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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그리스도교 박해와 역대 황제 1
그리스도교 박해와 역대 황제 (1)
B.C. 60년-44년에 로마는 3두 정치 체제였다. B.C. 60년 평민파 수령 카이사르(시저)는 원로원 파의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장군 폼페이우스, 부호 크락수스와 비공식적 동맹을 맺고 다음 해 집정관이 되어, 세 사람이 희망하는 정책을 강경하게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 결합은 굳은 것이 아니어서 카이사르가 갈리아지방의 정벌을 위해 로마를 떠난 사이에 약화되었으므로 B.C. 56년의 루카회담에서 결속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B.C.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카이사르의 딸이 죽고, B.C. 53년 크라수스가 동방 파르티아의 토벌 전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3두정치의 일각이 무너져 동맹이 해소되고, B.C. 48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독재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 1차 3두 정치이다.
1. 카이샤르(Caesar Augustus. B.C. 100년-B.C. 44년)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 1회 3두 동맹(三頭同盟 : 제 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執政官)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영국 해협을 건너 브리튼 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B.C. 52년 베르킨게 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오랜 갈리아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B.C. 53년 크락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1회 3두 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 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카이사르는 그 곳 왕위 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B.C. 48년 10월-B.C. 47년 3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이어서 B.C.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 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이어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탑소스에서 소탕하고(B.C. 46년 4월)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였다. 다시 B.C. 45년 3월에는 에스파냐의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B.C. 49년 이래의 내란의 막을 내렸다.
카이샤르는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 ·간척 ·항만 ·도로건설 ·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 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되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B.C. 44년 3월 15일).
2.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년 - BC 48년)
폼페이우스는 B.C. 109년에 출생하였고 그의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인물로 로마 정계에서 명성이 높았던 장군이었다.
B.C. 89년 콘술이었던 아버지 스트라보 휘하의 장교로 아스쿨룸 전쟁에 참전하여 무훈을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 스트라보는 로마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가 정계에 진출하여 입지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공금을 횡령했다는 오해를 받아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무죄로 석방된 뒤 절제된 생활로 신망을 받았다. 그는 당시 정계 최고 실력자인 킨나의 진영에 가담하고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품페이우스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살았는데 그동안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였다. 로마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권력이 분산되어 서로가 다투던 시기에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를 모으고 양성하여 변방의 작은 도시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마침 소아시아에서 로마로 복귀하는 술라를 지지하여 그의 충직한 부하 장수로 로마 정계(政界)에 재등장하였다.
B.C. 82년 폼페이우스가 25세 때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임페리움의 권한을 받아 로마 정규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었고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술라를 반대하며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의 군사적인 재능이 인정받기 시작했고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고 '마그누스(위대한)'라는 영웅의 호칭을 받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한 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크라수스와 함께 B.C. 70년에 콘술이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으며 적과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하며 로마제국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나갔다.
B.C. 67년 지중해에서 로마의 상선을 약탈하며 괴롭혔던 해적을 소탕해 버렸고, 또 B.C. 66년에는 미토리다테스 토벌의 대권(大權)을 수여받아 그를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B.C. 63년까지 이집트를 제외한 동방의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세입도 크게 늘어났지만 젊은 폼페이우스의 급속한 성장과 인지도는 로마 원로원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B.C. 60년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3두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원로원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3두 정치를 통해 자신의 부하들에게 농지배분과 정복한 오리엔트 지역의 재편성 안을 관철되면 오리엔트에서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C. 55년 다시 콘술이 되었으며 B.C. 52년에는 단독으로 콘술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폼페이우스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로마제국 최고의 실력자였다.
폼페이우스의 독단을 두려워하던 원로원에서 정치적 술수를 부렸는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보수파의 충동으로 카이사르와 대립하게 되었다. B.C. 49년 갈리아에서 군사를 이끌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포기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동방으로 이동했다. B.C. 48년 8월 9일 그리스 아테네 북쪽 파르사로스의 평원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였고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믿었던 동방에서 모두 외면받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집트 왕조 또한 폼페이우스를 반기지 않았고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옮겨탄 배에서 암살당하였다.
3. 크락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50년 - B.C5344년)
B.C. 60년부터 폼페이우스 및 케사르와 제1회 삼두 정치를 시작했으며, B.C. 55년에 다시 콘술이 된 후, 속주 장관(屬州長官)으로서 임지(任地) 시리아를 얻었으나 B.C. 53년에 파르티아 인(人)과의 싸움에서 패사(敗死)했다.
B.C. 87년 마리우스와 술라가 내전을 벌일 당시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하고 술라파를 숙청하자 이를 피해 히스파니아로 도망쳤으며 술라가 로마로 돌아올 때 합세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크라수스는 술라의 살생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거나 재산을 몰 수 당한 자들의 재산을 헐값에 사들여 재산을 늘렸고 이외에도 재산을 늘리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좋지 않았다.
B.C. 73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하나인 루쿨루스는 폰투스와의 전쟁으로 동방에 머물고 있었고 또 한명의 유능한 장군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을 치루느라 히스파니아에 머물고 있었는데 2명의 집정관이 반란군에 패배하자 원로원은 법무관이었던 크라수스에게 전직 집정관이 거느리던 2개 군단 외에 새로 편성한 6개 군단 총 8개 군단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크라수스는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에게 뒤지지 않는 공을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첫 번 째 교전에서 패배하자 본보기로 도망친 부대에 10분의 1형(부대원 중 제비로 10분의 1을 뽑아 나머지 부대원이 그들을 죽이게 하는 형벌. 로마 군단에서의 최고 형벌)에 처하기까지 하면서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고 포로들은 모조리 십자가형에 처해 죽였다.
B.C. 70년에는 앙숙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힘을 합쳐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나 이후로도 둘은 경쟁관계에 있었다. 여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새롭게 로마 정계에 등장하게 되었고 B.C. 59년 카이사르의 중재와 설득으로 제1차 삼두 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결성된다.
B.C. 55년 크라수스는 다시 한 번 폼페이우스와 집정관이 되었고 이후 5년간의 임기로 시리아 속주 총독이 되어 부임하게 된다. 시리아 총독이 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에 뒤지지 않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파르티아 군을 지나치게 쉽게 생각한 나머지 적의 영토로 너무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고 기원전 53년에 벌어진 카르하이 전투에서 파르티아 귀족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게 된다.
이 전투로 카이사르 밑에서 싸우기도 했던 크라수스의 아들이 전사했고 크라수스도 결국 적의 계략에 말려들어 살해당하게 됩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는 B.C. 115년 경에 태어나서 B.C. 53년에 죽었다.
4.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44년-B.C. 13년)
B.C. 49년 호민관(護民官)이 된 뒤부터 로마에서 활약하였고, 카이사르 대 폼페이우스의 내란에서는 은의(恩義)를 입은 카이사르의 한 팔이 되어 그를 도왔다.
