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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8월 29일 후기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11)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8월 29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510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510
의 후속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열한 번째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책쫌읽자 법우, 보리연꽃 법우, Gumpdad 법우,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6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중 ‘Chapter VI. The Doctrine of No-Soul: Anatta’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57페이지 13째 줄부터 64페이지 마지막 줄까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이승훈 옮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경서원>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Chapter VI. The Doctrine of No Soul: Anatta
In the Dhammapada there are three verses extremely important and essential in the Buddha's teaching. They are nos. 5, 6 and 7 of chapter XX (or verses 277, 278, 279).
The first two verses say:
'All conditioned things are impermanent' (Sabbe SAMKHĀRĀ aniccā), and 'All conditioned things are dukkha' (Sabbe SAMKHĀRĀ dukkhā).
The third verse says:
'All dhammas are without self' (Sabbe SAMKHĀRĀ anattā).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무아))
《법구경(法句經)》(Dhammapada)에 부처의 가르침에서 극도로 중요하고 필수적인 세 구절이 있다. 그것들은 스무째 가름의 5, 6, 7번이다.(또는 277, 278, 279절) 그 첫째 그리고 둘째 구절은 말한다.
'조건 따라 있는 것은 모두 다 늘 그러하지 않다.' [諸行無常(제행무상)]
'조건 따라 있는 것은 모두 둑카이다.' [一切皆苦(일체개고)]
셋째 구절은 말한다.
'모든 법(法)에는 자아가 없다.' [諸法無我(제법무아)]
Here it should be carefully observed that in the first two verses the word samkhārā 'conditioned things' is used. But in its place in the third verse the word dhammā is used. Why didn't the third verse use the word samkhārā 'conditioned things' as the previous two verses, and why did it use the term dhammā instead? Here lies the crux of the whole matter.
여기서 첫째, 둘째 구절에는 "조건 따라 있는 것"[행(行)]이란 단어가 쓰인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셋째 구절에는 그 자리에 법(法)(dhamma)이란 단어가 쓰였다. 왜 셋째 구절에서 앞의 두 구절과 같이 "조건 따라 있는 것"[행(行)]이란 단어가 쓰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법이란 단어가 대신 쓰였는가?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핵심이 있다.
The term samkhāra denotes the Five Aggregates, all conditioned, interdependent, relative things and states, both physical and mental. If the third verse said: 'All samkhārā (conditioned things) are without self', then one might think that, although conditioned things are without self, yet there may be a Self outside conditioned things, outside the Five Aggregates. It is in order to avoid misunderstanding that the term dhammā is used in the third verse.
상카라[행(行)]라는 용어는 "다섯 가지 모임", 즉 육체, 정신 모두를 막론하고 조건에 따르고, 상호의존하며, 상대적인 모든 사물들과 상태로 정의된다. 만약 셋째 구절이 '모든 조건 따라 있는 것에는 자아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록 조건에 따르는 것은 자아가 없지만 조건 따라 있는 것 외에서는, 즉 "다섯 가지 모임" 밖에서는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 법이라는 용어가 셋째 구절에 쓰인 것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The term dhamma is much wider than samkhārā. There is no term in Buddhist terminology wider than dhamma. It includes not only the conditioned things and states, but also the non-conditioned, the Absolute, Nirvāna.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or outside, good or bad, conditioned or non-conditioned, relative or absolute, which is not included in this term. Therefore, it is quite clear that, according to this statement: 'All dhammas are without Self', there is no Self, no Ātman, not only in the Five Aggregates, but nowhere else too outside them or apart from them.
법이라는 용어는 상카라라는 용어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이다. 불교용어 중에 법보다 넓은 의미의 용어는 없다. 그것은 조건 따라 있는 것들과 상태들뿐만이 아니고 조건에 따르지 않는 것들, 절대적 진리, 열반까지도 포함한다. 우주 안이건 밖이건, 좋건 나쁘건, 조건에 따르건 조건에 따르지 않건, 상대적이건 절대적이건 간에 이 용어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런 말, 즉 '모든 법에 자아라는 것은 없다'에 의한다면 "다섯 가지 모임" 안에서만 아니고 그 밖에 어떤 곳에서도, 즉 "다섯 가지 모임" 밖에서도, 또는 "다섯 가지 모임"과 유리되더라도 '자아'가 없고 아뜨만이 없음이 아주 분명해 진다.
