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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文明의 어머니 江
黃河流域 사람, 사람들!
<黃河(Huanghe 황허)를 거슬러 오르면서 ① ; 산둥(山東)
厚堂 고 광 창
황허(黃河 Huanghe 황하)
黃河는 시장(西藏-티벳)과 칭하이(靑海)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동쪽의 황허(黃海), 보하이(渤海 발해)까지 5,464㎞를 흐르는 중국에서 두 번째 긴 강이다. 河는 물이 적은 河川을 가리키는 일반 용어인데 黃河에서 河는 고유명사가 되어있다. 黃河는 물빛이 언제나 누런 황토색이어서 黃河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또 黃河는 강이 굽어지고 물길이 사납고 河床이 주위 제방 보다 높아 제방 붕괴로 풍수해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이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지혜가 발달하여 고대 4대 문명 중 하나인 찬란한 ‘黃河 문명’을 탄생시켰다.
黃河는 중국 문명을 싹틔운 곳이기도 하고 중국 문명을 꽃피우게 한 곳으로 중국 문명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黃河를 풍요의 상징인 ‘中國文明의 어머니 강’이라 부르고, 중국 사람들은 황금색을 좋아한다. 또 이 지역은 중국 정치의 중심무대로 중국 고대 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華中 또는 中原’이라 부른다. 여행기에 王朝 이야기가 많이 나오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여행기 머리에 ‘간추린 中國史’를 제시한다. (우리나라와 관련 된 부분 별도 표기)
黃河 유역은 기후 관계로 ‘밀’을 많이 재배하게 되므로 主食은 자연히 밀가루 음식일 수밖에 없는데 중국에서 만두(饅頭)는 보통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 된다.
① 만두소 없이 밀가루 반죽만으로 찐 꽃빵 같은 만터우(饅頭) - 만두
※ 만터우는 소를 넣지 않아 맛이 없다. 중국식당에서는 본 음식이 나오기 전 1~2개 그냥 준다.
② 만두소로 고기나 채소를 넣고 수증기로 쪄서 만드는 바오즈(包子) - 포자만두
③ 만두소로 고기나 채소를 넣지만 물에 데치거나 끓이는 자오즈(餃子) -교자만두
우리나라에서 만두는 ②, ③모두를 말함.
※ 간추린 中國史
<中國 王朝 흐름>
o夏 - o商 - o周 -o春秋戰國 - o秦 - o漢- o三國 - o晉 - o南北朝 - o隋 - o唐
o五代 - o遼 - o宋 - o金 -o元 - o明 - o淸 -o中華民國 -o中華人民共和國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기 때문, 오래 분열된 제국은 통일되게 마련이고, 오래 통일되어 있던 제국은 분열되게 마련이다.
<秦왕조> - BC 221 - 207
⦿ 秦始皇 : 13세 왕위 오름, 22세 親政, 수도 - 산시(陝西)省 센양(咸陽)
통일국가 건설,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단일화폐 , 법령 표준화, 도로와 운하망 건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독제, 칼로 정복하고 칼로 다스림 -법과 처벌에 의한 법치주의,
‘焚書坑儒’(분서갱유) - 자기 정책 비판 書籍 화형식
長城(만리장성) 건설 - 백성들 무리한 부역, 과중한 조세 부담
兵馬俑 갱 축조 - 무리한 부역, 비밀 보장 위해 설계자 및 기술공 생매장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 - 진나라 2대 15년 만에 막을 내림 ⇒ 유방의 漢나라.
※ 'CHINA' 의 語原 - 서양세계에서 중국(秦 CHIN ⇒'CHINA)을 가리키는 말
‘印度支那 반도’에서 ‘支那(秦)’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 ‘’
<漢왕조> BC 206 ~ AD 220
⦿ 劉邦 (유방)
漢나라 초대 황제, 농부의 아들, 秦의 하급관리로 출발,
秦始皇제 사망 후 모반을 일으켜 ‘항우’를 누르고 황제에 오름
통치체제는 秦나라 제도 답습, 諸侯王은 漢族에 한함. 王朝의 기초 튼튼히 함
⦿ 漢武帝 (BC 140 - BC 186년)
7대 황제, 儒學을 국가지도 사상으로 정함
영토 화장(북•동쪽) - 북부지역 장악, 흉노족 몰아냄.
(서쪽) -중앙아시아와 연결, 중국의 비단을 로마까지 전해주는 비단 길을 열었다. 비단길을 西는 로마, 東은 장안까지 연장하여 무역 활성화, 과거제도 도입, ‘사마천의 史記
※ 우리와 漢나라의 관계 - 고조선 멸망시킴, 고구려 땅에 漢四郡 설치
<三國시대> AD 220~280
漢나라 몰락으로 뒤이어 나타난 3國 - 魏, 蜀, 吳(明代 소설가 나관중 ‘삼국지연의’) 참고
o 魏 (AD 220- 265) 黃河 유역 뤄양(洛陽), 조조, 5대 45년간, 晉(진)나라에 멸망
o 蜀 (AD 221 -263) 四川省 청두(成都), 유비, 2대 42년간, 晉(진)나라에 멸망
o 吳 (AD 229 -280) 長江하류 난징(南京) 손권 4대 52년간 晉(진)나라에 멸망
<晉왕조> AD 265 -420
晉武帝 司馬炎이 魏나라를 전복시키고 산시(山西)省에 세운 나라, 三國을 統一, 草書의 거장 王羲之활약, 司馬炎 사망 후 지방 토호세력으로 나뉨 ⇒ 남북조시대
<南北朝> AD 420 -589
南朝 - 宋, 齊, 梁, 陳
北朝 - 北魏, 東魏, 北齊, 西魏, 北周
<隋왕조> AD 581 -618
漢나라 멸망 후 분열된 나라를 양견(楊堅 초대 文帝)이 통일하고 隋나라 세움,
南北을 잇는 대 運河건설, 술과 여인, 歌舞에 넋을 빼앗김, 隋왕조는 2대 37년간이다.
