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의 가난](수필)-교정본
- 김현태(형국)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난 아버지는 큰소리를 지르며, 온 식구들을 단잠에서 깨우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코끝을 간질이는 새벽안개가 눈을 떴다. 목덜미를 휘감는 새소리와 함께 눈 비비며 겨우 일어난 식구들은 입이 석 자나 나왔지만 하루의 첫 출발은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디딜방아를 찧어 알곡 만들어서 보관하고, 아버지는 쇠죽을 끓여 소 먹이고, 가축들의 먹이를 주느라 분주했다. 할머니는 길쌈 준비하느라 하루해가 짧았다. 베틀에 올라앉은 어머니도 식사도 거르며 끊어진 한 올 한 올의 실을 이으느라 주름살이 늘어났다. 봄이 되면 아버지는 논밭을 갈아 일 년 농사를 준비하고 못자리를 만들어 이웃 간에 품앗이로 모내기를 했다. 한 마을에 황소 몇 마리가 온 동네 논밭을 갈아 주었고 그 품삯으로 부잣집 품을 갚았다. 우리집은 소가 없어 큰댁에서 소를 빌려서 논밭을 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신 품으로 갚아야 했다. 나와 두 동생들은 부모님이 품앗이 하는 일터로 따라 나갔다. 그 근처 논두렁에 모여 앉아 새참과 점심을 얻어먹고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면사무소 공무원들은 모내기할 때 논으로 나와 못줄로 심도록 독려하고, 평당 주수 확보하여 수확량을 늘리도록 농민들을 지도해 주었다. 가뭄이 들 때면 관정 파서 물을 뿜어 올려 한해 대책을 세우고, 피뽑기를 하도록 호별 방문하여 독려했다. 어떤 날은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 주기 위해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동원되어 일손을 도와주었다. 조금만 비가 오지 않아도 수리시설이 너무 부족해 힘들었다. 매년 반복되는 연례 행사처럼 물을 뿜어 올려 논에 물을 채우고, 농약 살 돈이 없으니 경유 기름에 모래를 섞어 벼멸구를 잡았다. 오뉴월 뙤약볕 아래 어른들은 논밭의 김매기를 하고, 우리들은 풀을 베어다가 퇴비를 만들고 꼴망태에 소깔을 베어 소죽을 끓였다.
그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동네 친구들과 들로 나가 소 먹이며 보리피리 만들어 노래 부르며 놀았다. 저수지와 냇가에 뛰어들어 멱 감으며 개수영하며 즐겼다. 냇가로 나간 아이들은 피리병에 된장 풀어 물고기를 잡고, 어른들은 족대질과 투망질을 하며 천렵을 즐겼다. 어른들은 뒷산에 올라가 토끼와 고라니에게 덫을 놓아 짐승을 잡아왔다. 우리들은 집 마당에 새덫을 놓아 새를 잡으면 어른들의 술안주로 쓰이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우리는 끼리끼리 모닥불 피워 놓고 덜 익은 보리와 밀을 그을려 먹었다. 검게 타 귀퉁이가 닳은 보리와 밀은 단숨에 질긴 배고픔을 베어냈다. 단물 같은 오후가 달라붙어 우리는 키득키득 웃음을 날리며 그을음을 입가에 묻혔다.
어른들은 뱀과 개구리도 잡아 구워 먹으며 배고픈 시절을 달랬다. 어른들은 추석 전에 도시락을 싸 높은 산으로 올라가 땔감 준비에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을이 되면 밭에서 나온 곡식을 도리깨질하여 저장하고, 논 바닥에 쌓아 둔 볏짐을 지게로 지고 날라 집마당에 벼늘로 쌓아 두었다. 이웃 간에 서로 품앗이로 날씨가 좋은 날 홀태에 일일이 홅어 볏두지 두 대통에 저장해 두었다. 저장해 둔 벼는 풍구질을 잘 하여 가마니에 넣고 무게를 달았다. 호별로 배정된 양을 지정된 공판 일정에 맞춰 등급을 받아 정부에 매상하여 아이들 학비와 가용돈으로 썼다.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나면 보리를 심을 수 없는 습지 논은 소 쟁기로 논을 깊게 갈아 추경심을 하여 토심을 높여 주었다. 나머지 남아 있는 논은 한 필지도 빼지 않고 보리 파종을 하도록 했다.
공무원들은 담당 마을에 출장을 나와 전답의 지도를 일일히 들여다보면서 보리 심기와 추심경을 하도록 호별로 방문하며 독려하여 노는 땅이 하나도 없도록 챙겼다. 이렇게 보리 백 만석 돌파하기 운동을 정부 시책 사업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배고픔과 보릿고개를 면할 수 있었다.
