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 적요와 상실의 시대 -
이 가을의 소망
소슬바람이 분다
적요와 상실의 계절이다
지나버린 날의 풍성함 대신
썰렁하게 비워지는 황량함이 시작되겠지
아쉽고 서러워도 이별을 준비할 때다
그토록 열렬했던 사랑도, 우정도, 세월까지도 …!
이별 후의 텅 빈 자리엔
추억의 그림이라도 그려야겠지
말간 하늘만큼 널따란 맘속 도화지에
하얀 뭉게구름 온갖 형상 그려내듯
그리움 가득, 행복 가득 그려야겠지
보고 싶은 얼굴이야 말할 것 없고 …!
*김길수 : 소설가, 수필가. 부산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호문학회 회원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나 K관세사 사무실은 예년과 달리 이상하리만큼 처리해야 할 물량이 많았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일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나, 여름휴가를 가지 못하는 직원들은 모두 입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오늘은 여름비치곤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려 모두 마음이 심란한 지경이었다.
어제 나는 오랜만에 K관세사 대표인 한수와 술자리를 가졌다. 퇴근 시간이 훨씬 넘어서까지 사무실에서 다음 주 운송계획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그가 느닷없이 내 사무실에 들렀다.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내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일은 무슨 일? 그냥 친구끼리 술 한잔하자는 거지.”
시계를 보았다. 시각은 벌써 밤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려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 나는 금방 생각이 바뀌었다.
“좋아. 오랜만에.”
그와 자주 가는 선술집이었다. 그는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금방 취했다. 아마 최근에 연일 계속되는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문제가 있긴 있나 보네. 한숨을 쉬는 걸 보니.”
“그래. 내가 하소연할 곳이 어디 있냐? 너밖에 없지.”
그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요즘 같으면 진짜 이 일도 못 해 먹겠다. 직원 관리도 안 되고, 관리가 뭐야? 직원들에게 욕이나 먹고 말이야.”
나는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하소연하는 모습에 은근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계속 한숨을 쉬는 바람에 나는 그가 단순히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닌 것 같아 자세를 바로 잡았다.
“뭔데? 말을 해봐. 직원에게 욕을 먹다니?”
“너! 혹시 요즘도 유희 만나냐?”
나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움찔했지만, 이내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무슨 소리! 그때 그 사고 이후로 끝이야. 이미 마음을 접었는걸.”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요새, 유희 때문에 너무 힘들다. 너도 알잖냐?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기라는 걸. 그지? 다른 직원들은 오늘도 남아서 야근하고 있는데, 글쎄, 유희는 오늘 서울에서 친구가 온다며 퇴근하자마자 나가는 거 있지? 그러니 다른 직원들은 대표님은 유희 말이라면 껌뻑, 넘어간다고 노골적으로 불평하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능청스럽게 되받았다.
“그거야, 유희 씨가 일을 잘하니 그렇지.”
그렇게 말을 하곤 나는 아까 퇴근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여름비가 하도 세차게 내려 나는 그 시간에 창밖을 보고 있었다. 빌딩 앞에 유희가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하늘을 몇 번 쳐다보더니 들고 있던 빨간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는 빌딩 앞 도로를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오늘은 그녀와 우산을 소재로 시를 한 편 쓰고 싶었다. 그때 그가 버럭, 하고 화를 내었다.
“잘하긴 뭘 잘해? 얼마 전 내가 미국 출장 갔을 때, 세번번호를 잘못 기재해서 난리 났다며? 다행히 네가 도와줘서 그 건은 잘 넘어갔지만, 최근에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어. 요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업무에 집중을 못 해. 가끔 사무실을 둘러보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앉았거나,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계속 통화만 해. 그러니 일을 잘 할 수 있겠냐고?”
“…….”
“그때도 그래. 그날, 세번번호때문에 난리 치던 날, 밤에 내일 하루 휴가를 내겠다고 내게 문자가 왔더라. 그게 직장인으로서 할 처신이야? 당연히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그다음 날 출근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어떻게든 해결을 했다, 하는 보고를 대표인 내게 해야 할 것 아니냔 말이야.”
이번엔 진짜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 했다. 그가 말한 그다음 날은 나와 그녀가 무산 시 근처에 있는 무지개 폭포에 가서 그녀가 싸 온 김밥을 먹으며 온종일 즐겁게 지낸 날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그저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렇지. 그건 유희 씨가 잘못했구먼.”
“그렇지? 내일 출근하면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겠어. 이쁘다, 이쁘다 해주니 이건 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저었다.
