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관계
살사에서의 쿠바의 시각
푸에르 토리코의 관계
미국의 관계
'살사'는 일반적으로, 예전에 단순히 '라틴 음악'이라고 알려진 음악의 형태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쿠바의 대중음악과 민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재즈의 구조에서 발전된 형태이다. 이는 원래 '소스'를 뜻하는 말로, 1960년대에 널리 퍼졌다.
음악에서 분류를 할 때, 살사는 한번도 '라틴 음악'이란 말로 완벽하게 대체된적이 없다. 대부분의 음악가들, 특히 옛날 음악가들은 여전히 옛날 말을 쓰고 있다.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 초의 포스터에는, 이 말들이 함께 쓰였다. 예를 들면, 어떤 포스터에서는 '새로운 살사 음악과 라틴 톱스타들이 출현하는 티비 쇼' 라는 광고를 했다. 살사라는 말은 '살사 쿠바나'라는 이름으로 최근에 쿠바에 전해졌다.
이때까지 살사는 댄스리듬이나 음악적 장르는 아니었다. 그저 어떤 음악의 전후관계정도로 사용되었다. 작곡가였던 '이그나치오 피녜이로(Ignacio Pi eiro:1888∼1969)'는 'Echale salsita'라는 곡을 1920년대에 썼다. 게다가 그 용어는 댄서들에게까지 사용되면서, 라틴 요리에서 양념소스가 사용되는 것처럼, 음악에도 그 고유의 양념을 넣도록 음악가들을 충동질했다.
살사는, 누요리칸이라고 불리는, 뉴욕에 사는 푸에르토리칸인들이 주로 발전시킨 '뉴욕사운드'로 정의되는 라틴음악의 예전 스타일과는, 잘 구분된다. 이 음악의 기원은 때로 많은 모순적인 의견들을 반영한다. 이 모순적인 것들은, 쿠바 음악의 뿌리를 위조하려는 욕망과, 재즈와 록의 음악적인 것을 받아들이는데 대한 흥미, 그리고 가끔은 모든 라틴 음악들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정치적인 흥미로운 희망들이다.
국민적이고 민족적인 영향들
쿠바의 관계
많은 살사 음악가들, 특히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의 음악가들은, 1940년대의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Arsenio Rodriguez)'와 피아니스트 '릴리 마르티네스 그리냔(Lily Mart nez Gri an)' 같은 쿠바 대중음악의 지배자들의 음악을 기초로 해서 따라하고자하는 욕구가 있었다. 형용사인 't pica(전형적인, 상징적인:서)'는 종종 이런 종류의 음악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티토 푸엔떼(Tito Puente)'같은 전세대의 누요리칸 음악가들은, 새롭게 발견되는 옛날 스타일 음악의 대중성에 아직도 놀란다:
"나는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어요. 많은 밴드들이, 내가 예전 밴드에 있을때같은 옛날 밴드의 옛날 사운드와 비슷한 것들을 연주하더군요. 하지만 그들은 내게 그러더군요, 그런 사운드를 너무 좋아한다구요. '마치도(Machito)'와 나는 우리의 음악을 펼치려고 노력하고있고, 우리 음악을 더 진보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리 곤살레스(Jerry Gonzalez)'같은 많은 누요리칸 음악가들은, 전형적인(t pica) 사운드의 원점으로, 아프리카계 쿠바의 민속음악으로 돌아갔다. '제리 곤살레스'는 트럼펫과 콩가를 둘다 좋아하고, 둘다 연주한다. 그가 이끄는 '아파치요새 밴드(The Fort Apache Band)' - 아파치 요새는 '브롱스'의 한 경찰서에서 얻은이름이다 - 의 레코드에서는, '꼼빠르사(comparsa)와 '룸바(rumba)'같은 쿠바의 민속음악과, '산떼리아(Santer a : Chapter V 참조)'라고 불리는 '요루다 성가(Yoruda chants)가 재즈와 어울려 연주되었다.
