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레지오의 산 증인
한기일 스테파노 중서울 Re. 명예기자
서울대교구 신당동성당(주임신부 강사집 요셉) 성조들의 모후 Pr.에서 평단원으로 활동하는 남중화 요셉 형제를 중구 구세주의 어머니 Co. 단장 염태일 마르코 형제의 추천으로 신당동성당에서 만났다.
1934년 4월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난 후 3세에 어머니를 사별하고 누님과 면장을 지내신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외롭게 자랐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북대학교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수료하고 교원 자격증을 취득하였지만 교사 월급으로는 집안 살림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성모님의 인도하심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는 일마다 잘되어 성공을 하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교 3학년까지 개신교(장로교)에 다니다가 개신교의 뿌리인 천주교회가 큰집이라 생각하고 또한 김수환 추기경의 누님과 친밀한 관계인 장모님의 권유로 1970년에 개종을 하였다. 1972년 4월 대전 주교좌 대흥동성당 치명자의 모후 Pr.에 가입한 후 현재까지 47년간 사업과 레지오 활동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성모님의 정예 군사로 열정적인 레지오 활동
1972년 12월 입단 선서를 한 후 4개월 만인 1973년 4월 고령인 단장의 후임으로 당시 본당 김영환 신부의 명에 따라 대전 대흥동성당 루르드의 성모 Pr.으로 옮겨 단장으로 봉사한 후 창설되는 Pr.마다 단장으로 옮겨 다니며 12년간 Pr. 단장으로 봉사하였다. 옮겨 다니는 Pr.마다 단원을 늘려 분단시킴으로 레지오 확장에 매진하였다.
이때가 한국 교회의 레지오 활동 중흥기로 본당 신부님이 매주 주회에 5분 전부터 끝까지 참석하여 레지오 단원들의 신원과 신심, 활동을 일일이 파악하고 활동 배당까지 하여 레지오 단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당시 무 학력자가 2/3 인데 이분들에게 교본 공부를 열심히 시켜 두 명씩 짝을 지어 병원장과 변호사들에게 입교 권면을 하도록 신부님이 활동 배당을 하여 사회 지도층들이 입교하여 교회도 크게 성장하였다고 한다.
또 사목위원들로 Pr.을 조직하여 사목위원들이 레지오 활동을 잘 알고 두 단체가 잘 협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모든 지혜가 성모님께서 주신 지혜라고 겸손해 한다. 개종 후 사업도 잘되어 성모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라는 신심으로 대전교구 8개의 소년 Pr.을 지원하는 소년 Cu. 단장으로 봉사하고, 1976년 대전교구 Co. 단장으로 선출되어 5년간 봉사하며 대전교구 Re.로 승격시켰다.
1982년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의 부단장으로 선임되고 자녀들의 교육 문제로 1984년에 서울로 상경한 후 신당동성당 황금 궁전 Pr.에 전입하고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3대, 4대 단장으로 선임되어 6년간 봉사하였다. 신당동성당 성실하신 정녀 Cu. 단장과 확장 신설되는 순교자들의 모후 Cu.의 초대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레지오는 교본대로 운영하고 기도와 활동이 양립될 때 활성화
퇴임 후에도 Pr. 부단장을 맡았으며, 지금 현재는 86세의 고령과 직장암 수술로 힘들어도 열심히 평단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여 부인과 함께 가정 성화를 이루고, 매일 묵주기도 20단 이상 바친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가장 좋아 한다는 남중화 요셉 형제는 각급 평의회(Pr. Cu. Co. Se.)의 단장으로만 30여년을 봉사한 한국 교회 레지오 마리애 활동의 밀알이었다. 온 삶을 바쳐 열정적으로 레지오 활동에만 전념하여 레지오 확장에 크게 기여한 공적으로 1991년 1월17일 김수환 추기경님으로부터 공로패를 받고, 2005년 8월17일에는 정진석 추기경님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참으로 성모님 신심이 깊고 전교 활동에 헌신한 남중화 요셉 형제를 취재하며 기자는 많이 배우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은 교본대로 운영하고 기도와 활동이 양립될 때 활성화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