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포카레카레 아나(연가 戀歌)
“john. 오클랜드에서 딱 두 시간 거리에, 이런 로토루아 자연 힐링 장이 있는 걸 몰랐어. 창작하는 디자이너에게는 아이디어 충전소인데.
하여튼 고마워. 레드우드에 안내해준 john이.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새 근무처에서 첫 출발이 좋을 것 같아.”
레드우드 삼림욕장을 내려오며 Lynn이 john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여기 따라오기 잘했어. 그동안 오클랜드에서 운전만 하느라 바쁘게 보냈지. 이런 떼어둔 시간을 가끔 갖는다는 게 필요한데도.
민재. 나 역시도 고마움을 느끼지. 이런 좋은 친구가 있어서 기뻐.“
Lynn에 이어 제니까지 민재에게 고맙다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민재가 고마웠다. 레드우드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을 가슴 깊이 마시며 걸었다.
“나야말로 함께하는 Lynn과 제니가 있어서 감사드리지. 남녀노소를 떠나서 마음이 통하면 다 친구 아닌가.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겐 이런 시간이 필요해.
세상엔 물질 부자가 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친구 부자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잖아. 우린 부자야. 레드우드 뿌리처럼 탄탄한 인연이 큰 힘이고.“
민재가 대답하자, 제니가 그 말을 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삶을 직접 자유롭게 운전하지 못하고 얽매여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왜 훌쩍 떠나지 못하지?”
이번에는 Lynn이 제니 말을 받았다.
“일상이 그런 줄 알고 그 자리서 맴돌다 보니까. 멀리 한 번씩 떠나는 자유는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지. 이제부턴 이런 시간을 내야지.”
민재가 차를 폴리네시안 핫 풀장으로 몰았다. 로토루아를 휘감는 유황 특유의 냄새가 다시 코를 찔렀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온천장은 붐볐다.
남녀노소 함께 사용하는 여러 온천탕이 있었다.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은 채 옮겨 다녔다. 미지근한 탕부터 뜨거운 탕으로.
온천수마다 각종 향이 가미된 것도 있었다. 자기 취향에 따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온천욕을 했다.
제니와 린이 여자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온도가 중간인 탕으로 들어갔다. 민재는 온도가 좀 뜨거운 곳 구석에 들어가 몸을 비스듬히 누였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대로가 좋았다. 온몸 깊숙이 온천 기운이 그대로 스며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에서 누가 어깨를 톡톡 쳤다. 제니였다.
린도 제니 옆에서 호호 웃었다. 민재가 눈을 번쩍 떴다. 웬 미녀가 둘씩이나.
“민재. 꽤 고단했나 봐. 운전하고 우리들 신경 쓰느라. 30분쯤 지났어. 온몸이 노곤한데. 몸과 마음이 정말 호사를 누리는 날이야.”
“제니. 정말 좋은 날이지. 린도. 온천 끝나고 맛있는 저녁 먹자고.”
“존. 나 이런 곳 오랜만에 와봐서 쑥스러운데. 정말 좋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두 소녀와 한 소년이 마오리 민속촌 온천탕에서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셋 다 모두 폴리네시안 온천장을 나올 땐, 선남선녀였다.
모텔에 짐을 풀고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러 메뉴가 적힌 차림표를 보고 몇 가지 골라 주문했다. 주메뉴는 치즈가 곁들인 홍합탕이었다.
“우~와! 이 큰 대접에 홍합이 수북하니 엄청 많네. 치즈 소스 곁들여 음식 향도 식욕을 돋우는데. 정말 호강하는 날인데. 민재. 고마워.”
각자 앞에 놓인 홍합 요리 큰 대접을 훈장 받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치즈 소스로 우려낸 홍합 요리가 일품이었다. 린도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삶 터전에서 운동경기 하듯 수고들 많았잖아. 오늘 이 시간, Self Gifting 하는 거야. 지나간 생일 자축도 하고. 스스로들 위로하고 힘내자고.
