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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에 속한 믿는 이들의 생활 -
이러한 생활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고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개성을 갖고 있다. 그들이 주님을 믿고 거듭날 때부터(영원까지) 이 개성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 안에서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혼에 속한 생활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체험을 이것과 비교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용어로 혼에 속한 생활에서 비교적 현저한 몇 가지 일들을 언급하고, 각기 다른 방면의 체험을 간단히 묘사하고자 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의 한 가지 특징은 바로 호기심이다. 이러한 사람이 성경의 예언을 읽는 목적은 장래 일을 알아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상적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의복이나 말이나 행위에서 그들은 자기의 다른 점과 우월감을 나타내는 태도를 취한다. 많은 일에서 그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을 해내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을 믿기 전부터 이러한 취향을 갖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천연적인 생명을 이기지 못한다. 그들은 깊은 해답을 원하는 영에 속한 믿는 이와 달리 대부분 그들의 체험이 하나님의 교훈과 일치되는가를 추구하지 않고 어떤 이론을 말하기를 좋아하며 생각의 이해를 가장 관심한다. 평상시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그들의 체험이 그들의 이론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理想)과 생각에서 그들이 아직 갖지 못한 영적 체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각으로 이해한 것을 이미 소유한 체험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속이는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가장 큰 과오인 줄 모른다.
혼에 속한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 옳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단지 때로 이 마음이 겉으로 쉽게 표출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사소한 것에 대한 의견을 고집한다. 성경 안에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큰 진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수하지만, 비교적 작은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다. 비록 우리의 믿은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것은 주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사소한 차이점을 접어두고 공통된 큰 것을 추구해야 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의 생각은 대부분 악령의 방해를 받아 그들의 생각이 분란해지고 혼잡해지며(때로는) 더럽혀지기도 한다. 그들은 대화할 때 묻지 않는 것에 답할 뿐 아니라 생각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논조를 자주 바꾸며 생각의 분란함을 나타낸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에도 아무 생각 없이 행한다. 만일 누가 그에게 그의 행위에 대해 사람은 응당 어떻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 그는 사전에 별 깊은 생각 없이 행했으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깊이 상고하고 원칙에 따라 행했는가를 말한다. 때때로 그들도 세 번이고 열 번이고 생각한 후에 행한다. 그러므로 혼에 속한 믿는 이의 행위는 이와 같이 안정되지 않고 들떠있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또한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때때로 그는 매우 흥분하고 즐거워하며 때로는 매우 흥분하고 즐거워하며 때로는 매우 침체되고 근심한다. 기쁠 때 그는 세상이 그를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여겨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 그러나 고통스러울 때 그는 세상의 자기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의 마음은 감정에 의해 작용되어 불이 그의 마음속에서 타는 것 같고 어떤 보배를 얻은 듯 매우 기뻐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불탐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갑자기 무엇을 잃은 자같이 매우 근심하고 답답해한다. 그의 기쁨과 근심은 그의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에게는 변함없는 견고한 생활은 없다. 그의 근심과 기쁨이 그의 생활을 지배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대부분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다. 그들은 외부적인 모든 일이 자신을 향하여 행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일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그는 곧 화를 낸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그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따라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분통하게 여긴다. 그들은 사람들과 가장 친밀할 줄 알고 사람의 인정에 의지해 살며 남과 헤어지기 어려운 상태에 떨어진다. 만일 이러한 관계가 조금이라도 깨진다면 그는 혼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갖게 된다. 그는 이것을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혼에 속한 믿는 이의 약함 - 항상 자신을 중심 삼고 약간 영성의 진보가 있을 때 자신은 이미 남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 을 아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 특별한 은혜를 주시어 그로 초자연적인 체험을 많이 갖게 하시며, 한때 감정을 극히 기쁘게 하고 때로는 주님을 보는 듯 아주 친밀하고 확신이 있으며 무엇을 만지고 느끼는 듯하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이 그분의 은혜를 맛보게 하심으로써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하신다. 