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가문을 세운 레갑인을 배우라(2023.2020.3.19)
렘35:1-11
할렐루야
오늘 성경본문은 ‘레갑가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갑가문’은 당시 숫적으로도 매우 적은 것은 물론이요, 유다광야에서 거칠고 불안정한 목축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갈대아인의 침략으로 잠시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와 난민처럼 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레갑족속은 육신적으로는 비천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한 ‘레갑가문’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본받으라고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가문을 다른 사람들이 본받으라고 한다면 얼마나 멋진 가문이냐 ‘저 가문의 신앙을 본받으라. 저 가문이 복받은 비결을 찾아봐라. 저 가문의 행복한 비결이 어디있는지 찾아봐라’고 한다면 그 가문 얼마나 멋집니까?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이 복을 받아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갑자손을 본받으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 말씀은 여호야김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을 배반함으로서 바벨론이 직접 쳐들어오지 않고 주변의 나라들을 보내서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유다에는 유목생활을 하던 레갑족속들이 있었는데 전쟁을 피해 예루살렘안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척이나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레갑인들의 경건한 생활은 현대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정말 그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들의 믿음은 얼마나 싸구려 신앙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 부끄러운 충격만 더 할 뿐입니다. 레갑인들의 경건한 모습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경건한 삶을 칭찬하셨습니다(18-1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대비하시어 경고하시는 반면교사로 레갑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모든 성도들도 레갑인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레갑인들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임받는 축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유다백성들은 도리어 책망과 재앙을 선포 받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말도 잘 듣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레갑인의 신앙적인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쩔수 없이 레갑인들의 경건생활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불순종을 고발하시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택한 선민의 반열에 들지도 않으면서도 하나님앞에 신실했던 레갑 족속의 실례를 들어 유다 백성들의 죄악상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레갑인을 초청하여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시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음에도 없는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문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그들의 신앙적인 삶을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유대인들에게 자랑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감을 가지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포도주로 유혹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혀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레갑인들을 통해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선조가 세운 ‘가훈’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갑족’은 겐 사람 레갑의 후손들입니다.(대상2:55절) 그래서 ‘겐족속’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은 아라비아 지역의 ‘페트라’ 또는 ‘미디안 광야’라고 하는 곳에 정착해 있었던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할 당시부터 하나님을 섬겼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입니다. (왕하10:15-29절)
레갑족속이란 말의 ‘족속’은 히브리어 ‘바이트’라는 단어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집’이란 뜻인데, 여기서의 ‘집’이란 주거하는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이 같은 ‘씨족 공동체’란 의미 와, 정신이 같은 ‘문화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혈연이 같으면서도 같은 정신을 대물림 받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풍’을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가‘족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혈연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족속’이란 단어보다는 ‘가문’이라는 말이 더 성경적 의미를 살리는 것이라 생각하여, ‘레갑족속’ 보다는 ‘레갑가문’이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레갑가문이 가훈을 갖게 된 것은 가문의 시조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여호나답’이라고 불려지기도 했습니다.(왕하10:15,23절)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후 바알 숭배에 빠져들었을 때, 바알 숭배자들을 척결한 예후의 종교개혁을 도왔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요나답은 ‘가훈’을 세워 지키게 함으로 ‘레갑족속’을 ‘레갑가문’이 되게 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구별된 삶이 꼭 필요합니다.
본문에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원칙들을 세웠는데, 그의 자손들이 수백 년 동안 ‘요나답’이 세운 원칙을 지켜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웠던 세 가지 원칙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원칙을 저의 목회철학으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세웠던 원칙은, 예수님의 삶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닮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이 원칙을 나의 결심으로 세워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세운 ‘가훈’이 무엇입니까?
1.세상 포도주 시험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킨 레갑인입니다.
