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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감상 스크랩 숙맥 외 / 최재경
최재경 추천 0 조회 45 18.09.28 0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숙맥 / 최재경

 

 

아내에게, 머리를 깎으려고 돈 만 원을 달랬더니 얼싸 준다, 그래서

삼 년 내내 기른 머리를

연산 장터 이발소에서 싹둑 잘랐다

긴 세월이 구름처럼 풀풀 날아갔다

내 모습이 자꾸 변해갔다

"오랜만에 오셨지요, 시도 잘 되시구요

헌데, 많이 빠지셨네요, 그리고

염색도 하셔야지요"

주름살이 편해 보이는 이발사가 그랬다

눈을 감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유리창 밖으로 풀이 죽은 해가 떨어지고

연탄난로가 썰렁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어느 시인에게 전화가 왔다, "머리 깎으러 갔다며?,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혀 이 숙맥아"

아내 말 잘 듣는것도 숙맥인 모양이다

바람 부는 장터에서 자꾸 손이 머리로 갔다

심란한 강물이 바다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2012,1,6) 

 

 



 

 

 

자전거로 읍내 다녀오기 / 최재경

 

 

내가 매일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다녀 오는 것은

타고 다니던 트럭을 팔고 자전거를 샀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 일을 보기 때문에, 면사무소에 들려 동정도 살피고

조합에도 들려, 주민 공과금 비료대금 거름 값도 내주고

저금한 돈도 찾아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방에도 들려서 좀 노닥거리다가

종묘상 철물점 방앗간도 들려 근동 소식도 듣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시인이장이라 부른다

그래서, 담뱃집도 술집도 외상을 잘 준다, 해거름에

퇴근하는 사람마냥 단골 술집에 들어선다

출출한 공복에 소주 한잔은 기본이라, 툭하면 자전거를 맡기고 온다

걸어서 십 리 길, 자전거로 십 분길

이제 막 벚꽃 창꽃 밥풀꽃이 늘늘하게 핀 신작로를 따라

오늘은 터덜터덜 해찰을 하면서 집으로 간다

 

일 끝내고 집에 가는 복만이가 50씨시 오토바이를 타고 씽 하니 지나간다

"시인이장님 오늘도 얼큰하네요, 자전차 어따 놨슈?"

 

나도 봄날도 노을처럼 자꾸만 취해가고 있었다. 

 

 





쌀 도둑 / 최재경


또,

식구들 몰래 쌀 한 말을 퍼내어

외상값도 값고 술과 라면으로 바꿔먹었다

그 다음 날, 마당에서

방에 있는 나 들으라고 어머니가 그러셨다

"우리 집에 분명 쌀 도적놈이 있는디, 당최 누군지 모르겄단말여"

아버지는 그러셨다

걸리기만 하면 손모가지를 잘라 논다고.

끽소리도 못하고 내 손을 쳐다보았다 

며칠 뒤 식구들 오일장에 다들 가고 집이 텅 비었다

나는 또 도적놈이 되어 부엌문을 살금살금 열다가

기겁을 하였다

어머니가 그러셨다

"어짤라고 니가 여길 들어오냐?"

 

.

.

.

그다음부터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손가락으로 

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꺼먹고무신 - 내 신세 / 최재경

 

 

내가 나를 가만히 생각하면 참 모질고 질기게도 살아왔지

지금도 나는 늘 먼지를 뒤집어쓰고, 시골 장터나 신발집 구석에 짓눌려 살고 있지

예전에는 나를 찔찔 끌고 다니거나 꺽이거나 젖어 있었고, 주인도 분명치 않아

아부지 엄니 그리고 동생들 으징이 뜨징이도 끼고 다녔지

다른 것들은 마루 밑에 가지런히 모셔놓아도, 나는 늘 뜰팡 아래 굴러다니거나

한 짝은 보이지 않고, 툭하면 개가 가지고 놀거나 질겅질겅 씹고 있었지

부잣집 아이들은, 나를 아예 물건으로 보질 않고 허드레로 보며 내다 버렸지,

그래도 신명 날 때도 있었지, 냇가나 강가에 가면 나를 어항 삼아 송사리도 붕어도

넣어주었고 신줏단지처럼 나를 안고 다녔지, 그러나 그 뿐인 거지

나를 팽개치고 둥둥 띄워버리거나 잊어버려 모래를 뒤집어쓰고 묻히기도 했고

일부러 구멍을 내거나 찢고서는 엿이나 사탕으로 바꿔먹는 일도 흔하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흔한 천덕꾸리로 태어난 거지, 암! 알고 말고, 그러나 시방은

다시 태어났다는 거지 왜냐면, 나를 구경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이지

내가 한 번 떴다 하면, 사람들은 신기하여 까르르 웃거나 만져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어디 가면 살 수 있고 얼마냐고 물어보기도 하는 거지, 나는

이제 애물단지도 천덕꾸리도 아니고, 죽은 줄 알았던 사람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거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꺼먹이니 껌정이니 함부로 막 부르지 말라는

얘기지 구두약 반지르 바르고 하이칼라 한 고귀한 신사양반으로 불러 달라는

얘기지

 