※ 우리와 隋나라의 관계 - 고구려 정벌 나섰으나 을지문덕 장군에게 3번 거듭 패하며 국력 손실,
<唐왕조> AD 618 -907
唐태조 이연(李淵)이 왕조 건설. 중국 文化 隆盛期, 이백, 두보, 백거이 등 시인들이 중국 詩문학의 꽃을 피움, 승려 ‘玄獎’이 인도 다녀온 이야기는 소설 ‘西遊記’출간, 무거운 과세와 잇따른 재해로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황소(黃巢)의 난 등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唐 왕조 무너짐.
※우리와 唐나라의 관계 - 唐太宗은 2대 왕으로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패함. 태종 사망 후 648년 나•당 연합군 조직,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 차지,
<5代 10國> AD 907 -960
唐나라가 몰락하고 宋나라가 세워질 때까지의 분열된 혼란의 시기를 5代 10國이라 함.
o 5代 : 황하 유역에 5왕조가 차례로 들어 섬- 後梁⇒ 後唐⇒ 後晉⇒ 後漢⇒ 後周
o 10國 : 남쪽의 작은 10개국
※ 만주족 : 만주 지역에 살았던,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의 총칭. 거란족은 遼나라, 여진족은 金나라, 淸나라를 건설했고, 말갈족은 渤海를 건설했음.
※ 千里장성 : 고려 때 만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원산에서 신의주까지 쌓은 長城
<遼왕조> AD 907 -1125
거란족 ‘여율아보기’가 자기 부족을 통일하고 나라 세움. 지역은 만주, 내몽고, 黃河 북쪽,
※우리와 거란족과의 관계 : 고려 때 3차례 침입, 1차 서희 외교담판, 2차 양규의 방어,
3차 강감찬 귀주 대첩으로 몰아 냄, 1125년 金왕조(여진족)에 의해 멸망
<宋왕조> AD 960 -1279
문화국가를 표방하고 적극 지원하여 문화의 꽃 피움, 중국 문화 융성기 - 唐에서 이어 짐
종이와 인쇄술 발달, 대표적 문화인 - 사마광의 자치 통감, 朱子의 성리학, 시인 소동파
※우리와 宋과의 관계 - 도자기 제조 기술과 성리학을 우리에게 전해 줌
o 北宋 ( AD 960 - 1127) 카이펑
後周가 망하자 태조 조광윤이 카이펑에 나라 세움, 1127년 金(여진족)나라에 정복 당함
o 南宋 ( AD 1127 - 1279) 항저우
북송의 왕자 고종이 항주로 내려와 세운 나라, 1279년 元(몽골족)에게 정복 당함.
<金왕조> (AD 1115 - 1234) 카이펑, 베이징
여진족 ‘아구다’가 세움, 北宋을 정복했으나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의해 멸망
※ 우리와 여진족과의 관계 - 여진족이 고려를 침략하자 고려 윤관이 9성을 쌓아 방비함.
<元왕조> (AD 1206 - 1368) 베이징
몽골족 징기스칸의 손자 ‘후빌라이칸’이 세움, 대운하 완성, 군사력은 왕성했지만 정치와 경제적 능력 미숙,
※ 우리와 元나라와의 관계 -君臣의 관계 강요, 고려 왕세자와 원나라 공주 강제 결혼, 紅巾賊의 亂-우리나라에 2차례 침입,
<明왕조> (AD 1368 - 1644) 난징, 베이징
漢族 주원장이 난징에 세움, 베이징으로 수도 옮김, 영락제 때 전성기, 만리장성 1,000㎞ 연장, 미국과 무역 거래, 환관세력에 휩쓸려 당파싸움으로 몰락 자초
<淸왕조> (AD 1644 - 1911) 베이징
滿洲(여진)족, 滿洲족의 漢族化- 만주족은 흔적 없이 사라짐.
끝없이 이어지는 농민 반란과 1911년 순원(孫文)이 일으킨 신해혁명으로 淸왕조 멸망
※ 우리와 淸과의 관계 - 君臣관계 강요, 2차례 침입, 부녀자 50만 명 강제로 데려 감.
