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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2권. 헬레나 와 로마 시대, 231-462
제8장 헬레니즘과 크리스트주의, 우리 시대의 초기 세기들
Hélénisme et Christianisme : Auc premiers siècles de notre ère 430-462
제1절 일반적인 고찰 Considérations générales 430-437
크리스트교는, 마치 한 학설이 다른 학설에 대립되지 않듯이, 그리스 철학에 대립되지 않는다. 크리스트교의 자연적이고 자발적 형태는 교수법적이지만, 성문으로 된 교육은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크리스트교 공동체들에서는 장인들과 하층민들로 조성되어 있으면서, 물건들에 대한 공동 소비의 기대감 속에서 상호참석과 형제애라는 배려가 지배한다. 하늘나라들의 왕국을 믿는 신앙을 확고히 하고 선전하기 위하여 상황들의 문서들, 편지들, 예수의 역사적 이야기들, 사도들의 행전들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합적으로 추론된 학설적 진술은 전혀 없었다. (430)
그리스 철학은 새로운 우리 세기를 향하여, 불가사의에서 벗어난 이법이 아주 잘 침투된 세계의 이미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불가사의의 도식은 철학적인 문서들에 의해, 마치 보다 민중적 형식들로 된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논술로서 세계에 관하여가 있고; 예로서는 세네카의 자연의 의문들(62)이 있다). 그러한 우주 속에서는 미래의 숙명에 대한 문제는 사라졌는데, 한편으로 살아있는 것들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불멸의 죽음”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의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 마치 우주적 운명이 짜놓은 모든 사건들처럼 죽음에 대한 스토아학파에 의해서이다. 게다가 신들의 이야기들도 사라졌는데. 한편으로 죽은 왕들의 이야기를 재발견하려는 에우에메로스(Εὐήμερος, 전316-전260)에 의한 역사적 이야기에 비례해서 이끌려져서이고, 다른 한편 스토아학자들에 의해 자연학적 상징주의로 이끌려져서이다. 그런데 그 철학자[세네카]의 태도 전체는 이런 합리주의에 의해 계도 되었다: 그의 위안들 속에서, 그의 충고들 속에서, 그의 의식적 방향 속에서, 이것은 항상 동일한 후렴이다. 사건 전체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시간에 도달하는 세계 속에서 불평하거나 걱정하거나 혼란하거나 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431)
그 철학자가 로마에서 합리주의를 설교하고 있는 순간에, 예수(Jesus)는 갈릴리 지방에서 교육받지 못한 평민들에게 가르친다. 그들은 그리스 과학들을 그리고 세계의 과학적 개념작업들을 완전히 모르지만, 촘촘한 변증법의 추론들 보다, 잠언들과 이미지들을 파악하기에 더 익숙한 자들이다. 이런 교육에서 세계, 자연, 사회는 마치 이법으로 침투되고, 또한 철학자의 이해에 순종하여 굴복하는 실재성들처럼 개입되지 않고, 오히려 마치 마르지 않고 정신적 기호작용으로 가득한 화수분들처럼 개입한다. 말하자면 들판의 백합, 방탕한 아들,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는 여인, 그리고 다른 많은 것도 있는데, 이런 신선함과 민중적 특성은 디아트리베[스토아의 설법]들의 기대했던 꽃들과 값진 우아함에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에 도달하는지를 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외부 사건들을 마치 무차별적인 것처럼 고려하게 했던, 의지로부터 나온 일종의 영웅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다. 가난, 슬픔들, 모욕들, 불의들 박해들 이것들은 여기서 진실한 악[잘못]들이다. 그러나 이 악들은, 천박하고 상속 없는 자들을 위한 신의 편애 덕분에, 우리에게 하늘들의 왕국을 열어준다. 고통과 기대, 즉 행복의 기대로부터 오는 고통 속에서 일종의 환희는, 매 찰나에 전적으로 자기 숙명을 완성된 것으로 보는 현자의 이런 차분함으로부터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얼마나 다른 상태이던가! (431)
그런데, 신과 우주에 관하여 전반적 신학적 관점이 없어서, 헬레니즘에 분명하게 대립되는 크리스트의 교육에 관하여, 철학사가는 문명사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문제의 한 측면일 뿐인 문제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철학적 사색들의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재위306-337) 황제이래로 서구 문명이 크리스트교 문명이 된 사실로부터, 그 중요성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런 의문에서 행해졌던 응답들의 모든 층위를 안다.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그런 의문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두 가지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크리스트에 의한 사랑의, 자비의, 구원의 의무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라는 복음의 크리스트교의 순수성을 구출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추리적 사유의 독립성과 자치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의도에서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그러한 것이 초기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관점이었다., 그것은 초기 5세기 동안에 복음과 성 바울에게 보태진 크리스트교의 독단론은, 특히 말씀의 본성과 삼신성의 본성에 관한 사색들은, 원시적 전통에 보탠 그리스 사변의 위험한 첨가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의도에서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은 합리적 관점에서 인간정신의 효과적인 진보들이 그리스 과학들에 접합선 없이 묶여졌다는 것인데, 즉 크리스트교는 그리스 수학으로부터 미분계산으로 또는 프톨레마이오스(100경-168경)에서 코페르니쿠스(1473-1543)에게로 이끈 행진 속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법의 이런 자치적인 발전을 크리스트교는 가끔 족쇄를 채울 수 있었으나, 결코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한 것이 18세기 후반에서 진보의 이론가들의 관점이다. (432)
반대로 다른 이들에 따르면, 크리스트교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작업 속에 중요한 혁명을 표시했을 것이라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런 크리스트교의 새로움을, 아마도 보충적이라 할지라도, 아주 다른 두 가지 측면 하에서 소개한다. 첫째로 내적 변증법을 역사 속에서 찾는 경향성을 지닌 철학자들에게서, 사람들은 주목하기를 그리스 철학은 본질적으로 사물들의 객관적 재현을, 우주를 관조하는 정신을 위한 대상이라는 우주의 이미지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 대상 안에 어느 정도 흡수된 정신이 있으며, 그 때에 과학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 주체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주체가 아는 대상과 동일하다. 스토아주의에서 주체는 객체와 전적으로 동맹을 맺는 것과 다른 자치가 아니라고 한다. 완전히 반대로 크리스트교는 대상들의 세계와 독립적인, 자치적인 주체들을 진실로 알았다. 이 대상들의 모든 활동성은 우주를 사유하는데 완전히 소모되지 않으나, 그러나 대상들은 자기 고유한 삶을 갖고, 즉 객관적 재현의 용어로 번역할 수 없는 감정의 삶, 사랑의 삶을 갖는다. 결국 우주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모든 사색들을 무시하면서, 크리스트교는 인간적 사유에 종교적 협력의 독창성을 주장하기를 더 잘했다고 한다. 이런 협력은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주체, 심장, 감정, 의식이라는 것의 발견물이다. 그리고 관념론이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크리스트교 문명 속에서이다. 그 관념론은 주체의 내밀한 자연으로 모든 실재성의 발전 원리를 만들었다. (433)
게다가 크리스트교에 기인한 심정적 혁명의 둘째 측면이 있다. 그리스인들의 코스모스는 말하자면 역사 없는 세계이며, 영원한 질서이다. 거기서 시간은 어떠한 효과도 없으며, 때로는 시간이 그 자체와 항상 동일한 질서를 남기든지, 때로는 시간이 항상 동일한 점에 되돌아오는 일련의 사건을 생성하는데, 무한정하게 반복하는 순환적인 변화에 따라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류의 역사 자체는 동일한 문명들의 영속적 회귀가 아닌가? 반대되는 생각도 있다; 근본적 변화들의, 절대적인 주도권들의, 진실한 발명 작업들의 실재성 속에는 한마디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서 역사와 진보가 있다. 이러한 생각은 크리스트교가 그리스인들의 코스모스를 뒤엎어버리러 오기 전에는 불가능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의 창조된 세계, 인간이 밖으로부터 수용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신적 법칙에 복종에 의해서건 불복종에 의해서건 자기 스스로를 만드는 숙명, 인간들을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새롭고 예견 불가능한 신적인 주도권, 신-인간[예수]의 고통에 의해서 얻어진 대속, 이러한 것이 드라마적인 우주의 이미지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위기이자 방향전환이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헛되이 운명을, 즉 모든 원인들을 포함하는 이유를 찾고, 여기에서 자연은 지워지고, 여기에서 모든 것은 인간의 그리고 인간과 신과의 내밀하고 정신적인 역사에 의존한다. 인간의 자기 앞에 가능한 하나의 미래를 본다. 인간은 그 미래의 작가이다. 인간은 처음으로 루크레티우스의 “모든 사물은 항상 동일하다”(“sunt eadem omina semper”)의 우울증으로부터, 스토아학파의 운명으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재성을 가두어 놓았던 기하학적인 영원한 도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크리스트교인을 신중하게 접근했던 초기 이교도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런 중요한 특징이다. 2세기 말경에 크리스트교인들에 반대하여 켈소스(Κέλσος, 2세기경)가 작성한 진실한 담론(178경)에서, 그는 크리스트교인들에게 무엇을 비난했는가? 그것은 변질하지 않는 신을 인정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신이 상황들에 맞게 주도권들과 결단력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감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이 연민에 의해 감화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화를, 즉 크리스토스(Christ)의 신화를 믿는 것이다. “그 신화의 이야기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신화는 마치 실재적 역사처럼 주어지고, 물리적 법칙의 상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켈소스처럼 플라톤주의자에게서도 예지적 유지가 부족하였다. (434)
이리하여 한편으로, 그리스 철학의 사변과는 독립적인, 기본적으로 순수한 크리스트교가 있고, 그리고 전적으로 기원에서 그리스적이며 또한 크리스트교인의 정신적 삶과 연관도 없는 자치적 지적 문화가 있다. 다른 한편, 전적으로 새로운 우주의 통찰에 기여하는 크리스트교가 있고, 인간이 세계 질서에 대한 순진무구한 인식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드라마 같은 우주가 있다. (434)
