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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영성 공동체 인간은 싫든 좋든 남들과 함께 어울려 살 수 밖에 없는 관계적 존재이다. 유사 이래 인류는 남들과 더불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늘 고민해왔다. 그 고민의 결과가 윤리와 철학 그리고 법률과 종교로 대변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긴 인류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아직도 인류는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고 전쟁을 일삼고 있다. 인간행복과 인류평화를 위해 애써 찾아낸 많은 방법들이 오히려 새로운 불화와 반목을 조장하기도 한다. 나는 다음 다섯 가지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영적 공동체를 감히 꿈꿔본다. 첫째는 인간 개개인의 영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특정 종교나 이념을 기초로 하는 사회는 그 공동체 안팎으로 늘 증오와 갈등의 단초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추구와 이기심, 그리고 각 종교의 독선과 이념의 경직성을 뛰어넘어 인간 개개인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영성의 발견과 성장에 주력하는 공동체이다. 인간은 신의 본성(영성)을 가장 많이 타고난 존재이기에 그 삶이 영성을 추구하는 삶이 될 때 인간은 에고를 넘어서 진정 고귀한 생명체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모든 생명체 뿐만 아니라 존재계의 모든 요소들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고는 악용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말살과 자연파괴를 초래하였다. 이제 인류는 우주 생태계에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고 모든 생명체와 사물이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한다. 인간의 우월한 능력은 오직 지구와 우주를 조화롭게 관리하고 이롭게 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계는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본능에 기초를 둔 냉엄한 생존의 법칙(정글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다리를 다친 토끼 한 마리가 숲길을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면 순식간에 다른 동물이 이 토끼를 낚아채어 잡아먹고 말 것이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면 지나가던 사람이 그 할머니를 부축해 준다는 것에서 인간의 진정한 우월함이 있지 않을까? 셋째, 서로 섬기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인간은 홀로 행복할 수 없다. 만약 그런 행복이 있다면 착각이거나 건강치 못한 행복일 것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이웃도 함께 행복해야 되며,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존중해야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게 불평등하게 태어났기에 더 많은 능력을 지닌 자는 덜 지닌 자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고, 적게 지닌 자는 더 많이 지닌 자에게 감사하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성의 발견을 통해 모든 개체는 다른 개체나 사물들과 연결되어 있는 한 몸임을 깨닫고, 다른 개체의 행불행을 나의 행불행으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생명의 기쁨과 삶에 대한 긍정적 자세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원죄에 짓눌린 자학적 존재가 아니오, 또한 인간의 삶은 하늘의 한 점 구름이 떴다 사라지는 것과 같은 허망한 존재도 아니다. 저 들에 핀 야생화나 숲 속을 뛰어 다니는 동물들, 그리고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를 보라. 저 생명의 약동과 살아있음의 기쁨과 아름다움은 인간도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이다. 인류의 평화를 방해하는 악이나 부정의 세력은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바위틈에서 새로 솟아난 샘물이 흙탕물을 맑게 하듯이 사랑과 긍정의 힘으로 악과 부정을 정화시켜야 한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나 석가의 뭇 생명에 대한 ‘자비심’, 간디의 현실 부조리에 대한 ‘아힘사’(ahimsa ,비폭력)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생명의 원리이다. 다섯째, 예술과 축제가 있는 영성이 발현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추구와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었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일하고 돈만 벌다가 죽어야 하느냐?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연주의자 소로우는 인간은 일 년 중 두 달만 열심히 일하면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체험으로 증명해 보였다. 나머지 시간들은 영성의 성숙과 인간정신의 가장 높은 고양인 예술의 향유, 웃음과 춤이 있는 축제를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난히 더디게 찾아온 봄이지만, 봄은 어김없이 또 찾아왔다. 향긋한 봄바람, 물오른 붉그스레한 나무가지, 막 터질 것 같은 꽃망울, 암수가 함께 주고받는 숲속의 새소리... 아! 이것들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고, 영혼은 두둥실 하늘로 떠오를 것 같지 않은가? (영성잡지 <참세상> 1997 3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