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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에서 복낙원 찾아가는 길-이영옥의 <<뜨거운 빙수>>
方 旻
1. 이영옥은 오래 전에 소박한 낙원을 잃었다. 마치 인류가 오래 전에 낙원을 잃었듯이. 기독교 성경에 의하면 사탄의 유혹으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이 얘기는 영국 작가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으로도 널리 알려진 바다. 이영옥의 <<뜨거운 빙수>>는 한 마디로 그녀의 실낙원 이야기다. 동양권에선 살고 싶은 이런 이상향을 무릉도원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살고 싶은 이상향, 유토피아는 잃었던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게지 엄밀하게 따져 들어가면 현실에선 없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낙원을 상실하지만 그것의 회복을 믿고 구원을 기다리는 ‘실락원’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 인간은 현실에서도 하루하루 낙원 회복을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 꿈의 실현을 종교에 의지하든 문학에서 찾으려하든 그런 시도는 힘겨운 삶에서 견디고 살아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문학도 실제는 인간의 불가능한 꿈을 찾아가는 상상적(또는 허구적) 행위의 하나다. 문학의 한 특성인 허구성이 바로 이 꿈과 속성에서 잘 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책장을 덮고 나듯 꿈에서 깨고 나면 사라지거나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떤 것, 곧 실제와 다른 허구의 세계 말이다.
누구나 꿈꾸는 인생 낙원에서 행복한 삶을 얼마 살지 못하고 일찍 그곳에서 밀려난 삶을 작가는 살아간다. 사람이 현실에서 겪은 물리적 시간과 상상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시간은 다르다. 이 수필집에서는 이영옥의 차분한 실낙원 이야기를 주로 읽는다. 그녀가 누리던 낙원의 삶은 어떠했는지, 어떻게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성경 에덴동산의 삶은 아주 짧게 나오지만 그곳을 떠난 삶의 이야기는 훨씬 길고 구체적이다. 밀턴 서사시의 제목이 실낙원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낙원을 잃은 것이 이야기 핵심인 까닭이다. 이영옥의 실낙원도 이와 흡사하다. 그녀가 누린 낙원의 실상은 짧게 소개하거나 추측으로 그려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녀 수필집도 그곳을 나온 뒤에 실낙원의 삶을 주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낙원을 떠나기 전까지, 행복을 잃기 전까지 그곳이 낙원이었는지, 그게 행복이었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떠나보내거나 잃고 나서 그것을 깨닫고 느낀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면서 나름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뒤늦게 그것을 깨우치고, 찾기 위해서 종교에 의탁하고 문학의 품에서 안타까운 몸짓에 맡겨두기 마련이다. 인간의 타고난 비극인가. 우주의 섭리인가. 정말 알기 어렵다.
거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미미한 생명체이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그나마 낙원을 회복하고자 애를 쓰고 희망을 품는다. 그날이 언젠가 오겠지 기대하면서 삶의 고뇌에 찬 골고다 언덕을 넘어간다. 이 풀꽃 같은 희망마저 버리거나 막연한 그날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정녕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희망의 내일이 있기에 오늘의 쓰라림을 버텨내고, 현실의 고단함을 견딘다. 이영옥의 글에서도 이런 희망의 찬가를 여기저기서 만난다. 그녀가 디디고 있는 현실의 삶은 낙원을 떠난 상태이지만, 다시 그곳을 찾고자 쉼 없이 희망을 품는다. 피곤한 삶이지만 기대의 소망으로 지칠 줄 모르는 그녀는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보고 낙관의 마음으로 읽는다. 이 미래 지향의 세계관은 그녀 앞에 닥친 어떤 난관도 타고 넘어갈 힘찬 엔진으로 작동한다. 이 엔진은 다소 생래적 유전에서 비롯했으나 그 엔진을 부리고 버려서 더욱 강력한 마력을 장착한 것은 오로지 그녀의 노력이고 인내함이고 의지의 발현이다. 이제 그만 이 엔진에 시동을 걸어 그녀가 모는 수필 자동차에 동승키로 한다.