대상2:55절‘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 겐 종족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사회의 지도층인 서기관들이 나왔습니다(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겐 종족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호밥)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이드로의 후손 중에서 레갑이라는 사람의 아들 ‘요나답’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교훈을 하였습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은, 유대인들 중, ‘나실인’들이 하는 결심이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스스로 나실인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술을 안 먹으면 거래도 안 되고 즐길 수도 없을 텐데, 왜 요나답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교훈을 했을까요? 거래를 위해서 고급술과 미녀들을 붙입니다. 그러면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불법에 연루되고, 또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을, 요나답이 알고,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죄와 타락으로부터 보호하고, 경건의 신앙을 지켜가기 위해서 영원히 술을 먹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입니다
레갑 족속들은 이렇게 선조 요나답이 명한 대로 무려 300년 동안 한 치의 변함도 없이 그 명령을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조들이 세워 놓은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은 금주 금연 주일성수 새벽기도 십일조하는 교회생활의 전통입니다. 더 추가했으면 하는 새로운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선조들이 세운 전통만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레갑가문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6절‘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이것은 절제된 생활로서 언제나 맑고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여 스스로 편견을 갖거나 이웃을 해하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레갑인들을 성전의 한 방으로 초청하여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참으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초청하여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이유는 자기들의 선조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자손손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포도주를 평생에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많은 성도들이 포도주 한 두잔 마시는 것이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합니다. 알기로는 노골적으로 마시는 성도들이 상상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변명합니다. 가끔씩은 그런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결코 그런 것들이 우리 신앙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가볍게 여길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술은 세상문화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 레23:13절에 전제라는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용하는 포도주는 알콜이 아니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딤전5:23). 물론 이 때 사용하는 포도주는 당시에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약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악용합니다. 자기들의 입장에 맞는 말로 교묘하게 각색을 해서 이용합니다. 매우 간사한 생각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하게 포도주를 금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레10: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에게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셨습니다. 특히 나실인에게는 절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민6:3-4).
신29:6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예 포도주를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잠23:31). 이유는 포도주가 사람을 거만케 하기 때문입니다(잠20:1). 또한 포도가 뱀같이 물기 때문이요 독사같이 쏘기 때문입니다(잠23:32). 포도주를 마시면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이며 마음이 망령된 것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주가 나중에는 음행의 포도주가 되고 맙니다(계17:2). 한마디로 포도주가 주는 해악이 심각하기 때문에 금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주어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바벨론 궁중에서 제공하는 최고급 포도주를 절대 거부했습니다(단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습니다. 잠간의 고통이라도 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받기조차 거절하십니다.
구약의 나실인들도 마시지 않습니다. 나실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 시대에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 사람들 역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실 것 같으면 우리에게 왜 마시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마시면 좋지 않기 때문에 마시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자기 입장에 맞게 각색을 하고 악용을 합니다. 사실 이 작은 계명 하나가 많은 크리스천들을 넘어뜨리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작은 계명 하나가 우리 신앙의 가장 큰 계명을 깨뜨리는 단초로 사용되고 있어도 마시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리고 영적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보다 크고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안하는 것입니다. 포도주 한잔 마셨다해서 금방 우리가 죽게 되고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안마시고는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변명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자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더 잘 압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지 술 권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술이 없으면 비즈니스가 안되고 인간관계가 안된다고 변명합니다. 중고생들도 쉽게 술을 사서 마실 수 있는 사회입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강제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문화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기가막힌 세상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자꾸만 술을 권합니다. 사실 그들은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나중에 기독교를 공격할 때 그런 것들을 가지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슬금슬금 빠져듭니다. 결국은 그들의 함정에 완전히 빠져들고 맙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술은 세상문화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세상문화를 거절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 없이 포도주를 거부해야 합니다.