순수 역사적 방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즉 이교도와 크리스트교 사이에 큰 대립들을 삼가면서,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기원들에 관해 거의 한 세기를 거쳐서 추구해온 세부 연구들을 이용하면서, 우리가 생각하기로, 사람들은 이러한 해결책들의 어떠한 것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해결책들을 차례로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순수한 크리스트교는 실천적 관점에서 완전하게 합법적인 추상일 뿐이고, 오히려 그 역사가의 눈에는 완전히 비합법적이다. 첫 5세기 동안에, 어떤 세네카 또는 어떤 에픽테투스에서 내적 개종의 실천적 문제에 대한 이교도의 사유를,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의 정제된 신학으로 몰아간 것, 그리고 바울의 정신적이고 내적인 크리스트교의 크리스트 사유를, 오리게네스(Ὠριγένης, 185경-253경)와 카파도키아 신앙인들의 독단적 신학으로 몰아간 것, 이것은 유일하고 동일한 진화이다. 이러한 변형작업에서 동일한 인자들이 역할을 못 보았다고 하기는 어려우리라. 게다가 어떻게 점점 더 잘 증명되었던 이런 역사적 진리를 회상하지 못하겠는가? 그 증명된 진리란, 그리스 사상의 이교도들과 동방에 물든 크리스트교도들이 분리되는 것인데, 그것은 지적인 방법과 사변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숭배의 복종 특히 황제숭배의 복종이었다. (434)
과학적 사유의 자치적 발전에 관한 한, 사실은 아주 정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크리스트교가 그리스과학의 교육에 비추어서 그리스철학 그 자체의 상황과 다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는 삼중 지혜를 정확하게 구별했다. “이 세계의 지혜”, 이것은 세네카가 자유 교양학들이라 불렀고, 필론은 교육의 순환이라 불렀던 것이며, 말하자면 문법학, 수사학, 기하학, 음악 등이다. 여기에 시학과 의학을 보탤 수 있으며, 말하자면 “신성에 관한 어떠한 관점도, 세계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도 높이 올라간 실재성에 관해서도, 착하고 행복한 삶의 제도에 관해서도, 어떤 관점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이 세계 원리들에 대한 지혜”, 말하자면 이집트인들의 비의적인 불가해한 철학, 메소포타미아의 ]칼데아 지역의 고천문학[점성술], “그러나 특히 신성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견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트의 지혜인데, 계시로부터 유래한다. (435)
지혜의 첫째 종류, 즉 이 세계의 지혜에서 보태야 할 것이 있는데, 철학의 다소 상당한 부분들이, 즉 논리학, 변증법, 물리학과 천문학의 몇몇 일반성들, 정직한 인간의 형식적 교육도 아마도 들어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무소니우스(20경-100경)가 그렇게 생각했던 대로, 아주 일반적인 도덕 교리문답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플로클로스와 헤르미아스와 동시대인인 한 플라톤주의자의 견해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적 철학을 특별한 비밀전수와 구별했는데, 그 비밀전수 방식을 플라톤주의는 자기 신봉자들에게는 보류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말하기를, 수학, 자연학, 윤리학을 철학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단어의 남용이다. 그는 이 인간적 철학에 전수자의 열정을 대립시켰다. 전수자는 자기편에서 보면, “신학, 철학전반, 그리고 사랑의 광기”를 포함하고 있다. (435)
이런 교육의 공통부분을 크리스트교는 원칙적으로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아마도 크리스트교인들은 그것의 정신적 가치를 매우 분리하여 생각하였다. 이들 가운데 교양 있는 인물들, 즉 아우구스티누스(354-430)과 그레고리오스(329-390) 같은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 가치에 대해 매우 열렬한 방어자들이 되었다. 반면에 다른 이들, 즉 테르툴리아누스(150경-220경)와 힐레르(315경-367)는 지름길의 가담자였고, 이런 교육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는 그것을 형식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이 주제의 관점의 분화는 크리스트교인에게서 크지 않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교도들에서도 크지 않았다. 퀴니코스학파의 지혜와 스토아학파의 지혜들이 나타났던 이래로, 플라톤에게서 진실한 실재성들의 인식을 향한 유일한 접근 통로였던 철학적 과학들은, 한편으로 이것들의 고유한 원리들을 이것들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보조물, 즉 지혜의 보조물들 또는 예속물이 되거나, 다른 한편 (퀴니코스학자들 또는 퀴레네학자들에게서) 심지어 인간의 오만에 기인한 무용한 장식물이 된다. (436)
이리하여 우리들 세기의 초기의 여러 세기들에서 모든 이들에게 공통하는 심정적 체제가 있다. 그것의 토대는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간 수준의 교육과 사람들이 이법을 통한 정상적 훈련과는 매우 다른 방법들에 의해서만 도달하는 종교적 삶 사이에 단절의 감정이다. 말하자면 이 다른 방법들에는 스토아학파의 도덕적 교육, 플로티노스의 직관, 계시를 믿는 크리스트 신앙과 같은 것들이 있다. (436)
이러한 체제에서 크리스트교는 저자가 전혀 없다. 저자는 그것을 마치 만들어진 상태에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서 이 종교에 반대하여 반작용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또 서양 르네상스의 순간에 결판낸 지적인 혁명이 크리스트교의 영감과는 전혀 다른 영감에서 왔다는 것을, 또한 보게 될 것이다. 어째거나 우리들의 초기 다섯 세기 동안에, 이교도 사상가들의 철학과 다르면서 근본적으로 독창적인 지적 가치들의 목록을 포함하는데 알맞은 크리스트 철학은 없었다. (436)
남은 것은, 어느 점에까지 크리스트교가 우리의 세계관을 새롭게 개조했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크리스트교 자체와 사람들이 지나온 많은 세기들 이후에 거기에 부여한 해석과 혼동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초기에 크리스트교는 전혀 사변적이 아니었다. 크리스트교는 공동체 속에서 정신적이고 동시에 물질적인 상부상조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우선 이런 정신적 삶은 크리스트교에서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적 삶의 필요, 즉 정신집중의 필요는 크리스트교가 승리하기 훨씬 이전에 모든 사람들 속에 품고 있었다. 죄의 의식, 과오의 의식은 역사가들에게서 또는 시인들에게서 민중적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의식 검토의 실천, 정신적 상담의 실천은 진실한 고백으로 되어 있고, 우리들 세기의 초기에 빈번했다. 더욱이 이런 실천과 이런 정신적 삶이 그리스 철학과 과학으로부터 결과로 나왔던 우주의 이미지에 속하는 무엇을 변하게 했다는 것은 어림없는 것이다. 한정되고 유일한 세계, 지구중심주의 사고, 하늘과 땅의 대립, 이런 모든 것은 르네상스의 시기까지 고집될 것이다. 사물들의 새로운 용어를 태어나게 함이 없이, 크리스트교인들의 정신적 삶이 그리스 우주에게 병치되었다. 아마도 정신적 삶의 내부에 예기치 않는 위기의 용어가, 그리스의 우주론이 지워버리려고 애썼던 절대적 주도권의 용어가 도입되었고, (그리고 또한 우리는 어떤 제한된 범위에서 볼 것이다.) 그러나 역사와 진화의 이런 감정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인간의 무한히 증가하는 경험 덕분에, 스토아학자들이 이미 비난했던 그리스의 호기심의 방법적 주물제조 덕분에, 사물들 일체의 개념작업에서 실현될 것이다. (437)
따라서 우리는 이 절과 다음 절들에서, 한편 철학적 사유의 발전이 크리스트교의 도래에 의해 심하게 영향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한편 한마디로 우리 사유를 요약하기 위하여, 크리스트 철학은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희망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뒤따르는 계보들 속에서, 초기의 여러 세기들에서 크리스트교의 독단론에 대한 요약을 행하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 중요한 이름들이 모자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은 크리스트교를 연구하는 것인데, 그 종교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 철학과 크리스트교의 연관에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37)
제2절 성 바울과 헬레니즘 Saint Paul et l’hellenisme 437-439
크리스트교의 사상은 고대의 말기에서 이교도 사상과 동일한 단계들을 거쳐 갔다. 제국 시대의 도덕적 교육에(사람들은 자주 이것을 세네카의 대하여 주목했다) 성 바울의 설교와 서한들이 상응한다. 1세기 말과 2세기에, 신플라톤주의 형성과 개화 시대에 대해, 넷째 요한 복음서가, 호교론자들이, 그리고 그노시즘 체계들의 발전이 응답한다. 플로티노스와 더불어 플라톤주의의 성숙기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교육계에서 클레멘스(150경-220경)와 오리게네스(185경-253경)의 신학적인 방대한 종합의 형성이 상응한다. 프로클로스(412-485)와 다마스키오스(458-533)는 거의 동일한 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카파도키아지방의 성직자들의 대척점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크리스트교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 즉 네메시우스(350경-400경)와 위(僞)디오뉘시오스(Διονύσιος, 5세기-6세기)와도 대척점에 있다. (437)
두 측면의 정신적 운동의 동일한 곡선이 있다. 그리고 특히 내부의 도덕적 삶과, 신을 믿는 신념에 근거하면서, 종교적 삶으로부터 학설적이고 독단론적인 신학으로 이행하는 동일한 경향이 있다. 이런 학설적이고 독단적인 신학은 인간과 신의 연관들에 대해서 라기 보다, 오히려 절대자 속에서 신에 대해 말한다. (438)
성 바울(5-67)은, 직접적인 영향이든지 또는 도처에 퍼져있던 학설들의 혼합적 작용이든, 교육받은 헬레나인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수많은 관념들, 사유방식들, 세네카(전4-후65)와 특히 에픽테토스(50-130경)와 친밀한 표현들을 발견한다. 크리스트교는 스토아사상처럼 세계시민주의였다. 그리고 크리스트주의는 단지 추론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에 공통하는 덕목만을 인식한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노예도 자유민도, 남성 또는 여성도 아닌, 당신들 모두는 예수-크리스트 속에서 하나입니다.” 스토아학파의 설법처럼 성 바울은 구원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의 무차별적 완전을 설교했다. (438)
이방인들의 사도 또는 심지어는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자신들의 역할과 의무들로부터 받은 감정은 에픽테토스와 동일한 것이었다.사람들은 에픽테토스가 자신의 도덕적 임무로 어떤 높은 생각을 이루었는지를 안다. “자신의 전 영혼을 그 임무에 부여하면서” 스스로를 병사처럼 생각하였는데, 성 바울도 “좋은 병사”를 생각하였다. 에픽테토스에게서나 성 바울에게서나 자기 힘의 근원은 신을 믿는데 있다. 둘 다, 자신들이 자신들 각각에게 신의 권능을 부여한 그 신에게 감사할 줄 알았다.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런 이법을 믿는 보증은 신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이처럼 성 바울에게서 “정신적 인간[πνευματικὸς, 성령]은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에픽테토스가 이상적 초상화를 그린 퀴니코스학자처럼, 사도는 신으로부터 지상에 보낸 자이다. (438)
신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어떤 이에게서나 또는 다른 이에게서처럼 모든 상황들에서 고요함이 유래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들은 신의 착함으로부터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438)
