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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례>
1. 7世 겸수(謙受, 1555.3.22.~1598.4.15.)공 소개 2
2. 통훈대부 학성 이겸수공 신도비명병서 8
3. 판관공 이겸수의 생애 12
가. 사우, 서원 현판에 적절한 문구 12
나. 잠와공의 한시 12
4. 南岡祠(남강서원) 17
5. 판관공의 일생을 통한 소개 21
가. 죽재공 이겸수의 형제 연보 21
나. 죽제공의 다큐 스토리 26
1막 학문과 수양의 청년 (1555–1591) 26
2막 국난, 칼을 들다 (1592–1593) 27
3막 적진을 오가는 외교관 (1594) 29
4막 목민관의 길과 요절 (1596–1598) 31
다. 판관공을 기리는 노래의 구성 32
1. 7世 겸수(謙受, 1555.3.22.~1598.4.15.)공 소개
가) 통훈대부 판관공 이겸수(李謙受, 1555–1598)
자(字)는 자허(子虛), 호(號)는 잠와(潛窩) 또는 죽재(竹齋)이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事) 종실(宗實)의 6세손(世孫)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우춘(遇春)의 장자(長子)로 울산군 서면 대주리(현 주남리)에서 1555년 3월 22일 태어났다.
나) 인물 개요
출생: 1555.3.22(명종 10) 진시, 울산 서면 대주리(현 양산 주남리)
가계: 시조 충숙공 이예 7세손 | 부 우춘(상서원 직장) | 모 흥려박씨
배우자: 숙인 순흥안씨(1558–1642)
몰년: 1598.4.15, 경주(월성부) | 향년44
다) 한눈에 보는 연표
성장 · 수학
유년총명·영특, 문필과 치경에 탁월
1580(25)부친상, 3년상 예로 완수
임진왜란 · 군공 · 외교
1592(38)임진왜란 발발, 가족 피난
1593(39)좌병사 진중 군관 주부
1593사명대사 유정과 교유, 군무·외교 참여
1593.8모친상, 예법 엄수
1594(40)기복 종군
1594.1.25별시 권무병과 병과 급제
1594북부주부 겸 지휘사
1594서생포 왜성 회담 수행(1·2·3차)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 반간계 주도
부장 희팔랑 회유, 적정 탐지 보고
명 도독 유정, “수재”라 칭찬
관직
1596(42)통훈대부 기장현감
1597(43)정주판관 제수
별세
1598.4.15(44)부임 도중 병으로 별세(절명시 전함)
라) 묘소 변천
초장: 부산 기장 정관면 예림
1987양산 웅상 덕계리 아리골 이장
2009.4.18양산 주남동 산 149-1 이장
2009.6.16신도비 제막
마) 사우 · 제향
1783충렬사(남강사) 건립
1868남강서원 승격
1871서원철폐로 훼철
2009남강서원 복원
바) 유물
이겸수 보검(길이 65cm)
2009 묘 이장 시 출토
2014.2.13 양산유물전시관 상설 전시
어려서부터 총명·영특하였으며 자라서는 문필(文筆)과 치경(治經)에 탁월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에 참여하여 대소전투(大小戰鬪)에서 공을 세우고, 선조 27년(1594) 정월 25일 별시(別試) 권무병과(勸武丙科)에 급제하였다. 동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울산 서생포에서 진을 치고 조정에 화친을 청하는 글을 보내자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향의 장희춘(蔣希春)과 함께 우리 측 대표인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을 수행하여 동년 4월 13일 서생포 왜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간 1차 회담과 동년 7월 12일 2차 회담을 수행하고, 동년 12월 23일 3차 회담에는 사명대사가 불참하고 우리 측 대표로 참여하면서 적의 진위를 파악하는 한편 가토오 기오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반간계(反間計)를 주도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총애하는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에게 접근하여 적절한 논변과 거동으로 적의 불필요한 의심을 해소하는 한편 충심으로 적정을 상세히 파악하여 나라에 보고하니 명나라 총병(總兵) 유정(劉綎)도 도독(都督)은 그를 가르쳐 수재(秀才)라고 칭송하였다.
장희춘(蒋希春, 1556~1618): 본관 아산(山), 자(字)는 인경(仁敬), 호(号)는 성재(誠齋),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향의 이경연(李景淵), 박봉수(朴寿) 등과 의병을 일으켜서 울산 개운포, 함월산성, 경주 금오산, 영천 창암, 창녕의 화왕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선조 27년(1594)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 간 서생포 회담 시 적정을 탐지하는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장흥고 직장, 용양위 부사정, 부사과, 동래·기장현감, 훈련원판관, 장례원 사평, 선조 39(1606)년에는 형조정랑이 되어 쇄환사(刷 여우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저서로 <성재실기> 4권 1책이 있다. 생전에 제월당 이경연(1565~1643)공, 죽재 이겸수(1555 ~1598)공, 제월당의 외사촌 형 장계현公 등 네 분의 우의가 두터웠다고 전한다.
公의 사적은 선조실록(宣祖實錄)>, 12회,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사명대사의 <분충서난록奮忠舒難錄)>, 정탁의 <용사잡록 (龍蛇雜錄)〉,〈적정탐지기(賊靑知記)> 등에 실려 있다.
벼슬은 북부주부겸 지휘사(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기장현감(機長縣監)을 제수받고, 얼마 후 정주판관(定州判官)을 제수받아 부임하던 중 과로로 병을 얻어 선조 31년(1598) 4월 14일 경주부에서 향년 44세에 졸(卒)하였는데 절명시(絶命詩)가 전한다.
