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장 듣는 물소리 -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서평
제가 대학을 다니며 서울에 살 때에는, ‘잠실’이라는 말을 들으면 롯데월드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잠실(蠶室)의 한자를 보면 ‘누에 잠(蠶)’에, ‘집 실(室)’자를 씁니다. 사실 잠실은 조선 태종 때부터 한강변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던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전국에 누에를 치던 시범 단지 6곳이 있었는데, 잠실이 그 중에 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누에를 치기 위해 당연히 뽕나무가 필요했고, 태종 때엔 100만평 이상의 뽕나무밭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뽕나무밭이 즐비하고 양잠이 발달했던 곳이 지금의 서초구에 있는 잠원동입니다. 잠원동 역시 예전에는 잠실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송파구의 잠실과 같은 발음이어서, 나중에 지명을 잠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잠실의 ‘잠’자는 그대로 살리고, 근처에 있는 신원리에서 ‘원’자를 따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모르시겠지만, 지금의 잠원동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 1호로 잠실뽕나무가 있습니다. 과거 뽕나무가 온들판을 뒤덮었던 시기를 지금에라도 어름풋하게나마 증명하려는 것처럼, 고사목 한 그루가 아파트 단지 틈새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는 원철 스님의 신간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를 읽고 종로 옥인동에 있는 수성동 계곡을 찾았습니다. 불교방송 BBS [온전한 나로 살기] 방송 녹화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다시 수도암에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약간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틈을 이용해 서울에 있는 몇몇 절을 참배하거나 소소한 명소들을 한두 군데 둘러보고 갑니다. 마침 스님의 책에서 <물소리를 듣기 위해 수성동을 찾다>라는 글을 인상적으로 보아, 지난 방송 녹화 후,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수성동 계곡을 찾았던 것입니다. 인왕산 아래에 있는 수성동 계곡은 본래 대로라면 청계천의 발원지인 곳이기도 합니다.
수성(水聲)은 말 그대로 ‘물소리’입니다. 누에의 집이 있어서 잠실이고, 계곡에서 물소리가 난다 하여 수성으로 부른 걸 보면, 옛 사람들은 참 단순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지명을 잘 살렸던 듯 합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수성동 계곡에서 비를 맞으면서 폭포를 보았다’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규장각 서리로 근무했던 존재 박윤묵 선생도 큰 비가 내린 뒤에 이곳 수성동 계곡을 찾아서 자신의 감회를 서술하여 남기기도 했습니다. 수성은 말 그대로, 비가 온 뒤에나 계곡의 물이 불어 괄괄거리는 소리를 낼 적에야 비로소 그 이름의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물소리가 잦아들면 다소 아쉬움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이에 ‘수성이란 이름을 통해 찰나 속에서 영겁을 보고자 하는 바람을 알게 모르게 반영한 것이다’라는 원철스님의 글귀에 다소간 생각이 머무르게 됩니다.
추사와 존재 선생 모두 물소리를 듣기 위해 비오는 날 나막신을 신고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옛 사람들은 이 별스럽지 않은 듯 보이는 이 물소리를 듣기 이곳을 찾아온 풍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수성동 계곡을 찾았을 때는 며칠간 날이 화창했던 여름의 초입이었습니다. 방송 녹화나 강연 스케쥴에 맞추어 다닐 뿐이니, 일부러 비 온 뒤에 이곳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청계천의 발원지라 하지만, 땡볕이 계속된 이 여름의 날씨에 물이 많을리 없었고, 때문에 제대로 수성을 감상할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계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작은 도랑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었습니다. 수도암으로 들어올 때 보게되는 무흘계곡보다도 아담해 다소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비가 온 뒤에 이 ‘괄괄괄’ 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이 수성동 계곡을 다시 찾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느 그렇게 계곡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간단한 탐방을 마쳤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오대산과 가야산, 만남과 은둔>이라는 글도 유난히 머리에 들어옵니다.
...풍수가들은 오대산은 육산(肉山)이고 가야산은 골산(骨山)이라 부른다. 오대산은 평평한 흙산이고, 가야산은 바위로 울퉁불퉁하다. 육산은 품이 넉넉하고 골산은 기상이 장대하다. 산이 많은 강원도에도 흙산이 있고, 평야가 많은 경남에도 돌산은 있기 마련이다. 강함 속에는 부드러움이 빛나기 마련이고 부드러움 속에는 강함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두 산이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저는 늘상 절에서 지내면서도 이런 차이를 그다지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오대산 월정사는 제 수도암으로 들어와 지내기 전에 안거를 했던 도량입니다. 그리고 가야한 해인사는 제가 출가를 했고, 또한 노장님을 시자로서 모시며 지냈던 도량입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육산에 사는 사람들과 골산에 사는 사람들의 성품이나 그 절의 분위기가 조금씩 남다름을 이렇게 원철스님의 글을 통해서 깨닫고, 정리해 나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들이 단지 오대산과 가야산 뿐이겠는가요.
원철스님의 산문집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는 당신께서 지난 5년간 탐방한 60여 장소와 함께 이곳과 관련된 1백 여명 인물들의 이야기가 총 62편의 글로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유서 깊은 곳까지 탐방하시면서 이에 관련된 역사적인 고증을 하시면서 인물들을 찾고, 이야기를 모으고, 명문(名文)이나 선시(禪詩)들도 곁들이면서 글의 격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禪) 공부를 하는 탓일 겁니다. 여러 문인들의 글이나 시보다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선사들의 게송이나 이야기에 더 집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게송이나 이야기를 낱낱의 글의 흐름 속에 툭툭 던져놓고, 그 틈을 독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메우고 소화하게끔 하는 스님의 글쓰기 스타일에 여러번 멈추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비록 자신이 사는 곳이라고 해도 관심이 있으면 살펴보겠지만, 반대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움츠러들었지만, 우리가 매년 친숙하게 치러냈던 연등 행렬의 시작점이 탑골공원이었다는 사실, 지금에는 공원으로 유명하지만 선유도 또한 강에 조성된 하나의 섬이라는 사실과 이 섬이 현재의 공원으로 발전한 과정, 물맛 좋기로 유명하다던 충북 보은의 복천암 선원과 관련되어 복정(福井), 도천(盜泉), 탐천(貪泉), 염천(廉泉) 등에 대한 의미 성찰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책을 읽으며 이 여러 장소들을 꼼꼼히 답사하여 단지 사실 기록으로만 남긴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성찰한 원철스님의 안목에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저는 일상대로 관음전에 사시 기도를 하러 나갔습니다. 주차장으로 가는 그 길목에 조그만 개울이 있습니다. 낙가암을 드나들 적에 저는 종종 이 개울의 다리 한 가운데 가만히 쭈그려앉아 물소리를 즐겨 듣습니다. 개인적으로 물소리를 듣기 좋아해서 그 소리를 듣다가 종종 물소리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일정량의 물이 흐르기에 매일같이 만나는 이 조그만 개울이 좋습니다. 비록 소리나 크기가 작을지언정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거나 그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는 그런 맛없는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경북 청송에 물속에서 자란 왕버들 수십 그루가 많은 이들을 불러들이는 저수지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주왕산의 주산지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주 촬영지인 곳이기도 합니다. 설명을 보니 1720년, 이진표 처사의 뜻으로 축조를 하게 되어 무려 3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저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그곳으로 슬쩍 가서 흐르지 않는 저수지 물을 한없이 바라보는, 그 맛없는 재미를 한껏 누리다가 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