사상 그게 왕즉불 사상인데 그런 왕즉불 사상을 통해서 왕권을 신장시키고 강화시키는 어떤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아동 벽화에 나타나는 연꽃 문양 통해 볼 때 대가야도 6세기 이후에 들어오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자 노력을 했고 그런 것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고령 대가야의 성장 기반은 무엇일까? 경남 합천 야로면에 있는 한 야산. 최근 이곳에서 조선시대까지 사용됐던 제철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야로 지역은 조선시대 3대 철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세공으로 매년 정철 9천5백 근을 바칠 정도로 풍부한 철 생산지였다. 지금은 합천군에 속하지만 삼국시대에는 고령군에 속해 이 지역은 대가야의 세력권이었다. 대가야의 성장 기반은 바로 풍부한 철산지와 뛰어난 제철 기술에 있었다.
신종환 관장 / 고령대가야 박물관
“대가야의 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무구류 가운데 갑옷이나 투구라던가 이런 유물들은 대가야가 다른 어떤 선진적인 철문화의 국가로부터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서 철을 제작했다기보다도 대가야만의 독특한 기술이 그대로 반영된 우수한 유물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대가야의 철 생산 기술과 철기 제작 기술은 아마 고대 사회에서 신라나 백제보다 한수 위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철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 중엽부터 고령 서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경남 거창군 개봉동 고분군. 산능성 위에 대형 고분이 우뚝 솟아 있다. 무덤의 입지와 형태로 볼 때 전형적인 대가야의 무덤양식이다. 이곳에 대가야의 세력이 진출했었음을 확인해 주는 고분군이다.
김기대 교수 / 대구한의대
“거창 개봉동 고분군은 5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고분군인데 이것을 이제 말하자면 대가야가 5세기 전반에 내부적으로 체제를 다진 다음에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동쪽에 있는 합천을 지나서 거창까지 와서 이 기반을 만든 다음에 더 서쪽 함양, 남원 쪽으로 진출하는 기지로써의 역할을 했던 그런 사람들이 만든 고분군이라고 할 수가 있죠.”
거창에서 자동차로 달리길 30여분. 함양군 백천리에서도 20여기가 밀집해 있는 가야계 고분군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무덤들도 크게 훼손돼 있다. 봉분 위에는 공장 시설이 들어서 있고 봉토는 대부분 잘려 나갔다. 숲속에 남아 있는 고분들 역시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여기 저기 도굴 구멍만 퀭하게 뚫려 있다. 1980년 발굴을 통해 함양지역의 세력들은 고령 대가야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이 확인 되었다. 대부분의 유물이 고령에서 직접 만들어서 옮겨진 것들이었다. 함양은 대가야가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박천수 교수 /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특히 함양 지역은 교통의 결정점입니다. 첫째 대가야가 서쪽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거창을 거쳐서 함양으로 오게 되면 서쪽으로 가면 곧바로 운봉, 아영으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면 남강로를 따라서 진주, 사천 또는 진주, 고성으로 진출하는 해안으로 진출하는 교통로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함양 지역이 대가야에게 중요한 지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5세기 초 영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대가야는 이를 발판으로 백두대간 넘어 호남 동부지역까지 그 세력권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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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가야의 해외 교역로 개척
대가야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도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5세기 이후 계속된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인해 대가야와 인접한 두 강국,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틈을 이용해 대가야는 주변 지역으로 영역을 넓히고,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 중국과도 교류를 확대해 나갑니다. 고령 지산동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대가야가 당시 주변국들과 얼마나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야광조개로 만든 이 국자모양의 유물입니다.
이 야광 국자는 일본에서도 최남단 오키나와에서만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일본 규슈지역을 거쳐 수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5세기 중반부터 대가야의 문물은 일본 열도에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이런 갑옷을 비롯한 철제무기류와 다양한 토기들이 일본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요. 특히 주목되는 것은 금동관, 금귀걸이, 마구 등과 같은 높은 수준의 금세공품들입니다.
고령 지산동에서 발굴된 유물과 비교해 보면 한 눈에 대가야에서 건너 간 유물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요, 여기 대가야 금동관의 특징을 보면 풀잎이나 꽃잎 모양의 솟은 장식이 금동띠 고리에 꽂혀 있습니다. 이 금동관과 유사한 게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쓰야마 고분에서 나옵니다. 장식을 사슬로 엮어 늘어뜨린 이 금귀걸이 역시 대가야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인데요, 일본에서도 이런 대가야의 금귀걸이가 여러 점 발견됐습니다.
