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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보현산시루봉~소재~775m봉~갈천재~노귀재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정각리 절골,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이 마을로 가는 길은, 면소
가 있는 화북면 자천리에서 3km쯤 북동진을 하면 35번도로와 8번도로가 엇갈리는 옥계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삼거리에서 황계천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난 8번도로를
따라 시오릿쯤 차를 더 몰면 또다른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이때에는 동쪽으로
향하는 8번도로를 버리고 북쪽으로 치달리는 16번도로를 따라야 한다.이길은 종당에는
보현산 천문대를 막바지로 하는 도로인데 그 도로를 1km쯤 발걸음을 하면 마을입구
(도로 좌측) 삼거리에 다다르게 된다(10시30분).버스에 오른지 3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다.
추적추적 소리없이 내리는 봄비가 오락가락거리는 봄날의 산협은 산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개울물소리와 개짖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올뿐 한적하기만 하다.마을 어귀에는
'보현사'와 '정각사'라고 써 있는 절집이름의 입간판이 서 있으며,버스승강장도 눈에
띤다.'별빛마을 절골'이라고 새겨진 마을빗돌이 우뚝 서 있는 어귀를 지나면 길 한복판
에 범강장달보다 허우대가 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수문장인양 서 있으며, 그 옆에는
팔각정도 한 채 세워져 있다.그리고 팔각정 옆에는 별모양의 대리석 구조물 위에 한
남자 어린이가 큰 별을 하나 머리 위로 들고 서 있는데, 큰 별에는 두 개의 작은 별도
달려 있다.그러한 행색의 금빛의 동상이 빗물에 번질거린다.
절골의 수문장인 500살의 느티나무
나이는 500살이 넘었으며, 키는 30m에 이르고 가슴둘레는 2m라고 신상이 밝혀져 있는
절골의 수문장 느티나무를 뒤로하고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르면 길 좌측
으로 돌거북이 두 개를 거느린 오층석탑을 만나게 된다.그리고 그 맞은 편인 길 우측은
바로 보현사라는 절집이다.절집 마당에는 대리석으로 빚은 배불뚝이 달마상이 연화석
좌대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앉아 있다.그리고 달마상 뒤편의 절간 뒤쪽으로는 석불이
하나 고개를 쳐들고 산객 쪽을 지그시 바라다 보고 있다.보현사를 지나면 정각사 입구를
차례로 지나가게 된다.정각사는 임도에서 우측으로 300m쯤 산기슭을 따라 더 발걸음을
해야 한다.
절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은 사연은 이 골짜기 일대에 누대에 걸쳐 여러 절집이 자리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란에 파괴가 되어 사라진
절집도 있었을 것이고 신도의 발길이 끊겨 자연도태된 절집도 있었을 것이다.그러한
사연이 절절이 서려있는 절골이라면 폐허의 흔적인 주춧돌이나 기와조각,석탑, 그리고
부도 등의 불에 타지 않는 잔해 등이 어디엔가 남아있을 텐데 아직도 발견이 안되서
안뵈는 것인지 찾아볼 마음이 아직까지 없어서 그런지 마을이름다운 구석은 작은 절집
두 군데 뿐으로 초라하기만 하다.다만 기계로 빠른 시일 안에 깎아 세운 것이 아니고
정으로 일일이 쪼아서 빚은 부드러운 질감의 오층석탑과 돌거북은 기단석의 안정감은
기대에 못미치지만 그런대로 체면치레는 한 느낌이다.
절골마을과 절집들을 뒤로하는 임도는 꺼뭇한 물때의 양회임도를 지나서야 본격적인
산길의 양태를 보이며 경사각을 높여 나간다.소리없이 내리는 가는 빗줄기와 엷게
드리운 운무로 산행의 즐거움은 차라리 묻어 두는 게 낫지싶다.가풀막진 오르막 비탈이
매우 미끄럽다.일주일 전의 하산길에서는 흰눈이 두툼하게 내려앉아 있어 내려서기가
매우 미끄러워었는데, 오늘은 거꾸로 오르는 치받잇길은 맨 땅의 미끄러운 오르막이
산객의 애를 태운다.흰눈의 내리받이 미끄러움이 질척이는 맨 땅의 미끄러운 치받잇길
로 거죽의 행색만 바뀐 것이다.헐떡거리며 가파르고 미끄러운 치받잇길을 애면글면
올라서면 완만한 오르막 비탈이 기다린다.
완만한 오르막 비탈에는 굵직한 통나무와 PE로프를 이용한 고정로프가 마련이 되어
있다.조금 전의 가파른 급경사에서나 요긴한 고정로프가 뜬금없이 필요성이 별로 없는
구간에 마련이 되어 있는 거다.산길도 이제 질척거리는 맨 땅이 아니고 돌조각들이 적당
하게 섞여 있어서 걷기에는 더 부드럽고 질퍽거리지는 않는다.데크전망대(산길우측)가
마련이 되어있는 삼거리 갈림길,좌측으로 '정각리 등산로입구(1.5km)'로의 등하행 산길
이 나 있는 갈림길이다.삼거리 갈림길을 뒤로하면 산불감시카메라를 만나게 되고 산불
초소를 잇따라 만난다.