홍합에는 뉴질랜드산 미션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린대. 한번 마셔보자고.“
민재가 와인을 땄다. 제니와 린 앞에 놓인 우아한 와인 잔에 천천히 따랐다. 민재 잔에는 앞에 앉은 린이 따랐다. 셋이서 즐거운 음성으로 건배를 했다.
“freedom!"
"freedom!"
여행 와서 각자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라 노곤한 탓일까. 홍합 대접에서 알찬 홍합을 건져 맛있게들 먹었다. 땀도 송골송골 이마에 맺혔다.
한 대접 더 시켜 가운데 두고 덜어 먹었다. 와인도 한 병 추가시켰다. 다들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평소 마시는 와인 맛보다 몸에서 잘 받았다.
민재가 홍합 대접을 얼추 다 비운 뒤 무엇이 떠올랐는지, 운을 뗐다.
“에스키모 이야기인데, 그네들은 내면에 참기 힘든 감정이 밀려올 땐 무작정 걷는대. 한없이 걷다가 평안함이 찾아오면 그 지점에 막대기를 꽂아두고 온대.
우리도 오늘 여기까지 와 평안을 찾고 막대기를 꽂고 가는 거지. 인생 뭐 별거겠어? 지금에 살고, 과거에 감사하고, 미래에 희망을 두자고!“
제니가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 송을 했다.
“휴식은 다음을 사는 힘의 원천이지.”
제니가 거기에 마무리 방점을 찍었다.
“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어. 가던 길을 잠깐 멈춰 서서 나를 보면서.”
모텔로 돌아오자 화창한 낮과 달리 밤공기는 꽤 차가웠다. 각자 방으로 가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민재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손으로 만졌다. 방바닥 아래 온천수가 흘러서 옛날 시골 온돌방이 생각났다.
펄펄 끓는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 녹였던 외할머니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낮에 농사일로 지친 몸의 피로를 푼 외할머니처럼 그대로 따라서 누웠다.
“어~ 시원하다. 으이 뜨거워.”
***
다음날도 화창한 날이었다. 간밤을 잘들 쉬었는지 얼굴이 모두 환했다. 여유롭게 아침을 느지막이 먹었다.
로토루아 호수를 들러보며 오클랜드로 향했다. 운전 중인 민재에게 뒤에 앉은 제니가 말했다. 린은 창밖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로토루아에 오면 한국에서 학창 시절 잘 모르고 불렀던 연가라는 노래를 되뇌게 돼. 이 곡이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민요였다니 감회가 새로워.
여기 로토루아가 그 노래의 발상지였다는 게 참 신기해. 그 역사의 현장을 지나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네.“
민재가 운전대를 여유 있게 돌리며 로토루아 호숫가를 따라 돌았다.
“이곳 뉴질랜드 학교에서는 행사 때마다 애국가 부르듯이 이 노래 포카레카레 아나(연가 戀歌)를 부르곤 하잖아.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에 참여한 뉴질랜드 병사를 통해 전해졌지. 서로 대립했던 마오리 두 족장의 아들과 딸이 호수를 헤엄쳐 만난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결국 이들의 눈물겨운 사랑에 감화한 두 부족이 화해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났지. 비극적인 로미오와 줄리엣과 달리 인간적인 훈훈함이 깃들어 있어.“
그때, 민재가 준비한 포카레카레 아나(연가 戀歌) 곡이 스피커로 울려 나왔다.
포카레카레 아나 나와이요 로토루아 위티아루 코헤히요 마리오 안나에 에히네에 호키마이라 기마테아하우이 테아로하에~
`
(바다에 폭풍이 불고 있지만, 그대가 건너갈 때면 바다는 잠잠해질 거예요. 그대여, 내게 다시 돌아오세요. 그대를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린이 반색하며 이 노래를 마오리어로 따라 불렀다. 가락이 낯익었던 터라 민재와 제니가 한국말로 함께 불렀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
“연가를 들으면, 뉴질랜드는 그래도 휴머니즘이 배어있어 마음이 편안해. 극과 극으로 파국을 치닫는 서양 로맨스와는 결이 다르니까.”