‘아비 없는 胡來(호로?)자식’출산 (胡는 만주족이나 교양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 ⇒ 사회 문제화
<중화민국> (AD 1911 - 1949) 베이징, 난징
장제스(蔣介石)가 순원(孫文)이 세운 임시정부를 인계 받아 국민당 정부 세움, 국•공내전에서 실패하고 타이완(대만)으로 이주
※ 우리와의 관계 ; 우리 임시정부 활동 지원
<중화인민공화국> (AD 1949- 현재) 베이징
마오쪄둥(毛澤東)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1949 10.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 우리와의 관계 ; 6•25전쟁 때 북한을 도와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 중공군
1. 산둥(山東 Shandong)
‘山東’이란 地名은 타이항산(太行山 2,882m)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山東은 黃河의 하류 지역으로 농토가 비옥하고 産物이 풍부해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① 한국 중소기업체의 공장지대 산둥반다오(山東半島)
② 중국 5岳 중 으뜸인 타이산(泰山)
③ 쿵즈(孔子)의 유적지 취푸(曲阜 곡부)
④ 멍즈(孟子 맹자)의 고향인 쩌우센(鄒顯 추현)
(1) 한국 중소기업체의 공장지대 산둥반다오(山東半島)
중국 지도를 보면 山東半島는 전남•북 크기의 1.5배나 되는 땅이 우리나라를 향해 쭉 뻗어 나온 半島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가는데 선착장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 반도에는 3개 市가 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순서로 말하면, 웨이하이(威海), 옌타이(煙臺), 칭다오(靑島)등 이고 모두 다 港口가 있는데 웨이하이와 옌타이는 북쪽에 있고 칭다오(靑島)는 남쪽에 있으며 不凍항이다. 地理적 특성상 우리나라와 가까워 예로부터 많은 교류가 있었다. 통일신라 때는 당나라와 교역을 했는데 그때 신라인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여 ‘신라방’이라 한 적이 있었고 1980년 쯤 부터는 이곳에 1,000여 개가 넘는 우리 기업체들이 들어와 한 때 우리국민 상주인구가 8만 명이 넘는 때가 있어 이곳을 ‘코리아 타운’이라고 했다. 지금 일부 기업체들은 베트남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지만 아직도 칭다오(靑島), 옌타이(煙臺), 웨이하이(威海)에는 우리 기업체가 많이 남아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중소 기업체들이 이곳에 공장을 많이 세워 산동반도는 ‘한국의 공장’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회사 본사는 물론 한국에 있지만 원료비, 인건비, 운송비 등이 저렴한 관계로 산동반도에 공장을 세워 운영하는 것이다. 또 일부 농산물 업체는 중국산을 구입하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하여 생산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기업체 직원 자녀교육을 위해 한국인 학교가 웨이하이(威海), 옌타이(煙臺), 칭다오(靑島)에 모두 있다. 또 조기 외국어교육 바람을 타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留學오는 학생이 많고, 우리나라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비행시간도 짧고(1시간) 항공료도 저렴하여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행객들의 關門이고 요즘 해외로 골프 치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산동반도는 우리에게 이웃처럼 아주 친숙한 곳이다.
이곳은 黃河의 하류지역으로 땅이 비옥하고 경지 면적이 넓어 밀, 면화, 땅콩, 옥수수, 고구마 등을 많이 생산하고 있고 특히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수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농작물을 집단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농작물이 우리나라 가정 장바구니를 채워준다고 한다. 반도는 3면이 바다인 관계로 어업이 발달해 있는데 불명예스럽지만 우리나라에 와서 불법 조업을 하는 배들 대부분이 산동성 어선들이라고 한다.
칭다오(靑島)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海岸 도시이고 휴양도시로 유럽풍의 붉은 지붕이 異國的인 정취를 풍겨 ‘중국 속의 유럽’이라고 불리 우는 곳이다. 고운 백사장과 끝없이 펼쳐진 海邊이 칭다오의 寶石이라 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칭다오는 중국에서 4번째로 큰 항구이고 산둥성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淸 왕조시대 義和團(의화단- 반 기독교단체)에 의해 독일 선교사 2명이 살해되자(1898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99년간 독일 조차지로 내주게 된다. 독일은 이곳에 맥주 공장을 세우고(1903년), 해군기지도 만들고 지난(濟南 제남)까지 철도를 놓아주고 서양문물을 전해 주었다. 독일은 지금도 맥주공장 시설의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 칭다오 맥주는 뮌헨 박람회에서 金상을 받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다.
이 공장을 2001년에 박물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는데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해 아쉽지만 볼 수 없었다.
아름다운 해변을 보러 바닷가로 나갔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때 요트 경기가 열린 바닷가다. 널따란 퇀다오 灣에서 앞을 바라보니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들어 시원스럽다. 그 부근은 新시가지라 일컫는 곳으로 높은 빌딩이 이 많고 시가지 중심에 5•4광장이 있다.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에 反일본, 反제국주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학생 운동이다.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일본이 그동안 독일이 가지고 있던 칭디오에서의 기득권을 일본이 차지하려고 하자 베이징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반대 시위를 벌였고 이 운동이 칭다오를 비롯하여 중국 전역에 번지자 1922년 일본이 이를 포기하고 물러가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5•4광장을 설치하고 그 광장에 5•4운동 상징물로 20m 높이의 횃불을 만들어 놓았다.