This means, according to the Theravāda teaching, that there is no self either in the individual (pudgala) or in dhammas. The Mahāyāna Buddhist philosophy maintains exactly the same position, without the slightest difference, on this point, putting emphasis on dharma-nairātmya as well as on pudgala-nairātmya.
상좌부(上座部)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는 각 개인에서건 법에서건 간에 자아가 없음을 의미한다. 대승불교 철학은 이점에 있어서 "개인적 차원의 나 없음"뿐만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의 나 없음"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어떤 차이점도 없이 정확히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In the Alagaddūpama-sutta of the Majjhima-nikāya, addressing his disciples, the Buddha said: 'O bhikkhus, accept a soul-theory (Attavāda) in the acceptance of which there would not arise grief, lamentation, suffering, distress and tribulation. But, do you see, O bhikkhus, such a soul-theory in the acceptance of which there would not arise grief, , lamentation, suffering, distress and tribulation?'
'Certainly not, Sir.'
《마지마-니까야》의 《알라갓두빠마-경》(M.22; {阿黎咤經(아려타경)},中阿含(중아함) 200)에서 부처가 제자에게 설법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영혼설을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여라.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너희는 보았느냐?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지 않는 그런 영혼설을.'
'정말로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Good, O bhikkhus. I, too, O bhikkhus, do not see a soul-theory, in the acceptance of which there would not arise grief, lamentation, suffering, distress and tribulation.'
'훌륭하다. 오! 비구들이여, 나 역시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지 않는 그런 영혼설을 보지 못하였다.'
If there had been any soul-theory which the Buddha had accepted, he would certainly have explained it here, because he asked the bhikkhus to accept that soul-theory which did not produce suffering. But in the Buddha's view, there is no such soul theory, and any soul-theory, whatever it may be, however subtle and sublime, is false and imaginary, creating all kinds of problems, producing in its train grief, lamentation, suffering, distress, tribulation and trouble.
만약 부처가 인정한 어떤 영혼설이 있다면 여기서 그것을 설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비구들에게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은 받아들이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의 견해로는 그런 영혼설이 없다. 그리고 사소한 것이든 거창한 것이든 간에 어떤 영혼설도 거짓되고 환상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슬픔과 비애, 괴로움, 흔들림과 걱정을 줄줄이 엮어낸다.
Continuing the discourse the Buddha said in the same sutta:
'O bhikkhus, when neither self nor anything pertaining to self can truly and really be found, this speculative view: “The universe is that Ātman (Soul); I shall be that after death, permanent, abiding, ever-lasting, unchanging, and I shall exist as such for eternity”- is it not wholly and completely foolish?'
같은 경에서 계속 설법하며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자아도, 자아에 속하는 어떤 것도 정말로 찾아내지 못했으면서 "우주는 저 아뜨만('영혼')이다. 나는 죽은 뒤에 영원하고, 머물러있으며, 늘 그러하고, 변치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실재로서 존재할 것이다" 이런 사변적인 견해, 그것은 완전히 바보스러운 것이 아니냐?'[각주1]
[각주1] S.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은 이 문구에 대해 말하길, '부처가
반박한 것은 작은 자아가 영구히 계속된다고 떠드는 거짓된 견해이
다'(《인도철학》(Indian Philosophy), Vol. I, London, 1940, p.48
5)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
로 부처는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인 아뜨만이나 영혼을 반박하였다.
우리가 바로 지금 앞 문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크건 작건 간에 그 어
떤 자아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부처의 견해로는 아뜨만에 대한 모
든 이론은 거짓된 것, 즉 정신의 "내어 비춤"이다.
<역주> 부처의 가르침이 다른 인도철학, 특히 요즘 잘나가는 인도의 명상
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명상으로 얻어
진다는 대아大我 또는 '참 나'라는 신비한 경지도 다만 마음이 만들
어낸 것에 불과하며(113,171쪽을 참조하라), 거기에 의존하려거든 차
라리 지금 소박하게 느끼는 현실의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편이
낫다고 가르친다.(이하 참조)
Here the Buddha explicitly states that an Ātman, or Soul, or Self, is nowhere to be found in reality, and it is foolish to believe that there is such a thing.
