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5. 완호낙현
조선 화맥 전통 지켜 후대에 전한 ‘名金魚’
근대 불화(佛畵)의 거장(巨匠)들 가운데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부산 영도 복천사에 머물며 불화를 그린 완호낙현(玩虎洛現, 1869~1933) 스님의 행장은 그동안 다른 불모(佛母)에 비해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완호스님은 부산 복천사에서 불화소(佛畵所)를 운영하며 후학을 기르는 한편 불화.불상.조각을 함께한 드문 이력을 갖고 있다. 또한 금어(金魚)임에도 범어사 선원에서 정진한 기록이 확인 되는 등 참선수행을 겸비했다. 복천사 주지 경호스님의 도움말과 관련 자료 등을 참고해 완호스님의 행장을 살펴보았다.
조선 화맥 전통 지켜 후대에 전한 ‘名金魚’
경봉스님 “부처님 수기받은 대불모” 극찬
일제 연호 사용 全無…‘전통 기법’ 고수
<사진> 부산 영도 복천사에 있는 완호스님 진영. 사진이 아니라 세밀한 실로 짠 모직물이다. 사진제공=부산 복천사
○…완호스님은 1920년 동안거 때 범어사 금어선원에 방부 들인 기록이 남아있다. 불모가 선원에서 정진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방함록에 법호는 완호, 법명은 낙현으로 되어 있으며 헌식(獻食) 소임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0년이면 스님의 세� 5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
헌식은 사시예불을 마치고 마지(부처님께 올린 공양)를 모아 아귀(탐욕 때문에 늘 굶주려 있는 중생)에게 주는 소임이다. 이를 시아귀(施餓鬼)라 한다. 당시 범어사 선원에는 성월(性月)스님을 비롯해 눈밝은 납자들이 정진했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펴낸 <근대선원방함록>을 보면 이 무렵 금어선원에서 도명(道明).성능(性能) 스님 등 20여명의 수좌가 정진을 같이했다. 조실은 성월스님. 당대의 선지식으로 완호스님이 화두참구를 통한 수행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경봉(鏡峰)스님은 완호스님에 대해 “완호 불모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대불모”라면서 “선사이며 불보살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불모에게 선사(禪師)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흔치 않은 일로, 완호스님이 수행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명정스님(통도사 극락선원장)이 지은 <삼소굴 소식>에는 완호스님 제자인 월주덕문(月洲德文)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불교미술총본가’ 설립을 상의한 내용의 편지가 들어있다.
완호스님 제자인 월주스님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지도 했는데, 이것은 은사 완호스님의 영향 때문이다. 새벽 예불을 시작으로 도량과 작업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하루도 빠지지 않도록 했으며, 게으름 피우는 제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퇴출시켰다고 한다. 경봉스님의 사형(師兄)인 구하(九河) 스님도 완호스님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하스님 친필인 복천사 현판이 지금도 전해온다.
○…부산 영도 복천사에는 완호스님이 친필로 작성한 <예참문(禮懺文)>과 <일용집(日用集)>이 남아있다. 스님의 체취가 담겨있는 필사본이다. 해서체로 쓰여진 글씨는 엄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재질이 닥종이로 된 이 책은 낱장을 넘길 때 손 닿는 부분이 닳아 없어져 다시 보완한 곳이 많다. 매일 <예참문>과 <일용집>을 읽으며 당신의 수행을 점검했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스님은 불모로서 지켜야 할 계행(戒行)을 철저히 실천했다. “오른팔을 묶고 불화를 그리는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완호스님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조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는 혈안이 돼 있었다. 하지만 스님은 ‘우리 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방법 가운데 하나가 화기(畵記)의 표기에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그들의 연호(年號)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스님이 남긴 작품에는 단 한점도 일본 연호로 표기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유작 60여점은 ‘世尊應化(세존응화)’라 표시했고,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도리사 불화 2점에는 ‘佛紀(불기)’를 사용했다. 문연순씨(동국대 석사)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 시대에 일본인이 선호하던 서양화법을 불화에 적용하지 않았다”면서 “동양화법에 서양화법을 가미한 기형적인 화법이 유행하던 때, 전통기법만을 고수했다”고 완호스님 작품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어 문연순씨는 “화기나 불상의 서명(書名)에는 반드시 ‘세존응화’를 썼다”면서 “항일의지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스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자료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일한 초상화는 사진이 아니라 세밀한 실로 짠 ‘모직물’이다. 사진으로 만난 스님은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고, 두손을 가지런히 한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스님 뒤에는 조선의 풍광을 담은 병풍이 쳐져 있고, 주변에는 화분과 화단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왜식(倭式) 또는 양식(洋式) 복장을 착용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때 흰고무신과 한복 차림은 ‘조선의 혼’을 계승하고자 했던 스님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완호스님이 조성한 복천사 문수보살 사자형 좌대.
○…완호스님은 부산을 비롯해 영남지역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상당한 자료가 사라졌다. 도난된 것도 여럿으로, 현재는 불상과 불화 등을 합쳐 60여점만이 전해올 뿐이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괄호안은 제작 연도. 쌍계사 통영포교당 지장도.신중도.칠성도(1914), 통영 용화사 괘불도(1914), 범어사 안양암 칠성도.독성도(1914), 경주 불국사 신장도(1917).신중도(1930), 통도사 사명암 석가후불도(1917).지장도(1920), 울산 고석사 지장보살좌상(1919), 서울 동명불원 관음보살좌상(1919), 통도사 자장암(1920), 울릉군 대원사(1920), 경주 기림사 독성도.산신도.조왕도.지장보살좌상(1921), 부산 복천사 석가후불도.현왕도.조왕도(1921).보현보살좌상(1922), 범어사 계명암 석가후불도(1927). 이같은 사실을 보면 스님의 활동 영역이 주로 부산과 영남에 집중돼 있었지만, 서울과 울릉도까지 달려가 불화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남긴 불화는 1931년 선산 도리사 석가후불도와 신중도로 지금은 김천 직지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선산 도리사 불화 이후 만든 작품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완호스님 입적을 애도한 운봉스님
“불모되어 무량공덕 이룩”
경허스님 법맥을 이은 혜월스님의 법제자인 운봉(雲峰)스님의 법어집에는 완호스님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실려있다.
<사진> 완호스님이 불화소를 운영했던 복천사 전경.
<운봉선사 법어집>에 실린 ‘吊 玩虎和尙(적 완호화상)’이란 글의 한글 풀이는 다음과 같다. “완호화상의 부고를 받고 아이고, 아이고. 완호스님이여! 애닯고 애닯도다. 칠십 여년을 사바세계에 노니시며 불모가 되시어 무량공덕을 이룩하셨고, 본색을 감추고 세속과 함께 하되 어느곳에서나 걸림이 없었도다. 애닯고 애닯도다! 화상의 최후여 피부가 탈락하니 진체(眞體)가 눈앞에 나타남이라. 돌호랑이가 불 속에서 잠을 자고 진흙소가 바다 위를 달리는구나. 화상은 어디로 돌아가셨나요! 애달프다! 해지는 바닷가의 노을은 곱고 푸른 파도 물결 위의 돛단배 외롭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