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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2편 1-8절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본 시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6편에서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로 되어 있는데, ‘여덟째 줄’에 대하여 어떤 분들은 여덟 현을 가진 수금, 즉 악기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곡조(가락)에 대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미 구약에서부터 시편이 하나님 앞에서 노래로서 불리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통해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엡5:19, 골3:16).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서 시편을 노래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종교개혁 시대의 산물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잠시 불렀던 찬송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반드시 불러야 할 찬송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처럼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 말씀보다 더 합당하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진심을 다한다 할지라도 그런 진심이 진리 위에 설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할지라도 그의 말씀 위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 1절을 보시면 다윗이 이렇게 간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여기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경건치 못한 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고 충실하지 못한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말했던 것처럼(창6:5) 악인이 세상에 편만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끊어진다, 인생 중에 없어진다는 표현은 모든 인생 중에서 경건한 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충실한 자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더욱 드러내고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질 때 바로 그들을 끊고 없애는 자들 편에서는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경건한 자 그리고 충실한 자들 쪽에서는 오히려 저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한 예로 창세기에 보면 의인 열 명이 없어 심판을 당했던 소돔에 관한 기록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의인만 있으면 심판 받지 않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해 줄 수는 없지만, 의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이고 그런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가 끊어지는 것,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는 것에 대하여,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자들의 경우 마치 그들 스스로가 어떤 힘을 가지게 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는지 몰라도, 경건한 자들과 충실한 자들은 그것이 더욱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경건한 자가 끊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또한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는 가운데서도 경건한 자, 충실한 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 하면 인내하되, 끝까지 인내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는 하시지만 영원히 기다리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깐 참으시는 법은 있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실행하지 않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지상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할 때 이 지상에서의 삶은 전투하는 교회로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전투한다는 것은 대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 대적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경건한 자들이 끊어지는가? 왜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는가? 바로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이 땅을 살면서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5:8). 환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대적 마귀와 그를 따르는 악인들이 많아지고 득세할 때, 그리고 그들이 더욱 이 세상 곳곳에 편만해질 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더욱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 때문에 성도는 공의를 행하실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이 “여호와여 도우소서...”라고 간구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에게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얼핏 생각해 보면 거짓을 말하는 것과 경건한 자가 끊어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대적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요8:44). 맨 처음 아담이 타락한 것도 바로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소위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고 해서, 하와의 비위에 맞도록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또 뭔가 하와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여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이 시작할 처음에만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와를 통해 아담을 유혹한 마귀는 택자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혹하려고 했습니다. 40일 동안 굶주리신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들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도 유혹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천사가 너를 붙잡아주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마귀인 자신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인류의 머리인 아담의 경우는 그런 유혹으로 말미암아 실패했지만,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지만, 택자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 앞에서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이겨내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유혹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고 있고,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만 맨 처음에 마귀가 뱀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것처럼 마귀는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자나 그 외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여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특별히 마귀의 도구로서 악인들은 겉으로는 악인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다가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마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마음으로부터 어떤 말이 나온다고 할 때 나오는 말과 그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어떤 말인가? 본문에 의하면 ‘아첨하는 입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듣기에 기분이 좋을만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감언(甘言)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과는 달리 그 마음에는 어떤 말이 있는가?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거짓이 있을 뿐입니다. 거짓을 통해 해롭게 하려는 그런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1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자를 끊으며 충실한 자들을 없애려고 하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의하면 아첨하는 입술과 함께 ‘자랑하는 혀’로서 저들의 정체를 좀 더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 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방식과 원리가 이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그 마음에 새긴 법, 즉 양심의 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법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어릴 때부터 자기 자신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일 것 같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거짓이 나오는 것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 혹은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하게 되는 것은 거짓이 자기 방어 본능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험하다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거짓은 필요악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짓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이 만연하면 만연할수록 진실과 정직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과 정직을 열매로 삼는 자들, 다시 말해 1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 충실한 자들은 그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누가 득세하는가? 두 마음을 품는 자들, 겉으로는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알랑거리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위에 서기 위해 잠시 잠깐 아첨할 뿐인 자들, 거짓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자들, 그들이 득세할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방식과 원리가 이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 오늘 본문에서 경건하다고 일컫는 자들, 충실하다고 일컫는 자들은 거짓이 그들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들이 거짓을 말하는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거짓은 남을 속이는 짓입니다. 남을 속여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기 유익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자리, 그것이 성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명하신 것을 행하며 그가 금하신 것을 행하지 않는 삶! 한 예로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의도하지도 않는 것이 성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꼭 유익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임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람들,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 할지라도 경건한 자들, 충실한 자들은 경건한 자를 끊고 충실한 자들을 없애는 자들의 방식과 원리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점점 그런 방식으로 더욱 더 나아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주의 말씀을 따라 진실과 정직을 열매로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는 것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여기서 ‘끊으시리니’라는 말을 간청의 의미, 즉 ‘끊으소서’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동시에 한글 번역 그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에 대한 확신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공의를 시행하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특별히 거짓을 말함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아첨하는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자들, 그러면서도 큰 소리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끊어내고야 마시는데, 성도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우리는 결코 거짓을 말하는 자들, 겉으로는 아첨하지만 그 속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 즉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언젠가는 그들을 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렇게 하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일어설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저들을 심판하시느냐? 만약 그렇다면 이정도로 죄악이 가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들을 끊으실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저들의 거짓 앞에서, 저들의 자기 자랑 앞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셔야 합니다.
