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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조건 ▶ 변화와 혁신을 이끄는 솔선수범 리더십
■ 사막의 여우 롬멜
롬멜의 신화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10월, 롬멜은 산악부대 중대장이었다. 그는 약 150명의 병력으로 천혜의 요새인 알프스 마타주르산에서 이탈리아군 약 1만 명과 마주했다. 그는 속전속결 작전으로 9000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대승을 올렸다. 이 공으로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푸어르 메리테’ 최고 훈장을 받았다(이 훈장은 처음에는 다른 장교에게 주어졌다. 그 이유는 롬멜이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장교였기 때문)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의 추도식,1944년 10월 18일(출처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7기갑사단을 이끌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마지노 요새를 전격 작전으로 돌파해 프랑스 점령의 첫 단추를 열었다. 보병부대 출신에게 기갑부대는 생소했지만 롬멜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기다리라”는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기습적으로 마지노선을 돌파했고 이내 프랑스군을 임계선과 후방 부대로 갈라놓았다. 이른바 롬멜이 즐겨 쓰는 ‘양단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전선의 프랑스군은 고립되었고 이내 프랑스 전선은 붕괴되었다.
“적이 할 수 있는 작전을 펴는 지휘관은 무능한 것이다.
승리는 적에게 예측할 수 있는 시간과 계획을 주지 않을 때 얻는 것이다”
이 같은 롬멜의 속도전은 프랑스 군대에게 공포의 존재였다. 롬멜은 독일군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전차 전문가가 되었다. 이때가 1940년으로 롬멜의 나이 48세이다. 롬멜은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가 지휘한 제7기갑사단은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기동력으로 ‘도깨비 사단’, ‘유령 사단’이라 부르며 연합군은 두려워 했다.
독일은 프랑스 점령 후에 소련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즈음,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하면서 독일에 구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문제는 소련 침공 작전 준비로 빼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소수의 기계화 부대와 유능한 장군 한 명을 보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가 완전히 축출당하는 것만은 막으려 했고, 이때 도착한 장군이 바로 롬멜이었다.
당시 영국군의 상태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는 데만 집중되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독일군의 그리스 침공으로 2개 사단을 차출하는 등 실제 전력 자체도 많이 약화 되어 있었다. 이처럼 영국군의 상황이 어수선하다는 점을 파악한 롬멜은 아직 수송선에서 병력이 제대로 하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격을 개시한다.
하지만 반격할 병력과 전차 등 턱없이 부족한게 현실이었다. 이에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 모양이 나게 만들어 영국군을 공격하는데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롬멜은 독일 아프리카군단 사령관으로 연합군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는 10만 명의 병력과 불과 약 150대의 전차를 갖고 20만 명의 병력과 1300대의 전차로 무장한 연합군을 상대로 예측을 뛰어넘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연합군의 혼과 진을 빼놓았다. 연합군을 그를 ‘사막의 여우’라 불렀다. 사실상 아프리카의 전쟁은 롬멜 대 영국군의 전쟁이 되었으며, 영국군에게 롬멜은 정말로 무섭고 미운 적이지만, 동시에 군인으로서 존경할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1942년 1월 27일 영국 수상 처칠의 의회 연설중에서
대치 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하기도 하고, 전투를 위해 장갑차가 이동해야 할 때는 장병들과 함께 야전용 전투식량으로 때우는 등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하 장병들과 함께하는 리더였다. 롬멜은 일선 병사와 부사관, 초급장교들에게 친절히 대하며 그들의 의견과 고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작전에 반영했으나 지휘관들에겐 악몽 그 자체였다.
어느 육군 장교가 잠시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자 장교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정찰기에서 롬멜이 "지금 당장 진격하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서 부대를 지휘할 테다"라고 적은 쪽지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또한, 적의 저항이 너무 거세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자 “자네를 포함해 병력 절반이 희생당해도 그건 예정된 희생일 뿐이야!”라며 공격을 계속하게 독촉하기도 했다. 얼마나 지휘관들을 거칠게 채찍질했던지 롬멜과 동갑내기인 휘하 사단장 육군 소장 하인리히 폰 프리트비츠는 그의 독촉을 받고 황급하게 전투에 나섰다가 초장에 전사하고 말았다.