B.C. 44년 콘술(집정관)이 되고, 그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그의 유언장을 발표하였다. 추도연설에서 민심을 선동하고 암살자들과 타협하면서 그들이 실권을 장악할 길을 봉쇄하는 한편, 동시에 카이사르의 세력기반(로마의 대중 ·병사)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출현으로 그의 지반이 잠식되고, 이에 편승한 공화파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합법적으로 허용된 북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일 마저 실패, 결국 남프랑스 지방으로 피신해 카이사르의 유장(遺將) M.A.레피두스와 합류하였다.
B.C. 43년 말에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더불어 ‘국가건설 3인 위원으로서 제2차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성립하고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B.C. 42년 필리피전투에서 M.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이기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어 이름을 떨쳤다.
B.C. 40년 삼두정치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B.C. 37년 그 임기를 연장하여 동방원정에 전념하였다. B.C. 30년대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하는 5인의 왕의 대(大)패트런(Patron)이 되었고, 로마 지배하의 여러 주(州)를 장악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아 디오니소스의 신(神)으로 숭배 받았다.
클래오파트라와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애인으로 삼아 그녀와 그녀의 아들과 딸에게 광대한 영토를 나누어 주는 등, 본국 로마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집행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깊은 사랑에 빠져 동방을 통치하는 사령관으로서 본분을 망각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출정에서 패배하자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 등 고국의 신임을 잃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결전을 벌였다. B.C. 31년 9월 에피루스 해안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海戰)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쳤는데, 다음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삼두정치에서는 항상 우위를 유지하였고 동방원정도 로마의 국가적 요구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이집트에서의 그의 방종이 지나쳤고 대웅변가 M.T.키케로를 적으로 만들어, 패배자로 끝을 맺고 말았다.
5. 네피투스(Marcus Aemilius Lepidus. B.C. 44년-B.C. 13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는 로마의 정치가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하로 있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더불어 제 2차 삼두 정치를 실시하여 반대파를 억눌렀다. 그는 에스파냐 및 갈리아의 나르본을 영유하고 뒤에 아프리카를 얻었다.
B.C. 43년 말에 레피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더불어 국가건설 3인 위원으로서 제 2차
6.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Augustus. B.C. 27년-A.D. 14년)
독재 정치를 한 카이샤르가 B.C. 44년에 암살당하자 제 1의 실력자인 안토니우스가 호민관 티티우스의 제안을 받아드려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누스와 제 2의 3두 체제를 결속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연합하여 반대파의 주력인 공화파 부수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분쇄하고 그후 3자 직원이 갱신되었으나 B.C. 36년에 레피투스가 식각하여 3자 정치는 깨어지고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전쟁에서 패전하게 되어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1인 체제가 수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샤르의 양아들로서 카이샤르를 신격화했고 자신도 신격화 했다. 그는 아구스트 티누스(존엄한자)라는 존칭을 받았고 황제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아구스도 티누스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헤롯 1세를 유대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이 나이 70였다. 이는 이두메 사람으로 유대인들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 아니기 때문에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헤롯 1세는 왕위의 위험을 항상 두려워 했다.
이 때에 그리스도가 탄생했다. 동방 박사들로 하여금 유대 왕이 태어났다는 정보를 듣고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신의 지시로 요셉이 애굽으로 피신했고 헤롯을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죄 없는 베들헴의 두 살 아레의 어린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7.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 Augustus. A.D 14년-A.D. 37년)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Tiberius Claudius Nero) 이며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Octavian, 재위BC 27~AD 14)의 뒤를 이어 로마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된 인물이다.
어린 시절에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BC 100~BC 44)의 암살 사건에 연루된 가족들과 함께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그 와중에 자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어머니가 친아버지와 이혼하고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함에 따라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되었다. 23세에 빕사니아(Vipsania)와 결혼하였고 점령군 군단의 지휘권을 맡아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13년 29세의 나이로 집정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 손자 가이우스(Caius)와 루시우스(Lucius)가 죽자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된다. 후계자가 된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명을 받아 발칸지역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티베리우스를 로마 황제로 선언한다.
티베리우스가 A.D. 37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칼리굴라(Caligula, 재위37~41)가 로마제국의 세 번째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려했던 수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고 자신에 대한 비난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등 공화정과 민주원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했다. 이는 그를 위대한 황제로 만들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총독은 빌라도였고 유대왕은 헤롯 2세 아켈라오 였다.
헤롯 1세는 유대의 영토를 3분하여 세 아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유대는 아켈라오, 갈리리 지역은 안티파네스, 시리아 지역은 필립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에 유대인들이 선동으로 빌라도를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당시에 유대 안는 헤롯 정치의 반감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특히 열심당은 민족 주의 자들로서 독립을 위한 닫체였다. 헤롯은 자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한 헤롯당이 있었다. 그리하여 유대교 바리세파와 헤롯당은 팽팽한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데는 유대인의 선동이었고 빌라도는 정치적인 유익을 도모하고자 합세하였다.
8. 칼리쿨라(Calligula. A.D.37년-A.D.41년)
칼리쿨라는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의 막내 아들이었다. 티베리우스에 의하여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자식들 중에서 칼리큘라와 세 명의 누이동생들만 살아남았다.
칼리큘라는 세 명의 누이동생과 육체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과 정치적으로 협력하며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칼리큘라가 19세가 되었을 때 티베리우스는 칼리큘라를 카프리섬으로 불러 성인식을 치러주고 자기 곁에서 살게 한다. 칼리큘라는 어머니와 두 형을 죽인 원수와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칼리큘라는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후 75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죽은 뒤 칼리큘라가 많은 사람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자 칼리큘라가 황제가 된다. 원로원과 시민들은 게멜루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된 지 채 5년도 되기 전에 칼리큘라는 근위대에게 살해당했다.
9. 글라우디우스(Tiberius Claudius. A.D. 41년-A.D.54년)
글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Tiberius)의 조카이며 마아크 안토니(Mark Antony)의 손자이다. 주후 41년 근위병에 의해 황제임이 공포되었다. 악의가 없는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나르키우스(Narcissus), 팔라스(Pallas) 및 황후 멧사리나(Messalina)의 교사(敎唆)를 받아 유혈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재위 할 때 밖으로는 브리타니아를 굴복시키고, 라인 변경을 진압하였으며 식민시(植民市)나 자치 도시를 설치하는 등, 시민권을 확대하였다.
문필을 사랑하고 약간의 저작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의 황후 멧사리나를 불륜과 음모의 죄로 처벌한 다음, 조카인 아그립피나(Agrippina)와 결혼하였으나, 데리고 들어온 아들이며 황제의 양자로 된 네로를 즉위시키고자 열망하던 아그립피나에게 독살되었다고 전한다.
글라우디오는 헤롯 아그립바 I세의 정치적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등극하였으므로, 그는 평생 그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제국(帝國) 내에 있는 유대인 전체에게, 그들의 종교적 예배 권리를 인정했다. 물론 그 권리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을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에, 만일 이 경고를 무시할 경우에는 그들에 대한 황제의 압제가 가해졌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글라우디아의 치세에 그리스도교는 금지 종교가 아니었고 국가에서 인정한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보호되고 있었다.
