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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연구 범위: 요 13:1-20; 요 14:1-3; 단 7:27; 요 14:5-11; 요 1:14; 골 1:16, 17; 요 5:38-40
기억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님은 선생이며 주님으로서 자신을 따라 권위와 능력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분은 길을 따르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죄와 비극이 끝나는 재림의 약속을 주셨다. 그분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 연결 고리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진리이시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모든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크게 서론(요 1:1-18), 표적의 책(요 1:19-12:50), 영광의 책(요 13:1-20:31), 결론(요 21:1-25)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지금까지는 주로 서론과 표적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기적(표적), 대화,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설명했다. 지금부터는 요한복음의 세 번째 부분인 영광의 책을 살펴볼 것이다.
유명한 일곱 개의 "나는 …이다"라는 진술은 흥미롭게도 표적의 책과 영광의 책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생명의 떡"(요 6:35, 41, 48, 51), "세상의 빛"(요 8:12, 요 9:5), "문"(요 10:7, 9), "선한 목자"(요 10:11, 14), "부활이요 생명"(요 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 "참포도나무"(요 15:1, 5)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주 교과는 고별 설교의 목적과 그에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중요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4장에 기록된 "나는 ...이다"(I AM)의 놀라운 선언을 살펴볼 것이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선생이며 주님인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신 것은 권위와 능력은 자신을 높이고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고별 설교(요 13-17)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미래를 향한 교훈이다. 이것은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고별 설교,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는 장면(창 47-49), 다윗이 솔로몬을 훈계하는 장면(대상 28, 29)과 유사한 문학적 구조를 보인다. 예수님은 자신의 작별에 대해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자신을 대신할 대리자를 약속하신다(요 14-16). 그분은 슬픔이 닥칠 것을 말씀하시고(요 15, 16), 제자들에게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신다(요 15).
요한복음 13:1-20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이 이야기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은 어떤 교훈을 가르치려고 하셨는가?
예수님 시대의 그 지역 사람들은 샌들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기에 발은 늘상 먼지로 뒤덮이고 더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식사를 하러 온 사람의 발을 시종이나 노예가 씻어주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체포되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던 날 밤 그곳에는 그 일을 할 종이 없었다.
놀랍게도 예수께서 만찬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제자의 발을 직접 씻어주셨다. 요한복음 13:4, 5은 예수님의 행동을 단계별로 알려 준다. 주님께서 이 믿을 수 없는 겸손의 행동을 하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은 이 장면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베드로의 반응은(요 13:8-11)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의 당혹감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그런 비천한 일을 할 수 있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네가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든 면에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며 온몸을 씻어달라고 했다.
(이어서)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는 그분이 누구이신지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13에서 자신이 선생이며 주시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그렇게 불렀고, 그분도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이 칭호들은 권위와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위와 능력은 자신을 높이고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재림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을 받아들이고, 성만찬을 위한 준비 예식으로 겸손 예식을 실행한다.
<교훈> 선생이며 주님인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신 것은 권위와 능력은 자신을 높이고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묵상> 겸손 예식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다른 이들을 겸손하게 섬기는 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적용> 오늘 내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겸손하게 섬기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권위와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겸비를 실천하신 선생님 - “지상에서의 그분의 사업이 거의 끝나고, 그분의 손에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그분의 머리에 온갖 영광을 쓰시며 자신이 내려오셨던 아버지의 보좌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겸비를 쓰신 그분이 하신 마지막 교훈 가운데 하나는 겸손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약속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이냐에 대해 싸우고 있었을 때, 그분 자신은 종처럼 차리시고 당신을 주님이요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발을 씻기셨다”(교회 증언 4권, 373).
내가 반드시 다시 오리라
두려워하는 제자를 위한 재림의 약속은 죄로 인한 비극이 완전히 끝나는 때이다.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 약속도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있다.
요한복음 14:1-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어떤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3장의 끝에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신다(요 13:33). 이 말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질문한다(요 13:36). 제자들은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요 13:37).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신다(요 13:38).
예수님은 이런 맥락 가운데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1). '근심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타라소'(tarassō)는 ‘동요하다, 방해하다, 불안하게 하다, 혼란에 빠지다’를 뜻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혼란에 빠졌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위해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을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그곳으로 가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가오는 십자가의 폭풍을 넘어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를 가리킨다. 그분은 죄로 인한 이 모든 비극이 단번에 끝날 때를 바라보고 계신다(단 7:27 참조).