舊시가지 앞은 칭다오 灣인데 灣이 넓고 C자형으로 안으로 굽어져있다. 여기가 칭다오 항구다. 등대, 전챠오(棧橋 잔교)등 제법 볼거리가 많다.
칭다오 灣 동쪽이 후이취안 灣이고 제 1해수욕장이다. 부근에 있는 ‘바다관(八大關)’은 도로가 8개로 나누어지는 곳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휴양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외국 대사나 영사 또는 기관 요원들이 휴양시설을 지으면서 자기나라의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 놓았기 때문에 20여 개국의 서로 다른 양식의 건축물이 한데 모여 있어 세계 건축물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러 나라 건축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여기까지 왔으나 ‘바다관(八大關)’의 휴양시설에서 해수욕을 하면서 며칠 푹 쉬어가고 싶다. 나는 내 건강의 반도체는 여행(국내외 여행 모두)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은 신체적 건강은 물론 정신적 건강까지 챙겨주기 때문이다.
후이취안 灣 동쪽이 타이핑 灣이고 여기가 제2 해수욕장인데 제1 해수욕장보다 더 깨끗하고 하얀 모래 입자가 아주 예쁘다. 또 그 동쪽으로도 C자형 灣이 계속 이어져 총 6개의 灣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고 해변에 죽 늘어 서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저녁 때 칭다오항구에 가 보았다. 인천과 칭다오를 1주일에 3번씩 왕래한다는 큰 선박이 정박해 있고 일부 상인(보따리 장수?)들이 짐을 싣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인천에서 칭다오까지 16~17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이곳에서 저녁 무렵에 출발하면 내일 아침 인천에 도착한다고 한다. 상인들은 이곳에 올 때는 이곳에 필요한 화장품 같은 것을 사 가지고 오고 갈 때는 이곳 각종 농산물과 식자재를 사 간다고 한다.
칭다오의 먹거리는 단연코 육즙이 가득한 만두 샤오룽빠오즈(小龍包 작은고기만두)다.
웨이하이(威海)는 ‘두려운 바다’란 뜻인데 반도의 맨 끝에 있어 이런 지명이 붙은 것 같다. 淸나라가 아편전쟁에 져서 한 때 웨이하이를 잠간 영국에 租借地로 넘겨준 일이 있었는데 영국이 스스로 조차지를 내 놓고 가버려 지금은 영국의 지배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워 우리나라 기업체가 가장 많고 식당에 한글 메뉴판을 비치한 식당이 있을 정도다. 여기서 인천까지 다니는 배가 있는데 칭다오보다 1시간 적게 걸리므로 우리나라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통일신라 때 지은 불교 사찰인 法華寺가 있는데 이절 앞마당에 신라 장보고가 해적(왜구)을 물리쳐 준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있고 장보고 공원도 있다. 이걸로 보아 이곳이 신라 때 장보고의 활동 무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옌타이(煙臺)는 ‘煙氣나는 테라스’란 뜻으로 明나라 때 산에 늑대 똥으로 불을 피워 연기를 내서 어선에게 해적(왜구)의 침입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煙臺에는 ‘남산 72골프장’이 있는데 중국 국가대표들 지정 연습장일 정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우리나라 골프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펑라이(蓬來 봉래)는 옌타이에서 65㎞ 떨어져 있었다. 펑라이거(蓬來閣 봉래각)는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절벽 위에 올라 앉아 있고 지어진지 1,000년이나 된다고 한다. 중국 고대 전설인 八仙過海(팔선과해 - 8명의 선녀가 배를 타지 않고 자기가 가진 비법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너갔다)의 신화가 이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몇 십 년 만에 한 번씩 신기루(蜃氣樓) 현상이 일어나는데 2001년 7월에 발생한 신기루는 산동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혀 지금도 녹화된 화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黃河가 바다에 잠기는 모습, 즉 黃河의 끝자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黃河 하구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사의 설명에 의하면 黃河 물이 내려오는 곳 북쪽 바다는 푸른색인데 보하이(渤海)라고 하고 남쪽 바다는 黃색이어서 黃海라고 한다고 일러준다. 사진사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주면서 보라고 해서 보았더니 멀리 보이는 바다는 푸르게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바다는 누렇게 확실히 구분된다. 넓은 바다의 위쪽은 파란색 물감을 풀어 놓고 아래쪽은 황색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다. 自然이 만들어 낸 걸 작품이다.
