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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 Moyen Age et Renaissance 463-
제3장 12세기 Le XIIe siècle 504-542
[개요] 504
12세기는 불붙어서 변화된 사유, 또한 소란스럽고 혼동된 사유의 세기이다. 한편 체계화작업과 통일성의 필요이다. 그 통일성은 평결문들(Sentences)이란 서적들과 같은 여러 종류의 신학적 백과전서들이 생겨나는데 기여하다. 다른 한편 정신의 커다란 호기심이다. 이 호기심은 고대의 인본주의로 회귀에 의하여, 그리고 4학과의 과학에 새로운 주의에 의하여, 몇몇 터전들에서 번역되었다. 덧붙이자면, 고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번역들에 의하여 조금씩 꺼풀을 벗겨냈다. 그리고 도서관들은 풍부해졌다.
아마도 사람들은 다른 터전[환경]에서 드러났던 중요한 정신의 네 방향을 분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 평결문들(Sentences)의 신학적 작가들이다. 이들은 크리스트교 전통을 집성하여 통일화하였다. [둘] 샤르트르 학파의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진솔한 인문주의자들로부터 나온다. [셋] 생-빅토르 수도원의 신비가들이다. [넷] 자연주의와 범신론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정신적 능력을 불안하게 하지 않고서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또는 독립파들(les indépenants)이 있다.이들은 어떠한 범주의 서열에도 속하지 않는다. 특히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가 있고, 그의 지성은 복잡하고 민감하지만, 그의 시대 모든 정념들을 반영한다. (504)
1절 평결자들 Les sententiaires 504-
12세기는 거대한 신학적 백과사전의 시대이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이브 드 샤르트르(Yves de Chartres, 1040경-1116)가 말했듯이, “하나의 유일한 몸체(un seul corps) 통합할” 것을 시도했다. 그 몸체란 크리스트교의 삶에서 다루는 모든 것들, 즉 교양과목, 신앙, 풍습 등이다. 그 모든 것에는 어떠한 철학적 고민도 없다. 그러나 실천적 필연성이 있다. 크리스트교는 자신의 정신적 통일을 간직하기 위하여, 흩어진 많은 자료들을, 교회법령집들, 교회령과 교황령, 교부들의 견해들, 실천적 도덕 규칙들과 종교생활의 규칙들의 자료들을, 재통합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한 모든 것은 종종 모순적인 측면이 있으나 그럼에도 통일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생산작업들이 상응하는 필요들은 우리의 법전들이 상응하는 것[필요]들과 – 철학보다 더 많은 실천적 필요와 법률적 필요를 포함하는 - 동일한 질서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이 전달하는 작업은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질서로부터 이다. 베르놀트(Bernold de Constance, 1050경-1100)가 각 관점에서보아 겉보기에 모순적인 권한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전에 뱅상 드 레랭(Vincent de Lérins, ?-445/450)처럼, 규칙들 사이에 조정하고 선택하기 위하여 규칙들을 제공한다. 이브 드 샤르트르(1040경-1116)는 열일곱 권으로 된 그의 종교령令(Decretum, 1094) 속에서 신앙에 대한 학설의, 그리고 풍습들에 대한 규칙들의 거울(miroir, speculum)을 제공한다. 더 나중에 라울 아르당(Raoul Ardent, 1140이전-1200)의 보편통감(Speculum universale)(14권, 1193 et 1200)은 크리스트교인 역사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특별나게 크리스트교육 이외에도, 고대의 인문학적 도덕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한다. 크리스트에 의해 구원의 계시에 앞서서, 그 작가는 선과 덕목의 근본적인 도덕 개념들을 설명한다(1권). 신앙과 교회예배식들을 제시하기에 앞서서(7권과 8권), 그는 덕목과 악덕에 관한 인간적 사유들을 전개한다(6권). 신학적인 덕목들을 다루기에 앞서서, 그는 기본적인(cardinales) 덕목들을 말한다. 크리스트교 진리들과 인간적인 도덕을 나란히 놓는데, 그는 이것들을 순진하게 신앙에 집결시키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과학들의 고대 분류작업(이지도루스 또는 베다에서 전승된 대로)을 이론적으로,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거기에 역학을 보태어서 찾는다. 그는 네 가지 과학들이 원죄로부터 나온 네 가지 과오들에 대한 – 무지, 불의, 오류, 신체적 연약함에 대한 - 네 가지 치료제라고 경건하게 주목하자고 친절을 베푼다. (505)
크리스트교의 규준화작업(codification)은 연속적인 저술 작업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12세기 내내 이런 저술들을 따라가 볼 수 있다. 라옹의 안셀름(Anselme de Laon, 1050/1055-1117)의 질문들(Questions) 즉 평결문들(Sentences)(1110경), 기욤 드 샹뽀(Guillaume de Champeaux, 1070경-1121)의 평결문들(Sentences, Sententiæ), 영국의 로버트 풀렌(Robert Pullen, 1080경-1150)과 로버트 멜룬(Robert de Melun, 1095경-1167)의 같은 저술들, 특히 롬바르도(Pierre le Lombard, Lombardo, 1100경-1164)의 저술들이 있다. 롬바르도가 죽은 이후에 곧바로 이 스승은 삐에르 망죄르(Pierre le Mangeur, 1100경-1179)와 삐에르 드 쁘와띠에(Pierre de Poitiers, ?-1206)에게 설명의 원본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뒤따르는 세기에 신학적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505)
아벨라르(1079-1142)는 롬바르도(1100경-1164)의 스승들 중의 한사람이다. 아벨라르의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Sic et non, 1121)는 동일한 문학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교부들의 견해들을 모아서, 이것들을 두 분류로, 즉 그렇다[긍정]고 말하는 견해들과 아니다[부정]고 말하는 견해들로 나누었다. 아벨라르는 회의적인 결론들을 끌어내려고는 확실히 원치 않았고, 단지 “독자들이 진리의 탐구에 더욱 잘 실행하기를 또한 독자들이 이런 탐구에 의해 더욱 섬세하게 되기를 부추기고자”원했다. 게다가 시작에서부터 견해들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규칙들을 부여하였다. (506)
이 작품들은, 사람들이 보듯이, 자연적으로 합리적 작업을 가정한다. 그 합리적 작업 없이 모든 규준화는 불가능하다. 사물들의 토대를 위하여 [종교적] 권한[권세] 이외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권한으로 의미[감관]와 가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추론된 토론이 필요하다. 구별들이 혼성되어 있는 문단들의 각각에 관하여 또는 그의 책의 장들에 관하여, 롬바르도는 원문들에게 원문들을, 찬성(le pro)과 반대(le contra)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그는 인용문구들에 의하지 않고, 토론에 붙여서 선택한다. 이리하여 소위 말하는 스콜라적인 방법을, 즉 발명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견해들을 판단하거나 또는 증거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변증법을 확립한다. 섬세한 정신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견해들 사이에 일치 또는 모순을 파악하는 정신이다. 가능한 지적인 유일한 방법이, 진리가 이미 주어진 자료로서 고려되는 하나의 영역 속에 있다. (506)
다른 중요한 점은 아벨라르와 롬바르도의 작품 속에서 재료들의 분배가 있다. 그 분배의 하부 구조는 크리스트교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le récit)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과 삼신성을, 창조작업, 천사들, 인간과 원죄, 체화와 속죄, 성체예식들과 종말론을 연구한다. 거기에 공통하는 세계[우주]의 도식이 있다. 이 도식은 조금씩 필수불가결하게 되고, 이제 지배적이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많은 철학자들 속에서, 숨을 거두 중세 이후에 오랫동안 재발견할 것이다. 우선 실재성들의 위계질서에 대한 회화가 있다: 즉 신, 천사들, 인간들이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드라마가 나온다: 원죄, 속죄, 선택된 자들의 신으로 회귀이다. 이런 이중 주제는 많은 변이들[변주곡]들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 제한된 변이들은 어느 정도에서는 하강 운동과 신으로 회귀 운동을 가지고 영원한 필연성을 만든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방식에 맞는 플라톤주의이다. 그리고 변이들은 롬바르도 또는 성 토마스의 정통교리(l’orthodoxie)이다. 이 둘이 드라마 각장의 초반부에 완전히 자유롭고 우연적인 주도권을 행사한다. (527)
2절 12세기 샤르트르 학파 L‘école de Chartes au XIIe siècle: Bernard de Chartres 507
반대로 일종의 철학적 신학은 샤르트르 학파에서 발전된다. 이 시대에 샤르트르 지방에서 보에티우스, 이지도루스, 교부들을 넘어서는 지적 노력의 수평을 확장하기 위해 이루어진 노력들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없다. 이 주도권을 행사한 자들 가운데, 우선 콩스탄틴 라프리깽(Constantin l'Africain, 1020-1087)와 아델라르 드 베스(Adélard de Bath, 1080경-1152경)를 인용하자. 이들은 동방과 서방 사이에 다시 정립해야할 관계들에 대해 값진 증인들이다. 11세기 말부터, 카르타고에서 태어난 콩스탄틴은 모든 동방을 여행했다. 그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의학서들 이외에도, 히포크라테스의 경구들(Aphorisme)을 갈리아누스의 주석들과 더불어 번역했으며, 갈이아누스의 두 논저들도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들 속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이를 곧 보게 될 것이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입자물리학의 인식을 길어 올릴 수 있다. (507)
아델라르 드 베스는 12세기의 초에 그리스와 아랍지방을 여행했는데, 특히 수학 작품들의 번역에 기여했다. 그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아랍어로부터 번역했으며, 천문학적 작품들 이외에도 알콰리즈미(al-Khwarizmi, 780-850)의 산술학을 알게 했다. 이제 특이하게 4학과가 증가하게 되었다. 아델라르는 수학자임과 동시에, 플라톤주의자 경향이었다. 그의 플라톤주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칼키디우스(Chalcidius ou Calcidius, 4세기경)와 마크로비우스 (Macrobe, 370경-430경)의 티마이오스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다. 그는 철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일자와 차이에 관하여(De eodem et diverso라는 작은 논문을 썼다. 사람들은 그 작품에서, 보에티우스와 마르티아누스 카펠라의 진부한 표현을 따르면, 지혜사랑(Philosophia)을 본다. 지혜사랑은 일곱 기예들을 동반하여 오두막사랑(Philocalia)에 반대하여 논의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시된 인식의 이론은 프쉬케에 대한 플라주의의 신화 전체를 가정한다. 순수 상태에서 지성은 사물들과 사물들의 원인들을 안다. “신체의 감옥 속에서” 이런 인식은 잃어버린 부분이다. “이때 인식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의 기억은 감퇴되었기에, 인식은 견해에 도움을 받는다.” “매우 작은 사물들과 매우 큰 사물들을” 무지하게 우리를 내버려두는 “감관들의 소동”(티마이오스, 44.a)은 합리적 인식을 막는다(최소치는 아마도 아톰들일 것이고, 아델라르는 원자들의 현존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유가 있는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상상작용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인식할 수 있다고 그가 말할 때이다. 그러나 플라톤도 또한 이유가 있는데, 완전한 인식은 사물들의 원형의 형상[이데아]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하고, 그러한 형상[이데아]은 신체 속에 통과하기에 앞서서, 신적 오성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오직 반대 진행방식이 있다. 플라톤은 원리들로부터 출발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이고 혼성된 사물들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부터 보편자들 문제의 해결책이 나온다. 