예수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 요한복음 14:3은 재림의 약속에 대한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 이 구절에서 '내가 올 것이다'(I will come)의 원문은 헬라어로 현재 시제이다(내가 오고 있다). 이것은 헬라어 문법에서 미래적 현재형을 사용한 것인데 마치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같이 묘사될 만큼 성취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말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어서)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내가 반드시 다시 와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 소망의 근거는 성경 예언의 성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약속을 주신 분, 바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에 우리의 소망은 더욱 확실한 것이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교훈> 두려워하는 제자를 위한 재림의 약속은 죄로 인한 비극이 완전히 끝나는 때이다.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 약속도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있다.
<묵상>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재림이 없다면 예수님의 초림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적용>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예수님의 재림을 나는 얼마나 확실하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활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계 1:7; 살전 4:16; 마 25:31)라 하셨다. 그때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83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갈 길을 묻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 연결 고리이시다. 그분이 없다면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요한복음 14:5, 6을 읽어 보라. 도마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해 어떤 질문을 했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도마의 질문은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면 그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도마의 질문을 뒤집으신다. 무엇을 향한 길인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서문(요 1:1-18)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 1:18은 독생하신(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알게 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알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 엑세게오마이(exēgeomai)로 ‘설명하다, 해석하다, 해설하다’라는 뜻이다. ‘의미를 드러낸다’는 뜻의 exegesis(주해)라는 용어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세상에 아버지를 설명하거나 해석해 주시는 분, 아버지와의 연결 고리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 또는 통로이시다. 그분이 없다면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요한복음 14:7-1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빌립의 오해를 어떻게 해소해 주셨는가?
빌립은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그것은 죄 많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더욱이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다(출 33:17-34:9, 요 1:18). 예수님은 그의 이해의 부족을 타이르시며 당신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다(요 14:9).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신 것이 분명하다. 그분이 없으면 그 길은 어둡고 불확실하다. 그분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비추는 빛이시다.
(이어서)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이라는 세 개의 용어를 하나로 묶으셨다. 길이라는 용어는 이 구절 외에는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것을 말했던 요한복음 1:23에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진리와 생명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이다. 수요일과 목요일 교과에서는 특히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오늘 우리 시대에 더 중요한 주제인 진리의 개념을 확인할 것이다.
<교훈> 갈 길을 묻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 연결 고리이시다. 그분이 없다면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묵상>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최고의 계시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안심이 되고 큰 은혜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적용> 예수님이 아버지를 어떤 분으로 알려주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유일한 길 - “하늘에 가는 데 많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이 자기 나름의 길을 택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첫 복음이 에덴에서 선포된 이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높이 들리신 바 되어 오셨다. …그분은 부조들과 선지자들이 구원을 얻은 그 길이었고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시대의 소망, 663).
나는 진리요
진리는 단순한 사실, 개념, 구조가 아닌 도덕적 측면을 포함한다. 그에게 진리는 인격이며, 그분이 진리라는 것은 모든 것이 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뜻한다.
요한복음 1:14, 17, 요한복음 8:32, 요한복음 14:6, 요한복음 15:26을 읽어 보라. 요한은 진리의 개념을 예수님과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는가?
진리는 계속해서 예수님, 그의 아버지, 성령과 연결된다. 진리는 예수님, 말씀, 그리고 어둠과 대조되는 빛과 연결되어 있다(요 1:1-14, 요 3:19-21). 거짓은 마귀, 죄와 연결되어 있다(요 8:44-46). 따라서 요한복음의 진리는 단순히 정확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찾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을 포함하지만, 이보다 더 나아가 진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신실함이라는 도덕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세상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고자 부르짖는 사람과 그의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적지 않으나 어떠한 훌륭한 철학 이론이나 문학적 작품도 그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주장이나 그들이 지어낸 이론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말하도록 하라. 인간의 전통, 이론, 격언만을 들어온 사람들에게 심령을 새롭게 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라"(실물 교훈, 40).
예수님이 “진리”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로고스(logos) 즉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신 말씀이시다(요 1:1-4). 영원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특성을 가지고 계시며, 따라서 "스스로 있는 자"(I AM)이시다. 그분의 존재는 어떤 존재나, 다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지식도 그러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 창조된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서만 존재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 17).
