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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五世 美川大帝紀
제15세 미천대제기
원문출처 ;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帝,初號乙弗大王,西川帝之孫,咄固大王之子.母,乙太后,太公乙宝之女也.性寬厚下人,有智略能制衆.烽上之殺咄固也,乙弗在尙婁家,婁以家人再生談河護乙弗.而走匿于水室村陰牟家爲傭.牟役之甚苦,使禁蛙鳴,達夜投[瓦]1)而禁之.晝夜樵採,不許暫息.乃逃與東村人冉牟販鹽奇於鴨淥之思収村人家.其家老嫗請鹽,許之斗許,請益不得與,嫗恨恚潛以屨置之鹽中.不知上道,嫗追索之誣以偸屨.鴨淥宰命以鹽償屨而決笞放之.於是,形容枯槁衣裳繿縷,人見之不知其爲王孫也.時,倉助利將行廢立,以王孫儉約仁慈可以嗣祖,遣臣等迎之.乙弗曰“予,野人.非王孫也.”蕭友等引至仙潔家,行君臣之禮,迎入于烏陌南家.九月,畋于候山之陰,助利謂衆曰“與我同志者,劾我.”乃以芦葉揷冠,衆皆揷之,乃謂衆曰“今主上無道.乙弗大王有德,願其戴之.”衆大喜抃躍.乃迎乙弗上璽綬,幽烽上帝于行宮守之.
제는 초호가 을불대왕乙弗大王이고, 서천제西川帝의 손자로, 돌고대왕咄固大王의 아들이다. 모친은 을乙태후로 태공 을보乙宝 딸이다. 성품이 너그러워 아랫사람들에게 후하였으며, 지략이 있어 능히 무리들을 절제하였다. 봉상烽上이 돌고咄固를 죽일 때, 을불乙弗은 상루尙婁의 집에 있었고, 상루婁가 집안사람 재생再生과 담하談河로 하여금 을불을 보호하게 하니, 수실촌水室村2) 음모陰牟의 집으로 달아나 숨어서 품을 팔았는데, 음모牟가 부려먹음이 심히 고생스러웠다. 개구리가 울지 않게 하라고 하여 밤새도록 기와쪼가리를 던져서 울지 않게 하였고, 밤낮으로 땔나무를 하라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였다3). 이에 도망하여, 동촌東村사람 염모冉牟와 함께 소금을 팔면서 압록鴨淥땅 사수촌思收村사람 집에 의탁하였다4). 그 집 노파가 소금을 달라고 하여 한 말쯤을 주었고, 더 달라고 하매 더 주지 않았더니, 노파가 원망하며 화가 나서 신발을 소금 속에 숨겨놓았다. 이를 모른 채로 길을 나섰다가, 노파가 쫓아와 뒤져서 신발을 찾아내고 신발을 훔쳤노라고 고변하매, 압록鴨淥땅의 관리(우두머리)가 명하여 소금으로 신발 훔친 것을 보상하게 하고 볼기를 쳐서 풀어주었다. 이 시절, 얼굴과 꼬락서니가 삐쩍 마르고 의복은 남루하여, 사람들은 마주하고서도 그가 임금의 손자임을 몰라보았다. 이즈음, 창조리倉助利는 곧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우려던 참이었고, 왕손이면서도 검약하고 인자하여 조부의 뒤를 이을만하다고 여겨서 신하 등을 보내서 맞아들이게 하였더니, 을불乙弗이 말하기를 “저는 야인이지 임금의 손자가 아닙니다.”라 하였으나, 소우蕭友 등이 선결仙潔의 집5)으로 모셔가서 군신의 예를 거행하고, 오맥남烏陌南의 집으로 맞아들였다. 9월, 후산候山6)북녘에서 사냥하다가, 창조리助利가 무리들에게 말하길 “나와 뜻이 같은 이들은 나를 따라 하시오.”라며 부들 잎을 모자에 꽂았더니, 모두가 부들 잎을 모자에 꽂으매, 이윽고 (창조리가) 말하기를 “지금의 주상은 무도無道하오이다. 을불대왕乙弗大王이 덕이 있어, 그를 추대하려 하오이다.”라 하자, 무리들이 크게 기뻐하며 손뼉치고 발을 굴렀다. 이에, 을불을 맞아들여서 옥새璽와 인끈綬을 바치고, 봉상제烽上帝를 행궁에 가둬서 지켰다.
1) 乙弗大王傳은 石이고 三國史記는 瓦石인데, 本傳의 글자는 本傳의 글자는 明確하지 않으나 瓦인 것으로 보인다.
2) 乙弗大王傳曰[尙婁心腹二人奉命,裝乙弗以流人,出奔沸流,至尙婁遠族陰牟之家,詐稱尙婁家罪人而托之.]. 이는 癸丑(CE293)之事이며, 甲寅(CE294) ~ 丁巳(CE297)年간에는 山西省 霍山인근 最彘와 淸漳河 下流인근인 樂浪部 黏蟬之境을 輾轉한다.
3) 乙弗이 沸流 땅 陰牟의 집에서 품을 팔던 期間은 烽上2年(CE293)9月 以後부터 약 1年餘 정도이다. 봉상4년(CE295)2月쯤에 이미 南方을 向하였다. 乙弗大王傳 참조.
4) 三國史記及乙弗大王傳皆曰[思收村在鴨淥江東.], 乙弗大王傳 기록을 따르면, 沸流(湯河) 땅으로 逃避하여 身分을 숨기고 품팔이를 하다가 다시금 南方 멀리 樂浪(郡)境界로 逃避하여 交通貿易하였고, 最彘部(帶方故地) 鵠落岺지경에서 靺鞨들과 섞여 살면서 菖蒲王이 되어 最彘六村二城・陽化二村・鞨部一村을 거느렸고, 棘城에 있던 慕容廆와의 일이 失敗한 以後로 慕容廆와 不和를 피하고자 黏蟬部(樂浪故地)로 會同하러 갔다가, 黏蟬部의 使嗾로 慕容廆의 校尉와 烽上의 西部使者에게 붙잡혀 京都로 送致되던 중 班玉岺에서 反衆에 의해 檻車에서 풀려났다. 이에 逃亡하여 水確之家와 棠山村 高朴兒의 집을 거치고 배로 (東)鴨淥(灤河?)을 건너 江東으로 逃避한 直後之事 즉 己未(CE299)之事이다. 대략 高句麗의 畿內地域 周邊의 北方과 南方을 거쳐 다시금 東方지역으로 逃避한 直後의 일이다. 이후로 候山 및 烽山을 거쳐 京都로 入城한다.
5) 棠山雉祠・平山달祠・馬山牛祠 則三蘇之馬山.
6) 張北市候兒山?
☯元年庚申,秋九月,封公臣十二人倉助利祖弗蕭友烏陌南柘仙方方夫再生談河松巨長莫思休都等于其鄕,賜奴婢有差.尊考咄固大王為平貊大帝,母乙后為檀林太后,祖母高氏為太皇太后,乙太后父乙宝為國太公. 冬十月,黃霧四塞五日,求言.太史于先曰“兆在后妃.”再生脅取烽上帝椽后為妻,人皆以爲再生霧. 以倉助利太輔,于卓左輔,乙盧右輔.盧,乙太后兄也. 十一月,西北風大至,飛沙走石六日.上减食問過,倉助利曰“冝先立正后,而禁再生談河之恃功[擅]7)權.”上唯唯. 晋立羊氏爲后. 十二月,星孛于東方.于先曰“君臣相爭之兆.”乃赦尙宝父子及芙莢兄弟.宝,草氏之父.莢,芙氏之兄也. 晦日,以尙宝爲左輔,于卓為西部大使者.上欲以草氏為皇后,倉助利諫曰“草氏不能立節,媚事廢帝.失節之人,不可爲后.
☯원년경신(CE300), 추9월, 창조리倉助利・조불祖弗・소우蕭友・오맥남烏陌南・자柘・선방仙方・방부方夫・재생再生・담하談河・송거松巨・장막사長莫思・휴도休都 등 공신 12인에게 각자의 고향땅을 봉하고 노비를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으며, 선친 돌고대왕咄固大王을 평맥대제平貊大帝로, 모친을乙후를 단림태후檀林太后로, 조모 고高씨를 태황태후로, 을乙태후 부친 을보乙宝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올렸다. 동10월, 누런 안개가 닷새나 사방을 막아서, 직언을 구하였더니, 태사 우선于先이 아뢰길 “조짐이 후后와 비妃에게 있습니다.”라 하였고, 재생이 봉상제烽上帝의 연椽후를 윽박질러 취해서 처로 삼았음에, 사람들 모두가 재생의 안개로 여겼다. 창조리를 태보로, 우탁于卓을 좌보로, 을로乙盧를 우보로 삼았다. 을로盧는 을乙태후 오빠이다. 11월, 서북풍이 크게 불어와서 모래가 날리고 돌들이 구르길 엿새를 계속하여, 상이 감식하며 잘못된 일들이 있는지를 물으매, 창조리가 아뢰길 “먼저 반듯한 후后를 세우시고, 재생과 담하가 공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 하니, 상이 “예. 예.”라 답하였다. 진晉8)이 양羊씨를 후后로 세웠다. 12월, 살별이 동방에서 밝으매, 우선于先이 아뢰길 “군신君臣들이 상쟁相爭할 조짐입니다.”라 하여, 상보尙宝 부자와 부협芙莢 형제를 풀어주었다. 상보宝는 초草씨의 아비이고, 부협莢은 부芙씨의 오빠이다. 그믐날, 상보를 좌보, 우탁于卓을 서부대사자로 삼았다. 상이 초씨를 황후로 삼으려 하자, 창조리가 간언하여 아뢰길 “초草씨는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고 교태를 부리며 폐제를 섬겼습니다. 절개를 잃은 이를 후로 세워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7) 本傳의 檀은 擅의 誤寫로 보여서 바로잡는다.
8) 西晉 惠帝 司馬衷
●二年辛酉,春正月,受朝於乙太后宮.大政多出於太后,人多失望. 二月,太公乙宝薨,年七十一.先是,乙巴素有庻子素介,爲酒桶太后謁者,烝于酒桶,而生者也.身長體偉,喜怒不形於色,不與人[爭]9)利.烽上時,勤愼而自守.今上卽位,乙太后專政,宝戒之而一不干政.以王禮葬于酒桶太后陵.子盧源向良閔七沛等為乙氏七祖. 三月,親祭安國君陵,命王子柘開倉賑民. 夏四月,草氏倉氏等爭寵,造言播外.乃流其婢于海濱. 五月,廢帝崩于候山別宮.再生逼令自經. 上[與]10)太后如卒本,謁始祖廟及咄固帝陵. 六月,以祖文倉覓紐碧為船將軍練水師,明臨涉為行軍注簿.仙方請以大府宰大發為上船將軍而督三軍,許之. 秋九月,畋于杜訥原訓練軍事,宴于仙方妻免氏鄕.
●2년신유(CE301), 춘정월, 을乙태후 궁에서 조례를 받았다. 대정大政11) 여럿이 태후에게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2월, 태공 을보乙宝가 71살에 죽었다. 애초, 을파소乙巴素 서자 소개素介가 주통酒桶태후 알자謁者12)를 하며 주통을 치붙어서 낳은 아들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하였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 이로움을 다투지 않았다. 봉상烽上시절엔 근신하며 자신을 지켰고, 금상이 즉위한 후로는 을乙태후가 국정을 주무르자, 을보乙宝는 이를 경계하며 일절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왕의 예법으로 주통태후 무덤에 장사하였다13). 아들들인 로盧・ 원源・향向・량良・민閔・칠七・패沛 등은 을씨乙氏 집안의 일곱 시조가 되었다. 3월, 친히 안국군安國君14)무덤에 제사하고, 왕자15) 자柘에게 명하여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하4월, 초草씨와 창倉씨 등이 총애를 다투며 없는 말을 만들어 밖으로 퍼뜨려서, 그 하녀들을 해빈海濱16)으로 유배하였다. 5월, 폐제가 후산候山17)별궁에서 죽었다. 재생再生이 핍박하여 스스로 목을 매게 한 것이었다. 상이 태후와 함께 졸본卒本으로 가서 시조사당과 돌고제咄固帝릉을 배알하였다. 6월, 조문祖文・창멱倉覓・뉴벽紐碧을 선장군船將軍으로 삼아 수군을 조련하고, 명림섭明臨涉을 행군주부로 삼았다. 선방仙方이 대부大府18) 우두머리宰 대발大發을 상선장군上船將軍으로 삼아 3군19)을 감독하시라 청하여, 허락하였다. 추9월, 두눌원杜訥原20)에서 사냥하여 군대를 훈련하고21), 선방의 처 면免씨의 고향에서 잔치를 열었다.
9) 乙弗大王傳二年白鳥,二月,...素介爲酒桶太后謁者,烝於太后而生,故實爲東川之胞弟也.身長而體偉,知遠而言少,喜怒不形於色,不與人爭利...
10) 本傳은 如이나. 乙弗大王傳은 與. 文脈上으로도 與가 옳다. 誤寫로 보고 바로잡는다.
11) 都目政事 즉 年初 人事考課 決定. 또는 굵직한 政事 決定.
12) 賓客을 主人에게 引導하는 벼슬.
13) ☞酒桶太后의 私夫였다.
14) 達賈
15) 達賈의 아들. ☞高句麗는 君 즉 王임.
16) 물가, 바닷가. 해빈 땅, 해・빈 땅
17) 張北候兒山? 懷柔北 後山舖?
18) 京都의 貢物倉庫를 管理하는 官府.
19) 祖文・倉覓・紐碧의 3水軍
20) 黃龍國故地
21) ☞毋丘儉軍이 侵入하였던 곳에서 遠征을 準備함.
☯三年壬戌,春正月,移御新[宮]22).自廢帝時營是宮,三年而成.
春夏,新羅大旱. 四月,百濟有慧星晝見. 秋九月,三日,上自將三万精銳,進攻玄菟.十五日,伐南蘇,拔之.南蘇,本我神地,為貫賊所奪,或我或彼朝得暮失者久矣.上出遊時曾經此地詳得地理人情城池虗實,故以仙方爲大注簿,而密與土酋相通,水陸幷進,斬其太守耿蒼等五人,虜獲男女八千人移于平壤.
☯3년임술(CE302), 춘정월, 신궁新宮23)으로 이어하였다. 폐제廢帝24)시절부터 이 궁을 짓기 시작하여, 3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신라新羅가 봄・여름이 크게 가물었다. 4월, 백제百濟는 대낮에 혜성이 나타났다. 추9월, 3일 상이 스스로 정예 3만을 이끌고 현도玄菟25)땅으로 진공進攻하여, 15일에 남소南蘇26)성을 쳐서 빼앗았다. 남소는 본시 우리의 신성한 땅27)으로, 관貫적28)에게 빼앗겼다가, 혹은 우리가 혹은 저들이 아침에 차지했다가 저녁에 잃은 지 오래였다. 상이 떠돌던 시절에 이곳을 거듭 지나치며 지리地理・인정人情・성곽城郭・해자垓字와 허실虛實을 상세히 살폈기에29), 선방仙方을 대주부大注簿로 삼아서 은밀히 토착민 추장들과 상통하고 수군과 육군으로 동시에 진공하여, 태수 경창耿蒼 등 다섯의 목을 베고, 8천인을 사로잡아 평양平壤30)으로 옮겨놓았다.31)
22) 本傳은 官이고 乙弗大王傳은 宮이다. 乙弗大王傳을 따른다.
23) 西川新宮
24) 後廢帝인 烽上帝 雉葛이며, 前廢帝인 太祖皇帝의 동생 遂成이 아님.
25) 烽上帝가 慕容廆에게 빼앗긴 山西省 東中部之境인 玄菟故地이자 勾茶故地임.
26) 勾茶古都
27) 山陵・宗廟之地. 高句麗 또는 高句麗가 繼承한 나라 陵原으로, 淸漳河上流地域일 것.
28) 貫은 毌의 異字이며, 毋의 訛字이다. 毋丘는 氏이고 儉은 名. 즉 毋丘儉(무구검).
29) 烽上帝紀 7年 9月條 기록과 乙弗大王傳 참조.
30) 이 高句麗의 平壤城은 河北省 北部之境으로 比定된다.
三國詐記는 [三年,秋九月,王率兵三萬侵玄菟郡,虜獲八千人移之平壤.]라 적어서, 현도군을 부당하게 쳐들어가서 그곳 백성들 8천 명을 도적질하여 온 듯이 해놓았다.
31) 乙弗大王傳은 [大王謂仙方曰南蘇本我神地.爲貫奴所奪.朕欲復之,以雪宿恥.故姑捨樂浪而先制玄菟,何如.仙方曰今魏人勢縮,玄菟無備,此誠可攻之.時,先遣談河暗察舊臣之爲虜者,與之相通而水陸幷進以制之,似無失矣.大王嘉之乃命密行而晝夜■軍練習訓育,拔其精銳三萬.大王自爲統主,以仙方爲大注簿大司馬,烏陌南爲副司馬,督祖文等船軍.方夫等步騎,以九月三日進發水陸攻之.所到郡縣望風來降.十五日進攻南蘇城拔之,斬其太守耿蒼等五人,虜獲男女八千人移于平壤]이라 하였다
●四年癸亥,春正月,宴群臣於太后宮.酒酣,上謂公卿曰“國之興替,在於養賢擧才.卿等各薦子弟.”龍山公[柘]32)曰“人在或有天成者,多出於素養,非一朝可得.請開院而敎.”於是,以白龍院大神院肖門院為學,命于先乙向大發立之. 二月,倉氏生太子忠.助利女也,初為烏陌南妻.自上寓於陌南時被幸,入後宮者也.上乃贈倉氏母烏氏爵上夫人賜墓奴十口山庄海浦,加助利食戶百家.助利諫曰“臣聞‘寬於色者,下好淫.寬於武者,下好殺.君臣同麀而生子,則王統乱矣.’請収臣女夫人之爵臣孫忠太子之號.昔者,陳靈公與其臣寧儀共通夏姬而生子徵舒,寧儀以徵舒為公子,而公以爲寧儀子,徵舒怒殺靈公.至今為笑話,以此観臣女罪重,臣亦難免責矣.請敀食戶庄浦.”上曰“以忠為吾子,而不以爲陌南子.豈可比於靈公.其勿過慮.” 夏四月,幸新城慰撫士卒,選武藝特出者二十人,授之以職訓練壮丁.依慕容廆用人之例,凡有才幹者雖漢越之人亦可來之.歷再生鄕,宴其族. 五月,于太后崩於菱院,春秋六十一.中川帝九年,為太子妃.明美善歌,孝事父皇,宮中稱之.及登坤位,以救護雉葛為主,擁蔽西川之聦明,助長烽上之癡慾,至有西川暴崩之變,安國賜死之禍.西川之喪,甚秘不發焉,先移安國君之兵權[于]33)其兄弟,然後矯詔立雉葛.盖亦后謀也.及專國政,荒淫好奢侈,宮室之宏搆奸輩之汎濫,皆后之所為害國蠹民之罪.有所不可宥候山之举,軍士欲殺之.上以西川之爱后,護庇善待使居菱院,捧供之節一如旧儀.再生累徃烝之,謀其子相亥事發,上使耽氏問之,后憂懼得疾而崩.上憐之,以太后禮葬于烽上之側.上初欲葬于西川,有大叱聲而不得云. 秋七月,太公倉助利薨於龍山溫湯.上迎其丧于郊外,欲以太公禮葬之,其妻陰氏以爲非其遺志,乃以大兄禮葬於板岺.助利為社稷而行廢立,而常自処以烽上之罪人.且見再生之擅権不能制,累夢猿項曰“噫,吾休矣.萬事浮雲.恨不作再思巢父之身.”
●4년계해(CE303), 춘정월, (西川新宮의) 태후궁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술이 얼큰하여지자, 상이 공경들에게 이르길 “나라의 흥체興替34)는 현자賢者들을 공양供養하고 인재人才들을 천거薦擧함에 달렸소이다. 경들께선 각기 자제들을 천거해 보시오.”라 함에, 룡산공龍山公35) 자柘가 아뢰길 “인재는 간혹 하늘이 완성하여 내려주기도 하나, 다수는 평소에 길러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학원을 열어서 가르치시옵소서.”라 하여, 백룡원白龍院36)・대신원大神院・초문원肖門院을 학원으로 만들고 우선于先・을향乙向・대발大發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하였다. 2월, 창倉씨가 태자 충忠을 낳았다. 창씨는 창조리助利의 딸로, 당초 오맥남烏陌南의 처였는데, 상이 오맥남陌南의 집에서 만나신 이래로 승은을 입고 후궁으로 들어왔다. 상이 창씨의 모친 오烏씨에게 상부인上夫人 작위를 추증하고 묘지기 열 명과 산장 및 포구를 하사하고, 창조리에겐 식호食戶 100가를 더해주었더니, 창조리가 간하여 아뢰길 “신이 들은 바, 여색女色에 관대한 자는 아랫사람들이 음란하게 되고, 무력武力에 관대한 자는 아랫사람들이 죽이길 즐기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여인을 끼고 놀면 왕통王統이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딸에게 내리신 부인夫人작위爵位와 신의 손자 충忠에게 내리신 태자太子호號를 거둬주시길 청하옵니다. 옛적에 진陳영공靈公이 자기신하인 녕의寧儀와 함께 하희夏姬를 통음하여 사내아이 징서徵舒가 생겼는데, 녕의는 영공公의 아들이라 하고, 영공公은 녕의의 아들이라 하매, 징서가 화가 나서 영공을 죽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스갯소리가 되었으나, 이에 견주어보면, 신의 딸은 죄가 무겁고, 신 역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식호・산장・포구를 거둬주시길 청하옵니다.”라 하매, 상이 이르길 “충忠을 내 아들로 삼아서 오맥남의 아들로 하지 않았소. 어찌 영공에 비견하시오. 지나치게 심려하지 마시오.”라 답하였다. 하4월, 신성新城으로 거둥하여 사졸들을 위무하고, 무예가 특출한 20인을 선발해 직책을 주어서 장정들을 훈련하게 하였다. 모용외慕容廆가 사람을 썼던 전례를 따랐더니 재간 있는 자라면 비록 한漢인・월越인이어도 역시 올 수 있었다. 재생再生의 고향37)을 지나가다가 그 족당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5월, 우于태후가 릉원菱院에서 춘추 예순하나에 죽었다. 중천체中川帝 9년에 태자비가 되었고, 명랑하고 예뻤으며 노래를 잘하고 효성으로 부황을 모셔서 궁중에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곤위에 오르자 치갈雉葛을 돕고 비호하여 임금으로 만들었다. 서천西川의 총명함을 가리고 봉상烽上의 어리석은 욕망을 부추겼다. 서천이 갑자기 죽는 변이 있게 되자, 안국군安國君을 죽이는 화禍를 있게 하였다. 서천이 죽음을 꼭꼭 숨겨서 발상하지 않은 채로, 우선 안국군의 병권兵權을 자기 형제들에게 옮겨놓은 연후에 거짓조서로 치갈을 보위에 세웠으니, 모두가 역시 태후의 음모였다. 급기야 국정을 전횡하고, 황음하며 사치하길 좋아하여, 궁실이 간사한 무리로 흘러넘쳤으니, 이 모든 것이 태후가 나라를 상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좀먹은 죄상이었다. 후산의거候山義擧38)를 용납하지 않았음에 군사들이 태후를 죽이려 하자, 상이 서천의 애후愛后이어서 보호하여 막아주었고, 좋게 대접하여 릉원菱院에 거처케 하여 받들어 모시는 범절이 옛날과 다름없었다. 재생이 여러 번 발걸음 하여 태후를 치붙었고 그녀의 아들 상해相亥와 음모하다가 일이 드러나서, 상이 탐耽씨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였더니, 태후가 걱정스럽고 두려워서 앓다가 죽은 것이었다. 상이 그녀를 가련히 여겨서 태후 예로 봉상 곁에 묻어주었다. 상이 애초에 서천에 묻으려 하였으나, 질책하는 소리가 커서, 그리하지 않았다 한다. 추7월, 태공 창조리倉助利가 룡산龍山 온탕에서 죽어서, 상이 그 시신을 교외에서 맞이하여 태공의 예로써 장사하려 하였더니, 처 음陰씨가 그의 유지遺志가 아니라 하여, 판령板岺39)에 대형大兄의 예로써 장사하였다. 창조리助利는 사직을 위해 임금을 폐하고 새로이 세웠음에, 늘 자신을 봉상烽上에겐 죄인이라 하였으며, 또한 재생再生이 권력을 휘두름을 보고서도 막을 수 없음에 여러 번 꿈속에서 원항猿項을 보더니만 “아! 나도 쉬어야겠구나. 만사가 뜬구름인 것을! 재사再思40)와 소보巢父41)의 처신을 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었다.