스토아학자의 설교자처럼, 복음을 알리는 자는 자주 세상의 일반인들로부터 조롱거리였다. 사람들은 에픽테토스에게서, 젊은이에게 충고하는 황금 반지를 낀 늙은이를 안다. “철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두뇌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 사물들은 광기(folles)이다.”마찬가지로, 성 바울도 크리스트교가 심리적 인간의 눈에는 “광기(folie)”라는 것을 잘 안다. 심리적 인간은 정신적 인간[푸뉴마티코스, 성령]이 판단하는 것을 알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일반인들의 자기 잘못들에 대한 무지이며, 설교자의 임무를 필수불가결하게 하는 죄 속에서 무의식이다. 무지자들을 향한 부드러움, 불의에 대한 형재애[동지애]로서 용서, 타인의 판단에 대한 무사태평, 이러한 것이 철학자와 사도가 세기의 앞에서 취한 공통적인 태도이다. (439)
모든 공통적인 특성들은 예언이 행해지는 비슷한 조건들로부터 온다. 이 특성들은 정열적으로 느껴지고 내부의 전환(개종)이라는 동일한 필요(besoin, 수요)에 응답한다. 소피스트들의 방식에 따른 말투에 영향을 받지도 않고, 독단을 알게 하지도 않는다. 바울의 신학은 또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스토아학자의 독단처럼 거의 정확하지 못하다. 성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신의 자연[본성]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출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과 인간 사이의 모든 연관들을 표현하는 크리스트가 그의 사유의 중심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에픽테투스에게는 거의 중요하지 않은 신의 실체의 문제가 나온다. 제일 평면에 속해 있는 것, 그것은 인간의 신적 계보이다. 이는 옛 스토아주의의 알려지지 않은 부드러운 뉘앙스로 표현된 것이다. 스토아주의에서 모든 인간들의 형제애가 나온다. 에픽테투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인간들을 이웃(le prochain)이라 지칭한다. 그는 이런 가족 계보를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인물 속에서 상징화하였다. 헤라클레스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구원자이며, 정의와 덕목을 퍼트리기 위하여 모든 지방을 다닌 자이다. (439)
물론, 에픽테투스에게는 없는 크리스트교의 근본적 특성이 남아있다. 에픽테투스는 파스칼이 말했듯이 인간의 비참함을 몰랐고, 그리고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신의 고유한 구원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성 바울에서는, 선을 아는 죄지은 자는 죄과의 잠재력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으며, 크리스트의 은총 덕분에 단지 균형을 이루어진 잠재력을 행사할 수 있다. 스토아주의에서처럼 필론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도우는 이런 반(半) 추상적인 잠재력들이 - 신적인 말씀 또는 내적 다이몬이 -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인물이 중요한데, 그 인물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했다는데, 이교도 현자의 것과는 아주 다르고 완전히 불가사의한 효과가 있는 행동에 의해 인류를 구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439)
제3절 2세기의 호교론자들 Les apologistes du IIe siecle 440-442
안토니우스 황제제시대의 호교론자들, 유스티노스(?-165), 타티아노스(120-173), 아테나고라스(133-190경)는 타티아노스를 제외하고 명백한 고민을 가졌다: 유스티노스는 두 두 변신론을 남겼는데, 하나는 황제 안토니누스(86-161: 재위 138-161)에게 보내졌고 다른 하나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재위 161-180)에게 보내졌다. 타티아노스는 이방인들에게 쓴 담론(168)을 썼으며, 아테나고라스는 자신의 변신론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아들 코모두스(161-192, 재위 180-192)에게 보냈다.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다음을 알리는 것인데, 즉 새 종교는 그리스 사유와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을, 그 종교로부터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이교도들에게도 이 종교를 마음에 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여기서부터 그리스 철학을 향한, 특히 플라톤을 향한 유스티노스의 공감이 있고 유보된 태도가 나온다. 그는 플라톤이 신의 인식의 측면에서 스토아학자들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하며, 반면에 스토아학자들은 도덕적으로 플라톤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한다. (440)
예수를 로고스에 또는 말씀에 동일시하면서, 그 논리 속에서 신은 세계를 창조했고, 제4복음서[요한]의 그 유명한 서설의 저자[유스티노스]는 크리스트교에 신학을 도입했다. 신학, 다시 말하면 신적이거나 또는 초감각적인 실재성에 대한 고심은 그 자체로서 파악되는 것이지, 인간의 종교적 삶과 연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스티노스의 주장은, 크리스트에게, 신의 말씀에게, 또한 철학자들이 모호하게만 예감했던 가지적인 것에게, 단번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감들이 가능하기 위하여, 모세와 복음서에서 계시되었던 신이 철학자들에게도, 특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도 부분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유일한 말씀 또는 신의 논리가 있다.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완전한 신의 계시 작용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선과 악에 대한 태생적 용어들을 생산한다. 신에 대한 이런 보편적 용어에 대해,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 용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게다가 그 인간들이 보편적 용어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우주적 근거(이유), 예언자들의 계시 작용, 구현된 말씀은 단지 동일한 계시 작용의 정도의 차이들일 뿐이다. 그 근거는 단지 부분적이고 퍼져있는 계시일 뿐이다. “각 철학자는 자신에게 나타난 것을 신적 말씀의 적은 량으로 보면서, 그는 매우 아름다운 정식들을 갖는다.” 이런 부분적 계시 작용의 주제와 더불어, 다른 주제가 화해를 잘 이루지 못한다. 유스티노스는 필론 주변의 유대인들에게서 다른 주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다른 주제에 따르면 플라톤과 스토아학자들은 모세의 제자들이었을 거라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에 공통하는 것은 말씀의 통일성을 반영하는 인간 정신의 통일성의 한 종류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다. 게다가 유스티노스는, 크리스트를 유대 경전들의 로고스에, 그 아들(le Fils)에, 온지혜에, 주제자의 영광에 동일시하려고 애쓰면서, 마치 그리스인들과 함께 진행하는 것처럼, 유대인들과 함께 진행했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러한 방법은 플라톤의 매우 피상적인 인식에서만 가능했다. 만일 그가, 제국의 스토아학자들의 도덕론자들처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드로스, 파이돈 편들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변증법적 대화들을 무시하고 제 1면으로 티마이오스편을 놓았을 것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필론이 이미 행했던 것처럼 티마이오스편의 이야기를 창세기의 창조작업의 이야기와 함께 끊임없이 뒤섞고 있었다. 그가 티마이오스편에서 배운 것은, “신은 선하기 때문에 비형태적 물질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신의 박애주의를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의 선성(善性)과 뒤섞으면서 말이다. (441)
그 크리스트교인으로서 플라톤[유스티아노스]이 다룬 주제는 역사 속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그리스인들에게 권고에 의해 보다 정확하게 언급되는데, 이 작품은 처음에서 유스티노스에게 속한 것인데, 실재로는 그보다 거의 한 세기 후의 것이다. 그 작가는 유스티나누스보다 훨씬 더 잘 조사하였고, 그는 가장 중요한 대상들에 관하여 - 세계의 영원성, 영혼의 불멸성, 유일신앙 등등 - 아리스토텔레스이든지 자기 자신이든지 플라톤과의 모순들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은 실재적으로 있는 신에 관해 정확한 견해를 가졌었고, 플라톤에 있어서 존재는 모세에게서 현재 있는 존재(celui qui est)이다. 오직 이러한 것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유스티아노스에게서 유일신앙의 제한들을 발견한다면, 만일 그가 생장하지 않는 물질들과 생장된 신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런대로 자기 사유를 부여하면서, 소크라테스처럼 고발당할 것이라고 유스티아노스가 불안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신들에 관한 비비꼬인 그의 진술이 나왔을 것이다. (441)
그 크리스트교인 플라톤[유스티아노스]을 사람들은 창세기에 비추어서 티마이오스편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유스티노스의 제자인 타티아노스에게서 재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스승과 반대로, 타티아노스는 추론에 의한 신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과 스토아학자들이 모세와 유사성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리스인들이 고백하지 않았던 한 표절에 의해 설명하려 한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유스티노스의 합리주의는 타티아노스가 보기에 후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온정신(Esprit 성령) 즉 계시를 받아들이는 숨결(le pneuma)은 순수한 자들 속에서만 현존한다. 그리고 그 온정신은 영혼의 일부가 아니고, 분절된 말투에 의해서만 동물의 영혼과 구별되고 미묘하게 침투하는 단순한 물질로서 영혼의 일부가 아니라, 온정신은 영혼에 포개져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442)
아주 반대로, 유스티노스의 합리주의는 아테나고라스(133-190경)에게서 재발견되고 증폭되었다. 아테나고라스가 시인들, 피타고라스학자들, 플라톤에게서 발견한 유일신앙은 모세와도 철학자들과도 공통하는 신적인 영감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심지어 삼신성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스티노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한 플라톤은, 게다가 한 크리스트교으로서 플라톤이며, 그가 신으로 묘사하는 온선 즉 불변의 존재는 플로티노스의 제1위격와 공통하는 이름일 뿐이며, 스토아학자들의 신과 훨씬 더 닮은 이름일 뿐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교도 신플라톤주의가 스토아의 종교성을 어떤 강열함을 가지고 배제한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크리스트교의 플라톤주의 범위를 더 잘 깨달았을 것이다. 그 크리스트교의 플라톤주의에서는 섭리와 세계의 아름다움을 토대로 한 논증(삼단논법으로 편집되어)과 더불어 스토아학자들의 신학 전체가 재발견된다. (442)
제4절 신지주의와 마니케이즘 Le gnosticisme et le manichéisme 442-447.