2. 그녀가 짧은 시간(기억 속) 살던 낙원이 어떠했는지 구체상을 이 수필집에서 찾아내긴 어렵다. 그 낙원에 살 때 모습들을 글로 쓰지 않았고 글을 쓸 생각도 안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힘들어 앞날이 아득해지고 캄캄할 때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치곤 했습니다.”(<작가의 말>)라고 고백하듯 이미 낙원에서 실질적으로 추방당한 뒤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그녀가 실낙원에 당도한 처지를 실감하는 “힘든 시기였”고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숨어서 울 곳을 찾다가 글을 만난” 셈이므로, 글은 닥친 어려움을 벗겨내기 위한 심정적 해소책으로 붙든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럴 때는 씻어낼 무언가를 마음에서 꺼내 펼쳐보기 마련이다. 세상에 어떤 형태로 드러내든 그 자체가 치유의 출발이 되는 셈인데 그녀에겐 바로 수필 쓰기였다. 낙원을 지탱하는 심리적 두 기둥인 “남편과 아버지”가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기둥인 아버지 사연을 읽어보자. 시골에서 “인지기능 검사를 받기 위해 오신” “여든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를 도우려고 올케와 친정어머니와 병원에 갔다. 일이 꼬여서 혼자 남아 소변검사 수발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탄 휠체어를 몰고 남자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실상을 혼란스럽게 마주했다. 기둥이 무너져가는 현장(<남자는 없었다>)을 목격했다. “건장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어쩌다 내가 허리춤을 풀고 있을까.”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그녀에게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어린아이가 되어 간다.”는 서글픈 확인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누구라도 때가 와서 늙어가는 남자의 자연스러운 변화인데 그녀에겐 비애감으로 “콧날이 시큰했다.” 그녀 낙원을 버티는 정신 기둥이었으니까. “몸체보다 몇 배나 더 큰 꼴을 지고 오시기도 하고 냇물이 불어나 학교를 못 갈 때 운동선수 같은 팔다리로 내를 건너 주시기도 하던<갑골 무늬를 찾아서>”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청춘”이었다. 그녀가 걱정 없이 살도록 낙원을 가꾸고 지켜내던 “갑골 무늬가 새겨진” “나무 껍데기 같았던” “큰 발”의 아버지는 “몇 발 앞서 걸으며 장애물을 치우고 길을 만들어 좋은 곳만 바라보게 하였”던 마음속 기둥이었다. 그녀에게 낙원의 삶을 굳건하게 제공하던 아버지가 이제 인생 종착역을 향해 떠나가는 열차에 몸을 실으려 하신다. 동상에 잘 걸리는 딸을 위해서 균형이 안 맞는 짝짝이지만 세상에 단 하나의 <장갑>을 떠준 “아버지는 뜨개질을 해주지 못한다.” 창백한 얼굴로 병원에 누워계시기 때문이다. 즉 실낙원 입구가 머지않아 슬슬 다가오기 시작한다.