류, 종, 개체 사이의, 예를 들어 동물(animal), 인간(homme), 소크라테스(Socrate) 구별은 감각적 사물들에서만 기호작용(signification)을 갖는다. 단어들은 차이 연관 하에서 동일한 본질을 지시한다. “종들을 고려하면서, 사람들은 개별적 형상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은 형상을 잊는다. 왜냐하면 형상들은 종의 이름에 의해서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에 연관하여 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언어들에 의해서 지명된 보편자들을, 형상이 신적인 지성 속에 있는 그대로의 원형의 형상들과, 혼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보편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더 많은 침투와 더불어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감각적 사물들 자체일 뿐이다. 형상들은 류들도 종들도 더 이상 아니다. 이것[류, 종]들은 개별자들과 연관해서만이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형상들은 감각적 사물들 밖에서, 신적 정신 속에서, 생각되고 현존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복적인 통찰에 비슷한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인식이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이데아들[관념들]을 관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508)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Bernard de Chartres, 1070경-1130)는 1114년에서 1124년에 샤르트르에서 가르쳤다. 그는 샤르트르적 특성이기도 한 아주 말끔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안다는 목표는 과거의 인식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난장이들과 같다. 우리는 옛 선인들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다. 우리 시각의 예리함 또는 우리 신체의 크기 덕분이 아니라, 우리가 거인들 위에서처럼 옛 선인들 위에서 지지받고, 성장했기 때문이다.”쟝 드 살리스버리(Jean de Salisbury, 1115경-1180)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플라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보편자들이 플라톤주의자들의 이데아들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플라톤주의의 짤은 진술이 또한 베르나르에로 되돌아가는가? 쟝은 그가 형식적으로 인용한 세네카로부터(편지, 59, 19, 22)그리고 티마이오스로부터 영감을 받으면서, 거기서 이데아들의 불변성과 감각적 사물들의 가변성 사이에 대립을 강조했다. 어째거나 확실하게 나타는 어떤 것이 있다. [추정컨대] 베르나르의 동생인, 띠에리 드 샤르트르(Thierry de Chartres, 1100-1150)는 창세기의 주석을 작성했다. 거기서 그는 세계를 4원인의 협력으로 설명한다. 아버지 신은 효과인으로서, 4요소들은 질료인으로서, 아들은 형상인으로서, 성령은 목적인으로서 설명했다. 이런 문구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의 이론을 티마이오스편의 우주발생론으로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정식들이 플라톤주의의 4용어들로는 잘 감추어지지 않는다. 4용어들로서 데미우르고스, 질료, 세계의 질서, 선이다(게다가 띠에리는 이어서 형식적으로 성령을 티마이오스편의 세계영혼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티마이오스편의 이런 해석은 세네카의 편지 65(8-10)에서도 발견된다. 세네카는 플라톤의 세계 원리들 각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들의 하나에 동화시킨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허위-신학(pseudo-Théologie)의 서문에 동일한 해석이 있다. 이 작품은 9세기의 아랍어로 된 작품인데, 우리는 나중에 말할 것이다. (509)
또한 티마이오스편은 베르나르두스 실베스트리스(Bernard Silvestre, Bernardus Silvestris, 1085-1160)에게 영감을 주어서, 그는 세기의 중간 시기에 우주 형상지(Cosmographia (ou De Mundi universitate sive Megacosmus et Microcosmus, 1147)을 썼다.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1070경-1130)의 제자인 기욤 드 꽁쉬(Guillaume de Conches 1080-1154)는 티마이오스편의 주석과 플라톤주의가 스며들어 있는 철학(philosophia)을 썼다. 그는 플라톤을 뒤따르는 아벨라르에 반대하여 주목 받았는데, 아벨라르는 플라톤을 종속시켜, 크리스트교의 변신론에 사용하게 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주의를 마치 독립하는 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독단[교리]와 어떠한 접근을 시도함이 없이, 그리고 인문주의의 어떤 환상(fantaisie)에 기여하고, 샤르트르의 모든 생산작업들에게 아주 특별한 향기를 부여하는 스타일의 고심에 기여한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두스 실베스트리스의 우주론은 편지에 앞서서 일종의 불가사의이다. 편지에서 사람들은 완전히 눈물에 젖은 자연(Natura)이 노이스(Noys)[누스]에게 다시 말하면 섭리에게, 물질 속에 지배하는 혼합물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본다. 노이스(Noys)는 자기의 불평들을 양보하고 요소들을 서로서로 분리한다 (마치 오비디우스의 변신의 제1권에서처럼) 그리고 자기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자연에게 인간을 형성하게 허락하면서 노이스(Noys)는 자연에게 전한다. 반면에 자연은 4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의 신체를 형성할 것이다(이것은 티마이오스편 이야기의 응용이다). 겉보기에 이것은 플라톤주의의 외투를 입은 크리스트교 삼신성이다. 아버지는 온선(Bien, Tagathon)과 동일시하고, 아들은 노이스(Noys)에, 정신[성령]은 노이스(Noys)에서 유출하는 세계의 영혼 또는 엔델레키아(Endelechia)에 동일시(identique) 한다. 이런 동일시작업(l’assimilation)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영혼은 그것보다 하부인 다른 위격에게, 자연에게 또한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왜냐하면 노이스(Noys)는 체화된 말씀에 전혀 닮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나 노이스는 가지적인 세계이며, 종, 류, 개체를 포함하고, “물질, 요소들, 세계가 곧 생성할 모든 것‥…, 모든 운명들의 계열(숙명적 계열들, 이것은 스토아의 용어이다), 여러 세기들의 배치, 가난한 자들의 눈물들, 왕들의 운수들”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510)
3절 알랑 드 릴 - Alain de Lille 510.
자연, 자연의 통일성, 자연 법칙들, 이것들은 결국에는 아마도 샤르트르학파의 플라톤주의의 본질적인 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 세기 말의 가장 아름다운 사상가들 중의 하나는, 알레고리 시들을 쓰고 동시에 공리들의 형식으로 신학의 규칙들(Règles de théologie, 1192경-1194)의 작가이며, “보편 박사”라 불리는 알랭 드 릴(Alain de Lille, 1115-1203)은 파리에서 그리고 몽펠리에에서 가르쳤다. 샤르트르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함이 없이 그는 그들의 정신을 많이 간직했다. 그는 자연을 돌들로 장식된 왕관 쓰고 외투를 걸친 쓴 젊은 처녀로 표상한다. 여기서 돌들은 하늘의 행성들을 상징하며, 외투에는 존재들의 진리전체가 수 놓여 있다. 12세기의 이 성직자는 페레퀴데스(Phérécyde de Syros, Φερεκύδης, 전580-520)가 기원전 6세기에 아마도 바빌론인들로부터 빌려온 오래된[늙은] 이미지를 재발견한다. 자연에 대한 이런 표상에, 자연과 동일한 부분들로 이루어진 소우주의 인간의 표상이 연결되어 있다. 이 자연의 표상에 네메시오스(Némésios, 350경-420경)의 저술이 낯설지 않다. 그 저술은 인간의 자연(La Nature de l'homme, 400경)인데, 1058년에 알파누스(Alfanus, 1015/20-1085)에 의해 번역되었다. 그러나 알랭 드 릴은 특히 티마이오스편의 이미지들을 사용했다. 이법은 인간 속에 마치 고정된 별들의 천구 운동처럼 있다. 그리고 변이들을 지닌 감각성은 마치 행성들의 기울어진 천구 운동처럼 있다. 영혼은 또한 신적인 도시국가처럼 있다. 거기서 머리 속에서 이법은 신과 하늘에 상응한다. 심장 속에서 열렬함은 천사들과 공기에 상응하며, 옆구리에서 아래 부분은 인간과 땅에 상응한다. 이렇게 보편적 삶의 이미지가 지배한다. 그 이미지의 모든 부분들은 비밀스런 근친성들에 의해 서로 상응한다.
알랭처럼 정통 교직자는 확실하게 자연을 분할할 수 없었다. 그는 자연을 신에 종속시켰다. 그러나 그가 신과 자연의 연관을 생각하는 방식은 프로클로스의 신학에서 빌려왔다. 그는 그것을 프로클로스의 원인들의 책(Liber de Causis, Livre des Causes)을 통해서 알았으며, 세기 중반에 그것을 아랍어로부터 번역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최고선의 본질에 관한 경구들(Aphorismes sur l’essence du souverain Bien)”이란 이름하에 인용되었다. 그가 자연에 말을 해야 할 때, “신의 조작작업은 단순하고, 나의 조작작업은 여럿이다.” 사람들은 플라톤주의자의 이론들을 단지 상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론들은 펼쳐진 통일성에 비해 감싸진 통일성의 차이만을 실재성의 다양한 수준들 사이에서 볼 뿐이다. (511)
4절 기욤 드 꽁쉬 - Guillaume de Conches 511
샤르트르 환경들 속에서 스스로 변형되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철학의 개념작업 자체이다. 우리는 기욤 드 꽁쉬(Guillaume de Conches 1080-1154) 속에서 그것의 한 증거를 갖는다. 그는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1070경-1130)의 제자이다. 그 작품을 특징짓는 것은, 3학과 4학과 사이에서 그가 행한 근본적인 구별이다. 3학과(문법학, 변증론, 수사학)은 철학의 기본적인 공부이며, 반면에 4학과(수학과 천문학)은 철학의 첫 부분이며 둘째 부분은 신학이다. 일곱 학과들과 신학의 대립이, 문학(belle-lettres)(웅변술과 3학과: eloquentiaou trivium)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철학적 연구에 대립으로 자리매김하는 경향이 있다.게다가 그것은 기욤이 묘사하는 상황에 사실로서 상응한다. 그에 따르면 많은 스승들은 웅변술의 교육에 한정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서문). (511)
스스로 묘사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의 새로운 이미지였다. 기욤은 콩스탄틴 라프리깽(Constantin d’Africain, 1020-1087)의 미립자 물리학을 도입하고자 시도했다. “콩스탕틴은 물체들의 자연(본성)을 자연[물리]학적으로 다루면서, 물체들의 단순한 부분들과 가장 작은 것들을 제1원리들의 의미에서 요소들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철학자들은 특별한 물체들의 자연들이 아니라 세계의 창조 작업과 다루면서, 볼 수 있는 물체들의 네 가지 요소들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네 요소들의 일상적 이미지는 “마치 농부들처럼 감관들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모든 것의 현존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서는 좋다. 그러므로 여기에, 지성은 소심하게 자의 역할을 요구하는데, 신적인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하여 뿐만이 아니라, 감각적 실재성의 실체를 규정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볼수 없는 원자들을 볼 수 있는 요소들에게, 기계적인 혼합물을 변환에 대립시킨다. 기욤은 특히 샤르트르학파의 환경 가운데서 자 자기 앞에 있는 많은 저항을 곧 발견할 것이다. (512)