호교론자들과 동일한 시대에, 크리스트교의 터전 속에서 소위 말하는 신지주의 체계들이 발전되었다. 이 체계들은 우리에게 반박문들에 의해 알려졌는데, 다음 세대의 교회 교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체계에 대한 반박문들이다. 특히 철학론(Philosophumena)를 쓴 알려지지 않은 작가[히폴리트(170경-235)로 추정], 이교도들에 반대하여(188)를 쓴 이레나에우스(140-200), 마르키론에 반대하여의 테르툴리아누스(150경-220경)도 있고, 잊지 않아야 할 작품으로, 3세기경에 신지주의자가 콥트의 입말로 쓴 것인데 보다, 옛 그리스어 표현들을 번역한 피스티스 소피아라는 자료도 있다. (442)
철학론에서 우리시대에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한 주제에 따르면, 신지적 체계들은 크리스트교 사유 속에 그리스 철학의 일종의 침입으로부터 결과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 분파들은 그리스트교 이단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단들은 마치 그리스 사유의 도달한 것처럼, 철학사에 직접적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진실한 신지적 사유를 다소 환상주의적 진술들과 – 교회의 교부들이 그 사유를 감추어 놓았던 진술들과 - 분간할 수 있었던 동시대 작업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기 속에는 거의 없는 것인 양으로 여긴 인상들을 내버려두었다. 이 체계들은 그것으로부터 제1질서의 관심을 그래도 간직하였다. 왜냐하면 체계들은, 우리가 그것을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진리의 반대-시험처럼 주어진다. 이 반대-시험은 우리가 믿듯이 그리스 철학에 대한 우리의 진술 전체로부터 분간된다. 헬레니즘은, 그 이론이 사물 속에서 인정하는 질서의 영원성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영원한 원리에서부터 영원히 동일한 귀결들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신지적 체계의 공통 주제는, 그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의 결정적 파괴를, 포함하고 있는 구원이며, 즉 잘못으로부터 벗어남이다. 헬레나인에게 있어서 잘못은, 그가 속해있는 우주에 대한 관조에 의해 사라진다. 신지학자에게 있어서, 잘못은 이 우주의 제거에 의해서 사라진다. 또는 그렇지 않으면 자기 그 위에 그리고 자기 바깥에 영혼의 고양에 의해 사라진다. (443)
바실리데스(Βασιλείδης, 110-130활동), 발렌티노스(Οὐαλεντῖνος, ?–160), 마르키온(Μαρκίων, 85경-160경), 이들은 2세기 중반 경에 가장 잘 알려진 세 명의 신지학자들이다. 아마도 발렌티노스에서만 신지학자들의 우주 일체에 대한 개념작업이 나타난 것 같다. 바실리데스는 무엇보다 먼저 도덕론자이다. “잘못의 문제와 섭리의 정당화 문제에 시달린 자이다.” 그가 말했는데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섭리의 설명 위에 잘못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고통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순교자들이 앞선 삶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참이었다. 게다가 죄를 마치 정념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정념을 마치 일종의 나쁜 정신처럼 생각하였고, 그 나쁜 정신이 영혼에게 밖으로부터 첨가되고, 영혼을 더럽힌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들은 일종의 도덕적 이원론으로 기울었고, 사람들은 플라톤에게서 이런 유비를 발견한다. (443)
그러나 바실리데스보다 더 형이상학적 정신을 지닌 인간, 발렌티노스는 이로부터 플라톤에 가장 반대되는 귀결들을 연역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기원에서 이원론의 설명을 찾는데, 이원론은 그 자체 속에서 서로 마주친다. 정신과 살의 이원론은 보다 깊은 세계의 창조자와 최고 신 사이의 이원론과 상응한다. 창조자 데미우르고스는 창세기에 말했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최고신은 착한 신이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따르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행한 그것에 대한 해석을 따르면서, 그는 데미우르고스와 천사들이라는 나쁜 존재들에 의해 제작된 인간을 제시한다. 이 존재들에는 정념들이 도입되어 있고 이 존재들은 추잡한 정령들이다. 이 피조물에게 최고신이, 즉 선한 신이 상층에서 실체 씨앗을, 정신의 씨앗을 첨가하였다. (444)
세계의 전 역사는 이런 씨앗을 사라지게 시도하는 천사들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이다. 그 역사는 자기 해방에 도달한다. 속죄는 성 바울에서처럼 크리스트 죽음의 효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발렌티노스의 제자인 헤라클레온(175년경 활동)에게서 보듯이, 신지학로부터 또는 크리스트에 의해 가져다 준 계시로부터 유래한다. (444)
발렌티노스 이후에, 가장 잘 알려진 신지학자는 마르키온이며, 그는 그 모임에서 특히 주석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그는 모세에 의해 계시된 구경전의 신은 잔인한 신이며, 복수심이 강하고 전쟁광이다. 그 신은 크리스트에 의해 계시된 신과 같은 동일한 신이 아니다. 후자의 신은 선성(善性)의 신이며, 볼 수 없는 세계의 창조자이다. 반면에 모세의 신은 볼 수 있는 신을 창조했다. 이 둘은 마치 정의와 선성처럼 서로서로 대립된다. 게다가 두 경전들의 이중 계시에 의해서와 다르게, 이 주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없다. 마르키온에게서 중요한 것은 대속자인 크리스트가 데미우르고스의 체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만,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유대인의 메시아는 아니었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원문을 문자의 의미에서 다루면서 메시아의 어떠한 특징도 예수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다른 한편 마르키온이 인정하기를, 크리스트가 최고신에 의해 보내졌고, 그가 진실로 신체적 자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자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데미우르고스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르키온은 생각하기를, 크리스트는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인간의 상태에서 계시를 받았고, 그의 신체는 겉보기일 뿐이라고 한다. 마르키온은 이런 관점으로부터, 결혼을 권장하고 또 절제로서 세례의 조건을 만들면서,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를 연역해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데미우르고스의 세계에서 적어도 의지로부터 벗어난다.