여기서 부처는 아뜨만이니 영혼이니 자아니 하는 것은 실재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Those who seek a self in the Buddha's teaching quote a few examples which they first translate wrongly, and then misinterpret. One of them is the well-known line Āttā hi attano nātho from the Dhammapada (XII, 4, or verse 160), which is translated as 'Self is the lord of self', and then interpreted to mean that the big Self is the lord of the small self.
부처의 가르침에서 자아를 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음부터 잘못 번역하여, 잘못 해석해 버린 몇 가지 예를 인용한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Atta hi attano natho'(열두째 가름 4번, 또는 160번 시문)인데, "자기는 자기의 주主님이다"로 번역하여, "큰 나는 작은 나의 주님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First of all, this translation is incorrect. Āttā here does not mean self in the sense of soul. In Pali the word āttā is generally used as a reflexive or indefinite pronoun, except in a few cases where it specifically and philosophically refers to the soul-theory, as we have seen above. But in general usage, as in the XII chapter in the Dhammapada where this line occurs, and in many other places, it is used as a reflexive or indefinite pronoun meaning 'myself', 'yourself', 'himself', 'one', 'oneself', etc.
우선 그 번역부터가 정확하지 않다. 여기서 앗따Atta는 영혼이란 의미에서의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빨리어의 '앗따'라는 단어는 우리가 앞에서 본 것과 같은, 특정적으로 그리고 철학에서 영혼설을 언급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동적이며, 한정적이지 않은 대명사[각주2]로 사용된다. 그런 영혼설을 언급하는 경우와 달리 이 시구가 나오는 《법구경》의 열 두째 가름 같은 일반적 용법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곳에서는 '나 자신'(myself), '너 자신'(yourself), '그 자신'(himself), '어떤 이'(one), '어떤 이 자신'(oneself) 등등을 의미하는 유동적이고, 한정적이지 않은 대명사로 쓰인다.
[각주2] <역주> 즉, 재귀대명사(reflexive pronoun)와 부정대명사(indefinite pronoun).
Next, the word nātho does not mean 'lord', but 'refuge', 'support', 'help', 'protection'. Therefore, Attā hi attano nātho really mean 'One is one's own refuge' or 'One is one's own help' or 'support'. It has nothing to do with any metaphysical soul or self. It simple means that you have to rely on yourself, and not on others.
다음에 '나토natho'라는 단어는 '주님'을 의미하지 않고 '피난처', '지원', '도움', '보호'[각주3]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실은 'Atta hi attano natho'가 '자기가 자기의 피난처이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돕는 이다.' 또는 '의지처'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어떤 형이상학적 영혼이나 자아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의지해야지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각주3] 《법구경》의 주석서에서는 '나토는 의지처(피난처, 도움, 보호)
를 뜻한다'(Natho'ti patittha)라고 말한다.(DhpA.II,PTS,p.148) 고
대 싱할리Sinhale어《법구경》주석서(Sannaya)는 'natho'를, '그것은
의지처(피난처,도움)이다'(pihitavanneya)라고 의역하고 있다.(Dhamm
apada Puranasannaya, Colombo,1926, 77쪽) 만약, 우리가 'natho'의
부정형을 취한다면 이 뜻이 더욱 확고해진다. 'Anatha'는 '주님이 없
는'이란 의미가 아니라 '도움 없는', '의지할 데 없는', '보호받지
못한', '가난한'이라는 의미이다. 빨리성전협회(PTS)의 빨리어 사전
에서도 'natha'를 '보호자', '피난처', '도움'이라고 설명하지 '주
主'라고 하지 않는다. 'Lokanatha'라는 단어를 '구세주'라고 번역하
는 것은 완전히 통념적인 기독교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아주 잘
못된 것이다. 부처는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진실로
'세상의 피난처'를 뜻한다.
Another example of the attempt to introduce idea of self into the Buddha's teaching is in the well-known words Attidipā viharatha, attasaranā anaňňasaranā, which are taken out of context in the Mahāparinibbāna-sutta. This phrase literally means: 'Dwell making yourselves your island (support), making yourselves your refuge, and not anyone else as your refuge.'