리더의 역할은 현장에서의 솔선수범이다.
너무 빨리 진격한 나머지 퇴각하는 영국 육군의 후위에 끼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영국 육군 중에서 그 누구도 옆에 있는 차량이 롬멜의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승리는 먼저 공격하는 자의 것이다. 늦게 움직이는 자는 2등이다”
사실 그를 괴롭힌 것은 적군보다는 오히려 보급품의 부족과 무능력한 이탈리아 육군이었다. 이탈리아 육군은 병력은 많아도 전의와 능력이 중구난방이어서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여기에 중요한 진격을 할 때마다 연료와 탄약이 크게 모자랐다. 이런 상황이니 진격을 하면 할수록 보급은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후퇴의 원인이 됐다.
롬멜은 이처럼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도 연전연승으로 독일민들에게 희망이며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거칠고 긴장된 생활의 연속으로 인해 결국 병을 얻어 본토로 떠나게 된다. 그가 아프리카를 떠난 사이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대반격이 시작되고 급하게 돌아왔던 롬멜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히틀러의 명령마저 무시해버리면서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퇴각하기 시작한다.
■ 롬멜의 리더십
롬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의 영웅이었다. 비록 나치의 장군이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서 독일은 물론 당시 연합국의 정치가, 장군들도 인색하지 않다. 물론 이런 평가는 만약 롬멜이 여타의 나치 장군들과 같이 전쟁이 종료되고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면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영웅’답게 전쟁 종료 약 1년 전 자결했다. 죄목은 ‘히틀러 암살 음모 연루’였다.
히틀러와 나치는 롬멜의 공개적인 처형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신화로 만들어낸 전쟁 영웅이 히틀러와 나치에 반란을 꾀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히틀러는 롬멜에게 ‘가족의 안전 보장’, ‘전쟁 영웅으로서의 예우를 갖춘 장례’를 조건으로 청산가리를 마시라고 했고, 롬멜은 이를 받아들였다.
1944년 10월18일, 롬멜이 죽은 지 4일 후, 도나우강이 흐르는 독일 남부의 도시 울름에서 롬멜의 국장이 거행됐다. 공식 발표된 롬멜의 사인은 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상 악화에 따른 심장마비, 장례식장에는 많은 독일국민이 참석해 전쟁 영웅의 최후를 애도했고, 베토벤의 ‘영웅’이 연주되었다. 롬멜은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롬멜의 평가는 위대한 승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의 부하들에게는 ‘우리의 대장이 롬멜이다’라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그와 상대한 연합군에게는 패배의 요인으로 ‘우리의 상대가 롬멜이다’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롬멜은 위대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리더였다. 그는 엘알라마인을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고민했다. 당시 롬멜 휘하의 수만 명의 병사들은 끊겨진 군수 지원에 싸울 무기도 없었고 전차는 불과 70대 뿐이었다.
그가 ‘평범한 군인’이었다면 롬멜은 사수를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롬멜은 수만 명의 병사, 즉 자신을 따르는 조직원을 살리고 조직을 살리기 위해 후퇴를 명령했다. ‘롬멜은 히틀러와 나치 추종자’라는 비판에 반론을 제기할 때 드는 첫 번째 예가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일로 롬멜은 히틀러에게 문책을 받았지만 그는 리더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군인’과 ‘조국을 위해 충성하는 군인’ 사이에서 조국을 선택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 더욱 극악해지자 롬멜은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 행위는 크나큰 범죄 행위이다”라고 비난하며 히틀러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이처럼 롬멜은 탁월한 전략과 전술, 공격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용맹, 정치와 권력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군인이었다. 롬멜의 리더십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솔선수범, 현장 리더십이다.
롬멜은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최고 지휘관으로 후방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전쟁을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롬멜은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최전선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고 보병부대 출신답게 참호에서 뒹굴며 적과의 교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롬멜은 장군, 장교, 병사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탈리아 장군들이 전쟁을 하다가도 식사 때면 우아하게 하얀 천을 깔고 와인을 곁들어 음식을 먹을 때도 롬멜은 병사들과 똑같은 전투 식량을 먹고, 똑같은 모포를 덮고 야전에서 잠을 잤다.