32) 本傳 前後의 기록과 乙弗大王傳은 「柘」로 기록되었음.
33) 意味上 「于」字가 必要하여, 揷入함.
34) 나라가 興하거나 主人이 바뀌는 것.
35) 乙弗大王傳에 의하면, 三年壬戌 四月에 仙方은 馬山公으로, 仙翁은 馬山太公으로, 創助利는 東山公으로, 왕자 柘는 龍山公으로 封爵되었음.
36) 南堂遺稿小獸林王紀九年條曰“靑龍院隔白馬河對白龍院.靑爲女,白爲男." 此白馬河,白溝河與拒馬河合流之境?
37) 北部, 沸流故地之境
38) 候山에 모여서 乙弗을 擁立한 일
39) 반옥령? 盤嶺? 房山西石板台?
40) 神明仙帝의 이름.
41) 堯임금시절에 世上名利에 뜻이 없어 隱居하였다는 사람.
●五年甲子,春正月,受朝于乙太后宮,賜功臣衣馬. 二月,汾西襲楽浪西都,破之,以其地為郡.其地,本汾西母宝果之國都也,汾西為其母奪之.楽浪王子述遣使于長莫思請和.上命長莫思,與汾西相通謀分樂浪.述怒而斥和,憤汾西之襲取西都,而欲報仇.是年十月,述臣黃倡郞者,鷄林人也,美而有膽勇,飾以美女而徃見汾西.汾西愛其美,納于車中.黃刺汾西,殺之.宝果立其所嬖比流爲王.仇首之庻子也.古爾之時,避于民間,熟知民情,且有力能射. 新羅,八月地震泉湧. 九月,京都又地震,壞民屋,有死者. 上命長莫思懷柔比流反述.而命五部九鎭三十七國督練步騎,考其功績.使乙兪免箕髙喜等採壮丁之有才者屬於左右衛,而摂以用兵之術,熟練之.
●5년갑자(CE304), 춘정월, 을乙태후 궁에서 조례를 받고, 공신들에게 옷과 말을 하사하였다. 2월, 분서汾西가 락랑樂浪42)의 서도西都를 습격해 깨뜨려서 그곳을 군으로 만들었다43). 그곳이 본시 분서의 어미 보과宝果 나라44)의 도읍인지라 분서가 모친을 위하여 탈취한 것이었더니, 락랑왕樂浪王 자술子述이 장막사長莫思45)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매, 상이 장막사長莫思에게 명하여 분서汾西와 상통 모의하여 락랑樂浪을 나눠 갖기로 하였더니, 자술述은 이에 화가 치밀어 척화하였고, 분서가 서도를 습취한 것이 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이해 10월에 자술述의 신하 황창랑黃倡郞46)이, 계림鷄林사람으로 예쁘고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예쁜 여인처럼 꾸미고 분서를 찾아가서 알현하니, 분서가 그 미모에 빠져서 수레 안으로 불러들였고, 황창랑黃이 분서를 칼질하여 죽이매, 보과가 자신의 정부情夫인 비류比流를 왕으로 세웠다. 비류는 구수仇首의 서자로, 고이 시절에 민간으로 피해 숨어들어서 민심을 숙지하였고, 게다가 힘도 있고 활쏘기에도 능숙하였다. 신라新羅에선 8월에 지진이 일고 샘들이 용솟았다. 9월, 경도京都에 지진이 또 일어서 민가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었다. 상이 장막사에게 명하여 비류比流를 회유해서 자술述과 반목하게 하여놓고, 5부・9진・37국들에게 명하여 보병・기병을 감독・훈련하게 하고 그 공적을 살폈으며, 을유乙兪・면기免箕・고희高喜 등으로 하여금 재주 있는 장정들을 선별하여 좌・우위군대에 배속하게 하고, 용병술用兵術을 숙련하도록 도왔다.
42) 西晉屬方?
43) 百濟經略遼西晉平而自置二郡,此也.
44) 太守國帶方
45) 乙弗大王傳기록엔[命...長莫思爲最彘太守.命休都松巨,伐最彘降之,誅秥蟬子盧.菖蒲献之.王以菖蒲不能守義,賜松巨爲妻,以菖蒲所生王子杣爲松巨子.]라고 적혀있다.
46) 당시 樂浪王 子述의 龍陽臣 즉 男色臣.
●六年乙丑,春正月,左輔乙盧薨,柘代之,方回右輔.盧以乙太后兄,不露圭角無所建立,唯以篤於敬神,能愼酒色,為人所許.廢帝時,專以嫵媚苟客.今上卽位之初,代其父乙宝為右輔,在相府終日撫鬚而己,人以爲撫鬚宰相.[柘]47),安國君達賈之子也.其母觧氏,平山祠熟之女也.有才局宻,與其母協贊大謀而功成.上卽位之初,举爲大注簿四年進右輔,制新令十二條適於時務,遂廢國相之職. 三月,以仙方女居知爲小后,賜姓周氏. 六月,猗이救晉伐漢而卒,子普根立,羊氏廢而復. 秋九月,畋于高山原,得神鹿駲之,大赦國中.
●6년을축(CE305), 춘정월, 좌보 을로乙盧가 죽어, 자柘로 대신하고, 방회方回를 우보로 삼았다. 을로盧는 을乙태후 오빠로, 모나게 처신하지 않아서 개진開陳한 바가 없으며, 오직 신神48)을 섬김에만 독실하였고, 주색에도 신중하여서, 사람들이 그를 꺼려하지 않았다. 폐제49)시절엔 오로지 구객苟客들의 비위를 맞추었으며, 금상 즉위 초엔 부친 을보乙宝를 대신하여 우보가 되어 상부相府에 머물면서 종일토록 수염을 쓰다듬을 뿐이었더니, 사람들이 그를 무수재상撫鬚宰相50)이라 하였다. 자柘는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의 아들로, 어미 해觧씨51)는 평산사平山祠52)(에 모셔진) 해숙熟의 딸이다. 바탕이 재주가 있어서, 어미와 함께 큰 모의에 힘을 합쳐서 공을 세워, 금상 즉위 초에 천거되어 대주부로 4년을 지내다가 우보에 올랐고, 신령12조新令十二條를 만들어 시무에 적용하더니 이어서 국상자리를 폐하였다. 3월, 선방仙方의 딸 거지居知를 소후로 삼고, 주周씨 성姓을 내렸다. 6월, 탁발의이猗㐌가 진晉53)을 도와 한漢54)을 치다가 죽으매, 아들 탁발보근普根이 보위에 올랐고, 양羊씨가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다. 추9월, 고산원高山原에서 사냥하여 신록神鹿을 얻으매, 길들이게 하고, 나라 안을 널리 사면赦免하였다.
47) 格이 柘의 誤寫이어서 바로잡았다. 格은 柘의 胞弟로 烽上之庶子이다.
48) 祖上神?
49) 烽上帝
50) 수염이나 쓰다듬는 宰相
51) 觧門
52) 井陘關東隣(桓那故地) 平山之境의 祠堂?
53) 司馬衷의 西晉
54) 漢趙 則 前趙
●七年丙寅,春二月,白龍院高太后崩,春秋六十五,葬于西川陵,以乙向為陵大夫.后,咄固大王之生母也,其父賢相[福]55)章之玄孫也.中川時,后以東宮皂衣之妻,薦枕于西川帝而生咄固大王,後登爲小后.西川崩,受辱于猿項,累經危害.及帝卽位,尊為太后居白龍院.濃麗,鄭重,少言語,知大體,以為帝忍辱,竟建中興之功,竟配于西川帝. 柘太輔,方囬左輔,仙方右輔兼大注簿大司馬乃國相之責也. 秋九月,草氏生皇子仁. 十一月,晋主衷鴆毒死,四十八.弟熾立.
●7년병인(CE306), 춘2월, 백룡원白龍院 고高태후가 춘추 예순다섯에 죽어서, 서천릉西川陵에 장사하고, 을향乙向을 릉대부陵大夫56)로 삼았다. 태후는 돌고대왕咄固大王의 생모로, 부친이 현상賢相 고복장福章의 현손玄孫57)이다. 중천中川제 시절에, 후는 동궁조의東宮皂衣의 처였는데 서천제西川에게 잠자리를 바쳐 돌고대왕을 낳은 후에 소후小后로 올려졌다. 서천이 죽자, 원항猿項에게 능욕을 당하고 누차 위해도 겪었다. 미천제帝가 즉위하매, 태후로 올려져서 백룡원에 기거하였다. 흠뻑 아름답고, 점잖고 묵직하여 말 수가 적었으며, 큰일들을 깨우치고 있어서, 미천제를 위해 욕스러움을 참아내며 끝내 중흥의 공을 세웠더니, 마침내 서천제에게 짝이 되었다. 자柘58)를 태보로 삼고 방회方回를 좌보로 삼았으며, 선방仙方을 우보로 삼아서 대주부와 대사마를 겸하게 하니 전일의 국상國相 책무였다.
추9월, 초草씨가 황자 인仁을 낳았다. 11월, 서진晉 임금 사마충衷59)이 짐독鴆毒60)으로 48살에 죽고, 그 동생 사마치熾61)가 보위에 올랐다62).
55) 稱章은 福章 즉 高福章의 誤寫이어서 바로잡는다.
56) 陵原을 管理하는 大夫
57) 高孫
58) 安國君 達賈의 子, 龍山公.
59) 南堂註釋曰 惠帝
60) 南方의 올빼미 비슷한 새의 毒
61) 南堂註釋曰 懷帝
62) 永嘉之亂(307-312). 山西匈奴劉淵立漢趙(前趙),劉和及劉聰之繼位,及羯族石勒之立後趙.
●八年丁卯,秋九月,大閱水陸軍三十万于鴨淥之原,考其債而賞其優.上與草后周后耽后巡視,三日而還. 冬十月,南部大使[者]63)大發卒.發能通古今善用兵,上兒時受騎射槍釼陣之術於大發而將大用,未及顯達而卒.上哀痛之,命以右輔禮葬之. 慕容廆自稱鮮卑大單于.棘城鮮卑祿官卒,弟猗盧揔摂三部,與廆通好.
●8년정묘(CE307), 추9월, 수군・육군 30만을 압록원鴨淥之原64)에서 임금이 친히 사열하고, 그들에게 진 빚65)을 참작해서 넉넉하게 보상하였다. 상이 초草후・주周후・탐耽후와 함께 순시하고 3일 만에 돌아왔다. 동10월, 남부대사자 대발大發이 죽었다. 대발發이 고금古今의 일에 통달하고 용병用兵을 잘하여, 상이 어릴 적에 그에게 기사騎射・창검槍劍・진법陣法을 배워서, 장차 (그를) 크게 쓰려 하였는데, 현달顯達66)하지 못하고 죽으매, 상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 우보 예로 장사하였다. 모용외慕容廆67)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다. 극성선비棘城鮮卑68)는 탁발록관祿官69)이 죽어, 동생 탁발의로猗盧70)가 3부部 모두를 거느리고서 모용외廆와 우호・상통하였다71).
63) 筆寫時에 「者」字를 빠뜨린 것으로 보고, 乙弗大王傳을 參照하여 揷入함.
64) 西鴨淥이라면 山西省東北端及河北省西北端洋河桑干河合流之境일 것이고, 東鴨淥이라면 灤河쯤일 것이다.
65) 30万 大軍을 育成하느라 쓰인 財物과 愁苦.
66) 立身揚名, 즉 벼슬과 명망이 높아져서 세상이 드러남.
67) 大棘城鮮卑. 晉書慕容廆傳曰 [大棘城也,帝顓頊之墟.] 즉 河南省 所在 帝丘城.
68) 河南所在?
69) 代昭王
70) 代穆王
71) ☞卑离族,卽鮮卑族 慕容氏와 拓拔氏가 鮮卑族 歷史의 主體로 本格 登場함.
●九年戊辰,春正月,*[馬]山大公仙潔薨,年七十二.其妻[九]72)牛氏殉之.潔父周仙,以公瑾之庻孫,十八從胡衛而來朝.及其誅流之時,典法令朱通爱其皃而匿之于家,通之.妻于氏潛與周仙相通而生潔.明敏好學,安國君達賈招之爲家臣.君敗,敀馬山畜牛羊採金銀而致貨数万,宻贊大謀.班玉岺脫檻之後,匿帝于家而竟成中興大業,其功爲第一,而一向隱居,唯以敎誨子弟爲楽,常戒其子[孫]73).仙方之位高,孫周小后之專寵,無使驕傲,人稱當世之怪傑,其裔大昌. 丙子朔,百濟日食. 五月,命祖文紐碧芙莢高植等,伐楽浪拔其郡74),虜男女三百人.樂浪王子述遣其子龍,稱臣[貢]75)馬及其土物十二而請和.仙方使其弟淡娶子述女,以爲二郡76)之主. 秋八月,重修山宮.山上帝敬神之所也,在黃山大川之上,有瀑與湯,花鳥之勝,上爲乙太后修之,以爲其貴玩遊憩之所. 十二月,左輔方回薨,年五十七.回以善射,上太子時招爲左師,與右師大發保護聖躬.上自幼敬之.及出遊,與仙方等宻贊大謀,驟登輔位.素以武夫不曉政體,只是含糊唯唯,未免尸位之評.無所建白,汲汲於嫵媚而已.及其臨終,上親臨問其所欲言,對曰“臣子方夫不能守分,願上勿用.臣欲所言者,不在於私,而在於上.願上戒色减房,無使女謁頻繁.”上改容謝曰“金石之言也.敢不佩乎.人以爲卿嫵媚宰相,乃今方知其爲甘草大臣矣.”囬祖丑,以摩離之裔,爲山上帝牙臣伐拔奇77)定社,尙山上女生箕78).箕尙東川女方乙生囬,幼時不辨菽麥駑鈍不能學,箕憂之.唯好弓術而得其妙,久在殿中侍衛不遷而黙黙無怨言,竟大貴而昌其門,爲方氏祖. 仙方左輔,祖弗右輔,方夫大注簿兼行左衛將軍大司馬,休都新城太守,仙方弟仙述左騎將軍,再生北部于台,高喜府庫令.
●9년무진(CE308), 춘정월, [마]산대공[馬]山大公 선결仙潔이 72살에 죽고, 그의 처 구우九牛씨가 따라죽었다. 선결潔의 아비 주선周仙은 공근公瑾79)의 서손으로, 18살에 호위胡衛를 따라와서 입조하였다. 죽이고 유배하던 시절에 전법령典法令 주통朱通이 그의 용모를 아껴서 그를 집에 숨겨놓고 상통하였더니, 주통通의 처 우于씨가 주선과 함께 몰래 상통하여 선결潔을 낳았다. 명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가 그를 불러서 가신으로 삼았다. 안국군이 죽자, 마산馬山으로 돌아가서 소와 양을 치고 금과 은을 캐내서 수만금의 재화를 쌓았으며, 큰 모의에 몰래 참여하였다. 반옥령班玉岺에서 함거가 깨진 이후에 미천제帝를 집에 숨겨드려서 이윽고 중흥대업이 성사되매, 그의 공이 제일이었으나 언제나 은거하면서 오직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항상 자손들을 조심시켰으며, 그 아들 선방仙方의 지위가 높고, 손녀 주周소후80)가 미천제帝의 총애를 독차지하여도, 교활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더니, 사람들이 그를 당세의 괴이한 인걸이라 칭송하였고, 그의 후예들은 번창하였다.
병자일 초하루엔 백제百濟에서 일식이 있었다. 5월, 조문祖文・뉴벽紐碧・부협芙莢・고식高植 등에게 명하여, 락랑樂浪81)을 쳐서 그 군郡들을 빼앗고 남녀 300인을 사로잡았더니, 락랑樂浪왕 자술子述이 아들 룡龍을 보내서 칭신하며 말과 토산물 12가지를 바치고 화친을 청하매, 선방仙方이 동생 선담淡으로 하여금 자술의 딸과 혼인하여 두 군郡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 추8월, 산궁을 고쳐짓게 하였다. 산궁은 산상제山上帝 신위를 모신 곳으로, 황산黃山82)의 큰 물줄기83) 곁에 있으며, 폭포와 온탕이 있고 꽃과 새들이 가득한 곳이다. 상이 을乙태후를 위해 고쳐지어서 그 귀한 분이 구경하며 노시거나 쉬시게 한 것이다. 12월, 좌보 방회方回가 나이 쉰일곱에 죽었다. 방회回가 활을 잘 쏘아서, 상의 태자시절에 초치하여 좌사左師로 삼으매, 우사右師 대발大發과 함께 성궁聖躬84)의 곁을 지켰다. 상이 어릴 적부터 그를 존경하였더니, (상이) 도성을 나가서 떠돌게 되자, 선방仙方 등과 함께 큰 모의에 은밀히 참여하였고, 빠르게 삼보三輔자리에도 올랐으나, 본바탕이 무부武夫인지라 정사의 근본에 어두워서 단지 우물쭈물 “예, 예.”라고만 하여 시위尸位85)란 평을 면치 못하였고, 건백建白86)하는 것 없이 비위나 맞춰 아부하다가 임종을 앞두게 되었다. 상이 친히 임종하여 말하고 싶은 바를 물으매, 답하여 아뢰길 “신의 아들 방부方夫는 제 분수分數를 지키기 어려우니, 원컨대 상께서는 등용하지 마십시오. 신이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신을 위함이 아니고 상을 위함이옵니다. 원컨대 색사色事를 주의하여 합방合房을 줄이고 여인들로 하여금 빈번히 찾아뵙지 않게 하소서.”라 하니, 상이 얼굴빛을 고치고 감사하며 이르길 “금석金石에 새겨둘 말씀이십니다. 어찌 명심하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경을 무미재상嫵媚宰相87)으로 여겼지만, 겨우 이제 와서야 경께서 감초대신甘草大臣88)을 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라 하였다. 방회回의 조부 방축丑은 마리摩離89)의 후예로 산상제山上帝의 아신牙臣90)이 되었고 발기拔奇(發岐)를 쳐서 사직社稷을 안정시켰으며, 산상의 딸과 혼인하여 기箕를 낳았다. 기箕는 동천東川의 딸 방을方乙과 혼인하여 방회回를 낳았더니, 어릴 적엔 숙菽(콩)과 맥麥(보리)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우둔하여 학문할 정도가 아니었음에, 기箕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方回는) 오로지 궁술弓術만을 좋아하더니 그 오묘함을 터득하였고, 오래도록 전중시위殿中侍衛로 있으면서 자리를 옮겨주지 않아도 원망하는 말이 없더니만 종당엔 대단히 귀하게 되어서 그 문중이 번창하였고, 방方씨 시조가 되었다. 선방仙方을 좌보로 삼고, 조불祖弗을 우보로 삼았으며, 방부方夫를 대주부로 삼아서 행직좌위장군・대사마를 겸하게 하였다. 휴도休都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선방의 아우 선술仙述을 좌기장군으로, 재생再生을 북부우태로, 고희高喜를 부고령府庫令91)으로 삼았다.
* 乙弗大王傳도 “馬山太公仙翁薨”이라 기록하고, 直後의 本傳기록에도 出仕하지 않고 馬山에서 살다가 죽었다 하였다.
平山大公을 馬山太公의 誤寫로 본다.
72) 乙弗大王傳을 參照하여 本傳의 其妻仙牛氏를 其妻九牛氏로 바로잡는다.
73) 乙弗大王傳을 參照하여 「孫」字를 揷入한다.
74) 本傳은 「其郡」이고 乙弗大王傳은 「二郡」이나, 本傳을 따른다.
75) 戰爭에 敗한 樂浪이 責馬할 수 없음이니, 乙弗大王傳의 貢馬가 옳다.
76) 당시 子述의 樂浪은 二郡으로 되었음이라.
77) 發岐의 通名이거나 誤寫인 듯.
78) 南堂이 「箕」를 註釋하길 一作回同이라 하였다.
79) 盧江郡 舒縣 출생 周瑜, 吳의 前部大都督.
80) 仙方女居知
81) 山西省中南部之境. 西晉屬方?
82) 滿城西北隣?
83) 滿城西北黃山大冊河?
84) 임금, 乙弗 즉 美川大帝
85) 尸童. 祭祀床의 影幀이나 紙榜을 대신하여 祭祀床 뒤에 앉혀놓은 아이.
86) 臣下가 임금에게 政事에 意見을 내는 것.
87) 아부만 하는 재상.
88) 藥材들을 잘 調和시켜서 藥效를 돕는 甘草 같은 重臣.
89) 芻牟之大功臣
90) 어금니 또는 기둥뿌리 같은 신하.