사위는 저물녘의 어둑발이 서려있는 것처럼 어둑신하다.희뿌연 운무 속에 팔각정이
모습을 드러내고 활공장을 가로지르면 곧바로 닿게 되는 해발1124m의 보현산 시루봉
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우람찬 낙동정맥의 등줄기,영천의 최정상인 이
보현산은 남,북천(二水)의 발원지요,13만 영천인의 터전입니다."라고 시루봉 정상빗돌
뒷면에는 그렇게 새겨 놓았다.가는 빗줄기와 사위를 자욱하게 뒤덮은 운무로 시루봉
정상 주변은 헬기장 두 개는 족히 닦아도 될 듯한 멧부리만이 눈에 들어온다.거센 바람은
아니지만 일렁이는 바람을 탄 가는 빗줄기가 산객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시루봉
정상에서 기맥의 방향은 좌측의 11시 방향이다.
시루봉을 뒤로하는 기맥의 산길 우측에는 철망울타리가 쳐 있다.기맥의 산길은 그
울타리를 우측으로 끼고 꼬리를 잇는다.내리막 산길에는 빗물에 젖은 다갈색의 가랑잎
이 수북하다.겨우내 언 땅이 녹아서 비탈길은 미끄럽기만 하다.다행스러운 건 수북하게
내려앉아 있는 가랑잎으로 미끄러움은 반감이 된 느낌이지만 간혹 수북한 가랑잎 밑
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얼음이 숨어 있기도 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탈길에는 드문드문 흰 떡가루덩이를 던져 놓은 것 같은 흰눈이 이따금 눈에 띠기도
한다.법룡사(좌측2.4km)로의 등하행 산길이 나 있는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시루봉을 0.4km쯤 지난 지점이다.
산길 우측으로 함께하던 철망울타리는 이제 둥글둥글한 가시철조망을 늘어 놓으며
영역표시를 이어나간다.둥글둥글한 가시철조망은 머지않아 다시 철망울타리와
번갈아가며 경계근무에 여념이 없다.산길은 완만한 내리받잇길이며 수북한 다갈색의
가랑잎은 물기를 머금어 축축하기만 하다.자욱한 운무 속의 산길은 삼라만상이 모두
착 가라앉아 있는 것 같으며 한적하다못해 으슥하기조차 하다.돌조각들과 빗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가랑잎들이 뒤섞인 비탈길을 따르면 철망울타리 너머 조립식의
초소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철망울타리 사이로 굳게 잠긴 출입문도 보인다.
소재를 통과하는 산객들
둥글둥글 가시철망이 위협하는 산길이 꼬리를 문다.운무 속의 산길은 축축한 빗물을
잔뜩 머금은 다갈색의 가랑잎이며 이제는 상당하게 사위어든 빗줄기가 그나마 위안이
라면 위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벌겋게 녹이 잔뜩 슬어있는 철조망이 시작이 되면서
내려서게 되는 사거리 안부,소재다.다갈색의 가랑잎이 내려앉아 있는 안부의 좌측은
영천시 화북면 법화리 방면이고 우측은 청송군 현서면 갈천리 쪽이다.나이를 꽤나 많이
먹은 참나무들이 줄을 잇는다.우리나라 산지의 수목들중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참나무는 너무 흔하게 접하다보니 실제가치 이하의 푸대접을 받고 있는 나무이다.
이름도 그래서 참나무(眞木)가 아니던가.
소나무,잣나무,편백 등의 상록 침엽수들을 비록 웃질로 대접하지만 이들은 그닥 우리
에게 주는 이로움으로 따진다면 참나무에 못 미친다.도토리를 비롯한 구황식물은 물론
이고 버섯재배 등에도 효용가치가 있으며 숯을 비롯한 땔감의 용도는 타의추종을 불허
한다.소재를 뒤로하고 비탈을 올려치면 푸릇푸릇한 이끼가 더께로 앉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줄을 잇는다.그런 뒤에 오르게 되는 해발775m봉,정수리 한복판에는 널찍한
구덩이가 하나 파여 있는 봉우리인데 구덩이에는 다갈색의 가랑잎만이 가득하다.
이 멧부리에서 기맥의 방향은 우측의 2시 방향이다.
자욱한 운무의 산길은 여전하고 변한 것이라고는 그동안 소리없이 내리던 봄비가
아니던가.접시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붕긋한 멧부리에서 기맥의 산길은 자칫 방향을
놓치기 마련이다.선답자들의 자취가 잦다고는 해도 이렇게 자욱한 운무에 더해서
빗물을 잔뜩 머금은 가랑잎들은 선답자들의 자취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참나무 등의 식솔들만의 붕긋한 해발727m봉을 넘어서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서면
비교적 잘록한 안부가 기다린다.갈천재다.이 안부의 양 측 방면의 산길은 다소 희미
하다.좌측은 영천시 화북면 법화리 쪽이며 우측은 청송군 현서면 갈천리 방면이다.