기우뚱하던 낙원에서 출구에 기댄 남편이 부른다. 그녀와 함께 이룬 낙원에서 그도 오랜 동안 살고자 했다. “젊은 날 살아보겠다고 벌인 사업<그냥 웃지요>”도 그렇고, “간간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창문을 통해 넣어주며” “희망을 풀무질 했던<브라보콘 하나의 사랑>” 것도 모두 낙원에서 살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애씀과 마음뿐 생각대로 안 되어 남편은 사업에서 실패하고 건강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이 흔들리는 낙원의 기둥을 붙잡고 지켜내려고 작가도 ‘커피 아줌마’가 되어 “20년 넘게<생일상>” ‘커피회사’에 근무했다<커피가 있는 풍경>. 그러나 한 번 흔들린 기둥은 다시 든든히 서지 못하고 계속 흔들린다<남편과 복권>. 급기야 ‘자전거’를 남기고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챙겨 주는 소박한 도시락 가방을 짐받이 박스에 넣고” “뒤뚱거리는 듯하다가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던 “사내와 많이 닮았던<자전거>” 자전거를 그 아내는 “5천 원”을 들이고 눈물로 마음자리에서 까지 떠나보냈다. 이제 그녀는 완전하게 실낙원에 입장한 것이다. 아버지란 왼쪽 기둥과 남편이란 오른쪽 기둥 둘이 그녀의 삶에서 영영 사라졌다. 이제는 그녀 앞에 더 이상 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낙원에서 완전히 추방당하였다. 여기 당했다는 말은 그녀가 의도한 것도 아니지만 결코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진 것을 가리킨다. 맞닥뜨린 실낙원의 삶을 어쩔 수 없이 시작해야 했다 그녀는, 아담과 하와처럼.
3. 낙원에서 추방된 사람은 다시 낙원으로 갈 수 있다. 아니 가야했다. 쫓겨 나온 길을 알기에 돌아가 길도 안다. 실패해 본 사람이 성공도 할 수 있듯, 그녀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어떻게 낙원을 찾으려 했고 낙원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는지 <구두에게 주는 꽃>에서 단초를 찾는다. 작가는 “아버지를 닮아 발이 크다.” 이 큰 발로 “걷고 또 걸으며 일을 해야 했고 어떤 날은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나와 하루 종일 아파하며 절뚝거리기도 했다.” 그녀가 닮은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태풍이나 물난리에 다 자란 벼가 쓰러져도 하늘을 원망하기보다 들로 달려가 물꼬를 트고 볏단을 일으켜 세우셨”고, “자연 앞에 순종하는 겸손한 모습이었다<갑골 무늬를 찾아서>.” 자연에 순종하며 묵묵히 사람의 일을 하는 마음을 농부의 마음, 곧 농심農心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영옥은 아버지의 농심을 닮아서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나도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다. 여자로서 작고 예쁜 구두를 신고 싶어 하지만, 결코 이에 연연하지 않는다<구두에게 주는 꽃>. 농심의 발에 정직한 구두를 신고 “달구지에 식구들을 태우고 앞에서 끄는 황소처럼<갑골 무늬를 찾아서>” 복낙원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선다. 이런 장면은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종결부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하늘 향해 외치던 다짐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절망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볼 줄 아는 마음의 본원은 아버지 농심으로부터 왔다. 스칼렛의 꺾이지 않는 줄기찬 재건 의지가 타라 농장을 세우고 키운 아버지로부터 왔듯 말이다.
하지만 핏속에 전해진 유전적 소인만 그녀가 가는 길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후천적인 그녀만의 비결이 따로 있다. 그것은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한” 미래지향의 낙관적 세계관이다. 아무나 따라 부를 수 없는 이영옥 희망가는 또한 긍정의 힘을 더불어 거느린다. “꺼져가는 희망을 풀무질했다.<브라보콘 하나의 사랑>”거나 “새로운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아따우로>”와 “다가올 새날을 향한 힘찬 출발<도배를 하며>”에서 보듯 새로운 희망을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품는다. 그녀만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그에 대한 기다림의 자세가 언제나 내심에 든든히 자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기다림은 “잃어버린 한 짝이 슬그머니 나타나길 기다려본다.<장갑>”, “봄을 기다릴 수 있는 치유의 길<산길에서>”, “그대를 기다려 보고 싶다.<자작나무 길>”, “울먹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그리운 열무김치>”에서 두루두루 확인한다. 이렇게 희망을 품고 새로운 날을 기대한다는 것은 미래를 낙관하는 긍정의 힘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그녀의 긍정하는 마음은 “나무는 나무대로 제자리를 지키며 나를 응원해 준다.<나무를 심다>”에서 자기 확신을 다짐함으로써 “나는 오늘 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나무를 심다>”의 미래 전망의 행위를 흔들리지 않고 할 수 있다. 물론 가끔 “봄이 되면 내게도 연둣빛 희망이 환하게 찾아와 줄까?