펑라이(蓬來)에는 옥(玉)공예 가게가 있다. 중국 사람들이 玉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가게 안이 붐볐다. 또 펑라이(蓬來)수족관이 있는데 큰 수족관 속에 인어 4명이 들어가 큰 고기들과 함께 遊泳하면서 人魚쇼를 벌이고 있는데 관람객들의 박수도 많고 볼 만했다. 이 수족관을 중국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는데 내가 보기엔 별로다. 중국 사람들이 무엇을 표현할 때 세계 제일, 세계 최대 등 과장법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黃河의 종착지가 왜 黃海가 아니고 보하이(渤海 발해)일까? 중국에서 구입한 지도를 보니 따렌(大連 대련)에서 산동성의 웨이하이(威海 위해)까지 일직선을 그으면 그 안쪽은 보하이(渤海 발해)灣으로 되어있다. 즉 중국의 해군기지가 있는 텐진(天津 천진)항구 주위가 보하이(渤海 발해)灣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하이(渤海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서 우리나라 고대국가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옛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던 만주 일부는 우리 땅이므로 다시 찾아 와야 하다는 것이 우리 측 주장이다. 한편 중국 측 주장을 들어보면 지금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어 그 위쪽은 중국 땅이니만큼 고구려와 발해는 만주지역에 있었던 중국의 고대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원래 흑룡강 주변에 살았던 말갈족인데 거란족과의 싸움에서 밀리자 고구려에 망명해서 장수로 활동하다가 고구려가 망하게 되자 다시 말갈로 돌아간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과 함께 발해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발해의 주민들 대부분은 말갈족이고 대조영에 이은 발해 왕들도 모두 말갈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대동강 이북은 중국의 고대 국가인 발해와 고구려 땅이므로 중국에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바다 이름을 옛 고대국가 이름을 따서 보하이(渤海 발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2002년부터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東北工程은 東北3省(요녕, 길림, 흑룡강)에 대한 歷史적 연구로 우리나라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東北3省이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에 질세라 우리나라도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시켰다가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측 주장에 강력 대응하고 있다. 중국이 자기나라 소수민족인 ‘조선족 문화’라면서 ‘아리랑’과 ‘한복’ 그리고 옛 ‘고구려의 고분’ 등 유물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요청하자 우리정부가 외교적 체널을 통해 강력 반발한 바 있다.
이처럼 두 나라간 역사 전쟁은 역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음으로 이렇게 민감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두기로 한다.
칭다오(靑島)는 1898년부터 독일 조차지였고 웨이하이(威海 위해)는 1895년부터 잠시 영국의 조차지였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다른 지역보다 文明이 앞서가고 있는 곳이 되었다.
여기서 독일로부터 하나 배워가지고 간다. 대부분 식민지나 조차지를 가진 나라는 그곳에서 경제적 수탈을 해 가는 게 일반적인데 독일은 도로를 개설해 주고 맥주 공장을 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맛이 좋은 맥주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도 기술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니 참 고맙고 감사한 나라다. 우리는 옛날 우리를 지배했던 나라와 ‘이웃집 웬수’처럼 살고 있는데 ---
黃河의 종착지를 보았으니 여기서부터 발원지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 지난(濟南 제남)은 山東省의 省都인데 볼거리가 많지 않아 기록은 생략함.
(2) 타이산(泰山 1,545m)
1987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산이다. 타이산(泰山)은 5岳 중 東岳으로 중국의 老莊 사상가들이 신성하게 여긴 5岳 중 으뜸이고 세계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 중 ‘물(水)’에 해당한다고 한다. 아주 옛날에는 그 정상에서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국의 민족 종교인 道敎에서는 가장 중요시하는 山이다. ‘泰’자는 크다, 넉넉하다, 편안하다의 뜻을 가진 글자다.
내가 어렸을 적에 ‘걱정이 태산 같다’ ‘티끌모아 태산이다’라는 말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詩(다음에 이 詩의 저자가 양사언 이라는 걸 알았다)를 자주 들었는데 그때 나는 태산이 우리나라에 있는 아주 높은 산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드디어 여기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차를 이용하여 타이산(泰山)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난(濟南 제남)역에서 타이산(泰山)역으로 가는 일반 기차를 타고 간 후 타이산(泰山)역에서 내려 G3이라 쓰인 버스를 타고 가서 따미아오(大廟)에서 내린다.
다른 하나는 지난(濟南 제남)역에서 타이안(泰安)역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타이안(泰安)역으로가서 그곳에서 타이산(泰山)가는 버스를 탄다.(타이안역에서 타이산역까지 10㎞나 되므로 이 교통편은 권하지 않음)
중국 사람들은 평생 오르고 싶은 산 1위가 타이산(泰山)이고, 타이산을 보고나면 나머지 4岳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타이산(泰山) 예찬론을 펼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타이산(泰山)을 오르면 100살까지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데 100살은 너무 많으니 정상까지는 올라가지 말자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중앙 등산로를 이용해서 올라가기로 했다.
타이산(泰山)은 높이가 1,545m로 중앙 등산로를 이용할 경우 정상까지는 7.5㎞이고 계단이 6,660개나 된다. ‘천하 제일문’에서 부터 걷기 시작했다. 두 번째 관문인 ‘중덴먼(中天門)’까지는 2시간 정도 이야기 하면서 쉬엄쉬엄 올라 왔는데 중덴먼(中天門)에서 부터 정상까지 2시간은 고도차가 커서 옆 사람과 말도 못하고 씩씩거리며 걸었다. (※지금은 타이안역에서 중텐먼까지 미니버스가 다니고 중텐먼에서 정상까지는 케이블카가 놓여 있다고 들었다.)
세 번째 관문인 ‘난텐먼(南天門)’을 지나 본당인 ‘위황딩(玉皇頂)’까지 30분 정도 걸으면 텐디(天帝) 청동상이 있다. 드디어 오고 싶고 보고 싶던 泰山의 정상에 올라왔다. 내 힘으로 올라왔으니 가슴이 뿌듯하다.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선물로 가져 갈 수 있게 되었다. 타이산 등반 날짜는 내 인생에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할 날이다.
