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와 원순제 옛날 이야기
<전설의 배경>
大靑島 하면 元나라 順帝가 太子로서 流配되었다는 것은 隣近 여러 섬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치 유명한 소위 新皇(元順帝)의 傳說이 있습니다.
1339년 충혜왕 1년에 원나라 명종 태자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를 대청도로 유배를 시켰다가 다음해에 소환하였다는 기록을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 때에는 몽고 압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몽고는 대청도를 죄인들의 유배지로 이용하였는데 이때 원 순제인 "도우첨목아"가 계모의 모함으로 이곳 내동으로 유배 왔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내동국민학교터에다 궁궐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 내동은 풍수학상으로도 지세가 다른 지역과는 특이한 데가 있는 곳이였던 것 같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대청도에 삼각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도 1339년인 것을 알겠고 원 나라 순제를 따라온 가구 수가 일백여 호가 따라왔다는 것으로 보아 큰 마을(大村)을 이루었을 것이 짐작됩니다. 옥죽포도 그 당시부터 있던 지명으로 순제가 도착한 곳도 옥죽포이고 후에 고려의 육지를 왕래하던 포구도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 순제는 유배지인 대청도를 자기의 왕도라고 생각하였는지 이곳 지명을 옛날 중국(당)왕도의 지명을 따서 붙였던 것 같이 생각됩니다. 삼각산 외에도 내동지역을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장안이라는 용어는 당나라의 소종(昭宗) 때까지의 왕도의 지명이었습니다. 즉, 장안이란 서울을 뜻하는 별칭이지요. 비록 유배는 왔지만 내동을 원나라 태자가 있는 왕도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다.
다음은 1910年代의 發刊된 新皇傳이라는 古談冊字에 의하면 高麗와 元 나라와의 얽힌 實史의 傳說입니다. 고려조의 제27대 충숙왕 17년(1330)에 元 나라의 順帝가 文宗의 太子가 황해도 장연의 大靑島로 유배온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전설 내용>
元順帝 즉, 원나라 명종 태자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는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 그동안 皇后인 계모에게도 王子가 태어났습니다.
계모는 장차 자기가 낳은 아들을 王位에 앉혀보려는 엄청난 음모가 계모의 가슴 속에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자(嫡子)인 太子가 엄연(儼然)히 存在하는 터에 太子로 봉하기는 합당한 조건과 도리가 없어 煩悶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한 妙案을 生覺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계모는 嫡子인 太子를 더욱 사랑하는 척 갖은 애교를 다 부리다가 하루는 太子를 불러 청하기를 내 등이 몹시 가려우니 등을 긁어달라고 웃저고리를 벗고 등을 긁게 하였다. 그 순간 계모는 갑자기 돌변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太子가 계모인 나를 겁탈하려 한다.”
고 광란(狂亂)을 부렸다.
이때 근처에 있던 신하들이 몰려와서 現場을 살펴보니 皇后는 웃옷을 버끼운채 있는지라 太子는 달리 변명할 여유조차 없이 애매하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현실은 皇帝에게 보고되고 마침내는 누명(陋名)에 罪를 지어 귀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곳이 大靑島였습니다.
이때 太子의 무고(誣告)함을 알게 된 忠臣 多數와 臣下들이 太子를 따라 大靑島에 왔는데 따라온 사람들의 數는 600여 名이라고 하였다. 太子一行이 大靑島에 첫 奇港地가 玉竹浦가 됐습니다. 섬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지금의 陽池洞에 자리를 잡고 大闕을 지었습니다.
이때 大靑島에는 어찌나 나무가 茂盛한지 玉竹浦에서 宮闕(현재의 대청초등학교 터)까지 오는 時日이 一週日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비록 絶海孤島로 귀양살이는 할망정 신하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안락한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계모는 太子를 귀양보내놓고 後患과 不安한 心情 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太子의 近況을 알기 위하여 자기 밑에서 심부름하고 있는 심복 계집 앵무(鸚鵡)를 시켜 몰래 大靑島로 密派하였습니다. 密令을 받고, 大靑島에 당도해 보니 山林은 울창하여 하늘을 가리우고 海邊에는 香氣 그윽한 海棠花가 滿發하여 仙境을 이루고 깊숙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높다랗게 宮闕을 짓고 제법 위엄있고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故國을 떠난 외로움에 젖어 눈물짓는 情景이 애처러운 바도 있지만 人間이 人間을 믿고 이해하고 아끼며 살아가는 모습이란 至上天國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和氣한 분위기를 본 그는 황급히 本國으로 돌아가 본대로 事實을 계모에게 아뢰었습니다. 깜짝 놀란 계모는 당황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太子를 없애버릴 계책을 꾸미기에 밤잠을 자지 못 하였습니다 .