그러나 믿는 이는 하나님의 원함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자랑의 자본으로 삼는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은혜를 입은 이유는 자신이 남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감정적인 기쁨과 특별한 체험을 가질 때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이것들을 소유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남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들이 혼에 속했다는 증거인 줄을 모른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감정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때때로 혼적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바깥 세상의 사물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에 의해 마음이 분란해진다. 세상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들이 자주 그들 속 사람을 침입하여 영 안의 평안을 빼앗아간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그를 기쁜 환경에 두면 기뻐할 것이고 슬픈 처지에 두면 근심하며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환경을 창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접하는 사람들에 따라 변하기를 잘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늘 감정적인 생활을 한다. 믿는 이가 아직 영에 속하기 전에 주님은 자주 그에게 감정 안에서 그분이 그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하신다. 그는 이러한 느낌을 가장 좋아한다. 이러한 느낌이 올 때 그는 이제 그가 최고 절정에 이르렀고 자신은 영적인 길에 들어섰으며 그 길에서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주님께서 때때로 그에게 이러한 느낌을 주시지만 그가 아직 온전한 믿음 생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아주 빈번하게 그분의 임재를 느끼게 하시면서 점차로 그가 느낌을 의지하지 않고 믿음을 의지하도록 그를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뜻을 모르고 그러한 일이 생길 때를 영성의 최고 절정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때 가장 저조하다고 생각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의 가장 뚜렷한 표시는 말이 많은 것이다. 그도 말이 적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때때로 감정의 작용으로 쉴 새없이 끝없는 토론을 펼친다. 말에서 그에게 자제력이 아주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입이 열릴 때 그들의 생각은 통제를 잃은 것처럼 보이며 한번 말을 꺼내면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것은 그들의 생각을 거치지 않았고 그들의 말은 마음 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말은 평상시에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들은 말을 길게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화에서 고조되면 수습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말이 많을 때에는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며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은밀히 판단한다. 말이 많다 보면 잘못이 없기가 어렵다. 혹 변론이 나거나 이로 인해 남과의 화목이 깨진다. 혹 남을 비평함으로 사랑을 잃게 되거나 말이 많음으로써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혼적인 믿는 이가 말이 많을 때에는 그의 대화 속에 우발적인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돌변적인 이러한 사상은 그로 하여금 대화 주제를 바꾸게 하거나 말을 더 추가하게 한다.
혼적인 믿는 이는 성도들에게 허탄한 말이 있어서는 안 되고 경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과의 대화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농담 듣기를 좋아한다. 그는 활달하고 활기 있는 대화와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말들을 좋아한다. 농담을 잘하는 것은 혼적인 믿는 이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도 경건치 않은 말을 미워하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감정이 자극될 때 그는 다시 자동적으로 환희의 길로 돌아가 통쾌한 것을 추구한다.
혼에 속한 사람은 '색채 즐기기'를 좋아한다. 그는 심미적(審美的)인 관념을 많이 갖고 있으며 세상의 미술적인 감각을 따라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그는 아직 세상의 미적인 감각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미술가와 예술가와 안목을 가졌다는 것을 자랑한다.
혼적인 믿는 이는 항상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이런 극단에 있지 않으면 다른 극단으로 몰입한다. 그는 아주 미술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감을 조금도 주의하지 않고 헤어진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며 도리어 이것을 주님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청결함(아름다움이 아님)이 믿는 이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임을 모른다.
지식적인 단계에 있는 혼적인 믿는 이는 종종 '명사(名士)' 들을 좋아한다는 표현을 한다. 그들은 흔히 산들바람 불어오는 아침이나 은은한 달밤이면 감상적인 노래 속에 자신의 혼을 쏟아 놓는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화를 내며 자기 자신 신세를 한탄한다. 그러다가 또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제하지 못한다. 그들은 문학을 아주 좋아하고 문학적인 미(美)를 아주 즐긴다. 이들은 또한 서정시를 좋아하고 시를 몇 수 읊으면 세속적인 것을 초원하는 듯인 기분을 갖는다. 그는 세상 일이 그릇됨을 볼 때마다 속세와 격리된 은둔생활을 꿈꾼다. 이러한 생각 중에 그는 자신을 초월하는 고상한 존재로 여긴다. 다른 믿는 이들은 모두 오염되고 세속에 물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믿는 이는 자신을 가장 영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얼마나 혼적인지를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은 혼적인 부류는 가장 완전한 경지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른다! 이러한 부류의 믿는 이는 완전히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의 위험은 바로 자신의 위기를 모르고 자족하고 자만하는 것이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영과 혼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교리를 들은 후에 타고난 두뇌로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쉽다. 그는 다른 사람의 생명 속에서 혼에 속한 많은 부분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의 혼적인 일과 사상을 알아차리지만, 그와 동시에 그 자신이 자기가 정의한 '혼의 사람' 똑같이 혼적인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는 다른 사람을 혼적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은 그보다 조금도 덜 혼적이지도 않다!
