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블을 바탕으로 하는 교리를 가진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유전 받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로 인하여 대속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바울의 주장을 따른 교리를 수천 년간 전파해 왔었지요. 교회를 위한 막대한 부와 권력의 원천이 되어왔던 시간이 흐르면서 터틀리안과 어거스틴을 거쳐 켈빈에 이르기까지 다듬어져온 이러한 원죄와 대속에 관한 믿음을 간단하게 몇 줄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인 점이 있지요. 그렇지만 최대한으로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한 원죄에 대하여 살펴보는 이 글은 세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선악과에 대하여 같은 이해의 맥락을 가진 기독교의 한 아류인 워치타워의 주장과 그들의 출판물을 바탕으로 바이블의 기록을 대조하여 다루었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성구들을 바탕으로 원죄와 관련된 일관성 있는 이해가 무엇인지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고의 자유를 가진 분들을 위하여 좀 더 심도 있게 여러 관점을 고려하여 아담에 대한 통찰책의 해석을 살펴봄으로 이러한 연구가 무엇을 길어낼 수 있는지에 관하여 다루었습니다.
----------------------------------------------------------------------
신낭만주의 작가였던 노르웨이 출신 안데르센의 작품 중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널리 번역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명작 동화가 있습니다. 모두들 잘 아시는 이 동화가 시사하는 바를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첫째, 이 동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투명 옷에 대한 어떠한 미사여구도 모두 허구라는 깨우침이 들어 있지요. 둘째, 때로는 조성된 여론에 의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는 일을 두려워하여 함께 동조하게 되고 마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또한 들어 있지요. 마지막으로, 그렇지만 결국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용기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일의 부당성이 밝혀지고 만다는 교훈이 들어 있지요.
동화이던 소설이던 부당한 일을 극복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결론은 독자들을 만족하게 해주지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아마겟돈이라는 과정을 거쳐 모두가 바라는 낙원이 오게 된다는 바이블의 스토리 또한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기승전결의 결실을 맺게 하는 방식으로 구성 되어 있지요. 그런데 선악과에 관련된 원죄라는 스토리의 전개가 안데르센의 벌거숭이 임금님 동화에서 알려주듯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보이지 않는 옷과 같은 상상의 산물이었다면 그 상상의 산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속교리와 수천 년간 치러져오던 기념식을 포함하는 것과 같은 모든 행위와 말들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원죄에 관한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의하면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요구함으로 창조주의 우주주권에 도전하였고 이 일은 우주의 법과 질서의 기초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쟁점을 낳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파97 2/15 4면 더는 고난이 없을 때 참조) 그 결과로 아담의 후손들은 유전죄를 물려받게 되었고 그 유전죄를 없애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보내는 대속 마련이 필요하게 된 것이라 말하고 있지요...
과연 바이블에서도 그렇게 알려주고 있을까요? 만약 바이블에 분명히 기록되어있는 선악과와 관련된 전체적인 묘사가 원죄에 대하여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면 그것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존재하지 않는 옷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잘못된 주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모든 마련과 설명들은 허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진정 대속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세차게 내뿜은 입김이라도 금방 사라져 버리듯이 바람을 좇는 헛된 일을 해온 것인지 아니면 창조주께서 그런 절차를 마련 하셨는지에 대하여 먼저 원죄를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출판물들을 통해서 확인 해 보도록 하지요. 워치타워에서 발행한 출판물들에서는 그들의 주장처럼 첫 인간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선악과와 관련된 상황을 성구를 바탕으로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처럼 확실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통-2 166면 에덴 ***
이 나무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성경 기록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주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권리, 즉 피조물에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명시하셔서, 피조물로 하여금 선하다고 선언된 것을 행하고 악하다고 선언된 것을 멀리함으로, 주권을 가진 통치자이신 하느님 앞에 승인받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요구하실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 참조) 이 금지 명령과 뒤이어 불순종한 부부에게 내려진 형 선고는 원죄가 된 것이 금단의 열매를 먹은 불순종 행위였음을 강조한다.—창 3:3.
위의 통찰책에서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행위가 원죄가 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선악과라는 나무는 인간에게 승인받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요구 하실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지요. 다시 말하자면 선악과나무가 인간에게 승인 받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요구 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것을 증명하는 바이블의 기록은 없다는 뜻이지요.
(나무 참조)를 찾아보아도 “나무는 또한 개인, 통치자, 왕국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라고 설명 되었을 뿐 선악과나무가 특별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상징이라는 설명에는 실패하고 있지요.