이런 논쟁의 역사는, 만일 사람들이 기욤의 세계의 철학(Philosophia mundi)과 티마이오스편의 주석을 단 그의 단편들을 비교한다면, 질베르 드 포레(Gilbert de La Porrée, 1076-1154)가 주장하는 관념들을 가지고 재구성하는 것이 편하다. 질베르는 또한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Bernard de Chartres, 1070경-1130)의 제자이며, 오랫동안 샤르트르 수도원의 사무총장이었다. 이런 이유로 기욤은 티마이오스편의 유명한 구절(43a)에 지지받는 자들에게 암시를 했다. 이자들은 기욤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 유명 구절은 감각성의 유동성 때문에 요소들이 안정된 실체들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그런데 질베르는 우리가 그를 알다시피, 티마이오스편을 충실하게 믿었고, 두 분분으로 구별했다. 한편 감각적 네 가지 요소들이 있도 다른 한편 네 가지 요소들의 이데아들이 있다. 전자들은 물질의 수용[그릇](플라톤이 필연성, 환상, 유모, 어머니)이라고 부른 것) 안에서 여러 물체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그들 사이에 서로 섞인다. 후자들은 가지적 물질로부터 형성된 순수 실체들이고, 이 실체들은 표본들과 더불어 신 가까이에 발견된다. 따라서 질베르는 감각적 세계 속에 흐름(fluence)과는 다른 것을 보는 것을 거부했고, 신적 실재성 속에서만 고정성을 발견하였다.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자연학[물리학]은 물질 속에서 또한 참여의 상태에서 참여된 형상들만을 차지할 뿐이다. 따라서 자연학은 항상 가지적 세계를 참조되어만 했다. 반대로 기욤은 자치적인 자연학에 대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공중(firmament)은 얼어있는 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제시한 후에, 그는 덧붙여서, “그러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또한 우리는 신이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 불행하도다! 이런 말투들보다 더 비참한 무엇이 있는가? 신은, 사물이 어떻게 있는지를 보지 않고서도, 사물이 그렇게 있어야할 이유도 없이, 게다가 그 사물의 유용성을 드러냄이 없이도, 사물을 만들 수 있는가?” 기욤은 존재들의 기원에 대해 소위 말하는 “자연적” 설명을 찾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들의 기원에 관한 것에서 루크레티우스(Lucrèce, 전99-전55)의 사변들로 되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존재들의 형성작업을 자연의 작업활동(natura operans)에게 속하게 해야 했다. 그러한 개념작업이 신적 권능을 범한 것이라고 자기에게 반대했던 자들에게, 전혀 반대로 그 개념작업은 신적권능을 깨뜨리는 것이고, 왜냐하면, “사물들에게 그러한 자연을 부여했던 것, 그리고 자연의 작업활동(natura operans)을 매개로해서 이렇게 인간 신체가 창조했던 것”, 그것은 이런 권능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들은 자연의 힘들을 모르는 인간들로부터 온다. 반면에 “나, 나는 이법을 전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법이 우리에게 모자란다면, 우리가 성령과 신앙을 신뢰해야 한다.” 게다가 기욤은, 아마도 여기서 루크레티우스와 티마이오스편(cf. p. 139)의 영감을 따르면서, 이런 재료들에서 사람들이 그럴듯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재인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자연주의는 플라톤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의(심지어 스토아학파를 포함하여) 기원들에 대한 주제들을 약간 혼동된 방식으로 섞어 놓았다. 왜냐하면 기욤은 세계의 영혼을 “신에 의해 사물들 속에 개입된 자연적 힘(cette force naturelle, vigorem natualem)이라 정의하였고, 그리고 그 힘에 의해 몇몇은 살아있고, 다른 몇몇은 살아있으면서 느끼고 있고, 또 다른 몇몇은 살아있으며 느끼고 추론한다. (513)
5절 빅토리아학파의 신비주의 Le Mysticisme des victoriens 513-
크리스트주의가 규준화하는 중량감 있는 평결자들 그 옆에, 플라톤주의를 새롭게 하는 샤르트르학파들이 스스로 세상을 묘사하면서 수도원 질서의 깊은 개혁에 연결되어 있다. 그 개혁은 중요한 신비적 운동이며, 이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은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 1090–1153)와 위그 드 셍 빅토르(Hugues de Saint-Victor, 1096-1141)이다. 수도원의 이상, 종교적 지위(le status religiosus)의 이상은 금욕(renoncement, 포기)의 삶이다. 그 생활에서 사람들은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즉 청빈, 순결, 순동을 따르며, 공통의 규칙을 따른다. 수도원 질서들의 역사는, 초기 규칙들의 망각과 – 세속적인 삶을 성직생활 속에 스며들게 하기에 이르는 망각과 – 새로이 규칙을 부여하는 개혁들 사이에서 연속적인 교체(une alternance)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11세기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에 의해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정신은 새로이 약화되었고, 그리고 12세기에 시토파의 개혁과 더불어 그 정신이 다시 깨어난다. 반면에 브뤼노(Bruno le Chartreux, 1030-1101)는 샤르트뢰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이 시스테리앙 수도사는 “농부, 기능공, 금욕자로 혼성된” 수도사이다. 따라서 정신적 삶은 그에게 있어서는 크리스트교의 근본적 진실들에 대한 정신적 성찰에 있을 것이다. 그 명상 덕분에 그는 크리스트교에 자기의 지성과 자기의 의지에 점점 더 잘 복종할 것이다. (514)
12세기의 수도원의 신비주의가 태어나는 것은 이런 명상으로부터인데, 그 명상에서 상상적인 이끌림(entrainement)은 비판적 반성을 거의 전적으로 폐기한다. 그것의 전형은 유명한 성 베르나르의 살아있는 신(De Diligendo Deo: fr. De l'amour de Dieu)이다. 베르나르는 시스테리앙의 기원이며, 클레르보 수도원 원장이며 제2십자군 원정(1146)의 설교자였고, 종교에서 옛 동반자인 교황 외젠 3세(Eugène III, 1080-1153)의 조언자였다. 그는 교황에게 교회의 잘못들과 교황권의 의무들에 관한 논저인 숙고론(De la considération)을 보냈다. 이러한 열렬하고 정열적인 정신이기에, “철학 전체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인식이다”라고 하며, 또는 똑같은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을 위한 신의 사랑에 대한 인식, 즉 인간들을 신의 사랑으로 이끄는 인식이다. 이런 사랑은 모든 크리스트교의 드라마 전체를 설명한다. 사랑에 의하여 신은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 자유로운 의지를(스토아적 표현으로 동의(assentiment, consensus)로 정의되는데) 부여했다. 그 자유의지가 추락했다. 이러한 일련의 착오에서, 예수의 육화와 체벌은 신에게서는 자신의 정의와 자신의 연민에 만족하는 수단이었다. 그 크리스트교인은 이제 크리스트를 따르면서 스스로 구원하는 능력을 갖는다. 크리스트교의 생활은 관조에 도달하기위하여, 숙고와 탐구로부터(이것은 우리 자신, 세계, 신에 관한 성찰이다) 출발하는 이런 길의 묘사이다. 여기서 관조란 “진리로부터 보장되고 의심스럽지 않은 개념작업”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국 황홀경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다. 활홀경에서 영혼은 신체적 감관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더 이상 영혼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그 영혼은 신의 향유에까지 차지하게 되었다(est emportée, rapitur). 그리고 그 영혼은 자기 자체와 매우 다른 것이 되고, 신과 너무나 닮아서, 결국에는 신격화되었다. (514)
내적 삶의 회화[그림] 속에서 전통적인 것 전부를 잘 보아야 한다. 이런 삶에 대한 논저들은 필론(전20-후45), 플로티노스(205-270),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래로 수세기를 걸쳐서 재생산되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우리가 연구했던 환경 속에서 신비주의가 종교적이고 감정적이며, 전혀 사색적이 아니라는 이런 사실에 지지해야만 한다. 그런데 신비주의는 영혼을 위한 삶의 규칙이지, 마치 플로티노스에게서처럼, 우주의 철학적 개념작업에 지지받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재적 성찰의 전통이지, 신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의 전통이 아니다. 심지어는 위그 드 생 빅토르와 그를 계승한 자들에게서 경향이며, 파리에서 위그 드 생 빅토르 교직내부에 스승들과 같은 이들도 이런 경향이다. 그것은 베르나르처럼 중요한 정치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직자들의 교육에 자신들의 모든 고민들을 부여하는 신학적 스승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빅토르 계보들]은 또한 샤르트르학파들과 아주 달라서, 이들은 교육의 전통적 개념작업에 만족해한다. 그리고 위그의 교육서(Didascalicon, 1137) 6권은 자유예학들과 신학을 포함하면서, 이지도루스(560-636)의 방법에 따른 교재들이다. 사람들은, 문법에서부터 윤리학과 이론 철학(수학, 자연학, 신학)을 관통하여 역학으로 가는, 훨씬 더 완전한 연구들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물체를 한꺼번에 갈기갈기 찢기를 바라는 자들에 대해 그리고 별난 판단에 의해 자신들에게 마음에 드는 것만을 임의적으로 선택하는 자들에 대해” 항의 했다.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보편주의의 전통이 12세기에 위협받으며 시작되었고, 우리는 곧 누구군가에 의해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비적인 관조가 매우 완전한 지적인 교육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그 빅토리안 출신은 매우 많은 작품들에서 신비적 관조의 단계들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관조와 그 종류들(De contemplatione et eius speciebus: La Contemplation et Ses Espèces) 속에서 점점 더 어려운 정신적 훈련들의 규칙들의 종류가 묘사된 것은 크리스트교의 내부적인 삶 전체이다. [규칙 종류들로서] 도덕과 정신적 질서들에 관한 성찰, “내부적 인간”이 자기 심장의 비밀들을 주의깊게 탐색하는 독백, 은 과 신적 질서들, 감각적 선함들의 유혹에 대해 방어하는 신중함(circonspection, circomspectio), 마지막으로 자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 차이를 갖는 상승이 있다. [첫째] 활동하는 상승(ascensio in actu), 이것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데, 보시를 베푸는데, 부를 경멸하는데 있다. 둘째 우리의 감정 속에서 상승, 즉 감동하는 상승(ascensio in affectu), 이것은 완전한 겸손함, 자비로움, 노련함, 관조의 순수함 속에 있는 것이다. 결국 가장 높은 곳에 지성 속에서 상승, 예지하는 상승(ascensio in intellectu), 이것은 피조물들을 아는데 있고, 그리고 창조자를 아는데 있다. 게다가 신의 인식은 점점더 완전한 다섯 양태들에 따라서 작업된다. [첫] 피조물들[신체들]로부터 출발하면서, 피조물들에 대한 관조는 창조자의 이데아로 인도한다. [둘] 신적 본질의 이미지이면서 또한 마치 우주 속에서 신처럼 신체 속에 도처에 있는 영혼의 자연[본성]을 통해서, [셋] 우리에게 신의 속성들을 계시해주는 성문(l’Ecriture)을 통해서, [넷] 우리에게 신에게 올라가게 하는 관조의 빛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통찰을 통해서, “그 통찰로부터 현재로 거의 매우 조금한 향유하는 그리고 통찰 속에서 신적 취향의 부드러움에 의해 매료되어 사람들은 휴식과 평화 속에서 신만을 관조한다.” 사람들은 어떤 배려[주의]와 더불어 이런 신비주의가 정통론(orthodoxe)으로 남게 되는지를 본다. 그것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 관조는 근본적인 크리스트교의 덕목들에 즉 신앙과 자비(charité, ἀγάπη)에 대한 승화일 뿐이다. (516)
위그의 작품은 리샤르 드 생-빅토르(Richard de Saint-Victor, 1110-1173)에 의해 계속되었고, 그의 신비주의는, 만일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합리주의와 주지주의로 또한 더욱 깊이 침투되었다. 그는, 성 안셀무스처럼, 신적 독단론들의 “필연적인 이법들”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의 관조적 은총(De gratia contemplationis)은 황홀경의 지적 예비로서 거대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516)
세계를 총체적으로 오해하기는커녕, 이 빅토르 수도원학자들은 과학에 관심이 있었고 심지어는 기술(techique)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기술에서 그들은 원죄의 귀결들에 맞는 섭리적인 “치료제”를 본다. 앙드레 드 생-빅토르(André de Saint-Victor 1110-1175)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성문에 대한 역사적 주 해석으로 초기 수준 낮기도 하고 매우 부서지기 쉬운 것들을 거부했다. (516)
6절 삐에르 아벨라르 Pierre Abélard 516-
평결파학자들, 샤르트르학자들, 빅토리아학자들은 서로가 겉보기에 매우 다르고 심지어는 적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정신으로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람들은 이들 모두에게서 해방의 감정을, 곧 시작하는 문명의 환희를, 그들이 다루는 빈약한 수단들에 부딪히는 지적인 열렬함을 느꼈다. 12세기는 진실로 백과전서들과 주석들로부터 해방되는 첫 세기였다. 인문학적 형식들은 보다 유연하게 되었고 또한 보다 개인적이 되었다.