혼적인 믿는 이는 거의가 영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는 것만큼의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많으므로 눈으로 정죄하는 것도 많다. 그러므로 남을 비평하는 것이 혼에 속한 믿는 이의 일반적인 성질이 되어 버렸다. 그가 은혜를 입어 지식을 얻지마, 아직 영적인 믿는 이같이 은혜를 입고서 겸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물을 접하거나 사람을 대할 때 뭔가 강팍한 것이 있다.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그에게 어떤 딱딱한 껍질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사람을 접촉하는 중에 다른 이에게 '차갑고 냉랭한 인상' 을 준다. 그는 밖의 껍질이 파쇄된 영적인 믿는 이같이 사람들에게 친밀감과 온화감을 주지 못한다.
혼적인 믿는 이는 아무리 입으로는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도 여전히 '자아'를 중심으로 삼는다. 그가 자신을 선하다 하든 악하다 하든 그의 생각은 자기 자신을 떠날 수 없다. 그는 아직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혼적인 믿는 이는 매우 교만하다. 그의 생각 속에는 자기 중심적인 충만하기 때문에 교만을 피할 수 없다. 그가 제일 마음 아파하는 것은 - 일에서나 남과의 대화에서나 - 다른 사람에 의해 한쪽에 제쳐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오해하고 그의 단점을 말하는 것을 그는 제일 견디지 못한다. 그는 아직 칭찬이든 반대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안배하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더 영적인 형제들괖 같지 않다. 그는 남에게 멸시받기를 싫어하고 자신의 비천함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 혹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자기의 천연적인 생명의 참된 상태와 자신의 부패함을 봄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람인 것을 보고나서는 자신이 남보다 더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겸손을 자랑한다! 교만이 늘 그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 혼적인 믿는 이들의 일 -
혼적인 믿는 이는 일에 있어서 남보다 뒤쳐지지 않는다. 그는 가장 활동적이고 열성적이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열성을 좇아 임의로 행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일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모른다. 그에게는 의뢰하는 마음이 없고 조용한 때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할 의사가 없다. 그는 다만 자기의 뜻대로 일하고 머릿속에 계획과 묘책이 많다. 그는 이렇게 수고하기 때문에 게으른 다른 형제들보다 더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면 열성적인 믿는 이(곧 그들 자신)보다 더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혼적인 믿는 이의 일은 거의가 감각에 표준을 두고 있다. 그는 마음이 기쁠때에는 일을 하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완전히 일을 멈추어 버린다. 그의 마음이 불타고 즐거움과 말할 수 없는 느낌이 있을 때는 계속 몇 시간씩 말을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고 사람들에게 간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없고 마음속이 냉랭하고 흥분될 만한 것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큰 필요가 있는데도 대충 몇 마디를 하고 끝낸다. 어떤 때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느낌이 있을 때는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느낌을 이기지 못한다. 배고픈 상태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지 못하고, 눈이 피곤한 상태에서 니고데모를 대하지도 못한다.
혼적인 믿는 이는 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들은 영적인 믿는 이와 같이 영 안의 고요함과 분요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분부하심을 이루지 워진다. 그의 마음은 밖의 일들의 다스림아래 있다. '섬기는 일이 많은 반면에 마음속에 분란함도 많은 ' 이것이 바로 혼적인 믿는 이의 일의 특징이다.
혼적인 믿는 이는 일할 때에 쉽게 낙심을 잘 한다. 이들에게는 안정된 믿음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믿음의 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의 감정과 외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가 실패했다고 느낄 때 - 사실은 그렇지 않음 - 실망한다. 혹 외부 환경이 어두운 것을 발견할 때는 낙담한다. 그에게는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 없다.