한편 계모의 密使가 다녀간지도 모르는 太子는 얼마 후에 뜻밖에 父王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의 잘못이 있어 내 너를 멀리 떠나 보냈다마는 父子의 情이야 어찌 저버릴 수 있었겠느냐. 보고 싶은 마음 禁할길 없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重病을 얻어 죽음이 눈앞에 있다. 名醫란 名醫는 다 불러 病을 물으나 重病으로 道理가 없다는구나. 다만 한 가지 神藥이 있기는 하다는데 이 神藥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太子의 눈을 하나 먹는 것이라 하니 이로서 千年을 산다한들 어찌 너의 눈을 내가 먹을 수야 있겠느냐. 애비는 너를 한번 못 본채 속절없이 죽게 되었구나.”
이러한 父王의 편지를 읽고 난 太子는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습니다. 비록 계모의 음모를 모르고 나를 이곳에 귀양 보낸 父王이지만 나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가 아니냐. 이제 生死가 경각에 있다하니 내 어찌 한눈을 아껴 父王의 生命을 건지지 못하는 千古의 不孝를 끼칠까보냐. 한눈을 바치기로 최후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한쪽 눈을 빼어 보낸 太子는 父王의 重病이 完快되기를 부처님께 빌며 전과 다름없이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太子의 한쪽 눈을 받은 계모는 기쁨을 참지 못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이에 만족함이 없이 영영 불구의 몸으로 만들기 위하여 太子에게 편지 한 장을 다시 썼습니다. 너의 눈을 먹었더니 약간의 차도가 있어 기쁘다. 한 눈을 마저 먹어야 완쾌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太子에게 傳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太子는 孝誠이 지극한지라 父王을 위하여서는 남은 한쪽 눈을 아낄 수는 없었습니다. 계모의 음모인줄을 전혀 모르는 太子는 한눈을 마저 빼고 父王의 쾌차하기만을 빌었다.
그 후 太子는 이러한 공덕이 있었던지 不具의 몸으로 歸國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옹진반도를 거쳐 海州로 길을 재촉하는 어느 날 해는 져서 캄캄한 밤인데 人家는 없고 露宿할 수밖에 없던 차에 먼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도하여 본즉 아담하고 조그만 암자였습니다. 首陽山 암자에 하룻밤을 새운 太子는 암자 주지스님의 인도로 海州 龍塘浦에서 船便을 이용하여 무사히 本國까지 歸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太子가 뽑아 보낸 두 눈은 유모가 자신의 젖을 짜서 그 젖에 담가 정중히 보관하고 있던 중에 太子가 도착하자 유모는 즉시 그 눈을 도로 태자의 눈에 넣어 기적적으로 太子는 광명을 되찾고 自由의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부처의 공덕인지는 모르지만 順帝는 귀국한 지 얼마 안가서 皇帝位에 오르게 되어 원 나라 순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순제와 신광사(神光寺) 이야기
유배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순제는 해서지방을 유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해주에 와서 유숙을 하는데 꿈에 神이 나타나서 나는 首陽山下 아무 곳에 있는데 한번 찾아오라고 하였다. 順帝가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어 神이 꿈에 말하던 곳을 찾았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에 神人이 다시 나타나서 당신이 친히 찾아와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順帝 친히 山下에 가 본즉 초목이 우거진 곳에서 환한 거울이 비침으로 이상이 여겨서 찾았더니 한 구의 金佛像이 있었다. 이때 順帝는 이 佛像을 받들어 모시고 그 후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면 도와주기를 기원하면서 공덕을 얻어서 귀국하게만 된다면 절을 창건하고 奉安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國事가 원체 다망해서였는지 부처와 약속한대로 佛寺를 창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듬 해에 부처가 現夢하여 그렇게 서약까지 하고 잊을 수가 있느냐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꿈을 깬 順帝는 크게 이상히 여기고 또 전일 海州에서 서약한 일을 생각하며 곧 많은 財力을 기울여서 金 부처가 처음 있던 그곳에 神光寺를 창건하였다.
이때 順帝는 특히 건축자금과 함께 大監 宋骨兒와 工匠(木手 등) 37人을 보내어 새로 절을 짓게 하였으며 고려조에서도 財力을 보조하고 侍中 金石堅과 密直副使 李壽山 등으로 건축공사를 함께 감독하게 하여 약 八 년간의 공사로 충혜왕후 3년(元至正 2, 1342)에 완성을 보게 하였던 것이니 그 제도와 규모가 얼마나 광대하고 화려하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
이것이 古談冊子 新皇傳의 줄거리다. 海州 神光寺에는 이러한 內容의 懸板이 걸려 있음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金晶玉 考證)
첫댓글 한편의 설화소설의 이야기 실감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