대가야는 중국과도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습니다. 중국 <남제서>에는 대가야가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이라는 작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대가야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당당한 국가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드는데요, 경북 내륙에 발판을 둔 대가야는 어떤 경로를 통해 중국까지 갔던 것일까요?
서해안에 말머리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변산반도의 서쪽 끝자락, 전북 부안군 죽막동이다. 이곳에서 목조 건물 하나가 들어서 있다. 수성당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다에 인접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수성당에서는 서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항해의 안전을 비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다.
박순발 교수 / 충남대 고고학과
“죽막동 유적은 지금으로써 우리가 보면 연안 해안에 돌출한 돛과 같은 곳에 위치한 곳인데 아마 예로부터 연안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 가야 될 그런 곳이면서 또한 물 사이 급하고 여러 가지 해안 사고가 많이 일어났던 그런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해서 그러한 장소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행해지는 그런 유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1년 수성당 뒤편 공터를 발굴한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나왔다. 제사와 관련된 유물들이었다. 국립전주박물관. 이곳에는 당시 죽막동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제사에 사용되었던 대형 토기류와 그 속에 담겨 있던 모형 돌칼, 철제품들이 함께 나왔다. 그중 눈에 띄는 유물이 있다. 대가야 특색인 물결무늬가 선명한 대형토기와 제사에 사용한 대가야의 원통형 그릇받침이다.
박순발 교수
“분명 5세기 후반에서 늦으면 6세기 초 경에 이르는 가야 지역 계통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무래도 대가야가 될 것 같지만 그런 가야 지역의 토기들도 함께 출토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항로는 이용한 것은 가야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 왜도 같이 활용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유물도 같이 나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역시 대가야계와 관련시킬 수 있는 이런 토기가 나왔다는 것은 이런 대가야 세력들도 이 항로를 이용했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시점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 그런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북 내륙 산간의 고령에 기반을 둔 대가야가 서해안의 끝인 전북 부안 죽막동까지 어떤 길로 왔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고령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하구에 있는 김해까지 나아가 남해를 돌아 죽막동으로 가는 길이다. 고령의 대가천은 낙동강 본류와 연결된다. 낙동강 큰물줄기를 타고 대가야인들은 바다로 쉽게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5세기 이후에는 더 이상 낙동강을 이용하지 못한다.
김태식 교수 / 홍익대 역사교육과
“5세기 대 이후를 보게 되면 가야는 가야와 신라가 낙동강을 국경선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야의 낙동강의 동부지역에는 신라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고 낙동강의 서부지역에는 가야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 강이 예전과 같은 교통로로써의 역할은 거의 기능을 못하게 됩니다.”
낙동강을 이용하는 바닷길이 막혔다면 육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백두대간의 육십령과 치재를 넘으면 임실까지 갈 수 있다. 거기에서 다시 호남정맥을 넘으면 죽막동까지는 별다른 장애 없이 평지를 통해 가는 길이 연결돼 있다.
박천수 교수
“남원 분지에서 죽막동을 가는 길은 남원에서 임실을 지나서 호남 정맥을 넘어서 부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470년대는 이미 고창, 부안 지역이 백제 수중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백제 협조 없이는 이 지역을 통과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으로는 신라, 서로는 백제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대가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바로 섬진강 루트를 통해 남해 바다로 나가는 길이다. 대가야는 섬진강 루트를 뚫기 위해 고령에서 계속 서진해, 백두대간을 넘어 호남 동부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해 갔던 것이다.
박천수 교수
“백두대간을 넘은 대가야는 남원 분지에 도달한 후 요천을 이용해서 섬진강 하구로 나아갔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지금은 섬진강의 수량이 풍부하지 못합니다만 일제시대 까지 요천을 통한 섬진강 하구까지 선박의 왕래가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섬진강 로 주변에는 대가야가 마치 교역로를 보호하듯이 축성한 대가야의 산성이 포진해 있기 때문입니다.”
섬진강 루트 주변에 밀집해 있는 산성들. 그것은 섬진강 루트를 보호하기 위한 대가야가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가 섬진강 루트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해와 마주한 전남 여수 미평동. 이곳에 주목한 만한 산성이 있다. 고락산성이다. 백제가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락산성은 남해 바다에서 뭍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망할 수 있는 요새다. 그런데 성벽 안쪽에 있는 배수구 터를 발굴하던 중 대가야 유물이 발견됐다. 뚜껑 있는 대가야의 목긴 항아리를 비롯해 대가야 토기 십여 점이 출토된 것이다. 이것은 6세기 전반 이전, 이 지역에 대가야 세력이 진출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동희 학예연구사 / 순천대 박물관
“그 당시 성 주변에서 살던 토착민이 이용하던 그릇으로 봐야 되는데 그 사람들이 왜 그런 대가야 토기를 사용했느냐.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5세기 후반 이후에 대가야의 정치의 문화적인 영향 속에서 토착민들이 이러한 토기를 사용했고 쭉 토착민이 지속화 되면서 백제가 들어오면서 토착민이 사용하던 그릇이 같이 매몰된 것으로 생각한다.”