혼적인 믿는 이는 원시적(遠視的)인 안목이 없기 때문에 낙심한다. 그가 보는 것은 눈 앞의 일들이다. 현재의 승리가 그를 기쁘게 하고 현재의 실패가 그를 실망케 한다. 그는 아직 믿음으로 한 가지 일의 결과를 보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다만 자기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현재의 승리를 얻으려고 한다. 이것이 없다면 그는 흑암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피곤하여 전진하지 못한다.
혼적인 믿는 이가 남의 단점을 찾아내지만 자기는 남보다 강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남의 일을 아주 잘 비평하지만 남을 용서해주는 마음은 너무적다. 그가 남의 단점을 지적하거나 시정할 때에는 늘 자기 만족과 우월감으로 충만하다. 비록 때로 그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합법적이기도 하지만 그 동기에 정당하지 못한 점들이 있다.
혼적인 믿는 이는 늘 성급하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다릴 줄을 모른다. 일을 할 때 그는 항상 조급하고 분주하며 남을 제촉한다. 하나님의 일에서도 열심에 밀려 하나님이 분명한 지시와 인도와 길을 기다리지 못한다.
혼적인 믿는 이의 생각은 온전히 자기 일로 충만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계산하고 계획하고 예측한다. 그의 생각은 그의 일에 대한 상상과 승패의 여부, 다른 상황들로 가득하다. 어떤 때에는 장래에 자기 일이 어느 단계에까지 이를 것인가를 예측한다. 그러다가 밝은 미래를 생각할때는 그 기쁨을 금할줄 모르고 어두운 내일을 생각할 때에는 갖가지 근심에 쫓긴다. 그래서 잠자는 것과 먹는 것까지도 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의 생각은 완전히 자신이 일로 점유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주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많은 때 그렇지 않다. 그는 주님보다 자기 일을 가장 생각한다. 그는 주님의 일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게 일을 주신 주님을 잊어버린다. 주님의 일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버리고, 일하시는 주님은 오히려 이차적인 위치에 두어진다.
혼적인 믿는 이에게 참된 영적인 시야가 없는데다가 그의 행동이 무의식 중의 '돌발적인' 생각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의 사역에는 많은 부적절한 말들이 있다. 그의 말은 사람의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 그는 남에게 그러한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지로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말로 남을 도와준다. 사람에게 동정이 필요할 때에 도리어 책망하고 사람에게 책망이 필요할 때에 오히려 위로를 준다. 이것은 그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그가 자기의 제한된 생각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이미 그가 무용지물임을 증명해 주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혼적인 믿는 이는 계산이 많고 의견도 많기 때문에 남과 동역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한 것을 인정하기 바란다. 그가 다른 사람과 동역하는 조건은 다른 사람이 그와 완전히 똑같은 의견을 갖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주 작은 견해조차도 남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깊고 놀라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다른 의견을 갖고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에게 의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기 의견은 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종파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어떤 것이 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가 믿지 않는 것은 다 이단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이 혼에 속한 사람 또한 그의 신앙을 거절한다. 이뿐 아니라 그의 일에서는 감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작은 단체 - 소위 작은 동그라미 - 를 갖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동역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서 자신의 감정을 따라 남과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혼적인 믿는 이는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비유나 해석이나 묘한 설명 곧 자기의 감화력을 의지한다. 혹 한두 저명한 사람은 자기가 말할 때 사람들이 듣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의지한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철저히 준비한 것을 의뢰한다. 기도 시간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과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시간은 메시지의 단락을 나누고 자료를 수집하며 자세히 상고하는 시간보다 많지 않다. 이들은 모든 말씀을 기억속에 담고 있기 때문에 전파할 때 다만 그것을 외운다. 이러한 일에서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말씀의 전파에서 주님을 붙들기보다 교리를 붙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믿는 이는 자기가 전파한 것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뿐 성령께서 계시해 주신 사람의 필요와 주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가 주의하고 믿는 것은 자기가 전파한 그것이다. 그것이 전적으로 진리이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배후에서 살리시지 않는 진리는 무용하다. 성령을 의미하지 않고 말씀만 의지하는 사역은 별로 영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고 받아들일지라도 전파된 그것은 사람의 생각에 미칠 뿐이다.