초대 그리스도 인에게 있어서 가장 혐오된 황제 예배는, 글라우디아에 의해 더욱 극성스러워졌으며, 그는 조모 리비아를 디바(Diva=여신)로 하고 조부를 성 아구스도(Divus Augustus)로 하여 모셨다. 그는 브리틴(Britain) 영국 캐물로다눔(Camulodunum=Colchester)에 그를 위해 신전 건축을 허락했다. 사후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했다. 이를 거역한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은 로마에서 추방령을 내렸다.
아그립바는 헤롯의 손자이다. 아버지 때부터 유대인들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야고보를 처형했다. 이유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기에 자신도 유대인들과 동질성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처형했다. 야고보는 스데반 다음으로 두 번째 순교자가 된다. 야고보 처형 후 아그립바 1세가 죽을 때 몸이 썩어 배에서 벌레가 나왔다고 했다.
[행 12:1-4]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아그립바 2세 때에 로마 총독이 뵐릭스 였고 바울이 고소 당해서 심문을 받을때 베스도 총독이 부임하게 되었다. 아그립바 2세와 유대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로마로 후송되는 핍박을 받았다. (행25:1-12)
기독교의 노골적인 박해는 네로 황제의 부임으로 시작된다. 네로는 글라우디오의 양아들로서 양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 후 54년에 왕위를 계승받았다.
그는 포악하고 극단적이고 광적인 사람이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주색잡기에 정신을 쏟았다. 주 후 58년에는 국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향락에 빠졌다. 특히 포피아 사비나(Poppia Sabinaa)라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자기 양어머니와 황후를 죽인 자이다.
그는 위대한 시(詩), 광적이고 정열적인 시를 쓰려고 로마를 모두 불태워 그 불을 보면 감흥이 일어나 위대한 시가 생각날 것으로 생각하고 불을 지르라고 했다. 그리고 타버린 로마는 새로 건설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는 불바다가 되었다.
짐승의 가죽을 씌어 맹견(猛犬)과 사자에게 던져 먹게 하였고 십자가에 못박는 극형을 시켰고 화형을 시켰다. 이 때에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죄없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려다가 순교를 했다
11.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A.D. 68년-69년)
갈바는 B.C. 3년 12월 24일,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20년, 23살의 나이로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A.D. 33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A.D. 39년에는 칼리굴라에 의해 라인 강 방위군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A.D. 45년 그는 북아프리카 총독에 임명되었다.
A.D. 61년,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자로 비난을 받았고 그의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갈바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은 더욱 실추되기 시작한다. A.D. 69년 1월 2일에는 라인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오토가 황제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갈바의 분노케 하여 오토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오토 측의 기병에 공격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12. 오토(Marcus Othos. A.D. 69년- A.D. 69년)
오토는 32년 4월 28일 에트루리아 남부에 있는 페렌티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로원으로부터 에퀴스트리안의 직위를 임명받았으며 집정관까지 되었다.
오토는 네로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네로가 그의 아내 사비나와 사랑에 빠짐에 따라 신임을 잃어 루시타니아의 총독으로 보내졌다. 오토의 사랑을 시기한 네로는 사비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갈바가 네로 정권을 뒤집고자 세력을 구축하자 그를 지지한 오토는 네로의 종말에 한 몫을 했다. 갈바가 황제가 된 뒤 예전부터 권력을 원했던 그는 자신이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이용하여 갈바와 그의 후계자 피소를 죽이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곧 원로원의 투표에 의해 갈바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지 3개월 후 비텔리우스가 다시 내란을 일으키고 초기 진압에 실패한 오토는 자결로 일생을 마쳤으며, 비텔리우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A.D. 15년에 출생하였고 그의 집안은 로마에서 신흥귀족에 속했다. 48년 콘술이 되었고, 61년 무렵에 아프리카의 프로콘술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동료였으며, 켄소르와 3차례의 콘술을 지냈던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A.D. 68년 갈바 황제에 의해 비텔리우스를 하(下)게르마니아 군대의 지휘관에 임명하였다. 그 해 11월 비텔리우스가 부임하였을 때, 갈바의 통치에 염증이 난 군인들은 반란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갈바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총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비텔리우스 휘하의 장군 카이키나와 발렌스는 하게르마니아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그들이 로마로 이동하는 동안 갈바는 살해되었고, 오토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버렸기 때문에 오토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황제에 오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군단과 오토를 지지하는 군단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A.D. 69년 4월 14일 베드리아쿰(또는 크레모나)에서 하게르마니아 군단은 경쟁 황제 오토의 군대와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패배한 오토는 4월 16일 칼로 가슴을 찔러 자살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는 패배한 오토 진영의 병사들을 처리하는데 미숙했기 때문에 반발심을 불러일으켰고 후일 이일은 그가 실각하는데 원인이 된다. 오토가 죽자 원로원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승인하였고, 비텔리우스는 7월 중순에 로마에 입성하였다. 날마다 파티를 열고 음식에 탐닉하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에만 빠져 지냈다.
비텔리우스가 황제에 오르는 데 일등공신인 카이키나와 발렌스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군대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동방에서는 비텔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하기 이전인 7월 1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도나우 군단의 사령관인 무키아누스도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였다. 두사람의 동맹으로 로마는 또 다시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 두 황제의 내전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A.D. 69년 10월 24일 베드리아쿰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도나우 군단과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강 군단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다음 날,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패배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도나우 군단은 비텔리우스가 있는 로마로 남하했다.
비텔리우스는 퇴위할 뜻을 밝혔으나, 근위대와 성난 로마 군중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궁으로 들어갔다. 로마에서는 양진영이 치열한 시가전을 펼쳤다. 12월 20일 베스파시아누스 편으로 돌아선 군대가 로마를 장악하였다.
비텔리우스는 손을 묶인 채 거리로 끌려다니다가 결국 포로 로마노에서 살해 되었고, 시신은 테베레강에 던져졌다. 이것으로 비텔리우스의 8개월간 황제 재임기간은 막을 내렸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14.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69년- A.D. 79년)
사비니 리에티 출신으로 평범한 가문을 배경으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하고,A.D. 39년 30세에 프라이토르(법무관)을 지냈으며 라강강 군단에 배치되어 2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그리고 브리타니아 군단에 배치되어 무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A.D. 51년 콘술(집정관)이 되었지만 짧은 임기를 마쳤을 뿐이었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속주의 총독에 부임하였다.
A.D. 66년 말 네로황제에 의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적임자로 선정되었고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4개 군단을 이끌고 갈릴리로 진군했다. A.D. 67년 7월 요타파타를 함락시켰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네로가 갑자기 자살하여 죽은 뒤 혼란 속에서,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가 차례로 로마황제로 추대되었지만 모두 불과 몇 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사망했다. 특히 비텔리우스가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로마 군부내에서 반발이 심했으며 마침내 A.D. 69년 7월 동방의 여러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발칸지방의 여러 군단도 지지를 표명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우선 부하를 로마로 진군시켜 혼란에 빠진 로마를 안정화시키는데 주력하였고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다. 맏아들 티투스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로마에 입성하여, 유대인을 반란을 진압한 환대를 받았고 원로원의 황제 즉위 승인을 받았다. 이때 황제의 이름으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를 사용하였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중후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혼란에 빠진 로마 제국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으며 국가의 위신회복과 내란의 손해 복구에 힘썼다. 로마의 귀족이 아닌 갈리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의 속주 출신의 인물에게도 원로원 의석을 주었고 제국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으며 로마의 신흥 귀족이 되게 하였다.