또한 같은 내용을 알려주는 통찰책의 나무제하에는 “그러므로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금지된 영역의 경계를 범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역과 권위에 대한 침범 또는 반역이 될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다시 말하자면 이 설명 역시 바이블에 기록된 성구들로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영역과 권리를 침범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에는 실패했다는 뜻이지요..
원죄에 관하여 다루는 또 다른 출판물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 원 제11장 101면 제6항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허락하셨는가? ***
6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먹었습니다. 왜 먹었습니까? 하와는 사단을 믿은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와는 자기나 아담이 더는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추리하였습니다. 더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동조하여 그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사람의 원죄를 설명하는 가운데 「예루살렘 성서」는 난외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며, 완전한 도덕적 독립을 요구하는 주장이다. ··· 최초의 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공격이었다.” 곧 인간의 절대적 통치자 혹은 상위자이신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위의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에 나와 있는 빨간 색으로 강조한 하와의 생각이나 추리나 공격이었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성구는 놀랍게도 바이블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앞의 통찰책처럼 이 주장 역시 봄볕에 사라지는 아지랑이처럼 오직 상상을 근거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사라가 마음속으로 웃는 장면까지 묘사하고 있는(창 18:12) 바이블의 상세한 기록 방식을 볼 때 하와가 마음속으로 우주주권에 반역하는 엄청난 생각을 하였다면 분명 바이블에 명확히 기록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선악과와 관련된 쟁점에 있어 바이블은 과연 무엇을 묘사하고 있기에 워치타워는 이처럼 원죄와 관련된 교리를 주장하는데 정확한 성구를 사용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실패하는 걸까요? 이제 실제로 바이블이 알려주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2016년 2월 마지막 주 건강에 관하여 다루는 연구용 파수대 16항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러한 주장이 믿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또는“이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하는 올바른 정신태도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성구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원죄나 그로 인한 대속 교리와 같이 바이블과 관련이 있는 종교들이 주장하는 교리들이 창조주께서 원하시는 사상을 올바로 전달하는지 아니면 벌거숭이 임금님의 동화에 나오는 재봉사들처럼 그들의 아젠다와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지를 구분시켜주는 시금석과 같은 몇 가지 성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성구들은 서로 송사하는 역할을 하여 종교들의 교리뿐만 아니라 여러 사상을 가졌던 히브리 부족들의 두루마리 기록들을 모아놓은 바이블 자체의 일관성에 관하여도 들여다보게 해주는 힘이 있는 구절들이지요.
“그분은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땅에는 여호와의 사랑의 친절이 가득하구나.(시 33:5)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옵니다. 그것은 천적인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며 그분에게는 회전으로 말미암은 변화도 없습니다.”(야고보 1:17)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아들은 단 한 가지 일도 자의로 할 수 없고, 다만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행할 따름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분이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같은 방식으로 행합니다.”(요한 5:19)
위의 성구들이 온 우주의 창조주의 성품을 알려주는 성구들이며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시금석이 되는 성구들을 바탕으로 과연 창세기의 선악과에 관한 기록이 워치타워가 주장 하는 것처럼 원죄를 묘사하거나 아담과 하와의 우주주권에 반역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의 장면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창 1:26) 워치타워에서는 “우리”라는 표현은 여호와와 예수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파70 9/1 391면 만물을 지으신 분 *** 성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고 말씀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창세 1:26)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분은 나중에 이 땅에 오셔서 예수가 되신 분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가 여호와와 예수라는 이러한 주장은 “위대하신 선생님”책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고 말씀하셨음을 알려 주지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말씀 하신 것일까요?-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말씀 하신 거예요. 이분이 나중에 이 땅에 오셔서 위대하신 선생님이 되신 거예요.”-위대하신 선생님 제3장 ”만물을 지으신 분 중에서 발췌)
여러 가지 고대 기록과 여기 저기 흩어져 살던 히브리 부족들이 둘둘 말아 낙타 등에 꽂고 다녔던 두루마리들과 그 외 작은 단편들의 모임을 함께 붙여놓은 바이블의 이야기는 계속되어 창세기 3장에서는 말하는 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선악과와 관련하여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바로 그 날에 필시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필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창 3:5)
이 구절에서 말하는 뱀은 과일을 먹고 나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필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지요. 과연 말하는 뱀의 장담은 거짓이었을까요? 이제 선악과를 먹은 사실을 알게 된 하나님들의 반응을 기록한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이 말씀하셨다.“자, 사람이 선악을 아는 데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 3:22) ... 하나님 스스로 확증 해주시듯이 바이블의 기록은 뱀의 단언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창 3:22의 기록이 알려주는 것처럼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이나 예수와 같이 되었다는 워치타워식 이해는 아담과 하와에게 모두가 바라는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길이 전혀 없는 외나무다리처럼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을 열어 놓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 시편 33:5과 요한 5:19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을 그대로 따르는 아들이신 예수와 같이 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바이블의 내용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가 반역 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워치타워에서 정말 독자들이 알게 되기를 원치 않는 명확하게 기록된 계속되는 창세기 3:22의 후반부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지요.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실제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한정 없는 때까지 사는 일이 없도록___”이 후반부의 기록은 어떤 점을 알게 해 줄까요?