삐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Abaelardus, 1079-1142)는 그들 중에 가장 특성있는 대표자이다. 여러 해 동안에 그는 상승하는 성공 덕분에 믈룅(Melun)에서, 꼬르베이(Corbeil)에서, 파리의 성당학교에서, 생-쥬느비에브의 수도원에서 변증법을 가르쳤다. 초보자를 위한 입문들(Introductions pour les commençant), Glossulae I(Gloses, 주해들, 비평들), 포르퓌리오스에 관한 작은 비평들(Petites Gloses), 변증법(Dialectique, 1121) 등은 이런 교육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그는 1112년경에, 안셀름 드 라옹(Anselme de Laon, 1050-1117)과 더불어 신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1113년에 파리 성당학교에서 행한 교육은 모두 신학적이었다. 사람들은, 엘로이즈와 사랑의 연속으로 1118년에 어떤 파국이 끝장을 냈는지를 한다. 그는 그녀의 삼촌이며, 성당 참사원인 퓔베르에 의해 잔인하게 거세당했다. 그는 셍-드니 수도원으로 은퇴했다(서른아홉). 그럼에도 그는 1122년에서 1125년에 노장-쉬르-센 가까이 있는 파라끌레에서 자기의 교육을 재개했고, 그러고 나서 생-질다-드- 뤼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1125-1132). 이 여러 해들 사이에 그는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Sic et non, 1121), 기독교 신학(Theologia Christiana, 1123), 신학 입문(Introductio ad Theologiam, 1125), 윤리학(Ethica, 1125이후)을 썼다. 이런 시기에 나의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 Epistola I)(Histoire de mes malheurs)를 썼는데, 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397-401) 보다 더 루소의 고백록(1765-1770)에 닮았으며, 그리고 엘로이즈(Héloïse, Έλούσα, 1092-1164)와 사이에 유명한 서신도 있다.
아벨라르의 교육은 중세에서 신학자들의 비난을 가장 심하게 자극했던 교육들 중의 하나이다. 두 종교회의에서 단죄 받았는데, 1121년 스와송에서는 신의 단일성과 삼위격(De unitate et trinitate divina, 1120), 그리고 1141년 상스에서는 신학 입문(Introductio ad Theologiam, 1125) 때문이다. 그의 신학적 견해들은 마치 모든 이단들의, 즉 아리안파, 펠레기우스파, 네스토리아스파의 요약처럼 간주되었다. 교황 카스텔로(Castello, 1375-1144, 재위 1143–1144)에게 보낸 랭스의 대주교의 편지에 따르면(1141),그는 신적 격위들의 동등성을, 은총의 효과성을, 크리스트의 신성을 부정했을 것이다. 이 모든 부정들은 유일한 근원을, 즉 그의 중요한 반대자인 성 베르나르(1090–1153)가 그를 비난한 거대한 지적 오만을, 가졌으리라. “인간적 천재성(génie humaine, humanum ingenium)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횡령하게 하는 그 오만은 신앙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고” 있고, 또한 “그가 인간의 이법에 의해 신이라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모든 신앙에 속하는 모든 장점을” 부정하고자 애썼다. (517)
따라서 그것은 크리스트교 삶의 모든 체제 전체인데, 사람들은 그가 바꾸기를 원했다고 비난했다. 그 변경해야할 체제란, 모든 불가사의가 제거되는 독단[교리], 전통을 무용하게 하는 독단, 인간 그 자체에서 신뢰에 지지하는 도덕, 은총과 더불어 성체의례를 무용하게 하는 도덕 이다. 사실 말하자면, 아벨라르는 그러한 합리주의를 고백하지 않았다. 그가 쓰기를 “내가 바울에 저항하는 그만큼의 철학자이기를 원치 않으며, 게다가 내가 크리스트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만큼의 아리스토텔레스이기도 원하지 않는다.” 또는 “이법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는 것을 토론하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것인지를 보아라, 그리고 감관과 인간적 이법(raison)에 의해 그의 말투들 모두를 밝혔다고 하기에 앞서서 먼저 멈추지 않는 것도 얼마나 건방진 것인지를 보아라.” (517)
아벨라르에서 이런 이법(cette raison)은 무엇이었던가? 그가 열정적으로 교양을 쌓았던 변증법에 의해 전적으로 형성된 이법은 4학과의 과학들의 거의 완전한 배제에 있다.우리가 곧 보게 될 것이지만, 그로부터 철학을 기예(cet art)에 접근 시켰던 변증론자들의 학파가 나온다. 게다가 그의 변증론(Dialectique, Dialectica)(1121년의 변증론)은 오로지 보에티우스의 번역들과 작업들 위에 기초되어 있었다. 그 변증론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논리학적 논저들을, 제1분석론과 제2분석론, 소피스트들에 대한 반박론, 변증론(Topiques, Τοπικά)을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작품들은 1125년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변증론은 범주론 주석을 단 보에티우스에게서 변증론이 하나의 과학인 것으로서 남아있었다. 그 과학은 사물들 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이 사물들을 기호화하는 한에서 그 단어들 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증론은, 매우 중요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을 전혀 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한 아벨라르(un Abélard)가 우주를 표상하는 방법을 찾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리라는 것은 그의 변증법에서가 아니라, 이 “합리론자”가 그 행동에 대해 말하는 윤리학의 몇 구절 속에서인데, 우리에게 그 행동을 끼치게 하는 다이몬들은 자연적 힘들에 대한 다이몬들의 자신들의 인식 덕분이라 한다. “왜냐하면 풀들 속에, 씨앗들 속에, 나무들 또는 돌들의 자연들 속에, 우리 영혼들을 다시 움직이게 하고 또는 평온하게 할 수 있는 많은 힘들이 있다.”자연으로부터 살아있고 열정적인 인식과 변증법적인 건조한 분류 작업, 이 둘 사이의 대비를 잊지 않아야 하다. 그 분류작업의 그물망 안에서 사람들은 사물들을 다룰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518)
그럼에도 변증법은 사물들의 인식에 대해 총체적으로 무관심일 수 없다. 아벨라르의 변증법적 교육의 프로그램은 우선 충분히 단순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복잡하지 않는 항목들을 연구한다(다섯 태들과 범주들), 그리고 복잡한 항들을, 다시 말하면 명제와 정언적 삼단논법, 명제와 가언적 삼단논법을 연구한다. 마지막으로 정의들과 분할을 연구한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단순한데, 왜냐하면 가언적 명제의 경우에, 그는 보에티우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에 대해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료와 형상의 문제들처럼 또한 원인들의 이론처럼, 자연학적인 문제들과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개입하게 했기 때문이다. (518)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토론의 방법으로 보편적인 방법을 만들기 위한 그의 의도 속에서, 변증법의 모호한 성격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185쪽). 그 모호한 성격은 그 유명한 보편자들의 논쟁의 기초에 속한다. 만일 단어들이 사물들을 기호화한다면, 사람들은 개별적 실체들의 류들과 종들을 발설하는 단어들이 어떤 사물들을 기호화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류들과 종들(동물 또는 인간)은, 우리가 상기하듯이, 개별적 주어(소크라테스)의 속성들이다. 그러나 그 속성들은 우발적 사건들의 차이에서(백인, 과학자) 주어의 본질 속에 되돌아가며, 말하자면 이 속성들은, 그 속성들이 없이는, 주어가 자기이라는 것을 그치는 것과 같은 그런 속성들일 것이다. (519)
사람들은 회상할 것이다. 포르피리오스(234-305)와 그 이후 보에티우스(480-524)는 류들과 종들, 보편자들이 사물들의 자연 속에 현존하는지를 또는 이들이 헛된 상상작용의 단순한 산물인지를 자문했다. 사람들은 이점에 관하여 로스켈리누스(Jean Roscelin, Roscelin de Compiègne 1050경-1121)의 견해를 보았다. 샤롱의 주교였던 기욤 드 샹뽀(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는 다른 학설을 지녔다.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또 다른 개별자들의 본질적 속성인 인간(homme)은 본질적으로 개별자들 각각에서 완전 동시적으로 동일한 실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개별자들은 인간들인 한에서 그들의 본질에 의해서 전혀 다르지 않지만, 그들의 우발적 사고들에 의해서는 다르다. 거기에서 게다가,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것은 매우 오랜 견해이다. 사람들이 류를 종차화 하는 차이들(추론적, 이법 없음)을 류에게 보탤 때, 류(동물)는 그 자신에 동일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발적사건들을 종에게 덧붙였을 때, 종은 그 자체와 동일하게 남아있다. (519)
아벨라르는 자신의 기욤(1070-1121)의 주제를 논의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는 귀욤의 제자였고, 심지어는 그가 스승의 주제를 수정했다고 한다. 당시에 기욤은 다양한 개별자들 속에서 보편자는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차이의 부재에 의해서(non essentialiter sed indifferenter)” 동일한 실재성임을 인정했다. 그것은 동일한 주제의 부정적 측면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플라톤에서와 크라테스에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욤은 심지어 더 멀리 나아가서, 그는 끝내는 소크라테스의 인간성과 플라톤의 인간성 사이에 본질적인 동일성도 없고 구별의 부재도 없으나, 단순히 근사하다(similitude)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519)
이런 토론은 16세기 이전에 이데아들의 현존의 주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분리했던 충돌과 동일한 평면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신학적 플라톤주의는 이데아들을 신의 사유들과 사물들의 표본으로서 인정했고, 이 플라톤주의는 유명론(le nominalisme)과 매우 잘 화해할 수 있다. 그 유명론은 보편자들이 우리가 이들을 명명하고 사유하는 대로, 진실한 실재성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가끔 플라톤주의자인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게서 유명론의 기원을 본다. 왜냐하면 그는 변증법이 언어적 표현(l’expression linguistique, dictio)에만 관여할 뿐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20)
아벨라르는 신학적인 면에서 플라톤주의 실재론자이다. 그는 “마크로비우스(370경-430경)와 플라톤과 더불어, 신적 지성은 사물들의 독창적 종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이 독창적 종들은 그것들이 물체들로 표출되기에 앞서서 이데아들로 불려졌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스승 기욤의 보편자들의 실재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에 반대하여 보에티우스의 옛 반박문을, 즉 사물로부터 나온 사물은 미리 말해질 수 없다(Res de re non praedicatur)를 높이 평가했다. 보편자는 하나의 속성이다. 그런데 “어느 실재성도 다수의 사물들이라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이름[명사]이다”. 따라서 기욤이, 마치 가장 높은 류에서 시작하여 가장 낮은 종들에 끝나는 분류작업의 구성원들처럼, 류와 종을 따로 고려했던 반면에, 보에티우스를 따랐던 아벨라르는 보편자는 무엇보다 먼저 술어이라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았고, 그 술어는 여러 개별 주어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보편자는 여러 주어들의 술어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보편자들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이론을 그의 제자인 쟝 드 살리스버리(Jean de Salisbury, 1115경-1180)가 스승에게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보편자들 속에서 담론들(discours sermones)을 보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보편자들을 토대로 그 위에 쓰여졌던 모든 것의 방향을 바꾼다.” 이 담론들, 다시 말하면 보편자가 주어들과 따로 담론들을 현존하게 할 수 없으며, 보편자는 주어들의 속성이다(sermo praedicabilis). 사람들은 심지어 개념론(un conceptualisme)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 (520)
