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이의 세상 (3)
- 나는 나팔이다 -
교수생활 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말과 생각을 내게 넣어 주시었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소개하려 한다. 우선 신설학교에는 여러 사람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었다. 1982년 국문과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나보다 4살 아래인 오 교수가 인문대학 소속 30여명 교수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 교수님은 우리 대학 유일한 장로님이시니까 기독교인의 대표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따질 것이 하나 있어요. 일요일마다 내 새벽잠을 깨우는 노파가 있어요. 기독교 전도지를 가지고 와서 벨을 누르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많아요.”
난로 주위에 둘러 서있던 교수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기독교인은 그 나름으로 비기독교인은 자기 나름으로 이 엉뚱한 도전에 내가 어떻게 답하나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오 교수는 화를 내면서 왜 웃느냐고 대들었다.
“당신 말이 어느 정도 맞아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을 비교할 때 다른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세상에는 물론이고 교회에도 오 교수처럼 착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 중에는 도둑도 있고 거지도 있어요. 그래도 교회는 열려있어서 누구나 받아줍니다. 교회 문에 들어서는 순간 도둑이 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가고 설교를 듣고 해가며 차차 좋아지는 것입니다. 처음 들어온 교인을 보면 오 교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기독교인이 나쁘다고 비판을 하려면 전형진이란 사람이 예수 믿고 어떻게 달라졌나를 보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나는 아주 독하고 나쁜 사람이었어요. 어렸을 때 나는 형을 돌멩이로 때려서 다치게도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상당히 좋아져서 아무도 나를 악인이라고 하지 않아요. 지금 교회에 오 박사같이 선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어서 교회에 나오십시오. 대 환영입니다.”
신자들은 “아멘!” 하며 박수를 쳤다. 오 교수는 얼굴이 벌게져서 “내가 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연구실로 찾아가서 따지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나가버렸다.“지고 이기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물어보니까 대답한 것이지 우리가 싸움을 했나요?” 내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이 죄인을 살려주시고, 귀한 직분을 주시어, 나팔로 사용하시니 고맙습니다.”
학점을 구걸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정년 직전에 겪은 이야기하나를 소개한다. 타과 학생 한 사람이 저학년 때 이수해야 할 교양영어 강좌를 졸업 직전에 수강신청을 해놓고 불쑥 내 연구실로 들어와 선물을 보따리를 내밀면서 성적을 구걸하였다. 출석 일수 미달에 시험조차 부실하게 치렀으니 성적이 나올 리가 없는 학생이었다. 선물을 연구실 밖에 내어놓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연구논문을 쓰고 어두움이 깔리는 시간에 퇴근하려고 내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순간, 이 학생이 내 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날씨가 무척 추웠다. 차에서 내려 일어나라고 타일렀으나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너 번 달래보아도 듣지 않았다. 나는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자네를 잘 못 가르친 내게도 책임이 있다. 세상을 더럽히지 말고 차라리 우리 같이 여기서 얼어 죽자!” 이 학생은 벌떡 일어나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일어나십시오.” 하며 두 손으로 싹싹 빌면서 사정을 했다. 한참 버티다가 내가 일어나는 순간 이 학생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달아나버렸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정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도록 이끌어주신 주님, 고맙습니다.”
아내가 부천에서 교사생활을 했었기에 부천에 집을 마련해서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내 권유에 따라 1979년 아내는 퇴직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1981년 아내가 가족회의를 열어 서울로 가는 것을 놓고 찬반을 물어보자고 했다. 결과는 반대 1표, 찬성 4표가 나왔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1982년 서울여의도로 이사를 했다. 따라서 1985년 새문안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새문안교회 당회에서 나를 2년 지켜보고 나서 재적장로 명칭을 인정할지 여부를 심사했다. 내 아버지만큼 나이가 든 오 장로님은 나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면서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승인을 받았지만 나는 그 장로님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아침마다 기도했다. 주일 아침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오 장로가 눈에 보이면 멀리 서도 뛰어가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이렇게 하면서 달이 가고 해가 갔다. 어느 날 오 장로님은 내게로 달려와서 먼저 인사를 했다. 그 후로는 먼저 보는 사람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것이다. 일부러 마음을 다진 것도 아닌데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서로 존중하고 감사하며 지내게 되었다.
이런 저런 사건을 통해서 교내에 나의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도 내 강의를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1995년 말에 인천대학교 각 단과대학마다 대표를 선정하여 조사해 보니 교인이 교수 중에 70여명이나 되었다. 비교적 열심인 교수를 앞세워 기독교수회를 창설했다. 내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매월 1회 예배를 드렸다. 1994년 시립대학으로 변한 이후 교수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위기의 시기에 기독교수회 회원들이 음으로 양으로 힘을 발휘하여 1996년 비리를 저지르고 인사를 함부로 하여 질서를 어지럽힌 황 총장을 퇴진시키고 학칙을 고쳐서 정직하고 능력 있는 김학준 박사를 직접 선거를 통하여 총장으로 선출하였다. 김 총장은 이전 어느 총장보다 학교를 발전시켰고 파벌을 초월해서 인사를 공정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