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석주선사昔珠禪師 법문法門
"게으름에서 악습 생기니 순간순간에 충실 하세요”
“죄 지을 생각이 없으면 승적(僧籍)이 무슨 소용 있겠느냐. 그와 같은 생각이 있으면 승적을 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나는 그런 일에 어두운 까닭에 그 법식(法式)을 모르니 다만 네 말을 믿고 따를 뿐이다. 지금 종교를 한다는 이들은 모두 형식에 그치고 있으니 심히 한탄스럽기만 하다. 지금 너에게 지혜가 없으니 내말이 무슨 소용이리오. 네가 이와 같이 출가했으면 속히 친가로 돌아가 오직 신상사(身上事)를 함이 옳을 것이니라. 스스로 결정하여 당당한 길을 가되 참되게 출가하여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붓 잡은 손이 떨려 낱낱이 답하지 못하겠구나. 다만 너의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을 믿을 뿐이다.” 내가 평생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칼날처럼 간직하고 살아온 은사 남전스님의 말씀입니다. 행자소임을 마치고 강원에 가기위해 승적을 만들어 달라고 편지를 드렸더니, 스님께선 이렇게 답장을 주셨지요. 은사스님은 편지에서는 혹독했지만 내게 승적을 해주셨고, 나는 무난히 강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계사스님이 이산스님이셨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사미십계를 받았어요.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북부 산간지방인 금계산 기슭의 옹천마을이란 곳입니다. 소백산맥이 시작되는 소백산 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장이어서 다락 밭을 일구어 주로 밭농사를 짓는 가난한 마을이었습니다. 15세가 되던 해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고생하는 어머님을 보며 내 입 하나라도 덜자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와서 선학원에 들어갔어요. 선학원에서 나중에 은사가 되신 남전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왜 출가하려느냐고 묻더군요. 변변하게 대답조차 못한 내게 스님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음 변하지 말고 사람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나는 “공부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고 약속하고 행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틈이 생기면 쓸데없는 생각이 끼어들어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그러면 마음에도 때가 묻기 마련이라고 늘 말씀하시던 남전스님은 내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으셨지요. 꼭두새벽에 일어나 법당에 들어가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고 다기 물을 올리고 새벽예불을 드리는 일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 종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도량을 깨끗이 청소한 뒤 대중들의 아침공양을 준비하고, 공양이 끝나면 설거지까지 해야 했지요.
또 여러 사람이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자리를 같이 해야 했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나무시장에서 사온 통나무를 도끼로 쪼개어 스님들이 묵는 방마다 군불을 지폈고 날이 어두워지면 법당 뜰의 잔 등에 불을 밝힌 다음 저녁 예불을 드려야 했습니다. 거기에 대중스님들의 심부름 또한 내 몫이었지요. 그 외 에도 절에 드나드는 스님과 손님들도 세심히 보살펴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내가 어느 날 남전스님께 “스님, 제가 하는 것이 일이지 공부는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했더니 칼로 자르듯 “일을 하기 위한 일이 아니고 공부를 하기 위한 일이다”고 답하셨습니다. 다시 내가 “그렇다면 스님, 공부하기위한 일만 매일 시키지 마시고 공부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야 공부하기 위한 일이 얼마나 공부에 도움 되는 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고 졸랐더니 스님은 “급하기는. 그래 할 일을 하나 더 주마. 일을 하는 동안 놀고 있는 입으로는 염불을 하여라”하시며 염불 독송 집을 건네주셨습니다. 선학원에 들어간 지 몇 달 만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불경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읽으며
목탁까지 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죠.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스님께서는 내게 수행생활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게으름 없이 늘 정진하는 습관을 길러주고 계셨던 것이지요. 향 피우고, 공양 짓고, 손님들 시중드는 일 하나하나가 바로 수행의 과정이요, 그러한 일들 모두가 내게 스승이었고, 화두였고, 가르침이었습니다.
불자여러분들도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생활에 충실하십시오.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고 했습니다. 자신과 인연 지어진 모든 사람과 사물을 진심으로 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 삶입니다. 선학원에 있으면서 만해스님의 심부름도 많이 했지요. 내 나이 18세 되던 해 만해스님은 47세셨는데 그때 <님의 침묵>이 출간되었어요. 그 책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민족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으로 노래한 작품이었는데 당시에는 만해스님의 시에 관심을 갖는 이가 거의 없었어요. 그때 나는 만해스님의 시집 출판을 알리기 위해 책방마다 시집을 돌리고 시집 판돈을 모아 만해 스님께 갖다드리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6년간 행자생활을 한 끝에 범어사 불교 전문 강원으로 본격적인 불교공부를 하기위해 떠났습니다.
