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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네덜란드 편)-
(2010. 2. 26 - 3. 26)
(스키폴공항에서)
홍민아!
지난 2월26일 일본 나릿타 공항에서 너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너는 미국으로 그리고 나와 네 어머니는 네덜란드로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 잠시 멈춰도 좋을 것 같은 시간은
우리의 바람과는 관계없이 벌써 한 달 이상이 지났구나.
홍민아!
미국생활에 적응은 잘하고 있니?
우리는 지난 3월26일 밤 11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함으로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끝내고
그동안 밀렸던 일들을 정리한 뒤에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10년 2월 26일은 우리 가족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휴거(?) 된 날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큰누나는 일 년 전에 네덜란드 지사로 발령을 받아서
우리나라를 떠났고,
둘째누나 역시 지난 해 11월말부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기에 앞서 유럽여행의 전초 기지로
큰누나가 있는 네덜란드로 갔으며,
우리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우리나라를 떠났으니 그 날 이후 약 한달 간은
우리 가족이 아무도 한국에 없었다는 사실에 묘한 생각이 들더구나.
홍민아!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습관처럼 이러저런 걱정과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그것은 ‘이번 여행, 과연 괜찮은 것인가’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산뜻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요즘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에 대한 기대와
또 그로인한 행복한 마음에 도취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우리 가족 역시 그리 만만하지 못한 요즘의 경제 상황들이
오래전 비행기 표를 예매해 놓고도 여행의 출발을 망설이게 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걱정과 상념들이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너도 잘 아는 것처럼 너와 작은 누나가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유럽 배낭여행 그리고 미국어학연수를 계획한 일은
과연 올바른 결정이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저런 우려를 뒤로 하고,
결혼 30주년과 현재의 급식 사업 20주년 기념이라는
아주 실낱 같이 가느다란 명분,
그리고 지금까지 남다른 고생을 아끼지 않은 엄마의 노고를 앞세우고,
우리는 원래 계획한 여행을 떠났고
또 너희들은 너희들이 계획한대로 일을 추진하였다.
홍민아!
지금까지 너와 나는 거의 모든 여행을 함께 했는데,
이번에는 네가 함께 하지를 못해서 몹시 서운했단다.
물론 누나들이 앞장을 서서 우리가 불편함이 없도록 많은 애를
써주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네가 함께 하지 않은 여행이 익숙하지 못한 탓에
너의 부재를 느끼면서 자주 네 생각을 했고,
또 너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쉬워했었다.
그래서 너를 생각하면서 여행 중에 있었던 일들을 써서
세 번에 나누어 보내려고 하니
그동안 우리의 여행을 네가 상상했던 것과 비교해 보려무나.
2월 26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돌아 올 때까지 31일 중에
우리는 영국에서 3일, 벨기에에서 하루,
독일과 스위스에서 8일을 지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들은 네덜란드에서 보냈지.
네덜란드:
인천공항에서 오전8시 비행기로 출발하여
일본 나릿타 공항에는 10시경 도착하였고
다시 11시 암스텔담행 비행기로 환승한 우리는
네덜란드의 스키폴 공항에 네덜란드 시간(우리보다 8시간 늦음)으로
오후 4시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만 14시간 걸렸더구나.
불편한 좌석이었지만 여행에 비교적 익숙한 우리는 비행기에서
두 편의 영화와 독서 그리고 잠을 자면서 지루하지 않게 온듯하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작은 누나와 큰누나가
한 아름의 꽃을 들고 우리를 반겼는데 공항에서 처음 꽃을 받은 나는,
이번 여행도 성공적으로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네델란드 천사들과)
공항에서 지하철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누나가 생활하는 집은
20평정도의 크기였는데 상당히 아늑하고 우리가 여행기간 동안
함께 있기에 넉넉한 넓이였다.
월세가 1050유로, 우리 돈으로 165만원 정도인데
물론 회사에서 부담한다지만 집세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네덜란드의 높은 물가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홍민아!
네덜란드에 갈 때 나의 처음 생각은 지금까지의 해외여행과는 달리
조금 넉넉한 마음으로 단지 외국에서의 생활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로 공원을 산책하거나 시장을 다니면서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또
한가로운 시간 동안에 나의 과거 생활도 반성해 보면서 앞으로의 생활을
설계해 보려고 했는데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180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첫째는 네덜란드의 날씨가 우리를 편안히 공원 산책이나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어서 인지 우리나라보다 더 춥고
또 가랑비가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유럽의 중심에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독일이나 영국 벨기에 스위스 등등의 나라들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정도의 결심만 하면
얼마든지 쉽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지.
그래서 우리는 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는
다음 날부터 네덜란드의 이곳저곳을
(잔세스칸스의 풍차마을)
먼저, 우리나라의 과메기와 비슷한 청어로 유명한
볼렌담이라는 도시를 시작으로
풍차의 도시 잔세스칸스, 치즈로 유명한 에담,
만국평화회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인 헤이그,
엄청난 튜울립의 정원인 쾨켄호프,
그리고 하이넥켄 공장,
뿐만 아니라 안네프랑크의 집과 고호와 고겡 미술관,
그리고 운하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에서 유람선을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고,
또 암스테르담의 인근에 있는
수많은 고성과 성당을 찾아다니는 등
네덜란드에서는 거의 쉬는 날 없이 여행을 했는데
누나를 아는 많은 분들이 우리를 보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고 하더구나.
