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 스토리텔링
열 일곱 개의 달이 뜨는 요천강 사랑 이야기
윤 샘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요천강 강둑에 어린 쑥 촉이 고개를 내미는 봄 날 밤에 양생은 요천강 오작교 다리 난간에 서서 개녕동 처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둥근 보름달이 멀리 지리산 고개 마루를 성큼 올라서고 있을 때 개녕동 처녀도 요천강 오작교 다리 난간에 이르러 양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도 오작교가 이어지고 있는 듯 한줄기 구름이 무지개 모양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요천강 다리 가운데 이르러 양생과 개녕동 처녀는 두 손을 맞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이어진 인연이요, 숱한 곡절과 생사를 넘나들며 이뤄진 만남이기에 만감이 교차하여 눈물이 된 것이다. 개녕동 처녀가 이내 눈물을 고운 소매로 훔치고 진지하여 양생을 보며 말했다.
“지난번 왜구들의 난리로 제가 꿈꾸던 봉도의 꿈을 잃어 이전의 인연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난번 낭군께서 은주발에 사랑주를 가득 담아 주시며 우리의 백년해로의 인연이 이뤄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다 말씀해 주셔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인생살이 언젠가 피면 석양의 노을처럼 저물고, 화려한 이 봄도 언젠가는 시드는데 어찌 오늘의 사랑이 참으로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간 참으로 낭군을 마냥 기다려야하는 아낙의 처지가 되었지만 이나마 하늘의 도움이니 저로서는 적이 행운이라 여깁니다. 만약 낭군께서 저를 버리지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면, 저는 당신의 성실한 아내로서 끝까지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그러나 원하시지 않는다면, 저는 저 구름과 저 땅의 간격만큼 아주 먼 곳으로 영원히 떠나겠습니다.”
양생은 그 말에 감동하고 감동하였다. 그가 말했다.
“오늘의 이 인연이 어찌 당신과 나만의 인연이겠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요, 운명이 아니겠소. 그런들 내 어찌 그 운명을 따르지 않겠소. 내 하늘의 명을 받아 천지간에 당신만을 사랑하며, 하늘의 은덕에 평생 감사하며 살아갈 따름이오.”
개녕동 처녀는 이 말을 듣고 참으로 기쁘고 기뻐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빌었다.
“하눌님이시어 오늘 요천강 오작교에서 한 맹세를 부디 지켜 낭군과 백년해로를 하게 해주소서.”
그 때 마침 하늘에서도 무지개 구름이 커다란 다리를 만들었고, 보름달은 그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양생이 말했다.
“우리 오늘 천지간에 이 기쁜 날 어찌 사랑주를 빼놓을 수 있겠소. 저 다리 위에 있는 정자에 가서 봄 밤 정취를 느끼면서 우리의 사랑을 나누면 더 좋지 않겠소. 이태백이가 그렇게도 마시고 싶어했으나 마시지 못했다는 그 귀한 사랑주 말이요.”
양생과 개녕동 처녀는 요천강 정자로 가서 준비해온 사랑주를 두 개의 은주발에 가득 따라서 놓고 서로 마주 앉았다. 은주발에 따라진 사랑주는 맑고 맑았고, 봄 밤 강물은 거울처럼 고요했다. 양생이 술잔과 강물, 그리고 하늘을 한번 씩 쳐다 보고나서 개녕동 처녀의 두 눈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기뻐하며 말했다.
“역시 하늘의 은덕과 축복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 밤에 달이 무려 열일곱 개가 한꺼번에 뜰 수 있겠소”
양생의 느닷없는 말에 개녕동 처녀는 기쁘면서도 놀라 물었다.
“달은 하늘에 하나뿐인데 어인 말씀이세요?”
이에 양생은 개녕동 처녀에게 더 다가가 앉으며 그 까닭을 이렇게 풀어나갔다.
“자 먼저 저 하늘을 한번 보시오. 저 무지갯빛 구름다리 위에 둥근 보름달이 하나 덩그렇게 떠 있잖소. 그리고 저 요천강 물을 한번 봐요. 저 거울 같은 요천강 수면 위에도 하늘의 보름달이 내려와 떠 있잖소. 그리고 저 요천강 깊이를 측정하려 세운 석등 탑에서는 사방으로 네 개의 둥근 등불이 밝게 빛나고 있잖소. 그리고 그 아래 강물을 한번 보시오. 그 둥근 등불들 역시 요천강 강물에 또 하나씩의 달을 띠우고 있잖소. 여기까지 합하면 몇 개의 달이 떠 있는 것이요? 양생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개녕동 처녀에게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개녕동 처녀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낭군님의 지금까지 말씀대로라면 열 개의 달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양생이 말했다.
“맞았소! 열 개의 달이 떠 있소.”
이어 개녕동 처녀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 낭군님 일곱 개의 달은 어디에 있는가요?”
양생이 은주발에 가득 담긴 사랑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 맑고 향기 좋은 사랑주 술잔을 속을 한번 보시구려. 당신의 고요한 술잔에 저 하늘의 보름달이 내려와 밝게 빛나고, 또 내 술잔에도 하늘이 내려 보내신 보름달이 덩실 떠 있잖소?”
이에 개녕동 처녀가 말했다.
“그러면 열 두 개의 달이 떠 있는데, 나머지 다섯 개는 어디에 있나요?”
양생이 이에 대답을 하기 전에 개녕동 처녀의 두 눈을 그윽한 시선으로 한동안 바라보며 답했다.다.
“그 두 개는 당신의 고운 눈 속 눈동자에 하늘의 저 달이 내려와 앉아 있는 달이요? 다른 달들도 아름답지만 나는 그 당신의 가만 눈동자 속에 덩실 떠 있는 달이 더 아름답소.”
개녕동 처녀가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띠우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제 눈 속의 달이 그렇게 아름다운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두 개는 어디에 떠 있는지요?”
양생은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떠서 개녕동 처녀를 참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양생이 개녕동 처녀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사랑스럽게 말했다.
“세상에는 많은 달이 있지만 내 앞에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당신처럼 예쁜 달을 난 본 적이 없소. 그리고 그 예쁜 달이 지금 내 마음속에 들어와 훤하게 비쳐 떠 있소. 당신과 내 마음속에 떠 있는 달, 그 달이 마지막 열여섯 번째, 그리고 열일곱 번째 달이요. 그 달은 나에게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달이요. 내 어찌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내 사랑 내 품에 안겨 언제까지나 내 마음을 훤히 비춰주시구려.”
개녕동 처녀는 이미 빛나는 달 그 이상이었다. 양생과 개녕동 처녀의 마음속에 있는 보름달은 이미 한 낮의 태양처럼 불타기 시작했다.
- 진정 사랑하시거든 달 떠오르는 봄 밤에 사랑주 은주발 마주하고 요천강 정자에 앉으시라. 정녕 열일곱 개의 아름다운 달을 을 볼 수 있으리니.
20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