부처의 가르침에 자아의 관념을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예는 유명한 말, 'Atta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sarana'이다. 이것은 《마하빠리닙바나-경》의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이 구절은 직역하면 '네 자신을 너의 섬(의지처)로 만들어서, 네 자신을 너의 피난처로 만들어 살아가라. 그리고 다른 이를 너의 피난처로 만들지 말아라'를 뜻한다. 불교에서 자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앗따디빠attadipa'와 '앗따사라나attasarana'라는 말을 "자아를 등불로 삼아라", "자아를 피난처로 삼아라"로 해석하고 있다.[각주1]
[각주1] 여기서 'Dipa'는 등불을 뜻하지 않고 분명히 '섬'을 뜻한다.
《디가-니까야》의 주석서(DA. Colombo ed., p.380)에서는 여기 'Dipa'
라는 단어에 다음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네 자신을 섬, 마치 망
망대해에 섬같은 의지처(쉼터)로 만들어서 살아가라.' (Mahasamuddag
atam dipam viya attanam anam dipam patittham katva viharatha) 윤
회(輪廻)(samsara), 즉 "존재의 지속"은 보통 바다(samsara-sagara)에
비유된다. 그리고 대양에서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섬 같은 단단한
땅이지 등불이 아니다.
We cannot understand the full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advice of the Buddha to Ānanda, unless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e background and the context in which these words were spoken.
우리가 이 단어들이 말해진 배경과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아난다에게 해준 충고의 완전한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다.
The Buddha was at the time staying at a village called Beluva. It was just three months before his death, Parinivāna. At this time he was eighty years old, and was suffering from a very serious illness, almost dying (māranantika). But he thought it was not proper for him to die without breaking it to his disciples who were near and dear to him. So with courage and determination he bore all his pains, got the better of his illness, and recovered. But his health was still poor. After his recovery, he was seated one day in the shade outside his residence. Ānanda, the most devoted attendant of the Buddha, went to his beloved Master, sat near him, and said: 'Sir, I have looked after the health of the Blessed One, I have looked after him in his illness. But at the sight of the illness of the Blessed One the horizon became dim to me, and my faculties were no longer clear. Yet there was one little consolation: I thought that the Blessed One would not pass away until he had left instructions touching the Order of the Sangha'.
그때 부처는 벨루바라고 부르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반열반) 석 달 전이었다. 이때 그는 여든 살이었고 매우 심한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어서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아를 없애 주지 않고 죽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모든 고통을 참고 병세를 호전시켜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회복이 된 뒤, 하루는 거처 밖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부처의 가장 헌신적인 시자 아난다는 사랑하는 스승에게 다가가서 곁에 앉아 말하였다. '선생님. 저는 세존의 건강을 보살펴 왔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편찮으셔서 돌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병색은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제 능력으로는 더 이상 낫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위안이 있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동아리"를 감동시키는 가르침이 남아있는 동안엔 떠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Then the Buddha, full of compassion and human feelings, gently spoke to his devoted and beloved attendant: 'Ānanda, what does the Order of the Sangha expect from me? I have taught the Dhamma (Truth) without making any distinction as exoteric and esoteric. With regard to the truth, the Tathāgata has nothing like the closed fist of the teacher (ācariya-mutthi). Surely, Ānanda, if there is anyone who thinks that he will lead the Sangha, and that the Sangha should depend on him, let him set down his instructions. But the Tathāgata has no such idea. Why should he then leave instructions concerning the Shangha? I am now old, Ānanda, eighty years old. As a worn-out cart has to be kept going by repairs, so, it seems to me, the body of the Tathāgata can only be kept going by repairs. Therefore, Ānanda, dwell making yourselves your island (support), making yourselves, not anyone else, your refuge; making the Dhamma your island (support), the Dhamma your refuge, nothing else your refuge.