혼적인 믿는 이는 그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전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참으로 영적인 믿는 이가 주님께서 주신 많은 체험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극히 분명하게 분석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이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일 수 있다. 혼적인 믿는 이는 모방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 점에서 남을 모방하려고 한다. 그는 어떤 말씀만이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할 때 그는 오묘한 상상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길을 갈 때나 대화 속에서나 음식을 먹을 때나 잠잘 때에도 어떤 놀라운 영감이 생기면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노트에 적어 둔다. 그러나 그는 그가 얻은 사상이 성령께서 영 안에서 계시해 주신 것인지, 자기가 체험한 것인지, 아니면 생각 속에서 일어난 돌연한 사상인지를 묻지 않는다.
혼적인 믿는 이 중에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남을 도와주는 일에서 어떻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할지를 모른다. 이것은 그에게 지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지식은 엄청나게 많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거나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알려 줄 때 그 자신이 노숙한 믿는 이의 양 그를 도우려고 하고, 그의 제한된 안목과 다른 노련한 믿는 이로부터 배운 판단력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고생의 체험을 강물같이 쏟아 붓는다. 혼적인 믿는 이는 항상 자기가 아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사람을 도와준다. 어떤 때는 자기의 지식을 넘어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가상적인 것을 말해 낸다. 또한 남을 도와줄 때 그는 자기 생각 속에 축척해 놓은 것을 쏟아내고 하나하나 진열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말이 상대방의 병세에 알맞은가를 묻지 않는다. 상대방의 필요가 어떤 것인지, 상대방이 그 말을 받을 수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는 히스기야와 같이 창고를 열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어떤 때는 남의 일로 변론이 일어난다. 이들은 일시적인 감정의 자극으로 많은 영적인 교리를 부어내는데 그중 많은 것들은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때에 이러한 행위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잠잠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바로 코 앞에 있는 큰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돕는 말을 해야 하는데도 그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 그는 천연적인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때문에 위축되어 자유함이 없다. 그가 말 많은 믿는 이 곁에 앉아서 심중에 비판할 줄 아나, 이렇게 말이 적은 것도 그를 다른 사람보다 덜 혼적이게 하지 않는다.
혼적인 믿는 이는 아직 하나님 앞에서 뿌리를 깊이 박지 않았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드러낸다. 영적인 일을 할 때 조차도 나타나는 위치에 서기를 좋아한다. 어떤 지방에가서 집회할 때에도 그가 바라는 것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을 때 그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른다.
혼적인 믿는 이는 영적인 용어를 배우고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어떤 용어와 문구와 특별한 어투를 배우기를 좋아한다. 적절한 기회가 오면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활용한다. 주님의 일을 할 때 그는 영적인 말을 설교 자료로 삼는다. 그러나 설교를 할 때 그의 마음은 전혀 전파한 것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도할 때에도 그렇다.
혼적인 믿는 항상 속에서 야망이 끓어오르고 남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주님의 일에서 그의 허영심 또한 상당히 짙다. 그는 유력한 사역자와 주님에 의해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사모한다. 무엇 때문인가? 자신에게 약간의 지위 - 영광 - 를 돌리기 위해서이다. 그는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비교하는 행동이 좀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와 비슷하고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이러한 비교와 보이지 않는 경쟁이 매우 심하다. 그는 자기 뒤에 있는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보다 영성이 높고 깊은 사람에 대하여는 자기가 그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기를 사모한다. 그는 자기의 일이 발전하고 흥왕해야만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남들은 모르고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다. 물론 때때로 이러한 뜻들은 더 순결한 뜻 속에 섞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뜻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혼적인 믿는 이는 가장 자만하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그를 통해 한 사람을 구원하시면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가 한 번 성공하면 그는 우쭐대면서 자기가 영적 세계에서 아주 높고 깊은 위치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혼적인 믿는 이의 가장 보편적인 표시는 그릇이 쉽게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 지를 관찰해 보지 않는다. 자기 물통 속에 물이 있기만 하면 자만해진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모든 일이 임할 때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보잘것 없는 자신을 주의하기 때문에 작은 득실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분량이 하나님께서 그를 더 크게 사용하지 못하시는 이유이다. 만일 그가 열 사람을 구원했다고 기뻐하면서 지나치게 자신을 자랑한다면, 천 명을 구원했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혼적인 그리스도인은 전도의 일이 성공하면 자신이 아주 놀랍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남보다 뛰어난 부분을 자랑하고 스스로 즐거워하며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가장 큰 사도보다 더욱 크다' 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놀랍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 마음에 괴로워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이렇게 대우해 주는 것은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나사렛의 선지자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는 자기가 전한 메시지 중에서 어떠한 의미는 전에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청중이 자기가 놀랍다고 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일을 마치고서 그는 하루 이틀간 자만자족하거나 몇 시간이라도 스스로 만족감에 취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머지않아 그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위대한 전도사나 대 부흥강사나 위대한 저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는 얼마나 괴로워하겠는가?