아마도 이런 해결책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화작업의 이론 사이에 연결이 있는 것 같다. 아벨라르는 이런 연결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3권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보에티우스의 구절들에서 빌려왔다. 그는 이러한 것의 중요성을 파악한 첫째 철학자이다. 그는 과정을 묘사하고, 그 과정에 의해, “실재성을 피상적으로 도달하는” 감각들 이후에, 상상작용은 정신 속에서 실재성 자체를 고정한다. 그러고 나서 예지(l’intellect)는 실재성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성의 자연 또는 성질을 파악한다.이런 자연 또는 형상은, 추상작용에 의해서 이런 자연이 물질과 분리되어 파악된다고 할지라도, 마치 분리된 실재성처럼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 “상상작용 없는 예지는 없다.” (520)
아벨라르로부터 출발하여, 사람들은 일반관념들의 형성작용에 대한 조건들을 동시에 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보편자들을 논하지 않는다. 또한 그 세기 전체는 일종의 “온건한 실재론”으로 향하는 경향을 나타난다. 온건한 실재론은 일반 명사들이 실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사물들과 동일한 자격으로 실재적 사물들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익명으로 쓴 예지에 대하여(De Intellectibus)라는 논저의 저자의 태도이다.이 논저는 예지적 인식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분석으로 진행되었다. 마치 세 개의 돌들처럼, 복합된 사물에 대해 예지적 지각작용(perception intellecuelle, intellectus)은 때로는 단순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유일한 직관(uno intuitu)으로 그 돌들을 지각할때이다. 때로는 복잡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의 인상보다 더 많이 인상들(pluribus obtuitibus)을 통하여 이것들을 인식할때이다. 그러나 예지는 단순하거나 복잡하거나 간에 항상 하나(un)이며, 예지의 작동(son acte)이 “연속성을 가지고, 또한 정신의 유일한 충력에 의해 일어나는” 한에서 하나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듯이, 단순성과 통일성은 사물들을 합치는(joindre les choses, intellectus conjungens) 예지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때는 그것들(단순성과 통일성)이 사물들 자체 속에 있지 않다. 동일한 방식으로 추상작용 속에서, 예지는 형상과 물질을 분리하면서, 사물들을 분할하고 따로 떼어낸다. [이때] 사물들은 실재성 속에서 분할되지도 않고 따로 떼어내 지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 두 경우에서 어떤 경우에서도, 예지는 무용하고 헛되다고 하는 결과에 이르지 않는다. 내가 인간(homme)과 같은 보편적 용어들을 사용할 때, 예지는 그런(무용, 허구)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러그러하게 실재 상으로 항상 있다는 사실은 내가 그를 그러그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단순하게 일반 명사와 개별적 실재성은 없다. 또한 예지의 고유한 의 대상인 명사의 의미가 이다.익명의 다른 단편[위의 익명의 논저]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소크라테스, 사람, 동물은 동일한 사물이지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고려된 사물이다. 류(類)는 사람들이 류[동물]에서 생명과 감성을 생각할 때이며, 종[사람]은 사람들이 종에게 이치(raison)을 덧붙일 때이며, 개별자[소크라테스] 개별자에게 우발사고들을 고려 할 때이다.이 모든 학설들 속에는 유멸론의 많은 흔적이 있다. 그런데 실재론의 흔적은 더 이상 없다. 만일 플라톤의 실재론이 자주 주장되었다면, 그 플라톤의 실재론은 보편자들의 문제와 아주 다른 문제에 응답한다.그리고 사람들은 류의 실재성과 사물들 가운데 종들을 엄격히 주장하는 이론을 헛되이 찾으려 할 것이다. 쟝 드 살리스버리(1115경-1180)가 실재론자의 전형처럼 표현하는 작가는 고띠에 드 모르따뉴(Gautier de Mortagne, 1100경–1174)인데, 고띠에는 보편자들이 개별자들에게 통일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롬바르도(Pietro Lombardo, 1100경-1164)는 성 안셀름과 반대로, 삼신격의 교리(독단)를 모든 실재론적 가정으로부터 분간해 내고, 근본적으로 신 속에서 세 인격들의 통일성을 류 속에서 종들의 통일성으로부터 또는 종 속에서 개체들의 통일성을 구별하려고 세심하게 다룬다.따라서 영역(le champ)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티우스로부터 온 학설에서 자유롭게 남는다. 즉 사물들 속에 신적인 이데아들의 이미지와 같은 보편적 형상들이 있다. 이 형상들은 자기 속에 현존하지 않으나, 예지의 추상작업에 의해서만 따로 떨어져 파악된다. (522)
아벨라르가 이렇게 제시한 대로 신학적 문제는 보편자들의 문제와 동일한 정신 상태로부터 도출된다. 변증법적 교육은 끝내는 어떤 심정적(mentale) 구조를 창조하고, 또는 만일 더 좋은 표현이라면, 끝내 실재성을 분류하는 어떤 방법을 강요한다. 이 모든 사물로부터, 사람들은 포르퓌리오스의 다섯 태(態) 중에서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들 중에서 어떤 것[사물]에 실재성이 다시 들어가는지를 자문한다. 모든 사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신적 실재성으로부터, 가장 정통적인 신학자들이 어떤 견해로[입장에서] 실체, 본질, 고유성, 관계, 동일성, 다양성 등의 단어들을 발언하는지를 자문한다. 사람들이 보에티우스에 이어서 제기하는 문제이다. 보에티우스의 삼위격에 대하여(De Trinitate)는 변증법의 항들을 신적인 실재성에게 적용하는 것과 다른 주제가 아니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해결책을 상기하게 된다. (522)
이 문제는 12세기에 열광했던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아벨라르의 크리스트교 신학(Théologie chrétienne, 1124)은 이점에 관하여 그의 교유한 교육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들의 교육의 목록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 베르나르와 그의 편[당파]이 아벨라르를 고발했다는 것을 저 위에서 보았다. 그 이유는 아벨라르가 신적 사물들의 인식에서 변증법의 역할을 과장했다는 것이다. 아벨라르의 모든 작품이 변증론자들에 대항하여 정확하게 인도되었고, 사람들은 믿었을 것인가!,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비난했던 과오로 그 변증논자들을 고발하였는데 말이다. “이런 소품들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우리에게 철학적 추론들을 가지고 공격한 허위-철학자들에 대항하여 오히려 진리를 방어한다고 이해한다.”따라서 아벨라르는 급진적 신학자들과 과장적 변증론자들 사이에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전자들은 변증법적 구별들을 감각적 사실들만을 진리로서 간주하면서, 그들의 변증법을 신적인 실재성에 적용을 거부했다. 후자들은 그러한 변증법적 구별들을 삼위격에까지 적용하기를 원했다. (523)
이 둘째 입장으로부터 아벨라르가 우리에게 묘사한 “이단들”이 나온다. 알베릭 드 랭스(Albéric de Reims, 1085경-1141)의 입장,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유일신이라는 것으로부터 신은 스스로 그 자신을 생성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질베르 위니베르셀(Gilbert l'Universel (Gilbertus Universalis), ?-1134)의 입장, 그는 신 속에서, 그의 신성과 3위격 이외에도, 세 가지 본질을 구별하고자 원했다. 부성, 부자관계, 과정, 이것들에 따라서 위격들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앙제의 부속학교 교장인 윌제르(Ulger, lat. Ulgerus, ?-1148) 입장, 그는 신 속에서, 위격들의 고유성들과 통일한 자격으로 정의와 자비(miséricorde)와 같은 속성들을 구별했다. 조슬랭 드 비에르지(Joscelin de Vierzy, ?-1152)의 입장, 그는 신은 속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몇몇 사물들은 자신이 사물들[사정들] 예언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벨라르는 샤르트르학파의 입장을 고발하는데, 샤르트르학파에 따르면 신은 세계에 앞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523)
사람들은 이 모든 “이단들” 속에서 변증법적 규칙들의 적용을 쉽게 따라간다. 알베릭은 실체의 용어를 적용한다. 질베르는 규칙을 적용하는데, 규칙은 각 존재가 구별된 본질을 갖기를 원하는 규칙이다. 윌제르는 범주론 속에서 위격들(아버지, 아들)을 신의 다른 속성들로부터 구별하는 어떠한 수단도 보지 못한다. 조슬랭은 성스런 원문들에게 명제들의 양상의 용어를 적용한다. 샤르트르학자들은 규칙을 적용하는데, 원인은 결과 없이도 현존할 수 있다는 규칙이다.
아벨라르의 해결책은 우선 완전히 급진적인 것으로 보인다. 신 또는 사람들이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떠한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신이 실체라고 심지어는 말할 수 조차 없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체는 우발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름도 그에 적합하지 않다. “그 자신 속에서, 신은 철학적 규칙들을 위반한다.” 그러나 변증법의 이런 투박한 적용이 외에, 플라톤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르친 길이 있는데, 근사성들(les similitudes)의 길이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마치 그 밀납이 사람들이 [쟈료로서] 밀납을 가지고 모델로 만든 이미지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본질에 관한한(essentialiser) 동일한 밀랍이다. 그럼에도 이미지는 밀랍으로부터 나오고, 이미지와 밀랍은 각각이 각각에게 맞지 않는 하나의 성질을 갖는다. (524)
이것은 아벨라르가 티마이오스편에서 그리고 마크로비우스에게서 찾고 발견했던 동일한 종류의 이미지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플라톤의 학설을 문자 그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알레고리적 주해석에 순응할 권리를 요구했다. “수수께기에 의한 언어는 철학자들에게나 또한 예언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친밀하다(p. 46)” 또한 그의 티마이오스편의 주해석은 샤르트르학자들의 주해석처럼 신-지성-세계영혼의 삼원성 속에 크리스트교의 삼위격을 재발견한다. 주해석은 완전히 알레고리일지라도, 플라톤 문자에서 비정통이라는 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재발견한다. 특히 그는 세계영혼을 성령에 동일시하기 때문에 많을 잘못을 얻었다. 세계영혼이란 데미우르고스의 첫 피모물이며, 데미우르고스는 세계영혼에 의하여 세계를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다. 만일플라톤이 이 영혼에게 시간에서 시초를 부여한다면, 반면에 성령은 영원하다면, 그것은 세계 속에서 정신의 조작작업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이해한다. 이 조작작업은 시간적이고 또한 점진적이다. 만일플라톤이 세계 영혼을 두 개의 본질, 볼 수 없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으로 혼성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그 자체로서 단순하고, 그 결과들(les effets)에서 또 성령이 인간영혼에게 주는 그 선물들(les dons)에서는 여럿이기 때문이다. 만일플라톤이 세계를 영혼에 의해 추론할 수 있으며 활동하는 생명체로서 고려한다면, 그것은 형상화되는 방식으로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어느 정도로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우리 영혼이 생명을 우리 신체에 주는 것처럼, 세계영혼 또는 성령은 정신적 삶을 우리 영혼들에게 준다. (524)
사람들은 르네상스가 그렇게 좋아할 모든 자연주의를 플라톤으로부터 잘라서 해결하는 것과 같은 의도를 본다.아벨라르는 자기의 절차가 지닌 “폭력적”인 것을 고려했다. 그는 몇 줄을 특성적으로 썼다. “만일 사람들이 나를 기회에 맞지 않고 또 폭력적인 해석이라고 고발한다면, 이런 해석이 맞지 않은 설명에 의해 철학자들의 원문을 우리의 신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고, 그리고 이런 해석이 그들에게 그들이 갖지 않았던 관념들을 빌려주었다면, 예측을 발설했던 자(성령)와는 다른 의미를 카이파에게 빌려주면서, 성령이 카이파(Caïpha)의 입을 통하여 크게 말하게 할 이런 예측(cette prophétie)을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말이다(p. 53).”