발렌티노스과 마르키온 이후에 신지학의 사유는 필로소푸메나에 의해 알려진 많은 체계들로 흩어진다. 필로소푸메나의 각각은 가끔은 가장 야릇한 변이들과 더불어 항상 동일 주제를 다룬다. 즉 크리스트에 의해, 신적 기원을 갖지만, 나쁜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감각적 세계 속에 갇힌, 영혼의 해방을 다룬다. (445)
모든 이들에게서, 사람들이 원한다면, 사람들이 신플라톤주의에서 발견하는 일종의 정신적 삶의 도식이 있다. 이 두 경우에서 지상의 신체에 내려오는 신적 기원의 영혼이 문제인데, 지상의 신체에서 영혼은 오물과 접촉하며, 그리고 거기서부터 영혼은 자기 기원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것은 진부한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플로티노스가 신지학자에게 전했던 저술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260년경에 로마에서 신지학자들을 알았고, 게다가 파이돈과 파이드로스의 이용에서 부족하지 않은 평민들을 위하여 한 헬레나인이 가져야 했던 불쾌함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설왕설래의 중요 점은 아마도 다음과 같다: 그 신지학자가 종교적 실천으로서 금욕주의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을 때, 그가 자기 경험의 이유들을 속죄로부터 얻고자 했을 때, 그가 안녕이든 또는 그 반대이든 정신적 힘들의 기원을 알고자 원했을 때, 그는 종교에다가 완전히 임의적인 일종의 형이상학적 드라마를 포개 놓아 끌어들였다. 다른 많은 예들 가운데 한 예로서, 3세기에 신지학자인 유스티노스가 속죄에 이르는 드라마를 이야기한 방식을 인용해보자: 세 가지 원리들의 꼭대기에, 선한 신이 있고, 그러고 나서 엘로힘(Élohim) 즉 남성의 아버지, 그리고 여성의 에덴(Eden)이 있다. 에덴에 통합된 엘로힘은 열두 천사들의 두 계열을 생산한다. 이 열두 천사들의 일체가 파라다이스를 형성한다. 파라다이스에서 창조되었던 인간은 엘로힘으로부터 푸뉴마 또는 정신적 숨결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에덴으로부터 영혼을 받아들인다. 여기까지 선한 신을 몰랐던 엘로힘은 창조의 정상에서 지내며(파이드로스의 영혼처럼), 그리고 신을 관조하기 위하여 에덴을 포기한다. 에덴은 스스로 복수하기 위하여, 인간 속에 죄를 도입한다. 엘로하임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면서 자기 천사들 중의 하나인 바루흐((Baruch)를 처음에 모세에게, 그리고 헤라클레스에게, 결국에는 마지막 속죄자인 예수에게 보낸다. 예수는 에덴의 천사들 중의 하나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하고, 자기 신체를 십자가 위에 남겨둔다. (445)
이런 고생스런 작업은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작업은 인간의 운을 형이상학적인 가정사에 의존하게 한 것인데, 이러한 것은, 신지주의가 그렇게 묘사한 것처럼, 신적인 짝짓기로부터 유래한 영원한 실재성들이라는 에온들(Eons, 하늘, 영원)의 세대가, 어떤 점에서 위격들로 된 플로티노스의 세대로부터 멀리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한 얼마나 이런 속죄가 플로티노스의 안녕(합리적 질서의 반성된 인식일 뿐인 것을 안녕이라 불러야 한다면)과 멀리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속죄에서 영혼은 속죄를 놓고 다투는 힘들의 대결이다(나중까지 영속되고 많은 전설로 재발견되는 민중적 재현이다). 이리하여 신지주의는 한편으로 옛 이야기 같은 동화들에 도달하는데, 그 동화에서는 한 동방인의 두뇌를 시달리게 하는 모든 종교적 형태들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편 미신적 실천들에 도달하는데, 그 실천운동들은 로마 제국의 전 영토에서 발견될 것이다. (446)
잘못의 실재성에 대한 의식은 근본적으로 나쁜 의지적 잠재성의 실체이다. 또한 그 의식은 관념들의 운동의 실체이다. 이 운동 3세기에 페르샤인 마니(Mani, 205-274)의 주도권으로 태어나서, 마니케이즘의 이름으로 알려졌고, 전 로마 제국 속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이 운동을 중세 시대에 여러 이단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시 발견할 것이다. 마니는 착한 잠재력과 나쁜 잠재력, 즉 선신 오르무즈와 악신 아흐리만이라는 페르샤 이원론을 도입했다. 이 이원론은 그래도 역시 유일 신앙자로 남았던 신지주의자들의 이원론과는 충분히 다른 것이다. 그들의 이원론에서는 창조적 잠재성이 최고 실재성의 하부로 남아 종속되어 있다. 마니에게서 함께 투쟁하는 창조적 두 잠재성이 중요하다. 선신은 매번 악신의 창조에 대해, 그의 작품이 완전히 파괴될 때 까지 새로운 창조를 대립시킨다. 이로부터 세계의 드라마가 나온다. 착한 신은 우선 다섯 잠재성들 또는 거처들을 창조해 냈다: 누스(Νοῦς, 온지성), 엔노이아(ἔννοια, 사유),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 반성), 엔튀메시스(ἐνθύμησις, 의향), 로기스모스(λογισμός, 추론)(이 다섯 거처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신적 사유의 다섯 측면이다). 착한 신은 세계와 연관 없이 이것들의 잠재성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잠재성들은 “고요와 평화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착한 신은 잘못(악)과 투쟁하기 위해 필요들에 따라서 자신으로부터 다른 잠재력들도 생산한다: 다른 잠재력이란, 다음 차례가 되어 첫째 인간을 불러내는 살아있는 것들의 온어머니(la Mère), 빛들의 친구, 살아있는 온정신(l’Esprit vivant), 열두 가지 덕목들을 불러오는 전달자(le Messager), 마지막으로 예수(Jésus)이다. 이들은 모두 어둠들의 잠재성과 연관 속으로 들어갈 운명에 처해 있다. 두 종류의 잠재성들 사이에 이런 이원성에서, 하나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말씀에 또는 온지성에 해당하며, 다른 하나는 상상작용에서 말을 하는 종교적 드라마에 해당한다. 이런 이원성은 더욱 교훈적인 것들이다. 로고스 또는 온지성은 사물들의 영원한 질서를 지지하기에, 사람들이 시간적으로 원하는 하나의 질서를 설명하는 것에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질서를 비정상적 위기의 결과처럼 간주하기 때문이다. 마니교도들에게서 감각적 세계의 창조작업은, 마치 신지학자들에게서처럼, 나쁜 데미우르고스의 창조 작업이 전혀 아니다. 이리하여 다음 차례가 되어 원초적 인간이, 자기가 방어막처럼 입고 있는 다섯 요소들을 창조한다. 투명한 공기, 신선하게 하는 바람, 등등. 이것들은 어둠들의 세계에서 다섯 요소들에게 항 대 항으로 대립된다. (447)
제5절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Clément d'Alexandrie et Origène 447.
판타이노스(Πάνταινος, ?-216경)는 스토아학자이었다가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사학 학당을 만들었다. 그는 클레멘스(Κλήμης, Clemens, 150경-220경)의 스승이었으며 클레멘스의 다음으로 오리게네스(Ὠριγένης, 185경-253경)로 이어진다. 그 학교는 크리스트교육을 하기 위해 철저하게 시도한 첫 학교이다. 이 크리스트 교육은 그의 확장으로 이교도 학교들의 교육과 경쟁이었다. 신지학자들의 교육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분위기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그리스 철학으로 매우 잘 교육받았던 사람들을, 또한 그리스철학에 대해 아주 깔끔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447)
그럼에도 입장은 복잡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에게 권고에서 클레멘스는 헬레니즘과 크리스트교를 비교한다. 그는 한편 헬레니즘 속에서 충분히 많은 잘못들을, 다른 한편 소심하게 표현된 부분적 진리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크리스트교만이 그것들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인들의 신학은 숭배들과 불가사의들 속에서 생각되었기에, 오류를 범하고 추문을 일으킨다(5장과 6장). 철학자들에게서, 그는 요소들을 신들처럼 취급하는 철학자들과 별들에게, 세계에게, 또는 세계의 영혼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높은 경지의 철학자들을 구별했다. 완전한 오류도 있는데, 그 오류는 신과 신의 작품들을 혼동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물의 창조자이며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는 티마이오스편의 플라톤에게서 진리의 흔적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안티스테네스(전444-365)와 크세노폰(전440경-전355경)도 유일신앙에 도달했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클레안테스(전331경-전232)도 퓌타고라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진실한 속성들을 알았다. 당시에 크리스트교는 헬레니즘을 소비할 뿐이었는데, 크리스트교가 헬레니즘의 완수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옛 경전의 오류를 입증했던 새 경전처럼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뿐이다. (447)
도덕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 지혜는 특별한 경우에 결혼에 관하여 그리고 공공 생활에 관하여 충고들을 한다. 크리스트교의 연민은 “보편적 참여이며, 삶 전체를 위하여 모든 경우에서 모든 상황에서 본질적 목적으로 향한다.” 따라서 그 연민은 스토아주의와 다른 학파들이 소위 하고자 했던 것을 결과적으로 실현했다. 왜냐하면 철학을 세부적이고 실천적인 충고들의 기술에 제한하는 체 하면서, 클레멘스는 철학을 원리들의 과학으로 바꾸기를 원했다(11장). (448)
진실은 이렇다. 크리스트주의 전체는 그리스 철학적 교육의 틀 속에서, 특히 2세기까지 스토아학파의 교육으로부터 유일하게 완전하게 조직화되었던 교육의 틀 속에서 그에 의해서 흘러나온다. 그가 말하기를 “천계들로부터 우리들에까지 오자마자, 인간들의 교육에까지 갈 필요가 더 이상 없다.”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 교육 대신에 대체했던 신적 교육은 인간적 교육과 통일한 형식을 간직한다. 클레멘스가 우리에게 신앙(la foi, πίστις)이 – 이 단어가 그리스인들에 의해 비방받고 있는 한에서 - 현자의 길이라고 말할 때, 그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보다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신앙을 마치 스토아학자들처럼 의지적 동의라고, 즉 하나의 고정되고 굳건한 항목의 동의라고,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지혜의 서곡인 것과 같이, 크리스트교인의 삶의 서곡이 되는 동의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가 말하기를, “신앙의 진실한 목적은 분파들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신지학이며, 즉 진실한 철학 속으로 말하자면 크리스트교 속으로 이전된 사물들에 대한 과학적 증명작업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로부터 그의 교육의 몇 가지 세부사항들에 이른다면, 사람들은 교육자론 전체가 마치 스토아학파의 도덕론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 책의 첫 권은 말씀에 동일하고 올바른 행동의 기준을, 즉 올바른 근거를 포함한다. 여기에서 8장을 주목해야만 하는데, 클레멘스는 그 8장에서 분명하게 신지학자들을 생각하면서, 정의는 선성(善性)과 동일하다는 것을 온전한 형식으로 된 스토아학파의 논증작업에 의해 증명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들을 위한 신의 사랑으로 조성된 추론에 의해서 자신의 정의로 이행한다. 둘째 권과 셋째 권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크리스트교인들에게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권장하려고 애쓴 무소니우스(20경-100경)의 설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퀴니코스주의로 뒤섞인 스토아주의 전체가 이제 크리스트교의 교육으로 넘어간다. 즉 “현자만이 부유하다”라는 파라독사 대신에, 그는 단지 “단지, 크리스트교인만이 부유하다”로 대체한다. (449)