민재의 말에 제니와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린이 연관 이야기를 했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은 인간적인 면도 있고, 용맹하기로 유명했어. 결국 영국군이 뉴질랜드를 식민화하면서 협상했지.
그러면서 마오리 원주민 자치권과 땅 소유권을 인정해주기도 했지. 미국과 호주처럼 원주민을 말살시키는 만행은 못 저질렀어.”
민재가 린의 마오리 족에 관한 경험담을 곁들였다.
“택시 운전하면서 택시 요금 떼먹고 도망간 녀석 중에 키위 백인들은 많았지만, 아직 마오리족이 요금 떼먹고 달아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나름 인정해”
***
마오리족 이야기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해밀턴 가든 관광지에 도착했다. 태국 레스토랑에 들러 가볍게 점심을 했다.
치킨 온 더 라이스를 시켰다. 한국식 밥에 간이 잘 배인 닭고기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마지막 코스인 해밀턴 가든에 들어서자 이탈리아, 영국, 아시아 여러 국가별로 테마 공원이 특색 있게 기용을 뽐냈다. 이탈리아 가든을 돌 때였다.
민재가 발걸음을 멈췄다. 휴대폰을 찾는데 안보였다. 식사하고 태국 음식점에 떨어뜨리고 왔나?
제니와 린에게 먼저 천천히 둘러보라고 일렀다. 금세 다녀올 거라며 빠른 걸음으로 태국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숨을 헐떡이며 음식점에 도착했다.
식사했던 자리 소파 구석에 빠져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해밀턴 가든으로 바삐 걸어갔다.
중국, 일본, 인도 가든을 지나 영국 가든 쪽으로 가는데, 멀리서 웬 비명이 울렸다. 제니가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린 목소리도 들렸다..
“어~머~나!”
“우~읍~스!”
민재가 폴짝폴짝 뛰어 소리 나는 쪽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제니가 가든을 내려가다 약간 급경사진 보도블록 턱에 걸려 넘어진 성싶었다. 발을 헛디뎌 그대로 굴러 떨어지며 내 지른 비명이었다.
제니 왼팔 위쪽이 구조물에 걸리면서 타박상을 입어 피가 흘렀다. 뒤따라간 린이 더 놀랬다.
흐르는 피를 지혈시키려고 린이 품에서 엉겁결에 손수건을 꺼냈다. 제니 상처를 닦아주며 피나는 부위를 꼭 눌렀다. 제니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린이 누르고 있던 손수건을 받아 상처 난 곳을 닦아내다, 제니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몸을 뒤척였다.
영문을 모르던 린이 더 놀란 눈으로 움칠했다. 그때 민재가 들이닥쳐 제니 팔을 붙잡았다. 제니가 정색을 하며 민재 팔을 확 뿌리쳤다.
“됐어! 내 몸에 손대지 마! 비키라고! 어서!”
단호한 제니의 앙칼진 목소리에 민재가 엉거주춤 물러나며 다시 상처 부위를 살폈다. 민재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우 입을 열려다 얼어버렸다.
‘아니? 저건 제니 꽃무늬 손수건이잖아!’
정황을 모르던 린이 옆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제니가 일어나 피 묻은 손수건을 바닥에 휙 내 던졌다. 말없이 총총걸음으로 내려갔다.
민재로서는 멘붕 상태였다. 이럴 때 어떡한다?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문을 모른 린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면서 덜덜 떨었다.
민재가 땅에 떨어진 제니 꽃무늬 손수건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멀어져가는 제니를 향해 달려갔다. 린이 멍하니 서 있다가 뒤따라 좇아오며 민재를 불렀다.
“John! 내가 내민 손수건 때문에 그런 거야?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와이카토강을 낀 해밀턴 가든에 웬 날벼락인가? 제니가 와이카토 강변으로 달려갔다. 물속으로 가나 놀랬는데, 강가에 선 버드나무를 안고 흑흑 흐느꼈다.
강바람에 버드나무 가지가 산발한 여인 머리 휘날리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공기를 휘갈겼다.
“솨~솨!” *
15화 끝(5,267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