“롬멜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신뢰가...... ”
오직 명령으로만 움직이고, 생과 사의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다가오는 전쟁터에서 ‘신뢰’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무거운 요소인 것이다. 항상 병사들 곁에, 현장에 있는 롬멜을 보면서 부하들은 그와의 신뢰 형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롬멜은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승리를 통해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롬멜은 군인, 전술가로서 큰 획을 그었지만 그에게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승리를 이끄는, 조직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조직원의 자발적 신뢰를 얻어내는 리더십인 것이다. 비록 나치의 장군이었지만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리더의 품격’인 것이다.
탁상공론은 버려라, 대신 혁신하고 변화하라.
롬멜은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한 적이 거의 없다. 항상 부족하고 최악의 여건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거둔 이탈리아군과의 전투 역시 병력 수에서 1/17의 약세를 딛고 승리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기갑전을 이끌 때는 물량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기습전으로 승리했다.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 때는 롬멜의 전차 수는 연합군의 약 1/20에 불과했다. 그러나 롬멜은 승리했다. 그 비결은 바로 관행, 습관, 틀, 고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롬멜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전술을 펼쳤다. 빠르고 많은 적 앞에서는 천천히 그리고 전력을 한 곳으로 집중해 대항했다. 거대한 적은 분산시켰고, 추격할 때는 후퇴하는 적보다 더 빠르게 기동전을 펼쳤다. 그리고 위장과 기만전술도 빼놓지 않았다.
롬멜은 승리하기 위해 조직에 속도를 부여하고 혁신했다.
당시 전차들은 전진하다가 멈추어서 포격을 했다. 그래야 명중률이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멈춰서는 순간 적에게 노출되는 단점이 있었다. 롬멜은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전차 전투 시 모든 전차는 달리면서 포를 쏘라.” 참모들은 깜짝 놀랐다. 움직이면서 포를 쏘는 것은 전함이 해전에서 쓰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탄환을 낭비하는 꼴입니다.” 참모들의 질문에 롬멜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투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기는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현대 전차전은 롬멜의 이 방식이 교범이 되었다.
또 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은 후퇴하는 영국군을 추격했다. 물론 후퇴하는 영국군의 전력은 롬멜군보다 우세했다. 추격전을 펼칠 수 있는 길은 세 곳이었다. 롬멜의 참모들과 후퇴하는 영국군은 같은 생각을 했다. “전력을 집중해 한 곳으로 추격한다”고, 롬멜을 이를 뒤집었다. 그는 부대를 삼분해 빠른 기동력으로 영국군을 추격했다. 영국군은 기겁을 했다. 당연히 한 곳으로, 한참 후에나 나타날 롬멜이 몸을 드러내자 또 후퇴하고 말았다. 이처럼 롬멜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시도한, 현대적 의미에서 ‘혁신의 리더’라 할 수 있다.
물론 롬멜의 빛나는 전공의 밑받침은 롬멜부터 맨 아래 전투 사병까지 서로를 신뢰하는 일체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직원의 능력과 고충을 알지도 못하면서 명령만 내리는 리더, 리더의 말이 그저 책상에서 만들어낸 공허함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조직원, 이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 조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롬멜은 행동하는 리더십,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그에 대한 부하들의 존경은 전투에서 승리로 나타났고 심지어 점령지 주민들도 롬멜을 존경했다고 한다.
롬멜의 리더십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리더십의 주인공들과 비교해 특별하지 않다. 그의 승리는 매우 영웅적이고, 신화적이지만 그의 리더십은 ‘부하들과 함께’라는 것이다. 전쟁터는 항상 어려움과 고통, 배고픔과 추위, 삶과 죽음이 옆에 있다. 그 순간 고개를 드니 우리의 리더가, 대장이 내 옆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조직은 위대해질 수 있으며, 리더는 부하들의 충성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위키백과(에르빈 롬멜), 매일경제 Citylife 제615호(박기종, 2018-02-06)
[출처] 리더십 연구 2 : 나치 최연소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작성자 오이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