올라오기 힘들 정도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詩 내용처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가 아닌가? 사람들이 자기가 오르려고 노력하지 않고 산만 높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준 詩라는 걸 느꼈다. ‘人老腿先衰’란 말이 있다. 사람은 다리가 먼저 늙는다는 뜻인데 늙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부질없이 鍛鍊을 시켜야 함으로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좀 고되기는 하였지만 오늘 다리 단련은 잘 시킨 것 같아 흐뭇하다. 天帝 동상 앞에서 다시 한 번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큰 숨을 들이키고 나서 서서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타이산(泰山) 역에서 기차를 타고 공자묘(孔廟)가 있는 취푸(曲阜 곡부)역으로 갔다.
차를 탓는데 차속이 滿員이다. 서 있는 사람이 많은데 어떤 사람은 통로에 종이를 깔고 앉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좌석을 찾아가니까 거기에 앉아있던 젊은이들이 자리를 비껴주는데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 젊은이들은 아마 立席표를 산 것 같았다. 중국 교통기관 중 가장 싼 요금이 기차요금이다. 더구나 입석표는 더 저렴하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단다.
처음에는 만원 기차가 낯설었지만 옛날 우리도 만원버스를 탔을 때 車掌이 문을 못 닫고 開門 발차를 하고 통학생들이 타는 기차도 차타는 계단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타고 갔던 기억이 되살아나니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중국 일반 서민들 생활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3) 취푸(曲阜 Qufu 곡부)
지닝(濟寧)시에 있는 취푸(曲阜)는 중국 고대 儒學者 孔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고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孔子의 祠堂인 孔廟, 孔子의 집인 孔府, 孔子의 묘지인 孔林 등 三孔이 있는 곳이다. 취푸(曲阜)라는 地名은 ‘구부러진 언덕‘이란 뜻이다.
孔子(BC551~479)는 춘추전국시대에 西周의 諸侯國인 ‘魯’나라에서 태어난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孔丘였으나 賢人이 된 후 孔子로 불리게 되었다. (※ 중국에서는 賢人들에게 존칭의 의미로 姓씨에 ‘子’자를 붙여준다. 孔子, 孟子, 老子, 莊子, 朱子 --- )
孔子 사상의 핵심은 ‘仁’이고 교육 목적은 ‘君子養成’이다. 처음에는 자기 고장 관료로 들어가 좋은 정치를 펴 보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仁’에 의한 도덕 정치 실현을 위해 1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였지만 이번에도 좋은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당시 왕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서만 노력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5년 동안 자기 이론을 재정리하는 한편 교육을 통한 후진 양성에만 전력했다. 이때 제자가 무려 3,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하는 ‘德不孤必有隣’나 ‘過猶不及‘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진정한 앎은 자기가 얼마나 모른지 아는 것이다‘.’항상 謙遜하라! 謙讓과 親切은 곧 禮의 기본이다.‘ ’인간의 천성은 비슷하나 습관의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등은 모두 孔子가 한 말이다. 孔子가 살아생전에 남긴 書冊은 없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말씀을 모아 ‘논어(論語)’를 펴냈다.
중국에는 유학 입문서로 간편한 4書(대학, 중용, 논어, 맹자)와 수준 높은 5經(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이 있는데 4書의 대학과 중용은 5經의 禮記를 쉽게 풀어쓴 것이라 하고 孟子도 논어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졌음을 감안하면 4서5경은 모두 孔子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4서5경은 중국 대학교육 교재이고 관리에 등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 교재다. 흔히들 孔子를 儒敎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孔子는 儒學의 창시자다.
孔子의 死後 역대 왕조에서 뒤늦게 孔子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그의 업적을 기려 文宣王, 至聖先師 등 爵位를 내리는 한편 그의 후손들에게도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벼슬을 내리고 이 작위를 대대손손 세습케 하였으며 孔廟 부근을 賜牌地로 내려주어서 부근에 孔子후손들이 모여 살게 했다.
여기서 잠깐 중국 ‘文化大革命’(1966~70)이야기를 해야겠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쪄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정권을 잡았지만 덩샤오핑 등 일부 반대파 인사들이 이에 맞서 비판을 일삼자 마오쪄둥의 아내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마오쪄둥 지지자 4인방이 마오쪄둥을 비난하는 일체의 문화 예술 활동을 금지하는 문화정책을 폈는데 이를 文化大革命이라 하고 또 마오쪄둥을 지지하는 대학생들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행동 대원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紅衛兵이라 부른다.
文化大革命을 요약하면 ‘마오쪄둥이 중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前無後無한 인물이다’. ‘좋은 말씀은 ’마오쪄둥 語錄‘에 다 쓰여 있으니 다른 것은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마오쪄둥을 神格化 하려는 시도였으니 文化大革命의 중심은 당연히 지금까지 신격화되어 있었던 인물이나 귀중하다는 서적을 없애는 것이다. ‘네 가지 오래 된 것’(①오래된 관습, ②오래된 습관, ③오래된 문화, ④오래된 사고)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과 논어, 맹자 등 聖人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학술 서적 등이 불에 타 없어졌다. 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모방한 것이다. 문화혁명의 앞잡이들은 지금껏 神格化되어 있던 孔子 사상을 惡의 表象이라고 규정하고 孔子廟와 비석을 파괴하고 孔子 관련 유물을 불태웠다. 붉은 완장을 두른 홍위병들이 이곳 취푸(曲阜)까지 밀어 닥쳐 파괴하는 바람에 孔子의 유적도 많은 손상을 입었고 孔子후손들도 이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1976년 마오쪄둥 사망 이후 1980년대 이르러 문화대혁명의 誤謬에 대한 비판이 거세져 4인방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문화혁명의 핵심 인물인 장칭(江靑)은 사형을 언도 받았다가 사면되어 자택 연금 중 목매어 자살했다.