또한 황제 법을 제정하여 원로원을 견제하고 황제의 제위계승자를 아들에게 이어지도록 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정복한 지방의 로마 화를 추진하여, 제국의 재건에 성공하였다. A.D. 79년 죽은 뒤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가 이어졌고 이후 로마제국은 오현제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15. 티투스(Titus. A.D. 79년- A.D. 81년)
A.D. 61년부터 63년에 걸쳐 트리브누스· 미리튬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 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 등지에서 복무했다. A.D.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이듬해에 마르키아· 프루니라와 재혼했다.
아내의 생가는 제위 후계자로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네로의 대항 세력에 속했지만, 결혼한 해인 A.D. 65년에 원로원 의원 피소에 의한 네로의 암살 의혹 사건(Pisonian conspiracy)으로 아내와는 이혼해야 했으며, 그 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A.D. 67년에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유대 반란 진압을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고,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Legion)을 지휘했다. 쿠에스톨(재무관)이있던 티투스는 동지로 군의 손가락 하나 지휘관으로서 근무한다.
A.D. 68년에 네로가 자살하고 갈바가 스스로 황제로 취임한다. 이 때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으로 갈바에 황제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도중에 갈바가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했던 오토가 자살했으며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서방의 정세가 혼란에 빠진 것을 알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유대 전쟁 진압에 전념했다. 이같이 1년에 황제가 네 명이나 교체되는 불안정한 '4황제의 해'에, 티투스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함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다.
A.D. 69년에야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한 선봉으로, 이듬해에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선언을 위해 차례로 로마로 향한 뒤, 예루살렘 공략의 사령관이 되어 A.D. 70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 A.D. 73년까지 저항을 계속한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의 반란을 평정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A.D. 81년에 세운 것이다.
이 때에 유태 왕가의 일족에게 늘어서는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다. A.D.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 개선식의 모습은 포룸·로마눔의 동쪽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릴리프에 남아 있다. 그 뒤 아버지 웨스파시아누스와 공동 통치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은 그는 A.D. 73년 아버지와 함께 감찰관을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집정관이 된지 7년 째 되는 A.D. 79년에,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며 그 해에 아버지가 죽자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사람들은 그가 다시 네로와 같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라고 훗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이유는 애인인 베레니케로,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의 재래로 여겨졌고, 시민들의 두려움을 깨달은 티투스는 베레니케를 아내로 하는 것을 단념했으며 이를 계기로 시민의 동정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하고,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티투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좋은 것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하루를 잃어 버렸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A.D. 79년 티투스가 즉위한 해 8월에 그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가 멸망했는데 이때 그는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다.
A.D. 80년로마에 사흘 동안에 걸친 대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때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을 마무리 지었고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와중인 A.D. 81년 9월 13일, 티투스는 치세 불과 2년 만에 열병으로 죽었다. 그가 죽자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1) 예루살렘의 멸망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지역 중에 오직 유대 지역만이 적대감을 가지고 불충성 했다. 이유는 자기 민족에 메시아가 와서 로마를 정복하고 또 세계를 통치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는 이들을 반국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가 유대에서 발생하고 보니 자연이 이들과 동일한 자들로 보기에 박해를 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견디지 못해 결국 주 후 66년 유대인들이 반기를 들고 가망이 전혀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메시아가 도우리라는 슬로건을 걸고 로마를 대항했다. 전쟁에 훈련이 전혀 없는 극소수의 유대 군인들과 1억 2천만의 인구를 가진 로마, 그리고 전쟁에 훈련된 25만의 군대를 대항한다는 것은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로마 장군인 베스파시아누스(Vesps -ianus)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포위하였다. 그러나 네로 황제가 죽게 되므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어 귀환하게 되었다. 네로는 로마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에 자신의 친위대의 반란으로 피신하게 되고 죽을 무렵에는 어느 농가에 숨어 있다가 자살하였다.
네로가 죽은 후 베스파시아누수는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들 티토스에게 전쟁의 지휘권을 주어 다시 예루살렘을 침입케 한다. 4년간의 긴 전쟁이었다. 이렇게 길게 지속된 것은 유대에 마사다(Massada)라는 요새지가 있어서 이다. 이 요새는 사방이 암벽으로 되어 있어 도저히 침범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포위하고 식량을 차단함으로 결국 굶어 죽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식을 바위에 쳐 죽여야 했고 심지어 자식을 잡아 삶어 먹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주후 70년 9월에 함락되고 성전도 파괴되었다. 성전 돌틈에 박혀있는 귀금속을 떼려고 돌 하나 돌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파해쳤다. 주님의 예언이 70년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노예가 돼 생포된 청년들이 고문에 고통받는 것을 상상해 보시오 어느 남편이 로마인에게 거칠게 다루어지는 자신의 아내를 볼 것이다. 두손 묶인 채 [아빠!]하고 소리 지르는 어린 자식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자 이제 우리의 손이 자유로워 칼을 들 수 있을 때 노예가 되지 말고 죽음을 택하자. 함께 이 세상을 자유민으로 마치자 연설 끝에 사나이들은 울면서 그들의 처자를 죽였고 10사람을 추첨으로 골라 죽은 각오를 하고 껴않고 누어 있는 사나이들의 목에 칼을 댔다 그리고 다시 추첨에 거린 마지막 사나이가 남은 아홉 명을 죽이고 건물에 불을 지른 다음 자신들도 스스로 자결했다. 두 여인과 다섯 아이만이 남아 처절한 최후를 전하게 된 것이다. ]
16. 도미티안 (Domitian(A.D. 81년- A.D. 96년) )
도미티안은 베시파사우스의 둘째 아들이다. 베시파시우스는 큰아들 티투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티투스는 동생을 불신했기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아무 실권을 주지 아니했다. 형인 티투스가 죽은 후 도미티안은 AD 81년에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도미티안은 국경을 확장하고 술 소비를 줄이고 밀 생산에 주력하여 내실 있는 정치를 했다. 그는 강압 정책을 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박해 또한 강하게 했다. 그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여러 가지 있겠으나 그 중에 두 가지가 두드러 진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비밀리에 모여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오해이다. 이들이 비밀리에 동굴에 모이고 새벽과 밤중에 자주 모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만 모이므로 미움을 받았다.
또 하나는 황제 숭배 거부이다. 이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 기독교인들은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무신론자들이라 규정했다. 이 무신론자들 때문에 신들이 노하여 로마에 재앙을 내린다고 생각했고 또 내릴 것으로 인정했다. 황제 숭배에 불복종하는 자들은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저명 인사들은 추방시키거나 맹수의 밥으로 던져다. 이 때에 무수한 기독교인들이 죽었다. 이 때에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위배되었고 밧모 섬에서 받은 계시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또한 특이한 것은 황제의 종제(從第) 부부를 비롯하여 많은 신도가 순교했다. 이 박해를 피하여 굴을 파고 피신했는데 그 굴이 바로 유명한 카타콤(Cartarcom)이다. 이 카타콤에서 많은 신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 형제같이 살았고 밖에 있는 신도들이 이들을 도왔다. 물고기의 그림이 성도들의 암호로 이 때에 쓰여졌다.