묘소는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예림마을에 있었으나, 1987년경 농공 단지 개발에 편입됨에 따라 양산시 웅상읍 덕계리 평산마을 46~1번지 아리골(阿里)에 이장하였다. 이 또한 체육공원부지에 편입됨에 따라 陰 2009년 4월 18일 웅상읍 주남리 하리마을 선산(주남동 산 149-1)에 이장하여 2009년 6월 16일 비석 제막식을 하였다.
유품으로는 묘(墓) 이장 당시 출토된 장검(長劍)이 한 자루 전하는데, 양산유물전시관에 2014년 2월 13일 기탁한 학성이씨 ‘이겸수 보검' 은 길이 65㎝의 검으로 손잡이 부분이 남아있지 않지만 검신의 훼손이 없고 명문이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 무신들이 사용했던 무기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자(子)에 준발(駿發), 손(孫) 의지(依址), 증손(曾孫) 진한(震漢), 현손(玄孫) 일찬(逸贊), 내손(來孫) 용택(龍澤), 곤손(晜孫) 경관(慶寬), 잉손(仍孫) 광신(光臣), 운손(雲孫)에 동배(東培)가 있다.
-. 참고자료
《선조실록》·《징비록》·《분충서난록》·《용사잡록》·《적정탐지기》
2. 통훈대부 학성 이겸수공 신도비명병서
(通訓大夫 鶴城 李謙受公 神道碑銘幷序)
공의 성은 이씨이고 관향(貫鄕)은 학성(鶴城)이며 휘(諱) 겸수(謙受) 자(字) 자허(子虛) 호(號) 잠와(潛窩) 승사호(陞賜號)가 죽재(竹齋)이시다. 세종조(世宗朝)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지낸 시조(始祖) 충숙공(忠肅公) 휘(諱) 예(藝)의 7세손이다.
고(考)는 휘(諱) 우춘(遇春) 자(字) 응서(應瑞)로 상서원 직장(尙瑞院 直長)이시고 비(妣)는 흥려박씨(興麗朴氏) 어모장군(禦侮將軍) 휘(諱) 자공(自恭)의 따님이시다. 공(公)은 명종 10년 을묘(1555) 3월 22일 진시(辰時)에 부서(府西) 웅상면(熊上面) 대주리(大周里)에서 태어나셨다.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 성품(性稟)과 도량(度量)이 엄정하고 위의(威儀)와 용모(容貌)가 의젓하여 두려워할 만하고 남을 대함에는 공손(恭遜)하고 충성스러워 신실(信實)한데다 또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
25세 장년(壯年)에 아버님 상(喪)을 당하여 보상(報喪) 3년을 례(禮)로서 다하였다. 38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위로 노모(老母)를 모시고 아래로 네 아우와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뒷산 일조암(日照菴)으로 피난했다.
하루는 모부인(母夫人)께서 공(公)에게 국가위망지일(國家危亡之日)을 당하였으니 의(義)로써 공명(功名)을 세워 군은(君恩)에 보답(報答)할 것을 일깨우자 공(公)께서 크게 깨닫고는 공경(恭敬)스럽게 명(命)을 받들어 하직하고 계사년 정월에 말을 달려 좌병사(左兵使)의 진중(陣中)에 나아가 군관(軍官) 주부(主簿)에 선임되었다.
또한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만나 함께 얘기를 해보니 크게 기뻐하며 장막 중에 머물게 하고 여러 의론에 참획(參劃)하게 하였다.
7月에 모부인(母夫人)을 산막(山幕)에서 배알(拜謁)하니 환후(患候)가 있어 시탕(侍湯)했으나 8월 초4일에 고종(考終)을 하였다.
상중(喪中)에 사명당(四溟堂)이 글을 보내와 만나기를 청했으나 “복(服)을 입은 사람이 어찌 군진(軍陣)을 출입하겠는가?”라고 거절함이 매우 확실했다. 사명당이 상계(狀啓)를 행재소(行在所)로 보내 말하기를, “청정(淸正)의 진영을 정탐(偵探)하는 일은 李아무가 아니면 일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는데 지금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예(禮)를 지킴이 더욱 두터워 진실로 조정(朝廷)의 命이 아니면 이 사람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상(上)께서 곧 전교(傳敎)하여 기복(起復)하라 하시니 성지(聖旨)가 간절(懇切)하고 돈독(敦篤)하여 공(公)이 부득이 눈물을 씻고 전쟁에 종사했다.
(宣祖) 갑오년(1594) 정월 조정(朝廷)의 례(例)에 따라 무과(武科),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북부주부(北部主簿) 겸 지휘사(指揮使)에 제수되었다.
동년(同年) 5월에는 사명대사와 더불어 비변사(備邊司)에 나아가 적정(敵情)을 상세히 알려 화전(和戰) 양면의 외교활동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였다.
또한 가등청정의 영중(營中)에 출입하면서 죽음과 험난을 무릅쓰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주선과 설득으로 횡포와 약탈을 중지하고 평온을 찾게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많은 남쪽 백성들이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公의 공덕이 아님이 없다.
