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째 배고픈 설움을 달래주는 사랑의 선교회, 박명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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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0일 정기모임 강연
살아온 이야기를 해 달라 해서 고민하던 차에, 전 대표가 제가 해 왔던 사랑의 선교회 활동을 중심으로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서 오늘 말씀은 사랑의 선교회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너무 길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도 있어서 한 30분 정도 하겠습니다.
제가 성공회 신부가 되어서 바로 목회를 하던 햇병아리 때, 80년도에 사제서품을 받았는데, 81년도에 천안 부대동 성당에 관할사제로 오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교구에서 영국에 갔다 오라고 해서, 당시 여권발급은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에 가서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청중 웃음) 반공교육이 저녁에 있었기에, 교육을 받고 천안역에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겨울이었는데, 요즘말로 노숙자, 그 때는 부랑인, 거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역전 구내 대합실 스팀에 등을 대고 있는 거야.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려고 서로 등을 대고 발을 대고 자는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걸 보고서, 신부가 돼서 저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 도울 방법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서 영국에 갔습니다.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라서 외국에서 신부가 오면 TV하고 신문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영어도 짧지만, 당시 인터뷰하던 기자분이 여성이었는데, 영국에 뭘 배우러 왔느냐고 질문을 하는 거에요, 갑자기 물어보니까, 혼자 생각에, 영국에 뭘 배우러 왔나(청중웃음), 그 때 언뜻 떠오르는 게, welfare(복지)더라고. 천안에서 본 부랑인들 생각이 마음에 박혀 있었던 거지, 얼결에 welfare(복지)를 배우러 왔다, 그렇게 답을 했지, 그랬더니 신문에 보도가 되고 TV에도 일부 보도가 되니까, 여러 군데 복지기관에서 초청이 와서, 다녀본 기억이 납니다. 84년에 돌아와서 여기 온양교회 관할사제로 발령을 받아 왔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 임인수 목사님을 비롯해서 인권운동을 하는 1세대들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박종철 추도미사를 우리 성당에서 했어요. 그 당시에는 못 모이게 하는데, 내가 강행을 했어요. 그 때 지금 송악교회 이종명 목사가 목원대 학생회장이었는데, 성공회 신자가 되어서 들어왔어, 그 때는 다 성공회신자야(청중 웃음), 성공회신자만 들여보냈어. 그러다 예산으로 88년도에 갔는데, 민교협이라고 지금 전교조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지금 교육감된 김지철 선생님이 앞장선 것 같은데, 그런 민교협 창립을 예산성당에서 하게 됐습니다. 당시에 장소를 구하기도 어렵고 곤란했을 때였는데, 내가 장소 제공을 하면서 민교협 창립을 도와준 것이 보람이 느껴집니다.
그 땐 세상이 어렵고 하다보니까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한 4년 정도 지나니까, 소외된 사람들하고 내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더불어 간다고 했는데, 그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일반목회만 하는 게 아니라, 복지를 배우러 왔다고 얘기했는데, 하느님께서 자꾸 이 길을 가라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1년 정도 깊이 생각해서, 결론은 내렸지. ‘나는 특수목회를 하자,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한번 더불어 살아보자.’
그래서 온양에 돌아왔습니다. 후원회원을 조직하면서 교인 중심이 아니라 지역사람들 중심으로, 뜻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후원회원, 임원회 준비를 했어요. 1989년 10월 5일 날, 공식적으로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사랑의 선교회라고 하는 사회선교단체로 공식인준을 받아서 출범을 하게 됐습니다. 조그만 사무실 하나 내서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 시작은 각 학교에 소년소녀가장, 결손가정 학생들을 추천 의뢰해서 받아서 순천향대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방과 후 과외도 하고, 적은 금액이지만 장학금 형식으로 지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가족적인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보자 해서 하기 수련회를 3박4일 형식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 때에 여학생 둘이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거여.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는 여름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부모 따라서 다 해변가로 가는데, 말만 들은 해변가를 처음 와 봤다는 거여. 그래서 너무 꿈에 그리던 해변가에 나와 보니까 너무 기뻐서 잠이 안 온다는 거여, 아,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을 하기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2011년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하계수련회를 다녔습니다. 하기수련회 3박4일을 하는데, 먹는 걸 모두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짐이 엄청 많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힘들어서 올해는 넘길까 하는 생각도 하다가, 그 아이들 그 모습을 생각하면 또 다시 힘을 내서 또 준비해서 가고 가고 해서, 1990년부터 2011년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91년도에 온양교회로 재발령을 받아 왔습니다. 그 때부터는 특수사목과 일반사목을 병행하였습니다. 성당 구내의 건물을 이용해서, 그 당시 온양온천초등학교 결식학생들 점심을 제공하기 시작합니다. 2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매일 점심을 먹으러 성당 구내로 옵니다. 처음엔 잘 안 오지 않아서, 데리러 가기도 하고 교장선생님이 데려오기도 하고, 뭐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그 때도 가슴 아픈 사연이 뭐냐면, 조금 지나니까 그 아이들 중에서 그 얘기를 합니다. 신부님, 사실은 저는 점심시간이 되면 밖에 나오는데, 수도에 가서 물 먹고 배고픈 걸 채웠는데 여기 와서 따뜻한 밥 먹으니 참 좋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까 참 내가 힘이 들고 어려워도 이 일을 하기 잘했구나, 그런 확신이 깊어갔지요.