당시 범어사에는 대중들만 3백 명이 넘었고, 불교 전문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인의 수도 6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초발심자경문>부터 배워 나갔고, <치문>을 끝으로 사미과를 마치고 사집과에 들어가 <서장> <도서> <선요> <절요>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사교과에 올라가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금강경>을 차례로 뗐지요. 마지막 대 교과의 <화엄경>81권 경전까지 공부하는 6년 동안 불교 전문 강원 밖으로 일체 나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대중스님들과 학인들 사이의 엄격한 계율, 절제된 생활은 나에게 크나큰 채찍이었지요. 그때 강원에서 배우고 익힌 공부는 평생 공부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불자 여러분들도 열심히 경전을 공부하십시오.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면 번뇌 집착이 사라집니다. 경전공부와 더불어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보는 것 또한 좋습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깨달음의 깊은 가르침이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강원 교육을 마친 뒤에는 선원을 다녔습니다. 상원사 선원에 방부를 드리고 면벽참선에 정진하면서 한암 스님에게서 <범망경>을 배웠지요. 구도자란 반드시 출가한 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참된 삶을 살고자 계를 지키는 일에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암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결코 없으며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야 하며 남의 슬픔과 고뇌를 나의 슬픔과 고뇌로 알아 남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자비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악을 짓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를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큰 가르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행하는 과정은 뼈를 깎는 고통과 같습니다. 수행자가 그 고통에 묶이어 고통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출가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굳센 인내가 필요하고, 본능에 젖어 나태해지는 자기 자신을 계율로써 끊임없이 일깨워야 합니다.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부족한 안일한 구도의 방법은 수행자를 타락시키고 맙니다. 한암 스님으로부터 배운 <범망경>은 내 마음에 출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심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 석우 스님이 계시는 금강산 마하연으로 자리를 옮겼고, 묘향산 보현사에서도 여러 스님들과 참선수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덕숭산 만공스님 회상에서 안거에 들기도 했지요. 1950년대 불교 정화운동을 시작하면서 당시 가장 절실하고도 큰 불교의 과제가 바로 역경과 포교, 인재양성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인재양성이야말로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부처님 말씀을 심어주는 일부터 시작해 이 땅의 미래불교를 활짝 꽃 피워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어린이 포교에 나섰던 겁니다. 포교라는 것이 그렇다고 해서 스님들만의 몫이 아니란 것을 불자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많은 사람을 누가 불자로 만들겠습니까. 물론 스님 네들의 영향도 많겠지만 불교의 요체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반 불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지금은 웬만한 절에 모두 어린이 법회라든가 불교유치원이 설립되어 흐뭇합니다. 아무튼 자꾸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처음은 힘들지만 길러내고 나면 언젠가는 그 아이들이 제 몫을 하게 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로 가든 결국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재양성은 곧 역경과 포교의 지름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린이 포교는 우리 불교계가 시급히,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30여 년 전,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서는 시대는 갔다고 여기고 운허, 홍경, 청담, 영암, 지월, 고암, 성철 스님 같은 이들 하고 모임 을 하나 만들었어요, 돌 모둠회’라고. 산성이나 축대를 다 쌓고 나면 돌이 남게 되지요. 남은 돌을 한쪽 옆에 모아 놓거든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돌들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뒷전에 물러나 있어야 할 늙은이들이라는 뜻으로 돌 모둠이라 했습니다. 그렇지만 종단이나 불교 일에 도움 줄 일이 있다면 도움을 주자는 모임이었지. 돌 모둠회 스님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지만 서신 왕래를 통해서 종단 일을 염려하곤 했는데 이제 다 가고 나 혼자 남았습니다. 현재 온양 금병산 보문선원에 불교사회복지관을 불사중입니다. 불교라는 게 본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종교인데 어쩐 일인지 복지 사업만큼은 타 종교에 뒤지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지켜보니까 신심이 두터운 신도들 가운데 늙어 갈 곳이 없는 분들이 많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비록 늦기는 했지만 그런 분들에게 편안한 요양 처를 마련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사회복지관 설립을 준비하게 됐어요. 처음엔 쉽게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막상 벌이고 보니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과도 견해가 많이 다르고 어려운 점이 많지만 무슨 일이든 원력을 굳게 세우고 처음부터 뜻을 잃지 않고 실천하면 이뤄지는 법입니다.
모름지기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 잘 믿고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실천하면 만사가 좋은 것입니다.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교훈이 없어서 세상살이가 괴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수승한 교훈입니다만 불자들이 입으로만 불교를 말하고 입으로만 신심을 외치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혼란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불교는 실천의 종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몸소 실천을 해야 성불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들이 모이면 이 땅은 자연히 불국 정토가 되는 거예요. 지난해 여름에 백두산 천지연에 다녀왔습니다. 정상까지 올라간다니까 다들 말립디다. 그러나 처음부터 올라가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정상까지 끄떡없이 올라가게 됩니다.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올라갔는지 나도 모르겠더라구요. 내 힘이 아니었던 게지요.
다 부처님 힘입니다. 내 나이 지금 여든 아홉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반드시 운동을 하고 아침에 삼청공원으로 산책 나가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내 몸부터 다스리는 것이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이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법입니다. 불자 여러분들도 항상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기안의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늘 마음속에 원을 세우며 살아가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옮겨온 글>
*석주선사昔珠禪師님은 1909년 경북 안동 옹천에서 출생 하시고, 1923년 남전선사님을 은사로 선학원에서 출가하여 1928년도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으며, 범어사 강원을 졸업하시고, 금강산 마하연사, 덕숭산 정혜사, 오대산 상원사, 묘향산 보현사등 전국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하셨고, 금정선원장, 불국사 주지,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조계종 포교원 초대 포교원장을 역임하시고, 동국역경원 이사장을 맡으셨고, 1980년도에는 중앙승가대학 학장을 맡으셔서 오늘날 중앙승가대학을 만들고 이끌어주신 종단의 큰 선지식입니다, 선사님과 인연은 중앙승가대학교 초창기 때 큰 스님을 모시고 학교 운영을 하면서 전국에 중앙승가대학 후원금 탁발을 다녔던 어려운 시기에 큰 스님을 모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위 법문은 선사님께서 출가하여 수행해 오신 과정을 자상하게 설법하신 법문입니다, 선사님은 옆에서 모시면서 느낀 감회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진지함이 후학들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곤 했습니다, 말없이 뵙기만 해도 친 아버지 같은 인자하신 모습은 선사님께서 수행오신 과정에서 다져진 수행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금쪽같은 석주선사님의 법문을 공유합니다, 좋은 인연들 맺으십시오, 화정 합장,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