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polymath)이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건설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차지했다. 네이처는 과학 전문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자를 1위에 뽑을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으며 2위는 세익스피어였고,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간신히 6위를 차지했다. 르네상스형 만능인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로 평가된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끓임없이 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그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초기 생애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에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Vinci)에서 태어났다. 다빈치의 태어난 시간까지 정확히 알수 있는것은 공증인이었던 그의 조부 세르 안토니오의 직업적인 습관때문이다. 그의 조부는 중요한 일들을 공증문서 노트 뒷 여백에 기록해두곤 하였다고 한다.
빈치(Vinci)는 현 피렌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25km 떨어진곳으로 아르노 강의 여러 지류중 위쪽에 자리한 산골 부락이다. 현재에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시대와 마찬가지로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다. 다빈치의 생가는 보존되어 있어 1년에 약 50만명 가량의 방문객들이 레오나르도 박물관과 생가를 찾는다.
아버지 피에로 다 빈치(Piero da Vinci)는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으로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카타리나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의 나이 23살로 결혼전이었으나 생모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고 지참금을 낼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다빈치를 낳은뒤 8개월후 아버지는 16살짜리 처녀 알비에라와 결혼하였고 생모 카타리나는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과 결혼하여 캄포제피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다빈치는 처음에 생모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결혼한 아버지가 계모 알비에라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다빈치는 본가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다빈치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알려진것이 많지는 않으나 1457년 경의 과세 기록에 따르면 부친과 한집에 살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이 시기에 다빈치를 양육한 이는 조부모와 다빈치의 숙부였다.
아버지 피에로가 피렌체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지역 공증인과 동업을 하게 되면서 집을 자주 비우고 피렌체로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중 계모 알비에라는 자식을 낳지 못한채 1464년에 사망했다. 1465년,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의 딸과 재혼했으나 새로운 계모 역시 아이 없이 사망했다. 이후에 아버지 피에로는 두 차례 더 재혼하였고 이때 아이를 많이 낳은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두 12명이나 되는 이복 형제가 생겼다.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1504년 아버지 피에르가 77세 나이로 사망했을때 이복형제들은 합심해서 음모를 꾸미고 다빈치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한푼도 나눠주지 않았다. 또한 훗날 숙부 프란체스코가 사망한후에는 상속문제를 두고 이복형제들과 법적인 소송을 치루기도 하였다.
*사생아의 한계
당시 피렌체에서는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심한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차별과 무시는 존재하였다. 귀족 가문의 사생아가 아닌 경우에는 제대로된 교육을 받거나 대학에 진학할수 없었고 의사, 약사, 법률가, 행정 공무원이 될 수 없는등 직업 선택의 폭도 제한적이었다. 부친이 속한 길드(조합)에서도 서자가 행정관리나 공증인이 되는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정식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고 비공식적으로 이탈리어등을 배웠을뿐이며 당대 귀족이나 식자층의 자녀들처럼 라틴어와 그리스어등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피렌체의 인문주의 학자들로 부터 무시가 이어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웠고 그 당시 라틴어를 연습했던 기록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예술 세계 입문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화가 조합 등록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제1 피렌체 시대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1 밀라노 시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상화.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제2 피렌체 시대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제2 밀라노 시대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앙부아즈 시대
3년간의 로마 체류
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간 피렌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해전인 1512년 9월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 정부를 와해 시키고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는 줄리아노 데메디치 (1479~1516)가 맡았고 그의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있었다.
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다.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후원자 물색
1515년 1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그해 9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한후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후 7년 넘게 지속되어온 캉브레 동맹전쟁 (1508~1516)을 종식 시키기 위해서 교황을 만나려고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했다. 같은해 12월 19일, 종전협약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다.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그곳에서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프랑스 이주
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의 사이가 소원하던차에 후원자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로마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다빈치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던것으로 보인다. 그는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세스코 멜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Clos Lucé)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다빈치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갔는데 프랑스에서 <성 안나와 성모자>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이때 이미 중풍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었으나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1세는 가끔 찾아왔고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빈치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또한 로모랑탱(Romorantin)에 큰 성을 건축한후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다빈치는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으며 수학 실험과 해부학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사망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증가하였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유언장에서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동성애 상대였던 살라이와 다빈치의 하인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등의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제자인 멜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프랑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조르조 바사리 (1511~1574)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에서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의 임종시 그 자리에 없었다. 유해는 다빈치의 유언에 따라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묘지들이 파묘된후 모두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From Wikipedia
*
‘프랑스와 1세’는 선대의 프랑스 왕들 처럼 이탈리아 정복을 꿈꾸며 밀라노를 침공한다.야만 수준의 프랑스 생활을 하다가,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는단다. 당시, ‘메디치 가문’으로 부터 팽 당하여, 실업자 수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국빈으로 초청하였고, 다빈치가 수석 제자와 하인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앙부아즈 성에서 가까운 ‘끌로 뤼쎄‘에 도착하여 왕에게 바친 것이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모나리자‘이다
>~~~~~~~~~~~~~~~~<
모나리자(Mona Lisa) 탄생과 모든 것"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그림이다.
다빈치는 일반적으로 화가(畵家)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만능 천재였던 그는 화가 이전에 음악가, 건축가, 기계 공학자, 해부학자, 발명가, 화학자, 물리 실험가 이기도 하다.
그의 노트에는 비행기의 날개 모양까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다빈치'는 신분상 결혼이 불가능한 시절에 태어난 서자(庶子)이다.
