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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0 민영환 순국지사 묘에 서 묵념으로 예를 표하고 비석과 안내판에 적혀있는 민영환 순국지사님 관련한 글을 읽어보며 민 영환 지사님께서 얼마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치셨을까 하고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해외 병원근무를 명예롭게 은퇴하고 한국에서 문화재지킴으로서 봉사활동을 시작한것에 지금까지도 참 잘 선택하였다고 자부 합니다. 저를 아시는 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 역사에관하여 1도 모르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문화재 지킴이를 하면서 강의를 듣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많은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정몽주 선생의 묘소에 다녀왔고 이번에는 "종묘배향공신"이신 민영환 순국지사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저의 집(분당 구미동)에서 약 7Km 정도 거리에 있고 탄천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마성초등학교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집에 돌아 올때는 구성동 주민센터 -->-->마북로247번지길-->난파음악관-->단국대학교로 해서 집에 도착하여보니 13.60 Km 를 걸었습니다.
정몽조 선생의 묘를 보았을 때와 민영환선생의 묘는 크게 달라보였습니다. 민영환 순국지사님의 묘의 석물은 혼유석, 문인석이 서로 마주보며 각각 하나씩 나란히 있으며 문인석 조금 뒤로 가운데에 장명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명등 뒤에 양쪽으로 망주석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석물의 위치는 망자의 신분에따라 다른지는 몰라도 책에 있는 위치와 묘에 있는 위치가 조금 다른 것이 보입니다.
정 의 : 대한제국기 내부대신, 군법교정총재 등을 역임한 문신.
키워드 : 순국지사
개 설 :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 판서 민겸호 (閔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검열·설서(說書)·수찬(修撰)·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 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 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내무 협판·개성 유수·해방 총관(海防總管)·친군연해 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한성 우윤(漢城右尹)·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등을 역임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영환(閔泳煥))]
1887년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민영환은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위의 사진은 '민영한의 집터'입니다. 어느분이 올린 "민영한의 집터" 라는 사진을 올려놓고는 남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저작권을 걸어놓은것을 보았습니다. 사진만 있고 집터를 알리는 석물의 위치도 기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올린 사진은 저작권도 없고 누구라도 필요하신분은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이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조계사 앞의 보도 좌측 약10m 위이에 있습니다.
이에 일제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민영환은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尹致昊)·김득련(金得鍊)·김도일(金道一)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上海)·나가사키[長崎]·동경(東京)·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孫炳均)·김병옥(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鄭喬)는 지금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韓圭卨)과 민영환 밖에 없으므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내부 대신 겸 군부 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참정 대신·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민영환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元帥府)의 회계국 총장(會計局總長)·장례원경(掌禮院卿)·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헌병사령관을 등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외무 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 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충정공 민영환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 입니다. 위의 사진은 11일날 조계사에서 시진 촬영을 마치고 문화재지킴이 강의 시간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꼭 가보라는 교수님들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조계사에서 약 5~10분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서 관람 하였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생각없이 발길가는데로 걷다보이니 충정공 민영환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라는 조형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영환(閔泳煥)]
작은 사당으로서 5년전에 건축했다는데 전혀 관리가 되어있지 않앗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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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한분을 다각도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흔적을 찾아 용인, 서울을 다니셨네요. 그 열정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