상(上)께서 가상히 여겨 장차 크게 쓰고자 하시어 병신년(1596) 7월 공(公)의 나이 42세에 통훈대부(通訓大夫) 기장현감(機張縣監)에 제수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정주판관(定州判官)을 제수하니 장차 부임(赴任)하려 하며, 읊은 시(詩)에 이르기를 “歲晏深知客味酸 一年無夢到長安 天高月色秋山靜 風急江聲 夜枕寒 若命不悲身地窄 全生猶荷聖朝寬 莫將世事 虛商華 安得浮雲有定端”라 하고 중도(中途)에 무술(戊戌, 1598) 4월 15일 월성부(月城府)에서 병(病)으로 돌아가니 향년(享年)이 44세였다.
배(配)는 숙인(淑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인데 명종(明宗) 무오(戊午,1558)년에 태어나서 인조(仁祖) 무오(壬午,1642)년 정월 15일 향년 85세로 돌아가셨으며 자(子)는 휘(諱) 준발(駿發) 통훈(通訓) 군자감정(軍資監正)이다.
명나라 도독유정(都督劉綎)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적충혈(赤忠血)은 양국소복(兩國所服)이라”고 전해 온다.
애석하고 원통하도다!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않아 웅지(雄志)를 다하지 못했다.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여 8년 전쟁에 기여한 공(功)이 많았으니 또한 공(公)의 충성과 용맹이 천성에 부여된 것이고 평소에 기른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난을 당하여 강개(慷慨)했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일의 대강(大綱)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조(宣祖條) 및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용사잡록(龍巳雜錄) 등에 기재되어 있다. 정조(正祖) 7년 계묘(癸卯, 1783)에 관민(官民)이 사당(祠堂)을 세워 추모하니 묘호(廟號)를 충렬사(忠烈祠)라 하고 사명(祠名)은 남강사(南岡祠)라고 했다.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사림(士林)이 공의(公議)로써 명칭(名稱)을 남강서원(南岡書院)으로 승격하였으나 신미년(辛未年, 1871) 서원철폐(書院撤廢)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충의세가(忠義世家)에는 반드시 넉넉한 경사(慶事)가 있으니 후손들이 번창하고 근실하게 선조(先祖)를 숭모(崇慕)하여 을유년(乙酉年)에 남강서원을 복원(復元)할 것을 발의(發議)하고 병술년(丙戌年)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무자년(戊子年)에 옛터전 가까운 땅을 가려서 기공(起工)하여 을축년(己丑年)에 묘우(廟宇), 신문(神門), 강당(講堂) 동․서재(東․西齋)를 완공하여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였다.
묘소는 부서(府西) 웅상면(熊上面) 평산리(平山里) 하곡리(何里谷)에 배위(配位) 숙인(淑人) 순흥안씨(順興安氏)와 유자지원(酉子之原)에 합폄(合窆)하였다가 을축년(2009)에 웅상체육공원 조성으로 인하여 이곳 주남동 후산(後山)으로 묘역(墓域)과 석물(石物)을 갖추어 이장(移葬)하였다.
삼가 그 묘도(墓道)에 돌을 깎아 행적(行績)의 대강을 기록하고 이에 명(銘)하기를
어릴적에 익힌정훈(庭訓) 효제충신(孝悌忠信) 꿰뚫으고
왜적침략(倭賊侵掠) 국난당해 칼을짚고 일어섰네
적진속을 드나들며 적괴간담(賊魁肝膽) 식혀주고
슬기로운 임기응변(臨機應變) 남도(南道)백성 구했다네
임금님의 각별은고(恩顧) 벼슬내려 격려했고
가슴속의 웅지경륜(雄志經綸) 펼칠기회 얻었건만
애석(哀惜)할손 천수(天壽)놓쳐 수名만이 전해오네
여경(餘慶)으로 자손번연(子孫蕃衍) 길이길이 귀감(龜鑑)되리
기축 2009년 입하절(己丑 2009年 立夏節)
성균관장 경주 최근덕 근찬(成均館長 慶州 崔根德 謹撰)
통훈대부 학성이공 신도비(通訓大夫 鶴城李公 神道碑)
3. 판관공 이겸수의 생애
가. 사우, 서원 현판에 적절한 문구
1) 현판용 대표문구
孝忠智義 立身衛國
(효와 충, 지혜와 의로 몸을 세워 나라를 지키다)
2) 외교·지략을 강조한 현판
出入賊營 以智靖難
(적진을 드나들며 지혜로 난리를 평정하다)
3) 학문·수양 중심 현판
庭訓在身 忠信在行
(가정의 가르침은 몸에 있고, 충신은 행실에 있다)
4) 요절과 여경을 아우르는 문구
身短而道長 餘慶無窮
(몸은 짧았으나 도는 길어, 여경이 끝이 없다)
5) 비석 음기(陰記)용 문구
國亡則家安乎(나라가 없는데 어찌 집이 편안하랴,
是以仗劍赴難(이로써 칼을 잡고 난리에 나아갔다)
나. 잠와공의 한시
1) 잠와공의 충성심
잠와공 이겸수님이 임진외란을 맞아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사명대사와 함께 가토 히데요시 왜장과 서생 왜성에서 회담을 하여 침입이 부당함을 이해시켜 왜군이 물러날 수 있도록 하여 그 공으로 기장혀남을 제소 받았고 이어 정주 판관을 하사 받아 취임을 하기 위해 가는 도중 임란으로 병약해진 몸으로도 경주 월성에서 병을 얻어 더 이상 이 몸으로 관직을 수행할 수 없음을 안타갑게 고뇌하면서도 나라르 위하는 충성심을 표현한 한시는 다음과 같다.