마찬가지로 신의 인식에서 방법도 중요하다. 클레멘스는 그 당시 퓌타고라스 또는 플라톤의 교육에서 그가 말했던 모든 것을 빌려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일련의 어떤 추상작업에 의해 사람들이 순수 통일성의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또한 신의 주체에게 동일한 정식들을 사용한다. 사람들은 이 정식들을 알비누스(150년경 활동)의 플라톤 교본에서 발견한다. “신은 류도, 차이도, 종도, 개별자도, 수도, 우발사고도, 주체도 아니다. 그것은 전체가 아니다.” 결국 그에게서 온아들의 용어, 또는 로고스의 용어는 가지적 세계의 용어와 멀지 않다. 증명할 수 없는 온아버지는 지혜라는 온아들에 대립된다. “왜냐하면 온아버지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고, 온아버지는 유일한 중심의 주위를 돌고 있는 모든 권능들의 원이다.” (449)
헬레니즘과 연관하여 오리게네스의 태도는 크리스트교인들에 반대하는 켈소스의 팜플렛에 대해 기나긴 그의 응답에서 깔끔하게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켈수스의 반대를 안다. 육신화의 사건에 반대하여 사물들의 영원한 질서의 참여자인 한 헬레나인을 위하여 매우 심각한 켈소스의 반대였다. “만일 사람들이 사물들을 최소한 변화를 하게 한다면, 모든 것은 뒤엎어질 것이고, 사라질 것이다.” 또는 “따라서 신이 인간을 심판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영원성 이후이고, 그가 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은 것은 영원성 이전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신화론적 특성이거나, 또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오리게네스가 자기 응답에서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크리스트교의 역사적 특성이다: 그가 첫 반대에 응답하기를, “신의 현전에서 생산된 유일한 변화, 그것은 신앙자의 영혼 속에서 변화이다.” 이리하여 그는 육신화를 내적 사건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고, 게다가 신의 하강을 마치 “말을 하는 방식”처럼 더 멀리까지 소개한다. 둘째 반대에 그는 응답하기를, 신이 “인간들의 대속에 끊임없이 전념했었다. 각 세대에서 신의 지혜는 성자들의 영혼들과 선지자들의 영혼에게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유사한 방식으로 그는 세계의 창조에 반대하여 그리고 비활동적인 신을 인정하는 무감동에 반대하여 헬레나인들이 끌어냈던 반대에 응답한다. 스토아학자들의 영원회귀를 믿지 않는 그는 신이 이 세계에 앞서 다른 세계들을 창조했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그는 헬레니즘의 표현자체인 시간의 순환적 개념작업을 인정한다. 그가 창조 또는 육신화 속에서 말씀의 변형작업들을, 마치 말씀의 변화들처럼 고려가 아니고 오히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들의 역량의 차이에 기인하는 현상들처럼 고려할 때, 헬레니즘의 경향성도 인정한다. (4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일한 오리게네스가 헬레니즘을, 특히 플라톤주의를 불신하는 것을 본다. 그가 말하기를, “섭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생성되지 않는 하나의 신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 신은 아들이 하나이고, 우리는 그것을 선언하는 유일한 자들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것이 그리스의 또는 야만족의 철학자들을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모든 것이 신의 말씀(Verbe) 또는 신의 이법(Raison)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할 때, 그들 중의 몇몇은 이런 견해를 갖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을 믿는 것은 신적으로 영감 받은 학설의 신앙에 따라서이다. 성-령(Saint-Esprit)에 관한한, 율법과 선지자를 알았던 또는 크리스트를 믿는 자들의 어느 누구도 최소한의 의심을 갖지 않았다.” 여기서 사람들은, 크리스트 신앙이 헬레니즘을 파괴함이 없이 서로 중첩하려고 하는, 헬레니즘의 정확한 한계들을 본다. 그러나 부분적인 진리를 젖혀두고, 또한 헬레니즘이 세계의 자연이든지 영혼의 자연이든지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에게서 감각적 세계는 가지적인 모델을 모방하는 하나의 질서가 전혀 아니다. 원 관념들(이데아들)의 세계는 정신의 유일한 환상 속에서만 현존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구세주가 거기로부터 오는지를, 성자들이 거기에 거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더욱이 신은 우선 추론하는 동등한 존재들만을 창조했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자유재량을 부여받아서, 몰락할 수 있다. 이로부터 영혼의 다양성이 도래한다. 이런 다양에 신체들의 다양성이 상응한다. 그 신체들은 절대적 현존이 아니며, 그러나 추론할 수 있는 피조물의 변화된 운동들 때문에 [세월의] 간격에 따라 태어난다. 그 피조물들은 dudgs을 필요로 했고, 영혼을 덮어쓰고 있다. 결국 오리게네스는 신체로부터 완전히 박탈되어 창조된 영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신만이 비형체적이다. 신체는 영혼의 존엄과 완전에 항상 상응하면서, 존엄하고 완전하게 스스로 모습을 바꾼다고 단지 말해야 한다. (450)
제6절 크리스트교, 4세기의 서방에서 Le Cristianisme en Ocident au IVe siècle. 451.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보다 헬레나 문명에 덜 집착했던 크리스트교인들은 크리스트와 그리스철학자들 사이를 일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을 지지했다. 그들은 특히 화해불가능성을 인정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신성을 존재들의 위계질서에 동일 관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신적인 실재성은 별들에, 신적인 존재들이 있다는 세계에, 영혼들에까지 펼쳐져 있다. 크리스트교인들은 그 실재성을 오직 삼신성에만 제한하였다. 영혼들의 신적 특성에 반대하는 발전에서, 297년에 개종한 아르노비우스(Arnobius, 240경-330)는 플라톤을, 또한 회상에 대한 그의 가설을 윽박질렀다. 회상 가설은 영혼들이 타락한 신적 존재들이고, 이들과 다이몬들 그 아래에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질문하기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왜냐하면 무지한 전체 종족들이 있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여러 과학들에서 인간들은 여러 가지 반대되는 견해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결국 왜냐하면 플라톤의 메논편의 유명한 질문은 진실로 설득력 있기 때문인데, 이럴 경우에만 그렇다: 즉 질문이 한 인간 존재에게, 즉 모든 경험이 은폐되어 갇힌 동굴의 깊은 곳에서 자라난 존재에게, 메논편의 노예처럼 수들에 대한 일상적 사용을 하지 않는 자에게, 말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게다가 만일 영혼이 신체 속에 들어가면서 망각한다면, 영혼이 수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타락하고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증작업이 있는데, 아르노비우스의 평범한 정신은 아마도 논증의 범위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는 유일한 경험주의가 정통교리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경-325경)가 별들의 신성에 반대하여 환기시킨 논의는 더욱 교육적이다. “스토아학자들이 천상의 존재들에 대한 신성을 위하여 가치있게 한 것은 그 반대를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만일 스토아학자들은 자신들이 신들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규제적이고 추론적인 강의를 하고 있어서,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정해진 궤도들의 밖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들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들이 신들로부터 나왔더라면, 사람들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그 존재들이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신들도 여기저기에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들의 의지들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확실히 새로운 정신이 있고, 그 정신에서 규칙적인 질서는 신성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 정신에 따라서, 사람들이 책 4권에서 그걸 보듯이, 신은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또 지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예기치 않은 결심에 의해 표출된다. (452)
이런 논평들에 의해 받은 충격, 즉 그리스 문화의 크리스트교인들 보다 철학자들에 대해 친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충격, 그것은 신적 존대들의 위계질서의 관념이 이런 존재와 저런 존재들로부터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진실한 실재성이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삼신의 인격성들의 절대적 동등성을 주장하면서, 다음의 유명한 정식을 만든다. 아들은 아버지와 공실체적이다. 그래서 신적 실재성의 내부에서 그러한 위계질서를 발견하려는, 그리고 위계질서로부터 모든 정신적 창조 작업들을 배제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끝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조건들에서 크리스트교의 신플라톤주의가 개조될 수 있었는지를 곧바로 지적할 것이다. (452)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크리스트교인들 가운데 플라톤의 이름을 평가를 퍼트리는데 가장 많이 기여한 인물들 중의 한사람이다. 마리우스 빅토리우스(Marius Victorius, 5세기 전반활동)의 라틴 번역 속에 플로티노스의 작품들에 대한 독서가 그에게 크리스트교에로 결정적 개종과 거의 가까이 일치한다(387년, 서른셋).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정신성과 플라톤학자들의 정신의 친근성은 그를 항상 놀라게 했다. 그는, 이들이 신학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다른 철학자들은 그들의 지성을 사물들의 원인들을 찾는데 사용했다. 그들은 신을 알았는데, 그 신 속에서 우주의 원인을, 즉 진리의 빛을, 지복의 근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도달해야만 할 목표의 관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기에 도달하는 길의 목표, 즉 크리스트이다. 사람들은 그가 읽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강독에 대하여 고백록(397-401)의 말투들을 알고 있다. “내가 거기서 이런 항목들에서가 아니라 진리의 관심에서 읽었는데, 원리들 속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은 신에게 있었으며, 말씀은 신이었고, 말씀은 살에서도, 피에서도, 인간의 의지에서도, 살의 의지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읽지 못한 것이 있는데, 말씀은 살로 이루어졌고, 우리들 가운데 거주하였으며 … 그가 노예의 형식을 취하면서 자기 스스로 낮추었고, 그가 스스로 죽음에까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복종하면서 겸손했다는 것이다.” (452)
