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수심결] ⑦
‘영리’하기만 하면 법망에 걸려 시비 일삼아
어떤 방편을 지어야 한생각 기틀을 돌이켜 문득 자성을 깨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대의 마음일 뿐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리오.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앎을 구할진데 문득 얻지 못할 줄 알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적멸의 바다에 보름달 떠오르니 천 개의 섬마다 달 하나씩 머금고 연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달빛을 따라 관음상 앞에 나섰더니 초여름 밤은 풀벌레 울음소리로 밝아오고 소리마다 영롱한 달그림자 마치 관음의 교향곡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의 천진한 성품은 보름달처럼 홀로 외로이 밝아 경계를 따라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경계를 보면 곧 마음을 볼 뿐 달리 특별한 방편을 짓지 않는다.
며칠 전 장마 준비를 하려 한길가에 전주를 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칡넝쿨을 자르고 밭에 나가 물꼬를 점검했다. 키가 큰 옥수수와 토마토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줏대를 세우고 노끈으로 동여맨다. 오이는 한참 동안 재미있게 열리더니 이제 끝물이 열린 것 같고 수박과 참외는 꽃이 한창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와 같이 신령스럽게 아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호박은 둥근 줄 알고 오이는 길쭉한 줄 알고 가지색은 검은 줄 알고 토마토는 붉은 줄 알고 참외는 노란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 마실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시원하면 시원한 줄 알고 또한 이렇게 능히 모든 것을 잘 분별할 줄 안다.
어리석은 범부는 아는 것을 따라가서 분별을 하고 취사선택을 하여 경계에 물들어 버리지만 깨달은 사람은 아는 것을 통해서 아는 놈을 바로 확인하기 때문에 단지 알 뿐이다. 이렇게 신령스럽게 아는 놈은 한 번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도 하지만 아는 것들은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흘러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것에 매이지 말고 머무른 바 없이 아는 놈을 쓰면 된다.
그러나 다시 아는 놈을 찾으려고 하면 문득 알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으니 마치 눈이 없다고 찾았던 사람이 사물을 보는 순간 본래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깨달으면 눈을 보는 것처럼 다만 알지 못할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지금 눈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불식(不識)” 즉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은 아는 놈을 찾으려고 하면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 않는다. 영리한 사람은 많이 아는 것으로 불법을 삼아 오히려 법망에 걸려 시비를 일삼고 둔한 사람은 모르는 것으로 도를 삼아 무기에 떨어져 밝지 못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알지 못할 줄을 알뿐이라서 앎을 자재하게 쓸 뿐이다.
장마 중간 중간 내려쬐는 햇살이 불볕마냥 따갑다. 산색은 어느덧 진한 초록으로 변해 바다와 하나로 만나고 숲은 어느 때보다 풍성해 보인다. 머루와 다래가 영글어가고 천문동, 하수오, 더덕 등 여기저기 약초들이 눈에 띈다. 저쪽 바위 옆에는 여정목이 하얀 눈꽃을 피우고 하늘나리가 꽃대를 제법 통통하게 내밀고 있다. 터널처럼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어느덧 계곡에 이르렀다. 산복숭아 익어가는 개울에 두 발을 담그니 청량한 기운이 뼛속에 스며들고 신령스런 앎이 이렇게 분명하다.
천진 도인이었던 혜월 스님이 관음주력을 하다가 경허선사의 『수심결』 강의 중 ‘다.만. 알.지. 못.하.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라는 구절을 듣고서 본래 천진한 면목을 깨달았다.
주인도 잠이 든 항구에
배 한척 깨어 있어
달과 함께 놀고 있다.
거금선원장 일선 스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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