91) 나라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
●十年己巳,春正月,太公尙宝薨,年五十二.宝以婁子生草氏,上太子時寵之.宝使再生等,護帝出遊,再造社稷.而爲功臣等所忌,卽位之初,目以廢帝奸臣,黙之.未幾,帝以草后之故,復用爲左輔國舅太公.其妻芙氏,亦得上寵封太后賜金印,居中用事頗預大政,故物論不爽. 冬十月,畋于杜訥原.周后免后從之,宿于貫那宮.太輔[柘]93)爲免后所殺.免后本仙方輔妻,周后母也. 仙方太輔,乙源左輔,仙玉左衛將軍,仙述右衛將軍,免城左騎將軍,仙方子槨右龍將軍.秋七月,周后告于上曰“吾父有不臣之志,不可委以大権.”上曰“汝父不可信,卽誰可信乎.”周氏不聽,命仙方敀馬山,盡罷仙方所置五部內使者十人.仙方歎曰“吾爲兒女所窘,殆天命也.”
●10년기사(CE309), 춘정월, 태공太公 상보尙宝가 52살에 죽었다. 상보宝는 상루婁의 아들로 초草씨를 낳았다. 상이 태자시절에 그녀를 아꼈더니, 상보宝가 재생再生 등으로 하여금 피해나가 떠돌며 미천제帝를 보호하여 사직을 다시 세웠다. 그런데도 공신 등에게 따돌림을 당하여, 즉위 초에 폐제의 간신으로 지목되어도, 묵묵히 있었더니, 오래지 않아서 상이 초草후의 연인이었던 까닭에 그를 다시 등용하여 좌보左輔・국구國舅・태공太公으로 삼았다. 그의 처 부芙씨 또한 상이 총애하여 태후로 봉함을 받고 금인을 하사받더니, 이편저편 사이에 끼어들어 권세를 부리며 자못 큰 정사를 간예하매, 여론이 상큼하지 않았다. 동10월, 두눌원杜訥原94)에서 사냥하였다. 주周후와 면免후가 따라가서 관나궁貫那宮에 유숙하였고, 태보 자柘가 면免후에게 죽었다. 면免후는 본시 선방仙方 보輔의 처로, 주周후의 어미이다. 선방을 태보, 을원乙源을 좌보, 선옥仙玉을 좌위장군, 선술仙述을 우위장군, 면성免城을 좌기장군, 선방의 아들 선곽槨을 우룡장군으로 삼았다. (지난) 추7월에 주周후가 상께 고하길 “제 아비는 신하될 뜻이 없으니95) 큰 권한을 맡기시면 아니 됩니다.”라 하매, 상이 “당신 부친을 믿을 수 없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소.”라 답하였었으나, 주周후가 들어주지 않아서, 선방에게 명하여 마산馬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선방이 배치한 5부五部의 내사자內使者 10인을 모두 파직하였더니, 선방이 한탄하며 이르길 “내가 어린 딸96)에게 군색窘塞한 바를 당하였다. 천명天命이련가!”라 하였다.
93) 乙弗大王傳을 參照하여 「格」을 「柘」로 바로잡는다.
94) 黃龍故地
95) 簒奪할 마음이 있어서? 乙弗大王傳 十年 十月 記事 참조.
96) 本是 仙方의 妻였던 免后가 낳은 仙方의 딸 즉 周后
●十一年庚午,春正月,草后難山而崩.草氏以上結髮之配,失節於烽上而復敀寵猶最高,至是寵衰而周后專房,故悲愁得疾而崩.宮人憐其数奇. 五月,基臨疾彌留,開獄放囚,六月殂.奈觧孫訖觧嗣之.其父于老角干,伐加耶浦上六國有功,娶助賁女命元而生訖觧.状皃俊異,爲事明敏,異於常流,故謂諸候曰“興吾家者,必此兒.”至是,基臨無子,群臣以訖觧有老成之德,奉而立之. 秋九月,玄菟人參星率其徒五十人降於南蘇.玄菟請敀之,不許. 冬十月,與免后徃馬山,宴乙太后及仙方,賜乙氏仙氏族男女衣帛有差.時,周氏有娠而告于仙潔之墓故也.初,九牛之祖在馬山畜九牛而致貨,仍以九牛爲神而生九牛氏.甚美,爲沛者所奪,尋爲使者所覈,轉爲朱面妾,而敀仙潔生仙方.夢有神兆故,牛翁奇其夢,以其家傳于仙潔.潔遂得其財大昌馬山,神其徒多爲扶社密贊功臣.潔常言九牛護國故,至是行九牛祭,以周氏爲主,上親行之.九牛氏九子皆異父.至是,皆姓仙氏或牛氏周氏.人以爲棠山之雉祠平山之달祠與馬山之牛祠,爲國三蘇. (十月)劉琨請兵於猗盧而討劉虎.盧使其弟弗子鬱律,帥二万騎助之.幽州王浚以代屬幽州,不許遣兵,盧拒之破浚.拓拔猗盧爲代公. 十二月,漢太后單氏因其子乂言而慙死.聦妻呼延說聦除乂.是年七月,漢主劉淵死,諸子相伐.聦克之而立烝單氏,以單氏子乂爲皇太弟.及單氏得娠,乂心恥之,至是死.
●11년경오(CE310), 춘정월, 초草후가 난산으로 죽었다. 초草씨는 상과 동정童貞으로 맺어진 짝이었으며, 봉상烽上에게 정조를 잃었다가, 복귀하여 총애를 받아서 오히려 최고에 이르렀으나, 이때에 이르러 총애가 빛을 잃고, 주周후가 총애를 독차지하매, 이를 슬퍼하고 근심하다가 병들어 죽었더니, 궁인들이 그 운명이 기구함을 가련케 여겼다. 5월, 기림基臨이 병석에 오래도록 머물러서, 옥獄을 열어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나, 6월에 죽으매, 내해奈觧의 손자 흘해訖觧가 후사를 이었다. 흘해의 아비 우로于老각간이 가야加耶와 포상6국浦上六國들을 정벌함에 공이 있어, 조분助賁의 딸 명원命元과 혼인하여 흘해를 낳았다. 외모가 뛰어나고 정사를 살핌에도 명민하여 보통사람들과 남달랐기에, 모든 징후들을 얘기하고 나서 이르기를 “우리 가문을 흥하게 할 이는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 하였었다. 지금에 이르러 기림에게 아들이 없자, 군신들이 흘해가 나이가 들어야 이룰만한 덕이 있다면서 받들어 보위에 올렸다. 추9월, 현도玄菟사람 삼성參星이 그의 무리 50인을 데리고 남소南蘇97)에 투항하였다. 현도가 그들을 돌려보내주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동10월, 면免후와 함께 마산馬山으로 가서 을乙태후와 선방仙方에게 연회를 베풀고, 을乙씨와 선仙씨 족당 남녀들에게 옷과 비단을 차등하여 하사하였다. 이즈음 주周씨가 회임懷妊하여 선결仙潔의 무덤을 찾아가서 이를 고하려던 까닭이었다. 애초, 구우九牛씨의 조상은 마산馬山에서 살았는데, 소 아홉 마리를 기르면서부터 재화를 쌓을 수 있었음에, 소 아홉 마리를 신神으로 모셨더니, 이후에 구우九牛씨를 낳았다. 지극히 예뻐서 패자沛者에게 빼앗겼고, 사자使者에 의해 분별되어 다시금 주면朱面의 첩이 되었다가, 또다시 선결仙潔에게 출가하여 선방仙方을 낳았다. 태몽胎夢에 신기한 조짐이 있어서, 우牛옹이 그 꿈을 이상히 여겼었고, 그 집안이 선결에게 전해지자, 이윽고 선결潔이 재산을 얻어서 마산이 크게 번창하였고, 그 무리들 여럿이 부두밀찬공신扶杜密贊功臣이 된 것도 신기한 일이어서, 선결潔이 늘 소 아홉 마리가 나라를 구했노라 말해왔음에, 지금 구우제九牛祭를 지낸 것이고, 주周씨가 구우제의 제주가 되었기에, 상께서 친히 거행하였다. 구우씨는 아들이 아홉이었고, 서로들 아비가 달랐더니, 지금에 와서 선仙씨 혹은 우牛씨와 주周씨들이 되었다. 당산棠山의 치사雉祠와 평산平山의 달사달祠를 마산馬山의 우사牛祠와 함께 사람들이 나라를 위한 삼소三蘇98)라 불렀다. (西晉幷州의) 유곤劉琨이 의로猗盧의 군대를 빌려서 유호劉虎를 토벌하였다. 의로盧가 동생 불弗의 아들 울률鬱律로 하여 2만 기騎를 거느려서 그를 도왔다. 유주幽州 왕준王浚이 대代 땅을 유주幽州에 합치고 군대를 보내는 것을 불허하자, 의로盧가 이를 막아서 왕준浚을 깨뜨렸다. 탁발의로拓拔猗盧가 대공代公이 되었다. 12월, 한漢99)의 태후 선單씨가 자기아들 예乂의 말로 인해서 부끄러워하다가 죽었다. 유총聰100)의 처 호연呼延이 유총聰에게 예乂를 없애라고 설득하였었다. 이해 7월에 한漢주 유연劉淵101)이 죽자, 모든 아들들이 서로를 치게 되었고, 유총聰이 이겨서 보위에 오르더니 선單씨를 처로 삼고 선單씨 아들을 황태제로 삼았다. 이윽고 선單씨가 임신함에, 예乂가 이를 부끄러워하였고, 이에 선씨가 지금 죽은 것이었다.
97) 勾茶古都
98) 神聖한 세 곳
99) 漢趙,즉前趙
100) 漢趙 즉 前趙의 烈宗
101) 漢趙 즉 前趙의 高祖
☯十二年辛未,春正月,周后生太子斯由.白牛之義,容皃魁偉,聲音洪亮,上大喜曰“此真龍種也.”賜酺群臣. 訖觧以急利爲阿飡,委以政要,兼知內外兵馬事,二月祠其始祖廟. 三月,高奴子使其子卿,入奏遼東可伐之状.乃命方夫仙玉率步騎五万與新城太守,三路進發.玄菟人參星安平人賈回等爲先鋒,又使封雨溫叔等徃誘其仙巫之衆. 五月,上與周后及新生太子如龍山溫湯而還,立周后爲皇后賜玉冊金印. 八月,方夫等進攻西安平,拔之,虜其男女二千口移于平壤.王受所俘,宴群臣.以仙玉為安平太守,仙述左衛,免江右衛,槨左騎,棤右騎. 是年六月十二日,劉曜入洛陽武庫,納惠帝羊皇后,遷六璽于平陽.十月,劉琨得石勒母玉氏及從子虎(年十七)送于勒. 十月,上與周皇后巡至安平勞士卒.以高卿爲安平小守,使理西安平. 左輔乙源以病免,祖弗代之,萧友右輔,友弟密万東部于台. 十二月,乙源薨.
☯12년신미(CE311), 춘정월, 주周후가 태자 사유斯由를 낳았다. 백우白牛의 행동거지에다가 용모는 우두머리의 위용이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더니, 상이 매우 기뻐하며 이르길 “이 애가 진짜 룡종龍種이로다.”라 하고서, 3보들과 군신들에게 술자리를 하사하였다. 흘해訖觧가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삼아서 정사를 맡기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여 살피게 하더니, 2월엔 자기 시조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3월, 고노자高奴子102)가 아들 고경卿을 들여보내서 요동遼東103)이 정벌하기 좋은 상황임을 주청하였다104). 이에 방부方夫와 선옥仙玉에게 명하여 보기步騎 5만을 이끌고 신성新城태수와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발하게 하고, 현도玄菟사람 삼성參星과 안평安平사람 가회賈回로 선봉을 삼고, 또한 봉우封雨와 온숙溫叔 등으로 하여금 (요동과 현도 땅으로 앞서서) 돌아가서 그들의 선도仙徒와 무도巫徒들을 달래게 하였다. 5월, 상이 주周후 및 갓 난 태자와 함께 룡산龍山 온탕엘 갔다가 돌아와서 주周후를 황후로 세우고 옥책과 금인을 내려주었다. 8월, 방부方夫 등이 진공하여 서안평西安平을 빼앗고, 그 곳 남녀 2천 생구를 붙잡아서 평양平壤으로 옮겼더니, 왕이 포로들을 받고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선옥仙玉을 안평태수, 선술仙述을 좌위장군, 면강免江을 우위장군, 선곽槨을 좌기장군, 석棤을 우기장군으로 삼았다. 이해 6월에 유요劉曜105)가 락양洛陽 무고武庫로 들어가서 혜제惠帝106)의 양羊황후를 거두고, 옥새 여섯을 평양平陽107)으로 옮겼다. 10월, 상이 주周황후와 함께 순행하여 안평安平으로 가서 사졸들을 위로하고, 고경高卿108)을 안평소수安平少守로 삼아 서안평西安平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 을원乙源이 병으로 물러나서, 조불祖弗로 그를 대신하고, 소우萧友를 우보로, 소우의 동생 밀만密万을 동부우태로 삼았다. 12월, 을원이 죽었다.
102) 南蘇太守
103) 西晉屬方?
104) 遼東之地를 賊에게 빼앗겼었다는 말임. 105) 漢趙 則 前趙의 末帝
106) 西晉 2世 司馬衷
107) 山西省 古晉州 堯都 平陽. 臨汾 平陽. 前趙 初都.
108) 高奴子之子
●十三年壬申,春二月,南蘇太守高奴子卒,松巨代之.奴子以身先人得士卒之心,善於守城,南蘇新城之人立祠祀之. 羅以急利女爲倭主之婦. 比流發使問民疾苦,賑其四窮穀三石.是年二月,聦以其妻小劉氏妻懷帝.四月,比流謁東明庙,以觧仇爲兵官佐平.其先亦出於平山,云. 五月,上御吾民殿,賞國産大夫孝卿白馬豹皮.大医卿彦山庄一座.賜産四男女者七十人四女者五人三男者五百人三男女者八十三人三女者五十七人男女各雙者二百九十一人,布帛有差.自上卽位以來,民無曠夫寡妻,人口增加四五倍者.甚多南部黃竜村西部加來村皆至十倍.孝卿曾出豪民閑妻邊戌貰妻,無失産期,又[沠]109)尼醫護産理妬,民俗淳厚,男女爱好樂太平而頌帝力. 石勒據襄國.
●13년임신(CE312), 춘2월, 남소南蘇110)태수 고노자高奴子가 죽어, 송거松巨로 그를 대신하였다. 고노자奴子는 몸소 다른 이들의 앞을 서서 사졸士卒들의 마음을 얻어 성城을 잘 지켜냈더니, 남소南蘇와 신성新城 사람들이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111). 신라羅가 급리急利의 딸을 왜倭주의 며느리로 주었다. 비류比流(百濟)가 사자를 내보내서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4궁四窮112)들에게 곡식 석 섬씩을 나눠주었다. 이해 2월, 유총聰이 자기 처인 작은 유劉씨를 회제懷帝113)에게 처로 주었다. 4월, 비류가 동명東明사당을 배알하고,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해구의 선대가 평산平山출신이란 얘기가 있다. 5월, 상이 오민전吾民殿으로 납시어서 상을 내렸다: 국산대부國産大夫114) 효경孝卿에게 백마와 표범피를, 대의경大醫卿115) 언산彦山에게는 저택 한 채를 내렸다. 아들 딸 넷을 낳은 사람 70인, 딸만 넷을 낳은 사람 5인, 아들만 셋을 낳은 500인, 딸만 셋을 낳은 83인, 남녀 각각 둘씩 낳은 사람 291인에게 포布와 비단帛을 차등지어 하사하였다. 상이 즉위한 이래에로, 백성들 중에 남편이나 처를 잃은 이들이 없어져서 인구가 4~5배로 늘어났고, 남부의 황룡촌黃龍村과 서부의 가래촌加來村은 대단히 많이 늘어나서 둘 다 10배나 되었다.116) 효경은 일찍이 호족豪들 및 백성民들의 찬밥신세閑인 처妻들을 변술邊戌117)로 내보내 (처가 없는 이들에게) 빌려주어서 여자들의 산기産期118)가 헛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니의尼醫119)들을 보내서 출산을 돕고 투기하는 이들을 다스리매 민속이 도타워졌고, 이에 남녀들이 사랑하고 즐거워서 태평한 세상이 되었더니 제께서 힘써주셨음을 칭송하였다. 석륵石勒120)이 양국襄國121)에 웅거雄據하였다.
109) 「沠」는 「派」의 同字이다.
110) 新城東及安平東北?
111) 新城在南蘇西方?
112) 鰥홀아비・寡과부・孤고아・獨독신노인
113) 西晉 三世 司馬熾
114) 出産을 獎勵하는 大夫
115) 醫藥을 擔當하는 重臣
116) 國力 즉 生産力과 軍事力을 떠받칠 人口가 4〜5배로 늘었다는 말이라.
117) 邊方 守자리가 있는 곳들
118) 애를 낳을 수 있는 시기
119) 出産 등을 돕는 女子醫員
120) 後趙高祖
121) 山西省晉城정도? 河北省邢台之境은 不可할수도.
☯十四年癸酉,春正月,受朝于乙太后宮,宴酣,上謂太輔仙方曰“安平旣定,可破樂浪.計將安出.”仙方曰“子述勇而無謀,可以智取,不冝征伐.臣請以計襲取.”上從之,以仙方爲征南大將軍,與祖文紐碧長莫思倉覓等,便宜行事. 比流親自割牲以祀天地於南郊. 二月,左輔祖弗薨,年六十六,穆平之外孫也.以萧友代之,靑見右輔.靑見,東川之外孫也.烽上時司評,得宜退爲東川陵守,不肯高官.至是福斯由而爲周皇后所引.上曰“三輔,非功臣不可.”后曰“功不如德.爾勿多言.”遂拜之. 是年,二月,聦殺晉臣珉等及懷帝年二十,復以小劉為其妻,尋其母死,妻張亦死,以小劉娥122)爲后.四月,猗盧使六脩伐段疾陸眷,見敗.慕容廆取段徒河而還,張統降于廆.廆以統爲樂浪太守,王遵爲叅軍事.此所謂樂浪郡廆置也. 七月,羅旱蝗民飢. 十月,仙方與樂浪王子述會獵于薩川原.子述見仙方之精騎甚多,欲退之.仙方追而擒之,又使祖文紐碧等進攻海濱諸邑,平之.倉覓破校尉府,而虜校尉屬國等七人,献之.長莫思襲破樂浪城,虜男女二千餘口,献之.以仙方爲樂浪王,進爵太公以鎭其衆.是年十月,代公猗盧遣其子六脩兄子普根等引数萬爲前鋒,自引二十萬継之,爲劉琨攻晉陽.漢劉曜大敗,身被七創. 石勒欺王浚123). 猗盧城盛樂為北都,故平城爲南都,又作新平城於瀑水之陽,使六脩鎭之.
☯14년계유(CE313), 춘정월, 을乙태후궁에서 조회를 받았다. 연회가 무르익자, 상이 태보 선방仙方에게 말하여 이르길 “안평安平은 이미 평정되었고, 락랑樂浪124)을 깨야겠는데, 계책을 장차 어찌 낼 것이오?”라 하였더니, 선방이 “자술子術은 용맹하나 지모가 없어서, 지략으로 취함이 좋고 정벌함은 마땅치 않을 것인즉, 신은 계략으로 기습하여 취하시길 청합니다.”라고 아뢰매, 상이 그리하자며 선방을 정남대장군으로 삼아서 조문祖文・뉴벽紐碧・장막사長莫思・창멱倉覓 등을 이끌고 형편을 따라서 거행하게 하였다125). 비류比流가 친히 희생물을 칼질하여 남교南郊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하였다126). 2월, 좌보 조불祖弗이 66살에 죽었다. 목평穆平의 외손자이다. 소우萧友로 조불을 대신하고, 청견靑見을 우보로 삼았다. 청견은 동천東川의 외손으로, 봉상烽上시절에 사평司評을 하여, 물러남이 마땅함을 깨달아 동천릉東川陵을 지키며 높은 자리를 피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사유斯由태자를 도왔다가 주周황후에게 불러들여졌다. 상이 “3보 자리는 공신이 아니면 아니 되오이다.”라 하였으나, 황후가 “공신들이 덕망 있는 이들만 못합니다. 당신은 여러 말씀 마세요.”라 하고서 청견에게 벼슬자리를 주었다. 이해, 2월에 유총聰이 서진晉의 신하 민珉 등과 20살 먹은 회제懷帝까지를 죽이고, 다시금 작은 유劉씨를 자기 처로 삼았다. 자기어미를 찾아보니 죽었고 본처 장張씨 역시 죽었음에, 작은 유아劉娥127)를 후后로 삼은 것이다. 4월엔 의로猗盧128)가 육수六脩를 시켜 단질륙권段疾陸眷129)을 치다가 패하였다. 모용외慕容廆130)가 단段씨의 도하徒河131)땅을 취하여 돌아가니, 장통張統132)이 모용외廆에게 투항하였고133), 모용외는 장통統을 락랑태수樂浪太守로 삼고 왕준王遵134)을 참군사叅軍事로 삼았다.135) 이것이 소위 모용외廆가 설치한 락랑군樂浪郡이라. 7월, 신라羅가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10월, 선방仙方이 락랑樂浪왕 자술子術과 살천원薩川原에서 회동하여 사냥하였다. 자술이 선방의 정예기병들이 심히 많음을 보고 내빼려하자, 선방이 쫒아가서 그를 사로잡았으며, 또한 조문祖文・뉴벽紐碧 등으로 하여 물가海濱의[호수변의, 바닷가의] 모든 읍邑들을 평정하고, 창멱倉覓으로 하여 교위부校尉府를 깨서 교위校尉와 속국屬國 등 7인을 사로잡아 바치고, 장막사長莫思로 하여 락랑성樂浪城을 습격해 깨뜨려서 남녀생구 2천여를 붙잡아서 바쳤다. 선방을 락랑왕樂浪王으로 삼고 작위를 태공으로 올려줘서 락랑 무리들을 지키게 하였다. 이해 10월에 대공代公 의로猗盧가 자기아들 육수六脩와 형의 아들 보근普根을 보내 수만을 이끌며 전봉을 서게 하고, 자신은 20만을 이끌고 뒤따르며, 유곤劉琨136)을 위해 진양晉陽137)을 쳤더니, 한漢138)의 유요劉曜139)가 대패하고 몸의 일곱 곳을 다쳤다. 석륵石勒140)이 왕준王遵141)을 속였다142). 탁발의로猗盧가 성락盛樂143)에 성을 쌓아서 북도北都로 삼고, 옛故 평성平城144)을 남도南都로 삼았으며, 또한 신평성新平城을 폭수瀑水145)북변146)에 쌓아서 육수六脩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122) 南堂註釋曰 六劉
123) 浚・弓浚・王遵・弓遵과 同人인지 異人인지 모르겠다.
124) 西晉屬方?
125) 三國史記엔 所謂 西漢의 漢四郡 中의 樂浪郡이 아직 존재한 듯 기록하였음.
126) 百濟의 天子國 즉 帝國 行勢
127) 六劉
128) 鮮卑族 拓拔氏
129) 鮮卑族 段氏
130) 鮮卑族 慕容氏
131) 娘子關桃河? 西漢 遼西郡 屬靑山?