그래서 부처는 연민에 가득 차 인간적인 정으로, 헌신적이고 사랑하는 시자(侍者)에게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아난다야. "동아리"가 내게서 무얼 기대하느냐? 나는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법을 가르쳐왔다. 진리(法)에 있어서 여래에게 스승의 움켜쥔 주먹(師拳(사권))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아난다야. 동아리를 이끌어가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아리는 그에게 기대야 한다. 그의 가르침을 펴게 하라. 허나 여래는 그럴 생각이 없구나. 그러면 왜 그가 동아리를 지도해야 하는가? 나는 이제 늙었다. 아난다야. 내 나이 여든이다. 낡은 수레는 수선해야 다닐 수 있듯이 내게도 그러하구나. 여래의 몸은 수선해야 계속될 수 있다. 그러하니 아난다야. 네 자신을 너의 섬(의지처)으로 만들어서 살아가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자신을 너의 피난처로 만들어라. 법法을 너의 섬(의지처)으로 만들어라. 법을 네 피난처로 만들어라. 다른 어떤 것도 네 피난처가 아니니라.'
What the Buddha wanted to convey to Ānanda is quite clear. The latter was sad and depressed. He thought that they would all be lonely, helpless, without a refuge, without a leader after their great Teacher's death. So the Buddha gave him consolation, courage, and confidence, saying that they should depend on themselves, and on Dhamma he taught, and not on anyone else, or on anything else. Here the question of a metaphysical Ātman, or Self, is quite beside the point.
부처가 아난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주 명백하다. 아난다는 슬프고 우울하였다.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이 죽은 뒤에 제자들이 피난처도 없고 지도자도 없이 모두 외로워하고 도움 받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는 제자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가르친 법(法)에 의존해야 하고 남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서 아난다에게 위안과 용기와 확신을 주었다. 여기서 분명 형이상학적 아뜨만이나 '자아'의 문제는 그 관점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Further, The Buddha explained to Ānanda how one could be one's own island or refuge, how one could make the Dhamma one's own island or refuge: through the cultivation of mindfulness or awareness of the body, sensations, mind and mind-objects (the four Satipatthānas). There is no talk at all here about an Ātman or Self.
더 나아가, 부처는 아난다에게 자기 자신이 어떻게 자기의 섬이나 피난처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법을 자신의 피난처나 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몸과, 감각과, 마음과, 마음의 대상들[사념처(四念處)]에 마음을 두는 것, 즉 일깨우는 수련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도 아뜨만이나 자아에 대해서 말한 바가 없다.
Another reference, oft-quoted, is used by those who try to find Ātman in the Buddha's teaching. The Buddha was once seated under a tree in a forest on the way to Urevelā from Benares. On that day, thirty friends all of them young princes, went out on picnic with their young wives into the same forest. One of the princes who was unmarried brought a prostitute with him. While the others were amusing themselves, she purloined some objects of value and disappeared. In their search for her in the forest, they saw the Buddha seated under a tree and asked him whether he had seen a woman. He enquired what was the matter. When they explained, the Buddha asked them: “What do you think, young men? Which is better for you? To search after a woman, or to search after yourselves?'
자주 인용되는 또 다른 문헌이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아뜨만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곤 한다. 부처는 바라나시에서 우루벨라로 가는 길목의 숲속에서 한 나무 밑에 앉아있었다. 그날, 젊은 왕자들이 서른 명의 친구로 모여 아내를 데리고 그 숲으로 소풍을 왔다. 아직 총각이었던 한 왕자는 기생을 데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동안, 그 기생은 값나가는 물건을 훔쳐서 도망가 버렸다. 그들은 그 숲에서 기생을 찾다가 나무 밑에 앉아있는 부처를 보고는 한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부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부처는 그들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엇이 그대들에게 더 나은가요?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 자신을 찾는 것과?'
Here again it is a simple and natural question, and there is no justification for introducing far-fetched ideas of a metaphysical Ātman or Self into the business. They answered that it was better for them to search after themselves. The Buddha then asked them to sit down and explained the Dhamma to them. In the available account, in the original text of what the preached to them, not a word is mentioned about an Ātman.
여기서도 역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부러 형이상학적인 아뜨만이나 '자아'라는 멀리서 가져온 관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앉으라고 권하여 설법을 해 주었다. 현존하는 증거로는 그가 가르쳐 준 것의 원전에 아뜨만에 대해 언급한 말이 없다.
Much has been written on the subject of the Buddha's silence when a certain Parivrājaka (Wanderer) named Vacchagotta asked him whether there was an Ātman or not. The story is as follows:
밧차곳따라는 "방랑수행자"[유행자(遊行者)]가 아뜨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을 때 부처가 침묵하였다는 소재에 대해 쓴 것이 매우 많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Vacchagotta comes to the Buddha and asks:
'Venerable Gotama, is there an Ātman?'
