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둘러보라. 타투(문신)를 한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나날이 더 인기가
치솟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 현재 5명중 약 1명꼴(21%)로 최소 1가지 이상의 타투를 하고 있다. 이것은 2003(16%),
2008년(14%)의 해리스폴 보고보다 높아진 수치다.
연예인들, 프로경기 선수들, 심지어 2009년 버전의 바비 인형도 숱한 타투를
하고 있다. 과연 이런 대세(?)에 크리스천도 편승할 수 있을까? 올바른 문답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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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pedia |
성경은 타투에 관해 뭐라고 말할까? 윌 하니컷 교수(리버티침신대,
변증학-현대이슈)는 성경이 현대와 같은 타투에 대해 "특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레위기 19:28에 비슷한 말씀은
있다. 특히 NIV 같은 대중적인 영어성경에 ‘타투(tatoo)’라고 번역돼 있다. NIV는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의 몸을 베거나 자신에게
타투 표시를 하지 마라.."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러나 하니컷은 현대와 같은 타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 구절이 구약 율법에 해당하므로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타투에 관한 인터넷 견해들을 검색해 보면 이에 대한 어프로치에서 레 19:28을 놓고 바로 타투에 관한 말씀이다, 율법이니까 적용이
안 된다 등 "혼동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어프로치가 다 잘못이라는 하니컷 교수의 주장을 간추려 본다.
성경은 오늘날과 같이 피부 아래 잉크를 주입하여 영구적인 그림이나 패턴이나
메시지 등을 새기는 관행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레 19:28은 엄밀히 "너희의 살에 죽은 자를 위해 상처를 내지 말고, 너희에게
마크(표시)를 쓰지(write) 마라. 나는 너희의 여호와다."라고 해석돼야 한다.
여기서 '쓰다(write)'에 해당하는 원어 낱말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서만
사용된 단어로 심볼이나 말을 새겨 넣다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 쓰인 '마크(표시)'라는 말도 유일하게 여기서만 쓰인 단어로 어원이 불분명하므로
뭐라고 딱히 정의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영어문화권에 '타투'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말이었다. 따라서 1600년대 초기에
발행된 KJV 성경의 본문이 더 원뜻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너희는... 너희에게 마크를 찍지(print)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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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evant 매거진 캡처 |
이 법이 생기게 된 배경은 애굽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이후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였다. 고고학자들은 애굽인들이 타투를 하긴 했으나 여성에게 국한되었다고 밝혀준다. 당대의 애굽 여성들은 임신․출산에 관계된 젖가슴,
허벅지, 하복부 등에 타투를 했다. 조산 등 액운을 막고 출산의 복을 비는 부적 같은 의미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이들 여성들이 몸에 찍은
그림들은 출산의 여신 베스의 신상이었다.
가나안의 경우 먹이나 물감 등으로 찍기보다 불도장을 찍거나 칼로 긋거나 자르는
것으로 표시했다. 고고학에 의하면 가나안 주민들은 바알 등 신들에 대한 의식(儀式)의 목적으로 특히 죽은 자를 위하거나 신들을 높이는 의미로
몸을 베는 관행이 있었다. 레위기 19:28은 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난자한 상처를 금한 것이지 꼭 현대의
타투를 금하셨다고까지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천들이 타투를 맘 놓고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M' 포인트를 숙고한 후 자신의 타투 여부를 결정해 보기 바란다.
변형(Modification)
성경이 타투를 금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떤 제한이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20)이므로 우리는 몸에 대한 가해성․위해성․가학성 행위 등을 삼가야 옳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그 분의 순수창작품으로 드높이 가치관을 부여하고 있으니 함부로 변형시키면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동물에 더 가깝게, 또는 외계인에 가깝게 자기 몸을
변형시킨다. 심지어 과감하게 성을 바꾸기도 하고 온갖 괴상한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적어도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작품의
아름다움을 흐트러뜨리는 행위를 삼가야 옳을 것이다.
동기(Motive)
도대체 타투를 왜 하려는 것인가? 만약 일부 비신자 자녀들처럼 부모에 대한
반항정신 탓이라면 물론 당연히 수용불가이다(엡 6:1-3 ). 예술적인 자기표현은 오케이일 수 있지만 우리의 우선적인 동기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전 10:31). 우리 자신이 아닌 그 분에게 관심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일부 신자들처럼 복음증언을 위해 타투를 할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복음증언에
가장 효과적이고 우선적으로 타당한 방법일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말로 전하는 복음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몸에 성구를
새겼다고 지상명령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또한 딴 교인들의 덕을 생각해야 한다. 타투를 불쾌하게,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조신(Modesty)
조신이라는 말은 자기 증대 효과를 노리지 않음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을 하나님께로 모으려는가, 자신에게로 모으려는가? 타투는 흔히 몸의 일부를 드러내고 힘을 주어 과장함으로써 몸의 일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을 모으기가 십상이다. 등 아래쪽에 타투를 새긴 이른 바 '트램프 스탬프'가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모으게 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신한 생각들이 타투의 위치나 사이즈, 개수 등에 관한 재고와 제한을 가져올 수 있다.
시장성(Marketability)
내가 취직하려는 기업체의 고용주가 나의 타투를 받아들일 것인가? 수많은 회사들이
직원의 타투가 노출되는 것을 꺼려서 감출 것을 권하거나 아예 초장에 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특정 기업의 관점과 측면에서 타투는
사회적으로 폭넓게 수용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골적인 기독교성 타투가 비신자 기업에서 쉽게 수용되겠는가?
메시지(Message)
세상과 의사소통하기 위해 나 자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타투는 파워풀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타투는 영구적이므로 특수 제거 시술을 하지 않는 이상 평생
따라다니기 십상이다. 타투 체험에 따라붙는 쉬운 용어 하나가 '타투 후회'라는 것이다. 점점 성장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타투를
후회하게 된다. 생각이 성장하고 가치관이 바뀌므로 "철 없던 시절"의 메시지가 경박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돈(Money)
타투에 쓰는 막대한 비용이 현명한 소비인가? '타투 인포'라는 웹사이트에서는
(2004~2009년 현재) 미국내 타투 비용이 시간당 80~100달러인데, 40달러 이하로 해 주는 곳은 드물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우리는 우리의 돈을 쓰는 데 있어서도 책임성과 슬기를 갖추어야 한다. 타투 비용은 둘째 치고 계속 새 기술이 계발되고 있는 타투 제거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건강
문제(Medical concerns)
타투에 대한 건강 문제가 떠오른다. 매요 클리닉에서는 "타투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경고한다. 타투 때문에 심각한 알러지가 생기거나 감염, 눈에 띄지 않는 상처, 간염 등 출혈 관련 질병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타투는 피부를 의도적으로 열고(open), 피를 드러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에 감염될 가능성이 고도로 높다. 타투 팔러들은 아무리
소독을 잘한다 해도 의료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법으로 마구 피부에 상처를 내고 출혈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잉크(타투 먹물)를 주입하기 전 팅크(생각)를 먼저 해 보라. 이 중대한 결정을
함부로 섣불리 하지 마라! 이상의 가이드 질문을 철저히 참고하라. 좀 더 성숙한 크리스천 성인들과 이 문제를 상의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