132) 遼東 樂浪人
133) 仙方 等의 軍隊에게 樂浪王 子術과 함께 당하기 싫어서?
134) 或云弓遵
135) 仙方等軍의 樂浪平定에 障碍?
136) 西晋 司馬睿의 臣下
137) 臨汾之境 前趙都城. 或 山西省 西南部 涑水最上流 絳縣之境? 太原縣 北隣 晉陽城?
138) 漢趙 즉 前趙, 匈奴族으로 五胡의 하나
139) 漢趙 즉 前趙의 末帝
140) 襄國에 雄據한 匈奴 一派인 羯族 後趙의 高祖
141) 魏之樂浪郡長, 廆之參軍事.
142) 石勒이 王遵의 樂浪땅 一部를 蠶食했나?
143) 朔州市 西北部之境? 和林格이 一圓?
144) 朔州市 西北部之境?
145) 瀑河? 山西省 西北部 洪濤山西隣之河?
146) 右玉之境?
☯十五年甲戌,春正月,周皇后生皇子武,以太子斯由封皇子賜玉冊金印,以檀林神宮爲周皇后宮,宴群臣宗戚于肖門院. 羅以急利爲伊飡.二月,訖觧以旱止修闕之役. 秋九月,方夫與仙玉休都芙莢等進圍平郭,下之,移其民於新城東北之地以墾耕爲業. 仙方遣祖文等伐帶方,取岑城提奚二城,献俘.南部大使者大玄從[征]147)樂浪而卒,年三十五.
☯15년갑술(CE314), 춘정월, 주周황후가 황자 무武를 낳자, 태자 사유斯由로 황자皇子를 봉하고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주었으며, 단림신궁檀林神宮을 주周황후의 궁으로 삼았고, 군신과 종척들에게 초문원肖門院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羅는 급리急利를 이찬으로 삼았고, 2월엔 흘해訖解가 가뭄이 들어 궁궐 고치는 공역을 멈추었다.
추9월, 방부方夫가 선옥仙玉・휴도休都・부협芙莢 등과 함께 진격해 평곽平郭148)을 포위하여 떨어뜨리고 그곳 백성들을 신성新城149) 동북으로 옮겨서 땅을 개간하여 농사짓고 살게 했다. 선방仙方이 조문祖文 등을 보내 대방帶方을 쳐서 잠성岑城과 제해提奚 두 성城을 빼앗고 포로들을 바쳤다150). 남부대사자 대현大玄이 락랑樂浪 정벌을 따라나섰다가 35살에 죽었다151).
147) 本傳은 「從征」樂浪이나, 乙弗大王傳은 「從政于」樂浪이다.
148) 河北省 西南部 廣平古城 쯤?
149) 河北省中部 新城?
150) 三國史記는 단지 [十五年...秋九月,南侵帶方郡.]이라고만 기록해서, 位置를 五里霧中으로 만들어놓은 帶方 땅만을 不當하게 侵犯한 듯이 해놓고, 高句麗의 南方이자 帶方의 東方인 桓那故地・涉羅故地 等에 該當하는 疆域에 대한 記錄을 省略하여, 高句麗의 西南方疆域을 斟酌할 수 있는 실마리 除去하길 繼續해놓았다.
151) 乙弗大王傳엔 「南部大使者大玄,與其母從仙方于樂浪,得疾而卒,年三十五.平山吏解熟之子...大玄事仙方如父.至是從政于樂浪,有功未褒而卒,人多惜之..」
☯十六年乙亥,春二月,方夫松巨高植等拔玄菟城,斬其守将王皚等三十人,盡獲其宝貨.以方夫爲鎭西太将軍玄菟太守平海公,兼領最彘陽化鞨部長嶺之地. 五月,慕容廆遣其從弟句入朝,献土物人蔘甘草猯鼠皮等五十種.上謂[句]152)曰“汝兄若知天命,則冝以河西之地來献,互守境界.”句曰“小國乃大晉之臣.何敢擅乎.”上笑曰“吾欲取者,大晉也.敀語汝兄早速來降.不然,未免王皚耿薈矣.”[句]曰“最彘陽化亦是河北而臣祖所起之地.陛下,何故取之耶.”上曰“我世祖琉璃明皇十一年,扶芬奴平此地爲屬領久矣.汝祖亦非我臣乎.”[句]曰“臣祖之祖始起于紫蒙川,而與宇文世讐,暫移乎此而更下巴東烏林大棘,則最彘以南皆吾地.”上曰“河南之地悉屬于朕,則最彘小壤亦讓于汝可也.”[句]知不可得,敀告廆.廆大怒,遂絶和. 秋七月,上與周皇后巡至玄菟城勞将士,八月入南蘇,太史奏星,九月畋于西川之原而還都. 十一月,乙太后行白龍大祭于陽隧.孛于東北.
☯16년을해(CE315), 춘2월, 방부方夫・송거松巨・고식高植 등이 현도성玄菟城을 빼앗고 그곳 수장守将 왕애王皚 등 30인의 목을 베었으며 보화들도 죄다 빼앗았다. 방부를 진서대장군・현도태수・평해공平海公으로 삼고, 최체最彘153)・양화陽化154)・말갈부鞨部장령長嶺155) 땅들도 겸해서 다스리게 하였다. 5월, 모용외慕容廆가 종제 구句를 보내 입조하여 토산물과 인삼・감초・단서피 등 50종을 바쳤다. 상이 구句에게 말로써 “네 형이 천명天命을 안다면 곧 하서河西156) 땅을 바치고 서로의 경계를 지켜야 할 것이다.”라 일렀더니, 구句가 “저희나라는 대진大晉157)의 신하인데, 어찌 저희 맘대로 하겠습니까?”라 아뢰매, 상이 웃으면서 “내가 가지려는 것이 그 대진大晉이다. 돌아가거든 네 형에게 조속히 찾아와서 항복하라고 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왕애王皚와 경회耿薈의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야.”라 일렀더니, 구句가 “최체最彘・양화陽化 역시 하북河北의 땅들이고, 제 할아비가 일어서신 곳입니다. 폐하께선 무슨 연고로 그곳을 갖고자 하십니까?”라 아뢰매, 상이 “우리 황조의 조상이신 유리명황琉璃明皇 11년에 부분노扶芬奴가 그 땅158)을 평정해서159) 속령으로 삼은 지 오래였고, 네 할아비 또한 내 신하가 아니었더냐?”라 일렀더니, 구句가 “신의 할아비의 할아비가 자몽천紫蒙川160)에서 처음 일어났고, 우문宇文집안과 원수가 되어 잠시 하서河西161) 땅으로 옮겼다가 다시 파동巴東의 오림烏林・대극大棘162)으로 내려온 즉 최체最彘 남쪽 땅이고, 이들 모두는 저희 땅이었습니다.”라 아뢰매, 상이 이르기를 “하남河南163) 땅 모두 짐에게 속하나, 최체最彘 작은 땅은 너희에게 줄 수 있겠다.”라 하니, 구句는 얻는다는 것이 불가함을 깨닫고 돌아가서 모용외廆에게 고하였고, 외廆는 단단히 화가 나서 화친하길 그만두었다. 추7월에 상이 주周황후와 함께 순시하여 현도성玄菟城164)으로 가서 장수와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였고, 8월에 남소南蘇165)에 들렀다가, 태사太史가 천문天文166)을 상주하여, 9월에 서천원西川原167)에서 사냥하고 도성168)으로 돌아왔다. 11월, 을乙태후가 양수陽隧169)에서 백룡대제白龍大祭170)를 지냈다. 혜성이 동북으로 뻗쳤다.171)
152) 本傳엔 「句」와 「苟」가 함께 쓰였으나, 乙弗大王傳은 모두 「句」이어서, 乙弗大王傳을 따른다.
153) 汾西 卽 古永安縣?
154) 太谷陽邑?
155) 淸漳西源上流長岭縣?
156) 南流黃河以西? 汾河以西? 遼河則淸漳河以西?
157) 西晉
158) 卑离 涉臣 東紫蒙
159) 光明大帝紀 11年 記錄 참조
160) 汾水? 淸漳東源?
161) 南流黃河 서쪽? 汾河 서쪽? 川西?
162) 帝顓頊遺墟? 紫荊山東南克城은 棘城?
163) 東流黃河? 汾河? 桑干河? 濁漳河?
164) 玄菟太守治所. 山西城西北部? 山西省東中部?
165) 勾茶古都
166) 별자리의 변동
167) 西川帝陵原? 箕丘以西의 滹沱河 最上流之境?
168) 西都? 西川宮所在?
169) 南堂遺稿 小獸林王紀 참조하면, 自陽岩至隧,則白龍院所在.
170) 高太后大祭
171) 三國詐記는 단지 十六年,春二月,攻破玄菟城殺獲甚衆. 秋八月,星孛于東北.]라고만 하여서, 西方인 盖馬故地(新玄菟故地)와 西南方인 勾茶古都(南蘇)가 高勾麗의 所有였음을 지우거나 그 西方과 南方 疆域을 歷史와 함께 지워버렸다.
●十七年丙子,春正月,以萧友爲南部大使者,劉長句爲粘蟬太守,芙昇馬川太守,周淡樂浪太守,靑見左輔,于豊右輔,烏陌南中部于臺.陌南,以烏伊之冢孫,密謀暗殺仙方,事敗.至是復起. 百濟有大星墜其西邊而大旱. 三月,代王猗盧愛其少子比延,欲以爲嗣,使長子六脩出居新平城172)而黜其母. 六脩有駿馬,日行五百里.猗盧奪之,以與比延.六脩來朝,猗盧使拜比延,六脩不從.猗盧乃坐比延於其步輦173)使人導從出遊,六脩望見以爲猗盧伏謁路左.至乃比延,六脩慙怒而去.猗盧召之,不至,大怒帥衆討之,爲六脩所敗.猗盧微服逃民間,有賤婦人識之,遂爲六脩所弑.拓跋普根,先守外境,聞難,來赴攻六脩滅之.普根代立,國中大亂.四月,普根卒,其子始生,普根母惟氏立之174). 四月,百濟,王都大井溢,黑龍出于其中故以爲北國來呑之兆,云. 五月,樂浪王仙方入朝,告晋人因劉曜之乱,降者甚多.命皆厚待之. 十一月,棠山公高朴兒薨,年六十九.朴兒,以雉祠之主,爲扶社功臣,位至一品而未甞立朝爭功,人以爲難. 普根子死,從父鬱律立. 鬱律者,猗盧弟弗之子也,國人立之.
●17년병자(CE316), 춘정월, 소우萧友를 남부대사자, 유장구劉長句를 점제粘蟬태수, 부승芙昇을 마천馬川태수, 주담周淡을 락랑樂浪태수, 청견靑見을 좌보, 우풍于豊을 우보, 오맥남烏陌南을 중부우대로 삼았다. 오맥남陌南은 오이烏伊의 종손으로, 선방仙方암살을 밀모하였다가 일이 틀어진 후, 이제야 다시 기용된 것이었다. 백제百濟에선 큰 별이 서쪽 변방에 떨어지고 큰 가뭄이 있었다. 3월, 대代왕 의로猗盧175)가 어린 아들 비연比延을 아껴 후사로 삼고자, 큰 아들 육수六脩를 신평성新平城으로 나가살게 하고 그의 어미도 내쳤다. 육수六脩에겐 하루에 5백리를 가는 좋은 말이 있었는데, 의로猗盧가 이것을 빼앗아서 비연比延에게 주었다. 육수가 조정으로 찾아갔는데, 의로가 비연에게 절하라고 시켰으나, 육수가 따르지 않았다. 의로가 이윽고 비연을 보련步輦176)에 앉혀서 사람들을 앞세워 길을 잡고 뒤따르게 하여 나다니게 하였더니, 육수가 멀리서 바라보매 그것이 의로로 여기고 길 좌측에 엎드렸는데, 다다른 것이 비연이매, 육수는 참담하고 화가 치밀어서 (폭수 북변의 신평성으로) 되돌아갔다. 의로가 돌아오라 불러도, 돌아가지 않으매, 크게 노하여 무리를 이끌고 육수를 토벌하다가 오히려 육수에게 패하였다. 의로는 미복微服으로 민간에 숨어들었다가, 비천한 아낙네에게 들켜서, 육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탁발보근拓跋普根177)이 우선하여 외부경계를 서고 있다가, 나라의 꼴이 여의치 않음을 듣고서, 육수를 찾아가서 쳐서 멸하였으며, 보근普根이 대신하여 보위에 올랐더니,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4월에 보근이 죽어, 그 아들 시생始生178)을 보근의 어미 유惟씨179)가 보위에 세웠다. 4월에 백제百濟는 도성의 큰 우물이 넘치고 흑룡이 그 우물에서 나왔더니, 사람들이 북쪽 나라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빼앗을 징조로 여겼다 한다. 5월, 락랑왕樂浪王 선방仙方이 입조하여 유요劉曜의 난리로 인하여 찾아와서 투항하는 진晉사람들이 매우 많음을 고하였더니, 그들 모두를 후대하라는 명이 내렸다. 11월, 당산공棠山公 고박아高朴兒가 69살에 죽었다. 고박아朴兒는 치사雉祠180)의 주인으로, 부두공신이 되어 품계가 1품에 이르렀는데도, 벼슬에 올라서 공을 다투지 않으매, 사람들이 어려워하였다. 보근의 아들181)이 죽고, 보근의 종부從父182) 울률鬱律183)이 보위에 올랐다. 울률鬱律은 의로猗盧의 동생인 불弗의 아들로, 나라사람國人들이 보위에 세웠다.
172) 建興元年,猗盧築新平城,唐謂之新城在朔州界.
173) 步輦,不駕馬,使人輓之(말로 끄는 수레가 아닌 사람이 끄는 수레).
174) 惟氏,猗이妻.
175) 代穆王
176) 말로 끄는 수레가 아닌 사람이 끄는 수레.
177) 代의 前廢王
178) 代의 後廢王
179) 惟氏는 猗이의 妻이다.
180) 乙弗大王傳曰 赤雉祠.
181) 始生.
182) 從叔, 三寸.
183) 代의 太祖.
●十八年丁丑,春三月,周皇后生子玟. 新羅,春夏旱,訖觧錄囚而原之. 五月,上與周皇后,如卒本謁東明廟,巡至柵城而還,命高植棤于京等伐東海,拔之.以植爲太守. 七月,肖門院爲象院,免后主.芙氏菱院主,乙太后白龍院主. 是年,司馬睿以廆爲昌黎公,不受,廆遣王濟浮海詣建康勸進.漢主聦信譖殺其弟乂.廆庶兄吐谷渾卒,子吐延嗣,長大有勇力,羌胡皆畏之.
●18년정축(CE317), 춘3월, 주周황후가 아들 민玟을 낳았다184). 신라新羅는 봄과 여름이 가물자 흘해訖觧가 죄수들의 기록을 다시금 살펴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5월, 상이 주周황후와 함께 졸본卒本으로 가서 동명묘東明廟를 배알하고, 순행하여 책성柵城185)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고식高植・석棤・우경于京 등에게 명하여 동해東海186) 땅을 쳐서 빼앗고, 고식植을 태수로 삼았다. 7월, 초문원肖門院을 상원象院으로 바꾸어 면免후가 주관하게 하고, 부芙씨는 릉원鬱律을 주관하고, 을乙태후는 백룡원白龍院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해에, 사마예司馬睿187)가 모용외廆를 창려공昌黎公으로 삼았으나, 이를 거절한 모용외廆는 왕제王濟188)를 배에 태워 건강建康으로 보내서 (북쪽으로) 진격하라고 권하였다189). 한漢190)주 유총劉聰이 참소를 믿고 자기 동생 예乂를 죽였다. 모용외廆의 이복형 토곡혼吐谷渾이 죽어, 그 아들 토연吐延이 뒤를 이었다. 몸집이 장대하고 용력이 있어서, 강羌족과 호胡족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였다.
184) 乙弗大王傳曰 [后旣與靑見相通而色慾尤盛,伺王之如太后宮,自服婢女衣,依於園林中,見殿士之俊秀者,引而通之.玟乃其子也.]
185) 大武神帝에게 被滅된 東夫余의 古都.
186) 현금 黑龍江 下流 東方? 韓半島之境? 遼河平原? 河北省東邊?
187) 東晋
188) 古樂浪故地之人?
189) 昌黎在古樂浪故地를 의미.
190) 五胡의 하나인 匈奴族 前趙
●十九年戊寅,春三月,左輔靑見病免,于豊代之,椽方右輔. 去年,聦殺愍帝,年十八.至是,凶問至建康,睿卽皇帝位. 遼西公段疾陸眷卒,其子幼,叔父涉復辰自立,匹磾自薊犇喪至右北平,涉復辰發兵拒止.末柸乘虗襲復辰自稱單于,迎擊匹磾敗之.匹磾走還薊. 訖觧下令國中,無奪農時.一切官役,命皆停之. 夏五月,遣玄菟小守高卿攻拔河城.平州刺史崔毖聞之,遣使稱臣,請與宇文共伐慕容而分其地.遣談河于宇文段氏而共謀討廆. 段匹磾殺劉琨. 秋七月,乙太后崩,葬於咄固大王陵,春秋五十八.性聦敏,多權術,顔色佳麗,身長七尺,善歌舞戱.謣令人喜怒悲懼,且挾媚術,柔権貴如泥,宻贊大業.上卽位,尊爲太后,參預政事頗多所失,而不能禁之.多畜私臣,鑄金人,專事荒淫,國人鄙之.是月,鬱律擊劉虎,破之,取其部落,西取烏孫東兼勿吉以西. 漢主聦死.子粲立,烝其母.靳樊武王等皆年二十.八月,靳準殺漢主粲,以璽還晉,曰“自古無胡人爲天子.”劉曜石勒共伐靳準,準爲其下所殺.十二月,石勒攻平陽,靳明走曜,曜盡殺靳氏.
●19년무인(CE318), 춘3월, 좌보 청견靑見이 병으로 물러나서, 우풍于豊이 그를 대신하고, 연방椽方이 우보가 되었다. 지난해에 유총聦이 18살인 민제愍帝192)를 죽였는데, 지금에야 그 흉한 소문이 건강建康193)에 다다랐더니, 사마예睿194)가 황제위에 올랐다. 요서공遼西公 단질육권段疾陸眷이 죽고, 아들이 어리매, 숙부 섭복진涉復辰이 스스로 보위에 올랐더니, 단필제匹磾가 계薊195)에서 조상하려고 허둥지둥 내달려서 우북평右北平196)에 다다랐고, 섭복진이 병사를 일으켜서 이를 막아서매, 단말배末柸가 허술한 틈을 타서 섭복진復辰을 습격하여 스스로 선우單于197)를 칭하고 필제를 맞아서 깨뜨렸고, 필제는 달아나서 계薊로 돌아갔다. 흘해訖觧가 명을 내려 농사철을 빼앗지 않게 하고, 모든 관역을 명을 내려 중지하였다. 하5월, 현도玄菟소수 고경高卿198)을 보내서 하성河城199)을 쳐서 빼앗았더니, 이 소릴 듣고 평주平州자사200) 최비崔毖가 사신을 보내와서 신하를 칭하며, 우문宇文과 함께 연합하여 모용慕容을 쳐서 그 땅을 나눠 갖길 청하매, 담하談河를 우문宇文씨와 단段씨에게 보내서 모용외廆 토벌을 공모하였다. 단필제段匹磾가 유곤劉琨을 죽였다. 추7월, 을乙태후가 죽어서 돌고대왕咄固大王의 릉에 장사하니, 춘추 쉰여덟이었다. 을乙태후는 성품은 총민하며 권모술수가 많았고, 안색은 예쁘고 고왔으며, 키는 7척이나 되었다. 노래하며 춤추고 놀기를 잘하였고, 망령된 명을 내려서 남들을 희喜・노怒・비悲・구懼하게 하였으며, 게다가 사람을 두루 녹여내는 재주가 있어서 권력이 있거나 귀한 이들을 진흙 주무르듯 하여 대업을 몰래 도왔다. 상이 즉위하여 태후자리로 올렸더니, 정사에 끼어들어 일을 그르친 것이 많았으나, 이를 말릴 수도 없었다. 사신私臣201)들이 많았고, 금인金人202)을 주조하며 황음하기를 일삼았더니,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천하게 여겼다. 이달에 탁발울률鬱律이 유호劉虎를 쳐서 깨뜨리고 그 부락을 취하였다. 서쪽으론 오손烏孫땅을 취하고, 동쪽으론 물길勿吉이서以西 땅을 차지한 것이라. 한漢주 유총劉聦이 죽어, 아들 유찬粲203)이 보위에 오르더니 어미를 치붙었다. 근번靳樊・무왕武王 등은 모두 나이가 스물이었다. 8월엔 근준靳準이 한漢주 유찬粲을 죽이고, 새보를 진晉204)에게 돌려주며 이르길 “예로부터 호胡인들이 천자가 된 적이 없었소.”라 하매, 유요劉曜205)와 석륵石勒206)이 함께 근준을 쳤고, 근준準은 자기 수하들에게 피살되었다. 12월엔 석륵이 평양平陽207)을 공격하여, 근명靳明이 유요曜에게 도망했더니, 유요曜가 근靳씨들을 모조리 척살하였다.
192) 西晉司馬鄴
193) 東晋都城
194) 東晋
195) 通志曰在幽州
196) 沁源霍縣間,霍山東北隣北平.
197) 匈奴族 및 鮮卑族의 帝王稱號
198) 高奴子之子
199) 山西省 西北邊 河濱關之境? 所謂芻牟鏡盖馬國(北邊)河城?
200) 自稱平州刺史? 東晋平州刺史?
201) 情夫
202) 金人像?
