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장에서
추석 3일 전 청솔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이 용문 5일장이니 그곳에서 기가 막히게 맛좋은 음식도 먹어보고 추석장도 볼 겸 놀러오라는 거였다. 장구경이라는 말에는 고향 냄새가 배어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수원 장을 나서본 적이 여러 번 있었고 결혼 후에는 바닷가 일광에서 매일 서는 장을 드나들었으며 남창에서 열리는 5일장에서 식재료를 사다 먹기도 했으므로 어렴풋한 추억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또는 영화에서 시골 장은 시끌벅적하면서 들떠있고 흥이 살아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에 맞춘 엿가락 장단과 시골 아지매들의 구수한 사투리와 억센 욕설이 난무하는 토속적인 그런 시골장이 요즈음 드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를 즉석에서 유혹하는 먹거리는 여전하다. 옥수수 가루로 직접 반죽해서 만든 올갱이 국수부터 뜨끈한 멸치 국물에 바로 말아주는 잔치국수 그리고 사내들의 불콰한 얼굴과 텁텁한 웃음소리가 오고가는 순대 국밥집과 선지 국밥집 그리고 친구가 적극 추천한다는 바로 그 집.
아직 점심시간도 아니건만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연기가 매케하게 올라오는 화덕 앞으로 친구부부를 따라가 보니 석쇠 위에는 지글지글 손바닥만한 무언가가 노릇하게 구어지고 있고 아직 멀었냐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빗발치고 있다. 저게 뭐죠? 메추리입니다. 메추리알을 낳는 바로 그 메추리입니다. 기름기를 쪽 빼내고 바삭하게 구워진 메추리 여섯 마리와 쌀 막걸리 세 잔을 주문했다. 기가 막힌 맛이라는 친구의 너스레에 맞춰 막걸리 한 모금을 들이켠 뒤 메추리 살점을 뜯어내 한 입 오물거려보는데.
추석이 임박한 이틀 전에 왁자지껄한 시골 장터에 여유만만하게 앉아있는 그곳이 내게는 분명 천국으로 보인다. 어머님이 살아계신 동안에 내 추석은 시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치루고 산더미만한 설거지를 마치고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남남처럼 멀어져가고 그러다보니 추석 음식을 준비해야할 일이 사라진 지금 추석이라고 해봐야 우리 가족이 먹을 음식만 조금 준비하면 되니 마음과 몸이 둘다 가볍다. 스트레스가 없으니 천국이 따로 있는가 여기가 천국이다 .
친구부부와 청솔님은 메추리 뼈까지 오도독 오도독 잘도 씹어 삼키며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인데 처음 보는 음식에 거부감이 심한 나는 영 당기지가 않는다. 음식 맛이야 어떻든 내가 흡족해하는 것은 그냥 그대로의 여유였으니 나는 그 여유를 맛나게 씹어 삼킨다. 그리고도 점심으로 해물 칼국수를 배불리 먹고 그늘에 앉아 한참을 노닥거려도 되는 천국의 시간은 쭉 지속되어지는가 싶었는데
한밤중에 배가 아프다며 그가 일어났다. 아랫배가 살살 아프면서 속이 더부룩하단다. 메추라기와 칼국수와 간단하게 때운다고 저녁으로 먹은 라면 그리고 감자칩 몇 장등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음식으로 채워진 그의 위장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이다. 토하지도 않고 설사도 없으면서 배가 아픈 증상이었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병명이 불분명하다. 소화제 몇 알을 삼키고도 오후가 되면서 점점 더 심해져서 식은땀을 흘려가며 그가 누워있는데 옆에서 그의 배를 문질러주는 그 시간은 기쁨과 행복을 전부 빼앗긴 지옥 그 자체다.
약을 사러 무조건 뛰어나갔으나 추석 전날이고 일요일이니 약국마다 컴컴하다. 명절이나 연휴 때는 그 지역에 한 군데씩은 문을 열게 되어 있다는 정보가 떠올라 온 동네를 샅샅이 뒤져나가는데 한 시간을 돌아다닌 후에 운 좋게도 불이 훤하게 밝혀진 약국을 만났으니 어두운 지옥을 벗어날 희망을 한 봉지 얻은 기분으로 달려와 그 희망을 남편에게 서둘러 먹였다.
추석날 죽을 먹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가을 햇살처럼 따사로워야 할 추석날 이렇게 어두울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아픈 사람이 있으니 기름 냄새 풍기는 음식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고 조금 재 두었던 갈비 몇 대씩을 아이들에게 안겼다. 흰 쌀죽과 전복죽으로 다섯 끼를 먹고 나서 다행히 통증이 가라앉고 편안해진 그와
가물어서 푸석해진 배추 무 밭에 물을 흠뻑 뿌려주는 일,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산길을 산책하는 일, 흐물흐물한 죽이 아닌 꼬들꼬들한 밥알을 씹어 삼키는 일, 구름사이로 지나가는 보름달을 고요히 바라보는 일 모두가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잔잔하게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날 저녁 사랑을 나눈 뒤에도 나는 말했다. 여보 정말 감사한 일이지 고마운 일이지. 추석 전후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 감사함이 그만큼 절실할 수 있었을까
천국과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뜰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텃밭에서 시들어가던 참외처럼 우리 곁에 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