사람들은 아벨라르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은 추론에 의해서 신앙에 의해 믿었던 것을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안셀무스의 변증법적 방법도 아니고, 어느 정도로 독단[교리]으로부터 독립적인 샤르트르학파의 철학도 아니다. 이것은, 철학적 용어들 속에서, 적어도 근사성에 의해 신적 실재성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신적 실재성의 이미지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un effort)이다. (524)
7절 철학에 반대하는 논전[쟁]들 Les polémiques contre la philosophie 525-
기욤 드 꽁쉬(1080-1154)의 경향성과 같은 이런 경향성은, 매우 단순한 신앙을 토대로 하는 수도원 개혁이 중심이었던 이런 터전들 속에서 불안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 베르나르와 그를 둘러싼 수도자들은 이에 대해 맹렬한 반대자들이다. 이들의 관점은 기욤 드 생-띠에리(Guillaume de Saint-Thierry, 1085경-1153)의 신앙의 수수께끼(Aenigma fidei) 속에 재현된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공통 신앙을 생각한다. 공통신앙이란 “신의 교회에서 어른들 만큼이나 어린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의 신앙이어야 한다.”그는 복음의 단순성과 성령의 고유한 스타일을 생각하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은 삼위격에 관한 복잡한 질문들에서 어떠한 암시도 발견하지 못한다. 신학자들은 이단들에 대항하여 옹호하기 위해 삼위격을 제시해야만 했었다. “실체에 대한 술어들, 즉 우발, 관계, 류, 종 등은 신앙의 자연[본성]에 낯선 것들이다. 이법에 대한 공통적이고 통속적인 도구들은 신적인 것[사물]들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p. 409a; 418b).” (525)
거기에 기욤 드 생-띠에리가 기욤 드 꽁쉬에게 행한 비난들의 근거가 있다.이 비난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티마이오스편이 우주발생론(une cosmogonie)라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우주발생론이란 신적인 실재성 속에서 세계의 창조에 연관이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반대로 소위 말해 계시된 삼원성의 신학은, 신과 세계의 연관 바깥에서(dehors)신에 도달한다. 그런데 기욤 드 꽁쉬는 플라톤으로부터 영감을 받아(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도), 성부를 권능과 동일시하며, 권능에 의해 신은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성자를 지혜와 동일시하며, 지혜에 따라 신은 아들을 창조한다. 성령은 의지와 동일시하며, 의지에 의해 신은 성령을 관리한다. 이때부터 “성부는, 성자와 연관에 의해서가 아니라{정통신학에서처럼}, 오히려 피조물들과 연관에 의해서 신이라는 것이다. 즉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 방식에 의해서 신이라는 것이다.”(338d) 삼위격은 그의 내밀성 속에서 신적 생명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과 관계를, 마치 자비 또는 궁휼[관용]과 같은 관계를 묘사한다. (525)
[기욤 드 생-띠에리가] 아벨라르에게 행한 비난도 마찬가지 자연[본성]이다. 삼위격을 권능의 삼원성(la triade), 권능, 지혜, 선함에 동일시하면서, 그는 그 자체적으로 생각되는 신속에다가, 인간에 비추어서 생각된 신속에서만 진리일 뿐이라는 것을 옮겨놓는다. 그럼에도 이런 동화작업은 고전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작업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그리고 베다(Bède, lat. Beda, 672-735)와 롬바르도(Lombardo, 1100경-1164)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 동화작업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작업은 불가사의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욤은 또한 이렇게 그를 비난했는데, 티마이오스편과 더불어 “신이 피조물들에게 향한 자비”에서 창조의 동기를 찾았다는 것이고, 또는 성령이 도처에 편재되어 있는 영혼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자, 이제, 정신보다 살(la chair)을, 신보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신학자가 있다. 그는 항목[용어]들을 더욱 명백하게 밝힌다. 감화작용(une affection)에 의해 움직여진 것 또는 어떤 것에로 펼쳐진 것, 이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신에게는 알맞지 않다.” (526)
8절 질베르 드 뽀레 Gilbert de La Porrée 525-
그럼에도 기욤 드 생-띠에리(1085경-1153)는 “신앙의 학설은 인간들에 의해 학설에 기여했던 명사[개념]들을 완전하게 거부하고 떨칠 수 없었다. 단순히 명사들을 학설의 규칙들에 하나하나 채택해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보에티우스가 따라갔던 프로그램을 자기의 삼위격에 대하여 속에서 지적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질베르 드 포레(Gilbert de La Porrée, 1076-1154)가 이에 대해 쓴 자기의 주석서에서 다시 다룬다. 질베르에 따르면, 모든 이단들은 사람들이 “신학적 사물들”에게, “자연적 사물들”에게만 알맞은 몇몇 규칙들을 적용했던 것으로부터 온다. 그가 이러한 고려에서 다룬 모든 예비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람들이 신에게 자연적인 사물들에게 빌려온 범주들을 옮기지 못한다면” 그는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단지 비례들을 간직하는 것이 알맞다. [그런데] 위태로운 임무가 있었는데 질베르 자신은 성 베르나르 뜻대로 채울 수 없었다. 베르나르는 파리 공의회(1147)와 투르 공의회(1148)에서 그를 단죄하려 했다. (526)
질베르는 샤르트르 학파의 제자인데, 그들의 플라톤주의에 동의한다. 게다가 그는 이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가장 깊이 있게 연구했던 자들에 속한다. 그는 1125년에 번역된 분석론을 알았다. 여섯 원리들(De sex Principiis)이라는 제목으로 그는 하나의 연구서를 냈는데, 이것은 능동, 수동, 어디에, 언제, 소유하다, 상황 등을 다루며, 고전으로 남았다. 특히 그는 형상 또는 본질 이란 용어를 강조했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샤르트르학자들에 의해서 이용되었던 세네카의 구절들을 지지하였다.세네카는 거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forme, εἶδος)을, 즉 작품의 바깥에 있는 모델과 작품의 내속하는 형상을 구별했다. 이것이 정확하게 질베르가 했던 구별이다.사람들이 그의 실재론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형상들이 그것들 자체저그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적으로 존속하는 개별적 실체들이 이 형상들, 즉 실체들에 내속해있는 형상들 덕분에만 존재 또는 본질을 갖는다고 말하는데 있다. 인간이 존재 또는 본질을 지니는 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 속에 인간성이라는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성 형상 그 자체는 합리성과 신체성의 형상들로 조성되어 있다. 거꾸로 실체들을 존속하게 하는(les subsistentiaedes subsitentes) 이 형상들은 그것들 자체에 의해서 존속할 수 없다. 말하자면 주어들일 수 없다. (527)
그런데 질베르는 형상에 관한 고찰들에서 자연적인 것들(naturalia)과 신학적인 것들(theologica)에 공통하는 규칙을 발견했다. 그가 말했는데, “존재는 항상 형상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두 질서들에 공통하는 규칙이다. 따라서 3위격들에 앞서서 신 자체 속에 형상, 즉 신성(divinité) 또는 자연성(déité)을 가정해야만 하고, 이 자연성에 의해 인격들은 형상으로 된다. 이런 구별 자체를 성 베르나르가 공격했다. 사람들은 이에 따라 비판적 문제의 모든 난점들을 충분히 잘 안다. 이 난제들에서 12세기의 지적인 힘들이 소진하였다. 한다. “어떤 점에까지 신적인 실재성이 자연적 사물들의 인식의 규칙에 종속되는가?” (527)
9절 아벨라르의 “윤리학” L‘“Ethique” d’Abélard 527-
삼신성(la Trinité)에 관한 아벨라르의 학설을 겨냥하는 비난, 스와송의 단죄에 이른 비난은 아마도 1141년 상스에서 아벨라르를 새로이 단죄했던 보다 중대한 비난을 감추고 있다. 12세기에서도 앞선 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크리스트교 생활에서 이론적이라기보다 더 실천적인 모든 관념들 일체로부터, 독단[교리]에 상대적인 사변적 논쟁을 분리할 수 없었다. 마치 신학자인 성 베르나르가 신학자인 아벨라르에 대립되는 것처럼, 그리고 똑 같은 이치들에서 엄격한 규칙에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수도원의 개혁가들이 자기들 앞에 모순가들(les contradicteurs)을 발견한다. 모순가들은 수사들과 수녀들의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은 체화에 앞서서 그리고 그걸 믿지 않고서도 구원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사람들은 신학적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에게 해방(emancipation)의 운동이 응답한다. 이 해방운동은 수도원의 생활, 성체의례, 신앙의 장점 등을 무용한 것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벨라르는 윤리학, 너 자신을 알라(Ethica seu scito te ipse (ca. 1139)(Éthique, ou Connais-toi toi-même)을 썼다. 이 작품은 혁명적 귀결들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함이 없이, 성 베르나르가 하나의 방법을, - 그 방법에 따르면 “인간 지성이 지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방어하고 신앙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고” - 단죄할 수 있다고 믿는 의도의 주관성에게 많은 여지를 만들어 준다. 아벨라르가 성직자들에 의해 행해진 돈을 댓가로 고해성사의 면제에 대한 추문을 고발하고, 또 심지어는 죄를 면제하게 하는 권력을 주교들에게 이의제기를 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아벨라르는 지성에 의해 생각되었던 대로 또한 그처럼 인정되었던 대로 양심과 선에 복종에 의하여 오로지 규정된 올바른 의지의 도덕을 옹호하였다. 이때부터 원죄의 성격이 변하였다. 과오 자체는 개별적일 수 있고, 단지 체벌은 신적 결단에 의해 인류 전체로 확장된다.실재상으로 이런 정식들은 아벨라르 검열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덜 급진적이었다. 그 자신은 이 정식들을 정통교리의 의미에서 훨씬 더 나중에 설명했다. 그럼에도 성 베르나르는 여기에서 “새로운 복음”을 보았고, 그리고 상스 공의회(1141)에서 19개 명제를 단죄하였고, 그 중의 절반은 윤리학(1139경)에 관해서이다. 교황 이노센트 2세(Innocent II, 재위 1130-1143)는 이 주제에 관해 썼던 글을 다시 고쳐 쓴 글에서, 동방 황제 마르시앙(Marcien, 392-457[재위 450-457])이 요한 교황에게 보낸 편지(게다가 가짜인데)를, 동방 황제 마르시앙이 서방 교황 요한 1세에게 말했다고 하는 편지를,상기시킨다. “미래에 어느 성직자도, 어느 군인도, 그 어떤 조건에 어느 인격도 크리스트교 신앙에 대해 공공연하게 다루기를 시도하지 못한다.” 아벨라르의 마지막 작품은 유대인, 철학자, 크리스트교인 사이의 대화(Dialigue entre un juif, un philosophe et un chréetien)인데, 여기서 그리스 철학을 구약과 신약과 더불어 대치시켰다. 그 논쟁은 무엇보다 최고선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평화적인(irénique) 저술은, 교회의 독단론이 진실한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합리적 반성을 어린이의 순진한 신앙에 대립된다.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1121)와 더불어 이 저술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스콜라학자들의 노력을 예고한다.