The Buddha is silent.
'The Venerable Gotama, is there an Ātman?'
Again the Buddha is silent.
Vacchagotta gets up and goes away.
밧차곳따가 부처에게 와서 물었다.
'고따마 선생님. 아뜨만이 있습니까?'
부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고따마 선생님. 아뜨만이 없습니까?'
역시 부처는 묵묵부답이었다.
밧차곳따는 일어나서 가 버렸다.
After the Parivrājaka had left, Ānanda asks the Buddha why he did not answer Vacchagotta's question. The Buddha explains his position:
그 방랑수행자가 가 버린 뒤에 아난다는 부처에게 왜 밧차곳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부처는 자기 입장을 설명하였다.
'Ānanda, when asked by Vacchagotta the Wanderer: “Is there a self?”, if I had answered: “There is a self”, then, Ānanda, that would be siding with those recluses and brāhmanas who hold the eternalist theory (sassata-vāda).
'아난다야, 방랑수행자 밧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영원주의 이론[상주론(常住論)]에 집착하는, 사문과 바라문의 편을 드는 것이다.'
'And, Ānanda, when asked by the Wanderer: “Is there no self?” if I had answered: “There is no self”, then that would be siding with those recluses and brāhmanas who hold the annihilationist theory (uccheda-vāda).
'그리고 아난다야, 그 방랑수행자가 "자아가 없습니까?"라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고 대답했다면 소멸주의 이론[단멸론(斷滅論)][각주1]을 신봉하는 사문과 바라문의 편을 드는 것에 불과하다.'[각주2]
[각주1] <역주> 상주론(常住論)은 형이상학적으로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하
는 이론이다. 단멸론(斷滅論)은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되어 없
어지게 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水野洪元, 김현
옮김, 《原始佛敎》(서울:지학사) 71~76쪽을 보라.
[각주2] 다른 기회에 부처는 그 밧차곳따에게 '여래에겐 학설이 없다. 사
물들의 본성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주었다.(M. I PTS, p.486)
여기서도 부처는 어떤 이론가들에도 부응하려 하지 않았다.
'Again, Ānanda, when asked by Vacchagotta: “Is there a self?”, if I had answered: “There is a self”, would that be in accordance with my knowledge that all dhammas are without self?'
'Surely not, Sir.'
'또 아난다야, 밧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는 내 앎과 일치하겠느냐?'
'분명 아닙니다, 선생님.'
'And again, Ānanda, when asked by the Wanderer: “Is there no self?” if I had answered: “There is no self”, then that would have been a greater confusion to the already confused Vacchagotta. For he would have thought: Formerly indeed I had an Ātman (self), but now I haven't got one.'
'그리고 또 아난다야, 그 방랑수행자가 "자아가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면 이미 혼란스러워하는 밧차곳따에게 더욱 엄청난 혼란을 줄 것이다.[각주3]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정말 나는 아뜨만(자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잃어버렸다."'
[각주3] 사실은 그 이전이 분명한 다른 때에 부처가 어떤 깊고 미묘한 문
제―아라한이 죽은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문제―를 설
명해 주었을 때 밧차곳따는 말했다. '고따마 선생님, 여기서 저는 무
지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고따마 선생님과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졌던 아주 작은 믿음 마져도 지금은 달아나 버
렸습니다.'(S. IV PTS, p.487) 그래서 부처는 그를 또다시 혼란시키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It should now be quite clear why the Buddha was silent. But it will be still clearer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e whole background, and the way the Buddha treated questions and questioners – which is altogether ignored by those who have discussed this problem.
부처가 왜 침묵하였는가는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가 전체적인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부처가 질문과 질문자들을 다루는 방법―이런 문제를 논하는 자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을 고려한다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The Buddha was not a computing machine giving answers to whatever questions were put to him by another at all, without any consideration. He was a practical teacher, full of compassion and wisdom. He did not answer questions to show his knowledge and intelligence, but to help the questioner on the way to realization. He always spoke to people bearing in mind their standard of development, their tendencies, their mental make-up, their character, their capacity to understand a particular question.