'제리 곤살레스'의 형제인, 베이시스트 '앤디 곤살레스(Andy Gonz lez)'의 개인적인 레코드 소장품들과, 프로듀서이자 음악 연구가인 '리네 로뻬스(Ren Lopez)'의 레코드는, '오스카 헤르난데스(Oscar Hern ndez)'와 같은, 무대에서 가장 유명한 많은 음악가들에대한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가끔 그 목적은, 레코드를 들으면서 음악을 따라하고, 레코드를 들으면서 알게된 음악적인 연습을 실전으로 옮겨보는 것이 되었다. 쿠바의 연주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방법일뿐이라고 느꼈다. 살사 음악가들의 음악은, 종종 현대에 쿠바에서 만들어진 레코드뿐 아니라, 옛날 수집품중에서도, 아이템을 얻었다. 처음에는 통용되는 레코드를 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많은 음악가들은 '마르티니께'를 통해서 레코드를 구하곤 했었다. 요즘에는 미국의 많은 출처로부터 사는 것이 가능하다.
쿠바가 서구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뉴욕은 사실상 쿠바음악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누요리칸들에 의해서 쿠바혁명이 이루어진후에, 과거처럼, 새로운 유행과 춤들이 쿠바에서 발전되었다. 혁명전에는, 음악가들은 맘보, 차차, 파창가, 그리고 라틴음악 성질의 잼 세션인 '데스까르가(descarga)'의 댄스 리듬을 채집했다. 혁명후에는, '모잠비크'와, 최근에 가장 영향력있는 새로운 쿠바 스타일인 '송고'가 있었다.
'카스트로(Castro:쿠바의 혁명가, 대통령)'가 권력을 얻음으로써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단절됐음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여전히 리듬의 혁신에 원천이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미국에서, 라틴리듬을 수반한 유일한 새로운 리듬의 성장은, '살사'의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라틴 재즈, '디지 질레스피(Dizzy Gillespie)'의 '쿠밥(Cubop:쿠바의 비밥)', 부갈루(bugal ), 그리고 '까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의 음악-라틴 록 등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대중음악스타일과 재즈와 결합된 라틴 리듬의 부산물들이다.
비록 뉴욕의 살사 음악가중 태반이 누요리칸이지만, 무대위에는 항상 많은 쿠바 음악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카스트로의 권력이 '매리얼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에도 미치자 떠난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이자, 으뜸가는 사람은 '셀리아 끄루스(Celia Cruz)'이다. 그녀는 강하고 바이브레이션이 없는 콘트랄토(테너와 소프라노의 중간, 여성 최저음) 목소리와 극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1960년에 쿠바를 떠나 뉴욕에 재정착하기 전에 이미 쿠바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그후로 그녀는 '티토 푸엔떼(Tito Puente)', '윌리 콜론(Willie Colon)', '조니 파체꼬(Johnny Pacheco)' 등과 다른 살사의 최고 명성을 날리는 사람들과 함께 앨범을 녹음했다.
그 외에 살사무대에 오른 다른 쿠바 음악가들은 다음과같다. 타악기 주자 : '훌리오(훌리또라고도 알려져있다) 꼴라소(Julio Colazo)', '까를로스 "빠따또" 발데스(Carlos "Patato" Valcez)', '오레스떼스 빌라또(Orestes Vilat )', '마리오 "빠빠이또" 무뇨스(Mario "Papaito" Mu oz)', '비르힐리오(Virgilio)' 와 '엘로이 마르띠(Eloy Mart )', '이그나치오 베오아(Ignacio Berroa)' 와 '다니엘 폰세(Daniel Ponce)'; 피아니스트 : '하비에르 바스께스(Javier V squez)', '알프레도 발데스(Alfredo Valdez)' 와 '리노 프리아스(Lino Fr as)'; 트럼펫 주자 : '"초꼬라떼" 아르멘떼로스("Chocolate" Armentros)' 와 '"엘 네그로" 비바르("El Negro" Vivar)'; 베이스주자 : '이스라엘 "카차오" 로뻬스(Israel "Cachao" Lopez)'; 바이올리니스트 : '알프레도 델 라 페(Alfredo de la Fe)'; 싱어 : '미구엘 킨따나(Miguel Quintana)', '후스또 베딴꼬우르뜨(Justo Betancourt)' 와 '펠로 바리오스(Felo Barrios)'
살사 음악가들은 푸에르 토리코와 쿠바나 그외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다. 예를 들어, '파체코 하일스(Pacheco hails)' 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고, 피아니스트 '에디 마르티네스(Edy Mart nez)' 와, 고 '조지 달토(Jorge Dalto)' 는 콜럼비아출신이며, '루벤 블레이즈(Ruben Blades)' 와 '머리치오 스미스(Mauricio Smith)' 는 파나마출신이다. 소수의 라틴계열이 아닌 북아메리카 출신들은 그들 스스로 이름을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래리 할로우(Larry Harlow)'이며, 그는 원래 '로렌스 이라칸(Lawrence Irakah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또다른 잘 알려진 라틴 계열이 아닌 살사 음악가들로는, 트럼본 주자 '배리 로저스(Barry Rogers)'와 바이올리니스트로도 알려진 '루이스 칸(Lewis Kahn)', 플롯 주자 '아트 웹(Art Webb)', 섹소폰주자인 '로니 쿠버(Ronnie Cuber)'와 '바비 포르셀리(Bobby Porcelli)'등이 있다.
