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천수경』⑭
지혜-실천 통한 해탈방법론 제시
내 얼굴은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잘 보인다. 그런 것처럼 부처님 가르침 역시 다른 종교·철학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닐까. 힌두교의 성서,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라고 하는 텍스트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늘 『천수경』과 함께 내 사색의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힌두교 신앙과 유사
■ 힌두교 역시 해탈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탈을 이루기 위한 길은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 첫째, 스스로 완전자임을 깨달음으로 인하여 해탈을 이루는 방법이 있다. 이를 지혜의 길(갸냐 요가)이라고 하는데, “내가 곧 브라만이라” 말하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내가 곧 부처라”고 말하는 선불교는 공히 이 범주에 해당된다. 이를 위해서는 명상이 강조되는데,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이 제시된다.
■ “세상 속에서 좋은 일을 함으로써 해탈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문제제기이다. 그렇다. 세상 속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행함으로써 해탈할 수도 있다는 관점이 등장하는데, 이를 행위의 길(카르마 요가)이라 부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방법론이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우파니샤드로부터 이어받은 지혜의 길은 물론이지만, 새롭게 행위의 길을 강조한다. 행위의 길은 그 이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던 분야이다. 보살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는 대개 이 행위의 길을 통해서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지혜의 길과 행위의 길은 우리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의 해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취하는 해탈방법론은 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자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제3의 믿음의 길(박티 요가)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나 불교의 정토신앙 역시 물론, 이 차원에서도 여전히 자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이 박티라고 하는 믿음의 특성이다. 그러니까, 자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일본의 신란(親鸞)의 믿음은 박티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어떤 종교이든지 이러한 세 가지 패러다임의 해탈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이들 세 가지를 함께 설하는 회통의 텍스트이다.
그렇다면 『천수경』 역시 회통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들 세 가지 해탈론을 다 역설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 지혜의 길은 존재한다. 『천수경』의 다라니가 선적(禪的)인 차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행위의 길 역시 존재한다. 관세음보살이 갖고 있는 자비실천의 높은 뜻을 생각하면 그렇다. 이는 『백화도량발원문』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믿음보다는 실천 강조
문제는 믿음의 길과 관련해서이다. 과연,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함으로써 해탈하라 말하는 것일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범본으로 환원한 뒤 다시 그것으로부터 우리말로 옮겨보면, 그 안에는 힌두교 신의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 말해지는 비쉬누신 역시 등장한다. 파괴의 신 시바신에 대한 신앙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증거로 『천수경』의 관세음보살 신앙이 믿음의 길의 입장에서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라니 외의 산문 부분에서 그러한 성격을 탈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 신앙이 아니라 다라니 독송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유신론적 성격은 감추게 되었다.
이 점이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와 『천수경』의 차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차 논문으로 꾸미면서 좀더 상세한 천착이 이루어져야 할 과제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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