幼習庭訓貫孝忠 어려서부터 효제충신의 가르침을 익혀,
倭侵國難仗劍雄 왜적의 침략이라는 국난에 칼을 들고 일어나
出入賊營寒魁膽 적진을 오가며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臨機妙策救南民 임기응변으로 남도(南道) 백성을 구하였다
王恩特賜榮官秩 임금의 각별한 은총으로 벼슬을 받았으나,
胸藏雄略展未伸 큰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惜哉天壽名空在 수명은 짧았으나 이름은 남아,
餘慶子孫作世龜 그 여경이 자손에게 이어져 길이 귀감이 되노라
2) 臨亂忠憤歌(임란충분가)
1) 음훈
壬辰烽火遍東陲 임진 봉화가 동쪽 변방에 두루 퍼졌네
布衣義起志難移 베옷 입은 몸으로 의롭게 일어나 뜻을 옮기지 않았네
隨師泗溟入西生 사명대사를 따라 서생포로 들어가니
說義陳非動敵魁 의로움을 말하고 그릇됨을 밝혀 적장의 마음을 움직였네
倭將始悟侵非理 왜장이 비로소 침략이 옳지 않음을 깨달았고
干戈暫歛海雲垂 창과 방패 거두고 바다에 구름이 드리웠네
此功特拜機張宰 이 공으로 특별히 기장 고을 원이 되었고
旋賜定州判官職 곧이어 정주 판관 벼슬을 하사받았네
病骨侵年身欲仆 병든 뼈에 세월이 스며 몸이 쓰러지려 하니
月城秋夜恨難支 월성의 가을밤, 한을 견디기 어려워라
不能報國空流涕 나라에 보답하지 못해 헛되이 눈물만 흐르네
一片丹心照史詩 한 조각 붉은 충심이 역사와 시를 비추리라
壬辰烽火遍東陲 임진 봉화가 동쪽 변방에 두루 퍼졌네
臨亂忠憤歌(임란충분가)
壬辰烽火遍東陲(임진봉화편동수)
布衣義起志難移(포의의기지난이)
隨師泗溟入西生(수사사명입서생)
說義陳非動敵魁(열의진비동적괴)
倭將始悟侵非理(왜장시오침비리)
干戈暫歛海雲垂(간과잠감해운수)
此功特拜機張宰(차공특배기장재)
旋賜定州判官職(선사정주판관직)
病骨侵年身欲仆(병골침년신욕부)
月城秋夜恨難支(월성추야한난지)
不能報國空流涕(불능보국공류체)
一片丹心照史詩(일편단심조사시)
해석
임진년에 봉화의 불길이 동쪽 변방 온 나라에 퍼지고
벼슬 없는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뜻을 굳게 세우니 흔들림이 없었네
사명대사를 따라 서생 왜성으로 들어가
의리를 설하고 그릇됨을 밝혀 왜장의 마음을 움직였도다
왜장이 비로소 침략이 이치에 어긋남을 깨닫고
창과 칼을 잠시 거두니 바다에는 구름이 드리웠네
이 공으로 특별히 기장 현감에 제수되고
이어서 정주 판관의 벼슬을 하사받았네
병든 몸은 해를 넘기며 더욱 쇠약해져 쓰러질 듯하고
경주 월성의 가을밤, 한스러운 마음을 이기기 어려웠네
나라에 보답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공연히 눈물만 흐르고
한 조각 붉은 충정만이 역사 속 시로 남아 빛나네
임란충분가 훈독 시
임진왜란의 불길 속에서 벼슬 없는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사명대사와 함께 왜성을 찾아 의로 침략의 부당함을 설득하였고, 그 공으로 관직을 받았으나 병든 몸으로 부임길에 올라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라를 위하는 붉은 충성심만을 역사에 남겼다는 한시이다.
임진년에 봉화가/ 동쪽 변방에 가득 퍼지고/ 베옷 입은 몸으로/ 의롭게 일어나
뜻을 옮기지 않았네/
사명대사를 따라/ 서생포로 들어가/ 의로움을 말하고/ 그릇됨을 밝혀/ 적장의 마음을 움직였네
왜장이 비로소/ 침략이 옳지 않음을 깨닫고/ 창과 방패를 거두니/ 바다 위에 구름이 드리웠네
이 공으로/ 기장 고을 원이 되었고/ 곧이어/ 정주 판관 벼슬을 받았네
병든 몸에 세월이 스며/ 쓰러지려 하는데/ 월성의 가을밤/ 한을 견디기 어려워라
나라에 보답하지 못해/ 헛되이 눈물만 흐르고/ 한 조각 붉은 충심은/역사와 시에 길이 비치리라
4. 南岡祠(남강서원)
울산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동래부 울산군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으며, 1906년에는 울산의 외남면·웅상면이 양산군으로 이관되었다.
남강서원이 위치는 양산시 주남동 613번지[주남마을1길 8]에 있다.
남강서원(南岡書院)은 7세 통훈대부 行 기장현감 정주판관 휘 謙受(1555~1598)公을 추모하는 관민의 염원으로 정조 7년 계묘년(1783년)에 남강사(南岡祠)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고종 5년 무진년(1868년)에 사림의 공의에 따라 남강서원(南岡書院)으로 승호(陞號)되어 후학양성이 활발하고 사림 유생들의 강학논경을 하였으며, 山長 1인, 有司 1인을 두고 향제하여 왔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또한 龜洛公이 축조한 華堂(화당)도 폐하고 없다.