‘革命’이란 사회체제의 변혁을 뜻하지만 나쁜 체제를 좋은 체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거꾸로 좋은 체제를 나쁜 체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文化大革命’이란 이름 아래 중국의 귀중한 문화재와 보물이 다 불타 없어지고 파괴되었는데 이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美化할 수 있을까? 文化大革命으로 없어진 중국의 귀중한 보물과 문화재의 값어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다. ‘文化大革命’이 아니라 ‘文化대파괴’였다.
그 후 공산당 정부 지도자들이 국민들을 통합하는데 孔子의 가르침인 유교적 충효사상이 공산주의 지배 이데오르기와 잘 맞겠다고 생각했던지 ‘孔子 연구’ 붐을 조성하고 홍위병에 의해 훼손된 유적을 다시 복원하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孔子 사당이 문을 열었고 지금 취푸(曲阜)시 인구의 1/5은 孔子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럼 불타 없어진 귀중한 문화재는 어떻게 살려 내려고?
중국의 儒學者들이 儒學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서적이 모두 불타 없어져 버린 후 공자의 중요한 서적이 있는 곳을 搜所聞해서 퇴계 이황 선생의 생전 거처인 안동 陶山書院을 찾아와서 많은 부분을 복사해 가져가면서 유학에 대한 연구의 깊이 면에 있어서 한국이 중국을 앞서가고 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공자의 直系 가족이 도산서원을 찾아와 고맙다는 뜻을 碑石에 새겨서 도산서원 앞에 세워 놓고 갔다고 한다,
숙소를 찾아 한 호텔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 우리 교포(?)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 중국에서 ‘우리 교포’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내가 호기심이 많던 고교시절에 ‘在美교포’, ‘在日동포’, ‘在카나다 동포’라는 말이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데 ‘在中동포’라는 말은 왜 없을까하고 신문사에 전화했더니 자기들도 잘 모르니 외무부에 직접 전화해 알아보라고 한다. 내친김에 ‘외무부’에 전화로 문의 한 결과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미국은 원래부터 우리 교민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도중에 이민을 와서 살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동포라는 뜻으로 在美동포(교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원래부터 우리민족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국민이지 우리 동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在中동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 그럼 우리 조선족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았을까? 나라사이에 국경 개념이 없었을 때인 옛날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강가에 논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우리는 그곳을 間島라고 부른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 시대에는 만주지역까지 우리 땅이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 그곳에 많이 살았다. 그런데 국경이 압록강, 두만강으로 정해져 버리니 오가지도 못하고 거기에 머물다보니 중국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 침략을 하기 위해 세운 회사가 ‘東洋拓植회사’다. 이 회사에서는 농사짓기 용이한 충청, 경상, 전라도 지역에 일본 농부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 조상들에게 더 많은 토지를 준다고 꾀여 만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1909년부터 1933년까지 150만 정도가 만주로 강제이주 되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일부는 沿海州로도 갔는데 그 연해주가 소련(소비에트연방공화국) 땅이어서 소련 지도자 스타린이 그 곳 우리 민족 8여 만 명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그곳이 우주베키스탄과 그 주변 국가였다. 그 후 소련이 연방공화국을 해체하고 ‘러시아’가 되면서 각 나라들을 분리 독립시키게 되자 그곳에 살던 우리 민족 들은 점차 이웃나라인 동유럽까지 번져 나갔는데 오늘날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광주 광산구에 ‘고려인촌’ 마을이 있다.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곳이다.
호텔직원들이 우리말을 사용하니 무척 반가웠다. 다음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알바생 2명은 이곳 지난(濟南 제남)대학교 학생인데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선택하고 한국어를 익히기 위해 여기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알바생에게 한국어를 선택한 걸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제일 먼저 孔子의 祠堂인 쿵마오(孔廟)에 갔다.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니 祠堂의 면적이 16,000㎢로 아주 넓어서 놀랬다. 취푸시 중심가의 1/5을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정원에는 꽤 오래된 큰 소나무들이 있고 漢대에서 淸대에 이르기까지의 글씨들이 새겨진 1,000개가 넘는 石柱가 죽 늘어서 있다. 1724년에 지어졌다고 하는 다청덴(大成殿)은 흰 대리석 단 위에 31m 높이로 새워져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압도당했다. 唐代, 宋代 때 확장을 했고 明代에 와서 지금 모습으로 만들어 졌는데 중국에서는 황제 왕궁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 가면 쿵마오(孔廟)를 흔히 볼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이 중국을 넘어 이웃 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孔子는 中國과 동의어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졌다.