203) 前趙 隱帝
204) 東晋
205) 前趙末帝
206) 後趙明帝
207) 山西省 臨汾之境
☯二十年己卯,春正月,談河自遼東還,奏“段氏有內乱.宇文最强而慕容新盛,其勢不可豫測.冝観二氏動靜而徐拾吾邊,不失其機乃上策也.”上嘉之. 二月,石勒遣左長史王脩,献捷於漢.漢主曜遣兼司徒郭汜,授勒太宰領太将軍,進爵趙王,加殊禮出警入蹕如曹公輔漢故事,拜王脩及其副劉茂皆爲将軍封列侯.脩舍人曹平樂,從脩至粟邑,因畱仕漢,言於曜,曰“大司馬遣脩等來,外表至誠,內覘大駕[疆]208)弱,俟其復命將襲乘輿.”時,漢兵實疲弊.曜信之乃追汜還,斬脩於市.勒還至襄國,劉茂逃歸言脩[死]209)状.勒大怒曰“孤事劉氏,於人臣之職有加矣.彼之基業皆孤所爲.今旣得志,還欲相圖.趙王趙帝,孤自爲之.何待於彼邪.”乃誅曹平樂三族. 三月,上巡至新城及安平,使芙莢高卿等,各引步騎出界. 四月,漢主曜還都長安,立妃羊氏爲皇后,以羊氏子熙爲皇太子.羊氏卽故惠帝后也,曜甚寵之,頗干預國事. 代王鬱律擊匹磾.匹磾棄妻子,奔樂陵依邵續. 十月,命仙玉引休都于京等伐廆,廆欲納女而和親,上問於談河,河曰“廆娶妻於段氏而取其徒河.是其外仁而內險也.不可親.”於是,與宇文段國幷進.廆大懼,不能出,密遣饋酒求和.仙玉却之,宇文獨受之.時,天寒師老,玉有憂色.司馬玄膝說玉曰“聽人之言而深入,不戰.今,宇文忽變,段本廆族.不如退而観變,徐圖之,不失萬全.”仙玉然之乃退,段氏亦退.廆與其子翰襲破宇文,而進攻遼東.崔毖单身敀我而請救.仙玉出戰爲廆所敗而死.王痛哀之,命休都領其衆.廆使其子仁爲遼東太守,伐休都.我軍連敗,平郭失守.乃以萧友爲安平太守,率軍二萬徃救之.以靑見爲南部大使者,葬仙玉以右輔禮,賜玉妻弗氏年穀.玉,方之弟也.有脅力善射,佐其兄方以成候山之功,奪尙宝妻弗氏(中川女也).玉勇敢善戰而有輕敵之氣,常時好罵幕下,故单騎深入,竟敗而死.其下不力戰而救之,人多惜之.
通鑑曰
十二月,平州刺史崔毖,自以中州人望,鎭遼東,而士民多歸慕容廆,心不平.数遣使招之皆不至,意廆拘畱之,乃陰說高句麗段氏宇文氏,使共攻之,約滅廆分其地.毖所親勃海高瞻力諫,毖不從,三國合兵伐廆.諸将請擊之,廆曰“彼爲崔毖所誘,欲邀一切之利.軍勢初合其鋒甚銳,不可與戰,當固守以挫之.彼爲烏合而來,旣無統壹,莫相歸服.久必攜貳,一則疑吾與毖詐而覇之,二則三國自相猜忌.待其人情離貳,然後擊之,破之必矣.”三國進攻棘城.廆閉門自守,遣使獨以牛酒犒宇文氏.二國疑宇文氏與廆有謀,各引兵歸.宇文大人悉獨官曰“二國雖歸,吾當獨取之.”宇文氏士卒数十萬連營四十里.廆使召其子翰於徒河,翰遣使白廆曰“悉獨官举國爲寇,彼衆我寡,易以計破,難以力勝.今,城中之衆,足以禦寇.翰請爲奇兵於外,伺其間而擊之,內外俱奪,使彼震駭不知所備,破之必矣.今,幷兵爲一,彼得專意攻城無復它虞,非策之得者也.且示衆以怯,恐士氣不戰先沮矣.”廆猶疑之.遼東韓壽言於廆曰“悉獨官有憑陵之志,將驕卒惰,軍不堅宻.若奇兵卒起,掎其無備,必破之策也.”廆乃聽翰留徒河.悉獨官聞之曰“翰素名驍,果今不入城.或能爲患,當先取之,城不足憂.”乃分遣数千騎襲翰.翰知之,詐爲段氏使者逆於道,曰“慕容翰久爲吾患,聞當擊之.吾已嚴兵相待,宜速進也.”使者旣去,翰卽出城設伏以待之.宇文氏之騎,見使者大喜馳行不復設備,進入伏中.翰奪擊,盡獲之,乘勝徑進,遣間使語廆出兵大戰.廆使其子皝與長史裵嶷將精銳為前鋒,自將大兵継之.悉獨官,初,不設備,聞廆至,驚,悉衆出戰.前鋒始交,翰将千騎,從旁直入其營,緃火焚之.衆皆惶擾,不知所爲,遂大敗,悉獨官僅以身免.廆盡俘其衆,獲皇帝玉璽三紐.崔毖聞之,懼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會.三國使者亦至請和,曰“非我本意.崔平州敎我耳.”廆以示燾,臨之以兵,燾懼首服.廆乃遣燾歸謂毖曰“降者上策,走者下策也.”引兵隨之.毖與數十騎棄家犇高句麗,其衆悉降於廆.廆以其子仁爲征虜將軍,鎭遼東,官府市里案堵如故.高句麗將如奴子據于河城,廆遣將軍張統掩擊擒之俘其衆千餘家.以崔燾高瞻韓恆石琮歸于棘城,待以客禮.
十二月,高卿與張統戰于河城,敗死.上命方夫率玄菟軍徃救之.方夫不向河城而直指遼東210),廆使其子翰救仁,翰以善戰,聞乃命方夫互相守界,以爲持久之計.統率河城千余家而敀. 北海鄭林敀廆,廆遺以車牛粟帛皆不受,躬耕於野.廆献三璽於建康.高句麗数侵遼東,廆遣翰仁禦之.是歲,蒲洪降於趙主劉曜.
☯20년기묘(CE319), 춘정월, 담하談河가 요동遼東에서 돌아와 상주하길 “단段씨는 내란 중이며, 우문宇文은 가장 강성하여 있고 모용慕容은 새로이 번성하여 그 위세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이 두 씨氏들211)의 동정을 지켜보면서 우리 변방을 조용히 수습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 하니, 상이 흡족히 여겼다. 2월, 석륵石勒212)이 좌장사左長史 왕수王脩를 한漢213)에 보내서 승첩勝捷을 바치니, 한漢주 유요曜가 겸사도兼司徒 곽사郭汜를 보내서 석륵에게 태재령太宰領・태장군太将軍을 제수하고 조왕趙王으로 작위를 올려주었으며 수례殊禮214)도 얹어주어서 나갈 때는 길거리의 행인들을 없애고 들어올 때는 길을 깨끗이 치우게 하여 조공曹公215)이 한漢216)을 섬기던 옛 얘기처럼 하였다. 왕수와 그 차석副 유무劉茂217) 모두도 장군으로 삼아서 열후로 봉하였다. 왕수脩의 사인舍人 조평락曹平樂이 왕수脩를 따라 속읍粟邑218)으로 갔다가 남아서 한漢을 섬기게 되자, 유요曜에게 “대사마大司馬219)는 왕수脩 등을 보내서 겉으로는 지성至誠을 다하고 속으로는 큰 가마大駕220)의 강약强弱221)을 살피며 재차 명령이 있기를 기다려서 장차 타고 계신 가마를 엄습하려 합니다.”고 언급하였다. 이때 한漢은 군병의 실상이 피폐한지라, 유요曜는 이 말을 믿어 곽사汜를 쫒아가서 되돌아오게 하였으며, 왕수를 저자에서 참하였다. 석륵勒222)이 양국襄國223)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유무劉茂가 도망쳐 들어가서 왕수脩가 죽은 상황을 보고하매, 석륵勒이 대노하여 “내가 유劉씨224)를 섬김에는 신하된 직분 그 이상이었고, 그의 기업基業은 모두 내가 이루어준 것이다. 지금 이미 뜻을 이루었다 하여, 도리어 서로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조趙의 왕王이든 황제皇帝이든 내 스스로 이룰 것이지 어찌 그놈에게 기대하겠나?”라 하고서, 조평락曹平樂의 3족族을 주살하였다. 3월, 상이 순수하여 신성新城과 안평安平으로 가서, 부협芙莢과 고경高卿 등에게 각자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국경으로 나가게 하였다. 4월, 한漢주 유요曜가 장안長安으로 환도하여, 비로 있던 양羊씨를 황후로 세우고, 양씨의 아들 유희熙를 황태자로 삼았다. 양씨는 죽은 혜제惠帝225)의 후后였으며, 유요曜가 그녀를 지극히 아꼈더니, 국정에 끼어들어 잘못됨이 많았다. 대代왕 탁발울률鬱律이 단필제匹磾를 치자, 단필제는 처자식을 버리고 락릉樂陵으로 도망하여 소속邵續에게 의지하였다. 10월, 선옥仙玉에게 휴도休都와 우경于京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 모용외廆를 치라고 명하였더니, 외廆는 딸을 바치겠으니 화친하자고 하여, 상이 담하淡河에게 묻자, 담하가 “모용외廆는 단段씨 집안에 장가들어 그들의 도하徒河226)땅을 취하였고, 겉은 어리뜩하지만仁 속은 험險합니다. 화친은 아니 됩니다.”라 하였다. 이리하여, 우문宇文국 및 단段국과 함께 진격하였더니, 모용외廆는 크게 두려운 나머지 나오지 못하고 몰래 술과 음식을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였다. 선옥仙玉은 이를 거절하였고, 우문宇文만이 수락하였다. 이때, 날씨가 춥고 군사들은 지쳐 있어서 선옥玉도 걱정스런 낯빛이었더니, 사마 현슬玄膝이 선옥玉을 설득하길 “남의 말을 듣고서 깊숙이 들어는 왔지만, 싸우지는 마십시오. 지금 우문宇文은 갑자기 변심하였고, 단段국은 본래 모용외廆의 족속입니다. 물러나서 변화를 살피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서서히 도모하여 만전을 기합시다.”라 하매, 선옥도 그것이 옳게 여겨 물러났고, 단국 또한 물러났다. 모용외廆가 아들 모용한翰과 함께 우문宇文을 기습하여 깨버리고 요동遼東으로 진공하였다. 최비崔毖가 홀몸으로 아군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여, 선옥仙玉이 나가서 싸우다가 모용외廆에게 패하여 죽었다. 임금이 이를 애통히 여겼으며, 휴도休都로 하여금 선옥의 군대를 이끌게 하였더니, 모용외廆가 아들 모용인仁을 요동遼東태수로 삼아 휴도休都를 쳤다. 우리가 연패하여 평곽平郭을 잃었다. 이에 소우萧友를 안평安平태수로 삼아 2만군을 끌고 가서 휴도休都의 군대를 구원하게 하였고, 청견靑見을 남부대사자로 삼아서 선옥仙玉을 우보의 예로 장사하고, 선옥玉의 처 불弗씨에겐 년곡年穀을 하사하였다. 선옥玉은 선방方의 동생으로 상대를 겁주는 힘이 있고 활을 잘 쏘아서 형인 선방을 도와 후산候山의 공을 세웠으며, 상보尙宝의 처인 불弗씨를 빼앗기도 하였다. 선옥玉은 용감하여 싸움을 잘하였으나, 적을 얕잡는 기질이 있고, 평소에 번번이 휘하들을 욕보였기에, 단기單騎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끝내 패하여 죽은 것이다. 그의 휘하들이 힘껏 싸워서 그를 돕지는 않았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다 여겼다.
자치통감通鑑에서 이르기는;
12월,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는 자신이 중주中州의 인망人望227)이어서 요동遼東에 진鎭을 쳤는데도, 많은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용외慕容廆에게 귀의하매,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여러 번 사자를 보내서 돌아오라고 불러도 모두들 돌아오지 않으매, 모용외廆가 이들을 붙잡아놓았다고 생각하고 몰래 고구리高句麗・단段씨・우문宇文씨를 설득하여, 함께 공격하게 하였고, 외廆를 멸하여 그 땅을 나눠 갖자고 약속하였다. 최비毖와 친하게 지내던 발해渤海땅의 고첨高瞻이 힘껏 말렸으나, 최비毖가 따르지 않아서, 3국이 군대를 합쳐 외廆를 치기에 나섰다. (모용외의)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공격하자고 청하자, 모용외廆가 이르기를 “저쪽은 최비崔毖의 꼬임에 빠졌고 한데 뭉친 이점을 노리고 있다. 저쪽의 군세軍勢는 처음엔 합쳐졌으니 심히 날카로울 것이다. 맞싸워서는 아니 되고, 응당 단단히 지켜서 그 예봉을 꺾어야 한다. 저들은 질서 없이 합쳐서 왔고, 처음부터 하나로 합쳐지지 않아서, 서로들 한 사람 아래로 들어갈 수는 없다. 시일이 지나면 필시 사이가 어그러져서, 한편으론 우리가 최비毖와 함께 속여서 자기들을 이길 것이라 걱정하기도 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자기들끼리 시기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갈라지길 기다린 연후에 공격하면 필히 저들을 이길 것이다.”라 하였다. 3국이 극성棘城으로 진공하자, 외廆가 성문을 닫고 지키며 사람을 보내서 소와 술로 우문宇文의 군대만을 먹였다. 다른 두 나라가 우문宇文이 외廆와 모의한 것으로 의심하고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고, 우문대인宇文大人 실독관悉獨官이 이르길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지만, 당당하게 나 혼자라도 차지하겠다.”고 하니, 우문宇文씨 사졸 수십만이 40리를 연이어서 병영을 차렸다. 외廆의 사자가 도하徒河에 있는 그의 아들 한翰을 불렀더니, 한翰이 사자를 보내서 사뢰어 아뢰길 “실독관悉獨官이 거국적으로 쳐들어와서, 저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으니, 계책을 써서 깨뜨리기가 쉽고 힘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성안의 군대만으로도 적을 막기에 충분하실 것이니, 한翰은 밖에서 기습병력이 되어 그들의 틈을 노려서 공격하게 해주시길 청합니다. 안팎에서 함께 치면, 저들로 하여금 놀라자빠져서 대비할 바를 모르게 할 것이니, 저들을 깨뜨리는 것은 필연이겠습니다. 지금 병력을 한데 모으면, 저들은 성을 공격하기에만 몰두하고 다른 것은 걱정하지도 않아도 될 것이니, 방책으로 취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저들이) 군사가 많음을 드러내서 겁박하면, (우리) 군사들의 기세가 싸우기도 전에 먼저 꺾일까 걱정입니다.”라 하였더니, 외廆가 그래도 이를 믿지 않으매, 요동遼東의 한수韓壽가 외廆에게 아뢰길 “실독관悉獨官은 큰 것을 믿고 기댈 생각이겠으나, 장수들은 교만하고 병졸들은 게을러서, 기습병력奇兵이 갑자기 내닫아서 대비가 없는 그들을 앞뒤에서 붙잡는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계책일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외廆가 한翰을 도하徒河에 머물러있으라 허락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실독관이 이르길 “모용한翰이 평소에 날래기로 이름이 있더니, 과연 지금 성城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혹여 골칫거리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니, 응당 먼저 쳐서 잡아야 할 것이다. 성城은 걱정거리가 되지 못한다.”라 하고, 수천 기를 나눠보내서 한翰을 습격하였다. 한翰은 이리 될 것을 알아서, 가짜 단段씨 사자를 만들어서 귀로에 (실독관에게) 얘기하길 “모용한慕容翰은 오래도록 우리에겐 골칫거리였습니다. 소식을 듣는 대로 그를 치십시오. 우리228)는 이미 엄중한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속히 진격하셔야 할 것입니다.”라 하게 하였었고, 거짓사자가 이윽고 길을 나서자, 곧바로 한翰은 성 밖으로 나가 매복을 두어서 우문宇文씨의 군대를 기다리게 하였다. 우문씨의 기병騎兵들은 사자를 만나보았고 크게 기뻐하며 내달려서 대비도 해놓지 않은 채로 복병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이에, 한翰이 두들겨 짓이고 사로잡으면서 승승하여 빠르게 진격하며, 밀정사자間使를 외廆에게 보내서 ‘출병하시어 큰 싸움을 벌이시자.’고 알렸더니, 외廆가 자기 아들 황皝과 장사 배억裵嶷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이끌고 전봉을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悉獨官은 애당초 대비가 없었기에 외廆가 다가오고 있음을 듣고 놀라서 모든 병사들을 내보내서 싸우게 하였다. 전봉들이 서로 부닥치자, 한翰은 1,000기를 거느리고 측면에서 곧바로 영내로 달려들며 모조리 불을 질러 태워댔더니, (실독관)무리들 모두는 놀랍고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패하였다. 실독관은 가까스로 몸을 피하였으나, 외廆가 그 무리들을 모조리 사로잡고 황제 옥새 세 개를 노획하였다. 최비崔毖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우매 자기 형의 아들인 도燾로 하여금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 축하모임을 하게 하였다. 세 나라 사신들 역시 도착하여 화친을 청하며 말하길 “우리들 본시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최崔평주平州가 우리를 그리 하게 교사敎唆하였습니다.”라 하니, 외廆가 도燾를 곁에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지켜 서게 하였더니, 도燾는 두려움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외廆가 도燾를 돌려보내서 비毖에게 이르길 “항복하면 상책上策이고, 도망하면 하책下策이다.”라 하여놓고, 병사를 이끌고 사자를 뒤좇았더니, 최비毖는 수십 기와 함께 가속家屬들은 버린 채로 고구리高句麗로 도망하였고, 그의 군사들은 모두 외廆에게 투항하였다. 외廆가 아들 인仁으로 정노장군征虜將軍을 삼아 요동遼東을 진압하니 관부官府와 저자동네市里들이 옛날처럼 안도案堵(安堵)하였다. 고노자奴子 같이 생긴 고구리의 장수가 하성河城에 진을 치고 있어서, 외廆가 장통張統을 보내 갑자기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았다. 최도崔燾・고첨高瞻・한긍韓恆・석종石琮이 극성棘城으로 귀의하여, 객례로 대하였다라고 하였다.
12월, 고경高卿229)이 하성河城230)에서 장통張統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상이 방부方夫에게 명하여 현도玄菟군대를 이끌고 가서 하성을 돕게 하였는데, 방부는 하성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요동遼東231)으로 달려갔고, 외廆는 아들 모용한翰으로 하여금 모용인仁을 돕게 하였다. 모용한翰이 잘 싸워낸다는 소식이 들려서, 이윽고 (상이) 방부方夫에게 피아간의 경계를 지키라 명하였으니, 이는 오래도록 버티는 계략이었다. 장통統이 하성河城에 있던 천여 가를 이끌고 돌아갔다. 북해北海의 정림鄭林이 모용외廆에게 귀부하여, 모용외廆가 수레車・ 소牛・조粟・비단帛을 주었으나, 모두를 받지 않고서 손수 들판에서 경작하였다. 외廆가 옥새 셋을 건강建康232)에 바쳤다233). 고구리高句麗가 여러 번 요동遼東을 쳤으나, 외廆가 한翰과 인仁을 보내서 막아냈다. 이해에 포홍蒲洪234)이 조趙235)주 유요劉曜에게 투항하였다.
208) 「彊」과 通字이고, 「强」의 뜻으로 사용된 것임.
209) 「死」의 誤寫로 본다.
210) 南堂註釋曰彰武, 즉 漳武?
211) 宇文씨와 慕容씨
212) 後趙
213) 前趙
214) 恪別한 儀典禮法
215) 曹操
216) 劉氏의 東漢 즉 後漢
217) 曹魏樂浪太守
218) 漢 京兆 北隣 馮翊郡 粟邑縣之境
219) 石勒
220) 임금이 타는 수레 즉 劉曜
221) 强點과 弱點
222) 鞨族으로 靺鞨의 한 部類로 보이며, 역시 匈奴의 한 部類로 본다.
223) 山西省襄垣? 河北省邢台?
224) 匈奴族인 劉曜. 前後漢 劉氏가 아니다.
225) 西晉 司馬衷
226) 娘子關桃河? 山西省 紫荊山 西北 陡坡之境?
227) 世上이 우러러 稱讚하고 따르는 德望.
228) 段氏
229) 通典의 高句麗將如奴子가 곧 高奴子의 아들이었다.
230) 山西省西北邊 河濱關之境? 遼東地域 河川 隣近의 城?
231) 漢 遼東 즉 漢 河東之地?
232) 東晋司馬睿, 현금의 南京之境
233) 慕容廆가 아직 西晉을 이은 東晋의 臣下로 있었나?
234) 陝西氐族長
235) 前趙 즉 漢趙
☯二十一年庚辰,正月,楽浪王仙方薨,上哭哀之曰“昨年仙玉戦死,今春亜父棄我.何奪朕股肱之甚乎.”命槨返葬于馬山.上與周皇[后]236)親臨立祠.方美風儀,有權術能,愛人下士,中興帝業.而仍欲簒奪,爲周皇后所沮,遂知天命所在,務進南西,事未成而薨,年六十四.尙多精力而惑於楽浪少女而沈疾遽劇,人多惜之.方能知大體,而不識禮節,烝乙太后如其妻.太后臨崩,命方殉之.上以其爲重臣,不可殉於小節,而止之.夢太后責其負約,心常缺然,至是,夢見太后怒拔其根而病劇,楽浪女亦暴死,人以爲太后靈. 于豊太輔,椽方左輔,談河右輔.豊方皆外戚大家.河,寒微功臣,人以為狗尾貂. 周皇后生子得. 劉曜攻陣倉拔草壁又拔隂宻而還長安. 叚末柸攻叚匹磾破之.匹磾謂邵續曰“吾本夷狄,以慕義破家.君不忘久要,請相與共擊末柸.”續許之,遂相與追擊末柸,大破之.匹磾與弟文鴦攻薊.石勒知續勢孤,遣虎圍厭次,孔萇攻續別營十一,下之.續自出擊虎,爲虎所執,使降其城,續不聽. 三月,幸新城監軍. 六月,劉曜作酆明観西宫陵霄臺.又營壽陵,周圍四里,深三十五丈,以銅爲椁,飾以黃金.工費累億萬,諫者以是資軍,足以平凉州兼吳蜀及石勒曹薿也.曜乃罷其役. 祖逖攻石勒.勒患之,修逖祖墓而返其降者.逖德之,緩其侵暴.勒以奸計懈逖如此. 七月,休都與慕容仁,戰于平郭,斬其右翊将慕容與市.上遣周椹,勞其軍,加爵休都. 八月,比流築射臺于宮西.朔望,佐平以下皆習射應試. 徐龕為虎所困乞降,勒許之. 九月,慕容仁復襲休都,我軍失利甚多,休都于京死之.十二月方夫松巨伐仁,不克而還.