다빈치의 주요 작품인 모나리자는 신비한 웃음과 미완성 작품으로 유명한데 그 사유는 아래와 같다.
당시 초상화, 벽화, 성화가 유행할 때 '리자'라는 24살의 여인이 남편과 함께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다빈치를 찾았다.
리자의 아름다움은 다빈치를 감동시켜 승낙하게 된다.
그림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리자의 모습에서 살짝 스치는 미소를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로 진척이 잘되지 않는다.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러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으며, 리자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찾아와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어느 날 리자는 서운한 듯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남편을 따라 외국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얼마나 걸립니까?"
"석 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전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남편이 한사코 가자고 해서..."
"함께 가셔야죠. 그림의 끝은 다녀오신 뒤에 마무리하죠.
언제 떠나십니까?"
"오늘 갑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을 무엇으로 붙이실 겁니까?"
"'모나리자'라고 할까 합니다."
리자 부인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모나'란' 마돈나', 즉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로 여자를 높임말이다.
아쉽게도 리자는 외국 여행 중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게 된 것이다.
‘모나리자’라고 하는 불세출의 그림은 위와 같은 연유(緣由)를 가지고 있다.
모나리자(MonaLisa) 그림의 여자 이름은 '리자'이다.
[모나리자의 모든 것]
" Mrs. Risa "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한 폭에 “약 40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림 한 장값이 40조 원이라니, 도대체 그 그림은 어떤 그림이며 어디에 있을까?
그 그림은 바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에 있는 것으로서 르네상스 시대 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레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1503~1506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가로 53cm x 세로 77cm짜리 유채(油彩)
패널화 “모나리자(Mona Lisa)”라고 한다.
이 모나리자라는 작품은 프랑스 정부와 루브르 박물관의 소유이므로 경매의 대상은 아니지만, 프랑스 정부는 경제적 가치가 최소 약
2조3,000억 원에서 최대 약 40조 원 정도 될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최대 40조 원이라는 이 엄청난 가격이 붙은 이유는 2018년 기준 연간 루브르 박물관의 방문객 수가 약 1,000만 명 정도인데,
방문객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최후의 만찬 등 다른 역작들을 제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 작품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기술적으로도 대단 하지만 다빈치가 죽을
때까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눈썹 없는 여인네에 불과한 이 그림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그림의 모델인 리자 게라르디니(Risa Gherardini)는 피렌체의 성공한 사업가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모나리자(Monarisa)라는 단어의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로 Mrs라는 의미이므로 “모나리자는 Mrs. Risa”라는 뜻이 된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리사 부인”이라는 말이다.
다빈치가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 1503년 게라르디니(Gherardini)가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었던 직후였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미소 짓게 하기 위해 광대와 악사들을 고용했다고 하는데 모나리자의 야릇한 미소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6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림이 완성되지 않고 오래 걸리자 다빈치와 그녀 사이가 야릇한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았는데 하지만 다빈치는 동성애자였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방탄유리로 보호받고 있는 모나리자는 신비한 미소로 특히 유명하다.
200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연구팀이 인간 감정(感情)을 인식하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모나리자”를 분석한 결과 이 미소에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다고 발표했다.
입술의 굴곡과 눈가의 주름 등 얼굴 주요 부위의 움직임을 수치화해 분석한 결과 전체표정의 83%는 행복함, 9%는 불쾌함, 6% 두려움,
3%는 분노 등이 섞여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506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1518년 프랑스 국왕이 구입하여 프랑스의 소유가 되었고, 1789년 프랑스 혁명 후인 1797년에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으로 옮겨져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기네스북(Guinness Book)은 모나리자를 1962년에 보험가격을 1억 달러로 산정한 바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보험가격이 가장 비싼
그림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현 시가로는 9억 달러가 되며 한화로는 1조 2천억 원이 넘는다.
모두가 알고 있듯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썹이 없다.
다빈치의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Georgio Vasari)는 눈썹이 없는 점이 바로 이 그림의 백미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모나리자의 구성과 형식을 그의 그림에 자주
도입하였는데, 그 이후 500년 동안 모나리자의 구성과 형식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화가가 이를 원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나리자 그림이 문학, 음악, 영화, 방송, 광고 등 예술과 문화 분야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미국의 흑인 가수 “냇 킹 콜”이 부른 “Mona Lisa”는 1950년에 빌보드 차트 1위를 5번 차지하고, 영화 주제가로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이런 모나리자 그림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눈썹이 없는 한 가지 흠이 있어서 오히려 그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이라는 말이 있다.
페르시아의 카페트 장인들은 카페트를 만들 때,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 일부러 작은 흠을 하나씩 낸다는 것이다.
인디언들도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흠이 있는 구슬 하나를 일부러 넣는데 그 흠 있는 구슬을 영혼의 구술이라고 한단다.
완벽함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흠 없는 사람은 없다.
자연계를 보아도 대형 태풍, 대형 산불, 대형 폭우 같은 자연 재앙이 없는 해가 없다.
자연계도 이처럼 한두 가지 흠결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되라는 말은 만능의 신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한두 가지 흠이 있다고 해서 조금도 기죽을 이유가 없다.
기억하시라. 눈썹 없는 모나리자가 증명하고 있듯 개인이든 국가든 최고의 가치는 자신의 특성을 최고로 살리는 데 있다.
지방특산물이 그 지방을 살리는 무기가 되듯 그대의 특장점이, 또 나라의 특장점이 그대와 나라를 살리는 최고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감명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