숲은 비가 내리지 않는 만큼 운무의 농도가 더 짙어진 느낌이다.이럴 때 일수록 기맥의
방향을 놓치기 쉬우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접시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넙데데한
봉우리에서는 더욱 방향을 잃기 쉽다.앞서 간 선답자들이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면 뒤를
쫓아 오는 산객들도 똑같은 행동을 취하게 마련이다.그러므로 앞서 가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그만큼 중요하다.갈천재를 뒤로하고 완만한 비탈을 올려치면 해발670m봉이다.
이 봉우리에는 준희씨의 고도표시팻말이 굵직한 신갈나무에 묶여 있다.삼각점까지
부여받고 있는 670m봉에서 기맥은 좌측의 10시 방향으로 이어진다.
해발670m의 삼각점봉을 뒤로하고 다갈색의 가랑잎이 수북한 산길을 따라 다시 한번
더 올려친,670m봉과 외양이 어상반한 멧부리를 올라서면 산길은 우측의 2시 방향으로
꼬리를 잇는데, 이 해발622m봉에서는 자칫 좌측의 10시 방향으로 발걸음을 하기 쉽다.
미상불 자욱한 운무 속이라면 그럴 위려가 더 높다.내리받잇길이나 치받잇길 모두
완만하고 부드럽기만 하다.그러나 운무 속의 산길의 방향은 으레 세심한 주의가 필요
하다.622봉을 뒤로하면 나이를 많이 먹은 늙은 참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붕긋한
670m봉의 좌측으로 트레버스를 하면 맨 땅이 고스란히 드러난 납작한 봉분의 묵묘의
곁를 지나가게 된다.
자작나무 숲
나이를 꽤 먹은 듯한 굵직한 참나무 거죽에는 검버섯처럼 푸릇푸릇한 얼룩 같은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그런 행색의 늙은 참나무들이 지키고 있는 해발621.4m봉에서 기맥의
산길은 우측의 2시 방향이다.부드럽고 밋밋한 산길 이곳저곳에는 쓰러진 수목들이
간간히 눈에 띤다.간벌목 같기도 하고 자연재해의 폐해로도 느껴지는 밋밋한 숲길을
따라 완만한 비탈을 올려치면 굵직한 몸매의 굴참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띠는 붕긋한
멧부리를 넘어선다.산길 우측으로 광범위한 자작나무 숲이 눈에 들어온다.빗물을 머금은
나목의 꺼뭇한 몸매들의 어둑신한 분위기 일색의 숲에서 끌밋하고 끼끗한 하얀 몸매의
자작나무의 자태는 환상적이고 신비롭기조차 하다.
조금 전의 산길처럼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간벌목들 사이로 꼬리를 잇는 산길을 따르면
붕긋한,접시를 엎어 놓은 것 같은 가랑잎이 수북한 붕긋한 봉우리에 오르게 되는데,
이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600여 미터쯤 기맥에서 떨어져 있는 해발605m의 방각산으로
향하는 산길이 나 있는 삼거리 갈림봉이다.이 갈림봉에서 기맥의 산길은 좌측의 10시
방향으로 꼬리를 잇는다.산길은 다갈색의 가랑잎이 수북하다.언덕 같은 고만고만한
붕긋한 멧부리를 두엇 넘어서면 우측 저만치 산 아래 쪽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의 날머리 노귀재가 턱밑으로 다가와 있다는 신호음이나 다름없다.기맥을 가로
지르는,빗물에 젖어 번질거리는 왕복2차선의 도로(35번)가 넘나드는 고개,청송군 현서면
과 영천시 화북면 사이를 잇는 노귀(奴歸)재이다(13시30분).
노귀재
노귀재 언덕배기 우측의 길 건너 편에는 노귀재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조금 전의
개짖는 소리는 여기에서 들려온 소리다.고개를 넘나드는 차량들은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니 휴게소라고 손님들이 잦을 리가 있겠는가.이 도로가 이렇게 한적하고 쓸쓸하게
변한 이유는 십년 전에 고개 밑으로 노귀재터널이 새로 뚫려버렸기 때문이다.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심심찮던 노귀재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이러한 행색의 노귀재에 대한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적바림 해보면,이 고개는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천면 경계로서
임진왜란 때 침노한 왜구가 이순신 장군의 진을 피하여 내륙으로 진입하면서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고.
병사를 거느린 우두머리가 이 재를 넘으려니까,재가 높고 험준하여 무서워하면서 넘어
가는데, 길손을 만나 "이곳이 어디냐?"하고 물으니,그 길손은 "여기는 청송땅이오"라고
대답하자 왜구의 무리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그 왜구들은
1592년(선조25년)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장군에게 크게 패한 일
때문에 이장군을 매우 무섭게 생각하고 있었는데,이름 중에 '송(松)'자가 청송의'송(松)'
자와 같으므로 이여송 장군을 만날까 두려워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그래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멸시하는 뜻에서의 '종 노(奴)'자와 '돌아갈 귀(歸)'자를 써서 '노귀재'라
불리워졌으며,그로부터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이 재가 재앙을 면하는 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2018,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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