<기다리는 봄>”처럼 회의와 망설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를 무마하는 주조음은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견고함이다. 이런 마음을 어느 곳 어디에서도 그녀는 발휘한다. 동티모르 섬에서 봉사하는 지인을 찾아가는 여행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스티븐 시걸을 닮은 남자>에서 택시 운전사의 만남을 “구세주, 커다란 행운, 나침판, 감동, 큰 선물”로 해석해 받아들인다. 세상을 아름다운 마음으로 보면 모든 세상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녀가 바로 그렇다. 낙관의 눈을 뜨고 희망의 마음을 품어 세상을 대하니 세상도 그녀에겐 모두 그렇게 대응한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아주 행복한 휴가>로 생각하는 데서 이 속마음의 정체가 드러난다. 마음속에서 스스로 원하는 바가 있었다고 자백한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한다. 어쩌면 그날의 사고도 내 몸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운명이 알아서 나를 챙겨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이렇게 교통사고까지도 긍정하며 낙관으로 일관하는 그녀는 운명도 알아서 좋게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보니 <인생 수업료>에서도 나은 직장을 찾아보려다 어긋나자, 세상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다독이며 긍정하고 낙관한다. “나는 여전히 느리고 가난하면서 바보처럼 살지만 그럼에도 회사가 좋고 커피가 좋고 행복하다.”의 무한 긍정 앞에선 고개를 절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세상을 긍정하고 희망을 놓지 않는 낙천적 마음은 여러 편에서 보인다. 열거해 보면 차량 접촉 사고를 내고 이를 해결해 유능한 변호사 역할을 한 <블랙박스는 내편>도 긍정이요, 여행지에서 낯선 기쁨을 찾게 한 <아따우로>, 남편이 받은 친정어머니의 선물을 찾다가 마음을 돌린 <어디다 숨겼을까>에서도 긍정의 시선을 보게 한다. 그녀는 마치 긍정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긍정으로만 사건이나 상항을 보는 듯하다. 그러니 수필집에서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의 찾지 못한다. 사건이 진행하면서 때로는 부정하고 나쁘게 바라보기도 하지만 글의 결미에선 대부분 언제나 긍정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처럼 긍정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이영옥과 달리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부정적 마음과 비관적 시선으로 시종하는 사람도 적잖은 세상이다. 대체로 그들은 그러한 문제는 자신에겐 잘못이 없고 세상과 제도와 타인을 탓하며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불평불만으로 다른 사람의 성취를 비난하고 욕하거나 잘된 사람을 보면 질투의 마음만 그득하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할뿐더러 혹간 해결이 된다 해도 또 다른 불만거리를 찾아서 끝없이 불평하여 늘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상에서 마음대로 안 되거나 실패한 경우에도 스스로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가고 결국엔 문제를 풀어서 실패하기 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낸다. 흔히 세상을 진보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 현 상황의 부정적 면을 확대해석해 보거나 편견으로 왜곡하여 보면서 그것의 해결을 전적으로 외부에서 찾으려한다. 그러니 계속 갈등을 일으키고 문제는 꼬이며 해결하지 못하고 불평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영옥 마냥 세상을 긍정하며 현실적인 사람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세상의 잘못된 것을 탓하기에 앞서 현실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 부족으로 여기며 일단 자신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단서를 잡기 시작한다. 세상의 일이란 사실 이상과 현실이 진보와 보수가 서로 엉키며 휘돌아간다.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문제는 있고, 마찬가지로 해결책도 보인다. 다만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풀어나가는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사람과 자신은 제외하고 남을 탓하고 세상에만 문제의 원인을 돌리는 이상적이나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이영옥은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이나 세상의 잘못으로 보지 않는다. “하늘을 원망하기 보다는” “자연 앞에 순종하는 겸손한”농심으로 농사를 짓던 그녀 아버지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묵묵히 할 뿐이다. 그녀는 현실적이면서도 긍정과 낙관으로 세상을 대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영옥은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농심을 더욱 심화시켜 긍정과 낙관의 미래지향적으로 사고한다. 아울러 그와 동행하는 태도를 보이며 세상을 마주하며 큰 발로 주어진 길을 수긍하며 걸어간다.
