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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국제음악제는 통영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선생을 기리기위해 개최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클래식음악축제로 3.19 부터 시작된다. 또한 2010 통영국제음악제 개막 1주일에 앞서 3.12부터 격식없이 즐기는 프린지(FRINGE)공연도 시작되었다.
통영시는 윤이상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도천동 148번지 주변 공간에 '도천테마공원'을 조성하여 3.19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식에 맞춰 개장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이곳 본관 2층에 `윤이상 기념관'이 마련되어 개장에 대비하고 있는 윤이상 기념관을 미리 가보았다.
어린시절의 음악적 영감
Episode1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려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무말 없이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Episode2
봄이 되어 논에 물을 댈 때면 개구리 천지입니다. 매일 밤 개구리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는데 그게 나에게는 우는 소리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구성된 혼성 합창처럼 들렸습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소리가 거기에 맞춰 화담하고 세마리째가 가세하면 갑자기 고음, 중음, 저음의 합창이 일제히 시작되고 또 갑자기 모두 침묵합니다.
음악적 토양, 통영
윤이상은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긴순달 사이에서 2남3년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영은 풍부한 전통문화로 인해 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이 꿈꾸며 온몸으로 예술의 혼을 호흡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열세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자신이 만든 선율이 동네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관에서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로서의 첫 꿈을 품게 된다.
바이올린은 만든지 2~300년된 바이올린으로 윤이상이 북한에 기증한 것을 이번에 가져왔다고 한다.
음악을 향한 열정과 삶
1935년 아버지의 뜻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음악원에서 첼로, 작곡, 음악이론을 배우게된다. 이때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모여사는 지역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왔다가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한 이케노우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가다
광복후 고향으로 돌아가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민족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었다. 1948년에서 1952년 사이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면 작곡을 하였다.
1953년 서울로 이주, 여러대학에 출강하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55년 피아노 트리오와 현악 4중주 1번으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윤이상은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39세의 나이에 유럽유학을 결심,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예술혼이 담긴 첼로
일제치하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활동은 계속되어 언제나 감시대상이었고 결국 체포명령이 떨어졌는데 이것을 안 지인이 그의 도피를 도와 도망을 하게된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놓지않을 만큼 소중한 첼로는 윤이상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표적인 첼로곡으로는 활주(Glissees), 첼로협주곡(Konzert fur Violoncello und Orchester, 1975/76), 일곱개의 연습곡(Sieben Etuden fur Violoncello solo, 1993) 등이 있다.
동양의 정신을 서양음악에...
1956년 파리음악원에서 수학 후, 1957년에 서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옮겨 보리스 불라허(Boris Blacher), 라인하르트 슈바르츠 쉴링(Reinhard Schwazchilling), 요세프 루퍼(Josef Rufer)를 사사했다.
1959년 네델란드 빌토벤(Bilthoven)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5 Stucke fur Klavier)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Musik fur sieben Instrument)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1964년 부인과 두자녀를 데리고 서베를린에 정착한 윤이상은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om mani padme hum, 1964), 관현악곡 '예악(Reak, 1966)의 연이은 성공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된다.
고난과 역경
유럽에서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힌 윤이상은 냉전시대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윤이상은 1969년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희극 오페라인 '나비의 미망인(die Witwe des Schmetterlinge)'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뉘른베르크 무대에 올려졌고 31회의 커튼콜을 받을 정도로 큰 호평을 받았다.
예술혼으로 승화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 건강이 악화된 윤이상은 병보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상에서 조차 계속 작곡에 몰두 '영상(Image)'과 '율'(Riul)을 완성하였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죄르지 리케티 증 200여명의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탄원서를 내어 구명운동에 힘썼다.
이 흉상은 평양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소장한 흉상을 윤이상평화재단에서 북한 만수대창작사에 의뢰해 제작한 복제품이다. 실물 크기는 가로 54cm, 세로 49cm, 높이 83cm 규모며 무게 85kg의 동(銅)으로 견고하고 육중하게 만들어 졌다.
아직은 미공개상태라 바닥에 놓여있다. 현재 좌대를 제작중이며 정식으로 오픈하면 좌대위에 있는 흉상을 보게된다. 통영시와 윤이상 평화재단은 평양 윤이상 박물관에 전시된 흉상 복제품의 반입을 추진해왔다.
이에 따라 북측으로부터 흉상을 기증받아 작년 6월4일 인천항까지 운반했으나 흉상 도착 직전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정부가 반입을 보류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면서 흉상은 인천항 보세창고에 장기간 보관돼 왔다.
윤이상, 음악을 말하다.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통일을 기다리는 염원으로 가득했다.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한후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완성하게 된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작품을 완성후 윤이상은 이런 설명을 하였다.