한 가지 예를 들어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의 재판관들이 어떤 사람에게 선고를 내렸는데,.. 당신은 우리를 닮았음으로 이제 사형에 처합니다. 라고 판결을 내렸다면 그 재판관들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자신들을 닮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들도 있나? 라는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이블에는 실제 그런 판례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22의 기록이 그런 판례를 기록한 내용인데..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자신들처럼 되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쫒아내고 영생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재판하여 결국 그들이 죽음을 맞도록 조처를 내린 판결기록이 바로 창세기 3:22의 내용인 것입니다!
만에 하나 워치타워의 주장처럼 아담과 하와가 반역하였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한 것이라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확인 해주신 여호와와 아들이신 예수가 반역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되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됨으로 이 또한 존재 할 수 없는 교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구의 앞뒤를 살피지 않고 이러한 교리를 개발한 워치타워는 사실 창조주를 모독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세상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선악과와 관련된 이러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시금석 역할을 하는 시편 33:5에서 알려주는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의와 공의를 사랑하는 창조주와 그분을 그대로 본받아 행동하는 예수를 닮아 “우리중 하나같이” 된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분명 좋은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닮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공의의 하나님의 판결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록된 명백한 성구들을 바탕으로 자세히 살펴본 선악과 이야기는 어떤 결론을 내리게 해 줄까요?... 하나님 중 하나와 같이 되었는데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기록은 공의에 위반되는 것이고 워치타워의 주장처럼 아담과 하와가 반역했기 때문에 사형에 처했다면 하나님들 또한 반역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 밖에 되지 않는 중동 지방의 히브리 부족들의 둘둘 말린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는 그 자체가 벌거숭이 임금님의 보이지 않는 옷과 같은 허구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인 할 수 없는 바이블의 기록은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바울의 원죄에 관한 모든 설명 그리고 그로인한 예수 대속의 주장 또한 벌거숭이 임금님의 이야기처럼 허구가 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롬 5:15-17) 사실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바울이나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워치타워는 아담의 범죄와 그로인한 예수의 대속 필요성에 대하여 주장하기 전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는 하나님들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주는 창세기 3:22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았어야 하였었겠지요....
----------------------------------------------------------------------
살펴보신 것처럼 이성을 가두는 세뇌라는 독초만을 사용해온 종교들과는 달리 창조의 아버지에 대하여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는 성구들을 바탕으로 교리나 바이블의 내용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데 첫 5:21) 왜냐하면 이러한 대조 방법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 왔던 원죄나 대속과 같은 헛된 교리도 무너뜨릴 수 있고 더 나아가 고대 여러 히브리 부족들에게 구전 되어 내려오거나 그들이 지니고 다녔던 단편들을 모아놓은 바이블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지에 관하여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원죄와 관련된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관련된 내용들에 좀 더 주의를 집중 해 보겠습니다.