17.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 A.D. 95년-A.D. 98년)
로마의 황제(재위 : 96~98). 티베리우스제 시대의 법학자. 5현제(五賢帝) 중 한 사람이었다.
나르니아에서 출생. 2회 통령을 지내고 A.D. 71년-A.D.90년 도미티아누스제가 살해된 후 원로의 추대(推戴)로 고령에 즉위. 자녀가 많은 시민에게 토지를 주고, 부유한 집의 자녀 교육을 위해 국가 기관을 설치하여 민생(民生)을 안정케 했다. 또 우편 제도의 비용을 국가 부담으로 하고, 로마 시의 곡물 분배제, 수도(水道)의 정비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관후하고 정의감이 강했으나 행정, 특히 군정의 경험이 없어, 97년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전권(全權)을 위임, 이후 원수의 지위 계승법의 선례(先例)를 열었다.
18. 트라야누스(Teajan A.D.98년-A.D. 117년)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남부 바이티카 이탈리카에서 출생하였다. 로마제국의 황제 중에서 오현제(五賢帝)로 불리는 황제 중 제2대 황제이다.
에스파냐 출신인 아버지는 로마 군단장을 지냈고,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였으며 로마의 신흥귀족 계급에 속했다.
트라야누스 또한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으며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이스라엘을 함락할 때 참가하였다. 시리아에서 부군단장으로 봉직하였고 라인강 군단에서 근무하였다. 그후 로마에서 회계감사관과 법무관을 지냈고 에스파냐에 주둔하는 7군단의 군단장을 맡았다. 황제 도미티아누스에게 발탁되어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군단 내에서 군인으로서 명망이 높아 많은 병사들의 신망을 얻었다. 특히 제국의 국경인 게르마니아 전선의 방벽을 구축하는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고 네르바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지만 근위병들의 반란으로 황제자리를 양위하게 되자 네르바에 의해 황제의 양자로 지목되어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고,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농촌 회복시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영역을 확장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현재 루미니아 일대)를 정복하여 속주로 하였으며, 또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의 경계까지 진출하여 요소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다시 동방으로는 나바타이 왕국을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하였으며,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파르티아 군을 몰아내고 아시리아까지도 속주로 만들었다. 파르티아 왕국(현재 이란)을 정복하고 수도인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이것은 로마제국 역사상 동방으로 가장 멀리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고기를 먹을 때에는 다른 사람은 일절 금하고 자기들끼리도 비밀을 보장하는 사람만 모인다고 성찬예식을 오해했다. 또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비밀리에 음행하며 근친상간까지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은 동정에 여지가 없는 자들이라 인정했기에 가혹하게 박해했다.
트라얀 황제 박해때에 교부 익나티우스가 순교했다. 익나티우스는 교부로서 맹수의 밥으로 순교했다.
19. 하드리안(Hadrian. A.D.117-A.D.138년)
트라야누스의 영토 확장을 제국 방위 정책으로 전환하여 국력의 충실에 힘썼다. 속주 통치조직, 로마의 행정제도·관료제도·군사제도의 정비에 힘쓰는 한편 학문 연구와 문예·회화·산술 등을 애호했다. 서기 138년 사망했다
하드리안누스 황제때 에 변증가이며 교부인 져스틴이 순교했다.
20.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A.D. 138년-A.D.161년)
또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또 다른 양자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161~169 재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며 공동 황제였다가 나중에 단독 황제가 된 콤모두스(176~192 재위)에게도 보통 이 칭호가 쓰인다.
안토니네의 치세(138~180)는 로마 제국 내에서 일체감과 민족간의 조화가 가장 잘 이루어진 최고 평화번영기 중의 하나이다
그는 온화한 성품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로 84년간(96~180) 로마 제국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5현제(五賢帝) 중 4번째 황제였지만 원래 갈리아 출신 집안 태생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안토니누스는 20년 콘술을 지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A.D.117~138 재위)를 도와 이탈리아의 사법 행정을 맡았으며 A.D. 134년경 아시아 속주 총독이 되었고 이후 황제의 고문관으로 임명받았다. A.D. 138년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겸 후계자가 되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후계자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훗날 황제가 됨)와 루키우스 베루스가 뽑혔다.
권력을 쥐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원로원을 설득해 황제에게 부여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던 신(神)으로서의 영예를 하드리아누스에게 주도록 했으며 이 일을 비롯해 다른 몇몇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원로원에 의해 피우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안토니누스의 치세 당시 사람들이 당대를 태평성대라고 했으나 안토니누스가 죽은 뒤 제국은 적대적인 여러 부족에게 침략 당했고 뒤이어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그리스도 박해와 역대 황제
21. 말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us. A.D.161년-A.D.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A.D.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A.D.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A.D.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A.D.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제위 기간 동안 전란을 많이 격은 사람이다. 그의 경험을 토대로하여 탁월한 통솔력으로 외부의 침략과 방비와 내부의 통치에 힘써 큰 공을 세웠다. 이는 로마 황제 중 가장 뛰어난 황제로서 수준 높은 정치를 했다. 그는 왕위의 철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며 공명정대한 정치를 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하여서는 매우 가혹했다. 그는 로마의 질병이나 흉년은 기독교인들 때문이라 생각했고 기독교인들의 복음은 우습게 생각했다. 그는 전통적인 로마의 생활 습관을 보존하려 했으며 황제 숭배에 굴복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반란자로 취급했다. 이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시키고 수 천명의 신도들을 투기장에 던졌다. 특히 리용 교회와, 빈 교회를 더 학대했다.
이 때에 순교한 사람이 서머나 교회 폴리갑 감독이다 폴리갑 감독은 주후 155년에 순교했다.
폴리갑의 순교 기록은 상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졌다. 그가 정부 관원에게 끌려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강요당할 때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는데 지금까지 그 분은 나에에게 은혜만 베푸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수 있겠는가.? ”했다. 결국 그는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22.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 A.D.161년-A.D.180년)
A.D. 138년 아버지가 죽은 뒤 하드리아누스의 권유에 따라 훗날 황제가 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16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유명한 선생들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우수한 학생이었다. 시를 좋아하고 연설에 뛰어났다. A.D. 153년 쿠아이스토르(재무관)로 정치를 시작하였고, A.D. 154년과 A.D. 161년 2차례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A.D.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죽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뒤를 이어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공동 황제였다. 법률상 지위와 권력은 동등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신의의 표시로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군대의 통치권을 주고, 자신의 딸 루시엘라와 결혼시켰다. A.D. 162년부터 A.D. 166년까지 루키우스 베루스는 로마 동부에서 일어난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출정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23. 콤모두스(Commodus. A.D. 180년 - A.D.193년)
콤모두스의 본명은 Lucius Aelius Aurelius Commodus(A.D.180년-A.D.192년)이다. 로마의 황제 A.D. 177년~A.D. 180년까지 공동황제로 재위했고 A.D. 180년 이후 단독으로 통치했다.
