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다만 그렇고 죽음도 다만 그렇거늘”
<7> 대혜 선사의 행장 ⑥
[본문] 소흥 11년(1141)에는 간신 진회(秦檜)라는 사람이 대혜선사를 장구성(張九成)과 일당이라고 모함하여 가사와 도첩(道牒)을 빼앗기를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그래서 형주에서 귀양살이를 15년이나 하게 되었다. 소흥 26년(1156) 10월에는 조칙으로 매양(梅陽)이라는 곳으로 옮겼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그 형색과 가사를 회복하고 풀려났다. 그해 11월에 다시 조칙으로 아육왕사(阿育王寺)에 머물게 되었다.
소흥 28년(1158)에 교지를 내려 선사에게 재차 경산사에 머물게 하여 원오선사의 종지를 크게 드날렸다. 선사의 법이 융성하여 당세에 으뜸이었다. 대중은 2000여 명이나 되었다. 신사년(1161) 봄에 명월당에 물러앉아 있었는데 이듬해(1162) 임오년, 고종 32년에 임금이 호를 대혜선사라고 내려주었다.
[강설] 대혜선사가 뜻밖에도 귀양살이를 하게 된 사연이다. 출가한 사람으로서 또는 큰 도인으로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연인즉 진회(秦檜)라는 사람은 북송의 태학생(太學生) 출신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아 재상(宰相)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북송은 당시 금(金)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아 진회는 화친을 주장하고 대혜스님의 제자인 장구성(張九成)과 장준(張浚)은 화친을 반대하는 강경파였다.
화친을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장구성 등을 귀양살이를 보낼 때 대혜스님까지 연좌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역사상 큰스님의 신도나 제자들로서 가장 우수한 사람들을 많이 가르쳤던 분으로서는 단연 대혜스님을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최고 지성인들과 벼슬이 높은 사람들 중에서 대혜스님의 제자들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혜스님께서도 정치적 바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을 귀양살이를 마치고 아육왕사에 머물다가 드디어 옛날에 살던 경산사에 다시 오게 되어 2000여 명이나 되는 대중들을 거느리고 스승 원오선사의 도법을 크게 드날렸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과 관료들
대혜스님 제자 많아 ‘시샘’
[본문] 효종 융흥 원년 계미(1163)에 명월당에 계셨는데 하룻밤 대중들이 보니 별 하나가 절 서쪽에 떨어지는데 유광이 환하게 밝았다. 선사가 곧 작은 병세를 보이더니 8월9일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내일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5경에 손수 유표를 쓰고 후사를 부촉하였다. 그때 요현이라는 스님이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니 선사가 이에 크게 써 주었다. “삶도 다만 그렇고 죽음도 다만 그렇거늘 임종게가 있고 임종게가 없는 것에 왜 그렇게 열성인가?”라고 하시고 편안히 돌아가시니 세수는 75세이고 좌하는 58세시다. 임금님이 슬퍼하시기를 마지 않으시고 시호를 내려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호는 보광(普光)이라 하였다.
지금은 살았을 때의 법호와 돌아가신 뒤의 시호를 들어 대혜보각이라고 한 것은 남악혜양(南岳懷讓) 화상의 호가 또한 대혜임을 분간하기 위한 것이다. 어록이 80권이 있어서 대장경을 따라 유행하고 있으며 법을 이은 제자는 83인이다.
[강설] 선사의 마지막 모습을 밝혔다. 열반하실 무렵에 요연이라는 스님이 임종게, 즉 열반송(涅槃頌)을 청하였는데 “태어남도 죽음도 아무것도 아닌데 임종게라니 그 무슨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임종게가 있고 없음에 왠 관심이 그렇게 많은가(生也祗 死也祗 有偈無偈 是甚熱)?”라고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은 임종게가 아니다. 임종게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곧 그것이 임종게가 된 셈이다. 대혜 선사가 만약 임종게를 정식으로 짓기로 하였다면 그 뛰어난 문장력으로 그렇게 짓고 말았겠는가? 어록이 80권이며 법을 이은 제자도 83인이나 되었으니 참으로 왕성하게 교화를 펼친 대선지식의 일생이었다.
[출처 : 불교신문 201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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