레갑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포도주 시험앞에서 전혀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그들만의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포도주 한잔으로 자신들의 양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념을 무너뜨리지 도 않았습니다. 레갑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향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향기가 없으니까 그들이 실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는 레갑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2.세상의 소유를 거절한 경건한 삶과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7절‘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 지도 말고’왜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고 농사도 짓지 말고 유목생활만 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정착하여 머물게 될 때 우상숭배라든지 세속에 물들게 되고 또 도시를 이루게 되면 다른 나라가 침략해 와서 고난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 당시 북이스라엘에 만연하던 바알 숭배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알은 농사의 신으로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잘못된 믿음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착하여 도시를 이루게 되면 꼭 등장하고야 마는 것이 타락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 예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분산하여 살면 그렇게 큰 타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타락과는 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안 요나답은 철저히 유목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조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토지에 정착함으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입니다. ‘레갑가문’ 이로써 욕심이나 시기심 등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또 싸움이나 긴장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경건을 방해하고 유혹합니다. 성도의 생명력이 경건함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죄많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롬12:2).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것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보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누리는 것, 즐기는 것 등등 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의 거룩을 훼방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문화가 우리 믿는 성도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이라는 공간을 떠나서 살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7절을 읽어 보십시다. 그들은 세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짓지도 않았고 파종도 하지 않으며 포도원도 재배치 않고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랬단 말입니까? 아니면 이들이 염세주의자들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둘 다 아닙니다. 그들은 게으른 자도 아니요, 그들은 염세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신앙적 가치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들은 이 땅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함입니다. 아무래도 집을 짓고 파종을 하며 포도원을 개간하다보면 땅에 것에 대한 욕심이 자라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자기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유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 생겨서 죄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 있는 소유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아무래도 농경의 신 바알의 우상에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하게 될 것이고 젖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 농경사회의 정착생활을 거부함으로 인해 더 이상 안일한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들이 세상적인 탐욕이나 안일을 거부한 것은 분명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큰 적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적은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욕심은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고 죄를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이 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로 발전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신앙의 대적인 것입니다. 아무래도 세상 것에 집착하다보면 누구든지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심으로 발전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그것 때문에 레갑인들은 세상의 소유를 거절한 것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정신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들의 신앙적인 순결함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욕심없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방해하는 또 다른 대적은 안일함입니다. 안일함은 우리 신앙을 은밀하게 무너뜨립니다. 안일함의 쉬운 표현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정말 우리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아주 간사한 죄악입니다. 성도는 게으름을 버려야 합니다. 레갑인들은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파종을 하게 되면 정착하게 되어 안주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안하겠다고 서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들도 그 땅에서 정착하여 살면 편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삶의 안락을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영원한 것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영원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 세상의 화려한 모든 것을 미련없이 내려놓는 위대한 신앙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말 아까운 것이라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영이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고 싶은 의도를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신앙적인 모습을 극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깝지만 내려놓아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레갑인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단호한 의지와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비참한 일입니다. 절대적으로 우리는 레갑인들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해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믿음의 선한 행실을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레갑인들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3.영원한 천국본향을 사모하는 가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레갑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7절‘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 역시 장막생활을 하며 지상에서 나그네와 순례자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생활은 일시적인 것에 집착해서 영원한 것을 놓치는 일을 미리 막아 주는 것으로, 레갑족속이 이런 훌륭한 가훈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본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레갑인을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장막생활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장막에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정착지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생스러운 장막생활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장막은 요지부동의 거처가 아닙니다. 장막은 유동적인 거처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생활은 무척 불편합니다. 피곤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생활입니다. 누가 그런 생활을 좋아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원합니다. 장막생활은 생활이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생활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주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살고 있는 처소에 대한 미련이나 소유에 집착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곳에 안주할 수도 없습니다. 게으를 수도 없습니다. 항상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라도 어디로든지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망설임이 없이 떠나야 합니다.
장막생활은 나그네 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사명자의 생활과도 같습니다. 나그네와 사명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떠나라면 떠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항상 개나리 봇짐하나만 짊어지고 떠나야 하는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요, 사명자의 인생입니다. 나그네와 사명자는 짐을 많이 가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짐을 다 풀지도 않습니다. 마치 군대의 5분대기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 장막생활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다못해 이사 다니는 것이 싫어서 무리하게 빚을내서라도 집을 사고 장만을 하는 세대가 아닙니까? 장막생활은 그런 생활을 거절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더욱 위대한 생활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두 나라를 동시에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속은 하나님의 나라지만 사는 처소는 세상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나라입니다. 일시적이고 허무적이며 변화무쌍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나라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 속한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으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 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 것으로 인해 영원한 것을 잃어버린다면 세상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맞다 틀리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영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즐겨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들을 존중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네 인생자체가 장막인생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이 땅에서 장막인생을 사셨습니다. 마 8:20절‘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장막 인생을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도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가나안땅에 들어간 후에 장막생활을 했습니다(창12:8). 그의 아들 이삭도 장막생활을 했으며, 야곱도 장막생활을 했습니다(히11:9). 이유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11:10).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적인 결단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레갑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날 갈수록 우리 믿음을 지켜내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우리의 신앙에 도전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들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인들의 신앙적인 삶의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충격과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변질되어 간다할지라도 우리는 레갑인들을 배워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그들의 고고한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들의 성경적 신앙만큼은 절대 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레갑인을 배웁시다.