플라톤주의의 매개자와 크리스트의 매개자의 이런 대립은 종종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로 되돌아온다. 크리스트는 매개자인데, 왜냐하면 그가 말씀이기 때문이 아니다. 말씀은 불멸이고 최고의 행복이며, 그 말씀은 도덕적 불행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매개자인데, 왜냐하면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면서 인간을 해방시킨 자이다. 이런 육체화는 사건이며, 이 사건의 이행하는 특성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매개적인 자리를 영원히 고정시키는 영원한 질서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신적인 매개자는, 마치 아풀레이우스(Apulée, 125경-170경)가 그렇게 믿었던 대로, 다이몬 또는 천사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매개자는 이것들의 본성으로부터 행복하고 불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매개적인 것은, 그것을 신에게 통합하기보다 신으로부터 분리될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며, 신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오히려 사멸하는 사물들의 오염물로부터 신을 따로 떼어내기 때문이다. (453)
이런 인용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주의자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그가 이들과 공감에도 불구하고, 제시하기에 아마도 충분하다. 그가 헬레니즘에서 근본적인 주제들에, 즉 영혼의 영원성과 세계의 영원성에 이를 때, 사람들은 그를 훨씬 더 잘 알아본다. 전자에 관해서 그는 말하기를 “인간 정신의 탐구들을 회피하는 물질들에서 오히려 왜 신성(神聖)을 믿지 않는가?” 우주의 주기적인 공전들의 영원성에 반대하여, 그는 종교적 이유들 이외에 다른 이유들을 갖는다: “어떻게 그것이 진실한 지복인가? 만일 똑같은 비참함들의 회귀가 항상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복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영원성의 지복인데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크리스트는 일단 죽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판단들에서, 성자(聖者)의 표시라는 일종의 효과적인 열성을 느낀다. 마치 그 성자가 소위 말하는 사물들의 추리적 질서를 종교적 삶의 필요에 종속시켰던 것처럼,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학자들에 반대하여 인간 영혼의 모든 정념들을 정당화했다. 욕망, 불안, 슬픔. 선에 대한 사랑과 아가페로부터 올 수 있고, 그리고 그것들 자체 속에는 악들이 없다. 그것은 합리주의의 몰락임과 동시에 철학적 합리주의 몰락이다. (453)
이리하여 사람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주의에 대해 많이 조심하고 또 유보함과 더불어 말할 수 있다. 초기저작들 속에서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찬사들을 깎아내리 않고서, 그가 플라톤주의자들이 오직 철학자들이라고, 철학과 종교는 동일한 대상인 알 수 있는 세계를 갖는다고 말하는 시점이 있다. 알 수 있는 세계는 두 가지 수단에 의해, 이유에 의해서든지 또는 신앙에 의해서든지, 발견될 수 있다. 그는 검토들(427)에서 이런 찬사로 되돌아온다. “내가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해 행했던 찬사는 이유도 없지 않지만 마음에 안 든다. 왜냐하면 특히 크리스트교의 학설이 이들의 몫에 크나큰 오류들에 반대하여 방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454)
아우구스투스 정신성은 플로티노스의 정신성과 매우 멀리 있다.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모순들에 의해서 상기시켰던, - 그 모순들에서 우리가 [현재] 있으며 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내적 과학(science)에 대해 말했다 - 삼신성(400-416)(15권)의 유명한 구절들을, 그 자체들로 인식되는 위격들을 관한 플로티노스의 구절들에 비교해 해보자. 사람들은 이런 자기 인식이 얼마나 두 작가 사이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자기 인식은 아카데미학자들에 의해 가져온 모든 의심스런 이유들을 회피하는 인식이다. 그 인식은 사실의 인식이고 현존의 인식이며 본질의 인식이 아니다. 플로티노스에게서 그 인식은 아주 다르다. 그것은 지성의 본질에 동일한 사물들의 가지적 본질의 인식이다. 스스로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우주를 인식하는 것이다. 살면서 현존하면서 느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재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자기 인식처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인 인식으로 이해한 방식은 플로티노스와 매우 구별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놀라게 한 특징은 가지적인 사물들에 내속하는 어떤 성질이 아니고, 그것은 개별적인 정신들에 연관해서 우리가 품고 있는 진리들의 비의존성이다. “추론하는 모든 이들은 각각이 자신들의 근거와 자신들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일한 사물을, 예를 들어 수의 근거와 진리를 공통적으로 본다.” 그러한 것이 그에게서 가지적 실재성의 현존을 증명하는 순수하게 외적인 특성이다. 여기서 또한 사물들 자체들이 아니라, 사물들에 견주어서 주체의 재량권이 중요하다. (454)
또한 이런 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단으로 판정받은 펠라기우스(Pelagius, 350경-420경)와 싸웠던 헬레니즘의 합리주의의 형식이 있다. 펠라기우스는 스토아학자들과 더불어 주장하기를, 우리의 장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착오들은 전적으로 우리에 의존한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만일 아담의 죄가 죄를 짓지 않는 자들에게도 해를 끼친다면, 크리스트의 정의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조차도 봉사해야 한다.” 그는 덧붙였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고유한 죄들에 속하게 하고, 또 우리에게 타인의 죄들을 떠넘기는 신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일치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중요한 오류는 이런 주제가 기도를,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모든 종교생활을, 무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기도는 우리를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우리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착한지를, 그리고 어떠한 선도 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의지 속에서 찾게 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파들은 신을 우리 의지의 주제자로 만들면서, 그리고 우리 의지를 선하게 하는 것이 우리자신이라고 덧붙이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어야 했다. 우리로부터 오는 것, 즉 선한 의지는, 신으로부터 오는 것, 즉 간단한 의지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한다. (455)
이런 몇 가지 예들은, 라틴 환경들에서 그리스 철학이 어떤 유보된 조건으로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다. 397년에 세상을 뜬 성 암브로시우스(saint Ambrosius, 340-397)는 학설보다 생활규범에 더 집착하였으며, 오히려 키케로의 의무론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키케로를 모방하여 동일한 제목의 책도 썼다. 그 저술에서 그는 교직자들의 책무들을 진술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테르툴리아누스(150/160-220경)는 정통교리의 충실한 간직자로서 자부하면서, 스토아학파의 도덕론에만 가치를 양보하였고, “세네카는 종종 우리 자신의 것이다”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복잡한 형이상학적 고안물들에 자리를 내주는 것과는 너무 멀리 있었다. (455)
제7절 크리스트교, 4-5세기 동방에서 Le Cristianisme en Orient au IVe et Ve siècle. 455.
동방에서 사정은 전혀 달랐다. 거기에서 신학은 “성직자들에게, 고위직들에게, 선한 사교계에 제한되었다. 반면에 신상을 갖는 인민은 둘째 계층의 크리스트주의로 살았다. 그 신학은 완전히 그리스적 귀족정의 전통 속에 이었다” 또한 예를 들어 유대지역의 한 도시 세자레의 주교였던 에우세비오스(Εὐσέϐιος, 265-339)는 자신의 복음 준비론에서 어떻게 크리스트교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분명한 증명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를 제시할 운명에 처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발췌의 복사본들을 인용하는데, 그 중의 많은 부분들이 그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졌다. 보다 나중에 현 터키 중부에 있는 도시인 나지안제노스 출신의 그레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 329-390)는 그리스인들의 자유 교육을, 말하자면 그리스 교육을 무용하다고 판단했던 크리스트교인들에 반대하며 과학들을 옹호했다. (455)
그[그레고리오스]가 동생인 카이사리오스(Καισάριος, 330-368)와 세자레 출신의 바실(329-379)에 대해 쓴 찬사들에서 보아, 사람들이 철학적 학파들에서 발견하는 암시들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의 친숙한 인식을 증거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파도키아의 학자들, 바실(329-379), 뉘세스 출신인 그레고리오스(335-395), 나지안제노스 출신의 그레고리오스(329-390) 그리고 또한 요아네스 크뤼소스토모스(344-407), 그리스 철학자들은 “크리스트교 바깥의 현자들”로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경전의 성문에 주석을 달기 위한 기회에 그들을 이용했다. (456)
크뤼소스토모스는 다음을 감추지 않는다. “우리가 경전 문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틀림없으나,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주 순수하게 제공되어서 정신의 은총이 우리 영혼 속에서 책들을 대신하고, 마치 책에 잉크가 새져지듯이, 그 은총이 우리의 가슴 속에 기록되었다. 둘째 항해라는 문자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은총을 밀어내기 위해서 이다.” 더군다나, 삼신성의 자연에 관하여, 한편에서 아리우스(Arius, 250-336)와 그 지지자들이, 다른 한편 정교론자들, 성 아타나시오스(Ἀθανάσιος, 296/298-373), 카파도키아학자들 사이에 충돌들 있었다. 전자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창조물이고, 후자에서 인격들의 공통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 제기된 문제는 철학에서는 아주 낯선 것이다. 아들, 아버지, 성령의 연관을 지칭하기 위하여 크리스트교인들에게서 사용되었던 세대와 과정이라는 단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자들에서 사용되었던 정확한 의미를 간직하지 못했다. 만일 이런 의미가 보존되었다면, 그 의미는 아리아니슴과 같은 학설을 내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행 중인 실재성이 그 실재성을 진행하게 하는 실재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절대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크리스트라는 신성의 신앙은 이 원리에 반대되고, 철학적 사색에서 최소한 뿌리도 갖지 않은 독단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456)