선무원종공신(창의의사) 정주판관 휘 겸수공은 1555년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에서 출생하고 자(字)는 子虛요 호는 竹齋(죽제) (혹은 潛窩(잠와))로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고 北部主簿(북부주부)로 적진에 누차 왕래하면서 軍機를 탐지하고 和戰의 강화회담 등 외교교섭에 진력한 공으로 선조실록에 공의 이름이 아홉곳에 기록되어 당시의 활약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도총섭 승장 유정과 더불어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종의지, 평조신 등 적장간의 이간책과 명의 유총병(劉摠兵), 심유격(沈遊擊)과의 조정을 위하여 기밀문서를 열겹으로 단단히 봉하여 옷깃 속에 넣어 가라는 십습견봉(十襲堅封)의 밀지를 받아 진중에 나아갔다고 선조실록 27년 9월 6일조에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급박한 정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1594년 5월에는 의병장 유정과 더불어 비변사에 나아가 적정을 상세히 알려 화전양면의 외교활동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으로 기장현감을 제수받고 그 얼마 후 정주판관으로 승계 제수받았고 1598년 졸하셨다. 후에 유림에서 남강사를 세워 공의 위패를 모셨다.
초등학생들에게 남강서원(南岡書院) 선인당(宣仁堂)에서 선비문화 체험 전통의상 입기와 동영상, 서원견학, 다례체험 등으로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이창진(성균관대학교 인성예절학 교수) 훈장이 우리 민족의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매월 망일(15일)에 분향례와 매년 봄 향례를 서원에 있는 충열사에서 많은 향도사림과 후손들이 공경을 다해 봉행하고 있다.
남강서원은 이겸수의 고향인 학성(鶴城: 울산의 옛 지명)에 세워져 조선시대 후학 양성과 사림 유생의 강학 등 교육장소로 활용되다가 신미년(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관련 문헌들이 없어지고 1946년 건물도 헐려 그 터만 남아 있다가 후손에 의해 2008.4.18. 기공식을 하고 2009.5.16준공 낙성식을 가졌으며, 468평의 부지에 사당과 강당을 완공하여 138년만에 복원됐다.
위치는 주남동 산 195-1이며 서원비(묘정비)는 앞마당에 있고, 충열사 9평, 내삼문 5평, 강당 25평, 동재 13평, 서재 27평, 외삼문 7평으로 약 11억원이 소요되었다.
5. 판관공의 일생을 통한 소개
가. 죽재공 이겸수의 형제 연보
이겸수(李謙受)| 자 자허(子虛) | 호 잠와(潛窩)·죽재(竹齋) | 본관 학성(鶴城)
1555년 명종 10년 3월 22일 울산 서면 대주리에서 태어났다. 시조 충숙공 이예의 7세손으로, 부는 상서원 직장 우춘, 모는 흥려박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필과 경학에 뛰어났으며, 25세에 부친상을 당해 예에 따라 3년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고, 선조 27년(1594) 별시 권무병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사명대사 유정을 수행하여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에 참여하며 적정을 탐지하고 외교 활동에 공을 세웠다.
이후 북부주부 겸 지휘사를 거쳐 통훈대부 기장현감에 제수되었고, 정주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병을 얻어 선조 31년(1598) 4월 15일 경주에서 향년 44세로 졸하였다.
임진왜란이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음력 4월 13일)부터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까지로, 이날이 바로 노량해전이 벌어진 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7년에 걸친 임진왜란(임진·정유재란)이 종결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에는 판관공 이겸수공께서는 38세이고 1598년 4월 15일 돌아가셨으니 이때 나이 44세로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이지만 전쟁이 끝나기 8개월 전에 돌아가셨다.
| 성명 | 생년과 생졸 년도 | 비고 | 수명 |
| 우춘 | 1530.3.29.-1579.12.23 | 50세 | |
| 겸수 | 1555.3.22.-1598.4.15 | 정주판관을 제수받고 임관차 가던 중 경주에서 병사함 | 44세 |
| 겸록 | 1558.윤7.7생 | 임란 때 해를 입어 돌아가심 | 35-37 |
| 겸광 | 1560.11.11생(배.김씨) | 임란 때 경산에서 참소당함 | 32-35 |
| 겸복 | 1570.9.25생 | 장가들기 전에 졸함 | 24-26 |
| 겸익 | 1575.1.29.-1645.12.25 | 문인(文人)으로 생활 | 71세 |
죽재공은 5형제 중 장남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넷째인 겸복이 22세이고, 겸익이 18세인 동생에게 병환에 계신 모친 흥려박씨를 일조암에 피신시킨 후 모친의 말씀따라 겸록, 겸광 두 동생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였고 그 다음해에 모친 흥려박씨께서 돌아 가시자 겸복과 겸익은 멀리 나주에 계신 관해공 임회의 수하에서 3년간 수학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겸록과 겸광 두 형제를 잃고, 의병활동으로 사명대사와 함께 서생 왜성에서 왜장과 회담하는 등 여러 가지 공을 세웠고 벼슬에도 입격하여 기장현감을 제수 받은 뒤 정주 판관까지 제수 받아 임관을 하러 가던 중 전쟁으로 과로한 상태에 몸이 쇄약한 상태로 임진왜란이 끝나기 8개원 전인 4월에 경주에서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
배는 숙인 순흥안씨로 아들 준발을 두었다. 묘는 양산시 주남동 선산에 있으며, 충렬사(남강사)에 제향되었다.
이상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된다.