늦가을부터 온 가족들은 산에 올라가 굽은 손 호호 불며 갈퀴나무를 긁어 땔감 준비를 했다. 남자들은 나뭇등걸을 캐다가 장작을 패서 쌓아 두고, 겨우살이 준비를 해 두었다. 저녁에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앉아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저녁밥을 먹은 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마니를 짰다. 어쩌다 어머니가 바늘대로 아버지 손을 찌르면 아버지는 와락 화를 내셨다. 그러다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을 마친 우리는 대충 치운 방에서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멀고 먼 바닷길이 시려 푸른 등을 부둥켜안은 자반고등어처럼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잤다. 비릿한 가난으로 뜨는 달빛을 덮고 무장무장 반짝이는 별빛에 기대어 잤다. 이렇게 짠 가마니는 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달걀은 먹지도 못했다. 하나 둘씩 매일 가마니를 모아 두었다가 꾸러미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아이들 학비와 가용돈으로 썻다.
북풍한설에 추워서 일을 못한 머슴들은 사랑방에 모여 앉아 덕석과 멍석을 만들고 한 해 머슴살이를 마치며 겨울을 보냈다. 농한기에는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 사업이 있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시멘트와 철근을 제외한 땅값은 희사 명목으로, 인건비는 봉사활동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새벽 동이 트자 말자 동네마다 회관 스피커에서, 혹은 이른 새벽 골목을 누리던 청소차에서 나오는 새마을 노래에 우리는 새벽 단잠을 깨야만 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먹고 살기에 바빠 그저 분주한 일상에 쫓기듯 살았지만, 이 노래를 통해 노력 봉사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마을 회관과 공동 작업 현장에는 새마을 깃대를 게양해 국민과 마을 주민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도록 했다. 마을마다 새마을 지도자와 개발위원장을 두고 읍,면 담당 공무원들을 배치해 지도 감독을 하도록 했다. 부실 공사를 방지하고 비리를 예방하는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길이 좁아 지게로만 운반했던 농로를 확장하고, 새 농로를 만들었다. 우리는 마을 안길을 넓히는 공동 작업에 동원되었다. 집 울타리를 없애고, 벽돌담을 쌓아 올리며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스레트나 기와 지붕으로 개량했다. 비포장 지방도로는 책임 구간을 정해 놓고, 어른들 사타구니 높이만큼 반 자갈을 쌓아 두었다. 훼손된 도로를 의무적으로 정비했다.
아침 저녁에는 무밥에 시래기국으로 그럭저럭 끼니를 떼웠다. 찐 고구마와 막걸리 한 사발이 샛거리의 전부였다. 비오는 날이면 쑥 버무리와 개떡을 만들어서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찬밥은 물에 말아서 고추에 된장 찍어서 먹었고, 끓인 밥에는 짜디짠 무짠지와 게 한 마리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먹어 치웠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일 년에 몇 번만 겨우 먹을 수 있는 귀한 먹거리였다. 설날과 추석절, 유월 유두날, 칠석 절기에 동네에서 돼지를 잡아 나누면 그 돼지고기를 사서 먹었다. 어쩌다 고기맛을 보니 우리는 돼지고기 비계 덩어리와 닭고기 껍데기의 지방질까지도 너무 많이 먹곤 했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내 동생들이 설사병이 나곤 했다. 그 외에는 집안 어른들 생일이나 백년손님 사위가 올 때만 집에서 키우는 닭을 한 마리씩 잡아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기는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명절이나 절기에는 남자들은 고싸움 놀이, 장치기, 돌싸움 등으로 격렬한 놀이를 즐겼다. 여자들은 강강술래, 널뛰기, 그네뛰기, 다리 밟기 등 다양한 놀이를 했다. 용기와 신명을 북돋기 위해 농악놀이를 했다. 방에서는 윷놀이와 공놀이를 하며 이웃 간에 단합과 화합을 다져 나갔다. 마을 입구에는 장승과 솟대와 서낭당을 세웠다. 그 기운으로 외부의 나쁜 운수와 잡귀를 물리쳐 냈다. 집안에서는 부엌의 조왕신, 안방의 성주신, 장독대의 철륭신에게 운세와 부를 지켜 달라고 빌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집안 식구들 생일이나 명절 때 성주신에게 상을 차리며 빌었고, 장독대에 깨끗한 물을 떠놓고 두 손 싹싹 빌며 자손들의 무병장수와 출세를 빌고 또 빌었다. 서당에서는 하늘 천 따지 글 외우는 소리가 담 넘어 들려오고 훈장님은 회초리 들고 학동들을 다스린다. 남자는 상투 틀어서 갓을 쓰고 여자는 쪽지어 비녀를 꽂아 성년식을 올렸다.
결혼을 앞두고 처녀 총각은 선과 궁합을 보았다. 신랑의 친구들은 신부집에 사주단자와 함께 함을 지고 가 전달했다. 마당에 대례청을 꾸며 신랑은 신부에게 목 기러기를 바치고,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교배례와 조롱박에 나눠 마시는 합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혼례식을 마치면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신랑을 따라 시갓집을 가는 신행길을 떠났다. 아들 못 낳는 아낙네는 칠거지악을 면하기 위해 당산나무와 성기석 앞에 엎드려 아들을 점지해 달라며 빌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먹고 사는 것도 너무 힘들었지만 못 먹고, 못 입으면서도 오직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공부를 시키고 큰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 이렇게 피와 땀으로 일으켜 세운 이 조국 선조들의 지혜와 얼을 이어받아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다. 배고픔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게 해준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마음 다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