10절 알랭 드 릴의 신학 La théologie d’Alain de Lille 528-
어떠한 단죄도 이런 이유로, 신학자들이 크리스트교 신앙에서 지적인 구조를 찾아가는 저항할 수 없는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지적 구조가 잘 연결된 전체를 신앙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거기에 고려되어야만 하는 실천적 필연성이 있다. 아벨라르는 그 필연성을 여러 번 가치있게 만들었다. 추론의 방법은, [독단론의] 진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단학자들에 대항하는 유일한 가능성이 이었다. 또한 그것은 알랭 드 릴(Alain de Lille, 1115-1203)이 세기의 마지막에 썼던 카톨릭 신앙의 기예(Ars catholicae fidei, 1200경)에서 말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공통용어들, 전제들(postulats, petitiones[공리]), 정리들을 포함하는 유클리드의 형식을(예전에 프로클로스가 쓴 신학의 기본들(Eléments de théologie)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알랭은 알았다) 사용했다. (5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도 아벨라르도 아니라고 하듯이, 추론에 의해서는 가능성을 넘어선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반대로 신앙은 “과학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들의 출구”로 남는다. 또한 그에게서 크리스트교 진리들의 우연적 성격과 방법의 합리적 성격 사이에 대조가 있다. 전자의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불가사의한 결단에 의존하는 사건들을 발설한다. 후자는 사실들을 증명해야만 한다. 신의 잴 수 없는 권능은, 사람들이 신앙의 진리들에게 부여할지도 모를 이법을 항상 제한하러 온다. 예를 들어 “신은 그가 행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류적 인간을 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III, 15)오히려 다른 인격이 아니라, 신체로 구현된 성자가 있다는 것에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질베르 드 라 뽀레와 마찬가지로, 알랭은 자기의 신학의 규칙들(Règles de théologie, 1192경-1194) 속에서, 자연적인 것들의 규칙들이 신학적인 것들로 이전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로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이중 원리를 가지고 있다: 우선[한편] 속성화[부가어화]의 공통의 규칙들은 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신은 논리적 주어로서 고려될 수 없다. 논리적 주어의 속성화들은 범주들에 따라서, 즉 실질성(quiddité), 질, 양 등에 따라서 서로 배열될 것이다. 왜냐하면 특이한 항목인 신을 류와 종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신의 속성들은 결코 유일한 본질을 결코 지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원인들에 관계하는 규칙들은 자연적 사물들에서와 동시에 신적 실재성에 적용된다. 만일 한 술어가 한 주어의 진실이라면, 또 이 주어가 신 또는 자연의 존재이라면, 우리는 술어가 원인에 의해 신에 속한다고 하는 그 원인이 있다고, 그리고 속성화의 원인은 속성화 그 자체와는 다르다[차이있다]고 말할 권리를 항상 갖는다. 만일 신이 정의롭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신이 정의롭다고 만드는 한 원인이 있다. 그리고 이런 원인은 정의로운(juste)이라는 속성[술어]과 다른 것이며, 정의로운 속성은 우리와 연관해서 원인의 결과들을 발언하는 것이다. (529)
이 둘째 원리에서, 성 안셀무스의 신성에 대한 독백(1075-1076)의 관념들에 대한 새로운 적용방식을 보아야 한다. 안셀무스는, 신의 속성들의 진리들에 참조하면서, 또는 위-디오뉘시오스(Denys l'Areopagite, 490년경 활동)이 말했던 것처럼 신의 이름들에 참조하면서, 신의 자연[본성]에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은 근본적으로 남아있었고, 알랭은 가지적 영역의 유명한 정식을 여러 번 험담한다. 그 영역의 중심은 도처에 있으며, 그 영역의 주위[원주]는 아무데도 없다. (530)
11절, 12세기의 이단들 Les heresies au XIIe siècle 530 -
12세기의 마지막 부분과 13세기의 시작의 시기에, 한편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60–1216; 재위 1198-1216)는 [왕권에 대해] 교황지위의 우위를 주장하고 또한 비잔틴 제국에 반대 투쟁을 하였고, 다른 한편 앙쥬 왕가(1154–1214)의 왕들에 반대하는 영국의 백작들의 투쟁의 시기였다. 이 시대는 이전보다 더 혼란스럽고 소란스런 시대였으나, 두 사건으로 한 시대의 막이 내린다. 한편 라트랑(Latran) 공의회(1215)는 교황들의 권능 위에 학설들을 확정하였고, 동시에 종교 재판권을 제도화 하였고, 또한 걸승 수도원들의 창설하였다. 다른 한편 대헌장(Magna Carta, la Grande Charte, 1215)은 영국인 자유를 규정하였다. 반면에 한해 전에(1214) 프랑스 카페 왕조의 권력은 부빈에서 확정되었다. (530)
우리가 보게 될 것이지만, 관념들의 역사에 관해 거대한 무게로 눌렀던 이 사건들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12세기가 끝나는 시기에 요동쳤던 운동들을 재현해보아야 한다. 한편 교회에 대한 해방(l’émancipation)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은 매우 민중적인 이단들에 의해서 그리고 비정통 학설들에 의해서 표출되었다.다른 한편 인문주의적이고 학술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아벨라르와 프랑스 변증론자들의 제자이기도 하고, 토마스 벡케트(Thomas Becket, 1118-1170)의 조언자이기도 한 쟝 드 살리버리(Jean de Salisbury, 1115경-1180)가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530)
수많은 이단들에서, 그리고 마치 카타르파들, 알비파들, 보드와(발도)파들에서도 서로 다른 것처럼, 세속적인 공동체 베긴여인들, 머리모자를 쓴 카푸친들, 모욕당한자들, 카톨릭의 가난한자들의 각 연합들 속에서, 어디에서 학술의 문제들을 끝내야 하는지, 어디에서 이론의 문제들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이 세기의 중간에, 아벨라르의 제자인 아르노 브레스키아(Arnaud de Brescia, 1100-1155)가 설교하기를, 만일 성직자들이 토지를 소유한다면, 성직자들은 구원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충분히 강력해져서 1141년에 로마의 교황을 몰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이런 이단들의 실체적인 토대는 항상 동일한 것처럼 보였다: 즉 종교적이고 성스런 삶의 이상에 대한 설교이며, 복음의 단순성으로 회귀를 통한 그리고 교회와 교회 의례들로부터 완전한 해방(l’affranchissement)을 통한 설교이다. 계시받은 자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였다. 어느 삐에르 드 브뤼스(Pierre De Bruys, 1095-1131)는 세례의 가치와 성찬식에서 실재적 현전을 부정했고, 교회를 무너뜨리기를 원했으면 외부적 숭배를 제거하고자 했다. 1170년경에 리용 사람인 삐에르 발데스(Pierre Vaudès ou Valdès, Pierre Valdo, 1140-1217) (보드와신도들의 분파 창설자이다), 즉 “베드로 집무실을 찬탈하자”, 그는 복음의 가난[청빈]을 설교했다. 알랭 드 릴은 그는 모든 종교적 권위를, 심지어는 모든 인간적 권위를, 수도원의 성체의례의 가치를, 절대화의 제도화도 관용들의 제도화도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531)
동일한 알랭 드 릴은 자신의 이단학자들에 반대하여(Contra Haereticos, Contre les hérétiques, vers 1190-1200)에서, 그가 이름을 지칭하지 않은 이단학파들에 대해 말하지만, 그러나 거기서 유명한 카타르파들 또는 알비파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쉽다. 그리고 이 파들이 프랑스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학술적 견해들이 삶의 이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안다. 아주 순수하고 [편견없이] 순화된 성스러움의 야망은, 우리의 영혼이 천상의 타락된 힘이며 또한 반대되고 나쁜 힘들에 의해 갇혀있다는 믿음이 없이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알비파에게서 하나의 정확한 학설로 변형되었고, 거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말하듯이 마니케이즘이 아니라 오히려 신지학의 학설을 인정하였다. 세계는 나쁜 원리에 의해 즉 데이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다. 데미우르고스는 동시에 모세율법(lois mosaïque [모자이크 법칙])의 작가이다. 영혼은 기원에서 천상이다. 천사가 타락되어,영혼은 지상의 생황에서 벌을 받고 있다. 이 영혼으로부터, 생명적 단순 원리와 같은 영혼, 또한 신체와 더불어 소멸하는 동물들의 영혼과 구별해야 한다. 영혼들을 구원하러 온 크리스트는 인간적 자연[본성]이 전혀 아니다. 그의 신체는 단순한 겉보기일 뿐이다. 그 신체는 성체의례들의 어떠한 것도 세우지 못했다. 구원을 위한 소위 말하는 필연성은 성체의례[를 행함으]로써 교회의 힘을 만든다. 크리스트교인의 삶은 단지 순수 상태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상태에서 영혼은 죄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서 잘못을 행할 수 없으며, 잘못[악]의 죄수가 더 이상 아니다. 순수인들 즉 카타르교인들은 이 상태에 도달한 이들이다. (531)
알비파들이 요구했던 종교적 독립은 정치적 독립과 더불어 [같은] 틀을 형성했다. 프랑스 중부 지역의 스승들, 툴루즈의 백작들은 이런 독립을 스스로 얻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십자군이 이노센트 3세(재위 1198-1216)에 의해 명령받고, 이름 없이(1207-1214)잔인성에 의해 표시되었는지를, 그리고 이단에게 백작의 권력에게 종말을 고했는지를 안다. (531)
[3차] 라트랑 공의회에서 단죄 받은 학설들 중에서, 죠아생 드 플로르(Joachim de Flore, 1135경-1202)도 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최 남단] 칼라브르 지방의 피오레에 있는 생 쟝 수도원의 원장(1145-1202)이었다. 예수는 요한 복음(XIV, 16)에서 말하기를 “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Consolateur, Paraclet[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조아생에게서, 이 구절은 구원의 역사의 세 시기를 표시한다. 모세의 율법의 시기, 크리스트교회의 과거와 미래모습이 있는 성부의 시기, 현재라는 교회의 시기이며, 성령이의 통치를 앞선 미래 모습의 시기이며, 죠아생이 이것을 묵시록적 통찰들로써 알린다. 묵시록적 통찰에서 그는 한 새로운 세기에서 변형되고 정신화 된 교회를 재현한다. 그 세기는 1260년에 시작된다고 한다. 이리하여 크리스트의 복음에 대한 정신적인고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하나의 영원한 복음의 관념이 태어난다. 이런 관념은 프란체스코파의 환경 속에서 14세까지 이어질 것이다. (532)
조아생의 관념들과 보두아파들 또는 알비파들의 관념 사이에, 확실히 어떤 친족성이, 즉 현실적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정신적 질서를 태어나게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대립은 크다. 조아생파들은 영원한 복음 속에서 미래를 향하여 도달된 크리스트교주의 성취(la consommation)를 본다. 이들은 역사적 연속성의 의미를 갖는다. 카타르파들은 교회의 역할을 단순히 부정하고, 새로운 정신적 질서가 신적 기원에 입문했던 순수한자들 또는 완전한 자들에 의해 이제부터 실현된다는 것을 고려한다. 한 측면은 점진적 과정을 다른 측면은 갑작스런 혁명이 있다. (532)
파리에서 신학으로 지도자인 아모리 드 샤르트르(Amaury de Chartres ou Amaury de Bène (en latin, Amalricus de Bene, 1150경-1207)는 알비파의 학설과 매우 다르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실천적 태도를 끌고나갔다. 알비파들은 그노시스트파들에 의해 묘사되었던 것과 같은 구원의 드라마를, [말하자면] 잘못에 갇혀있는 신적 본질인 영혼의 해방을, 재발견한다. 아모리에게서는 이런 드라마가 전혀 없다. 그는 각각의 인간이 크리스트의 한 가지 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의 주석에 따르면, 그는 현존했던 유일한 실재성은 영원히 자기 자신에 동일하며, 그것은 신이었다고 말하고자 원했다. 그리고 구원은 신이 모든 사물이라는 과학 또는 인식에서는 전혀 답이 없다. 최상의 운수에 기대들이었던 신앙과 희망에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또는 천국의 희망들도 전혀 없다. 신이 크리스트 속에서 또는 성체(빵)속에서 특별하게 현재하고 있다는 어떠한 믿음도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전한 보장이 있고, 아모리의 계시에 의해서, 교회를 대체해야만 하는 성령의 결정적 통치가 태어났다. (533)
사람들은 스토아학자들에 의해 유래되어 플로티노스와 위-드니를 거치면서,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를 매개로 해서 아모리에까지 이른 사유의 계보를 재인식했다.