잠와(潛窩) 이겸수(李謙受) ― 장남 · 중심 인물
생몰: 1555.3.22 ~ 1598.4.15 (향년 44)
호: 잠와(潛窩), 죽재(竹齋)
관직: 기장현감 → 정주판관(제수)
역할 요약
임진왜란 발발 시 의병장 격 핵심 인물
사명대사 유정 수행, 서생포 왜성 회담 참여
가토 기요마사 등 왜장과 담판, 외교·첩보 공로
전쟁 중 과로·병약 → 임관 도중 경주에서 순절
무장·외교·문신을 겸한 인물,
전쟁 종결 8개월 전까지 나라를 위해 소진된 삶
이겸록(李謙祿) ― 차남 · 전쟁 희생자
생몰: 1558년 윤7월 7일생 ~ 임란 중 경산에서 피살로 사망
향년: 약 35~37세
형 겸수와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여 전쟁 중 경산에서 직접적인 피해로 순절
무명 속에 사라진 의병 세대의 상징
이겸광(李謙光) ― 삼남 · 전쟁 중 희생
생몰: 1560.11.11생 ~ 임란 중 사망
배우자: 김씨
임진왜란 중 경산에서 참소(讒訴)로 희생
전쟁기의 혼란과 모함 속에서 칼보다 무서운 ‘말’에 쓰러진 비운의 인물
이겸복(李謙福) ― 사남 · 요절
생몰: 1570.9.25생 ~ 24~26세 요절
특징: 장가도 들지 못하고 사망, 임진왜란 당시 22세
이겸익(李謙益) ― 오남 · 유일한 장수자
생몰: 1575.1.29 ~ 1645.12.25 (향년 71)
특징:
형들이 전사·요절한 뒤 가문을 이어간 인물
문인으로 활동
임진왜란 후 가문의 기억과 명맥을 보존
‘여경(餘慶)’을 잇는 존재, 형들의 희생 위에 남은 기록자
이 다섯 형제의 이름 끝 글자(受·祿·光·福·益)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유교적 작명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가치 사슬을 이룹니다.
아래에 각 글자의 뜻 → 인명 의미 → 형제 간 연관성순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謙受(겸수) ― “겸손히 받아 지니다”
受: 받을 수, 감당하다, 이어받다
인명적 의미
하늘의 명과 부모의 가르침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
책임과 사명을 회피하지 않고 몸으로 감당하는 존재
상징
가문의 뜻과 국난의 짐을 먼저 ‘받은’ 장남➡수(受)는 시작이자 부담의 수용
(2) 謙祿(겸록) ― “겸손히 녹을 바치다”
祿: 녹봉, 삶의 보장, 하늘이 내린 복
인명적 의미
사사로운 녹을 탐하지 않고 국가의 녹을 대신해 몸을 내놓는 인물
상징
관직의 보상보다 전쟁의 희생을 택한 이름➡ 록(祿)은 생명의 대가로 바쳐진 몫
(3) 謙光(겸광) ― “겸손한 빛”
光: 빛, 드러남, 명예
인명적 의미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되, 행실로 드러나는 사람
상징
억울한 죽음 속에서도 후대에 남은 명예의 빛
➡광(光)은 가려졌으나 꺼지지 않은 명분
(4) 謙福(겸복) ― “겸손히 누릴 복”
福: 복, 삶의 완성, 평안
인명적 의미
조용히 가정의 복을 이루는 삶을 뜻하나
상징
전쟁 속에서 끝내 누리지 못한 복
그래서 더욱 비극적 이름➡ 복(福)은 빼앗긴 가능성
謙益(겸익) ― “겸손히 더하다”
益: 더할 익, 이로울 익
인명적 의미
가문과 세상에 남김을 더하는 사람
상징
형들의 희생 위에 남아 기억을 보태는 존재
후손과 기록으로 이어지는 여경(餘慶)
익(益)은 끝에서 다시 이어지는 결실을 의미
다섯 이름을 잇는 하나의 연관 표현
🔹 한문 사슬 표현
受而祿之,光而不耀,福未及身,益在後昆
(받아 녹을 바치고, 빛나되 드러내지 않으며, 복은 몸에 이르지 못했으나, 이로움은 후손에 남았다)
🔹 5형제의 사자성어식 요약
受志祿命(수지록명): 받은 이는 짐을 지고, 녹을 받은 이는 몸을 바쳤으며,
光節不耀(광절불요):: 빛난 이는 드러나지 않았고,
福薄志厚(복박지후): 복은 누리지 못했으나,
益傳後世(익전후세):그 이로움은 후대에 남았다.
비문·사우·족보에 쓰기 좋은 문장형
謙受以身任國,謙祿以命酬義,謙光以節垂名,謙福以早殞見悲,謙益以餘慶啓後
겸수이신임국,겸록이명수의,겸광이절수명,겸복이조운견비,겸익이여경계후
(겸수는 몸으로 나라를 맡고, 겸록은 목숨으로 의를 갚았으며,
겸광은 절개로 이름을 드리웠고, 겸복은 일찍 져 슬픔을 남겼으며,
겸익은 여경으로 후손을 열었다.)
나. 죽제공의 다큐 스토리
1막 학문과 수양의 청년 (1555–1591)
1) 내레이션
16세기 중엽 조선.
사림 정치가 자리를 잡고, 가문마다 유교적 교육을 가문의 뿌리로 삼던 시대였다.
울산 서면 대주리에서 회야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 한 선비의 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이겸수. 훗날 ‘잠와’, ‘죽재’라 불린 인물이다.