孔子의 집인 쿵푸(孔府)는 쿵마오(孔廟) 바로 옆에 있는데 중국에 있는 가장 귀족적인 집으로 孔子의 長子, 長孫들이 代를 이어가면서 정부에서 작위도 받고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공자의 후손들이 귀족처럼 왕족처럼 엄청난 특권을 누려왔다는 증거였다. 규모도 무척 컸다. 침실, 객실, 식당, 조리실, 욕실 외에 일하는 종업원 생활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孔子의 무덤이 있는 쿵린(孔林)은 국가에서 하사한 땅에 만든 중국 최대의 인조공원이고 가족 공동묘지다. 10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와 편백이 200헥타르 면적을 덮고 있고 쿵린을 둘러싼 벽의 길이가 10㎞다. 지난 2,000년간 孔子와 그 후손들이 이곳에 묻혔다. 묘지가 넓어 걸어서 다니기가 어려우면 골프용 카트를 이용하면 빨리 돌아 볼 수 있다. 관심 있는 孔子의 무덤을 가 보았다. 무덤은 소박하게 낮은 봉분에 낮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무덤에 상당히 큰 이름 모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왜 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놔두었을까? 많은 관광객이 孔子의 무덤을 보러 오는데 ---
(4) 멍즈(孟子 맹자)의 고향인 쩌우센(鄒顯 추현)
취푸(曲阜)에서 남쪽으로 23㎞ 떨어진 곳에 멍즈(孟子 맹자)의 고향인 쩌우센(鄒顯 추현)이 있다. 멍즈(孟子 BC372~289)는 孔子의 손자 ‘子思’로부터 배웠고, ‘子思’는 또 孔子의 제자인 ‘曾子’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孔子-曾子 -子思- 孟子 까지 4대를 儒學의 한 학파로 분류되고 있는데 특히 孟子는 儒學의 많은 개념들을 발달시켜 후대에 儒學이 이해되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쩌우센에는 孟子의 사당인 멍마오(孟廟)와 孟子의 집인 멍푸(孟府)가 있었는데 멍푸에는 ‘孟母 三遷之敎’의 주인공인 孟母가 베틀위에 앉아 베 짜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孔子 사당은 호화스러운 반면 孟子 사당은 초라하게 보여 惻隱한 마음이 들었다.
孔子는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생전의 말씀을 모아 ‘論語’라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孟子는 본인이 직접 ‘孟子’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중국 지도를 보니 쩌우센에서 조금 동쪽으로 나가면 ‘르자오(日照)’라는 항구 도시가 있는데 칭다오(靑島) 조금 아래쪽으로 우리 전라도에서 가기는 가장 가깝게 느껴졌다. 孔子 孟子 사당만 보려고 한다면 멀리 산동성을 돌아서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다음 행선지는 중국 10대 명산 중의 하나인 河南省 윈타이(雲臺)山이다. 윈타이(雲臺)山은 중국 지도에도 나오지 않았고 우리가 가진 중국 Guide북에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가느냐고 리더에게 물었더니 친구 하는 말이 중국에 가려면 여러 가지 참고 서적을 두루 보아야 하는데 어떤 책에 雲臺山을 아주 좋게 소개해 놓아서 한 번 가보려고 한다. 그러니 한 번 가보자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이 있다. 善循環 사이클이다. 리더 친구가 중국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그 만큼 많이 알 것이고 리더 활동도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우리들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雲臺山을 가려면 취푸(曲阜)역에서 河南省 신샹(新鄕)으로 가서 쟈오주오(焦作)가는 차로 換乘해야했다. 신샹(新鄕)에서 내려 환승하려고 하는데 역무원이 2명 나와서 우리 앞은 가로 막는다. 이 차에는 메이요우 주오(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표를 보여주어도 두 손을 모아 가위표를 하면서 안 된다고 한다. 왜 안 된다는 것인지 모르니 가슴이 답답하다. 할 수 없이 또 내가 서툰 중국어를 발동했다. 웨이선머 삐에지에?(왜 안 된다는 거야?)했더니 이번에는 두 손을 펴서 쭉 내밀면서 좀 기다리라는 身語를 한다. 그러는 사이 다음 기차가 왔는데 또 우리를 못 타게 앞을 가로막더니 열차 사무원(차장?)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고 우리를 인계한다. 열차에 오르니 우리를 침대칸으로 안내하더니 요금을 더 내라는 거다. 차에 태워준 것만도 고마웠다. 두 정거장 지난 다음 내린 곳이 쟈오주오(焦作)다. 휴! 하고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니 이건 추측에 불과하지만 취푸역에서 표를 팔 때 환승할 차의 좌석에 공석이 있는 가를 알아보지 않고 표를 팔았는데 나중에야 공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어 신샹(新鄕)역으로 연락을 해서 우리들을이 무사히 쟈오주오(焦作)까지 갈 수 있도록 선처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등석 칸은 빈 좌석이 없어 침대칸에 우리를 태워주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철도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글 순서는 ② 허난(河南), 산시(山西), 베이징(北京)
③ 네이멍구(內蒙古), 닝샤(寧夏), 칭하이(靑海)
④ 간쑤(甘肅), 산시(陝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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