A.D. 177년 콤모두스는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 재위)의 제위 계승자이자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침입해온 게르만족들을 맞아 도나우 강 연안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마르쿠스 황제가 죽자(180. 3) 재빨리 게르만족과 화해했다.
단독 황제에 오른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로 이름을 바꿨다. 182년 누이 루킬라가 일단의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해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콤모두스는 그 복수로 상당수의 지도급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는 차츰 자의적이고 잔인한 통치를 펴기 시작했다. 186년에는 군대를 무마하기 위해 총리를 처형했으며 3년 뒤에는 그 후임자가 폭동을 일으킨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치적 실권은 황제의 첩과 2명의 고문관에게 넘어갔다. 한편 콤모두스는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의 이름을 새롭게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로 바꾸었다.
자신이 헤라클레스 신이라는 망상에 빠져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가 검투사처럼 싸우거나 활과 화살로 사자를 죽이기도 했다. 이 시합에서 그가 죽인 검투사만도 1만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A.D. 193년 1월 1일 콤모두스가 검투사 복장을 한 채 콘술(집정관)직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자 로마 시민들은 분노했다. 192년 12월 31일 고문관들은 최우수 레슬링 선수를 시켜 그를 목졸라 죽이게 했다.
24. 페르 낙스(Pertinax. A.D. 193년-A.D.193년)
페르티 낙스는 해방 노예인 헬비우스 수세서스 아들이다.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30대 중반에 진로를 바꾸어 군대에 들어갔다. 직을 거치면서 진급하였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뒤 시리아· 브리튼· 도나우강· 라인강 등지의 부대를 지휘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재위 기간 중에는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 A.D.169년 게르만족이 침입하였을 때 큰 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A.D. 180년 원로원에 진출한 뒤, 모이시아· 다키아· 시리아 등지를 관할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A.D. 188년부터 이듬해까지 아프리카의 프로콘술을 맡았다. 코모두스 황제는 그를 로마의 콘술(집정관)로 임명했다.
A.D. 192년 12월 31일, 코모두스가 살해당하자 원로원에서는 명망이 높은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당시 로마의 재정은 궁핍한 상태였기 때문에 황제에 오른 페르티낙스는 일반 경비와 군사비를 줄이려고 했다. 군대에서는 이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하여 193년 3월 28일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페르티낙스의 재위 기간은 3개월이 채 못 되었다. 나중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를 합법적인 황제로 인정하여 그를 암살한 군인들을 처형했다. 또 정식으로 페르티낙스의 장례를 치르고, 칙령을 내려 그를 위하여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한 뒤 그 곳에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붙였다.
25. 디디우스 율리아 누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틴어:Didius Julianus) (A.D. 133년 ~ A.D. 193년 )는 로마 제국의 열아홉 번째 황제이다.
로마 정무관과 장군으로서 활약했고, 콘모두스 황제가 암살되는 혼란시에 친위대에 의하여 추대되었으나, 겨우 재위 2개월 만에 도나우 군단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부유한 원로원 의원으로 콤모두스 황제에게 추방당했다. 이후 콤모두스 황제는 192년 12월 31일에 살해당하고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올랐으나 193년 3월 말에 레토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근위대장 레토와 1만 명의 근위대의 추대를 받아 페르티낙스의 장인 플리비우스 술피키아누스와 겨루어 승리해 옥좌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세베루스와 알비누스가 연합해 세베루스의 2개 군단이 남하하며 해군이 배반하자 재위 3개월 만에 그를 추대한 것을 후회하던 근위병 몇 명에게 살해당했다
26. 셉티미우스 세베레스 (Septimius Severus. A.D.105년-A.D. 211년)
셉티미우스는 A.D. 189년 3월 7일, 로마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2번째 부인이다. 게타가 태어날 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코모두스 황제 아래에서 지방을 통치했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며, 형 카라칼라보다 11개월 어리다.
A.D. 193년 황제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A.D. 198년 젊은 아들 카라칼라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하사했다. 게타는 카이사르(부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A.D. 209년 게타도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형 카라칼라와 공동황제가 되었다. A.D. 211년 2월 4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에보라쿰(지금의 영국 요크 지방)에서 사망했다.
AD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후 로마는 대 혼란의 연속이었다. 나약하고 변변치 못한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함으로 이들은 한결 같이 전쟁을 치르거나 아니면 쾌락에 빠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숨을 돌릴 수가 있었고 그 틈을 타서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런데 세베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더 혹독하고 잔인한 박해를 가했다. 이는 202년에 즉위하여 211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박해했다. 이는 병적일 정도로 우울한 성격의 사람이면서 강인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므로 미약해진 옛 종교를 그리스도 교회로부터 지키려 했다. 이는 로마 영토 중 카타콤에 있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가혹하게 다스렸으며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당했다.
이는 신도를 무조건 잡아다가 맹수에게 던졌다. 이 때에 신학자인 오리겐(Origen)의 아버지 네온니다스(Neonidas)가 순교했다. 그리고 칼다콤에 사는 귀부인 페페뉴안(Pepenuan)이 그의 몸종 펠리시다스(Peli-sidas)와 함께 맹수의 밥이 됨으로 그 당시 화제가 되었다.
27. 카라칼라(CoraCalla. A.D. 211년-A.D. 217년)
카라칼라와 게타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죽자 갈등은 더욱 커졌다. 형제는 법률 문제에서 정치적 부분까지 의견이 대립하였다. 결국 두 형제는 각자 군대를 이끌고 갈라섰다.
카라칼라는 게타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농신제(農神祭)인 사투르날리아 축제 때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11년 12월 카라칼라는 게타를 속여 호위병 없이 어머니가 머무는 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게타가 도착하자 백부장이 그를 공격하였으며,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죽었다.
주요 업적으로는 로마에 거대한 목욕탕을 짓고 A.D.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발표한 것을 들 수 있다. 재위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했으며 종종 로마사에서 가장 잔인한 폭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카라칼라는 파르티아인을 상대로 벌인 2번째 원정 초기에 암살되었다.
28. 게타([Publius Septimius Geta. A.D. 211년 A.D. 212년)
A.D. 193년 황제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198년 젊은 아들 카라칼라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게타는 카이사르(부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A.D. 209년 게타도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형 카라칼라와 공동황제가 되었다. A.D. 211년 2월 4일 부황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에보라쿰(지금의 영국 요크 지방)에서 사망하였다. 그 때 카라칼라는 22세, 게타는 21세였다.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죽자 갈등은 더욱 커졌다. 형제는 법률 문제에서 정치적 부분까지 의견이 대립하였다. 결국 두 형제는 각자 군대를 이끌고 갈라섰다.
카라칼라는 게타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농신제(農神祭)인 사투르날리아 축제 때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11년 12월 카라칼라는 게타를 속여 호위병 없이 어머니가 머무는 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게타가 도착하자 백부장이 그를 공격하였으며,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죽었다.