인내하시되 다윗이 주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만을 의뢰하면서 인내를 배우셔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인내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저들을 심판하실 것을 배우고 알지만, 안다고 해서 인내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도우소서...”라고 말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지만 그만큼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보면서 연약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저들을 끊어주시도록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간구하면서도 인내해야 할 자로서 인내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이지만, 저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4절을 보시면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보다 더한 거짓을 볼 수 없는데, 그들은 지금 누구를 대상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상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이란 존재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합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할 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하나님 없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의지를 강조할 때 이런 방향과 맞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의 의지와 관련해 자율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분명 지금의 의지와는 다른 의지였습니다. 지금은 죄에 대하여 필연일 수밖에 없지만 아담은 죄에 대하여 필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정하셔서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부터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할 때 의지 자체도 피조물이라는 것은 인식해야 합니다. 결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의지는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누구 아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느냐? 주의 명령 아래 있을 때입니다. 명하신 바가 있다면 그 명령에 순종할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불순종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시편 2편이 그것을 잘 증거 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2:2-3) 그러나 실상 하나님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그분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거짓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그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굉장히 교만한 생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들 스스로가 이긴 것처럼 보이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그들 스스로의 지혜로, 그들 스스로의 언변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하도록 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위에 아무도 없는 것인 양 그렇게 착각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그런 착각 가운데 있게 만드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팔, 다리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위로 들어 올리고자 하면 올라가는 형식으로 있습니다. 일어나서 걸어가고자 하면 걸어가는 형태로 있습니다. 팔을 내리고자 하면 팔이 내려가고 걸어가는 것을 멈추고자 하면 멈추는 형태로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의지로 되는 것처럼 착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런 일반은총을 거둬 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일들이 매일 매일 반복되다 보니 내 의지로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형벌로 있을 뿐입니다. 죄를 죄로서 벌하실 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심으로 그들 스스로가 형벌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반면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이신데, 시편 115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단순히 땅과 하늘이라고 할 때 그런 하늘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란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극히 높으시되, 특별히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전능하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반면, 인간은 결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을 동원하느냐 하면 종교성을 동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있습니다. 시편 115편 4절 이하 8절이 우상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우상은 뭔가? 자기의 소원을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우상에게 빌어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소원을 들어주는가? 실제로는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들어줄 수 없지만 왜 그렇게 그것들을 붙잡고 있는가? 하나님께로 가서 다시금 하나님께 매이기 싫기 때문에 끝까지 그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형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할 때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될 내용은 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속성과 배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그런 분이 죄를 창조하실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신데, 그런 분이 거짓을 말씀하실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에 걸맞은 것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에 걸맞는 것만 행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어디 있는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4절을 통해 말하고 있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 죄의 노예로서 거짓의 아비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이겼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경건한 자를 끊어냈다고 생각하고 충실한 자들을 없이하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시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자기 임의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잠시잠깐 혹은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 혹은 마지막 심판이 있을 때까지 거짓을 말하는 자, 아첨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하는 자들이 세상 가운데 많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5절 이하 7절은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가 없어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고백하고 있는데, 먼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때가 되면 가련한 자들, 궁핍한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이란 겁니다. 악인들이 무한정으로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속에서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가련한 자, 궁핍한 자를 안전한 지대에 두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가련한 자, 궁핍한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일어나기 전에는 마치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시는 듯 한 그런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일어나실 것입니다. 가련한 자들을 돌아보실 것이고, 궁핍한 자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저들이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위로는 하나님 안에만 있다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특히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련한 자로 있을 때 그리고 궁핍한 자로 있을 때, 다시 말해 두 마음으로 있는 저들이 겉으로는 아첨을 하지만 속으로는 거짓을 말함으로 우리를 해하려 할 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탄식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여 도우소서...”라고 1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아뢰고 그분께만 피해야 합니다. 가련하다고 해서, 궁핍하다고 해서 가련하고 궁핍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만 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아뢴다고 해서, 탄식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것은 아니란 것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약속의 말씀은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할 것이다.”(렘33:3 참조) 그리고 약속하신 바가 결코 헛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을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행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기도가 원인이 되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란 겁니다.