"나는 이 교성곡(칸타타)을 1987년 2월과 3월 2개월동안에 완성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민족을 위한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안겨질 곡을 쓰고 싶었다. 이 곡은 나의 양심에서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온곡이다. 이것으로써 '광주여 영원히'와 함께 나는 작곡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중략
음악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승화시키고 남과 북을 이으려고 노력했던 윤이상,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마음은 음악으로 통일을 염원하였으며 화합의 세계로 문을 열었다.
우리 땅은 우리 민족의 주인이다. 우리의 땅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이땅에 사는 민족은 갈라질 수 없다. 우리의 역사가 가르쳐준 쓰라린 교훈은 우리 민족에게 강렬한 자활의식을 심어준 것이다. 단합, 화해, 자주, 평등, 평화 이런 귀중한 요소들이 우리 민족앞에 주어진 지대한 과업이고 목표이며, 그 때문에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라고 호소형으로 표현하였다"
화합의 세계를 열다
그는 언제나 음악을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 정치적 상황속에서 1971년 서독으로 귀화하였으나, 조국통일 범민족 연합(범민련)의 유럽본주의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1987년에는 삼팔선에서 남북합동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정부에 건의하여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분단 45년만에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후, 북한에서는 1982년 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이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다 스러져간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교향시 '화염 속의 천사 및 에필로그(Engel in Flammen, 1994)'를 작곡하였다. 마지막 작품이 된 이 곡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 받아 독일괴테문화원이 수여하는 괴테상을 받았다.
따뜻한 가장 윤이상
1958년 1월 서로 떨어져 있던 유학초기에 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문구와 1967년 6월 독방 수감생활 중 독일에 남겨두고 온 아들, 딸에게 쓴 첫 편지로 사형이 구형된 상황에서 1심공판을 기다리면 쓴 편지문구 등 가족과 교환한 서신이 전시되어 있다.
베를린 자택의 유품
유품인수단이 지난해 10월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 가져 왔던 선생이 사용하던 책상과 문방구, 생전에 연주하던 첼로와 유학 때 사용한 여권, 키홀더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태극기 등 유품 148종 412점이 전시되고 있다.
벽면에 붙은 사진은 윤이상 선생이 갖고 있던 1910년대 통영사진이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그는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가 되었다.
고향의 풍광소리가 그의 음악을 키웠고 많은 영감을 받은 윤이상은 민족음악가로의 위상을 높였으며, 음악을 통해 동서양을 잇고 분단과 삶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가이다.
사신도와 작품 '영상(Images)'
사신도는 고구려시대의 강서대묘 내부에 그려진 수호신들의 벽화이다. 동, 서, 남 북의 벽면에는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은 상상의 동물로서 우주공간을 지키는 신으로 여겨져 왔다.
오래전 부터 기상이 드높았던 민족 역사의 회복을 꿈꾸던 윤이상은 1963년 강서고분 벽화를 실제 답사하게 되었고, 이때 받은 인상을 1968년 플루트(현무), 오보에(청룡), 바이올린(주작), 첼로(백호)를 위한 4중주곡 '영상(Images)'에 담아 서로 어우러지는 통일의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애국자 윤이상
슬픔과 억압이 있는 곳에 음악으로 말하고 싶어했던 윤이상
윤이상 선생의 마지막 육성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의 고국의 형제 자매 여러분 !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
안녕히...."
메모리홀은 음악회, 세미나 등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다. 이곳에서 앞으로 윤이상 아카데미, 클래식 등 학습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라 한다.
메모리홀 뒷편에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의 통영국제음악제 표스터를 전시해 놓았다.
윤이상 기념관은 개관후에도 계속해서 독일에서 유품을 가져다 전시할 예정이라 한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땅에 안긴 윤이상의 얼은 도천테마파크를 통해 윤이상 선생의 체취를 흠뻑 느낄수 있게 될 것 같다.
참고로 2010 통영국제음악제는 3.19부터 3.25일까지 통영시민문화회관, 도천테마파크등에서 열리며 프린지 공연은 3.12부터 시작하여 3.24일 끝난다.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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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이상 선생 기념관이 개관되면
그의 삶의 흔적을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며 그의 음악 세계와 나라 사랑이 재조명 되리라 믿어 집니다.
그동안 체제경쟁의 희생양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재조명되면 선생의 업적이 더 빛나겠지요
완전 감동이네요.
음악을 말하다의 윤이상님이 쓰셨다는 글에 얼마나 가슴 먹먹하든지...
음악은 우주 만물의 소리라고, 그래서 내 개인의 것이라고 할수가 없다라는...
내가 좀더 예민하여 우주의 소리를 들어 전하는 것이라 셨던... 그 마음에...
님의 자세한 설명과 윤이상님을 아끼는 맘이 하나가 되어 감동으로
다가 옵니다.
귀한 글과 꼼꼼히 하나 찍으신 사진... 잘 보구 갑니다.
행복한 저녁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1004님
윤이상 기념관을 통해 그의 업적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네요.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것들을 꼼꼼한 포스팅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통영에서도 뒤를 이어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햇살님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삶을 엿보고 그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전시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래곤님 포스팅 덕분에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