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5> 이병욱
“너와 나를 하나로 인식할 때 깨달음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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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관계에 있다. 이를 철저히 인식한다면 대립과 분별을 극복하고 너와 나를 ‘하나’로 알게 된다. 사진은 자타불이(自他不二)를 가르친 〈유마경〉의 무대 바이샬리의 유적. |
몇년 전 사찰의 청년회 사람 몇 명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른바 ‘불교 과외교사’가 된 셈이다. 나도 재가불자이지만, 우리나라 재가불자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나의 수업을 들었던 사람 중에 불교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 들어 늦게 불교를 만났으니 이제라도 열심히 불교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론공부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무척 회의적이었다. 선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수행이 잘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무척 조바심을 내었다.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해 불교가 없어질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이 조바심을 내는 모습에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겹쳐졌다. 내 주위에 수행공동체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서 느낀 점은 세간에서 못다 이룬 꿈을 깨달음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집념이었다. 돈도 좋고 권력도 좋고 명예도 좋은데, 이런 게 현재 삶의 현장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것이었기에 대신 만만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당분간 세간의 즐거움을 유보하지만, 그것은 고시 합격하는 그 날에 더 많은 것을 가질 것이라는 희망에서 나온 것처럼, 이 사람도 불교의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아닌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세간의 일은 세간의 논리로 해결해야지, 불교를 통해서 일괄 타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불교공부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내가 부딪쳤던 현실은 불교공부를 좀 한다는 재가불자의 교만심이었다. 불교는 자력종교이므로 이는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이게 말은 좋은데,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 중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교만심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다. 세상일은 균형잡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타력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은 수행의 논리를 무시하고 절대자의 은총에 매달리는 경향이 강하고, 그에 반해 이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너무도 잘났다는 생각이 충만하다. 하기야 잘났으니까 불교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는 것이겠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 수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깨달음 얻기위해 고시공부하듯 조바심내면 수행에 방해
특정 수행만 고집할 필요없어…근기따라 다양한 길 선택
불교 과외선생이 되어 보고서 느낀 점은, 깨달음에 대한 조바심과 교만심을 넘어서야 일단 초보자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하긴 나의 삶에서도 이 두 가지 모습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공부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때, 다시 말해 불교공부를 통해서 어느 정도 편안한 심정을 맛보게 되었을 때, 이 두 가지 단점을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단순하고 쉬운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무척 어려운 법이다. 나는 철학이 전공이라고 하면서 철학을 가르치는데, 그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든다. 한번도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작은 단위를 공부하였을 뿐, 큰 단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철학을 가르치느냐고 핀잔을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점은 불교의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자기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불교라는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이미 상식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오히려 소홀히 하는 게 우리네 일상의 모습 아닌가?
이제 너무도 친숙한 개념인 깨달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면 초기불교의 정의가 간결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용이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처님은 열반에 대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진 상태라고 하였는데, 이게 깨달음에 대한 일반적 설명이 아닐까 한다. 이것에서 좀더 나아가면 주관과 객관의 일치, 또는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니라는 체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범부가 대상을 보고 욕심을 내고 화를 내고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은 대상이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가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세계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관이 존재한다는 관념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면 이러한 인식구조는 전환된다.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주관인 내가 둘이 아니라는 체험은 더 이상 욕심낼 것도 화를 낼 것도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장난감과 딱지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아이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면 그 어린아이는 세상을 모두 잃은 듯한 고통과 절망을 느끼겠지만, 나이가 들어 좀더 넓은 세상을 맛본다면, 이제 장난감과 딱지를 거저 준다고 해도 웃으면서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깨달음도 인간을 이렇게 성숙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깨달음의 체험을 하면, 그전에 목숨 걸고 추구했던 대상과 가치를 통째로 얻게 되어도 미련 없이 양보하고, 이제는 이런 것이 필요 없다는 ‘무소유의 정신’을 생생하게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중국불교에 들어가면,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더욱 골치 아프게 전개된다. 화엄종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니라는 체험의 연장선에 있다. 주관과 객관의 세계가 있는 곳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님을 분명히 체험한 사람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울타리를 훌쩍 넘을 수 있다. 이 울타리를 넘은 경지에 대해 ‘일즉일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흔히 쓰는 말에 우주에서 가장 크다는 수미산이 가장 작은 겨자씨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겠는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상식에 맞지 않은 일을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은 바로 공간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범부를 옥죄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의 체험,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발붙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깨달음에 대한 대승불교의 정의보다는 초기불교의 표현이 우리에게 더 살갑게 다가올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에 대해 다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세간을 떠나서 참선공부를 하는 것이 불교공부의 왕도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는데, 불교공부에는 보다 다양한 길이 있다. 산을 올라가는 데 한 가지 등산로만 있는 게 아니다. 여러 길이 있을 수 있고, 좀 돌아가면 어떻겠는가? 시간은 많고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도 필요한 법이다.
젊은 사람에게 불교철학을 강의할 때마다 부딪치는 곤란한 점은 불교의 분위기가 가을 같다는 점이다. 낙엽이 지고 황혼이 깔린 무렵에 벤치에 앉아서 인생을 관조하는 느낌이 강하다. 왜 불교에는 봄의 기상과도 같이 푸릇푸릇함이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 나의 의구심이었다. 이는 4여의족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4여의족’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추구하라는 가르침이다. 하겠다는 것도 멍석을 깔아주면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무엇을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간절히 바라는 건 아닌 것 같다. 당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추구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초기불교에서는 추구하는 것이 있으면 정말로 간절히 밀어붙이고, 그러할 때 집착의 마음이 지혜로 전환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이제까지 전통불교에서 강조되지 않은 부분이다.
한편, 사회적 봉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길도 있다. 그것은 4무량심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4무량심은 사랑하는 마음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봉사를 하고, 이 봉사의 마음이 결국 지혜로 이어진다는 것이 4무량심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수행의 길은 결코 한 가지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병욱/ 고려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53호/ 8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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