☯21년경진(CE320), 정월, 락랑왕樂浪王 선방仙方이 죽으니, 상이 곡하여 슬퍼하며 이르길 “작년엔 선옥仙玉이 전사하더니, 이번 봄엔 아부亜父238)께서 나를 버렸소이다. 어찌하여 짐은 고굉지신股肱之臣239)을 앗김이 이리 심하단 말이오.”라 하더니, 명을 내려 곽槨240)을 돌아오게 하여 마산馬山에 묻어주고, 상과 주周황후가 친히 왕림하여 사당을 세웠다. 선방方은 풍채가 멋졌고, 권모술수에 능하고 타인과 아랫사람들을 잘 돌보아서 제왕帝王의 업적이 다시금 번성하게 하였으나, 찬탈을 꾀하다가 주周황후에 의해 저지되었고, 끝내는 천명天命의 소재를 깨닫더니, 남서쪽 땅으로 나아가려고 애썼으나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64살에 죽었다. 선방方은 정력이 뛰어남을 자랑하다가 락랑樂浪땅의 젊은 여인에 미혹되어 병이 들어 갑자기 심해졌더니,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선방方은 큰일을 잘 헤쳐 나아갔으나, 예절을 알지 못하여 을乙태후를 자기 처처럼 치붙었다가, 태후가 죽음에 임박하여 선방에게 명하여 순사殉死하라고 하자, 상이 그가 중신重臣임을 들어 작은 예절을 따라 죽을 필요가 없다하여 그의 순사를 막아주었음에, 꿈에 태후가 나타나서 약조를 어긴 것을 책망하여 마음이 항상 찜찜하였는데, 근자에 꿈에 태후가 노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의 뿌리를 뽑아버림에 병이 심해졌었고, 락랑樂浪 여인 또한 갑자기 죽으니, 남들이 태후 영령이 그리 한 것으로 여겼다. 우풍于豊을 태보, 연방椽方을 좌보, 담하淡河를 우보로 삼았다. 우풍豊과 연방方은 모두 외척外戚 대가大家의 사람이었으나, 담하河는 한미寒微한 출신의 공신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구미초狗尾貂241)로 여겼다. 주周황후가 아들 득得을 낳았다. 유요劉曜가 진창陣倉242)을 공격하고, 초벽草壁243)을 빼앗았으며 또한 음밀陰密244)도 빼앗고 장안長安245)으로 돌아갔다. 단말배段末杯가 단필제段匹磾를 공격하여 깨뜨리매, 단필제匹磾가 소속邵續246)에게 말하여 이르길 “나는 본시 이적夷狄247)이고 의義를 귀히 여기다가 파가破家하였소. 그대는 서로 힘을 합쳐서 단말배末杯를 치자고 오래된 약속을 잊지 않았지요?”라 하여, 소속續이 들어줘서 함께 단말배末杯를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단필제匹磾가 아우 문앙文鴦과 함께 계薊248)를 공격하였더니, 석륵石勒249)이 소속續의 형세가 외톨이임을 알아차려 석호虎250)를 보내 염차厭次251)를 에워싸고서 공장孔萇을 보내 소속續의 별영別營 11곳을 쳐서 떨어뜨렸다. 소속續은 친히 성을 나와서 석호虎를 치다가 석호에게 붙잡혔고, 이에 석호가 성을 항복하게 하라고 시켰으나, 소속이 듣지 않았다. 3월, 신성新城으로 거둥하여 군대를 살폈다. 6월, 유요劉曜252)가 풍명관酆明觀과 서궁西宫 및 릉소대陵霄臺를 만들고서, 또 수릉壽陵253)도 쌓고자 하였다. 둘레周圍 4리里에 깊이深가 35장丈이었고, 구리銅로 곽椁을 만들고 황금으로 치장하는 것으로 하여서, 소요비용을 합산하면 수 억만금이 되었더니, 이에 간언하는 이가 있어서, 그 돈으로 군대를 꾸리면 평량주平涼州254)와 오吳・촉蜀 땅들255)은 물론이고 석륵石勒 및 조의曹薿의 땅들256)까지 아우를 수 있겠다고 하매, 유요曜가 그 공역을 파하였다. 조적祖逖이 석륵石勒을 치자, 석륵勒이 그것을 골치아파하다가 조적逖의 조부 무덤을 고쳐주고 투항했던 자들도 돌려보냈더니, 조적은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침입하여 난폭하게 함을 덜하였다. 석륵이 간계로써 조적을 누그러뜨리려함이 이러 하였다. 7월, 휴도休都가 모용인慕容仁과 평곽平郭에서 싸워서 그 우익장수 모용여시慕容與市를 참하였더니, 상이 주심周椹를 보내 그의 군사들을 위로하고, 휴도의 작위를 얹어주었다. 8월, 비류比流가 궁궐서쪽에 사대射臺를 쌓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좌평이하 모든 이들을 활쏘기 훈련과 시험에 참여케 하였다. 서감徐龕이 석호虎때문에 곤혹스러워하다가 투항하겠노라 청하였더니, 석륵勒이 이를 들어주었다. 9월, 모용인慕容仁이 다시 휴도休都257)를 습격하여, 아군이 패하고 잃은 것이 심히 많았고, 휴도休都와 우경于京이 그곳에서 죽었다. 12월에 방부方夫와 송거松巨가 모용인仁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236) 「周皇」은 「周皇后」의 誤寫로 보고 바로잡는다.
238) 父親 같은 功臣. 아버지 다음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흔히 임금이 功臣을 尊敬하여 부르던 말. 楚의 項羽가 范增을 尊敬하여 부른 말에서 왔다고 함.
239) 팔과 다리 같은 신하
240) 屍身을 넣은 관을 담은 상자, 또는 左騎將軍인 仙方의 아들의 이름.
241) 담비꼬리 冠飾을 대신한 개꼬리
242) 陝西省 寶鷄市의 陳倉區之境? 陝西省 渭河中流 南邊 太白山 西隣의 陳倉山?
243) 隴縣 東南隣의 草碧,是也.
244) 雍州刺史鎭, 安定郡 陰密縣?
245) 前趙 後期의 都城으로, 現今의 陝西省 西安市之境.
246) 西晉의 冀州刺史
247) 北方夷族
248) 通志曰在幽州
249) 後趙
250) 後趙
251) 邵續治所. 現今 山東省 德州 平原縣之境?
152) 前趙,在陝西長安.
253) 死前에 만드는 陵穴
254) 隴山北方
255) 長江支流인 漢水의 周邊
256) 南流及東流하는 黃河의 沿邊
257) 在遼東?
●二十二年辛巳,春二月,內裏大兄觧玄,以周皇后寵,擢為殿注簿,與后共决政事.太輔于豊諫“慕容廆為心腹之患,其諸子皆英勇無比.陛下,太子皆幼,嬖臣執政.恐廆得知.”上大慚,命玄出居于外. 比流以庻弟優福爲內臣佐平.乃其嬖臣也,國人不悅,果有太白昼見而蝗其國南. 三月,石勒攻幽州刺史叚匹磾於厭次.孔萇攻其統內諸城,悉拔之.文鴦力戰,死之.匹磾爲石勒所殺,幽冀幷三州皆入於後趙. 十二月,廆立子皝爲世子,作東橫,以平原劉讚爲祭酒使.皝與諸生同受業.廆得暇亦親臨聽之.皝雄毅多權略喜經術,國人稱之.廆徙慕容翰鎭遼東,慕容仁鎭平郭,翰撫安民夷甚有威惠,仁亦次之. 拓跋猗이妻惟氏忌代王鬱律之疆,恐不利於其子,乃殺鬱律而立其子賀傉大人.死者數十人,鬱律之子什翼犍幼在襁褓,其母王氏匿於袴中祝之,曰“天苟存汝則勿啼久之.”不啼乃得免.惟氏專制國政遣使聘後趙,後趙人謂之女國使. 以于卓女腆爲東宮妃,乙太后出也,行其遺命.
●22년신사(CE321), 춘2월, 내리대형 해현觧玄이 주周황후의 총애로 발탁되어 전주부殿注簿가 되어서 후와 더불어서 함께 정사를 처결하매, 태보 우풍于豊이 간하길 “모용외慕容廆는 심복들의 우환을 다스렸고, 그의 모든 아들들은 영특하고 용맹하기가 비할 데 없습니다. 폐하께선 태자들 모두가 어리시고, 폐신嬖臣258)이 집정하고 있습니다. 모용외廆가 이를 알아차릴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이 크게 뉘우치고 해현玄에게 명하여 밖으로 나가 거처하게 하였다. 비류比流가 이복동생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이 자가 폐신이어 국인들이 흔쾌히 여기지 않았더니, 과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그 나라 남쪽에선 황충이 일었다. 3월, 석륵石勒259)이 유주자사 단필제段匹磾를 염차厭次260)에서 공격하고, 공장孔萇이 단필제匹磾의 통치 안에 있던 모든 성들을 쳐서 빼앗았다. 단문앙文鴦이 힘껏 싸우다 죽고, 단필제가 석륵에게 죽어서, 유幽・기冀・병幷 3주州261)가 모두 후조後趙의 차지가 되었다. 12월, 모용외廆가 아들 모용황皝을 세자로 삼고, 동횡東橫262)을 만들어서 평원平原사람 유찬劉讚을 제주사祭酒使로 삼았더니, 황皝이 모든 소생들과 함께 수업하였고, 모용외廆도 짬을 내서 친히 임석하여 들었다. 황皝이 뜻이 크고 굳세며, 권략도 풍부하고 경술 배우기를 좋아하매, 나라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翰을 옮겨 요동遼東을 지키게 하고 모용인仁은 평곽平郭263)을 지키게 하였더니, 한翰이 백성들과 이인夷人들을 다독이고 평안케 함에 위엄과 사랑이 심히 그득하였고, 인仁 또한 거의 그러하였다. 탁발의이拓跋猗㐌의 처 유惟씨가 대代왕 탁발울률鬱律264)이 강성함을 싫어하고 자기 아들에게도 이롭지 않을까 두려워하더니, 끝내 울률을 죽이고 자기 아들 하녹賀傉대인을 보위에 세우니, 죽은 이들이 수십 인이었다. 울률의 아들 십익건什翼犍265)은 어려서 강보襁褓에 싸여있는데, 그의 어미 왕王씨가 치마 속에 숨기고 기원하길 “천명天命이 구차하나마 네게 있으니, 오래도록 울지 말거라.”라 하였고, 울지 않아서 죽음을 면하였다. 유씨가 국정을 움켜쥐고 후조後趙에 사신을 보내서 예의를 차렸더니, 후조의 사람들이 그들을 여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사신이라 하였다. 우탁于卓의 딸 우전腆을 동궁비로 삼았다. 을乙태후 소생이고, 유명을 따른 것이었다.
258) 情夫, 또는 男色臣
259) 後趙高祖
260) 西晉冀州刺史治所
261) 山西省 西部 및 南部와 河北省 西南部之境?
262) 궁궐 동쪽의 學堂. 혹시 東宮?
263) 廣平府 廣平古城? 山西省 平定?
264) 代太祖
265) 代高祖
●二十三年壬午,春正月,太輔于豊薨,椽方代之,談河左輔,方夫右輔,方象玄菟太守. 二月,後趙王勒立子弘為世子,遣石虎将精卒四萬擊徐龕,龕堅守不戰,虎築長圍守之. 四月,劉曜妻羊后卒,謚曰献文. 七月,石虎拔泰山執徐龕送襄國.石勒盛之以囊,於百尺樓上撲殺之,命王伏都等妻子刳而食之,阬其降卒三千人. 十二月,劉曜葬其父母於粟邑,大赦.陵,下周二里,上高百尺,計用六萬夫,作之百日乃成.役者夜作継以脂燭,民甚苦之.遊子遠諫,不聽. 皝伐叚末柸于令支,掠千戶而歸.
●23년임오(CE322), 춘정월, 태보 우풍于豊이 죽어서 연방椽方이 대신하고, 담하談河가 좌보로 방부方夫가 우보로 방상方象이 현도玄菟태수로 되었다. 2월, 후조後趙왕 석륵勒이 아들 석홍弘을 세자로 세웠으며, 석호石虎267)를 보내서 정예병졸 4만을 이끌어 서감徐龕을 쳤으나, 서감龕이 굳게 지키며 싸우려들지 않아서, 석호虎는 진을 길게 둘러치고서 지켰다. 4월, 유요劉曜처 양羊후가 죽었고, 시호는 헌문獻文이었다. 7월, 석호가 태산泰山268)을 빼앗고 서감을 붙잡아서 양국襄國269)으로 보냈더니, 석륵石勒이 이를 자루에다 처넣어서 백 척 루상에서 두들겨 죽이고, 왕복도王伏都 등의 처자식들에게 명하여 살점을 도려내서 먹게 하였으며, 항복한 병졸 3천을 땅에 묻어버렸다. 12월, 유요劉曜가 제 부모를 속읍粟邑270)에 장사하고, 널리 사면하였다. 무덤은 아래 둘레가 2 리에 높이는 100 척이나 되었고, 비용을 합산하매 장정 6만으로 100일이 걸려서 완성되었다. 부역이 밤이 되면 짐승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속행되어, 민초들이 심히 고통스러웠다. 유자원遊子遠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모용황皝이 단말배段末柸를 령지令支271)에서 토벌하고, 1,000호를 노략해 돌아갔다.
267) 後趙 中山公
268) 岱山? 太恒山? 霍太山? 혹 秦山?
269) 河北省邢台? 山西省襄垣?
270) 漢京兆北隣馮翊郡粟邑縣之境
271) 山西省 西南端 永濟? 臨洮府 南方 績山 冷地谷?
●二十四年癸未,三月,高喜女生觧玄女.是爲觧太后. 勒遣使於慕容廆,廆執送建康. 四月,烽山后生皇子羲. 六月,周皇后生皇子錫. 七月,太輔椽方薨,萧友代之,棤安平太守. 趙主曜自將圍隴城,別遣兵圍上邽陣.安頻出戰,輙敗.右軍將軍劉幹攻平襄,克之,隴上諸縣悉降.安留其將楊伯支姜冲兒守隴城,自帥精騎突圍出奔陝中.曜遣將軍平先等追之.安左揮七尺大刀,右運丈八蛇矛.近則刀矛俱發,輙殪五六人.遠則左右馳射而走.先亦勇捷如飛,與安搏戰,三交,遂奪其蛇矛.會日暮雨甚,安棄馬與左右匿於山中.趙兵索之,不知所在.明日,安遣其將石容覘趙兵,趙兵輔威將軍呼延靑人獲之,拷問安所在,容卒不肯言,靑人殺之.雨霽,靑人尋其迹,獲安於澗曲,斬之.安善撫將士,與同甘苦,及死,隴上人思之,爲作壯士之歌. [八月],石虎圍曹嶷於廣固,嶷出降,送襄國殺之. 九月,畋于杜訥原. 左輔談河薨,方夫代之,再生右輔,再生婿椽檍代再生理北部.以婿代理之風始此. 腆生完.
●24년계미(CE323), 3월, 고희高喜의 딸이 해현觧玄의 딸을 낳았다. 이 아이가 (훗날) 해觧태후가 된다. 석륵勒273)이 모용외慕容廆에게 사신을 보냈더니, 모용외廆가 (그를) 붙잡아서 건강建康274)으로 보냈다. 4월, 봉산烽山후275)가 황자 희羲를 낳았다. 6월, 주周황후가 황자 석錫을 낳았다. 7월, 태보 연방椽方이 죽어서, 소우萧友로 대신하고, 석棤을 안평安平태수로 삼았다. 조趙276)주 유요曜가 친히 장수가 되어 롱성隴城277)을 포위하고, 따로 군대를 보내서 상규上邽278)를 포위하여 진을 치매279), 진안安280)이 빈번히 나와서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였고, 우군장군 유간劉幹281)이 평양平襄282)을 공격해 이기니, 롱상隴上(隴州北方)의 모든 현縣들이 항복하였다. 이에 안安이 장수 양백지楊伯支와 강충아姜冲兒를 남겨서 롱성隴城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정예기병을 이끌어 포위를 뚫고 도망하여 섬중陝中283)으로 숨어들었다. 유요曜가 장군 평선平先 등을 보내 추적하였더니, 진안安이 왼손으론 7척 대도大刀를 휘두르고 오른손으론 한 길 8척의 사모蛇矛를 써서 가까운 적을 한 번에 칼과 창으로 대여섯을 베고 멀리 있는 적에겐 좌우로 활을 쏘아대며 치달렸으나, 평선平先 또한 용맹하고 빠르기가 나르는 것 같아서 진안安과 3합을 맞겨뤄서 그의 창을 빼앗았다. 저녁이 되고 비가 심하게 내리자, 진안安이 말을 버리고 측근들과 함께 산중으로 숨어들어서, 전조趙병사들이 수색하였으나 숨은 곳을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진안安이 장수 석용石容으로 하여금 전조趙의 군병을 살피는데, 전조趙군의 보위장군 호연청인呼延靑人이 그를 사로잡아서 진안安의 소재를 고문하였으나, 석용容이 죽어도 말하지 않으매, 청인靑人이 그를 죽였다. 비가 멎자, 청인이 흔적을 더듬어서 간곡澗曲284)에서 진안安을 붙잡아 죽였다. 진안安이 장수와 병사들을 잘 다독였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다 함께 죽었더니, 롱상隴上 땅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장사지가壯士之歌를 지었다. 석호石虎285)가 광고廣固286)에서 조억曹嶷287)을 포위하여, 억嶷이 나와서 항복하니, 그를 양국襄國288)으로 보내서 죽였다. 9월, 두눌원杜訥原289)에서 사냥하였다. 좌보 담하談河가 죽어서, 방부方夫가 그를 대신하고, 재생再生이 우보가 되었으며, 재생의 사위 연억椽檍이 재생을 대신하여 북부를 다스렸다. 이에 사위로 하여서 대신 다스리는 풍조가 비롯되었다. 우전腆290)이 완完291)을 낳았다.
273) 後趙
274) 東晋의 都邑
275) 草氏?
276) 前趙
277) 隴州城
278) 嶓冢山東北方
279) 渭水最上流・水最上流汭水之間之事
280) 後趙秦州刺史 陳安
281) 前趙. 資治通鑒曰 劉干
282) 平凉,涇水最上流北邊
283) 陝西省北部之境?陝西省東部陝縣之境?
284) 南流黃河支流淸澗河谷之境? 洛河中流澗水谷?
285) 後趙中山公
286) 山東淸州로 解說하나 필시 廣平府永年古城以西河內縣廣濟河沿邊之境? 鄭州西北黃河邊廣武鎭?
287) 前趙安東將軍
288) 後趙都邑, 山西省襄垣? 河北省邢台?
289) 黃龍故地箕丘以西中川之境
290) 于卓女,東宮妃.
291) 南堂註釋曰 斯由長子. 是時,東宮斯由年十三.
●二十五年甲申,二月,太輔萧友薨,方夫代之,再生左輔,烏陌南右輔,陌南婿棰代陌南理中部. 是歲,代王賀傉始親國政,以諸部多未服,乃築城於東木根山,徙居之.
●25년갑신(CE324), 2월, 태보 소우萧友가 죽어, 방부方夫가 그를 대신하고, 재생再生이 좌보로 오맥남烏陌南이 우보로 되었고, 오맥남陌南의 사위 추棰292)가 맥남陌南을 대신하여 중부中部를 다스렸다. 이해에, 대代왕 하녹賀傉293)이 친히 국정을 살피기 시작하였고, 모든 부들 중에 여럿이 아직 복속하지 않아서, 동목근산東木根山294)에 성을 쌓고 옮겨서 살았다.
292) 皇子棰
293) 代惠帝. 惟氏所生拓跋猗이子.
294) 賀蘭山脈之境? 山西省北部?
●二十六年乙酉,夏四月,方夫楽浪王,再生太輔,烏陌南[左]295)輔,松巨右輔,明臨涉西部于台,于璘南蘇太守. [二月,]296)石勒加宇文乞得歸官爵,使之擊慕容廆.廆遣世子皝索頭叚國共擊之,以遼東相裴嶷爲右翼,慕容仁爲左翼.乞得歸據渷水以拒,皝遣兄子悉拔雄拒仁.仁擊悉拔雄,斬之,乘勝,與皝,攻乞得歸,大破之.乞得歸棄軍走.皝仁進入其國城,使輕兵追乞得歸,過其國三百餘里而還,盡獲其國重器畜産以百萬計,民之降附者數萬. [三月,]297)叚末柸卒,弟牙立. 五月,劉曜與石虎,戰于八特阪.曜軍無故大驚,士卒奔潰,乃歸長安,憤恚成疾. 十月,百濟天有聲如風浪相激,十一月比流獵于狗原北,手射鹿. 癸巳朔日食. 慕容廆與叚氏方睦爲叚牙謀,使之徙都,牙從之則去令支,國人不楽.段疾陸眷之孫遼,欲奪其位,以徙都爲牙罪,十二月帥國人攻牙,殺之,自立.段氏自務勿塵以來,日益彊盛.其地西接漁陽,東界遼水,所統胡晉三萬餘戶,控弦四五萬騎. 代王賀傉卒,弟紇那立.
●26년을유(CE325), 하4월, 방부方夫를 락랑왕樂浪王, 재생再生을 태보, 오맥남烏陌南을 좌보, 송거松巨를 우보, 명림섭明臨涉을 서부우태, 우린于璘을 남소南蘇298)태수로 삼았다. [2월,] 석륵石勒이 우문걸득귀宇文乞得歸의 관작을 올려주고 모용외慕容廆를 치게 하매, 모용외廆가 세자 황皝과 색두索頭 및 단국段國으로 보내서 함께 걸득귀乞得歸를 치게 하고, 요동遼東재상 배억裴嶷을 우익으로 모용인慕容仁을 좌익으로 삼았더니, 걸득귀乞得歸는 연수渷水299)를 거점으로 하여 황皝에게 대적하고 형의 아들 실발웅悉拔雄을 보내서 모용인仁을 대적하였다. 인仁이 실발웅을 쳐서 목을 베고 승승하여 황皝과 합쳐서 걸득귀를 공격해서 크게 이겼더니, 걸득귀는 군대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였다. 황皝과 인仁이 걸득귀의 국성國城(都城)으로 들어가서, 가볍게 무장한 군병들로 하여금 걸득귀를 뒤쫓게 하였더니, 그 나라 땅을 3백여 리나 지났다가 돌아왔다. 중기重器300)와 가둬기르던 짐승들을 모조리 노획하였더니 100만이나 되었으며, 투항해 귀부한 백성도 수만이나 되었다. [3월,] 단말배段末柸가 죽고, 동생 단아牙가 보위에 올랐다. 5월, 유요劉曜301)가 석호石虎302)와 팔특판八特阪303)에서 싸우는데, 유요曜는 군졸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서 무너지매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더니 이에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어 병이 들었다. 10월, 백제百濟는 하늘에서 풍랑이 서로 부딪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11월엔 비류比流가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손수 사슴을 쏘았다. 계사일 초하루에 (고구리에서) 일식이 있었다. 모용외慕容廆가 단段씨와 더불어 두루 화목하더니 단아段牙를 위해 모의하여 그로 하여금 도읍을 옮기게 하였고, 단아牙가 그 말을 좇았던 즉, 령지令支304)로 갔음을 국인國人들이 반가워하지 않았다. 단질육권段疾陸眷의 손자 료遼가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도읍을 옮겼음을 아牙의 죄목罪目으로 삼고, 12월에 국인들을 이끌어 아牙를 쳐서 죽이고 자신이 보위에 올랐다. 단段씨가 무물진務勿塵 이래로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더니, 그들의 땅은 서쪽이 어양漁陽305)에 접하고 동쪽은 요수遼水306)가 경계이었다.307) 호胡인과 진晉인을 합쳐 3만여 호를 통솔하고, 공현控弦308)은 4~5만이었다. 대代왕 하녹賀傉이 죽고, 동생 흘나紇那309)가 보위에 올랐다.