사람들은 또한 이 시대에 신속에서 모든 존재의 통일성의 이론적 학설이 충분한 힘을 가져서, 교회의 정신적 체계 전체에 대립을 통해서 사실들 속에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는 위험을 느꼈다. 아모리학파들의 학설이 1210년 파리 공의회에서 단죄되었고 [제4차] 라트랑 공의회(IVeconcile du Latran)에서 확정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에리우게나의 자연의 분할에 대하여(De divisione naturae (864-866)를 단죄했는데,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학설의 근원을 보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시대의 경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비드 드 디낭(David de Dinant, 1160경-1217경)이 쓴 글 속에서도 또한 드러나는 데, 1210년에 마찬가지로 단죄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제목, De Tomis, hoc est de divisionibus만을 알 뿐이다. 이 제목은 에리우게나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1225-1274)에 의한 관념들은 알고 있다. 문제거리인 분할은 실재성들의 물체들, 영혼들, 분리된 실체들의 분할이다. 이 실체들의 각각은 개별적인 자기 원리를 갖고 있는데, 물체들에서는 물질(Yle, 휠레)이, 영혼들에서는 온지성(Noys vel mens, 누스 또는 심정)이, 따로 떨어져 있는 실체들에서는 신이 원리이다. 물질, 지성, 신이라는 삼원성은 단일의 실체만을 지칭한다. 다비드가 결론을 정립하기 위하여 원인들의 책(Livre des Causes)의 원리를 사용했던 것 같다. 만일 사람들이 거기서 구별된 항목들을 보았다면, 이들 항목들 그 위에 단순하고 분할불가능한 원리를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 원리는 자신 속에 그것들이 갖는 공통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아비스브롱이 추론했던 것과 유비적 방식인데, 다비드는 아비스브롱의 생명의 샘(Fons vitae)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단일의 실재성으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은 이 삼원성에서 마크로비우스(370경-430경)의 신플라톤주의의 삼원성, 일자, 지성, 영혼이 아니라, 오히려 티마이오스편에서 끌어낸 데미우르고스, 지성 또는 존재[현존], 물질의 삼원성을 인정한다. (533)
12절, 쟝 드 살리스버리 Jean de Salisbury 534 -
이 시대에 가장 호기심을 일으키는 인물들의 하나는 쟝 드 살리스버리(Jean de Salisbury, 1115경-1180)이다. 그는 아벨라르, 질베르 드라 포레, 기욤 드 꽁쉬의 교육을 받았고, 토마스 벡케트의 친구이며, 샤르트르의 주교로 세상을 떴다. 그는 고전적 고대의 추억들로, 즉 오비디우스(전43-후18)와 베르길리우스(전70-전19와 같은 시인들뿐만 아니라 세네카전(4-후65)와 키케로(전106-전43)의 추억들로 가득한 특별한 작가이다. 특히 그는 키케로에게서 스토아학파의 도덕론의 인식을 그리고 동시에 아카데미아의 회의를 빌려왔다. 그에게 중대한 두 작품, 메타논리학(Metalogicon, 1175경)(6권)과 정치도덕론(Policraticus, 1156)(도덕 정치철학, 8권)이 있다. 이 작품들은 생생한 방식으로 그의 시대에 교회의 중요 성직자의 편견들을 반영한다. (534)
메타논리학(Metalogicon, 1175경)은 우리에게 1160년경에 모든 문제들의 목록을 제공한다. 문제들이란 변증법의 교육의 확산에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지배한 개념작업이 약화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 개념작업에 따르면 변증법은 단지 일곱 자유 예학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 때 일곱 예학은 모두 합하여 신학의 입문에 쓰이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매우 간편한 위계적 개념작업이었는데, 12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이 보기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 개념작업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았다. 변증법은 더 이상 하부과목이 될 수 없었고, 신학을 침범했다. 한 성 베르나르학자는 거기에서 무엇보다도 죄악을 보았고, “부끄러운 호기심은 지식을 위한 지식에 있으며, 부끄러운 허영은 유명해지기 위해서 아는데 있다.”라고 한다. 이런 불평들은 심지어 평결문들과 대전[백과사전]들의 저자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사람들은 이 저자들이 교부들에게 만족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성 빅토르 수도원장인 고띠에 드 모르따뉴(1100경–1174)는 자신의 작품 프랑스인 네 명의 미로에 반대하여(Contra quatuor labyrinthos Franciae)에서, 삐에르 롱바르, 삐에르 드 쁘와띠에와 싸우면서도 아벨라르와 질베르 드 라 포레와도 마찬가지로 싸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증법이 신학에 침입을 단지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증법이 성스런 과학을 세속화하고 또한 독단들[교리들]을 가지고 공공연한 토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또한 사람들은 이해가 없지는 않지만 너무나 추진력있는 변증론의 문화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 토론 기술의 순수한 형식적 문화는 끝내는 마치 목적 자체로서 간주되었다. 예학들의 스승들에게 행해진 신학을 가르치는 것의 금지는 결과로서는 토론하는 기술의 거의 괴물 같은 발전을 가져왔다. 쟝 드 살리스버리는 우리에게 이런 “순수 철학자들”을 묘사해 준다. 그들은 논리 바깥의 모든 것을 경멸하고, 그리고 문법, 자연학, 윤리학을 무시한다. “그들은 그들의 전 생애를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보낸다. 그들이 늙은이가 되어서, 위험한 의심자들이 되고, 모든 음절 심지어는 말투들과 쓴 글의 철자들을 토론한다. 그들은 모든 것에 주저하고[망설이고], 항상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과학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견해들을 편집한다. 서로 대립되는 이런 견해들의 덩어리는 책의 작가 자신도 어렵사리 이 견해들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535)
센 강변에서 어떤 아당 뒤 쁘띠-뽕(Adam du Petit-Pont, 1100경–1180)에게서, 몇몇 그리스 학파들의 즐거워했었을 소피스트주의 취향이 다시 생겨나게 하는, 미묘성의 훈련 그 자체에 위험을 더 잘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당은, 만일 자기가 이해하기에 쉽고 단순한 정식들과 더불어 변증법을 가르쳤다면, 아주 드문 청강자들을 가졌을 것이라고 진솔하게 고백했다.사람들은 마치 아당처럼, 소피즘들의 총서들을 만들기를 더 좋아했다. 그 총서에는 메가라학파의 정신이 완전히 덮혀있었다. “백은 2보다 더 적다. 왜냐하면 2백과 연관하여 백은 3과 연관하여 2보다 더 적다.”
쟝 드 살리스버리는 논리학의 적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논리학이 무용하다고 하는 자들과 투쟁했다. 예를 들어 코르니피키우스(Cornificius, s.d.)라고 불렀던 수수께기 같은 인물은 연구[학습]들을 축약해서 하는 방법을 설교했다.그러나 쟝은 논리학이 사유의 단순한 도구이기를 원했다. 아당의 변증법은 “그 자체위에 굴러가면서, 그리고 그것의 고유한 비밀을 파고들면서, 가정에도, 전쟁에도, 법정에도, 성당부속학교에도, 궁정에도 교회에도 쓰이지 않는 주제들에, 즉 학교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쓰이진 않는 주제들에 전념한다.”(1권 8장) 그런데 논리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문제들의 재료는 다른 곳에서 빌려왔다. 이 주제에서 쟝은 무엇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Topiques, Τοπικά)」(토론의 규칙들에 관하여)을 따라간다. 이 논저는 오르가논의 다섯 논저들 가운데 그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 당시 오르가논의 완전한 인식은 서방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변증론(Topiques, Τοπικά)」의 중요성은 상당하였다. 당시에 그 책은 아주 새로운 것에 속했다. 그 책은 「분석론들」보다 훨씬 더 명석한 스타일이다. 매우 확실한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쟝은 그 책이 그 책 자체로 완전한 논저를 구성하는 것을 잘 알았다. 제1권에서 가르쳤던 논리학의 토대들에 의해 시작하면서, 그리고 포르퓌리오스와 보에티우스에게서 보다 훨씬 더 명석함을 가지고, 그는 거기에 도덕적이고 자연학적인 문제들을 결합시켰다. 그 문제들의 목록은 제2권에 나와 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유용한 8권과 더불어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토론의 규칙들이 그리고 대화의 경쟁시합이 가르쳐 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Logique, Ὄργανον)의 다른 논저들 가운데, 「범주론(Categories, Κατηγορίαι)」과 「해석론(De l'interpretation, Περὶ Ἑρμηνείας)」은 「변증론(Topiques, Τοπικά)」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분석론(Analytiques, Ἀναλυτικὰ)」들은 토피카의 부록들일 뿐이다. 「분석론 후편(Seconds Analytiques, Ἀναλυτικὰ Ὕστερα)」에서 가르쳤던 증명의 기술은 용도가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자연(본성)은 너무나 감춰져 있어서 인간이 명제들의 양상을, 즉 가능성, 불가능성, 필연성을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증명의 방법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학에서 뒤흔들리고, 수학에서만 완전히 자기 효과성을 갖는다.”([1권] 13장 마지막) (536)
사람들은 여기서 말끔한 특징들로서 이 시대의 이상을 본다. 즉 사물들의 자연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다양한 환경들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 논증들의 발명이라는 일반적 방법을 찾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개연적인 것에만 도달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진리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 그러한 것은 신의 완전성 또는 천사의 완전성에 속할 뿐이다.”(II, ch. X). 또한 쟝은 자신이 스토아학파의 방식으로 판단의 섬세성에 의해 정의하는 이법 그 위에, 자연적 이법들에 대한 신적인 원인에 도달하는 예지(l’intekkigence, intellectus[nous])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신적인 사물들의 풍미(la saveur)같은 것인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이로부터 영역을 강하게 분리했는데, 그 영역에서 인간적 수단들을 가지고 순수하게 인간적 관심들이 서로 격론을 벌인다.
이 동일한 정신, 신학으로부터 극복된 인본주의는 정치도덕론(Policraticus, 1156)(도덕 정치철학, 8권)에서도 재발견된다. 이 저술에서 인간적 지혜는 도덕적이든 정치적이든, 신정론으로부터 극복된다. 도덕적 부분에서, 이 작품은 전적으로 스토아주의에 침투되어 있다. 이 시대에 자연주의와 일치하는 이런 학설의 분명한 재탄생(renaissance)이 있다. 우리는 이미 자연주의에 대한 많은 표명들을 발견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고, 사람들은 운명과 관련있는 스토아학자들의 논증들을 토론한다.쟝은 우리에게 신-스토아학자(novus stoicus)이며, 뿌이유(이탈리아 남부의 동부해안 지역) 출신의 이탈리아인, 어떤 루이스(Louis)는 베르길리우스를 주석을 달면서, “우연한 미래들”에 관하여 디오도로스(Diodore Cronos, Διόδωρος Κρόνος, ?-전 284)의 옛 토론을 다시 다루면서, “인간이 미래에 행할 행동들 중의 어떤 한 행동이 그럼에도 가능한 행동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II, ch. xxiii). 다른 곳에서 쟝은, 스토아학파의 전한 학설에 따라서, “신의 섭리는 사물들의 자연을 제거하기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물들의 계열(la série des choses){series rerum(사물들의 계열들)이 운명의 정의 자체이다}이 섭리를 변경하지 못한다라는 것을” 증명한다. 4권 전체는 정치학이고, 키케로의 법률에 대하여(De Legibus)의 스토아학파의 관념들에 젖어있다. 사람들은 군주는 법률과 공평성의 노예이고, 법률은(크뤼시포스의 정식인데) 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물들 전체의 지배자이다. 그가 말하기를 또한 자연의 이미지에 맞게 정돈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발언에서, 국가는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Géorgiques)에 따라서, 모델로서 벌들의 공화국의 묘사를 인용한다(V, 21). 그가 5권에서 군주의 품행을 위한 규범들(les préceptes)을 요구한 것은 플루타르코스(46-125)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 Marcus Ulpius Traianus, 53-117)[98-117]에게 보낸 편지에서 온 것이다. 심지어 그의 도덕론에서 스토아학파의 경향성은 특히 8권에서 인데, 거기에서 그는 키케로의 Tusculanes, lat. Tusculanae disputationes)를 따라서 정념들을 다룬다. 이런 이유로 그의 스토아주의는 키케로의 것이며 아카데미이아의 의심[회의]에 의해 제한되었다. (537)
스토아학파의 합리주의로부터 침투되어 있는 자연주의는 신정론으로 경의롭게 잘 배열되어 있다. 그 신정론은 정신적 힘에 시대적 힘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만일 군주가 성직자들의 집행자이고, 성직자들에 비해 열등하다면,” 그러면 “군주가 신적 법률의 권위에 의해 정의의 법률에 종속된다는 것이 변함없는 것이다”(IV, 3과 4). 따라서 성직자는 이런 신적 법률[신법]의 첫 해석자이며, “군주는 눈 앞에 항상 신법이 있어야 한다”(IV, 6). 합리주의, 자연주의, 정신적 권력의 우월성, 이 셋처럼 정식들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간다. “국가는 신의 선행들 덕분에 생명있는 신체이다. 절대적 공정에 의해 인도되고 이법의 규칙에 의해 규제되는 신체[기계]이다(V, 6).” 따라서 군주는 신으로부터 선출된 자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마치 신성의 한 이미지처럼 국가 속에서도 그를 고려하게 하는 그의 특권들이 나온다(VI, 25).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크리스트에 의해 확립된 정신적 권력 속에서 실현된 스토아의 법칙을 발견한다. 쟝에 따르면, 사람들은 수도원의 질서들에서, 특히 샤르트르 수도자들에게서 작품에 맞는 스토아의 도덕론을 본다. (537) (56SLE) (29:05, 57R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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