(이어서) 예수님은 단순히 진리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시다. 진리는 개념이나 구조가 아니다. 진리는 인격이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비추는 태양에 비유할 수 있다(요 8:12). 이는 앞서 인용했던 C. S. 루이스의 말이 잘 설명하고 있다. “내가 태양이 뜬 것을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은, 빛을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빛에 의해 내가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영광의 무게, 홍성사, 2019).
진리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주변 세상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교훈> 진리는 단순한 사실, 개념, 구조가 아닌 도덕적 측면을 포함한다. 그에게 진리는 인격이며, 그분이 진리라는 것은 모든 것이 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뜻한다.
<묵상> 진리가 인격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가 도덕적 측면을 포함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적용> 내가 경험하고 나누는 진리는 도덕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라 - “거룩한 진리의 교사는 자신이 경험을 통하여 배운 것만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씨뿌리는 자는 ‘자기의 씨’를 뿌렸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가르칠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 경험은 모두 그분의 가르침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종들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실물 교훈, 43).
성경과 진리
성경은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빛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알려주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삶의 의미, 미래의 소망을 볼 수 있게 한다.
복음서 전체에서 성경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체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서도 성경은 진리를 나타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에 대해 가르칠 때는 더욱 그렇다.
요한복음 5:38-4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경을 가리켰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6, 47).
누가복음 24:27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먼저 성경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 왜 중요한가?
그리스도께서는 출애굽기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마 22:31, 흠정역)라고 말씀하셨다. 사가랴는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눅 1:70)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어 이야기했다.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성령님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이 성경 기록이 반드시 성취될 필요가 있"(행 1:16, 흠정역)다 라고 말했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기에 원자를 쪼개는 방법이나 뇌 수술을 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한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성경은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빛이다. 그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우주에서의 그분의 역할, 우리 자신의 기원, 인생의 의미, 미래를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 있을 것이다.
<교훈> 성경은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빛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알려주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삶의 의미, 미래의 소망을 볼 수 있게 한다.
<묵상>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 중 과학이 가르쳐 줄 수 없는 진리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적용> 성경이 나에게 가르쳐 준 가장 소중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성경을 통해 배운 중요한 진리를 정리해 보고 그것을 나누십시오.
<영감의 교훈> 구원을 위한 진리 - “귀중한 진리의 보석을 가진 성경은 학자만을 위하여 기록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성령의 도움을 받은 평범한 사람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해석이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와 가장 잘 조화를 이루게 된다. 구원을 위한 위대한 진리들은 대낮과 같이 분명하므로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 자신의 판단을 따르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실수하거나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교회 증언 5권, 331).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예수 안에는 생명이 있으며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다. 영생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의 능력을 뜻한다. 구원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말씀을 시험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을 신뢰하셨다. 말씀을 받지 않는 것이 죄의 시작이므로 우리는 믿음의 기초에서 시작해 지혜와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시대의 소망 51장 "생명의 빛"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초막절 예식의 의미를 잘 말해주는 성전 마당에 계셨다. 이 마당의 중앙에는 큰 등대들을 받쳐 주는 두 개의 높은 기둥이 솟아 있었다. 저녁 제사 후에는 모든 등에 불을 켜서 그 빛으로 온 예루살렘을 비추게 하였다. 이 예식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기둥을 기념하였으며 또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저녁에 불이 켜지면 마당은 크게 기뻐하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예루살렘을 밝게 비추는 일로써 백성들은 당신의 빛을 이스라엘에 비추러 오실 메시아의 강림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그 장면이 더욱 넓은 의미가 있었다. 성전의 밝게 빛나는 등불들이 저희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처럼 영적인 빛의 근원되신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신다. 그러나 이 상징은 불완전하였다. 예수께서 손수 하늘에 두신 저 큰 빛이 그의 영광스러운 사명에 더 가까운 상징이었다.
아침이었다. 해가 막 감람산 위로 떠올라 햇빛이 대리석 궁전에 눈부시게 비취고 성전 벽의 금을 비추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해를 가리키시면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463).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과학을 통해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진리는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 십자가, 부활 그리고 재림 등 우리에게 계시를 통해서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성경의 진리는 어떤 것이 있는가?
2.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많은 이지적 지식을 가진 완전한 존재였던 루시퍼의 타락을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반역했다. 이것은 자유 의지, 곧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실체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우리가 매 순간 그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 예수님은 선생이며 주님으로서 자신을 따라 권위와 능력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분은 길을 따르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죄와 비극이 끝나는 재림의 약속을 주셨다. 그분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 연결 고리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진리이시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모든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