295) 職位序列上으로 左輔가 옳다.
296) 자치통감에 2월의 일로 나온다.
297) 자치통감에 3월의 일로 나온다.
298) 勾茶古都
299) 濟河支流?
300) 크고 무거운 戰爭道具
301) 前趙
302) 後趙
303) 陝西・河南. 어디쯤?
304) 山西省西南端永濟縣? 臨洮府南方績山冷地谷?
305) 山西省 霍太山南 岳陽?!
306) 淸漳河?
307) 當時 段氏의 疆域은 대략 屯留를 중심으로 하여 西쪽은 霍山東邊 東쪽은 淸漳河下流쯤이었다는 말이라.
308) 騎射兵
309) 代煬帝
●二十七年丙戌,春正月,周皇后生女輝陽. 三月,皇后與皇太子斯由如龍山溫湯. 石勒夜微行檢察諸營. 五月,仙發中部沛者. 十月,石勒用程遐之謀,營鄴宮,使世子弘鎭鄴.石虎自以功多,無去鄴之意,而怨程遐.
●27년병술(CE326), 춘정월, 주周황후가 딸 휘양輝陽310)을 낳았다. 3월, 주황후가 황태자 사유斯由와 함께 룡산龍山온탕溫湯에 갔다311). 석륵石勒이 밤에 모든 병영들을 미행微行하여 단속하면서 살폈다. 5월, 선발仙發을 중부패자로 삼았다. 10월, 석륵이 정하程遐의 책략을 좇아서 업궁鄴宮을 짓고, 세자 석홍弘을 시켜서 업성鄴城312)을 지켰다. 석호石虎는 자신은 공적이 많아서 업鄴으로 갈 뜻이 없었음에 정하를 원망하였다.
310) 乙弗大王傳엔 “宮主或曰解玄女也"라 하였다.
311) 乙弗大王傳엔 “太子斯由烝周后於龍山溫湯."라 하였다.
312) 黃河北邊 河南省 安陽古鄴地?
●二十八年丁亥,夏五月,上與太子皇后如西川,勧民耕種,宴民父老. 七月,濟有雲如赤烏夾日.九月內臣佐平優福據北漢城反,比流發兵討之. 是歲,石虎擊代王紇那,戰于句注陘北.紇那兵敗,徙都大寗以避之.代王鬱律之子翳槐居於其舅賀蘭部,紇那遣使求之,賀蘭大人藹頭擁護不遣.紇那與宇文部共擊藹頭,不克.
●28년정해(CE327), 하5월, 상이 태자 및 황후와 함께 서천西川313)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농사짓기를 권장하고, 민간 부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7월, 백제濟에선 붉은 까마귀처럼 생긴 구름이 해를 감쌌는데, 9월에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해 반란하였고, 비류比流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이해에 석호石虎314)가 대代왕 흘나紇那를 공격하여 구주句注315)와 형북陘北316)에서 싸웠다. 흘나가 싸움에 지고서 도읍을 대녕大寗317)으로 옮겨 그를 피하였다. 대代왕 탁발울률鬱律318)의 아들 예괴翳槐319)가 장인丈人의 하란부賀蘭部에 기거하고 있어서, 흘나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내어달라 하였으나, 하란대인 애두藹頭가 옹호하며 보내주지 않으매, 흘나紇那가 우문부宇文部와 함께 애두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313) 在黃龍故地東部所在箕丘中川以西
314) 後趙
315) 繁峙縣之境句注山? 賀蘭山西北隣九井之境?
316) 井陘關北?
317) 山西省 蒲縣西隣 大寧? 靈州夏州之境? 大覇之境?
318) 代太祖
319) 代烈帝
●二十九年戊子,春正月,角氏生太子女豆氏.太子與周皇后如溫湯. 二月,太輔再生死.烏陌南代之,以緣后爲妾,烽上帝皇后也.松巨左輔,仙述右輔,祖文安平太守,棤新城太守,芙莢大注簿.寒微功臣連登三輔鼎任,人以爲鰍龍同穴. 五月,芙太后崩.尙宝妻生草后,得寵封太后,車駕出入依於乙太后.乙太后崩,獨專太后,上聽其所爲,芙氏大昌于是,時年六十六.其父布,沸流神豪,出於芙芬奴,云. 七月,石虎帥衆四萬,自軹關西入,擊趙河東.應之者五十餘縣,遂進攻蒲阪.趙主曜遣河間王述發氐羌之衆屯秦州以備張駿楊難敵,自将中外精銳水陸諸軍以救蒲阪自衛關北濟,虎懼引退.曜追之.八月,及於高候,與虎戦,大破之,斬石瞻.枕尸二百餘里,収其資仗億計.虎犇趙歌.曜濟自大陽攻石生于金墉,决千金堨以灌之,分遣諸将攻汲郡河內.後趙榮陽太守尹矩野王太守張進等皆降之.襄國大震.張駿治兵,欲乘虗襲長安.理曹郞中索詢諫,曰“劉曜雖東征,其子胤守長安,未易輕也.借使小有所獲,彼若釋東方之圖還與我校,禍難之期未可量也.”駿乃止. 十一月,後趙王勒欲自将救洛陽,僚佐程遐等固諫曰“劉曜懸軍千里,勢不支久.大王不冝親動.動無萬全.”勒大怒,按劒叱遐等出.乃赦徐光,召而謂之曰“劉曜乘一戦之勝,圍守洛陽.庸人之情皆謂其鋒不可當.曜帶甲十萬,攻一城而百日不克,師老卒怠.以我初銳擊之,可一戦而擒也.若洛陽不守,曜必送死冀州,自河已北席卷而來,吾事去矣.程遐等不欲吾行,卿以爲何如.”對曰“劉曜乘高候之勢,不能進臨襄國,更守金墉,此其無能爲可知也.以大王威略臨之,彼必望旗奔敗.平定天下,在今一擧,不可失也.”勒笑曰“光言是也.”乃使內外戒嚴,有諫者斬,命石堪石聦及豫州刺史挑豹等,各統見衆會滎陽.石虎進據石門,勒自統步騎四萬趣金墉,濟自大堨.勒謂徐光曰“曜盛兵成皐關,上策也.阻洛水,其次也.坐守洛陽,此成擒耳.”十二月,乙亥,後趙諸軍集于成皐,步卒六萬,騎二萬七千.勒見趙無守兵,大喜,擧手指天,復加額曰“天也.”卷甲御枚,詭道兼行,出于鞏訾之間.趙王曜專[與]320)嬖臣飮博,不撫士卒.左右或諫,曜怒以爲妖言斬之,聞勒已濟河,始議增滎陽戌杜黃馬關.俄而洛水候者,與後趙前鋒交戦,擒羯送之.曜問“大胡自來邪.其衆幾何.”羯曰“王自來,軍勢甚盛.”曜色變,使攝金墉之圍,陣于洛西,衆十餘萬,南北十餘里.勒望見,益喜謂左右曰“可以賀我矣.”勒帥步騎四萬入洛陽城.己卯,中山公虎引步卒三萬自城北而西,攻趙中軍.石堪石聦等各以精騎八千自城西而北,擊趙前鋒,大戦于西陽門,勒躬貫甲冑出自閶闔門,夾擊之.曜少而嗜酒,末年尤甚.将戦,飮酒數斗.常乘赤馬無故跼頓,乃乘小馬.比出,復飮酒斗餘.至西陽門,揮陣就平.石堪因而乘之,趙兵大潰.曜昏醉退走,馬陷石渠,墜于氷上,被瘡十餘,通中者三,爲堪所執.勒遂大破趙兵,斬首五萬餘級.下令曰“所欲擒者一人耳,今已獲之.其敕将士抑鋒止銳,縱其歸命之路.”曜見勒曰“石王,頗憶重門之盟否.”勒使徐光謂之曰“今日之事,天使其然,復云何邪.”乙酉,勒班師.使征東将軍石邃将兵衛送曜.邃,虎之子也.曜瘡甚,載以馬輿,使醫李永與同載.己亥,至襄國舍曜於永豐小城,給其妓妾,嚴兵圍守.遣劉岳劉震等從男女盛服以見之,曜曰“吾謂卿等久爲灰土,石王仁厚,乃全宥至今邪.我殺石佗,愧之多矣.今日之禍,自其分耳.”留宴終日而去.勒使曜與其太子熙,書諭令速降.曜但敕熙與諸大臣“匡維社稷,勿以吾易意也.”勒見而惡之,久之,乃殺曜.[明年春正月,]曜子熙聞之,大惧,不能保長安而與其兄胤奔上邽,諸征鎭皆棄守而從之,關中大亂.将軍蔣英辛恕擁衆數十萬據長安,遣使降于勒.勒命石生,帥洛陽之衆赴之.
●29년무자(CE328), 춘정월, 각角씨가 태자 딸 두豆씨를 낳았다. 태자가 주周황후와 함께 온탕에 갔다. 2월, 태보 재생再生이 죽으매, 오맥남烏陌南이 대신하고 연緣후를 첩으로 삼았더니, 봉상제烽上帝의 황후였다. 송거松巨를 좌보, 선술仙述을 우보, 조문祖文을 안평安平태수, 석棤을 신성新城태수, 부협芙莢을 대주부로 삼았다. 한미한 출신의 공신들이 줄줄이 3보 자리에 올라서 ‘세 발 솥 정사鼎任’321)를 담당하매, 다른 이들이 미꾸라지鰍와 룡龍이 한 구멍同穴에서 살고 있음으로 여겼다. 5월, 부芙태후가 죽었다. 상보尙宝의 처로 초草후를 낳았으며, 승은을 입어 태후로 봉함을 받았으며, 바퀴달린 가마로 출입하며 을乙태후를 의지하였으나, 을乙태후가 죽자, 혼자서 태후로 있어왔었다. 상이 그녀가 하고자 한 바를 들어줘서 부芙씨의 창성함이 지금에 이르렀고, 올해로 나이가 66살이었다. 아비 부포布는 비류沸流의 귀한 신분의 호걸로, 부분노芙芬奴 후손이라고 한다. 7월, 석호石虎322)가 4만 군사를 이끌어서 지관軹關323) 서쪽으로부터 들어가서 조趙324)의 하동河東325)을 치니, 50여 현이 호응하여, 이윽고 포판蒲阪326)으로 진공進攻하였다. 조趙주 유요曜가 하간왕河間王327) 술述을 보내서 저氐・강羌의 무리들을 징발해 진주秦州328)에 둔을 쳐서 (서쪽의) 장준張駿과 양난적楊難敵을 대비케 하여놓고 자신은 중외中外329)의 정예 수・륙군 모두를 이끌고 포판蒲阪을 구원하려 위관衛關330)에서 북쪽으로 하河를 건너자, 석호虎가 두려운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유요曜가 그를 추격하여, 8월에 고후高候331)땅에 이르러 석호虎와 싸워서 크게 이기고 석첨石瞻의 목을 쳤다. 널브러진 시체가 200여 리에 달하고, 수거한 물자와 병장기의 수효가 억億에 다다랐다. 석호虎가 허둥지둥 조가趙歌332)로 도망하자, 유요曜가 대양大陽333)에서 하河334)를 건너 석생石生335)을 금용金墉336)에서 공격하며 천금알千金堨337)을 터뜨려 금용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눠보내서 급군汲郡338)과 하내河內339)를 치니, 후조後趙 형양滎陽340)태수 윤구尹矩와 야왕野王341)태수 장진張進 등이 모두 항복하여, 양국襄國342)이 크게 흔들렸다. (후조) 장준張駿이 군대를 추슬러서 허를 찔러 장안長安을 치려하였으나, 이조낭중 색순索詢이 말리기를 “유요劉曜가 비록 동방정벌을 나섰어도, 그 아들 유윤胤이 장안長安을 지키고 있으니, 가벼이 보아선 아니 됩니다. 설령 얻는 것이 좀 있겠다 싶어도, 저들이 동방정벌을 그치고 돌아와서 우리와 맞붙는다면, 그 화난禍難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라 하여, 장준張駿이 장안탈취를 그만두었다. 11월, 후조後趙왕 석륵石勒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락양洛陽을 구원하려 하자, 신하 정하程遐 등이 굳게 막아서서 간하길 “유요劉曜의 군대는 천리를 떠나 있어서 그 군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몸소 움직이심은 온당치 않고, 움직이시면 만전을 기할 수 없사옵니다.”라 하매, 석륵勒이 대노하여 칼을 잡고 정하遐 등을 질책하여 밖으로 내쫒더니 이어서 서광徐光을 풀어주고 불러들여 이르길 “유요劉曜가 한 번을 싸워 이긴 것으로 락양洛陽을 둘러싸서 지키고 있소.343) 용렬庸劣한 이의 정리情理로야 그들의 사기가 예리함을 들어 당적하기 불가하다 하겠으나, 유요曜가 십만 갑병甲兵을 펼치고서도 성城 하나를 100일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고 있으니, 장수들도 지쳤을 것이고 병졸들도 나태해졌을 것이오. 우리가 초기의 예리함으로 그들을 쳐서 한 번 싸움에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락양洛陽이 함락되면 유요曜는 필시 죽어서 기주冀州344)로 보내질 것이며, 그가 황하河에서부터 북쪽을 석권席卷하여온다면 내 거사는 끝장이오. 정하程遐 등이 내가 일을 내지 않길 바라고 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고?”라 하니, 대답하여 아뢰길 “유요가 고후高候345)땅에서 이기고서도 양국襄國으로 진격하여 차지하지는 못하고 다만 금용金墉을 지키는 신세로 바뀌었습니다. 이로써 그의 무능함을 알 만 한 것입니다. 대왕의 위세 있는 책략으로 맞붙으시면, 그들은 필시 대왕의 깃발을 보자마자 도망하여 패할 것입니다. 천하를 평정함이 이번 한 번의 거사에 달렸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되십니다.”라 하매, 석륵勒이 웃으면서 “서광光의 말이 맞다.”라 하고 내외에게 엄히 일러서 말리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노라 하였으며, 석감石堪과 석총石聰 및 예주豫州346)자사 도표挑豹 등에게 명하여, 각자 눈에 보이는 무리들을 모조리 이끌고 형양滎陽으로 집결케 하였다. 석호石虎는 진격하여 석문石門347)을 거점으로 잡아놓았고, 석륵勒은 자신이 보병과 기병 4만을 통솔하여 금용金鏞으로 방향을 잡아서 대알大堨에서 물을 건넜다. 석륵勒이 서광에게 이르길 “유요曜는 병력을 성고관成皐關348)에 집결하는 것이 상책이고, 낙수洛水349)를 막는 것이 차선인데, 락양洛陽에 눌러앉아 지키고 있으니 사로잡힐 것이야.”라 하였다. 12월, 을해일, 후조後趙의 모든 군대가 성고成皐350)에 집결하였다. 보졸 6만에 기병 2만 7천이었다. 석륵勒이 전조趙의 군대에 망을 보는 병사가 없음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금 이마에 손을 모으고 “하늘이 돕는다.”라 이르더니, 갑옷을 벗어 가볍게 무장하고 말 입에 재갈을 물려서 험한 길을 재촉하여351) 공鞏352)・자訾353) 사이로354) 출진出進하였다. 전조趙왕 유요曜는 오로지 폐신과 함께 술 마시며 도박하기에 정신을 팔고 장수와 병졸들을 위무하지는 않았다. 좌우左右들이 혹여 말리면, 유요曜가 화를 내고 요망스런 말이라며 목이나 치더니, 석륵勒이 이미 황하河를 건넜다는 소리를 듣고서 형양滎陽수비군을 늘리고 황마관黃馬關355)을 틀어막을 논의를 하였다. 잠시 후에 락수洛水땅 척후候라는 자가 후조後趙전봉과 교전하여 갈羯356)인을 붙잡아 보냈더니, 유요曜가 묻기를 “대호大胡357) 자신이 왔다고? 무리는 얼마나 되는가?”라 함에, 갈羯이 답하길 “왕이 친히 오셨고, 군세가 아주 성합니다.”라 하매, 유요曜가 낯빛이 변하더니 금용金墉358)을 에워싸서 지키던 군대를 끌어다가 락하洛河 서쪽359)에 진을 쳐서 10만 군사를 남북으로 10여리를 깔아놓았다. 석륵勒이 건너다보더니 더욱 즐거워하며 좌우들에게 이르길 “나를 축하해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석륵勒이 보병・기병 도합 4만을 이끌고 (洛水南路로) 락양성洛陽城으로 들어갔다360). 기묘일361), 중산공中山公 석호虎가 보졸 3만으로 성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전조趙 중군中軍을 치고, 석감石堪・석총石聰 등이 각기 정예기병 8천씩을 거느려 성 서쪽에서 북쪽으로 조趙군의 전봉을 치매, 서양문西陽門362)에서 크게 싸움이 벌어졌고, 석륵勒은 친히 갑주甲冑를 걸치고 창합문閶闔門363)을 나서서 협격挾擊하였다. 유요曜는 어릴 적부터 술을 좋아하였고, 말년엔 더욱 심해서, 곧 싸움이 벌어질 판인데도 여러 말의 술을 들이켰고, 늘 타던 붉은 말이 까닭 없이 오그라져 있어서 작은 말을 올라타고 싸우러 나갈 듯하더니, 다시금 한 말 여의 술을 더 마셨다. 서양문西陽門에 이르러서 군진을 지휘하여 평평한 곳으로 나아가매, 석감石堪이 이를 기회로 잡았더니, 전조趙군은 와르르 무너졌고, 유요曜는 정신이 오락가락 취하여서 뒤로 내빼다가 말이 돌로 만든 수로에 빠지자 빙판에 나뒹굴었다. 열 군데를 다치고 깊은 상처가 셋이어서 사로잡혔다. 이윽고 석륵勒이 전조趙군을 크게 쳐부수면서 5만 여의 목을 베더니, 하명하여 이르기를 “사로잡을 놈은 하나였고, 지금 이미 그 놈을 붙잡았소!”라 하고, 장수와 병사들을 타일러서 예봉을 거두게 하고 (적들이) 명령에 귀복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유요曜가 석륵勒을 바라보고 말하길 “석石왕은 「중문지맹重門之盟364)」 깨나 기억하는 것 아닌가?”라 하니, 석륵勒이 서광徐光으로 하여금 그에게 말을 전하길 “오늘 일은 하늘이 그리 한 것이니, 다시 말해 무엇 하겠소?”라 하였다. 을유일365), 석륵勒이 군대를 돌리고, 정동장군征東將軍 석수石邃에게 명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유요曜를 에워싸서 호송하게 하였다366). 석수邃는 석호虎의 아들이다. 유요曜는 상처가 심하여 마차에 태우고, 의원 이영李永이 함께 타게 하였다. 기해일367), 양국襄國368)에 당도하여 유요曜를 영풍永豐369)의 작은 성에 가둬놓고 그의 기녀와 첩을 넣어주고서 군병으로 엄히 지키게 하였다. 유악劉岳・유진劉震 등 따르던 남녀들을 성장盛裝시켜 보내서 그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유요曜가 말하길 “나는 경들이 회토灰土370)로 된 지 오래인 줄 알았는데, 석石왕이 어질고 후하여 온전하도록 용서하여 금일에 이른 것인가? 나는 석타石佗를 죽이고서 매우 부끄러운 것이 많았소. 오늘날 당하고 있는 화禍는 그 때문이오.”라 하고서, 머물며 종일토록 먹고 마신 연후에 돌아가게 하였다. 석륵勒이 유요曜로 하여금 유희熙에게 글로 써서 속히 투항하게 타이르라고 하였더니, 유요曜는 다만 유희熙와 모든 대신大臣들에게 이르길 “사직社稷을 새로이 닦으라. 나 때문에 뜻을 바꾸지 말라.”고 조칙詔勅하자, 석륵勒이 그것을 보고서 그를 오래도록 미워하더니 끝내 유요曜를 죽였다. [다음 해 춘정월에] 유요曜의 아들 희熙가 이 소식을 듣더니 두려움이 큰 나머지 장안長安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 형 윤胤과 함께 상규上邽371)로 도망하였다. 정벌해서 얻었던 모든 진鎭들도 지키길 포기하고 희熙를 따라나서서, 관중關中땅이 크게 어지러워졌더니, 장군 장영蔣英과 신서辛恕가 무리 수십만을 끌어안고 장안長安에 머물며 사람을 보내서 석륵勒에게 항복하매, 석륵勒이 석생石生에게 명하여 장안의 무리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320) 資治通鑒을 參照해 「與」字를 揷入해서 바로잡음.
321) 重要한 國政들
322) 後趙中山公
323) 濟源南隣只城鎭
324) 前趙
325) 山西省西南端
326) 山西省西南端永濟縣之境? 陝西省蒲邑蒲城之境?
327) 渭水涇水間?
328) 鳳翔府邢陽南隣古秦州? 秦天水郡地?
329) 都城인 長安城 內外
330) 潼關?
331) 山西西南部 鳴條安邑之境. 或曲沃西隣高渠候馬之境? 黎城이黎候라면高平이高候?
332) 東流黃河 北邊 河南省 汲縣 東北의 淇縣?
333) 孟津只城(軹城)間之境? 原武新鄕間 東大陽堤?
334) 黃河
335) 後趙 洛陽守將?
336) 孟津南洛河邊之境?
337) 洛河下流北岸堤防
338) 衛輝之境汲城?
339) 沁陽則懷慶之境?
340) 河南省 鄭州 西隣
341) 河南省 黃河北邊之境? 野玉?
342) 山西省 襄垣? 河北省 邢台?
343) ☞洛陽城中은 後趙軍
344) ☞臨汾平陽? 劉曜故鄕? 山西 太岳之境?
345) 山西省西南部鳴條安邑之境? 山西省高平市之境?
346) 必是滎陽隣近也
347) 軹城西方洛陽北方河北王屋鎭東隣石村? 今山西省運城市垣曲縣石門鄕之境?
348) 滎陽西隣汜水鎭之境?
349) 洛河
350) 滎陽市上佳區之境?
351) 적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여 보통의 두 배 정도 빠르기로
352) 洛河注入黃河處邊
353) 翟鎭? 芝田鎭?
354) 今偃師市之境
355) 今滎陽西隣小關? 虎牢關隣近?
356) 羯族 後趙軍
357) 石勒
358) 金鏞,孟津南隣洛河邊
359) 瀍水以西? 孟津偃師間以東?
360) ☞洛陽城中은 後趙軍, 洛陽城 바깥은 前趙軍
361) 成皐 集結 後四日
362) 洛陽城 西中門
363) 洛陽城 西北門 또는 宮城南門
364) 남몰래 한 盟誓? 門衆을 貴히 여기겠다고 한 盟誓?