겸수의 집안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가르침만은 엄격했다.
아버지 우춘은 벼슬을 지냈으나 말보다 몸가짐과 실천을 중시했다.
소년 겸수는 글을 읽기 전에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다.
『소학』의 문장은 암송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고, 효와 공경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익혔다.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조용한 아이인데, 속이 단단하다.”
스물다섯. 겸수는 부친상을 맞는다.
젊은 나이였지만 예를 다해 삼년상을 치른다.
이 시간은 그에게 평생의 기준이 된다.
나라를 말하기 전에 집안을 바로 세우고, 벼슬을 논하기 전에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겸수는 그렇게 학문을 통해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2) 시대 배경
16세기 중엽, 사림 정치가 정착되고 유교적 가치가 가문 교육의 중심이 되던 시기.
장면 1 | 대주리의 아침
울산 서면 대주리. 태화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 선비의 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겸수. 훗날 ‘잠와’라 불릴 인물이다.
장면 2 | 가학(家學)
아버지 우춘의 훈도 아래 『소학』과 『논어』를 읽고, 어머니에게서 효와 공경을 배운다. 마을에서는 총명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일찍부터 이름이 난다.
장면 3 | 상(喪)을 통해 완성된 인격
25세에 부친상을 당한다. 젊은 나이에도 예를 다해 3년상을 치르며 ‘학문은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신념을 굳힌다.
3) 핵심 메시지
충과 의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수양 속에서 길러진다.
2막 국난, 칼을 들다 (1592–1593)
1) 내레이션
1592년, 임진왜란. 왜군은 남해안을 따라 순식간에 북상했고 울산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겸수는 먼저 움직여 노모와 형제들, 가족을 뒷산 일조암으로 피신시킨다.
그리고 밤이 찾아온다.
나라를 택하면 가족이 위험해지고, 가족을 택하면 나라가 무너진다.
그 침묵의 밤, 노모가 말한다.
“나라가 없으면, 집도 없다.” 그 한마디로 길은 정해진다.
겸수는 말을 달려 좌병사 진영으로 향한다.
군관 주부로 선임된 그는 전투뿐 아니라 군정과 행정 실무까지 맡는다.
이 무렵, 그는 한 인물을 만난다.
승려이자 외교관, 사명대사 유정. 두 사람은 밤마다 이야기한다.
칼로 이기는 전쟁과 말로 끝내는 전쟁에 대해. 그들은 깨닫는다.
이 전쟁은 칼만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을.
2) 시대 배경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조선은 전례 없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빠진다.
장면 1 | 피난
왜군이 남하하자 겸수는 노모와 형제들을 뒷산 일조암으로 피신시킨다. 나라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침묵의 밤.
장면 2 | 어머니의 한마디
“나라가 없으면 집도 없다.”
노모의 말은 겸수의 가슴을 울린다. 그는 결심한다.
장면 3 | 군문으로
말을 달려 좌병사 진영으로 향한다. 군관 주부로 선임되어 실무와 전투를 함께 맡는다.
장면 4 | 사명대사와의 만남
승려이자 외교관, 사명대사 유정. 두 사람은 밤새 토론하며 전쟁의 또 다른 길, 외교의 가능성을 논한다.
3) 핵심 메시지
진정한 용기는 칼을 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3막 적진을 오가는 외교관 (1594)
1) 내레이션
때는 1594년.
겸수는 별시 권무병과 병과에 급제한다. 이제 그는 조선이 인정한 공식 무신이다.
사명대사를 따라 서생포 왜성으로 들어간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죽음이다.
겸수는 싸우지 않는다.
그는 관찰한다.
가토와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의 균열, 장수들 사이의 미묘한 불신. 그는 반간계를 설계한다.
가토가 총애하는 부장 희팔랑에게 접근해 신뢰를 쌓는다.
그 신뢰는 곧 정보가 된다.
겸수는 약탈 중지를 설득하고, 그 결과 수많은 남쪽 백성들이 죽음을 면한다.
명나라 총병 유정은 말한다.
“이 사람은 수재다. 그의 충성은 두 나라가 함께 복종할 만하다.”
겸수의 싸움은 칼 없는 전투였다.
2) 시대 배경
전쟁이 장기화되며 조선·명·일본 간 외교전이 치열해진다.
장면 1 | 무과 급제
별시 권무병과 병과 급제. 겸수는 무신으로서 공식 인정을 받는다.
장면 2 | 서생포 왜성으로
사명대사를 수행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적진 한복판, 목숨을 담보로 한 외교.
장면 3 | 회담의 이면
겸수는 가토와 고니시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포착한다. 반간계를 설계하고, 가토가 총애하는 부장 희팔랑에게 접근해 신뢰를 얻는다.
장면 4 | 남쪽 백성을 살리다
약탈 중지를 설득하고, 정보를 조정에 보고한다. 그 덕에 많은 백성이 목숨을 건진다.
장면 5 | 국제적 평가
명나라 도독 유정, “그는 수재요, 충성의 피는 두 나라가 함께 복종한다.”
3) 핵심 메시지
말과 지혜로도 나라를 지킬 수 있다.
4막 목민관의 길과 요절 (1596–1598)
1) 내레이션
전쟁 속에서도 국가는 질서를 회복하려 한다.
겸수는 통훈대부 기장현감으로 임명된다.
폐허가 된 고을에서 그는 먼저 백성의 말을 듣는다.
세금을 늦추고, 억울함을 풀어준다.