원죄를 주장하는 워치타워의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완벽했던 아담이 반역죄를 저질러서 영원한 생명을 취소당하는 불리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도덕적인 완벽함과 관련한 내용을 알려주는 파수대 2008년 10월 1일호 27면 독자의 질문(아담은 완전하였는데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습니까?)에 대한 답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아담을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게 창조 하셔서 그가 현명한 결정을 내리거나 유혹을 물리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까? 아담이 불순종하기 전에,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포함하여 땅의 모든 창조물을 살펴보시고 ‘아주 좋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창 1:31)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창조주께서 설계상의 결함을 바로잡으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도 바로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창세 3:17-19)“ ]
이 파수대에서는 창세기 1:31절의 “아주 좋았다”라는 표현을 예로 들면서 아담이 도덕적인 결함이 없이 완벽하게 창조 되었다고 주장 합니다. 그런데 이 성구의 “좋았다”는 표현의 앞 구절들을 살펴보면 도덕적인 완벽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에 대한 흡족함의 표현 이란 것을 알게 해줍니다. 히브리어의 “좋았다”(to-wb)는 단어는 구약에 약 550회 이상 사용 되었지만 도덕적인 완벽함을 뜻하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이런 방법으로 사용 되었지요. [좋고 널찍한 땅”-출 3:8, “자네가 하고 있는 방식은 좋지 않네”-출 18:17, “그 땅이 좋을수록”-호세아 10:11, “그들의 마음이 흥겨웠으므로”- 사사기 16:25, “제일 좋은 소 떼와”-사무엘 상 8:16 ] 그러므로 창세기 1:31의 예를 들어 아담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창조 되었다는 파수대의 주장 또한 성서적으로 뒷받침 되지 못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원죄와 관련하여 봄바람 불면 반드시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이런 성구들을 생각 할지도 모릅니다. 출애굽기 34:7, 민수기 14:18의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 자손들에게 삼대 사대 까지 계속 죄를 묻지 않느냐고 반문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표현은 출애굽기 20:5에서 처음 나오는데 “-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아들에게, 삼대 사대까지 처벌을 내린다.”라고 알려줌으로 분명 그 자식들도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로를 걷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있지요.
또한 어떤 분들은 시편 51:3-5에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 보십시오! 내가 산고가운데서 잘못을 안고 태어났으며(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개역), 내 어머니가 나를 죄 중에 수태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을 들어 이 성구야말로 원죄를 표현 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51장의 바로 위에 작은 글씨로 “지휘자에게, 다윗의 시가, 그가 밧세바와 관계를 가진 뒤에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들어 왔을 때”라고 분명히 명시 되어있음을 즉, 전체적인 문장과 그 배경- 나단이 다윗의 죄를 지적하자 감정이 격해져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하지요.
이와 같은 표현이 창세기 19:15절에도 나오는데, 이 구절에서 천사는 롯에게 “- 이도시의 잘못 가운데 당신이 쓸려가 버릴까 두렵소”라고 알려 줍니다.
이 구절 어디에도 롯이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상은 없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잘못된 환경에 물들어 있다가 처벌 받게 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표현 또한 자신이 죄 많은 세상에서 태어났고 자신의 모친 또한 그런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로 자신을 낳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다른 구절들과 조화를 이루게 되지요.
그래도 원죄-유전되는 죄가 있다고 생각 한다면 에스겔 18:20을 다시 읽어 봐야 하지요. 그 성구에서는 죄를 짓는 영혼이 죽을 것이고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어도 아들은 아무것도 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지요. 이것 또한 각자의 행실에 따른 결과인데 바로 그 앞 구절인 19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틀림없이,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아들이 아무것도 담당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로 말하면, 그는 공의와 의를 행하고, 나의 모든 법규를 지키며 그것들을 계속 행하고 있다.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라고 알려주고 있지요. 이 성구는 유전되는 원죄 사상을 완전히 부정 하는 성구이지요! 그래서 20절 후반부에서는 이렇게 알려 주지요. “의인의 의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고려한 성구들로 인해 구약에서 원죄를 지지하는 사상이 있는가에 대하여는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졌다고 여겨지는군요.. 그렇다면 과연 신약에서는 원죄라는 사상을 지지하는가하는 문제의 중심에는 자칭사도인 바울의 주장이 아닌 신약의 주인공인 예수의 행적과 그분의 말씀을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러 왔을 때 침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이 한 말의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지요.
“보십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요한 1:29) 여기서 침례자 요한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하는데, 마태 3:1-2에서는 그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그의 외침에 부응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며 그에게서 침례를 받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중에 사람들이 묻자 침례자 요한은 메시야 즉 하나님의 승인 받은 자-메시아-를 예비하는 역할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지요.