“무슨 말이야? 유희 씨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겠지. 서울에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하잖아. 아마 그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 업무에 집중을 못 했을 거야. 네가 좀 이해해 줘라.”
그러자 그가 날 생뚱맞게 쳐다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제 그와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녀에게 서울에서 누가 왔냐고 문자를 했다. 그녀는 짧게 여자친구, 하고 답을 해주었다. 그녀의 문자에 나는 편히 잤다. 아침에 출근하여 직원들과 회의를 한 뒤부터 바쁜 업무로 정신없이 보내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그녀를 보았다.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니 그녀도 나처럼 어제 오랜만에 친구와 즐겁게 보낸 모양이었다. 그러다 한 번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아무도 몰래 내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무렵이었다. 연희가 결재 들어와서 잠시 테이블에서 다음 주 스케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업무용 전화기에 전화가 한 통왔다.
“최 림 과장님 바꿔주세요.”
톤이 높고 맑은 전형적인 서울 말투였다. 나는 행여, 서울에 있는 운송업체의 직원인 줄 알았다.
“접니다만.”
“안녕하세요? 전 유희 친구 되는 박미란이라고 합니다. 지금 퇴근 시간이시죠? 잠시 드릴 말씀이 있으니 만나뵈었으면 해요. 요 앞 ‘빨간우산’이라는 카페에 있겠습니다. 그럼.”
직감에 어제 그녀의 집에 놀러 온 친구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왜? 나는 연희를 보내고 얼른 유희에게 전화했으나, 이상하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는 어떡할까, 하다 일단 그녀의 친구가 만나자는 장소로 나가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아마,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유희와 비교해서 아주 발랄하고 밝은 인상이었다.
“유희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박미란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명함을 건넸다.
“최 림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자 그녀는 시간이 없다는 듯 시계를 보다 말을 꺼냈다.
“유희와 이곳에서 약속을 해두었어요. 그 전에 제가 과장님께 꼭 드릴 말이 있어서요.”
“어떤 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과장님!”
나는 그녀가 초면인 내게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헤어지세요!”
“네?”
“유희랑 헤어지란 말이에요.”
여자는 전투적인 자세였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요?”
“무슨 이야기인 줄은 과장님이 더 잘 아실 거잖아요. 유희는 이제 만으로 스물
여덟입니다. 과장님은 유부남이시구요. 그런데 어째서 창창한 유희의 앞날을 막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앤 곧 결혼할 거예요. 약혼자가 있단 말입니다. 그건 아시죠? 그런데도 유희는 과장님 때문에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고있단 말입니다. 왜?”
“그만 하세요.”
나는 그녀의 말이 도가 넘었다 싶어 중간에 끊어버렸다.
“초면에 이건 너무 실례가 아닌가요? 그리고 그런 말은 내게 직접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보아하니 유희 친구라면 같은 나이이겠네요. 결례되는 말은 좀 가려서 하시는 게.”
하지만 그녀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결례는 과장님이 이미 하시고 있잖아요. 순전한 유희 같은 젊은 처녀를 꼬드겨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지금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잖아요.”
나도 질 수가 없었다.
“꼬드기다뇨?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십니까? 난 그런 적 없고 지금도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유희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 또한 날 좋아하고 있어요.”
“사랑? 웃기시네.”
그녀는 팔짱을 끼며 날 노려보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불륜이란 말입니다. 당장 그만두세요!”
그녀의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주위의 손님들이 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유희가 시키던가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순순한 우정이에요.”
나는 불현듯 유희가 아내에게 당했던 수모를 강도는 낮지만, 나도 똑같이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한없이 슬퍼지면서 점점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희의 친구는 그러기나 말기나 화가 난 표정으로 날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친구로서 유희의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도 난감합니다.”
“과장님은 어떻게 과장님 입장만 내세우세요? 정말, 유희를 사랑하시는 것 맞아요?”
나는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정확히 말하는 게 맞다 싶었다.
“네, 유희를 사랑합니다.”
“사랑? 기가 막혀.”
그녀는 냉소적이었다. 나는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유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부재중 전화가 들어왔네요. 아까 대표님이 급하게 세관에 다녀오라 해서 못 받았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래? 아냐. 그게…….”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미란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카페 입구에서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리더니 천천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그러자 유희의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내가 보자 했어.”
나는 이쯤에서 일어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녀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좋은 시간 보내.”
나는 의연한 척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카페를 빠져 나왔다. 밖엔 여름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에게서 수통의 문자와 전화가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