카라칼라는 게타를 암살한 뒤 모든 조각상과 그림에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또 법률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법률적으로 정당화하도록 했다. 실추된 게타의 명예는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로 있던 219년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리고 게타의 유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가 묻힌 하드리안의 마우솔레움에 함께 묻혔다.
마크리우스는 로마의 속주(屬州) 마우레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제국 최초로 원로원 출신이 아니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원로원 의원 다음가는 신분인 에퀴테스 출신의 법률가로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카라칼라는 마크리누스를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로 임명했다. A.D. 217년 4월 카라칼라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침략한 파르티아를 물리치기 위하여 출정하였다가 살해당했다. 그러자 4월 11일 마크리누스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정했다.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의 뒤를 이어 파르티아와 오랫동안 전쟁을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결국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는데, 그 조건이 로마에게 불리하여 시리아의 군대로부터 반감을 샀다. 결국 시리아의 군대는 A.D. 218년 5월 카라칼라의 5촌 조카인 엘라가발루스의 편으로 돌아섰다.
마크리누스는 남은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도주하는 도중에 안티오크(지금의 터키 안타키아) 근처에서 추격해 온 군대에게 붙잡혀 A.D. 218년 6월 8일 처형당하였다. 그의 아들도 뒤이어 살해당했다.
마크리누스 (A.D. 165년 - A.D. 218년)는 로마 제국의 22대 황제로 황제에 올랐음에도 단 한번도 수도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황제이다.
30.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A.D. 218년 A.D. 222년)
엘라가발루스 A.D. 204년 ~ A.D. 222년 생으로 로마 제국의 23대 황제이며, 엘라가발루스신의 제사장을 역임한 것에서 황제 별명이 붙었다.
엘라가발루스의 본명은 바시아누스(Bassianus)이고 시리아 출생한 사람이다. 로마
A.D. 218년에 시리아 주둔군의 뒷받침으로 카라칼라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A.D. 219년에 로마로 들어가, 태양신의 대신전을 건립하고 그 음란한 축제를 로마로 옮겼다. 이리하여 궁정생활이 문란해지고 음모가 무성해, 어머니와 함께 근위병에게 암살되었다.
엘라가 발루스는 괴팍한 행동과 장난을 많이 친 황제로 유명하다. A.D. 217년 카라칼라 황제가 마크리누스에게 살해당하고 마크리누스가 황제에게 올랐으나 A.D. 218년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등이 군대를 사주해 마크리누스를 살해하고 엘라가발루스를 황제에 올렸다.
엘라가발루스는 최초의 동방 출신 로마 황제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장군을 처형하고 바알신을 믿게 했으며, 이방인들을 불려들였다. 또한 동물을 좋아해 거미집을 수집하기도 하고 각종 동물들을 마차에 끌고다니게 했다. 게다가 파티에는 손님들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했으며, 제대로 된 음식에도 거미를 넣거나 말똥을 섞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파티에는 꽃잎을 마구 퍼부어보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꽃잎을 너무 많이 퍼부어 몇 명이 질식하여 죽었다. 어떤 때에는 거대한 목욕탕을 지었는데 한 번만 사용하고 부수어 버렸다.
이렇게 황제가 괴팍한 행동과 장난을 많이 치자 국고는 바닥났고 할머니 마이사가 너무 일찍 동생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결정하자 근위대장을 시켜 알렉산데르를 죽이려하다가 오히려 A.D. 222년 3월 11일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31. 알렉산데르 세베루스(Severus Alexander. A.D. 222년 A.D. 235년)
오리엔트 지방의 소도시 알카 카이사리아 출생으로 A.D. 222년 3월 13일에 동생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되면서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법학자 울피아누스를 등용해 로마 제국의 일시적 부흥기를 마련하며 6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가 울피아누스를 실각시키고 후에 살해하면서 내정이 붕괴되고 A.D. 226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로마의 동방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5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시리아 속주에서 군단병들의 파업에 부딪치고 페르시아와 일차 전을 벌이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소득은 거의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원로원에는 승리로 보고한 뒤 철수해 A.D. 234년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라인 전선으로 떠났다.
하지만 알렉산데르가 게르만족과 평화 교섭을 진행하자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A.D. 235년 3월 9일에 갈리아 지방의 마인츠 근처의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해되었다.
32.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anus Thrax. A.D. 235년 A.D. 238년)
막시미누스는 A.D. 250년 ~ 310년 간 통치했다. A.D. 286년부터 A.D. 305년까지 디오클레티누스와 함께 로마를 통치한 로마 황제이다.
비천한 집안 출신이나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디오클레티누스에게 신임을 받아 그의 충복이 되었다. A.D.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부제로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제국 서방을 다스리는 정제가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등한 황제(Augustus)였으나 실제로는 항상 그에게 종속되어 있는 위치에 있었다.
서방 황제로 임명되자 즉각 군사 활동에 나서 프랑크족을 격퇴하고 갈리아 도적떼들을 소탕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도 사막 민족들을 몰아냈다. 이후 사두 정치가 시작되자 그가 거느리던 부제인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에게 293년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지방들을 넘긴 뒤 나머지 지방인 이탈리아와 북아아프리카를 다스렸다.
A.D. 305년 5월 1일 니코메데이아에서 퇴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를 선언하자 내키지 않았지만 같은 날 메디올라눔(오늘날 밀라노)에서 퇴위했다. 이후 새로운 사두정치체제)는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황제를 선언하자 그를 돕기 위해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와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A.D. 307년 2월 서방 부제 세베루스가 이를 반역으로 단죄, 토벌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지만 라벤나에서 이를 격퇴하고 세베루스를 포로로 잡은 뒤 살해했다.
뒤이어 갈레리우스가 원정을 오지만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자 A.D. 308년 카르눈툼 수뇌 회담을 열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위 복귀를 요구하나 거절당했다.
이후 아들 막센티우스와 불화를 겪으며 아들과 결별하고 딸 파우스타를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시집보내고 그에게 의탁하여 살았다. 그 뒤 A.D. 310년 콘스탄티누스가 라인 강 동부로 야만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했던 중 반란을 일으켰으나 콘스탄티누스가 너무 일찍 원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바람에 진압당했고 마실리아로 도망갔으나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암살인지는 확실치 않다.
33. 고르디아 누스 1세.(Gordianus I. A.D. 238년-A.D. 238년)
고르디아 누스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이다. A.D. 19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때 쿠아이스토르(재무관)와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A.D. 235년 초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가 새 황제가 되었다. 막시미누스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원로원에서는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A.D.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는 지역 정치가들의 지원을 받아 막시미누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3월 22일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80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의 속주(屬州)인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에서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황제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누미디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막시미누스에게 충성했다. 그는 다른 지지자들과 연합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하였다. 황제가 된 지 3주 만이었다.