바이블에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승인 받은 자, 즉 메시아의 역할은-그가 왕이던 제사장이던 예언자이던-사람들이 기름부음 받은 그의 말과 그가 세우는 본을 따라 그들의 죄의 행로에서 돌이켜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메시아의 역할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본을 남겨 자기의 발걸음을 밀접히 따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베전 2:21)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 1:29의 의미는 예수께서 침례자 요한 보다 훨씬 더 큰 모본을 보임으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그 행로를 올바르게 함으로 결국 세상에 만연한 죄가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이었지 아담으로 인한 유전되는 죄를 없앤다는 의미의 외침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요.. 즉 침례자 요한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구약의 속죄 제물에 사용되는 양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말한 것이었지 아담으로 인하여 유전된다는 원죄에 대한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해주는 부분이지요!.
예수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도 이점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여러분이 돌이켜서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18:3) 이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유전죄가 없어져야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실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점을 더욱 확신하게 해주는 예가 요한 9:2-3인데, 이 구절에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관하여 말씀 하실 때에도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의 부모도 아닙니다. ”라고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원죄사상을 배격하셨지요.
어떤 분들은 마가 14:17-21의 예를 들어 예수께서 직접 대속마련을 기념 할 것을 지정하셨다고 주장 할 것입니다. 공통관점이라는 뜻의 공관복음인 마태 26:26-29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고 누가 22:17-22에서도 같은 내용을 기록 하고 있지요. 그런데 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와 마가복음은 세부점에 있어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누가는 그 대상을 더욱 좁혀서 말하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요.(“이 잔은 여러분을 위하여 쏟게 되어 있는 내 피에 의한 새 계약을 의미합니다.”-(누가22:20) “이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쏟게 되어 있는 내 계약의 피를 의미합니다.”-(마태26:28; 마가 14:24)
더 나아가 그 유월절 밤의 일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유월절 식사에 함께 참여하여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의 품 앞에 기대 앉아 있다 그의 가슴에 기대며 말하기까지 했던-요한의 기록에는 공관복음에서 묘사하는 계약에 관한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 13:26-27에서 유다가 빵조각을 받은 일까지를 세세하게 기록한 요한복음의 저자는 어쩐 일인지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을 포도주 잔을 돌리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면서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는 다른 공관복음의 기록들을 확증 하는 일에는 무거운 바위처럼 침묵하고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요한복음의 기록은 그 유월절 저녁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술잔을 돌리고 빵을 떼어주면서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었다고 알려주고 있지요.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곧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한 13:34) 또한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1:24에서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안다고 기록해 놓음으로 후세 기록자들 중에 예수의 동선과 언행의 줄거리 전개를 놓고 서로 견제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느끼게 해주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의 원죄 이야기가 명백한 허구임을 고려하고 그 기록 시기와 저자들의 추구하는바가 각각 달랐던 공관복음서들과 요한복음의 상이점들 그리고 빵과 포도주에 관한 내용들의 불일치를 참고하여 예수께서 만찬식에서 말씀하신 내용의 공통분모를 찾아 자세히 눈여겨보면 어떤 이치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분은 지금 유대인 제자들에게 유월절 방식의 식사를 하시면서 침례자 요한이 자신에 대하여 언급했던 속죄와 관련된 제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제자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순조로운 이해일 것입니다.(마태 26:19; 마가 14:16; 누가 22:8; 요한 13:4)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면 단연코 그분은 자신들에게 불명예가 돌아가는 사실처럼 꾸며 만든 허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분의 제자들과 계약을 맺을 분은 아니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죄에 사용되는 로마서 5:12과 19에서 바울이 주장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왔다는 표현은, 예수의 가르침과 심지어는 구약에서 메시야와 예언자들의 입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과도 부딪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을 알게 해줍니다. 결국 벌거숭이 임금님의 보이지 않는 옷을 칭찬하는 모든 미사여구가 허구인 것처럼 바울의 주장은 허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영원토록 복종할 것을 강요당하는 원죄 사상은 자칭 사도인 바울의 생각을 발전시킨 터틀리안과 어거스틴을 거쳐 켈빈에 의하여 완성된 교리입니다. 이러한 교리를 이어받은 가톨릭에서는 아담의 후손인 마리아가 유전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잉태 하게 되는 모순을 뒤늦게 깨닫고서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를 통하여 성모는 무염시태(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교리를 발표하게 되기에 이른 거지요. 그래서 바울의 원죄와 대속론을 따르다 보면 가톨릭의 무염시태처럼 또 다른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여러 가지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교나 동방 정교회에는 원죄교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다는 자칭 사도였던 바울은 자신이 발명한 원죄라는 증서의 거대한 쓰레기가 수천 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는지를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아마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들을 손에 쥐고서도 그동안 조성된 여론에 의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는 일을 두려워한 벌거숭이 임금님 동네의 사람들처럼 함께 이 쓰레기를 찬미하는 일에 동조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
이미 저지른 것은 저질러 진 것이고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생각만 해도 썩은 생선과 같은 악취가 펄펄 풍기는 원죄라는 사상의 이 거대한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이제 진정 벌거벗은 임금님의 동화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우리 인류-호모사피언스-가 지구에 꽃피우도록 허락하신 창조의 아버지이신 참하나님을 사랑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 버렸습니다...