살사에서의 쿠바의 시각
누요리칸 살사 음악가들은, 미국뿐 아니라, 쿠바에 사는 쿠바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와 때때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쿠바에서 태어난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는 특히 쿠바의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일부 누요리칸들을 비판하고, '그건 쿠바의 음악이기 때문에, 쿠바에서 배운 쿠바음악가들만이 연주해야 최고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구아구아꼬(guaguac )' 같은 음악을 여기서 연주할수 없어요. 당신은, 당신이 그걸 망치고 있고, 여자들이나 드럼들따위로 망치게끔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고장에 가서 배워와야 합니다. 당신은 레코드들을 들을수 없고, 그 느낌들을 절대 가질수 없습니다.
레코드의 발란스를 위해서, 산타마리아가 수년간 그의 밴드에 누요리칸 타악기주자들을 써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해야겠다. 쉘러가 덧붙인다.
몽고는 항상 그의 밴드멤버들을, 아프리카계 쿠바음악, 재즈, 펑크, 쌈바, '소카(soca;soul-calypso)' 등을 포함한 갖가지 것들을 연주하는 능력에 따라 뽑아왔다. 그의 밴드는 항상, 음악가들이 재즈의 배경을 갖추고 있거나, 몽고로부터 라틴 음악을 칭찬하는 방법을 알때 최고의 사운드를 낼수있다.
산타마리아처럼 '다니엘 폰세(Daniel Ponce)' 도 또한 쿠바에서 온 콩가 연주자이다. 하지만 산타마리아가 미국에서 수십년간 산데 반해, 폰세는 최근에야 '메리얼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 출신 쿠바밴드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라틴 계열 사람들 중에서도, 이 그룹의 사람들은, 초창기 쿠바에서온 이민자들과 구분하여, '마리엘리토스(Marielitos)' 라고 불린다. 이 그룹의 다른 음악가중에는, 재즈 알토 색소폰 스타인 '빠끼또 드리베라(Paquito D'Rivera)' 와 드러머 '이그나치오 베로아(Ignacio Berroa)'도 있다. 폰세는, 현재 쿠바 대중음악이 살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느낀다.
쿠바인들이 뉴욕에 왔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이런! 이건 오래된 음악이군.' 이라고 말했었죠. 나는 강한 라틴의 현장을, 대담하지 않은 서정시, 한편의 악곡, 느낌에서 찾을수 있을거라고 기대했었습니다. 1960년대의 '티토 푸엔테(Tito Puente)' 나 '마치토(Machito)' 의 음악을 들어보고, 그 다음에 오늘날의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세요. 이름은 달라도, 음악과 느낌들과 배열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건 좋은 사운드이고, 그들은 대가들이지만, 지금,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대가 필요합니다.
젊은 쿠바 세대들의 살사에 대한 태도는, 널리 보급된것처럼 보인다. 쿠바와 미국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수년동안 뉴욕살사밴드는 쿠바에서 공연하지 못했다. '파니아 올스타스(Fania All-Stars)'가 처음으로 거기서 공연한 살사밴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흐리멍텅하게 마중을 했고, 10∼15분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버렸다.