34. 고르디아 누스 2세 (Gordianus 2. A.D. 238년-A.D. 238년)
고르티아누스 2세의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이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들이다. A.D. 19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때 쿠아이스토르(재무관)와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A.D. 235년 초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가 새 황제가 되었다. 막시미누스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원로원에서는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A.D.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는 지역 정치가들의 지원을 받아 막시미누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3월 22일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80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의 속주(屬州)인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에서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황제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누미디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막시미누스에게 충성했다. 그는 다른 지지자들과 연합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황제가 된 지 3주 만이었다.
35. 푸피에누스 막시무스.(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A.D. 238년 A.D. 238년)
막시부스는 A.D. 178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군대에서 성공적인 생활로 원로원의 신임를 얻어 황제가 되었다. 프리무스필루스(primus pilus:군단의 백인대장의 우두머리)으로 시작하여 군관, 프라이토르(법무관)를 거쳤다. A.D. 217년과 A.D. 234년 2차례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또 게르만 지역을 포함한 몇몇 로마의 속주(屬州)에서 총독을 지냈다.
A.D. 234년 로마에서 장관을 지낼 때에는 부하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다스려 신망을 잃었다. 막시미누스에 이어 황제가 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죽자, 238년 4월 22일 원로원은 막시무스를 발비누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원로원은 두 사람을 지지를 하였으나 시민들은 반발했다. 원로원과 두 황제는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삼았다. 원로원의 결정에 반발한 막시미누스가 로마를 향하여 진군하자 막시무스는 이를 막으려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았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전투를 할 필요도 없었다. 크리스피누스와 메노필루스, 두 원로원 의원이 이끄는 군대가 막시미누스를 죽이고 막시무스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막시무스가 돌아왔을 때, 로마에는 폭동이 일어나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공동황제인 발비누스는 그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황제가 모두 로마에 있게 되자 상황은 진정되었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는 서로가 단독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였고,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전쟁을 계획하는 데도 막시무스는 파르티아로, 발비누스는 카르피아로 군대를 보내려 하는 등 내분은 점점 더 커졌다. A.D. 238년 7월 29일 막시무스는 발비누스와 함께 황실의 근위대에 납치되어 재위 99일 만에 살해당했다.
36.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us 3. A.D. 238년 A.D. 238년)
고르디아 누스가 황제위 오를 때 13세였다. 집권 초에는 황제의 어머니가, 뒤에는 장인이며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였던 티메시테우스가 정부를 이끌어 나갔다. A.D. 242년 장인과 함께 페르시아와 싸워 이겼고 장인이 병들어 죽었을 때 아랍인 필리푸스가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를 맡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A.D. 244년 봄에 군인들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뒤로 필리푸스가 왕위에 올랐다.
37. 발비누스(Balbinus. A.D. 238년 - A.D. 238년)
발비누스는 살리족 사제로 귀족 출신이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의 아들이며, 태어난 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A.D. 203년과 A.D. 213년, 2차례 콘술(집정관)을 지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7개 지역의 책임자를 지냈다.
A..D. 238년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황제에 반대하여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20인 위원회가 정부를 맡았는데, 발비누스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막시미누스를 축출하고 황제가 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죽자, A.D. 238년 4월 22일 원로원은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막시무스를 공동황제로 선포했다.
시민들은 이 결정에 분노하여 두 황제와 원로원이 있던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포위하였다. 이에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삼았다.
한편, 원로원의 결정에 반대한 막시미누스는 로마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막시무스는 이를 막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고,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았다. 막시무스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으나 발비누스는 로마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로마는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난 상태였다.
발비누스와 막시무스는 서로 단독황제가 되려 한다고 생각하여 사이가 벌어졌다. 게다가 발비누스는 자신은 로마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데 비하여 막시무스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상황도 불안했다. 공동황제는 서로를 견제하여 전쟁을 계획하는 데도 발비누스는 카르피안으로, 막시무스는 파르티아로 진군하자고 주장하는 등 내분이 점차 심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A.D. 238년 7월 29일 황실의 근위대가 두 황제를 납치했고, 게르만족 호위병들을 피하여 달아나면서 두 황제를 모두 살해하였다. 이들의 재위 기간은 99일이었다. 238년 8월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38. 필리푸스(Philips the Arab. A.D. 244년-A.D. 249년)
황제가 된 필리푸스는 곧바로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내고, 형 프리스쿠스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로마로 돌아온 필리푸스는 아들을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정하고, 자기가 태어난 곳을 필리포폴리스(Philippopolis)라고 부르게 했다.
황제로서 통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게르만족이 판노니아 지역을 침략하였고, 고트족도 모이시아 지역으로 쳐들어왔다. 248년 필리푸스가 그들을 정벌하자 뒤이어 파카티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진압된 뒤 필리푸스는 데키우스를 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A.D. 248년 4월에는 로마시 건설 10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었다. 그 뒤 속주(屬州)의 군대가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으며, 249년 봄 도나우강 일대에 주둔한 군대에서 데키우스를 옹립하여 황제로 선포했다. 데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그 해 가을, 필리푸스의 군대는 베로나 근처에서 데키우스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데키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싸움에서 필리푸스는 데키우스에게 살해당하였으며, 데키우스의 승전보가 로마에 전해지자 필리푸스의 아들도 살해되었다.
39. 데키우스 (Decius. A.D.249년-A.D. 251년)
데키우스는 AD 200년경에 피노니아(Pinonia)에서 출생했다. 그의 모계에 의하면 이탈리아 출신이다. 이는 처음에 군대 사령관이었는데 후에 자기 뜻과는 달리 군대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로마의 고대 풍습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으며 기독교를 국가에 해를 끼치는 종교로 인정하고 박해를 강화했다. 이는 로마가 빈쇄 해진 것은 기독교도들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전멸하려 했다. 재산을 몰수하고 악형을 가했다. AD 250년에 아시아의 총독 갈루스의 반란 때에 피살되어 죽었다.
이 때에 유명한 신학자 오리겐이 순교했다. 오리겐은 아버지 네오디나스가 순교할 때에 따라서 순교하려고 아버지를 따라 나서자 어머니가 반대하고 옷을 감추어 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 “ 아버지 우리 때문에 신앙을 저버리지 마세요. ” 라고 쓴 글을 보냈다. 오리겐은 안수 받지 아니한 평신도로서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철학과 문법을 가르쳤다.
특히 금욕생활(禁慾生活), 고행(苦行), 철야기도(徹夜祈稻), 청빈생활(淸貧生活)에 힘썼다. 특히 여학생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AD 250년에 투옥되고 2년의 고행 끝에 옥고 후유증으로 죽었다. 십자군의 원정 때까지 순례자들이 끊이지 아니했다.
40. 트레보니아누스(Tribonianus. A.D. 251년-A.D. 253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A.D. 206년 이탈리아 ~ A.D. 253년8월 라티움 인테람나)은
그는 초기에 모이시아 지방 총독이 되어 데키우스 황제에게 충성하다가 A.D.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데키우스 황제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자기 아들 볼루시아누스를 부황제로 지명하고 다음 공동황제 후계자로 정했으나 호스틸리아누스는 얼마 안 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A.D. 253년 초 고트족이 다시 공격해오자 모이시아 지방 군대가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갈루스는 발레리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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