대가야는 섬진강 루트를 뚫고 남해 바다로 나가 일본과 교류했고, 죽막동을 거쳐 중국과도 독자적인 교역루트를 확보했던 것이다. 섬진강은 대가야가 개척한 새로운 대외 교역 루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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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제와의 전쟁 - 섬진강을 사수하라.
대가야가 백두대간을 넘어 호남 동부지역으로 진출했던 것은 바로 섬진강 루트를 뚫고 대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가야가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섬진강 루트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섬진강 중상류 지역에는 대가야 세력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봉수대가 밀집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봉수란 주변이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서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적의 침입을 신속하게 알리는 군사시설인데요, 왜 이 지역에 봉수대를 만들었던 것일까요?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완주와 진안을 이어주는 싸리 고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해발 500m의 봉화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산의 정상에는 삼국시대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가로 10m, 높이가 5m에 이르는 거대한 봉수대다. 봉수대 위, 화구가 놓였던 자리다. 화구는 없어졌지만 이곳이 봉수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인터뷰
“이게 그때 썼던 숯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봐서는 이렇게 안정된 숯이 쌓여 있는 것을 봤을 때는 아마도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숯이 되겠습니다.”
봉수대 주변에는 삼국시대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다. 그중 상당수는 대가야계 토기편들이다.
인터뷰
“이런 토기가 왜 산꼭대기에 있을까요? 이 봉수대에는 봉수군이 상주를 하고 봉수군이 상주하면서 일상생활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토기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해발 846m의 고남산. 이 산의 정상에서도 봉수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봉수대는 대부분 무너져 훼손됐지만 봉수대로 쓰였던 석축의 일부는 뚜렷이 보인다. 이 봉수대에서도 백제계 토기편과 함깨 대가야계 토기편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곽장근 교수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토기편인데 전형적인 가야 토기로 알려진 장경호편 경부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 경부 돌대 사이에 밀집 파상 무늬가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가야 토기편으로 추정되는 토기편이 봉수나 산성에서 수습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진안과 남원, 장수, 임실 일대에서 40여개가 넘는 봉수대가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곽장근 교수
“지금까지 지표 조사로 확인된 봉수는 대략 40여개 소에 달합니다. 그리고 지금 서 계시는 고남산 봉수 중심으로 해서 북동쪽으로 대략 8km 떨어진 곳에 장수 봉화산 봉수가 자리를 하고 있고 그리고 동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남원 깃대봉 봉수가 지라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반대편에 해당하는 남쪽에도 2개소의 봉수가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까지 파악된 결과에 의한다면 백두대간 산줄기에 대략 10여개소의 봉수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북쪽의 진안 봉화산 봉수대에서 남쪽의 남원 고막산 봉수대 사이에 자리한 40여개의 봉수대. 고려시대 이후 체계화된 중앙 봉수 체계에서 이 지역의 봉수대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사용된 봉수대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의 봉수대는 언제, 어떤 세력이 만든 것일까? 일본서기에 그 의문을 풀어줄 내용이 담겨 있다. 6세기 초반, 반파 즉 대가야와 백제가 기문과 대사 지역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고 있는 내용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기문과 대사는 오늘날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학계에서는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진안, 장수, 임실, 남원 일대에 자리한 소국을 기문 그리고 섬진강 하구에 자리하고 있는 하동지역을 대사로 보고 있다.
김태식 교수
“지금의 섬진강을 기문하라고 했어요. 일본 측 기록을 보면은 기문하라고 했는데 같은 강의 연변에 있는데 대사 하동은 섬진강 하류 지방이고 기문은 섬진강의 상류지역으로 보이고 그것을 기문하라고도 했고 또 남원이나 임실의 지명이 거물 또는 고밀 이런 식으로 발음이 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헌 증거 그러한 지역에서 가야 지역 문물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가문은 지금의 남원, 장수, 임실,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기문과 대사를 연결하는 섬진강 루트. 섬진강 루트는 일찍이 백제가 진출해 일본과의 교역로로 이용하던 곳이다. 이런 사실은 문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 하동을 장악하고 왕복하는 길의 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5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까지 옮겨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이틈을 이용해 대가야가 섬진강 루트를 확보한 것이다.
