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하는 혼 (이케다 SGI 회장 대담록)
제9회 미국 공민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
용기를! 일어설 때가 왔다
“인권의 보배, 세계의 보배, 세계의 어머니, 환영합니다!”
이케다(池田) SGI 회장이 들뜬 목소리로 그 사람을 맞이했다.
인종 차별 철폐로 이어진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디딘 로자 파크스.
1993년 1월 30일, 미국소카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당시)에 도착한 파크스 일행은 청년들이 부르는 ‘위 쉘 오버컴(We shall overcome, 우리는 승리하리라)’의 노랫소리에 감싸였다. 이 노래는 공민권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다.
SGI 회장이 파크스와 악수를 나누고 가네코 여사가 꽃다발을 건넸다.
파크스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회견하기 전의 긴장한 기색이 깨끗이 사라졌다.
파크스는 그 전해(1992년)인 12월 5일, 인권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소카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를 방문해, 어학연수 중이던 소카(創價)여자단기대학 학생들과 간담했다.
학생들의 순수함에 감동한 파크스는 SGI 회장이 이 학교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회견을 희망했다. ‘이런 훌륭한 학생이 있는 대학을 창립한 이케다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느 출판사가 ‘사진은 말한다’라는 책을 기획했다. 저명인사가 저마다 고른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진 1장’을 싣는 책으로 파크스에게도 의뢰가 들어왔다. 파크스는 SGI 회장을 만나기 전부터 그날이 인생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던 것 같다.
“버스 보이콧 운동은 과거의 일입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사진을 싣고 싶습니다” “오늘 이케다 회장과 함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실을 수는 없을까요?”
캠퍼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관계자와 이렇게 상담했다고 한다.
회견에서 SGI 회장은 파크스가 걸어온 인권투쟁의 발자취를 진심으로 찬탄했다. “‘한 사람’의 용기가 ‘만인’에게 퍼지고 ‘만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최초의 한 사람은 ‘만인에게 통하는 한 사람’입니다.”
파크스는 사랑하는 아버지 레이먼드와 존경하는 어머니 레오나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등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SGI 회장이 건네는 질문에 정중히 답하던 파크스가 도중에 이런 말을 꺼냈다.
“이케다 회장만큼 만나자마자 이렇게까지 친밀감을 느끼고, ‘우인(友人)’이라고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오늘 회장을 만나 내 인생에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이라는 새로운 장이 열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이야기한 ‘사진 1장’에 대해 털어놓았다.
SGI 회장은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기꺼이 수락했다.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을 실은 책이 이듬해 발간되었고, 파크스는 이 책에 헌사를 써서 SGI 회장에게 보냈다.
◇
파크스는 1913년 2월 4일,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다. 지난해(2013년)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0년대, 파크스가 소녀 시절을 보낸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폭력과 살인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밤이 되어 파크스가 잠들어도 할아버지는 총을 옆에 두고 습격에 대비했다고 한다.
파크스는 누명을 쓴 흑인 소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해 함께 인권운동을 하게 된다.
1943년 겨울, 파크스는 몽고메리시에서 버스를 탔다. 흑인은 뒷좌석에 앉도록 강요당하던 시절이었다.
파크스는 앞문으로 타서 승객들을 헤치고 뒤쪽으로 갔다. 운전사는 몹시 화가 나서 파크스에게 버스에서 내려서 뒷문으로 다시 타라고 명령했다. 파크스는 거부했지만, 권총을 든 운전사에게 위협당해 버스를 내리고 말았다.
12년 뒤인 1955년 12월 1일, 그 ‘역사를 바꾼 날’ 버스를 운전한 사람도 같은 남자였다.
파크스는 흑인석의 맨 앞줄에 앉았지만, 이윽고 백인석이 다 차게 되었다.
“어서 그 자리를 비우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협박하는 운전사에게 파크스는 의연히 되받아쳤다.
“노(No)!”
이제는 지쳤다. 다리가 아팠기 때문이 아니다.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심한 차별을 받는 불의(不義)에 지쳤기 때문이다.
“일어서야 할 때가 왔던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만 하면 두려운 일 따위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크스가 체포되자 흑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버스를 거부하고 걸어 다니거나 함께 차를 타서 이동했다.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지휘하는 ‘버스 보이콧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6년 11월, 연방대법원은 ‘공공교통기관에서의 차별은 헌법 위반’이라고 판결했고, 버스 보이콧 운동이 승리를 거뒀다.
‘워싱턴 대행진’으로 상징되는 공민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1964년 7월에는 인종 차별을 철폐하는 ‘공민권법’이, 1965년 8월에는 흑인의 투표권에 관한 차별을 금지하는 ‘투표권법’이 성립되었다.
◇
“꼭 일본에 와주십시오!” SGI 회장의 요청에 응해 여든한 살의 파크스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1994년 5월 13일, 파크스는 도쿄의 세이쿄(聖敎)신문 본사에서 SGI 회장과 회견했다. 그 전날에는 소카대학교에서 강연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났던 소카여자단기대학 학생들과 다시 만났다. 학생들이 부르는 ‘위 쉘 오버컴’을 다시 들은 파크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창가교육을 깊이 신뢰하게 된 파크스는 미국 소카대학교 오렌지군 캠퍼스(SUA) 건설에 협력한다. 1995년 3월, 대학 설립 인가를 결정하는 군의 공청회에서 파크스가 쓴 편지가 낭독되었다.
“이케다 박사는 평화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SUA는 ‘세계평화’와 ‘인류 번영’이라는 내 신념을 공유하는 대학입니다. 그리고 이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이 다음 세기를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설립은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청년을 사랑한 파크스는 미국SGI 청년부 모임에도 자주 발길을 옮겼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는 고베 다카쿠라다이지부의 여자부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이 곤란한 도전에 대해 새로운 정신으로 ‘위 쉘 오버컴’을 부르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2005년 10월, 파크스는 아흔두살로 영면했지만, 그 신념과 창가교육과의 우정은 파크스 가 공동 창립한 ‘로자&레이먼드 파크스 자기개발교육센터’로 이어졌다.
“계속 강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권의 어머니’는 세계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배우는 모든 사람들을 지금도 계속 격려하고 있다.
◆ 로자 파크스
미국 공민권운동의 어머니. 1913년 2월,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주 출생. 2005년 10월, 92세로 서거.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회원으로서 남편 레이먼드 파크스와 함께 인종차별에 맞선 항의운동을 전개했다.
1955년 12월 1일, 시영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해 체포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틴 루터 킹 박사가 리더가 되어 ‘버스 보이콧 운동’이 각지에 퍼졌다. 1956년, 연방대법원은 공공교통기관에서의 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987년, ‘로자&레이먼드 파크스 자기개발교육센터’를 창립해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99년에는 미국의회 최고의 영예인 ‘금메달상’을 수상했다.
공명하는 혼 (9) 미국 공민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