누가 아무리 뭐라 해 본들, 구두 안 신고 고무신 신는다는 얘기지 

 

 



 


 

가을 운동회 / 최재경

 

 

별별 나라 국기가 연 줄처럼 늘어져 바람에 펄럭이고

이마빡에 하얗고 파란 끈 질끈 동여 맨 아이들이 부산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귀신같은 장사꾼들이 벌써 술렁인다

한복 원피스 투피스 쓰봉 몸빼 차려입은 할머니 엄마 고모들이

머리에 이고 들고 온 음식을 한 보따리 씩 내려놓는다

준비 땅, 소리에 죽어라 달리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박수치고 악을 쓰고 소락대기 질러대고

팔목에 일등 이등 삼등 빨간 도장

 

꼴찌한 놈 울고 일등한 놈 웃고 

흙먼지 푸썩 우르르 밀려가고 밀려온다

삶은 고구마 알밤 계란이 나오고 김밥 맨밥 사이다 먹을것이 지천이다

배 터지게 먹고는 또 달려가 솜사탕에 깨끼먹고

음악책에 나오는 신나는 노래가 파란 하늘로 펄펄 흩어진다

 

오제미가 새들처럼 날아가고, 홍시같은 가을빛이 시든다

 

부수수 프라타나스 단풍이 진다

청군도 백군도 없는 운동장이 쓸쓸하다. 

 

 



 

 

 

나물 캐는 여자들 / 최재경

 

 

여자들하고 나물 캐러 갔다

 

얼굴 탈까 봐

칭칭 가리고 나물을 캔다, 그러니

누가 더

이쁜지 알 수가 없다.

 

여자들 손이 바쁘다

손 탈까 봐

장갑을 꼭 끼고 나물을 캔다, 그러니

누구 손이 더 뽀얀지 알 수가 없다.

 

여자들이 오줌을 싼다

환한 궁딩이 볼까 봐

둘둘 가리고 오줌을 싼다, 그러니

누구 궁딩이가

더 큰지 알 수가 없다. 

 

 



 

 

 

쭉정이 / 최재경

 

 

어머니 젊어 한시절
밤이면 푸른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그렁그렁 우는 아이들에게 모자란 젖을 물리고 있었다
미지근한 체온이 뙤약볕에 데워지고
가을이 다할 때까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아직도 기다림이 남은
고요하고 쓸쓸할 것 하나 없어도, 자꾸 슬퍼졌다
무서리 다녀가고
일렁이는 울음도 다 삭은
시래기만 남은 배추밭으로 푸짐하게 눈이 내렸다
옥수수밭에 갔더니
아기를 업은 채 엄마가 죽어있었다
꼿꼿하게 서서 얼어 죽었다
아기도 칭얼칭얼 울다가 잠자듯 따라 죽었다
기척도 없이 마른 소리로
포대기 끈이 바람에 날렸다

 

 



 

 

오늘도 가을입니다 / 최재경

 

 

노을 지는 마당에 서늘한 기온이 내립니다

아무도 없는 외딴집에 가오가오 갈가마귀 날아가고

누가 다녀갔나 마루에 하얀 구절초 한다발이 있어요

뜰팡아래 지친 귀뚜리 찌리 찌리리 울어요

샛별 곁에 초승달 고요하고요

건드리면 금방 울어버릴 까만 씨가 톡톡 져요

손톱 끝에 봉선화 물 선명하더니

엊그제 세상 뜬 사람 사정없이 그리워요

단풍이나 들면 떠나지 왜 그리 서둘러 떠났나요

아퍼하던 모습 생각하니 눈물 고여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담배를 물어요

나 여기 있다고 기별이 올 것 같은

바람이 사는 저 들길을 걸어보자고 할 듯

그렇게

오늘도 가을입니다. 

 

 



 

 

솔깃 / 최재경 

 


  읍내 다방이 신장개업을 하면서 마담도 새로 오고 배달하는

아가씨도 둘 인가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촌에 이 소문이

퍼지자마자 23개 마을로 순식간에 번졌는디, 모두 솔깃하였지만

 놈의 체면 때문인지라 좋아라 하는 눈치는 볼 수가 없었다,

스피커 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게 뽕짝 조 내지는 관광버스

막춤 음악이 흘러나왔고, 화환인지 꽃인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색시들이 위아래를 흔들며 차를 날랐다, 젊은 것들은 가게방에서

노닥거리며 해가 식기만 기다렸고, 나잇살이나 자신 분들은

내가 누구고 누구며 어디 사는 거시기고 머시기고, 안 해도

뻔한 거짓말로 자기소개를 했다, 색시들은 쪼르르 몰려와

착 달라붙어 시키지도 않은 비싼 쌍화차나 칡즙을 지덜 맘대로

시켜먹었다, 완전히 지덜 세상이었다, 해거름 판이었다,

꼰대들은 뭔 미련이 남았는지 뒤를 슬슬 돌아다 보며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덜 차례가 되었다고 막 인나는 참인디

누가 그랬다, "밤 이는 술도 판댜" 그랬다, 또 솔깃하다, 솔깃! 

더 이상 솔깃하지 말자.  

 

- 최재경 시집 <솔깃>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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