----------------------------------------------------------------------
이제 마지막으로 아담과 관련하여 기록으로 남겨진 다각도의 시각과 통찰책의 설명을 살펴보면서 함께 사물을 살펴보는 방법을 더욱 날카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미 앞부분에서 시금석으로 사용한 성구들처럼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과 그분을 그대로 따라 하시는 아들 예수의 회전 하는 그림자도 없으셔야하는 완벽함과 공의를 염두에 두고 원죄와 대속에 대하여 명료하게 기술하였는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지요.(지금은 무조건 중앙장로회를 따르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사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워치타워에 의하여 오랫동안 권장 되어왔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제 통찰책에서 설명하는 아담-아무 죄도 없이 그의 후손중의 하나인 자신의 욕망만큼이나 거침없이 일필휘지해버린 바울에 의하여 원죄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낙인찍힌 아담에-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지요. “아담”제하에 펼쳐지는 첫 번째 설명입니다. “(Adam) [땅의 사람, 인류, 인간. “붉은”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람”, “인류”, “땅의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성경에 560회 이상 나오며, 개개인과 일반 인류에게 모두 적용된다. 또한 이 단어는 고유 명사로도 사용된다.“
많은 연구와 조사들을 고려했을 통찰책에서 선택한 아담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한 설명은 ”땅의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아담에서 발전된 땅의 사람, 땅의 백성 이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암하레츠이고 그 복수형은 암메하라초트 로서 본토인, 비천한 것, 아랫것, 가욋것, 땅의것,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주로 비천함을 상징하는 의미가 들어 있는 이 단어-아담과 관련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기록과 좀 더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히브리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 알게 해주는 기록을 바이블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요. 특히 예수시대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 또한 비하하는 뜻으로 이런 단어를 사용했음을 신약에서는 알려주고 있지요.(마태 15:1,2; 요한 7:49)
통찰책에서는 아담과 관련하여 “그들의 집인 동산을 단장하고 돌보아야 했고” 죄를 지은 후에는 “에덴에서 쫓겨나, 정복되지 않은 땅 즉 저주를 받아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게 된 땅에서 자신의 죄의 쓴 열매를 거두며 땀을 흘리며 연명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하면서 원죄와 관련된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지면을 2페이지나 할애하고 있지만 에덴동산에서 축출 당한 후의 상황을 기록한 창세기 4:2의 내용,-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아벨은 양 떼(flocks)를 돌보는 자가 되었다는 바이블의 기록-과 비교 했을 때 이러한 통찰책의 장황한 설명 또한 사실을 왜곡한 허구임을 알게 해줄 뿐이지요..