쿠바에서의 태도가 변하거나, 몇몇 살사 음악가들의 작품이 다른것보다 쿠바의 맛을 더 풍기는 것에는, 어떤 계기가 있다. 쿠바의 대중 그룹 '로스 반 반(Los Van Van)' 은 최근에 '루벤 블레이즈(Ruben Blades)'의 곡을 편곡해서 노래했다. 게다가 '리차드 에구에스(Richard Eg es)' 는, 그룹 '바다쿰벨레(Batacumbele)'의 리더인, 푸에르토리코 타악기 주자인 '엔젤 "카체떼" 말도나도(Angel "Cachete" Maldonado)'의 앨범에 수록되지않은 한 노래를 녹음했다.
푸에르 토리코의 관계
누요리칸과 푸에르 토리칸 음악가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음악에서, 푸에르 토리코의 민속음악이 결코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닉한 일이다. '프랭키 맬러브(Frankie Malabe)'는, "라이브 공연에서, 당신은 아마도, 살사밴드가 연주하는 하나나 두곡의 '메렝게(merengue)'는 들을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봄바(bomb)' 나 '플레나(plena)'는 거의 들을수 없죠.' 라고 말한다.
봄바와 플레나는 푸에르 토리코의 민속음악의 종류이다. 메렝게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민적인 댄스 리듬이다. 푸에르 토리코의 '티피까(t paca)' 사운드는, '코르티호(Cortijo)'가 셀 수 없는 열광적인 관중들앞에서 공연했던 1957년에, 뉴욕인들사이에서 그 인기가 극에 달했다. 1980년대에 이 사운드는 구식인것처럼 보였지만, 맬러브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중 일부는 여전히 푸에르 토리칸에게 총대를 겨누고 있죠. 이러한 점에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헥토르 라 보에(Hector La Voe)'입니다. 그는 푸에르 토리코의 전형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한답니다. 나는 봄바와 플레나를 연주하기 좋아합니다. '루이스 바우소(Luis Bauzo)'와 함께 민속음악 그룹에서 연주하죠.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그런 오래된 것들은 연주 안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나를 불쾌하게 만들죠.
라 보에는 거의 10년 가까이 '윌리 콜론(Willie Colon)'의 밴드에서 있었죠. 이 기간동안 콜론은, 살사 청중들에게, 봄바, 플레나와 다른 푸에르 토리코 민속음악을 연주했다.
미국의 관계
새로운 살사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젊은 음악가들은, 라틴 계열이 아닌 미국 내륙과 관련된 음악적 장르, 특히 재즈와 리듬앤 블루스를 사용하길 원했다. 살사와 관련된 많은 음악가들은, 이미 '부갈루(bugal )' 스타일에 열중했다. 부갈루 스타일은, 라틴 악기를 이용하여, 때론 트랩(재즈에 사용되는 타악기)을 이용하여 라틴 음악보단 리듬앤 블루스에 가까운 리듬을 창조하는 것이다. '조 쿠바(Joe Cuba)'의 "뱅뱅(Bang Bang)"은 1966년에 라틴 부갈루의 열정을 끌어냈다. 그 스타일은, 1960년대 중반 유행하던 미국의 흑인 스타일인 '부갈루(bugaloo)'에서 뻗어나왔다. 대부분의 부갈루 곡들은, 영어로 되어있고, 누요리칸의 젊은 세대들이 두가지 언어를 쓴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부갈루 음악가들의 곡들은 국민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조니 콜론(Johnny Colon)', '조 바탄(Joe Bataan)', '조 쿠바(Joe Cuba)'를 비롯한 만은 빅 스타를 만들었다. 이중 몇몇 밴드는, 그들의 부갈루 스타일에 따라 예전 라틴 댄스 리듬들을 스페인어로 연주했다. 부갈루는 1960년대 후반에 가서는 그 인기가 떨어져, 밴드들은 스페인 서정시를 이용한 모든 라틴 음악 레파토리들을 다시 연주했다. ( '루벤 블레이즈(Ruben Blades)'의 영어로 된 최근 앨범은 몇안되는 예외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