부처는 누가 질문하건 간에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아무 생각도 없이 대답을 해주는 컴퓨터가 아니었다. 그는 자비와 지혜 가득한 현실적인 스승이었다. 그는 자기 지식과 지성을 내세우려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깨달음의 길을 가는 질문자를 도와주기 위해 대답하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발달 수준과 경향, 정신의 완성도, 성격, 특별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였다.[각주4]
[각주4] 부처의 이 앎을 '감관을 초월하여 아는 지혜'라고 부른다.
According to the Buddha, there are four ways of treating questions: (I) Some should be answered directly; (2) others should be answered by way of analyzing them; (3) yet others should be answered by counter-questions; (4) and lastly, there are questions which should be put aside.
부처에 의하면 질문을 다루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⑴ 어떤 질문은 바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⑵ 다른 것은 그것들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대답하여야 한다. ⑶ 그러나 다른 것은 반문하여서 대답하여야 한다. ⑷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쳐놓아야 할 질문이 있다.
There may be several ways putting aside a question. One is to day that a particular question is not answered or explained, as the Buddha had told this very same Vacchagotta on more than one occasion, when those famous questions whether the universe is eternal or not, etc., were put to him. In the same way he had replied to Mālunkyaputta and others. But he could not say the same thing with regard to the question whether there is an Ātman (Self) or not, because he had always discussed and explained it. He could not say 'there is self', because it is contrary to his knowledge that 'all dhammas are without self'. Then he did not want to say 'there is no self', because that would unnecessarily, without any purpose, have confused and disturbed poor Vacchagotta who was already confused on a similar question, as he had himself admitted earlier. He was not yet in a position to understand the idea of Anatta. Therefore, to put aside this question by silence was the wisest thing in this particular case.
질문을 제쳐놓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특정한 질문은 대답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가 바로 이 밧차곳따에게 이런 말을 해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듯이, 우주는 영원한가 아닌가 등등의 유명한 문제들을 부처에게 질문했을 때 그렇게 대답한다. 같은 식으로 부처는 말룽꺄뿟따와 다른 이들에게 대답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아뜨만(자아)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을 또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항상 논하고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라는 그의 앎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아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예전에 자아가 없음을 받아들여서 이미 혼란스러워하는 불쌍한 밧차곳따를 같은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하게, 아무 목적도 없이 혼란스럽게 하고 동요를 일으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나 없음"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특별한 경우에는 침묵으로 질문을 제쳐두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것이었다.
We must not forget too that the Buddha has known Vacchagotta quite well for a long time. This was not the first occasion on which this inquiring Wanderer had come to see him. The wise and compassionate Teacher gave much thought and showed great consideration for this confused seeker. There are many references in the Pali texts to this same Vacchagotta the Wanderer his going round quite often to see the Buddha and his disciples and putting the same kind of question again and again, evidently very much worried, almost obsessed by these problems. The Buddha's silence seems to have had much more effect on Vacchagotta than any eloquent answer or discussion.
우리는 또한 부처가 밧차곳따를 오래 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캐묻기 좋아하는 이 방랑수행자가 그를 보러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스승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구도자를 위하여 많은 사상을 가르쳐주고 엄청난 배려를 해주었다. 빨리 원전에서는 이 밧차곳따 같은 방랑수행자들이 돌아다니다 자주 부처와 부처의 제자들을 만나러 와서 같은 종류의 질문을 자꾸자꾸 던지는 것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이 문제들에 거의 강박관념이 되어서 아주 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부처의 침묵은 밧차곳따에게 그 어떤 웅변적인 대답이나 토론을 해주는 것보다도 훨씬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각주5]
[각주5] 그 이유는 나중에 밧차곳따가 다시 부처를 만나러 오지만 이번에
는 늘 하던 질문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
다. "제가 고따마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고따
마 선생님께서 좋고 나쁜 것(kusala kusalam)을 간단히 가르쳐 주신
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처는 그가 설명해 달라고 간청한 그 좋
고, 나쁜 것을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밧
차곳따는 그것을 실천하였다. 결국 밧차곳따는 부처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의 지위"(阿羅漢果;應供位)에 도달하였으
며 '진리', 즉 열반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아뜨만에 대한 문제와 다
른 문제들은 더 이상 밧차곳따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M. II, PTS,
p.489과 그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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