빨간색으로 강조한 위의 통찰책의 마지막 부분,“또한 이 단어는 고유 명사로도 사용된다.”라는 설명은 아담과 관련된 바이블의 기록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지 첫 남자를 만들었던 하나님들이 그를 아담으로 작명해 주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이러한 점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들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시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뜻이 담겨 있는 부분인데 그와 관련이 있는 창세기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그 후에 그분은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사람-(adam)’이라고 부르셨다.”(창 5:2) 이 내용은 흔히들 남자의 이름을 아담으로 부른 것이라는 잘못된 시각을 바로 잡아주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는 분명히 하나님(elohim)들이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한꺼번에 지칭할 때 “아담-earthling ”즉 땅의것으로 불렀다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남자와 여자를 합하여 사람(adam)으로 불렀다는 의미는 “아담-땅의것”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될 때에는 고유명사인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種)을 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인식하게 해주는 부분이지요. 아담 이라는 단어가 일반 인류를 칭하는 명칭으로 유대문화에 정착하지 못한 반면에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일반 인류-man, mankind”를 뜻하는 단어로“에노스”를 사용하고 있지요.( Strong's Concordance #582 참조) 이 단어가 바이블에 사용된 일례를 살펴보면, 일반인류를 뜻하는“동 시대인들 가운데”(창9:1)라는 표현과 라반이 “모든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할 때도 사용 되었지요.(창 29:22)
왜 에노스라는 단어가 일반 인류를 뜻하는 단어로 유대사회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창세기 4:26을 공동번역 포함 다른 번역판들로 비교해 볼 수 있지요. 또한 아담과 관련하여서도 창 4:1과 창 5:1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 내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창 3;1의 뱀-나하시에 관하여도 좀 더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구들을 비교해보는 조그만 창을 열어 두는 습관은 보이지 않는 미로에 불어오는 생생한 바람의 방향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사용한 여러 가지 분석 방법을 다시 요약해 보도록 하지요. 어떤 주제를 살핌에 있어 모두가 동의하는 시금석이 되는 성구들-창조주와 예수를 대표하는 구절들-을 항상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구의 앞뒤 문맥을 이른 아침 거미가 뱅뱅 돌아가면서 촘촘히 그물을 짜듯 주의깊이 살펴 과연 출판물(어떤 기독교 서적이든지)에서 같은 맥락으로 설명하는지를 비교 분석하는 것입니다.(사도 17:11) 더 나아가 같은 내용을 다루는 다른 번역판들의 단어 선택을 살펴보고 가능하면 히브리어의 사용 방법에 대하여 조사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수십 년간 자신들의 평생을 바쳐 순수 학자적 탐구 정신으로 바이블을 연구한 석학들의 깨달음을 무가로 얻게 해주지요.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은 이런 일들을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하게 해 주고 있지요.
눈부신 태양도 프리즘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색으로 구분해 낼 수 있듯이 원죄와 대속이라는 거대한 허구적 교리의 중심에 서 있는 선악과에 얽힌 이러한 여러 각도의 분석 방법을 우리의 사고에 함께하는 친구가 되게 한다면 가두고 또 가두는 먹구름과 같은 세뇌라는 간계를 깨뜨리는 실용적인 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속과 관련된 기념식을 몇 주 앞둔 시점에 원죄에 대하여 바이블에서 실제로 알려주는 내용들의 앞뒤를 분석한 이러한 연구 방법이 무엇을 길어내는 방법을 알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박차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독일 유학을 다녀온 어떤 친구에게 선악과의 전후 관계를 설명 했더니 망연자실 듣고만 있더군요.. 그래도 밥줄이라.. ^^
선악과...아마 기독교의 영원한 수수께끼일겁니다 ㅎ
지역역사로 풀면 뭔가 단서가 약간은 나옵니다..
1.아프리카쪽의 지혜로운 뱀 전설.
2.수메르의 지혜와 생명의 나무열매와 그걸 휘감고있는 뱀의 형상
3.터키의 괴베클리테페 유적의 거석들에 새겨져있는 열매와 뱀의 형상
....결론은 뭘까요..
그지역에 한때 그냥 따먹으면 될정도 과실과 기타소산들이 풍부한 수렵채집기가 있었고 지력의 변화로 농사를 지어야 먹을수있는 시대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풍부한 과실과 소출들이 여유있던 수렵채집기에 대한 기억이 남아 에덴전승이 만들어지며,그 이전 지혜로운 뱀전승이 거기에 조합된다.
선악이라는 최종과제를 판단하게 할 열매
에 뱀은 신과같은 존재가 되리라는 사항을 명시한다..
이는 아프리카 지혜의 뱀..신으로부터 인간을 맡아 모든걸 가르치며 양육한다는 전설 스토리와도 통한다.
이런점들이 저 선악과 전승을 가진 히브리들의 지역을 둘러싸고 관찰됩니다..
물론 창세기의 문학성을 옷입고..
올려주신 성경내 단서에 의한 여증식 테르툴리아누스/아우구스티누스식 원죄론과 우주쟁점론의 문제확인은 물론입니다^^
네 저는 단지 그들이 만들고 다듬어 놓은 내용을 그대로 성구들로 비교 했을 뿐이지요.^^
보통 한곳에 문명이 발생하면 지리학적 여건으로 인하여 같은 장소에 다시 다른 문명이 들어서기 때문에 학자들은 지층을 분리하여 각각의 문명을 구분하는 일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말씀하신 터키의 고베클리테페는 다음 문명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아주 중요한 고고학적 장소이지요.