혼적인 믿는 이는 원칙이 없는 믿는 이이다. 그의 언행은 일정한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의 생활은 감정과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는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한 행위는 평상시 행함과 크게 다르다. 일을 마친 후보다 혼적인 믿는 이의 변화를 더 쉽게 볼 수 있는 때가 없다. 만일 그가 어떤 교리를 전했다면, 그것을 전한 후에 그는 마치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이 생각한다. 만일 그가 인내에 관한 교리를 전했다면, 그것을 전한 후에 하루 이틀 동안은 자신이 잘 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미할 것을 권했다면, 권한 후에 자신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감정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이 자기의 말에 자극되어 그러한 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감정이 지나가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혼 적인 믿는 이의 한 가지 특별한 점은 그의 은사가 많다는 것이다. 죄에 묶인 믿는 이는 은사가 그리 많지 않고 영적인 믿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혼적인 믿는 이에게 남보다 은사를 많이 주신 목적은 그가 능동적으로 믿는 모든 은사를 죽음에 넘기고 부활 안에서 다시 새롭게 더 영광스러운 것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믿는 이는 은사를 죽음에 넘기는 것은 아까워하고 그것을 힘껏 활용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혼적인 믿는 이는 은사가 자기의 것이나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의지하지 않고 그를 사용하시게 하지도 않으며 자기 뜻대로 행동한다. 또한 성공할 때에는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다. 이렇게 자기에게 영광을 돌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은밀히 진행된다. 그가 아무리 겸손하게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도 자아를 중심 삼는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나 하나님에다 자기 자신을 추구시킨다.
그에게 은사가 많고 그의 사상도 좋기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며 사람의 마음에 쉽게 자극을 준다. 그러므로 혼적인 믿는 이는 매우 매혹적이다. 주님의 일을 할 때 그는 일반 믿는 이들의 환영을 받는다. 그는 실제에 있어서는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고 생수의 강같이 흐르는 성령의 능력이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 국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본 것들은 그가 '소유한 것'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있는 이것은' 그에게만 머물고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지 못한다. 겉으로 볼 때 그는 매우 풍성한 사람 같다. 그러나 사실상 가장 메마른 사람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마디를 추가하겠다. 즉 반드시 믿는 이가 죄의 억압에서 온전히 벗어나고 혼적인 믿는 이가 되어야만 이상의 체험을 갖는 것이 아니다. 믿는 이의 실지 체험에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한 면으로는 자기를 삶으로써 혼의 영향을 받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혼적인 믿는 이와 육신에 속한 믿는 이는 모두 '육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들은 죄를 범하다가 자아를 좇고 욱신에 속하다가 혼에 속하기도 한다. 정말 적지 않은 믿는 이들이 이렇다. 믿는 이가 죄를 범하면서 혼에 속할 수 있듯이 그도 또한 혼에 속하면서 영적인 체험을 가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믿는 이의 체험은 가장 복잡하다 - 이것은 세밀한 점을 말하는 것인데 전체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비천한 것들로부터 해방되었는가를 자문해보는 것이다. 만일 해방받지 않았다면 이는 우리가 여전히 비천한 것에 속해 있다는 증거이다. 영의 체험이 있다고 해서 신령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죄와 자아에 체험이 없을 때 비로소 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혼의 놀라운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적지 않은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또한 그는 영에 대한 많은 체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물론 한 영역에서 나와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