365) 滎陽에 集結한 後 十日
366) ☞後趙에 征東將軍이 있었다면, 征伐코자 한 東方이 어디였을까? 後趙의 都邑 襄國이 現世의 河北省 邢台則邢臺라면, 혹 新羅나 百濟와의 갈등관계는?
367) 洛陽에서 班師한 후 十四日
368) 後趙의 都邑. 山西省襄垣? 河北省邢臺?
369) 襄垣 史北鎭 間 甯城之境? 大陸澤 泜河 間 隆平?
370) 屍體가 태워진 재灰나 흙土
371) 長安보다 西쪽인 秦 天水郡之境
●三十年己丑,二月,于小后生琳太子.于卓子達之女也.達,乙太后出故,上寵愛之納其女潛爲宮人,至是生琳,封后. 東宮妃腆生子允.腆與其前夫再逢宻通而生故,皃猶於逢,周后欲廢腆.上以乙太后命,不許.東宮亦庇腆而諫其母周后曰“允猶我.母,何疑之.” 三月,左輔松巨病免,乙良代之.良以乙太后弟,治北部二十余年,德化行焉.入相百日而薨,年六十三.其妻,于豊妹也.以貞潔自守,見良之沒而恐失節而殉之.時俗,三輔之妻以上命継為輔室者多故也.人言乙良之善政,多由於此夫人,云.只有一子一女,女為免柯妻.子恭以為無才而不仕,只祀祖神而畜牛馬羊,見人則恭之而已故,人不知其賢.靑見左輔. [夏四月,]372)晋,溫嶠373)死.王導374)爲政,自江陵至建康三千里,流民萬計,人心洶洶,如有外變內患之兆. 八月,曜子胤見長安将失,悔斬胡勳,帥衆數萬自上邽趣長安,隴東武都安定新平北地扶風始平諸郡戎夏皆起兵應之.胤軍于仲橋.石生嬰城自守,石虎帥騎二万救之.九月,虎破胤於義渠,胤奔還上邽.虎乘勝追擊,枕尸千里,上邽潰,執熙胤及[其]375)将王公卿校以三千余人皆殺之,進攻秦隴悉平.氐王蒲洪羌酋姚弋仲俱降于虎.虎納劉曜幼女. 初,隴西鮮卑乞伏述延居于苑川,侵幷鄰部,士馬彊盛.及曜亡,述延惧遷麥田而卒,子傉大寒,孫司繁相継. 賀蘭部及諸大人共立翳槐,紇那奔宇文部,翳槐質弟什翼健于勒. 吐延雄勇多猜忌,姜酋姜聦刺之.吐延不抽釼,召其將紇扢埿,使輔其子葉延,保于白蘭,[抽劍而死]376).葉延孝而好學,以爲禮以王父字爲氏,國號吐谷渾.
●30년기축(CE329), 2월, 우于소후377)가 림琳태자를 낳았다. 우탁于卓의 아들 우달達의 딸이고, 우달達은 을乙태후 소생이었던 까닭에, 상이 그를 총애하여 그의 딸 우잠潛을 궁인으로 거두었더니, 이때에 림琳을 낳으매 후后로 봉하였다. 동궁비 우전腆이 아들 윤允을 낳았다. 우전腆이 옛 남편 재봉再逢과 밀통하여 낳아서, 용모가 재봉을 닮았더니, 주周후가 우전腆을 폐하려 하자, 상이 을乙태후의 명이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동궁 역시 우전腆의 잘못을 덮어주며 말리기를 자기 모후 주周후에게 “윤允은 저를 닮았습니다. 모친께선 어찌 그리 의심하십니까?”라 하였다. 3월, 좌보 송거松巨가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을량乙良이 대신하게 하였다. 을량良은 태후의 남동생으로 북부를 20여 년 동안 다스렸는데, 덕德으로 감화시켰다 하였다. 들어와서 상相378) 자리에 100일을 있다가 63살에 죽었다. 그의 처는 우풍于豊의 여동생으로, 정숙하여 깔끔하게 자신을 지켰으며, 을량良의 죽음을 보더니만 정절을 잃을까 걱정하고 따라죽었다. 그 시절 풍속으론, 3보輔들의 처는 상의 명을 좇아 계속하여 3보輔의 내실이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을량乙良의 선정善政은 이 부인에게서 비롯됨이 많았다 하였다. 단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남겼다. 딸은 면가免柯의 처가 되었다. 아들 공恭은 재능이 없다 하고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조상신에게 제사나 올리며 소와 말과 양을 쳤으며, 사람을 만나면 공손하게 대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가 현자임을 몰라보았다. 청견靑見이 좌보가 되었다. [하4월]에 진晉379)에선 온교溫嶠가 죽자, 왕도王導가 정사를 위하여 강릉江陵380)에서 건강建康381)으로 3천리를 왔는데, 떠도는 백성이 만 명에 이르고 인심이 흉흉하여, 밖으로는 변란이 일고 안으로는 우환이 있을 조짐 같았다. 8월, 유요曜의 아들 유윤胤이 장안長安이 곧 떨어질 것을 깨닫고, 호훈胡勳의 목을 벤 것을 후회하였으며, 수만 무리를 이끌고 상규上邽382)를 떠나 장안으로 향하였더니, 롱동隴東・무도武都・안정安定・신평新平・북지北地・부풍扶風・시평始平383)군 모두384)의 융戎족・하夏족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뜻을 같이하였다. 유윤胤군이 중교仲橋385)에 다다르니, 석생石生386)이 성을 에워싸서 지키고, 석호石虎387)가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다. 9월에 석호虎가 유윤胤을 의거義渠에서 깨뜨리니, 유윤胤은 상규上邽로 도망하여 돌아갔고, 석호虎가 승승하며 추격하니, 누운 시체가 천리에 널렸으며, 상규上邽를 궤멸하고 유희熙와 유윤胤은 물론 장수들과 왕들 및 공경들과 교위들을 잡아들이니 3천이나 되었다. 모조리 죽이고서 진주秦와 롱주隴까지 진격하여 모두를 평정하였더니388), 저氐왕 포홍蒲洪과 강羌족 추장 요익중姚弋仲 모두가 석호虎에게 투항하였고, 석호虎가 유요劉曜의 어린 딸을 거두었다. 애초, 롱서隴西389) 선비鮮卑 걸복술연乞伏述延은 원천苑川390)에 살았었고, 인근 부락들을 쳐서 병합하여 군세士馬가 강성하였으나, 유요曜가 망하자, 걸복술연述延이 두려운 나머지 맥전麥田391)으로 옮겨서 살다가 죽고, 아들 녹대한傉大寒과 손자 사번司繁이 서로 대代를 이었다. 하란부賀蘭部392) 및 여러 대인들이 합심하여 예괴翳槐393)를 보위에 세우자, 흘나紇那394)는 우문부宇文部로 달아나고, 예괴는 동생 십익건什翼健을 석륵勒에게 인질로 잡혔다. 토연吐延은 포부는 크고 용맹하였으나 남을 시기猜忌함이 많아서, 강姜족 추장 강총姜聦이 칼질하여 죽였다. 토연이 칼을 뽑아들지 않은 채로 그의 장수 흘골이紇扢埿를 불러서 자기 아들 엽연葉延을 보좌하며 백란白蘭395)을 지키라 하였더니, [흘골이가 칼을 뽑아서 죽였다.] 엽연이 효성이 있고 열심히 학문을 하였었기에, 왕이었던 아비의 이름字을 씨氏로 삼는 것을 예의로 여겨서, 나라의 이름을 토곡혼吐谷渾396)으로 하였다.
372) 資治通鑒을 參照하여 揷入한다.
373) 東晋의 驃騎將軍・開府儀同三司・加散騎常侍・始安郡公. 始安忠武公
374) 王羲之의 伯父로 東晋의 社稷之臣. 晉元帝時名丞相으로 明帝와 成帝를 補佐함.
375) 資治通鑒을 參照하여 揷入한다.
376) 資治通鑒을 參照하여 揷入한다.
377) 南堂註釋曰 (于)莘妹(于)潛
378) 左輔
379) 東晋
380) 洞廷湖北方荊州府쯤
381) 現今南京市쯤
382) 秦天水郡地
383) 興平?
384) 渭水南北
385) 長安所在
386) 後趙
387) 後趙太祖
388) ☞前趙滅亡
389) 渭水最上流北岸之境
390) 甘肅省楡中之境?
391) 甘肅省天水市東南部麥积鄕?
392) 賀蘭山之境
393) 代烈帝
394) 代煬帝
395) 白銀市+蘭州市?
396) 在現今靑海省靑海之境
☯三十一年庚寅,正月,皇后東宮發陽公主如溫湯,上命東宮行政事于溫宮.東宮以長莫思爲左輔,靑見太輔以緣后妻之. 九月,石勒稱帝,遣使來貢,請共伐慕容.[賜]397)珠玉三事經籍匹段薬物百種. 十一月,遣尙能龍發于勒,致(左犭+右百)弓十張,而議討鮮卑.勒大喜,以宝馬一雙紅玉尺三柄靑錦段七疋,答之,曰“東方之事,唯王主之.西方之事,唯朕主之.” 羅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
☯31년경인(CE330), 정월, 황후・동궁・발양發陽공주가 온탕溫湯에 갔더니,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온궁溫宮에서 정사를 보게 하였다. 동궁이 장막사長莫思를 좌보로 삼았으며, 청견靑見을 태보로 삼고 연緣후를 처로 주었다. 9월, 석륵石勒이 칭제稱帝하더니398),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하고 모용慕容집안을 함께 토벌하길 청하매, 주옥珠玉 셋과 경적經籍 및 비단 필과 약물 100종을 [주었다]. 11월, 상능尙能과 룡발龍發을 석륵勒에게 보내서 맥궁㹮弓 열 자루를 건네주고 선비鮮卑토벌을 협의하였더니, 석륵渾이 크게 기뻐하며 보마宝馬 한 쌍과 청색 비단 일곱 필로 답례하며 이르기를 “동방東方의 일은 임금이 주재하시오. 서방西方의 일은 짐이 주재하겠소.”라 하였다. 신라羅가 벽골지碧骨池399)를 개통하였다[또는, 개척開拓하였다. 즉, 빼앗았다.]. 기슭(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397) 文脈上으로 必要하여 揷入한다.
398) 資治通鑒曰「勒乃稱大趙天王,行皇帝事.」
399) 당시 碧骨池가 全羅北道 金提에 있었다면, 百濟는 어디쯤이었을까?
☯三十二年辛卯,正月,石勒大宴我國使,以黃金緞送于周后.上笑曰“奴養虎于家中,其亡非朝卽夕,敢窺人家也.” 二月,上疾篤,召太子至前,授神釼400)曰“烽上無道,吾以次子得位.汝雖継我,無道則不徒失國亦難保身.無失宗戚之望而興軍民之怒.與汝母幷政,婦人多偏私易失,汝冝執中得正.勿與慕容爭利,固城守界.勿以土木勞民俾失農時.簿賦歛,而勧民以勤儉忠孝,養老敬賢,任才使能.雖或好色節而無過,以汝父為鑑可也401).葬冝儉實,無為玉棺金椁.埋以珍玩,使盜掘之.汝母鄕之山水甚好.冝葬我於美川石窟,待汝母之從我而合封.戒畢而崩,春秋五十四.周后抱東宮卽位於殯前,受三輔之朝.百官山呼於殯宮之庭.東宮哀號失音,周后止之,而不聽.周后命太輔靑見諫之,靑見奏曰“天子之喪,異於庻人.陛下今為萬民父母,不可以私毁身,忘棄天下.哀毁,小節,士人之行也.天子當飮酒食肉,娛以聲色,涵養浩氣,然後,可以臨大政決難事.”上素重靑見故,乃抑慟攝酒,勉從其請.周后命進絲竹而自與綠眼裸舞呈喜,諸妃次苐如之.上命却之,放聲大哭,口吐血淚.周皇后驚,救引入其室,經夜無音,腆妃亦不得入焉.慕容廆石勒聞大行之崩,皆遣使来吊厚送賻儀,上親接其使恪盡賓禮,使敀語其主曰“新君勝於旧君.”勒歎曰“乙弗有子其祚可久.予於愔愔,何.”盖其子弘懦弱,故不能安心也.上聞之,謂左右“奴以小技發身,敢自尊大不思賣奴之時,敢以其賤比我東明聖國.可不誅乎.我國,大位一定,不復二言.羯胡自相殘滅,非復人道.是固禽獣也.”
☯32년신묘(CE331), 정월, 석륵石勒이 우리 사신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고 황금과 비단을 [또는, 황금을 섞어 짠 비단을] 주周후에게 보내왔더니, 상이 웃으며 이르길 “놈402)은 집안에 범403)을 기르고 있어서 곧 망할 것인데, 감히 남의 집을 엿보는 것인가?”라 하였다. 2월, 상이 질환이 위독하여 태자를 불러 면전에 다가서게 하여 신검神釼을 넘겨주고 이르기를 “봉상烽上이 무도하여, 차자次子인 내가 보위에 올랐다. 네가 비록 내 뒤를 잇게 되었으나, 무도無道하면 나라를 잃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네 몸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척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군대와 백성들의 노여움도 키우지 마라. 네 어미와 더불어 정사를 살필 것인 즉, 여인네들은 사사로움에 치우침이 많아서 실정하기 쉬우니, 너는 응당 중심을 잡아서 올곧게 되도록 하여라. 모용慕容집안과는 서로 이익을 다투지 말고, 성을 든든히 하고 경계를 지켜라. 토목노역으로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고, 부렴賦斂(租稅)을 적게 걷고, 백성을 근검과 충효로써 가르치고, 노인을 봉양하고 현자를 공경하고, 재주 있는 이들을 임용하여 일을 감당하게 해라. 설사 호색하더라도 조신하여 지나치지 말 것이다. 네 아비가 일찍 죽게 된 것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장사葬事는 검소하고 실속 있게 치를 것이며, 옥관玉棺과 금곽金椁을 쓰지 말 것이다. 귀한 물건을 함께 묻으면 도둑들이 파헤치게 된다. 네 어미 고향 동네의 산수山水가 아주 좋으니, 의당 나를 미천美川석굴404)에 장사하고, 네 어미가 나를 따라오게 되거든 함께 묻어다오.”라 하여 타이르길 마치고 숨을 거뒀다. 춘추 쉰 넷이었다. 이에 주周황후가 동궁을 안아 일으켜서 시신 앞에서 즉위하여 3보輔들의 알현을 받게 하니, 백관들이 빈궁殯宮 뜰에서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동궁이 슬피 울부짖다가 목소리가 가라앉아서, 주周황후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주周후가 태보 청견靑見으로 하여금 말리게 하여, 청견靑見이 아뢰길 “천자天子의 상喪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르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만민들의 부모가 되셨으니, 사사로이 용체를 훼손하여 천하를 저버려서는 아니 되십니다. 몸이 야윌 만큼 슬퍼함405)은 대수롭지 않은 예절이며,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의 행실인 것입니다. 천자께선 응당 술과 고기도 드시고 성색聲色도 즐기시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하신 연후에 큰 정사에 임하셔서 어려운 일들을 처결하셔야 할 것입니다.”라 상주하니, 상이 평소에 청견을 중히 여긴지라 슬픔을 억누르고 술도 마시면서 그의 청을 좇으려 애를 썼다. 주周황후가 악기들絲竹을 들여서 자신이 록안綠眼406)의 무희舞姬들과 함께 라무裸舞를 추어서 즐겁게 해보려 하고, 여러 비빈들이 이어서 그 같이 하였더니, 상이 명하여 그러지 못하게 하고서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다가 구토하고 피눈물을 흘리매, 주周황후가 놀라서 상을 자신의 방안으로 들였는데, 밤이 다하도록 기척이 없었고, 전腆비 또한 그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모용외慕容廆와 석륵石勒이 대행의 죽음을 듣고서 모두 사신을 보내와 조문하고 부의도 후하게 보내왔다. 상이 이 사신들을 친히 맞이하고 삼가하며 빈례賓禮를 다하였더니, 사신들이 돌아가서 자기 임금에게 “새로 선 임금이 앞선 임금을 능가합니다.”라 하매, 석륵勒이 한탄하며 이르길 “을불乙弗은 아들이 있어 사직이 오래 갈 것이야. 나도 조용하고 평온하지만, 어찌 한다?”라 하였다. 대략 그의 아들 석홍弘이 나약하여 안심할 수 없었음이다. 상이 이를 듣고 좌우들에게 말하길 “놈들은 조그마한 재주로 천함을 벗어나더니, 감히 스스로를 존대尊大하며 「몸 팔던 시절」407)은 생각하지도 않고, 감히 그 비천한 것들이 우리 동명성국東明聖國을 견주고 있으니, 죽여서 없애지 않아도 되겠소이까? 우리나라는 대위大位(宝位)가 한 번 정해지면 다시는 두 말 하지 않는데, 갈羯408)과 호胡409)는 서로를 죽여서 멸하며 인간의 도리를 돌이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정말로 금수禽獸들이오.”라 하였다. ///
400) 南堂註釋曰「光明所傳其釼,或云最彘宝釼.」 그러나 芻牟鏡의 「太阿釼」일 수도...
401) 南堂註釋曰「上過勞得疾,故其敎如是.」
402) 石勒
403) 石虎
404) 美川大帝의 陵原은 仙潔의 딸인 周后의 故鄕인 馬山 땅에 있다는 말이다.
405) 哀毁骨立
406) 碧眼, 西域女人
407) 晉과 前朝 則 漢趙 등에 附庸하던 시절
408) 匈奴別族. 아마도 羊을 치며 살던 匈奴(末曷)인 듯.
409) 匈奴族(鮮卑族包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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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길지만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글 올리고 주석 달기가 무척이나 힙듭니다...휴우......
그러고 보니 어제 읽다가 주석을 볼려고 찾아봤었는데 없었네요...수고하셨습니다.
을불이 북쪽으로 도망하였다가 다시금 서남쪽으로 전전하여 최체 일원과 낙랑 일원에서 시간을 보낸 기간에 대한 기록이 을불대왕전에 전하고 있는데...
그 최체最彘는 산서성 곽태산 인근으로 여겨집니다. 소위 낙랑군고지 점제黏蟬 지역도 이 最彘의 동방 부근으로 여겨지니...
북한 땅 평양 낙랑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겠지요...
북한땅 평양이 낙랑이라고 주장한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우리역사를 반도에 우겨넣을려고 어거지를 쓰고 있는거지요.
수정할 곳입니다.
(1) 3년 기사의 주석 번호 수정해야 함. 27) 貫은 -> 28) 貫은, 28) 烽上帝紀 -> 29) 烽上帝紀 ' 29) 이 高句麗의 -> 30) 이 高句麗의 , 30) 乙弗大王傳은 -> 31) 乙弗大王傳은
(2) 3년 기사의 주석 31)은 삭제해야 함.
(3) 5년, ... 비류는 고이古爾의 서자로 -> 비류는 구수仇首의 서자로
(4) 九年戊辰, 春正月,平山大公仙潔薨 -> 春正月,馬山太公仙潔薨 {∵乙弗大王傳에는 馬山太公仙翁薨. 이라고 되어있으며, 三年壬戌, ..., 四月, 免大生王女訥氏, 加仙方爵馬山公, 仙翁爲馬山太公 이라는 기사가 있음.}
(5) 九年戊辰, ..., 五月,命朝文 -> 五月,命祖文, 5월, 조문朝文 -> 5월, 조문祖文
(6) 주석 76) 당시 子述의 樂浪은 二郡으로 되었음이라. -> 혹시 이 二郡으로 미루어 주석 74)의 其郡이 二郡이 아닐런지요.
(7) 十年己巳,春正月,大公尙宝薨 -> 十年己巳,春正月,太公尙宝薨, {∵乙弗大王傳에는 太公尙宝薨. 이라고 되어있으며, 七年 ... 王乃以<尙宝>爲太公이라는 기사가 있음}
(8) 주석 184) 乙弗大王傳曰 .... 旼乃其子也. -> 玟乃其子也.
"74)의 其郡이 二郡이 아닐런지요"에 대한 역자의 견해 역시 김 선생님과 같은 생각합니다.
(9) 十九年戊寅, ..., 椽[邦]右輔 -> 椽方右輔, 연방椽邦이 우보가 되었다.-> 연방椽方이 우보가 되었다.
{椽邦은 [중천대왕기]에 따르면 292년 3월 우보, 293년 1월 좌보, 294년 9월 태보를 지내고, 295년 4월에 58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椽方은 椽邦의 아들[봉상대왕기 2년, 2월 기사에 ‘邦子方畏使’라고 나옴]로 318년 3월에 우보, 320년 1월에 좌보, 322년 1월에 태보를 지내고 323년 7월에 죽습니다.}
(10) 睿卽皇位帝 -> 睿卽皇帝位
(11) 19년 무인 ... 하5월, 현도玄菟태수 -> 하5월, 현도玄菟소수
椽方과 椽邦;
제가 앞의 기록을 대조하는 것을 깜빡한 착오입니다. 고맙습니다.
'烽山大王紀'까지 살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12) 二十一年庚辰, ... 椽邦左輔, 談河右輔. 豊[邦]皆外戚大家. -> 椽方左輔, ,談河右輔.豊[方]皆外戚大家.
연방椽邦을 좌보, ... 우풍豊과 연방邦은 -> 연방椽方을 좌보, ... 우풍豊과 연방方은
{위 (9)번과 동일한 사유}
(13) 二十三年壬午, ... 椽邦代之 -> 椽方代之, 연방椽邦이 대신하고 -> 연방椽方이 대신하고
{위 (9)번과 동일한 사유}
(14) 二十四年癸未, 七月,太輔椽方薨, 7월, 태보 연방椽邦이 죽어서, -> 7월, 태보 연방椽方이 죽어서,
{위 (9)번과 동일한 사유}
(15) 26년(CE325)을유, ... 명림섭明臨涉을 우보 -> 송거{松巨}를 우보, 명림섭明臨涉을 서부우태
(16) 28년(CE327)정해 -> 28년정해(CE327)
(17) 29년(CE328)무자 -> 29년무자(CE328)
(18) 30년(CE329)기축 -> 30년기축(CE329)
(19) 진晉)에선 -> 하4월, 진晉)에선
(20) 三十一年庚寅, ... 東宮以長莫思爲右輔 -> 東宮以長莫思爲左輔, 동궁이 장막사長莫思를 우보로 삼았으며 -> 동궁이 장막사長莫思를 좌보로 삼았으며
{을불대왕전에는 좌보로 되어 있으며, 좌보이던 청견이 태보가 되어 좌보의 자리가 비었음.}
(21) 十一月, ... 致貊弓十張 -> 致㹮弓十張
(22) 31년(CE330)경인 -> 31년경인(CE330)
(23) 32년(CE331)신묘 -> 32년신묘(CE331)
몹씨 힘에 부치는 부분이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저보다 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