발견된 위치가 지중해 연안을 끼고 발달한 비옥한 초승달 지역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중간 지점인 메소포타미아의 상층부에 해당하는 땅인데도 이 고베클리테페가 그 후 발생한 수메르 문명이나 바벨론 아시리아 문명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고고학계의 흥분을 자아내게 해주고 있지요. 언젠가 직접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한 곳이지요.^^
오늘 미장원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미장원 아주머니와 안면이 있는 어떤 자매 두 명이 들어와 어린아이 둘 을 데리고 차례를 기다리던 한 젊은 엄마에게 접근하여 집회 때 연습한 방법 그대로 워치타워 사이트를 소개하고 함께 있던 아이들에게 비디오를 보여 주더군요. 말끔하게 차려입은 두 자매 중 능숙하게 대화를 선도했던 자매는 정파이고 그 옆에 쭈뼛쭈뼛 서 있는 다른 자매는 분명 기념식 특별 보파 자매 같더군요..저는 이발 의자에 앉아 사각사각하는 가위 소리를 벗 삼아 창밖의 지나가는 차들을 응시하면서 모르는 척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요.
그 젊은 엄마와 애들은 자매들이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고 자매들은 만족한 미소를 띠우고 친절하게 미장원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갔지요.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진행된 일이었지요. 이제 이발이 끝나고 자리를 옮겨 따뜻한 물에 시원하게 머리를 긁어주는 아주머니의 서비스로 기분 좋게 머리를 감고 와서 다시 의자에 앉게 되었는데 저의 시선은 윙윙거리는 헤어드라이어의 소리를 뚫고 반사되는 거울을 통하여 애들을 데리고 앉아있는 젊은 엄마의 자리로 끌리게 되었지요.
그런데..애들은 다시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 젊은 애들 엄마도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면서 채팅 중이더군요... 다른 상품과의 비교가 가능한 웹상이라는 진열대에서 소비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워치타워의 에니메이션..결국 그런 애니메이션은 내수용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장면 이었지요.. 그런 점을 고려한 것인지 워치타워에서 발행한 아동용 비디오에는 나는 커서 베델에 갈 거야 하는 노래가사도 있지요. 이런 가사로 계속 세뇌된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언젠가는 다시 구조조정에 휘둘리게 되겠지요..
관심을 가졌던 알바고 인공지능과 겨룬 3번째 대국에서 이세돌의 불계패가 되었지요. 이러한 인공지능에 워치타워의 출판물 CD를 한 장 입력하고 한 주제를 정하여 워치타워의 출판물들의 내용이 이치적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지를 질문한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요?.. 이러한 인공지능과 더욱 밀접하게 살아갈 현재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 주도할 앞으로의 세상에서의 워치타워의 입지가 궁금해지는군요..
같은 방법으로 인공지능에게 모든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공의의 표준이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셔야하는 창조주의 불변의 특성과 그 분을 그대로 닮으신 예수에 대한 정보를 입력한 다음 바이블에서 하나님의 행적과 언행으로 기록 된 모든 일들을 검토하여 참 하나님의 특성과 맞지 않은 성구들을 골라내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군요..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히브리 부족들이 믿었던 하나님들의 정체가 곧바로 드러나겠지요? ^^
그 애니매이션 최근작품은 그래도 꽤 애쓰긴 했더군요.
그래도 본즈스튜디오나 디즈니영화같지는 않죠.
그런걸 보던 사람들이 영상적으로 끌릴리는 없고 스토리는 더더욱 황당하고.. 딱 지역대회 드라마 수준인데 뭘 봐주겠습니까..
리들리 스콧쯤 되는 사람이 지휘해도 쓸만한 성경서사극이 잘 안 나오는 판에 ㅎㅎ
국어더빙수준은 뭐..수족축퇴문제가 발동될수준이고 허허~
신규 유입도 대물림현상유지도 분명 실패입니다.
여증교..차차 축소/소멸될건 분명합니다.
그게 꽤 오래가는거라서 문제지만..
과거 중립 동기들끼리 소셜미디어를 통하여 서로 근황을 묻고 자주 연락하고 사는 형제들이 있지요.. 그들 중 많은 수가 특파 등 중요한 자리에서 활약 했었지요. 사실 이들이야말로 한국증인역사에서 핵심 진골들이라 할 수 있지요. 예전에는 성경적 고찰에 대한 열띤 조사를 논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일상생활에 관한 이야기들로 대화가 진행되곤 하더군요..
침대에 666 을 형상화한 무늬에 페도 심볼까지 있네요.
깊이있는 해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