곧 정주판관으로 제수된다.
부임길에 그는 시 한 수를 남긴다.
“몸은 비록 좁은 자리에 있으나, 성은은 넓다.”
그러나 길은 길지 않았다.
1598년, 경주 월성부에서 병으로 쓰러진다.
마흔넷.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남긴 선택은 길었다.
충렬사와 남강서원, 그리고 묘에서 출토된 한 자루의 검.
겸수의 삶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2) 시대 배경
전란 속에서도 국가는 질서를 회복하려 애쓴다.
장면 1 | 기장현감 부임
통훈대부 기장현감. 겸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을을 다독이며 백성의 삶을 살핀다.
장면 2 | 더 큰 소임
정주판관 제수. 그는 시를 남기며 새로운 임지를 향한다. ‘몸은 비록 좁은 곳에 있으나, 성은이 넓다.’
장면 3 | 마지막 길
과로와 병. 경주 월성부에서 쓰러진다. 44세.
에필로그 | 남겨진 것
충렬사와 남강서원. 그리고 묘에서 출토된 한 자루의 검.
이겸수의 삶은 짧았으나, 충과 지혜는 오늘까지 이어진다.
3) 최종 메시지
한 사람의 올곧은 선택이 역사의 방향을 바꾼다.
다. 판관공을 기리는 노래의 구성
1) 이겸수를 기리는 한시(漢詩)
學城世胄性儉修 학성 세족 성검수
童習人倫重德修 동습 인륜 중덕수
小學爲本孝敬行 소학 위본 효경행
三年喪後志彌堅 삼년 상후 지미견
家榮不取國途擇 가영 불취 국도택
不仗刀兵以舌爭 불장 도병 이설쟁
一言屈敵全生靈 일언 굴적 전생령
辯勝千軍血不橫 변승 천군 혈불횡
壬辰烽火動嶺南 임진 봉화 동영남
奉母山中夜不眠 봉모 산중 야불면
母曰無國何有家 모왈 무국 하유가
披甲辭親赴戎旃 피갑 사친 부융전
宣武登科從師行 선무 등과 종사행
西生倭城入又行 서생 왜성 입우행
智計先陳兵未發 지계 선진 병미발
一言救得萬民生 일언 구득 만민생
亂後殘邑理民艱 난후 잔읍 이민간
縣宰勤政活饑寒 현재 근정 활기한
判官未就身先逝 판관 미취 신선서
月城病榻壽四旬 월성 병탑 수사순
2) 노래의 의미
먼 하늘에 별이 떠서 우리의 길을 비추고
오래 쌓인 발자국이 오늘의 이름 되었네
바람 같은 세월 속에 뜻 하나를 품고서
서로의 손 맞잡으며 여기까지 걸어왔네
비와 눈이 몰아쳐도 등불은 꺼지지 않고
낮은 곳의 땀방울이 큰 강 되어 흘렀네
말보다 앞선 삶으로 진실을 새겨 두어
침묵 속의 약속들이 역사가 되어 남네
넘어지고 또 일어나 하늘을 다시 보고
쓰러진 자 곁으로 또 다른 어깨 내주네
이름 없이 흘린 시간 헛됨 없이 모여서
오늘의 굳은 뿌리가 내일을 밀어 올려
이제 우리는 노래로 지난 길을 부르고
다가올 새 아침을 조용히 맞이하네
한 줄기의 뜻 이어서 다음에게 건네며
끝없이 이어질 길 여기서 다시 시작
3) 판관공 송가
판관공은 사람을 세워 칼 없는 싸움으로 나라 지켜 이름보다 뜻을 남기신 이겸수의 일생을 노래로 표현하였다.
제1절은 학문으로 사람을 세우심이고, 제2절은 국난 앞에 가정보다 국가를 먼저 구하기 위해 의병으로의 길을 택함을 노래했다
제3절은 적진을 오가며 백성을 살리심을 노래했고, 제4절에서는 짧았으나 깊었던 관직의 길을 노래했다.
제1절 학문으로 사람을 세우다
학성가문 태어나서 검소함을 몸에익혀
글보다도 사람됨을 배워익힌 소년겸수
소학글로 생활법도 효와공경 실행배워
삼년상후 마음세워 평생신조 굳게삼네
가정위한 입신보다 나라위한 길을택해
칼이아닌 말로싸워 적군들을 제압했네
제2절 국난 앞에 길을 택하다
임난불길 울산땅에 나라흔란 그해여름
병든노모 산속피신 효성으로 밤새간병
나라없인 집도없단 엄마말에 길을정해
나아가서 군관되어 나라위해 몸을바쳐
가정위한 입신보다 나라위한 길을택해
칼이아닌 말로싸워 적군들을 제압했네
제3절 적진을 오가며 백성을 살리다
별시급제 무신되어 사명대사 함께하여
서생왜성 목숨걸고 적진깊숙 오고가네
지략으로 적을읽어 침략전에 회담하여
왜놈들을 굴욕시켜 백성들을 살려냈네
가정위한 입신보다 나라위한 길을택해
칼이아닌 말로싸워 적군들을 제압했네
제4절 짧았으나 깊었던 관직의 길
전란나라 안정위해 현감직을 맡기시니
폐허고을 난세풀어 백성들을 구해냈네
판관제수 받들고자 시한수로 마음다짐
월성병상 길을마쳐 마흔넷에 먼길갔네
가정위한 입신보다 나라위한 길을택해
칼이아닌 말로싸워 적군들을 제압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