그럼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라, 특별히 환난 가운데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말씀을 헛되이 하실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기도한 그것이 그대로, 그리고 속히 이루어져야지만 우리에게 유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환난 가운데 주님을 찾는 것, 주님을 부르는 것 자체가 유익입니다. 죄를 죄로 벌하신다고 할 때 그들이 죄 가운데 있는 것 자체가 형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가련하고 궁핍할지라도 그리고 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 자체가 은총의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서 지금 당장 이루어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좀 더 하나님께 집중하며 그분의 뜻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헛되이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을 주실 것입니다. 비록 기도하는 바에 대하여 뭔가 들어주시지 않는 외형처럼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십니다.
더불어 이런 이해와 함께 5절 말씀이 사실로 나타나기도 함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탄식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때가 되면 탄식하는 자로 하여금 안전한 지대에 옮겨놓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는데, 그런 우리를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지 않아서 가만히 계실 뿐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안전한 자리에 옮겨놓으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6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확실하고 신실하며 꾸준하다는 점을 여기서 선언하고 있습니다(칼빈). 5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안전지대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결코 그 말씀하신 바를 지키지 않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말씀이 순결하다고 할 때 무엇과 대조를 하느냐 하면 2절에서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라고 말하고 있는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방식과 원리가 그런 방향으로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방식과 원리가 거짓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다, 달리 말하면 거짓이 없다, 아무런 점과 흠도 없다, 완전무결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법 단련한 은 같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보자면 거짓을 통해 저들은 경건한 자를 끊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도록 한다면 여호와의 말씀은 그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저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한 방식이요 다른 사람을 죽여서 나를 더 높은 자리로 올려놓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 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의 응답이 더디다고 해서, 혹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래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없어질지라도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들은 끊어지고 없어지는 자리에서도 참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성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형벌의 한 형태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결코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귀중하게 보신다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시116:15 참조). 혹 성도가 끊어지는 자로 있다고 할지라도, 혹 성도가 없어지는 자로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죽음이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것이란 겁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기 때문에 다윗은 어떤 고백까지 하느냐? 7절입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문맥으로 보자면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해 주소서”라는 간청의 의미로서도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보존하시리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이 “여호와여 도우소서...”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오늘 본문 7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5절 이하 7절이 “여호와여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는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분이시요, 그들을 보존하는 분이십니다.
특히 ‘영원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존하시되 단 한번 혹은 단 하루만이 아니라 악인이 그들의 악을 행하는 모든 날 자리에서, 그리고 모든 날 동안 계속되리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저들의 거짓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횡포가 오랜 기간 동안 있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죽음에까지 이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지키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보존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의 죽음은 결코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키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보존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는 방식이 결코 육신적인 것은 아니란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존하신다고 하니까 우리의 생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것 등이 지켜지고 보존되는 그런 방식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만큼은 지키시고 보존하시는가? 그가 하나님의 소유로 있다는 것만큼은 결코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에게 주신 참된 믿음만큼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해하고 아무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도 혹 믿음이 떨어지는 경우는 있으나 그 믿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키시고 보존하십니다.
더불어 창조 이래로 이 지상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사라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악인이 득세한다 해도, 아무리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지상에서 자신의 참된 교회를 사라지도록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엘리야 시대, 엘리야 혼자 남은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두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19:18). 우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헤아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든지 자기 백성들,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시고 보존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육신을 해하려고 하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주시고 또한 보존하시는 것으로 있다면 그것이 곧 견딤의 이유요, 위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라는 말씀으로 본 시를 마칩니다. 보통은 7절로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편 12편은 주님을 바라보게 함과 동시에 다시금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처럼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이러 이러하니 세상에 소망은 두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알리면서 성도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여기 보면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 날뛴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비열한 짓을 할지라도, 수치스럽고 비도덕적인 일을 할지라도 그것으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의 모습 속에서 공의를 실행하실 때도 있지만, 비열한 짓을 행하고도 오히려 높임을 받는 자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더욱 만연해지는가? 악인들의 악행이 더욱 만연해질 뿐입니다. 비열한 짓을 행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으니 그런 악행은 더더욱 많아질 뿐인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런 내용으로 마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안에도 보면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나 한 사람 변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이 사회,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세상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5) 구약 시대보다 예수님 시대가 더욱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이요, 더욱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여러분, 세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죄악이 널리 퍼졌으면 퍼졌지 죄악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죄악이 농도가 짙어졌으면 짙어졌지 묽어지지는 않습니다. 죄는 점점 더 편만해지고 진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세상을 보는 자들이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나님을 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영원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으로 알리시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부르짖는 것도 우리가 부르짖도록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구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성도로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