김태식 교수
“위례성이 함락되어서 공산성을 천도하는 그러한 입장에서 주변 예하의 소국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아마 통솔할 수 있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 시기에 대가야로써는 그것을 기회로 잡아서 그 지역을 자기 소속국으로 편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선물 공세도 하고 또 자기들의 능력도 입증하면서 실질적으로 479년에 대가야가 중국의 남제와 교통한 것이 확인이 되고 있고 일본과도 교통하였던 것이 유물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볼 때 대가야가 보다 더 적극적인 공세를 통해서 기문 지역을 편입시켰고 그 당시에 국가 전망의 위기에 있었던 5세기 후반의 백제는 그것을 막을 힘이 한시적으로 없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6세기, 백제가 국가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백제의 무령왕은 대가야가 장악한 기문, 대사 지역의 회복에 나선다. 이를 위해 무령왕은 왜의 세력도 포섭한다. 이러한 백제의 움직임에 대가야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일본서기에는 대가야가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의 진주에서 하동, 그리고 광양까지 이어지는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섬진강 하구인 하동지역에 위치한 고소산성. 섬진강 물이 남해 바다와 만나는 이곳 하동의 고소산성에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대가야계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축성 기록을 근거로 대가야가 백제와 왜에 대비해 쌓은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세기 교수
“이 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 위치 어디를 방어하느냐는 것을 볼 때 서북쪽의 백제를 방어할 수 있고 오른쪽에 섬진강 하구를 방어할 수 있는 위치고 여기서 방어 위치가 대가야를 방어하는 위치라는 것하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513년에 다사 지역에 축성을 한 기록 대가야가 축성을 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리고 이 안에서 대가야 토기편도 나오고 이런 것으로 봐서 이거는 대가야 성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같은 시기 대가야가 봉수대와 식량 창고를 세워 일본에 대비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기록대로라면 섬진강 중상류 지역의 봉수대는 대가야가 쌓은 봉수대일 가능성이 크다. 대가야는 진안, 임실, 남원, 장수로 이어지는 기문지역에 봉수대를 설치해 백제와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태식
“기문지역은 결국 일본 교통로를 누가 장악하는가 하는 교통로의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 백제가 일본과 교통하게 되느냐 아니면 대가야가 일본과 교통하게 되느냐 일본은 그 당시에 가야나 백제보다 문화 수준이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선진문물을 이쪽에서 도입해야 됐고 그러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거든요. 그런 중개무역을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점에서 섬진강이 백제 세력과 대가야 세력으로서는 그것이 쟁탈하게 되는 입지적인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봉수대는 섬진강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남진하는 백제와 서진하는 대가야가 무력 충돌까지 불사했던 6세기 초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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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가야의 멸망
섬진강 중상류 지역에 밀집해 있는 봉수대들, 이에 대한 기록이 충분치 않아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하면 6세기 초 섬진강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백제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대가야 세력이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가야는 국운을 걸고 대외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산성과 봉수를 쌓고 백제와 맞섰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제, 신라와 당당히 맞서면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던 대가야는 6세기 중반부터 점차 쇠퇴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고구려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고전하던 신라와 백제가 점차 정국의 안정을 찾고 체제를 정비한 후에 가야지역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본격화한 것입니다.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살길을 모색하지만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대가야와 신라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낙동강. 낙동강에 바로 인접한 봉화산 정상부에는 대가야가 설치한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낙동강을 넘어 대가야로 진격해 오는 신라의 군사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정동락 학예연구사
“대가야와 신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최전방의 위치한 곳이다. 그렇게 높이는 높지는 않지만 한눈에 낙동강 건너 신라군의 동정을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얘기할 수 있습니다. 신라군의 움직임이 이상하면 봉수를 피워서 고령으로 바로 연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562년 9월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낙동강을 건너 고령으로 진격해 온다. 대가야는 고령 왕궁을 중심으로 외부로 통하는 길목마다 10여개의 산성과 봉수대를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왔다. 신라군은 달성 지역이나 창녕 지역에서 올라와 대가야의 왕궁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봉수대와 산성으로 튼튼한 요새를 갖춰 놓았던 고령의 대가야(고령 주산성). 그러나 대가야는 아무 저항도 못하고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사다함이 5천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니 사람들이 두려워 일시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562년). 대가야가 이렇게 힘없이 망한 이유는 뭘까? 대가야는 섬진강 루트를 백제에게 빼앗긴 6세기 초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대가야는 대외 진출로를 상실하고 왜와의 교역권도 잃게 된다. 계속되는 백제의 압박에 위기를 느낀 대가야는 친(親)신라 정책을 편다. 522년에는 신라와 결혼 동맹까지 맺는다.