그럼 이 시대의 유목생활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산업을 버리고 양 치러 가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유목생활은 바로 교회생활입니다. 즉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유목생활입니다. 이 교회생활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면 교회생활 잘 해야 합니다. 교회는 열 두 물 샘과 70주의 종려나무가 있는 사막의 엘림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떠나면 우리 심령이 죽습니다. 교회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결국에는 타락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만 떠나지 않으면 되는 줄 알지만 교회 떠나면 예수님까지 떠나게 됩니다. 교회 멀리하면 그만큼 믿음이 헤이해지거나 자기 주관적이게 됩니다. 정규예배 다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가정예배나 자기 기도시간을 꼭 정해 실천하시기 바랍니다.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은 바로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남은 자는 교회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9-10절 말씀대로 레갑 족속은 선조의 명령을 굳게 붙잡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많은 선지자들에게서 풍부한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 많이 알지 못하지만 아는 대로 철저히 순종하여 나갔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조상에게 듣고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습니다. 그 때 자손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좋지만 한 말씀이라도 목숨 걸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없는데 너무 많이 가르쳐도 귀만 커지면 더 곤란해집니다.
성경에 보면 순종하다가 복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복 받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쳐라 하셨을 때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실 때 순종했더니 두 배에 가득히 잡았습니다. 나아만이 병 고침 받은 것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돌던 것도 그렇고, 가나 혼인집에 하인들이 순종한 것도 그렇고,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다가 눈을 뜬소경들도 그렇고 모두 다 순종하여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기도보다 성경이 앞서야 하고, 실천보다 성경이, 그 무엇보다 성경이 앞서야 합니다. 성경을 봐야 기도도 나오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봐야 이단에 빠지지 않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참된 신앙의 남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레갑 족속이 선조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함과 같이 우리들도 교회생활 잘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죄악을 멀리하고 날마다 성경을 읽어서 레갑 족속과 같이 환난에서 구원 받고 제사장의 복을 받아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시기는 귀한 남은 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4.레갑 족속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조상의 명령을 고지식하게 지켜오는 레갑 자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칭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복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18절‘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많은 사람들이 불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 때에, 레갑 가문의 후손들만은 그 선조들의 명령을 잘 순종했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보실 때 어떻게 평가를 하시겠습니까?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복을 주셨습니다. 19절에‘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부모의 훈계도 거부했던 아들들 때문에 멸망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가 완전히 끊어져버렸습니다(삼상 2:34-36). 그러나 레갑의 후손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쓰시는 사람, 성전 봉사자, 하나님께 순종의 본을 보인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은 믿음생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야말로 믿음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됩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순종을 테스트 하시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음을 보여 줍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보여 줍니다(로마서 5:19).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마26:39절‘내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마28:19-20절‘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지상 명령을 주십니다. 주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한 그의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오늘 날의 교회가 지상에 세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레갑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가문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걸어갔던 길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빈궁하고, 구차하고, 안정되지 못한 생활이었지만, 신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의 가문을 세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물러주겠습니까? 자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신앙의 가문 가운데 태어나셨다면, 그 조상들의 믿음을 더욱더 계승함으로, 큰 축복의 가문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처음 믿는 그런 집안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초대 믿음의 선조로서 훌륭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면, 대대로 여러분의 이름이 해같이 빛나고, 여러분의 자손들은 대대로 축복받는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