4. 앞에서 필자는 그녀가 미래지향적 낙관으로 세상을 본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현실적이어서 닥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자신으로부터 해결의 단초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보여주는 해결의 현장을 작품에서 찾아가보자. “몸이 좋지 않았던 남편마저 병원에서 주변 정리를 하고 입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산길에서>” 출퇴근 하던 산길에서 “참았던 답답함에 고함을 질렀다.” 또는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그 길 위에 토해냈다.”에서 보면 그녀는 산길에서 고함을 치거나 논물을 흘릴망정 남을 탓하지도, 남의 힘을 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려고 나선다. 남에게 사사건건 의지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이상을 좇아가며 불평하는 사람과 달리 이영옥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닥쳐온 난관을 풀고 직접 해결하며 현실의 곤경을 헤쳐가려고 한다. 이런 자구적 노력은 형제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사실상 서로 외면하다시피 따로 살아가던 오빠가 모처럼 방문하며 가져온 차가운 빙수를 뜨거운 마음으로 받는다<뜨거운 빙수>.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늦게라도 찾아온 혈육의 정에 눈물이 차오르며 오빠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이토록 의연하게 살아가는 자신 삶의 당당한 주인이다. 이 자립심은 그녀가 생의 굽이굽이 험난한 실낙원 골짜기를 건너가게 한다.
하늘은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에게 그런 시련을 준다는 말이 있듯, 이런 끈질긴 자강력自强力을 갖추고 있기에 실낙원의 시련을 안겼는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공무원을 하던” 그녀는 “전업주부”로 살다가 남편의 사업 실패로 다시 직장에 나서서 “동서커피” 회사에 자리를 잡고<인생 수업료> 20 여년 근무한다<생일상>. 또 남편을 자전거와 함께 떠나보낸 뒤에 다시 직장을 찾는다. “인천대공원에서 기간제<자작나무 길>”로 일하면서도 조금도 신세 한탄을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낙관은 “근무 기간 만료로 떠나고 없을 것”을 알지만 “느티나무와 자작나무 길을 걷는 출근 시간이 설렌다.” 그녀는 어디 어느 곳에서도 긍정의 아이콘처럼 아름답고 고운 것<가을과 겨울 사이>과 희망의 싹을 찾아낸다<나무를 심는다>. 며느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조상의 제사를 봄에만 세 차례 모시면서도 “조상님들과 데이트를 마친 나는 셀렘<나의 봄>”을 느낄 정도니 도통 일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 긍정과 낙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과연 낙원에 다시 입성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기다리는 봄>에서 “봄이 되면 내게도 연둣빛 희망이 환하게 찾아와줄까?”라고 기대하고 “나도 봄이 오면 돌아와 대공원 연가를 함께 부를 수 있을까?”라고 의문도 간혹 품어보지만 아마도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돕는다.”라는 금언이 그르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녀에게도 기다리던 봄이 와서 ‘이영옥 희망가’를 목청껏 부를 날이 올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반드시 그때가 다가올 것으로 믿고 기대하고 싶다. 아니 확신한다. 세상이 지구처럼 정상대로 돌아간다면 긍정밖에 모르는 그녀에게 미래의 낙원이 찾아와야 옳지 않겠는가.
첫댓글 이영옥 선생은 자신의 글과 같은 분이지요. 방민선생님이 참 잘 읽어내셨네요.
소박한 감동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