우리가 방문한 위의 여러 도시들은 저마다의 특색이 있어서 그 분위기와
거기에서 먹은 음식, 만난 사람들,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의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우리가 만난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기도 등등
자세히 기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여행을 다닌 우리와는 달리 네가 지루할 듯하여
네덜란드의 전체적인 모습만 쓰려고 한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아내와 두 딸)
누나의 근무처가 있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다른 도시와는 달리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거의 폭격을 당하지 않아
옛 고성들이 잘 보존된 도시로서
유럽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의 중앙역사는 물론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건물도
현대식 건물이 아닌 오래된 고풍을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사방에 섬과 섬을 연결해 주는 많은 다리와 운하는
이곳이 네덜란드라는 사실,
즉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라는 사실을
한 눈에 느끼도록 해 주었다.
(간단히 기술하는 네델란드의 풍속도)
허름한 차림의 한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길을 지나기에
우리는 그 사람을 거지인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이번에는 멋쟁이 양복차림의 신사도
손에 햄버거를 들고 먹으면서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전철 안에서 과일을 맛있게 먹는
어떤 부인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관심을 갖고 보았더니
우리와는 달리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손가락까지도 쪽쪽 빨아 먹는 그들의 모습도----.
나도 흉내를 내보았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길을 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넘어질 뻔----^^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거의 줄담배를 피우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 사람들은 마치 매일 많은 양의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의무여서
그렇지 않으면
벌금이라도 내야 하는 사람들처럼 담배를 피웠고,
더더욱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할 일은
선진국 국민이라는 이 나라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도 청소부에게 일자리와 일거리를 주기위한
일이라나? 우리의 정서와는 달라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러나 이들은 공공장소,
아니 아주 작은 식당에서 조차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서 피운 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느 장소이든 실내는 공기가 맑았다.
자전거 도로가 넓게 그리고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점과
전차가 도시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다닌다는 사실 이외는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이곳의 교통문화,
그러나 횡단보도가 있음에도 사람들을 이를 거의 무시한 채
무단 횡단을 하지만
버스나 택시는 물론, 정지하기 힘든 전차도 사람이 지나가면
거의 정지를 했는데
마치 모든 차량의 기사들은 일반인들을 어린아이 보듯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넓은 아량을 갖고 대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든 차량의 기사들이 그렇게 품위가 있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우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개를 볼 수 있는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짖는 개를 만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현지인들의 설명에 의하면 주인이 개를 가족의 일원으로서 생각하고
인생의 동반자처럼 대하기 때문에
개들도 사람 대하기를 우리나라처럼 도둑으로 보기 보다는
친구처럼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모습은 스위스에서도 발견했는데 이들 나라에서
짖는 개는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비가 오더라도 우산 쓴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고
간혹 우산을 쓴 사람은 분명 외국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공기가 오염되지 않은 나라에서만 가능한
이 나라 사람들의 오랜 습성인 듯 보였다.
그리고 한 번은 우리나라의 소낙비 같은 장대비가 오는데
이번에는 처마 밑이나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기다리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았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네덜란드에는 물가가 엄청 비싸다.(우리나라와 비교하여 거의 2-3배)
그리고 화장실을 발견하기가 힘들고 그나마 유료화장실
(1회 사용료 800원 정도)이라는 사실과
백인과 흑인 ,유색인 그리고 아랍인들이
거의 같은 비율로 섞여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키가 190cm가 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가 네덜란드 원주민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만나기 힘든 멋있는 남녀는 물론,
보기조차 힘든 뚱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부러운 듯 보거나
혹은 무시하는 듯한 눈길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환경에 충실하면서 삶을 즐기는 모습과
서로의 능력을 존중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150kg이상 되는 여자나 남자들도 은행원으로,
혹은 기차의 역무원으로 그리고 마트의 출납직원으로 일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부와 저력은
이미 17세기부터 조상들이 쌓아온 탄탄한 부(富),
그리고 그 후 이를 바탕으로 하는 금융업과
철저한 신용을 바탕으로 다져온 중개무역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누나 회사의 젊은 지사장님 이야기가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우리나라의 경제와는 너무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러운 마음에 아직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네덜란드 한인교회와 헤이그에서의 이야기는
이번 유럽여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가장 뒷부분에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보여서
세 번째 편지에 보내려고 한다.
(운하를 배경으로)
***추신 : 아무리 바빠도 답 글을 보내지 않으면
더 이상은 “Have no sou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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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길거리에서 걸어가면서 먹는 맛도, 먹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아서 좋을거라는 생각입니다. 어릴적 밥 먹다가 다른 짓하면 혼나기 일쑤였는데. 네덜란드의 잘 닦여진 자전거 도로로 여행해보는 것도 추억에 남을거라는 생각이 들고, 안네의 집도 궁금하군요. 언제부터인가 집떠날려면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드니, 몸도 마음도 늙은이가 된 건 아닌지!
닉네임과 꼭 맞는 삶을 사시는 분 같아요. 여행도 여행이지만 여행하며 아들에게 아버지가 저토록 소상히 편지를 쓴다는 사실이 참 건강한 부자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보기 좋아요. 멋진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