한 일 년쯤 지나니까 어디서 전화가 왔는데, 온양역 광장에 점심 못 먹는 노인들이 좀 있는데 점심을 제공해 줄 수 있느냐, 그래서 내가 한번 나가봤습니다. 정말로 10분 정도가 있는데, 빵이나 우유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있더라고. 그러면 초등학교 아이들이 매일 점심을 먹으니까 이 양반들에게 점심을 제공해보자 해서, 이 분들에게 오셔서 식사를 하시라고, 매일은 드릴 수 없고 일주일에 두 번을 드리겠습니다 하니, 그것도 고맙다고 해서 노인급식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91년도에 노인급식까지 합쳐서 함께한 거죠.
그렇게 학교 급식을 몇 년 하다 보니까 초등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급식지원을 끝내고, 아산시내권 다섯 개 중학교 학생들에게 점심 제공을 하기로 했습니다. 학교 추천을 받아서 중학생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제공하게 됩니다. 매일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배달합니다. 그것도 몇 년 했죠. 한참 지나서 중학교도 급식을 하게 돼서 도시락 배달을 중단했는데, 학교에서 급식비를 못 내는 아이들의 급식비를 좀 내주면 어떻겠냐 해서, 도시락 대신 급식비 지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던 초기에 기독교농민회와 카톨릭농민회가 합쳐서 아산농민회를 만들었는데, 그 때도 저희 성당에서 했습니다. 그게 보람이 있고, 그러다 지역사회와 연결되면서 재야 관계되는 분들과 함께한 일들에도 보람을 느끼고, 그 때 맺은 인연으로 농민회에서도 선교회 지원을 해주기도 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온양온천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줄 때, 91년도인가, sbs에서 개국을 하면서 일부에 국내편이 있고 2부에 해외편이 있었는데, 어떻게 sbs에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우리 사랑의 선교회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점심 제공하는 걸 보고 ‘어린이에게 사랑을’이란 프로그램을 방영을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자기네들이 선정을 해 가지고 개국프로그램으로 촬영을 해간 적이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 급식활동을 한 30분 방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인터뷰하는데, 결식학생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기자가 질문을 해요. 그래 내가 한 3만 명은 될 거라고 했더니 다음에 안기부에서 전화가 왔어(청중 웃음), 아 박신부님이십니까, 솔직하게 안기부에 있는 누구라고 하면서, 3만 명이라고 하는 근거가 어디서 나왔는가, 이건 국가적으로 유언비어에 해당된다고(청중 웃음), 그래서 또 여보쇼, 나는 여기 초등학교 아이들 20명에게 밥을 먹이는데, 아산시내만 해도 한 2천명은 될 거다, 그러면 전국적으로 한 3만 명 안 되겠냐(청중 웃음) 그렇게 대답하니까, 신부님 그래도 그것은 국가적 대외비라나 뭐라나(청중 웃음) TV에다가 근거도 없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더라구, 그래 몰랐다고(청중웃음) 그 정도였어요.
그 방송 이후에 여러 군데서 전화도 많이 오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또 지나니까 거동 불편하고 움직이기 어려우신 분들, 독거노인들이 있는데 도시락 좀 제공해줄 수 없느냐 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이건 시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럼 또 해보자 해서, 2000년 3월부터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각 동사무소에서 추천을 받아, 매일 점심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급식 사업을 하면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찮게 역 대합실 스팀에 등을 대고 있는 그들을 보고 가슴에 담은 것인데, 몇 년을 잊고 살다가 그들을 다시 생각하게끔 이끌어가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배고픔 설움을 좀 잊게 해준다는 생각으로 해보니까 보람도 있고, 설움 설움 중에 제일 큰 설움이 배고픈 설움이라고 하는데, 내가 하는 일 중에 그래도 조그만 일이지만 예수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사업이 이런 사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26년 해왔는데, 역 광장 노인들 무료급식을 작년까지는 해왔습니다만 금년부터는 제가 힘들고 어려워서 올해부터는 중단했고, 지금 현재 하는 일은 시내권에 무의탁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현재 35명에게 매일 도시락을 제공해 드리고 있고, 내가 사는 선장면에 35명 노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밑반찬을, 면사무소 추천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금 운영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후원회원 회비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도시락 배달은 시에서 보조금이 나오는데, 사랑의 선교회 전체 예산 3분의 2는 후원금이고, 3분의 1정도가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재정적으로는 참 어렵습니다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금년 26년째 해왔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하느님 뜻으로 나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하는구나 하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선택한 그 일에 있어서 후회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 아닙니까? (청중 박수) 나는 내가 선택을 했고, 때로는 아이들에게 급식비 지원을 하다 모자라면 내 주머니를 털어서 하면서도, 기쁨이 있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의 선교회 일이다 생각합니다. 회원여러분 앞에 주제넘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부끄럽지만, 나는 사랑의 선교회 일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 많았지만, 보람을 느끼고 이 일을 하기를 참 잘했다 생각합니다. 노인들이 잘 먹었다고 하면 그게 기쁘고, 맛있다 하면 그게 기쁘고, 그들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겨나갑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만두라 할 때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청중 박수)
(질문에서) 제가 올해 예순 일곱입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집사람의 반대는 없었습니다. 성공회 교단이 원체 작은 교단이다 보니까, 재정적으로 신부들 생활이 어렵습니다. 아예 생활은 부인들이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집사람이 교직에 있어서, 교회일은 아예 내놓고 집사람은 반대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하면서 오히려 돈이 들어가고 그러니까, 나중엔 집사람도 대 주더라고(청중웃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해나왔습니다만 집사람도 늘 앞장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