그럼에도 다른 터전 속에서, 사람들은 플라톤주의가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음을 본다. 예를 들어, 플라톤주의는 시리아의 에메즈의 주교였던 네메시오스(Νεμέσιος, 350-420)의 저술인 인간의 자연에 관하여(400경) 속에서 넘쳐난다. 이 작품에서 크리스트교의 영감의 흔적이 없지만, 주교는 자술에서 한 철학자의 자유와 더불어, 영혼과 신체의 통합의 문제를 다루었고, 이렇게 구별된 두 실재성이 어떻게 하나의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한다. 그의 공감 전체는 하나의 학설로 향하는데, 그는 이 학설을 마치 플로티노스의 스승인 암모니오스 사카스(175경-242)의 학설처럼 다루었다. 어째거나 그 학설은 플로티노스 자신의 학설에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이런 학설은 영혼을 가지적인 빛에 비추어서 비교하는데, 신체는 그 빛 속에서 푹 빠져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학설이 영혼의 신적인 기원을, 다시 말하면 그리스트교인들이 헬레니즘과 가장멀리 떨어져 있게 하는 주제들 중의 하나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457)
만일 사람들이 5세기경에 교육받은 크리스트교인들과 이집트와 소아시아의 동방 터전에서 철학자들 사이의 연관들을 알기를 원한다면, 아이네이아스(Αἰνείας, 445경-534경)의 호기심 많은 대화록, 테오프라스토스를 읽어야만 한다. 이 책에서 사람들은, 이방인인 테오프라스토스가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막 도착해서, 그는 크리스트교도이며 시리아 출신인 어느 에욱시테오스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본다. 그 에욱시테오스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히에로클레스(Ἱεροκλῆς, 5세기경)의 제자였으며, “철학자들 주위에서” 영혼의 잔존 문제를 공부하기 위하여 아테네 갔다. 호기심을 끄는 점은, 창조되고 소멸될 수 있는 세계의 주제와 살(육 肉)의 부활에 대한 주제를 옹호하기 위하여 크리스트교인인 에욱시테오스의 의해 철학적 변증법의 사용이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마주쳤던, 그리스인의 습관적인 반대들에 대해, 세계의 시초에 앞서 신이 위격들의 영원한 진행 속에서 현실화되었다고 그는 응답한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칼데아인들, 플로티노스(204-270), 포르피리오스(234-305)는 물질의 창조를 가르쳤고, 플라톤을 따라서 모든 감각적 존재들이 창조되었다고” 응답한다. 더욱이 세계는 수동으로 감당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티마이오스편에 따르면 세계가 수동일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모든 잠재성은 현실태로 이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은 질서를 위하여 세계를 소멸하게 한다. 왜냐하면 질서는 반대 생산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영원이라는 가지성과 마주하여 소멸하는 지성 감각적인 생산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457)
살의 부활에 관하여, 에욱시테오스는, 이 주제를 헬레니즘의 독단을 만들고자 시도한다. 그리스인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부활의 사실들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해체 되었던 신체의 요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충분한 능력이 있는 씨앗 같은 근원의 힘을 지지한다. 게다가, 마치 태양이 물에 자기의 열을 소통하듯이, 영혼은 자기의 불멸성을 신체에게 소통할 수 없는가? (457)
결국, 불가사의한 인물, 위(僞)-디오뉘시오스(5세기-6세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중세 내내 성 바울의 동료로서 간주했었다. 그는 이런 혼동에서 부분적으로 그의 글에 예외적인 권위를 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신플라톤주의 사상들이 그의 이름을 덮어서 크리스트교 신비학 속으로 이행했는지를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처음으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33)에서 인용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영향을 받은 프로클로스(412-485) 이후에만 쓸 수 있었다. 그가 쓴 글은 두 묶음을 이룬다. 첫째로 천상의 위계과 성직의 위계이며, 이것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등급에까지 신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계열의 피조물들을 연구한다. 가장 높은 등급은 신과 매개 없이 접촉하는 천사들이고, 가장 낮은 등급은 세례 받는 신앙인이다. 각 존재는 상위의 항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생각되었고, 그리고 그 계시를 하급 항에 수여한다. 둘째로 신적인 이름들과 신비 신학의 작품들은 다른 두 작품들, 신학적 묘사들과 상징적 신학과 더불어, 신학의 완전한 강의를 형성했다. 그 신학의 계획은 기획은 신비 신학의 3장에 들어있다. 첫 세 작품, 신학적 묘사들, 신적 이름들, 상징적 신학은 긍정 신학을 포함하고 있었고, 신학적 묘사들에서는 가지적 세계 그 위에 있는 삼신성을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신학적 묘사들에서는 가지적인 것들의 질서에서 빌려온 신의 증명들을, 선, 존재, 생명, 지성 등을 다루었다. 상징적 신학에서 가지적 세계에서 빌려온 신의 속성들, 화냄, 질투, 서약 등을 다룬다. 마지막 작품인 상징적 신학은 부정신학을 포함하고, 긍정신학의 반대질서에 따라서 감각적인 것 또는 가지적인 것에서 빌려온 어떠한 명칭도 신에게 알맞지 못하는 것을 제시한다. (458)
위(僞)-디오뉘시오스는 이방인의 신플라톤주의에 연관해서 자기 상황을 어떤 부분에서도 정의하지 않았다. 한편 그의 편지 속에서, 사람들은 그가 모든 이방교도들과 논쟁을 거부했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한편 그는 우리에게 그가 쓴 글의 주제에서 “한 이방인 소피스트”인 아폴로파네스(Ἀπόλλωφάνες, s.d.)의 견해를 알게 해 준다. 그가 말하기를 “그 소피스트는 나를 모욕했고, 나를 부친살해자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을 불경건한 방식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그는, 이방교도라는 측면에서, 크리스트교를 이용하여 신풀라톤주의에 봉사했다고 분명하게 고발당했다. 그리고 사실상 그가 경전으로부터 “철학”이건 “신지학”이건 모든 것을 끌어낼 수 있다고 과장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유가 프로클로스(412-485)의 관념들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458)
첫째로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원인이 결과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신에게 피조물의 모든 이름을, 온생명, 온지혜 등등을 부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생명의 온원인, 지혜의 온원인 등등의 의미에서 이런 이름들을 다룰 수 있다는 조건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은 긍정 신학의 원리이다. 그러나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기에, 그가 원인인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속하는 모든 속성작업들을 걷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긍정신학 보다 우월한 부정신학의 원리이다. 둘째로 신적 이름들에서 신적인 이름들을 검토하기 위하여, 즉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장블리코스로부터 인정했던 위격들의 층위를 검토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온선, 그리고 온존재의 삼요소, 온생명, 온지성[누스], 이렇게 추상에서 구체로 가면서 그는 따라간다. 그리고 그는, 마치 프로클로스처럼, 온존재가 온지성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성적(가지적) 존재들이 순수 존재들보다 상위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또한 셋째로 결국 파르메니데스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거들인데, 플로클로스의 근거들과 비슷한 근거들을 위하여, 그는 자기 신학에서 본질적으로 뒤따르는 원리들을 인정한다. 결과는 원인에 비슷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원인은 결과와 비슷하지 않다. (45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플로클로소의 학설들로부터 그의 학설을 깊이 구별하는 특성들을 발견한다. 첫째로 신적 이름들의 계층 또는 위격들은 신 속에서 생성의 질서로는 전혀 표상되지 않는다. 마치 신의 온생명은 신의 존재로부터 진행하며, 신의 지성은 신의 생명으로부터 진행한다. 모든 것은 신 속에서 동일하다. 또한 위(僞)-디오뉘시오스는 이른 층위에 근거들을 제공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둘째로 더하여 거기에 하나의 귀결이, 즉 삼신성과 같은, 아버지, 아들, 성령과 같은 신이 있다. 이 신에 대하여 그가 신학적 묘사들에서 말하는 이 신은 신적인 이름들 그 위에 있다. 셋째로 사물들의 측면에서 위(僞)-디오뉘시오스는 모든 진실한 연역을 거부했다. 천상의 위계론에서 나오는 세 가지 천사들의 삼요소는 추리적 고찰들에 의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더욱이 삼요소의 항은 다른 두 항들에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이것은 내용물 없는 네오플라토니즘의 수적인 틀들이다. (459)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변양들을 크리스트정교의 영향을 부여하는 것에는 경계해야만 한다. 크리스트정교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실재성의 형식들의 필연적 과정을 효과적으로 밀쳐냈다. 그 진리는 위(僞)-디오뉘시오스에게서 신플라톤주의가 그의 동시대인 다마스키오스(458-533) 속에서 정확히 진화한다는 것이다. 다마스키오스는 사람들이 보았던 대로, 제일 원리가 중요하다고 할 때, 위격들의 과정과 상부에서 하부로 위격이 아주 부적격하게 말하는 방식들이라고 깔끔하게 선언한다. 또한 위(僞)-디오뉘시오스처럼 그는 추론적 연역을 거부했다. 그는 칼데아의 신탁의 전통에 호소하는데, 그 때는 실재성의 형식들의 계속을 규정하는 것이 문제거리일 때이다. 결국 위(僞)-디오뉘시오스의 부정적 신학은 프로클로스의 신학보다 다마스키오스의 신학에 더 가깝다. 계열의 제1항에 - 온선 또는 온일자 - 관한 부정성들을 축적하는 대신에, 이들은 온선에 우월하는 항을 서로서로 규정한다. 즉 다마스키오스는 그 항을 표현할 수 없는 것(l‘Ineffable)라 불렀고, 위(僞)-디오뉘시오스는 파르메니데스편에서 인용하면서, 그것에 대해 담론도 이름도 인식도 아니라고 말한다. (460)
따라서 그러한 것이 초기 세기들에서 크리스트교 안에서 지적 흐름들의 다양성이다. 성 바울의 교화작업에서부터 위(僞)-디오뉘시오스의 작품에까지, 무소니우스(20경-100경)와 에픽테투스의 설교들에서부터 다마스키오스의 복잡한 형이상학에까지 동일한 거리가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시대에 크리스트교 철학이 있었다고 단지 말할 수 있다.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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