김태식 교수
“대가야는 백제와 호남 동부 지역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낙동강 통로를 찾기 위해서는 신라와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그 당시 법흥왕 때인데 대가야 연맹 왕이 신라와 협조 관계를 구해 오게 되니까 요거를 빌미로 투쟁 없이 전쟁 없이 삼킬 수 있는 방안으로 결혼 동맹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 동맹은 불과 7년 만에 깨진다. 529년의 이른바 변복사건이 그 원인이었다.
주보돈 교수
“신라 왕녀를 보내면서 신라 복장을 하고 거기에 종자들이라고 나와 있는데 종자들도 신라 복장을 입혀서 보내어 가지고 활동을 하게 하는 겁니다. 아마 거기에는 여러 가지 군사무장을 한 사람도 있을 거고 종자도 있을 건데 이게 일종의 주둔 병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대가야 쪽에서는 그것을 바꾸라고 요구를 하는데 그런 자세들이 아마도 대가야 입장에서 볼 때 위압적이고 고압적으로 그런 것을 느끼고 이것이 원래 목적은 결혼 동맹을 미끼로 해서 제압해 나가려고 하는 그런 의사 표명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서 신라와 결혼 동맹을 파탄하게 되는 것이죠.”
이후 신라의 야심은 본격화된다. 551년 백제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유역을 신라가 독차지해 버린다. 신라의 배신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대가야와 왜 세력까지 동원해 신라의 관산성으로 진격한다. 충북 옥천. 신라로서는 이 지역이 새로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충지다. 여기에 관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 현재 돌만 흘러내린 돌만 남아 있다. 지금도 돌이 보이는데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554년 관산성에서 국운을 건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 백제 연합군의 관산성 점령으로 승전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백제 성왕이 기습 공격을 당해 죽는다. 이것은 백제 연합군의 참패로 이어진다. 관산성 전투와 관련해 이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게 한다.
조일권 이사 / 옥천 문화원
“이 곳을 말 무덤 고개라고 부릅니다. 말 무덤이라는 것은 우리가 타고 다니는 말의 무덤일 수도 있고 말 자체가 크다는 어원이 있기 때문에 이 뒤편에 있는 관산성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신라와 백제 전투 시 백제가 여기서 많은 전사가 있었는데 전사자들의 큰 무덤이 있지 않았나 그래서 그 무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말 무덤 고개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 연합군의 전자사는 2만9천6백명. 관산성 전투의 참패는 대가야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김태식 교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그 당시에 백제는 만 명 정도의 군대를 파견을 했다고 나오고 그 당시에 백제를 돕는 왜군이 천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백제군과 왜군이 11,000명이 되는데 사망한 사람이 29,000명 이상인데 나머지는 아마 가야군으로 추정이 되고 그래서 적어도 19,000명 정도 이상의 가야군이 사망했다고 보고 연맹체 단계의 국가로써 그렇게 많은 군대가 동원이 되어서 사망한 것은 아마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고 매우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경남 창년군 교동 고분군. 이곳은 가야연맹의 또 다른 소국이 자리했었던 지역이다. 신라 진흥왕은 561년, 창녕 가야세력을 공격해 멸망시킨다. 그러고 나서 이 지역에 척경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당시 왕을 수행했던 장수들의 명단을 밝히고 있다.
주보돈 교수
“왕도 물론 여기 오지만 창녕과 실제 관계가 없는 다른 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지방 파견의 군 사령관들 여기에 전부 결집을 하게 되는 것이죠. 중앙에서 가장 당시에 유력한 세력들도 여기에 와서 창녕에 모여서 이쪽을 전군 저는 전군 지휘관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창녕에 결집을 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강 건너 마지막으로 강 건너 가야 세력을 총 공격하기 위한 마무리 작업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창녕에 결집한 신라군은 562년, 고령으로 진격한다. 대가야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다. 5백여 년 가야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대가야가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춘 것은 5세기다. 멸망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대가야는 신라, 백제와 맞서 고대 국가로 발전했던 강력한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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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동안 우리에게 가야는 잊힌 왕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야가 자체적인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근 고고학의 발굴성과들이 축적되면서 어둠 속에 가려졌던 가야사가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조할 점은 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당당히 맞서면서 5백년 이상 엄연히 존재했었던 고대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발굴을 통해 드러난 가야의 유물과 유산은 다른 삼국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야의 우수한 선진문물은 고대 일본사회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마디로 가야사를 배제하고서는 고대 동아시아의 발전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의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4국시대로 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글 내용 저작권은 KBS HD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금함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 | 책을 벗 삼아 |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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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